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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제임슨, 「후기마르크스주의」, 제1부, 미메시스, 9-10장 발제문
제1부 개념의 곤혹스러운 매력 - 9장 <자유라는 모델>의 이어서
지난 세미나에 이어서 가겠습니다. 우리는 9장, <자유라는 모델>에서 우선 지난 세미나에서 칸트의 자유의 이율배반의 성격에서 아도르노의 이율배반으로의 발전을 주장하는 제임슨의 논리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칸트가 융합시키지 못한 이율배반의 모순은 아도르노의 시점에서 ‘화해되지 못한 보편과 특수가 취하게 된 도덕적 형식’으로서, 자유와 부자유, 동일성과 비동일성이, 보편과 경험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공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친화성을 통해 총체성의 논리로 나아가고자 하는 제임슨의 주장을 확인했습니다.
칸트가 발작적으로 부인하는 그러한 친화성(보편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사이의, 자유와 현상계 사이의-제임슨 첨가)이 없다면, 자유의 이념 ㅡ이 이념을 위해 칸트는 그러한 친화성을 부인했지만ㅡ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193, 「부정변증법」)
그러한 인과성 ㅡ우리가 후에 계속 살펴보게 될, 후기자본주의라는 ‘마법의 올가미’ㅡ안에서 주체와 자유는 어떤 친화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객관적 차원만이 주체의 진리를 벗길 수 있다. 사물에서의 ‘친화성’은 이런 의미에서 ‘특정한 부정’ 즉 ‘비판이론’이나 ‘부정변증법’이다. 그러한 친화성은 또한, 지금까지 전개하지 않은 의미에서의 미메시스이다.(195)
이 맥락에서 멈췄는데, 여기에서 미메시스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위의 인용에서 이어지고 있는 아래의 「부정변증법」 인용에서, 미메시스를 “사물들 둘레에 쳐놓은 주문에 대한 의태”(195)로서의 친화성, “인과성 안에 있는 주관성과, 대상들에 관해 주체가 체험한 것에 대한 예감인 대상 사이에 ‘선택적 친화성’이 존재”(195)한다고 말하면서, 미메시스의 의미를 짚어보고자 하고 있습니다.
미메시스는, 앞서 7장, <문장구조와 미메시스>에서 다루었었는데, 아도르노의 미메시스 개념을 유추하기 위해, 먼저 벤야민의 미메시스에 대한 관념을 살펴봤습니다. 벤야민에게 미메시스는, 이디오신크라시(원초적)적 언어관이 적용되는, 이념이나 언어가 ‘비재현적 미메시스’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벤야민의 ‘아우라’의 개념으로, “모든 텍스트에 미리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양 항상 이름만 넌지시 암시되는 근본개념”(159)이라는 점에서 미메시스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벤야민과 아도르노에의 미메시스에 대한 이해는 큰 공통점은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유사한 것은, 아우라와 미메시스의 개념이 “스스로를 해명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 불려나온 개념처럼 보이기 때문”(160)이고, “유별나게 보편화하는 사유나 언어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유일무이한 것이나 특수한 것에 주어진 담보물”(160)이라 말합니다. 미메시스는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을 완벽하게 가동시키는”(160) 것으로, 그동안 주체와 객체의 인과성 개념이 부각되어왔던 ‘계몽의 변증법’에 인식을 전환하는 것이자, “주체와 객체 사이의 필수불가결한 ‘친화성’을 환기시키는 것이지, ‘투사(投射: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욕망을 남에게 돌려 정당화하는 무의식적 마음의 작용)의 매커니즘’(161)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변증법이 인과성에 의한 투사의 작용이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런 관계성이 아닌, 주체와 객체를 이을 수 있는 ‘친화성’기반의 변증법의 가능성으로서 ‘미메시스적 충동’을 통해 개념을 말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개념은, 그 자신이 미메시스가 되어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을 지키면서 미메시스의 얼마만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 이외에는 달리 자신이 추방한 미메시스를 대변할 수 없다.(164, 「부정변증법」)
미메시스는 주체로의 합일화 과정에서 자신을 잃거나 추방하기 보다는, 친화적으로 엮이면서 ‘인과성’보다는 ‘인과망’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친화성’을 기반으로 주체와 객체가 매개화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체가 가장 주체적으로 경험한 것, 즉 주체의 표현은 객관세계와 매개된 것이다.(164, 「부정변증법」)
미메시스를 살펴보는 것은,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에서, 기존의 인과성 중심의 보편 중심의 변증법적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고, 주체와 주체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객체의 관계의 풍부한 관계와 서사적인 구조로 구성되는 개념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자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방법은 아도르노에게서 ‘모델’이라는 개념으로 정립되어, “‘모델’의 운동 속에서 풍부한 뉘앙스를 지닌 다채로운 형상들을 내놓게 되는”(168) 미메시스적인 것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도르노에게는 ‘미메시스적인 철학함’(168)으로서 주-객의 관계와 그 사이의 서사를 발견하고 매개화된 것을 알며,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어떠한지를 탐구하는 철학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메시스에 대한 이런 이해로부터, 9장의 <자유라는 모델>로 돌아가 봅시다. 