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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제임슨, 후기마르크스주의, 1, 4-7장 발제문

哲,테츠후기자본주의_1부,_4_7장_발제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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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개념의 곤혹스러운 매력

 

지난시간의 간단한 요약

 

제임슨이 아도르노에게서 본 가능성은, 아도르노가 기존의 철학적 개념과 체계에 대한 극도의 반체계적 변증법을 주장하면서, 그런 반체계적인 사유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체계의 관념을 견지하고 있음이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 통해 우리가 체계와 개념에 사로잡혀 있음을 지적하지만, “동일성이라는 폐쇄회로를 뚫고나오기 위한 체계와 총체성의 의식적인 도입으로서 해방적이며, 동시에 사유를 지속할 수 있는 역동성을 발견하게 해준다(94, 95). 아도르노의 철학은 기존 철학의 객체에 대한 비판과 주체 중심의 체계에 대한 비판이자, 체계와 총체성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것이자, ‘총체성의 체계와 사유의 형식이 변증법이라 말하며 <부정변증법>을 통해 설명하고 있음을 제임슨은 조명한다.

아도르노의 사유에서 모순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학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것 자체 내에 있는 모순들을 어떤 식으로든 사유 속으로 끌어와야 한다”(113)는 말을 통해, 우리가 앞서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모순된 사회 또한 끌어안고 사유하기 위해서 모순의 딜레마를 마주하고 끝없이 상상해야 한다. “딜레마나 모순이 있기 때문에 매개라는 것도 존재하고, “사회적 사실은 끊임없이 상상력의 결과로 용해될 수 있는 것이다”(115).

 

철학이 스스로의 이름에 걸맞게 되고자 할 때면 언제나 역사적 존재자들과 함께 비개념적인 것을 자신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부정변증법>(120)

 

 

4. 문화비판의 이해득실

 

아도르노의 입장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지식사회학이란 무엇인가? 지식사회학은 지식과 학문을 사회적 요인과 관련해서 분석하는 사회학의 한 분야’(네이버 지식백과)라고 말한다. 이런 연구가 문화론 영역 전반에서 이루어지며 문화사회학이라고도 하는데, 왜 이것을 추상적 사유 내부에서 객체의 우위’(121)라는 말로 시작하며 비판점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는 지식사회학이 가지는 계몽적 성격과 이념에서의 탈피 성향을 지적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시되는 것은 방해받지 않는 계획과 발전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마련하기 위해 테크노크라시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계몽적비판, 또는 신념이나 이데올로기적 집착을 탈신화화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122, Manfredo Tafuri의 인용)

 

아도르노의 문화사회학 비판은, 그들이 가진 가장 예민한 성감대를 건드리는것인데, 여기서 성감대는 진정한 문화에 대한 경멸, 온갖 형태의 심미적 첨가물에 대한 원한감정, 자율적이라 생각하는 문화의 자부심이 자신의 허점을 노출한 모든 순간에 급소를 찔린 듯한 반응을 보이는 질투에 찬 눈초리”(123)라고 표현하고 있다. 문화사회학은 문화라는 단어 자체가 가진 자율성과 스스로의 기능을 조명하고 있지만, 제임슨은 그런 문화를 말하는 것은 모든 연관관계를 잘라버린 채 자신의 무기력하고 기만에 찬 자율성이 대상 자체를 저주하도록 만드는 것”(123)이라 표현하고 있다.

문화사회학과 문화비평, 실용주의, 기능주의 등이 같은 시대에서 등장하고 일정한 흐름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모더니즘의 심장부로서 예술과 문화 현상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모더니즘적 경향에 대한 비판을 통해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여기서 제임슨이 이들에 대해 가하고자 하는 비판은 문화가 역사와 사회적 현상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경향성과, 그런 현상과 장식적 측면에서의 문화에 대한 기능주의적 태도에 대한 것이다.

