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장 상()과 주(), 책봉(冊封)과 조공(朝貢)

 

고대 중국인은 오방(五方)관념과 오복(五服)이라는 두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두 세계관은 서로 다른 계통으로 형성, 전개되었지만, 한 사람의 의식 세계 안에서 양립할 수 있었다.

오방 관념상의 세계는 중심에 중국과 동방의 동이(東夷), 북방의 북적(北狄), 서방의 서융(西戎), 남방의 남만(南蠻) , 각각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관습 등을 가진 오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복 관념이란 세계가 5개의 동심원으로 형성된, 중심부에는 왕기(王畿)와 전복(甸服), 그 외곽에 제후국으로 구성된 후복(侯服)과 빈복(賓服)이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만(), (), (), ()으로 구성된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서경.국어.사기에 보이나, ‘중국이나 이적을 구별하는 분별의식이 주()나라 초에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중국개념의(이라는) 중국 역사공동체의 형성은 동주(東周) 초기인 춘추(春秋)시대의 문헌에서 처음 발견, 이 시기의 중국은 제하(諸夏)의 범주, 즉 황하 중하류 유역 일대의 중원(中原)에서 형성된 특정한 역사 공동체를 의미했다. 이후 전통 시대의 전시기를 통해 전개된 중국개념은 춘추시기의 중국 즉 중원의 역사 공동체라는 의미를 포함했다.

 

중국(中國)’개념의 역사공동체 형성을 위한 문화적 바탕은 고고학적 시기-신석기 시대의 앙소(仰訴)문화와 용산(龍山)문화-에 구축되었다.(p53) 앙소 문화인(기원전 5000~3000)은 황하 양안에서 거주, 원시적 농업 생활 영위, 기하 문양이나 동물 도안 도기 사용했다. 이후 흑도(黑陶)를 특징으로 하는 용산문화로 점차 발전했다. 대문구 문화를 계승한 산동 용산문화는 동이(東夷)역사 공동체가 형성, 앙소문화를 계승한 하남, 섬서 용산문화는 중국역사 공동체가 형성, (). ()시대 이후에는 두 역사공동체가 융합되어 하나의 역사 공동체로 발전했다.

 

중국역사공동체의 형성 과정은 전실 시대에서도 확인된다. 35의 전설 시기에 판천(阪泉)전투와 탁록(涿鹿)전투 등을 통한 남만, 동이, 북적과 같은 역사 공동체의 등장은, 역사적 경험과 공동체 의식을 달리하는 과정이 장기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중국 등 역사 공동체들이 서서히 형성되어 갔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이라는 국가는 성읍(城邑)국가 형태로 하대(夏代)에 출현한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일 개 성읍 국가의 군주에서 성읍 국가군의 공주(共主)로 발전한 것은 치수(治水)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p55) 또한 사기등 기록에 의하면, ()임금에게 선양 받은 우()가 자신의 아들 계()에게 군주의 지위를 세습케 했다고 하는데, 선양제에서 세습제로의 전환은 왕조(王朝)형식의 국가가 출현하는 주요한 표지로 이해된다. 이로 인해, ()는 중국의 첫 국가로 인식되어왔다. ()는 수많은 성읍 국가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중심역할을 수행하는 성읍국가였고, 청동기를 사용하는 시기로 진입하는 시기이고, 원시 농업 단계이며, 점복이 성했고, 초기 문자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갑골문 등 금석문 자료로써 엄격하게 확인되는 중국의 역사시대는 상대(商代) 중기 이후로, 시조 설()이 상()땅에 봉해진 데서 얻은 이름이다. 설의 어머니 간적이 현조(玄鳥)의 알을 삼키고 설을 낳았다는 전설은 동이계의 토템 숭배의식을 반영한 것이기에, ()은 동이로 간주, 설에서 탕()까지 14대 동안 상()이 하()나라의 제후국이었다가 탕()에 이르로 상조(商朝)를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황하 중류 유역의 국제사회와 상국이 주도하던 황하 하류 및 산동연해의 국제 사회가 통합되면서 상()이 그 중심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거북과 소 등의 갑골을 사용하여 점을 쳤는데, 이때 새긴 갑골문은 상대의 역사적 실재를 증명, 중국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상대(商代)는 사국(四國)에 대응하는 중국(中國)’개념이 처음으로 출현한 시기로, ()나라는 국제 질서의 중심에 위치한 중국이었다. ()나라 이외는 성읍국가들을 가리켜 ()’이라 했는데, ()의 뜻이다. 이들 성읍 국가들은 상()나라와의 관계에 따라 국제 사회 안에서 차등적인 위상을 제도적으로 확보했다. (), (), (), (), ()의 오등작(五等爵)을 받기도 하고, 전복(甸服), 후복(侯服), 수복(綏服), 요복(要服), 황복(荒服) 등 오복(五服)에 귀속되기도 했다. 또한 상왕(商王)을 공주(共主)로 하여 동일한 국제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이들 성읍 국가들 가운데 방백(方伯))’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들은 주변 성읍 국가들에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대적 강국들로서, ‘서백(西伯)’을 칭하던 주()나라의 문왕이 그 대표적 경우이다.