지금까지 계몽이라는 인식에 대한 아도르노의 철학은, 데카르트적인 진리에 대한 인식에 대한 전면적인 반박일 수 있고, 그런 흐름에서 비코(G. Vico)의 진리의 가변성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지만, 이 원리 또한 교정하는 것이라고 제임슨은 말하고 있습니다.(195) 이는 마치 ‘낯설게 하기 이론’을 통해 우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 것이 사실은 사회적인 것이고 인간 실천의 결과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인간의 실천은 똑같이 이 사회를 다른 무엇으로 바꿀 수 있다는 자각을 일깨우는”(195) 것처럼, 변화하고 다채롭고 일그러진 양상을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자유라는 모델’의 미메시스가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유라는 모델의 마지막 부분에서 윤리학에 대해서 고찰하면서 ‘윤리학의 타율성’이 주장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얼핏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윤리학은 자율성과 그 자율성을 보장하는 합리성에 기반한 자유로운 선택으로 쉽게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미메시스의 개념이 친화적으로 ‘매개화’된 개념이라는 것을 살펴본 것에서, 현대의 윤리학이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자율성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사회적 관계와 총체성에 종속되어 있는 모순적인 것임을 도출하는 것에서, ‘자유개념의 타율성’(201)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기를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작점은 사형에 대한 논의에서 단호하게 주장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무죄선고는 벌것벗은 불의이다. 그러나 죄과에 대한 정당한 응보는 바로 그 파렴치한 폭력의 원리에 감연되는 것으로서, 이에 저항하는 데 휴머니티가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사형집행이 도덕적일지도 모르지만 정당하지는 않다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변증법을 예언했다.(196, 「부정변증법」)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수용되어 있는 윤리학에는 ‘유토피아의 모티브’(196)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미메시스적 충동은, “인간에게 낯설지도 않으면서 인간과 동일하지도 않은 순수한 가능성을 간헐적이지만 구체적으로 선취하는 것”으로서 “올바른 것을 행하고자 하는 충동을 내포하고 있는 의식”(196)이라고 인용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식이 없다면, 충동이 없다면 어떤 윤리학도 실행 불가능하다 말합니다. 변화를 시도할 수도, “인간은 좋은 동물이었다고 믿으면서 살려고”(197) 노력할 수도 없으리라 말합니다. 그런점에서 미메시스적 충동은 모순된 상태에 멈추는 것이 아닌, 그 모순을 어떻게든 해소하는 가능성(그것이 정신분석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실존주의적으로 타진되고 있는)에서 실행하고 구현하려 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모순적이지만,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부자유, ‘자유 개념의 타율성’의 의미로서 밝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도르노의 「최소한의 도덕」에서의 결혼, 관습, 사물과의 올바른 교류, 사랑 등의 문제를 통해 열거하는 과정에서, 아도르노 철학의 주-객의 관계, 친화성, 매개, 미메시스의 이야기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혼에 대해서 살펴볼 때, 결혼이 당사자들의 개인적 소중함을 통해 이루어지고 경제적 관심이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경제적 논리를 좇게 되는 것은 고유한 논리로서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결혼은 경제적인 관심과 제도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오염되었다.”(197)는 맥락은 결혼의 모순성을 매우 잘 드러내고 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관습, 소유, 사랑의 맥락도 모순성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예시를 통해서 “모순 없는 윤리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칸트 윤리학의 핵심이었다고 한다면, 아도르노의 윤리학은 그 모순성에서 다음 한 걸음을 나아가게 해주는 것은, “찾을 길 없는 가치의 원천에 다가갈 수 있는 것”(198)은 사회의 역사적 단계, ‘역사의 범주’(198)를 통해서라고 말합니다. 윤리적인 딜레마는, ‘윤리학이라는 수단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것’(199)이라고 말하며, 따라서 “사회의 해방이 없으면 어떤 해방도 불가능하다”(199)라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유명론의 위기’로서,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성의 영역과 특수성의 현실 사이에 있는 긴장”(199)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순은 벗어나지 못하고, 딜레마와 간극의 긴장 속에 머물러 있는 듯하지만, 우리는 “사회라는 사악한 간접성이 음흉하게 관철된”(199) 세계를 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함을 지적합니다. “현대생활에서의 자율성 또는 반자율성을 지닌 다양한 영역들을 다루는 사회적,철학적 주제로 확장”(200)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흐름에서 살펴본 것처럼, 순수한 자유와 그 개념은 불가능하고, 단지 자유를 말할 수 있기 위해 친화적인 사회와 삶의 영역에서 매개화된 자유의 