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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3. 천하국가 5-6장 발제.hw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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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수와 당, 기미부주 체제

 

589년 북조 수가 남조 진을 통합, 위진남북조의 불안정한 긴 시기가 종말을 고하고 하나의 강력한 제국에 의해 통일적으로 지배되는 상황이 재현되었고, 그 뒤를 이은 당에 의해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한편 중국을 수와 당이라는 통일 국가가 지배하던 초기, 동아시아 역사 공동체들이 매우 강력하고 통일적인 국가들을 건립, 발전시키고 있었다.

 

돌궐은 흉노의 별종으로, 토문시기에 점차 강성해져 이리가한(선우)이라 자칭했다. 수 말에는 중국을 압도, 신속하게 했다. 수는 공주와 종실의 딸을 출가시켰다. 당 태종에 이르러 동돌궐을 멸망시켰다(630). 이들을 서주와 연주로 보내 4개의 주 도독부를 설치하고, 힐리의 땅을 6개 주로 나누어 정양도독부, 운중도독부를 두어 그 무리를 통령하게 했다.

 

토번은 본래 서강(西羌)의 속으로 황하와 횡수, 양자강에 흩어져 살았다. 송짼간포시기에 티베트 고원을 처음으로 통일했다. 당에 사신 보내 조공했으며, 문성공주를 아내로 맞아 점차 화풍을 따랐다.

 

고구려는 한의 현도군 관할 아래 놓여 있었지만 이탈하여 부여를 병합하고 요하유역을 장악하고, 한반도 중부까지 점유, 강성한 국가로 발전, 요동의 국제사회를 주도했다. 수는 다원적 국제사회의 병존을 원치않았기에 양국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612년 양제가 직접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을 공격, 고구려 을지문덕 등의 저항으로 살수에서 대패하여 수가 패망하기에 이르렀다. 당의 고조 이연은 화친을 모색했으나 태종은 642년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구실로 친정했으나 실패했다.

 

돌궐과 토번 고구려 중국 국가의 지배체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독자적인 국제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선비 모용부가 강인의 땅에서 토욕혼 건립. 수와 당에 신속하지 않았다.

 

중국 밖, 이적의 거주지에 당의 도독부와 주현 등을 설치하고 도호부로 하여금 통령하게 하는 도호부체제를 두었다(서쪽에는 안서도호부가 설치되고, 동쪽에는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고, 사안도호부, 선우, 곤릉, 뭉지 도호부, 서북에 북정도호부 등 7개 도호부가 있었다). 당조의 군현체제안으로 내속시키되 실질상으로는 책봉과 조공을 통해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당대 특유의 세계 지배질서체제였던 도호부 체제는, ‘기미부주라는 체제로 도독과 자사는 원주민 추장이 맡고, 외교와 군사를 간섭, 통제했다. 즉 실제로는 고속(古俗)에 의한 자치가 허용되었고, 중국 황제와 이적의 군장이 책봉과 조공을 교환하는 국제체제였다. 당 태종이 설치하고 고종 시기에 활발하게 가동되었으나, 현종 시기에 파탄을 맞게 되었다.

 

당 국가의 가장 기본적 지배 체제는 균전제라는 토지제도와 조용조라는 조세제도, 부병제라는 병제의 기초 위에서 유지 되었다. 농민에게 농경지를 균등하게 지급했기에 조세도 균등하게 수취할 수 있었다. 병제 또한 균등한 토지제도를 기반으로 한 균등한 병역 정신이 제도화 한 부병제였다. 이러한 제도가 성당 시기가 지나면서 무너지자 권세가와 부호에 의한 토지 겸병이 일어나자 부병제도 무너졌다.

 

안록산은 755년에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난이 일어나고 3년만에 멸망했고, 사사명도 2년동안 황제를 참칭하다 그 아들 사조의의 원년(762)에 멸망했다. 안사의 난은 8년간 지속되었다. 안사의 난은 중원을 황폐화시켜, 중원 전통적 힘을 크게 약화시켰고, 변방의 힘을 강화시켰고, 군벌을 다시 출현시켰다. 절도사라는 번진 혹은 방진의 할거는 대란의 평정으 댓가로 반란을 일으킨 장수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재앙의 싹을 길렀다.

 

 

 

 

 

 

6장 요. . 원 통합국가

 

안사의 난 이후 중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은 관중(關中)일대를 지배하는 일개 지방 정권으로 전락하고, 번진(藩鎭)들은 사실상 독립된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즉 오대십국시대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 없이 연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송교체기는 왕조적 교체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 체제에서도 변화가 이루어졌다.