아도르노가 지적하는 문화적인 것의 딜레마<최소한의 도덕>에서의 언급처럼(10번 각주, 125-126), 문화가 구성된 허위로서 물적 토대를 은폐하는 것으로 볼 때, 문화를 이데올로기적 경향성으로 파악하는 것에서 등장하는 딜레마이다. 자유롭고 정당한 교환이란 허위의식을 고발하며 지적하는 것으로서, 문화의 허위는 상품세계의 허위를 고발하는 교정역할로서 진리의 편에 선다. 문화의 딜레마는 맑스주의의 상부구조/하부구조의 구별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말하며, 레이먼드 윌리엄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관념이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임슨이 말하고 싶은 바는 사람들이 하부구조/상부구조의 관념을 독자적인 이론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어떤 한 문제에 붙여진 이름으로서 그 해결은 항상 개인적이고 특수한 이해방식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파악할 때 모든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리라는 것”(127)이다.

벤야민은 상부구조란 하부구조의 표현으로 이해라 수 있다는 언어학적 모델을 제공하고, 샤르트르는 상황이 하부구조이며 자유로운 선택행위가 상부구조를 이룬다 말하고, 루카치처럼 이데올로기와 계급 사이의 맑수주의적인 전통에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제임슨의 관심은 보편과 특수의 공존에 관한 아도르노의 입체적 관념이 자신만의 독특한 상부구조/하부구조의 대립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128)으로, 아도르노의 발상이 독특한 점은 보편(총체성)이 인식되지 않는 하부구조로, 특수는 개인적 현실에서 나타나는 의식과 문화의 사건이라는 역의 관계를 설정한다는 점이라 하겠다.

기존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의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경향과, 물적 토대로서 사회경제적인 맥락의 일정한 법칙적인 경향성이 가지는 한계는, 여전히 법칙적인, “이데올로기적 반영이나 집단적 허위의식을 탈신화하는 가장 속류 마르크스주의적인 파악”(129)에서 벗어나, ‘광범위한 스펙트럼으로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에게는 문화를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다운 사회를 신기루처럼 떠올리는임기응변적인 거짓말(129)이라는 환상을 제거하고, “참여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재편성 하는 것”(129)이 중요하다. 기존의 맑스주의적인 관점에서 문화가 가상에 불과한 것으로서 한계가 있지만, “문화의 허위가 상품세계의 허위를 고발하는 교정역할을 할 수는 있는”(130, <최소한의 도덕>)것으로서 문화의 역할이 있다.

앞서의 사회학에서의 딜레마와 모순에 대한 논의는 문화에서도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챕터에서의 결론을 정리하자면, 우리는 문화비판에 대한 민감성을 유지하면서도, 문화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제임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문화비판의 의의를 제시한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결론 - ‘문화비판뿐 아니라 사유 일반에 해당되는 -을 내린다면 우리는 문화(이념으로서나 현상형식으로서나)를 죽이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문화를 가차없이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둘 중 어느 한 쪽에 결정적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철학함이라는 불가능한 이념의 숨을 이어나가는 것(문화의 생산처럼) 속에는,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유토피아적인 힘이 들어있다.(130)

 

아도르노의 문화비판에 대한 이해는 다음의 맥락에서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문화비판만이 오직 문화의 매춘행위나 정신의 순수한 자율성을 해치는 문화의 타락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할 수 있는 까닭은 문화의 기원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극단적인 분리에서 시작되었고 자신의 원죄인 이러한 분리로부터 힘을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가 이러한 분리를 부인하고 화목한 유대감을 꾸며내려 든다면 문화는 문화 본연의 관념에 못 미치는 초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최소한의 도덕>(131)

 

우리는 이 말에서 앞서 철학의 개념들, 사회학의 현상들 속에서 발견한 모순이 문화의 논리에서도 전개되고 있음을 이해하고, 그 간극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힘으로서 이후 전개될, 벤야민의 상엮기(configuration)와 구도(constellation), 아도르노의 모델(medel), 미메시스(mimesis)의 관념을 통해 우리는 총체성의 가능성을 탐색하게 될 것이다.