개념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윤리학이 자율적이고 자신만의 특수한 사고방식과 정신적 해결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이는 실제 자율성을 위한 출발전제 자체를 부인하는 이율배반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에 대한 아도르노의 잠언이라고 제임슨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더니티에 의해 자유에 의해 우리가 해방되고 자립하고 있다고 설명되어 왔지만, 우리 사회는 자율적인 상태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사회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연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회의 영역과 차원들이 반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거짓이면서 진실이다.”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는 변증법적 사고를 전환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우리는 기존의 “타당한 측면과 이데올로기적인 속임수”로서의 측면을 가졌던 변증법의 작용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사유하게 될 것입니다.
변증법은 윤리학과 같은 세속적 영역의 자율성을 인정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런 영역들이 사회적 총체성에 종속되어 있음을, 그런 영역에 자율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들이 만들어낸 모순들로부터 도출해낸다. 그러므로 자유 개념의 타율성은 사회적 영역들과 차원들(그리고 철학적인 분과영역들)의 자율성에 대한 좀더 일반적인 비판들 중의 하나가 되는 특수사례에 불과한 것이다.(201)
자유라는 모델의 미메시스적 성격을 통해 우리가 파악하게 된 것은, 우리의 자유의 개념을 향한 다양한 논의들이 가져왔던 의미성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계몽의 시대에 자유가 자율성과 선택, 책임의 의미를 부여하였고, 그런 계몽에 대한 비판으로서 칸트의 자유에 대한 사유는 자유자체가 가진 이율배반적 성격과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순의 문제에만 함몰되지 않고, 우리의 자유는 그 모순성에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사회적인 것과 역사적인 과정을 살펴보는 속에서 한계적인 자율성을 마주하고 주목하고 있고, 우리의 변증법의 역사가 한계적이고 제한되어 왔음을 인식하게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제임슨이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을 통해 발견하는 가능성은, 그렇게 친화적으로 매개화된 재현, 미메시스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 만든 사회질서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에 대한 깊은 통찰에 대한 허용일 뿐 아니라, 동시에 이러한 세상이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에 대한 희미한 예감”(195)으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이 보입니다.
10장. 역사라는 모델
<역사라는 모델>에서는, “마르크스의 역사관에 대한 아도르노의 가장 단호한 ‘방어’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경제체계에 대한 견해로서가 아닌, ‘개념’을 분석하는 것임을 주장합니다. 역사 개념과 후기자본주의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함의, 문맥에 따라 나타나는 패러독스(배리와 이율배반)의 불가능 하지만, 포기할 수도 없는 ‘개념’에 대한 제안을 개진한다고 제임슨은 설명합니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입장을 통해 아도르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역사라는 이름의 보이지도 있지도 않은 총체성이 지니는 궁극적 객관성”(203)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궁극적 객관성은, 뒤에 이어질 자연사 개념에 대한 노정이라 말합니다. 또 하나의 경향은, 총체성과 직선적 역사 개념(역사적,서사적 인과성)을 보편과 특수의 관계가 아닌, “상이한 문제의 토대 위에서 사유되고 새롭게 씌어질 것”(203)에 대한 것입니다. 보편과 특수의 관계에 의해 제기되는 중심문제를 아도르노는 ‘실증주의’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실증주의(positivism)는 문화적이고 지적인 방식으로서, 사회과학에서의 실증주의 경향을 일컫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실증주의에 대해 “추상적인 것을 낡고 케케묵은 전통적 내지 ‘형이상학적’ 사유의 잔재로 치부하고는 점점 더 엄격하게 제한하거나 체계적으로 추방해버리면서 경험적 사실들이나 세속적 현상에 몰두하는 것”(204)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가치나 도덕의 상실, 플라톤적 이념의 퇴색, 집단적 정체감의 붕괴, 문화와 풍습의 관습적 형식의 몰락에 대한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푸념과 연관성을 가지지만 철저히 구별된다”(205)는 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보편주의가 보편의 실재와 전통적 가치를 추구하며 보편의 지위를 복구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아도르노의 “‘보편자’가 갖는 지위”(205)는 보편과 특수의 관계에 대한 보수적인 관념이 아닌, 보편도 특수와 마찬가지로 타격을 입고, 철학의 임무가 보편을 쫓아내는 것으로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포섭이나 포용의 화해와는 다른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206) 보편과 특수의 긴장은 첨예하고, 모순적인 것으로서 긴장과 억압의 관계로 나타나며, 특수에 대한 보편의 지배적인 폭력이라고 낙인찍힌다. 이것은 “특수자가 역사의 보이지 않는 작용력을 몸서리 치도록 느끼게 해주는 모든 것에 대한 불만”(206)입니다.