중원의 국가들만이 아니라 상()나라와 정치적 관계를 갖고 있었던 중원 밖의 나라들-오복 중에 요복(要服). 황복(荒服), 동이(東夷)와 숙신(肅愼), (). (). (). (). () 등이 있었고, 이들은 사실상 독립된 국가를 스스로 운영하고 있었다.

 

서주(西周)시대의 중원도 성읍국가의 단계였다. “()의 시조 후직(后稷)은 제곡(帝嚳)의 원비였다. 그는 농경을 좋아하여 땅의 적절함을 살펴서 농사를 잘 지었다. 제요(帝堯)가 이를 듣고 농사(農師)로 삼고, 후직(后稷)이라 했고, 별성(別性)은 희씨(姬氏)였다. 후직이 일어난 곳은 도당(陶唐)과 우하(虞夏)의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주()는 중원의 서방(西方) 위수(渭水) 일대에서 중국과는 다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국어(國語)에서는 우하(虞夏)를 섬겼으나, 하가 쇠퇴하자 융적(戎狄)의 사이로 숨었다고 하고, 괄지지(括地志)에서는 “...다시 후직의 왕업을 닦아 농사에 힘썼다. ...고공단보(古公亶父)에 이르러 기산(岐山)으로 옮겨와 융적의 습속을 버리고 성곽과 가옥을 짓고 읍을 만들어 거처했다고 한다. 고공단보의 손자 문왕(文王) ()에 이르러 상()나라 중심의 중원 성읍 국가 집단에서 이탈하여 위수(渭水)유역의 서방 국제 사회를 주도하는 독자적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고고학적으로 선주(先周) 문화는 고도로 발달된 청동기 시대 문화였다. 문왕이 7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즉위 9년에 문왕의 무덤에서 제사지내고 동쪽으로 진군, 800제후와 함께 상()나라 교외 목야(牧野)에서 상왕 주()를 패퇴시켰다. ()의 왕기(王畿)를 셋으로 나누어 무경녹보(武庚祿父)를 패()에 봉하고, 관숙은 용()에 채숙은 위()에 봉해 다스리게 하여, (-)백성을 감시하게 했다.

 

은주혁명9殷周革命)’으로 표현되는 상()나라의 패망은 후대 중국사상에서 볼 수 있는 왕조 교체와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이 사건은 중원의 성읍 국가 집단과 서방의 성읍 국가 집단이 대결하여 후자가 승리를 거둬 그 중심 역할을 서방의 주()가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의 분봉(分封)주례(周禮)등에는 종법(宗法)제에 입각한 혈연적 봉건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동성(同姓)의 분봉은 극히 일부히고 대부분의 봉건은 상대 때부터 존속해온 성읍 국가에 대한 공식적 승인 절차였다(800제후와 같이 일어났기에 공신으로서 봉해졌다.p64). ()는 공. . . . 남의 5등작의 차등적 국제 질서를 주도, 제후국은 책봉(冊封)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정기적으로 조공(朝貢)함으로써 주국(周國)중국(中國)’ 즉 종주국으로서 지위를 인정했다. 책봉과 조공을 교환함으로써 군신(君臣)’의 명분을 가진 국가 간의 관계가 이때부터 나타나게 되었다.