 

5. 발터 벤야민과 구도들

 

벤야민-아도르노로 이어지는 구도가 있음을 제임슨은 설명한다. 이는 철학적인 제시재현의 문제(133)로서, 재현을 통해 진리와 비진리를 지닌 철학적 개념들을 작동시키는실마리”(133)를 찾고자 한다. 여기서 철학적 개념은 총체성과 관련된 것으로, “우리는, 이 총체성의 하인인 개념이 총체성의 비진리와 지배형식을 재생산하고 있기는 하지만, 총체성 자체는 생각할 수도 재현할 수도 없는 무엇이라는 사실”(134)을 지적했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사유를 통해, ‘자신의 비진리를 바로 자신의 형식 속에 내포하고 있는’(134) 가능성을 확인한 상황에서 재현은, 그런 가능성을 확인하게 하는 실마리가 된다.

여전히 우리들 사회에서 지식(episteme)은 객관적인 정신의 개념의 체계로서 말해지고 여전히 주체와 객체의 낡은 대립에서 주체의 승리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논의를 기지를 발휘해 잠정적으로 비켜가야 한다’(135)고 제임슨은 말한다. 물론 철학의 개념들의 작업을 위해 체계성을 지향하는 것이 철학의 총체화작업으로 밝혀져온 지금에서, 어떤 개념의 체계를 붙잡고 싶어하는 이 상태에서 빚어지는 딜레마의 문제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것은 아도르노에 있어 미메시스(mimesis, 모사, 모방)를 통해 딜레마를 초월하려는 의지를 확인한다.

 

의사총체성이라는 관념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서로를 지시하는 일련의 개념들이 만드는 연결고리가 총체적 체계의 환상을 만들어내지만 체계의 옹색한 마법은, 재현의 질서라는 것이 아무런 구속력도 갖지 못하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배열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신탁에서처럼 모든 요소는 이미 현존해 있지만 그것의 배치형식 또는 결과로서 드러난 모양새는 단순한 우연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의해 순식간에 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잠정적으로 만들어진 자기 자신의 구조물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재현의 방식을 벤야민은 상엮기 또는 구도라고 불렀는데 아도르노는 이 용어에 좀더 어색한 개념인 모델이라는 용어를 첨가하면서 <부정변증법>2부에서 이 모델의 세 가지 형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135)

 

물론 제임슨은 재현의 기존의 체계의 틀을 깨고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의 인상주의적 관념’(136)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단편적인 것은 현대 문화비판을 위한 호재로 보이지만, 여기서는 단편성에서 드러나는 것은 현대적인 딜레마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논의를 통해서 단편적인 것불연속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136)의 문제가 우리의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음을 말한다. “불연속적인 것은 단락들 사이의 빈 자리나 간극을 통해 드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단락들이 아예 빠져버리거나 의도적으로 제거됨으로써 더욱 첨예화되기도”(137)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당혹감을 주지만, 그런 간극의 관계를 파악하고 거리를 읽어내는 것에서 개념과 총체적 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문제로 이어가고자 한다.

 

불연속성의 관념은 대상들 사이의 거리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구도, 즉 별자리를 만들어내는 별들은 보통, 틀을 만들어주는 은유들이 결여된 단편적인 것들로 생각되지 않는다. 상엮기나 구도, 모델의 관념ㄷㄹ은 분명 그에 상응하는 미시적 범주들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하늘의 별들을 먼 거리에서 사진 찍어 이 사진이 하늘에 있는 별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게, 극적으로 자신의 건축을 위한 요소나 재료들을 다루는 방법이다. 우리는 곧 어떤 방식으로 개별 개념이 순간적이고 잠정적인 총체적 체계속에 자리잡게 되는가라는 문제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다음에는 그런 구도들의 포괄적인 형식적 재현에 대한 언급을 보완하기 위해, 재현을 만들어내는 미메시스적문장들을 살펴볼 것이다.(137)

 