이런 작용하는 현상이 ‘역사의 편재성’으로서, 나의 의식과 언어, 사회성에 침투해 있음으로서, 그런 ‘총체성의 인정’의 단계에서 역사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성은 이런 작용을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에서, 지배적이고, 편재적이며, 총체적인 것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법칙은 개별 주체로부터 추상화 되어 왔는데, 개인의 자발성에서 발견하고 나타내는 법칙들이 축적되어 오는 과정이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법칙이자 보편으로 고착되어 왔던 것을 인식하는 것이 역사적 인식이라 생각합니다.
유연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위원회의 속성은 역사 속에서 보편자의 폭력이 얼마나 변화를 모르는가, 그러한 폭력이 얼마나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가를 상기시킨다.(207, 「부정변증법」)
아도르노는 헤겔의 직선적인 역사로서 ‘대서사’의 관념에 대한 비판과 거부감에 동의하면서, 자신만의 이견을 제시하고 있다고 제임슨은 주장합니다. “보편사는 야만으로부터 휴머니티로가 아니라, 투석기로부터 핵폭탄으로의 전개과정이다”(208)는 부정변증법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역사의 필연성보다 우연성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제기합니다. 208의 각주에서 보듯이, 인류사를 우연한 헛디딤이자 카타스트로프(불운한 변이, 대단원, 파국)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아도르노는 헤겔의 보편성에 대해 논박하며, 헤겔적인 변증법을 정지시킨다고 말합니다.
민족들은 그 안에 종속된 개개인의 실존에 관한 한 보편자들인 것이 분명하지만 좀더 포괄적인 역사적 ‘텔로스’를 추정할 때는 민족들이 개별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들이라는 개별자는 다른 무엇을 위한 단계나 계기로 환원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개별성들을 자신 안에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실패를 ‘이성의 책략’이라는 거창한 개념의 불능성과 연결시키는 아도르노의 분석은 우리의 관심을 모은다.(209)
헤겔의 철학에서는 개별성은 역사적 대자(being-for-itself)로서, 개인은 보편자의 대리인으로 분류되었고, 변증법적으로 개인과 그 사이의 관계와 매개를 불변자로 생각하고 있는, “개인주의 사회 안에 사는 개인의 모습”(210)이라고 지적합니다.
‘개별화의 원리’는 글자 그대로 그런 사회의 원리, 다시 말해 교환 사회의 보편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시에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개별화의 형식을 필요로 하는 총체적 기능연관 속에서 개인들은 보편자의 단순한 수행기관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다.(210, 「부정변증법」)
여기에서 아도르노의 헤겔적 역사관에 대한 비판을 확인하며, 마르크스의 역사관과 세계사의 원리가, 시작하며 언급했던 아도르노의 단호한 ‘방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역사는, 보편적인 주문에 걸린 세계가 아닌,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적인 환경에서 모순적인 현상으로 발견되는 것이 역사이며, 지금까지의 지배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을 통하여, “보편과 특수 모두를,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그들이 함축하고 있는 진리와 그들의 실제 모습 속에서 상당히 객관적으로 드러낸 다음”(211)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역사는 엄청난 부를 소유하지도 않고, 어떤 전쟁도 벌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행하고, 소유하고, 싸우는 것은 사람이다.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이다. 역사는 이를테면 사람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을 자신의 고유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엥겔스/마르크스, 「신성가족」(Die heilige Famili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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