 

조공(朝貢)은 책봉(冊封)과 표리를 이루면서 상, 주 중심의 차등적 국제 질서를 형성했다. 예기(禮記)곡례에서는 제후가 북면(北面)하여 천자를 뵙는 것을 조()라 한다고 했다. 왕제에서는 제후는 천자에게 매년 한번씩 소빙(小聘)하고, 3년에 한번씩 대빙(大聘)하며 5년에 한번씩 조()한다고 했다. 주례추관(秋官) 사구(司寇)에서는 지역적 차이에 따라 조근(朝覲)의 횟수가 달랐다고 했으니, “후복은 매년 한번씩 조근하고, 전복은 2년에 한번, 남복은 3년에 한번, 채복은 4년에 한번, 위복은 5년에 한번, 요복은 6년에 한번식 조근했으며, 구주의 밖에 있는 번국은 1대에 한번만 조근하게 했다.”

 

유왕(幽王)때에 이르러 사이(四夷)가 교대로 침입하여 중국(中國)이 모두 배반했다. 신후(申侯)와 견융(犬戎)등이 왕을 공격하여 여산(驪山)에서 죽였다. 다음 대인 평왕(平王)때에 주()는 견융의 난을 피해 동쪽 낙읍(洛邑)으로 옮겼다. 이로써 서주(西周)시대가 종결되었다.

 

 

 

 

 

2장 춘추(春秋)와 전국(戰國), 사대(事大)와 자소(字小)

 

동주(東周)시대의 전반부를 춘추(春秋), 후반부를 전국(戰國)시대라 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철기의 개발로 인해 전통적 토지 공유제가 사유제로 전환되고 농민의 계급 분화가 진행되는 등,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 전반에 걸쳐 획기적인 변화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국가 체제가 성읍국가에서 잦은 겸병과 전쟁을 통한 영토국가로 전환되었다. 후한서군국지(郡國志)()가 상()을 이기고 오등(五等)의 봉()을 제정하니, 모두 1,773국이었다. 그 뒤에 제후가 서로 병합하여 춘추시대에는 1,200국 이었다. 242년 동안 군주를 죽인 것이 36, 국을 멸망시킨 것이 52건이었으니, 제후 가운데 분주히 애써도 사직을 보전하지 못한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전국시기에 이르러 남은 것은 10여 국이었다.”고 했다. 이처럼 격심하게 진행된 국가 체제의 변화로 이른바 사대(事大)와 자소(字小)로 표현되는 독특한 국제질서가 출현하게 되었다. 따라서 춘추전국 시대의 가장 큰 이상은 대국은 자소인 소국을 보호하고 소국은 사대인 대국을 섬겨서, 중원의 국제 사회에 다시 안정된 질서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사대와 자소의 구체적 방법에 대하여 좌전소공 30년조에서는 예란 소국이 사대하고 대국이 자소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대는 대국의 명령을 때에 맞추어 받드는 데 있고, 자소는 소국이 갖지 못한 것을 구제하고 부조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이는 상주시대의 책봉-조공 관계와는 본질적 성격이 같지 않다. 책봉과 조공 관계는 실질적으로 주권을 보유한 독립 국가 상호간의 관계였다면, 사대와 자소는 강대국과 약소한 국가 사이에 맺는 교린(交隣)관계였다. 이후 중국의 통일과 제국의 건립이라는 상황의 전개에서, 양자가 결합하여 독특한 세계질서를 구축하게 된다.

 

춘추시대에 제하(諸夏)와 이적(夷狄)의 접촉이 잦아짐에 따라 화이(華夷)의 구별 의식이 급속히 강화되었다. 존왕양이(尊王攘夷)를 표방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구별 의식의 결과가 중국이라는 개념의 역사 공동체의 형성을 의미한다. 중국 이외의 주변 공동체는 사이(四夷). ()라 총칭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은 의식의 세계에 국한,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라는 역사공동체는 정체된 공동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되는 공동체였다. 춘추시대의 잦은 전쟁과 외교적 접촉은 중국의 범주를 제하(諸夏)’의 범주 밖으로 확대, 관중의 진()이나 강남의 초(), 산동의 동이(東夷)제국이 중국의 범주 안으로 포함되었다.

 

맹자등문공상에 실린 허행과의 논쟁은 전국시대에 진행된 중국의 확장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전해준다. “신농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허행이란 사람이 초()에서 등()으로 갔더니....” 여기서 북방의 선왕지도(先王之道)’라 불리는 전통적 문화와 남방의 초()지방에 존립한 독특한 언어권의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중국의 확장은 천하의 확대로 이어졌다. 전국시대가 진행되면서, 그 전까지 이적시되었던 초. . 제 등의 남만, 서융, 동이 계통의 일부 인구와 그 거주지가 중국범주 안으로 포함되어갔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