영향이라는 것도 중요한 주제로, “‘영향, 수용하는 개인의 정신 속에서 일깨워진 새로운 관심”(138)이라고 말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미메시스에서 영향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하나는 사유가 어떻게 더 나아가는지, 둘은 기존의 사유는 어디까지 나아가는데 한계인가를 보여주는 과정이다.(138) 영향에 의해 우리가 표현하지만, 이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재현의 형식과 가능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아도르노의 미메시스는 다른 방식의 글쓰기의 가능성에 대한 실천적 증명이며, 궁극적으로는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이다.”(139) 개념은 기존의 철학적 형식처럼 관념적일 수 있지만, 철학적 미학은 새롭게 일깨워지는 가능성의 관념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것은 단절된 것은 아니다. 벤야민의 <<독일 비극의 기원>>에서는 <인식론 비판 서문>에서 시작하는, 기존의 진리와 인식에 대한 구별로부터 시작하여 진리내용을 다루면서, 그것의 허위의식에 대한 비판점이며 동시에 의사총체성을 완성하는 구도로 나아가는 것이다. 미메시스는 이와 유사한 방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의 방법처럼, 절대적 관념론을 비판하는, 이성에 의한 이성 비판이라는 모호한 지점이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보편적 관념의 억압을 벗어나 개별적인 것이 살아남고 이야기할 수 있는 철학적 사유이자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발전된 것이 <부정변증법>(Negative Dialektik)이다. 이런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최선의 선택은 그런 종류의 온갖 전통과 연관된 연상 작용들을 처음부터 배제하고 벤야민 자신의 논리전개로부터 신선한 의미를 끌어내는 것”(140)이라고 말한다.

 

현상들은 그들의 거짓된 통일성을 벗어버린 다음 요소들로 쪼개져 진리라는 진정한 실체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쪼개진 상태 속에서 현상들은 개념에 종속된다. 사물들을 요소들로 용해시키는 것은 바로 이 개념들인 것이다.<독일 비극의 기원>(141)

이러한 매개역할을 통해 개념들은 현상이 이념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개념으로 하여금 또 다른 역할, 즉 철한 본연의 과제인 이념의 재현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 또한 바로 이 매개역할이다.<독일 비극의 기원>(141))

 

재현과 이념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념은 개념들의 체계이자 개념들 사이의 관계이고 고유한 내용을 갖지 않는다. 여기서 재현은 개념을 재현하는 형식들, ‘진리에게는 스스로를 재현하는 것’(142)으로서 나타나는 경험적인 현실이다. “이념은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재현한다.”(143) 우리는 이념에서 총체성의 가능성을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이념적인 것인 진리의 존재는 현상들의 존재방식과 다르다. 진리의 구조는 그 무의도성에서 보면 단순한 사물들의 존재를 닮았지만 그 항구성에서 보면 그것보다 우월하다. 진리는 경험계를 통해 규정되는 어떤 의도가 아니라 경험계에 그것의 본질을 새겨넣는 힘이다. …… 이러한 이념들은 철학적 명상 속에서 부활될 수 있다.<독일 비극의 기원>(144)

 

철학적 명상, 새로운 추상은 기존의 전통 철학의 관념과 추상의 개념들, 그 보편과 특수의 관계와는 구별되는, ‘비전형적인 것이자 불협화음’(146)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공허한 단어가 되어버린 창백한 추상들에 예전처럼 매달리기보다는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개개의 경우나 사건 속으로 파고들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146) 번역의 과정이 유용함을 제임슨은 주장한다. 우리는 재현이 이루어지는 개념들의 상호 관계의 과정을 발견하고, 그 사이의 오고가는 현상들로부터, 그것을 다시 보편적 성격을 가진 이념의 이름으로 제시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념들은 철학적 체계의 형태로 함께 묶여질 수 없으며 어떤 하나의 이념을 철학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은 그 빛으로써 다른 것들을 가려버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정변증법>의 불연속성은 벤야민적인 형상 속에 이미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149)

 

6. 모델들

 

아도르노는 철학적 재현의 형식으로서 구도를 잘 조명할 수 있는 다른 대체 형상들을 만들어낸다.”(150) 여기서의 구도는 대상 속에 축적된 과정의 인식이다.(150) 구도는 맑스주의의 알튀세르의 구조적 인과성과 동일시 할 수 있다고 제임슨은 말한다. 알튀세르의 구조적 인과성은, 기계적 인과성-표현적 인과성-구조적 인과성의 관점에서, 기계적 인과성이 일대일의 대응관계를, 표현적 인과성이 부분간의 관계와 그 부분들에서 전체가 반영된다는 관점이라면, 구조적 인과성은, ‘전체와 환원되지 않는 부분들 사이의 복합성으로, 부분은 전체라는 최종심급으로 완전히 수렴되지 않는 자율성을 가지며 그 자체의 복합적 구조를 통해 전체에 결합된다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부정변증법>에서 구도의 방법으로서 모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 모델이라는 말이 과학 혹은 사회과학적 담론의 물화적 형식에서 사용하는 단어라는 점에서 부적절해 보이고 어색해 보이지만, ‘모델들은 특정한 질서나 상엮기를 의미한다’(154)고 말한다.

