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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제임슨, 「후기마르크스주의」, 제1부, 11장 발제문
제1부 개념의 곤혹스러운 매력 - 11장 <자연사>
p213 :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을 <종의 기원>의 저자에게 헌정한 의미는 인간의 역사가 자연사(이제부터는 다윈의 이론적 노고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214)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험적(priori/transzendental 초월론적) 역사적 상상력의 틀은 점점 더 적은 재료밖에는 포용할 수 없으며 텔레비전을(유튜브) 통해 증명될 수 있는 짧은 이야기만을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맑스주의자 vs 제국주의(자본주의) / 자국민중심주의 : 학교나 미디어가 조장하는 거대서사. 민족주의 > -> (세상을 해석하는 언어가 없다 = 애플은 힙하다. 취향은 존중받아야 한다. => 세상을 틀로선 빈약 – 트럼프, 코로나 바이러스... 가짜뉴스/자기편 전문가/팬덤정치)
좀 더 크고 추상적인 관념(요컨대 자연사)은 이 장치 안에 들어올 수 없다.
p215 : 인류사라는 악몽보다도 더 끔찍한 자연사라는 가위눌림을 포스트모던한 정신은 꽤 성공적으로 억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억압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이유가 그렇게 신비로운 것은 아니다. 자연이라는 악몽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자연을 송두리째 제거하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통해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217 :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집중하는 사람을 ‘인간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결국 그들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규정하고, 인간의 본성과 그(인간)의 잠재능력 또는 소외의 가능성에 대한 그들(초기 마르크스, 맑스주의자)의 조망이 인류학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곧 인간본성에 대한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조망이 필연적으로 허위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담론(초기 맑스의 인간주의적 역사관)으로서 경합관계에 있는 다른 담론들(페미니즘, 퀴어이론, 에콜로지)과 같은 차원에서 기능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p218 : 1)자연사로 돌아가는 것 (환경주의자 / 반인간주의 / 인간혐오주의 -> 어머니자연 =신화, 종교, 영적인 것 -> 가이아 사상, 신앙 : 어머니 자연) 또는 2)인간사의 ‘자연적’ 토대나 전망을 회복(과학이나 계몽의 기반 하에 / 친환경 첨단 소재 -> 형이상학적 충동 x)하려는 시도는 어떤 것이든 이런저런 ‘세계관’의 일종으로 전락할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가? 이런 점에서 아도르노의 제안이 독창적인 이유는 그가 이런 대안들을 예상치 못하게 가로지르면서, 우리가 형이상학적 충동을 완전히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충동의 완전한 제거는 실증주의(테크노크라시)와 경험주의의 승리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에 있다.
“역사적 존재는 극단적인 역사적 결정성 속에 있을 때, 즉 가장 역사적인 순간에 자연적인 존재로 파악된다. 자연은 겉보기에 가장 깊숙이 자신 속에 경직되는 순간 역사적 존재가 된다.” (부정변증법 465)
다른 말로 하면 이원주의는 정면 공격함으로써 극복되기보다는 양 극단을 변증법적으로 바쁘게 왔다갔다 할 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생산양식 : 헤겔의 방법을 거꾸로 사용하는 맑스의 방법/정신현상학/절대정신->역사를 추동/유물론->정신) 관념은(220) 정신적인 실험을 완전히 역전시키고 자연 자체를 낯설게 하여 일종의 사회적 존재로 만듦으로써, 역사의 자연화를 안팎이 거꾸로 되도록 뒤집어야 할 때다. 이제 자연에서 ‘역사적인 것’은 갑자기 자연을 사회적 존재로 발견하고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연을 인간의 사회적 세계 너머로 투사하는 능력이 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서로에 대해 불가공약적인 자연과 역사라는 이원성의 양극이 서로를 낯설게 만드는 것인데, 이것은 분명 둘 중의 어떤 것도 궁극적인 종합적 판단/분석적 판단에 도달할 수도 없는 항구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p221 : <계몽의 변증법>은 아직 자연조차 아닌 것에 직면한 불안과 상처받기 쉬운 여림으로 시작하지만 이런 시작(222)의 시간성은 변증법이 작동하면서 곧 교정되고 파괴되어 포스트구조주의의 공시성과 자연스럽게 결합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실제로, 시간적 연속을 일차적으로 가능케 하는 역사적 텔로스(목적인)와 함께, 불안과 여림이 극복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상론한다.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관념의 유별난 독창성은 이 책이 어떤 시작이나 최초의 시점도 배제하면서 계몽을 항상 이미(‘호명이론’ : 대타자가 나를 부를 때 우리는 ‘주체:이름을 가진 존재’가 된다.) 일어나는 과정으로 그리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보다 앞선 것(그것도 이미 계몽의 한 형식이지만)이 신화의 저 고유한 계기이며 이것을 파괴하는 것이 ‘본래의’ 계몽이 갖고 있는 사명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몽의 변증법>을 타락과 분열이 항상 이미 거기에 있는 시작 없는 서사로 읽어야 할 것이다.
p227 :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이라는 주문의 분쇄를 1)특정한 부정으로서의 변증법에 대한 찬미<정 반 합 -> 반 합 반>, 마르쿠제에게서 더 잘 발견할 수 있는 2)기억의 환기, 마지막으로는 3)‘진정한/혁명적 실천’에 대한 직접적인 요구를 통해 눈앞에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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