 

모든 것은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 동일성의 의미는 비동일성임이 드러난다. 출발점이 되는 소재는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고수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것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소재는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가능성에 대한 고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신음악의 철학>(154)

 

모델은 개념을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비판하고 논박하게 한다. “문제가 된 개념이 철학적 텍스트보다 선행하며, 철학적 텍스트는 사후에 이러한 개념을 철저히 사유하고비판하고 변형시켜 문제를 해결하거나 논박한다는 것이다.”(155) “개념이나 문제는 재현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재현과 하나라는 것이다.”(155)

모델은 자유역사형이상학의 방법론적인 구도이지만, 하지만 이 방법은 단순한 방법론으로 끝나려 하지는 않고, 모델을 통한 새로운 형식과 설명의 가능성, 재현의 가능성을 담지한 것으로서 이해된다.

 

7. 문장구조와 미메시스

 

벤야민의 상엮기나 구도의 설명하는 방식과, 아도르노의 미메시스적인 차이는 명확하게 나타난다. 벤야민이 유물론적으로 하부구조의 현상들을 무매개적으로 설명하는 인류학적 유물론의 낭만적 성격을 가진다면, 아도르노의 미메시스는 매개를 중요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에서 <부정변증법>의 전개와 이성의 힘을 조금 더 신뢰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문학은 독자를 마술적으로 텍스트에 붙잡아놓기 위한 눈앞에 떠올리기이지만 이러한 마법을 푸는 것은 철학의 요소일 것이다.”(각주1, 157) 벤야민의 언어는 스스로를 통해 자신을 전달”(158)하는 것이자, ‘비재현적 미메시스로서 이디오신크라시(원초적인)적인 언어관이라 말한다.

벤야민의 아우라의 개념에서 아도르노의 미메시스적 개념을 유추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아우라는 암시된 근본개념이라는 점에서 미메시스적인 관념과는 관계가 없다. 아도르노의 근본적인 방식은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을 완전하게 가동하는 것이다. 주체-객체의 변증법은 그 관계, 위계질서, 상호작용, 지배종속관계를 포착하는 인과성 개념을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그 구도가 알튀세르의 구조적 인과성의 특성과 유사함을 앞서 언급하였다.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의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자, ‘비동일성에 대한 동일성의 작용을 관찰하기 가장 적당한 장소’(161)로서 인과성 개념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미메시스적 충동’(162) 그 충동은 주체와 타자, 자연의 사이의 관계를 다시금 포착하도록 해준다. 그런 미메시스적 충동에 의해 일어나는 비판적 태도의 가능성에 대해서, 니체를 비롯 회의적인 태도를 취해왔지만, 아도르노에게 있어, 미메시스를 통한 <부정변증법>의 수용은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음을 제임슨은 설명한다. “아도르노에게서 수용의 가능성은 전체적으로 보아 사회체계의 획일화 과정에 비판적 주체가 휩쓸리지 않는 것을 가능케 하는 우연한 계급적 특권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163)

철학의 미메시스적인 계기가 아도르노의 표현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미메시스는 서사라는 언어로 대체하며 분명해진다고 제임슨은 설명한다. 언어는 자신들이 만들어지기 위해 통과해야 할 히겨운 우회로인 언어체계를 거치지 않고 미메시스적이 될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165) 하지만 그런 우회로 체계는 미메시스의 한 형태로 파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165)

 

계몽(보편적으로는 이성을 말하며, 특수하게는 모든 추상적 사유의 내적 추동력을 말한다)은 지배의 형식으로서 처음부터 행위자와 동기와 폭력적이고 극적인 사건을 포함하는 풍부한 서사 도식들을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서구 이성의 생성 계기들을 눈앞에 떠올려볼 경우, 껍데기에 불과하다.(166)

 

우리는 자연사에 관한 모델에서 앞에서 살펴본 미시적 서사의 결정적 변조, 즉 서사가 개념적 철학으로 고착되는 과정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특히 자기유지의 충동과 의식구조나 허위의식과의 관계에 쐐기를 박는 문장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사자가 의식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가 잡아먹으려는 영양에 대한 그의 분노는 이데올로기다”<부정변증법>(167)

 

고립된 추상적 개념이 잘못된 동일성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과는 다르게,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개념으로 만드는 것은 철학적 문장의 미메시스적인 요소들이다. 개념을 형성하는 과정의 서사적인 것으로 개념을 변형시키는 경향성, 이 경향의 미메시스적 성격에 의해 준서사적 재현으로 우리는 개념을 새롭게 읽어나갈 수 있다. “미메시스적인 것 또는 서사적인 것은 추상적 개념 속에 은폐되어 있는 본래의 지배를 발견함으로써 추상화의 독을 무해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잠재되어 있는 유토피아적 진리내용을 해방시키는 일종의 동종요법 전략으로 여겨진다.”(168)

아도르노의 비유는 개별 주체와 후기 독점자본주의의 법칙 경향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경제 전반에 확장된다.”(169) 제임슨은 경제영역에서의 논리에서도 아도르노의 논의의 관계성을 발견하고 설명하고자 한다. 마르크스의 가치 이론의 설명에서 개념과 동일성의 관념을 지적하면서 경제영역의 논리가, 심리적 추상과 철학적 추상의 통일성의 구조화된 형식으로 나타나고, 경제의 논리에서 모든 것을 사용가치라는 것으로 포섭하는 동일성의 과정이 일어났던 것을 언급한다. 우리는 그런 동일성에 의해 독점화된 상황에서 살아가는데, 여기서 개별의 위치는 매우 불안한 상태이다.

 

거대화된 산업이 독립적인 경제 주체를 제거함으로써 - 한편으로는 자영업을 빈사상태에 빠뜨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의 객체로 만들어버림으로써 - 끊임없이 도덕적 결정을 위한 경제적 토대를 제거해버리게 되자 반성 또한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된다.<계몽의 변증법>(171)

 

우리는 독점적 세계에서 자율적인 예술, 독립적 행동, 철학적 사유의 생산자로서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주체를 잊게 될지도 모른다. 그 주체는 지금 상황에서는 골동품과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동질화의 과정에서도 아직 새롭게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말한다.

 

자신만의 차이와 고유성에 의해 지배적인 교환관계 속에 흡수되어버리지 않는 것, 질적인 것이라는 유토피아는 자본주의하에서는 물신적 성격 속으로 도피해버린다.<최소한의 도덕>(172)

 

이런 물화의 과정 속에 아직 많은 주관주의가 있을 것이라는 것. 질적인 것으로서 주체라는 것이 다시 등장할 때 미메시스의 형상의 가능성이 가시화될 수 있다.(173) 하지만 제임슨은 아도르노의 이런 명상이 과도기를 살았던 그의 시대적 상황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파악하는 것 같다. 하지만 후기자본주의의 상황에서, 자유로운 주체는 미미한 역할을 행사하고, 기계에 의해 통제되는 기계화의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가능성은, 그런 기계화의 상황 가운데에서 미메시스의 형상이 그 자체가 변증법적인 것으로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 자체를 포함”(174)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적어도 관습적인 총체성이 아닌, 비록 보편과 총체성의 부분으로서 살아가지만, 일그러진 체계와 현상을 비판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특수로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총체성이나 사회체계 같은 용어는 아둔한 선입견의 형태로 미리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반대편에 잇는 개별 주체가 겪은 것에 대한 기록이다. 그 때문에 이런 언어형상들은 독점 단계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총체성의 특정 순간에 대한 정보를 담게 된다. …… 국가자본주의적경제모델로 돌아가보는 것은 상처받은 주체가 가지고 있던 척도 - 오늘날은 그나마도 불가능한-를 잘 볼 수 있게 해준다.(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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