당 중기에 정전제적 이상이 포기되고, 토지 겸병이 광범하게 진행됨에 따라, 토지를 매개로 한 국가와 소농민의 직접적 관계는 소멸되고, 토지를 매개로 한 지주와 전농의 생산관계가 일반화되었다. 국가는 지주만을 대상으로 빈부에 차등적 정율세제가 확립되었고, 소농민은 지주에게 납부하는 지조가 중요해졌다. 소농민의 집단적 저항운동은 지조에 관한 계약 조건을 유리하게 바꾸기 위한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송대에 이르면, 농지는 경작자의 소유가 아니고, 농지를 가진 자는 경작하지 않으면서 수입의 반을 차지하자, 빈부의 차는 더욱 커졌다. 이러한 모순은 농민 반란을 일으켰는데, 지배 이데올로기의 발전과 일정한 유기적 관련을 갖는다.

성리학은 농민 지위의 상승과 농민 반란의 빈번한 발생과 일정한 관계 하에서 전개, 성리학자들은 기()의 차별을 극복하여 지배계급인 사대부에 동참할 수 있다고 주장, 사회적 유동성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과거제 실시는 구품중정제의 폐단을 극복하고 신분제적 사회구조를 크게 바꾸었다. 이러한 구조 변화는 소농민층의 사회 지위 상승, 체제 이데올로기의 개방적· 진보적 전개와 관련,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서적의 대중적 보급, 소설과 연극 등 서민 문화의 출현과 발전, 수공업과 도시의 발달 등과도 관련을 갖고 진행되었다.

 

10-11세기 전후 중국에서 일어난 변화는 획기적이라 할만큼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 동아시아를 구성했던 한국과 베트남, 티베트, 일본 등 거의 모든 역사 공동체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동시에 일어났다.

고려는 관료제 사회로 전환, 월남은 중국의 식민지적 상태에서 벗어나 독자적 왕국을 건설, 티베트는 정교일치국가가 출현했고, 일본은 막부시대가 시작되었고, 장성 북쪽 오르도스지역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났다.

오르도스지역은 중국인과 유목민, 관중과 막부의 중간에 위치했기에 상징적 장벽의 의미가켰다. 양자 사이의 전쟁은 약탈과 방어의 의미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서북 초원지역에서 요동으로 대립축이 크게 전환되었다. 이들 요동세력은 흉노나 돌궐처럼 약탈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장성을 넘어가 정착해서 스스로 농경에 종사하거나 농경민을 지배하는, 정복국가 연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지금까지 중국 중심의 중국적 세계질서가 지속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거란은 요라는 국가를, 여진은 금이라는 국가를, 몽고는 원이라는 국가를, 만주는 청이라는 국가를 세우고 운영했다.

 

거란이 장성을 넘어간 것은 당 말부터 비롯되었다. 야율아보기가 요동을 통일하고 죽자, 그 아들 덕광이 중국지배를 실현, 부자관계를 맺고 책봉조공관계를 주도했다. 덕광 4년에 남침하여 진국(晉國)을 고쳐 대요국(大遼國)이라 하고 통합국가 건국. 연운 16주는 요가 멸망할 때까지 거란의 통치하에 있었다. 960년 송이 오대십국 상황을 종식 거란을 공격, 실패하여 거란의 태후는 숙모로 삼고, 10만량과 비단 20만필을 주기로 약속하며, 국서를 교환할 때 송을 남조로, 거란을 북조라 칭하였다.

 

12세기 초 거란이 쇠퇴하고 그 역사적 역할은 여진에 의해 계승되었다. 여진도 거란과 마찬가지로 수렵과 어로, 농경, 야철 등 다양한 산업에 종사했고, 이동과 정착 생활을 영위, 요동인의 특성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금의 시조는 함보라고 한다. 1115년 아골타는 국호를 대금이라 하고 연호를 수국으로 바꾸었고, 황제의 위에 올랐다. 1125년 요국을 멸망시키고, 송의 수도도 함락, 휘종과 흠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로 북송은 멸망하고 흠종의 아우 강왕이 남경하여 건염이라 개원하였는데, 남송의 고종이다. 남송의 조정은 악비 등 주전론자들과 진회 등 주화론자들이 서로 다투다가, 결국 굴욕적인 화의를 선택, “강토를 구획하여 회수 중류를 경계로 하고...은혜를 베풀어 번방이 되도록 허락해 주었으니(p242)...”서표를 받쳤다.

 

징기스칸은 1209년 서하를 공략, 1211년 금도 공격하여 1234년 패망시키고, 남송은 표문을 올려 신하를 자칭하며 항복을 청했지만 1279년에 잔멸시켰다.

몽고는 중국을 정복하기 전에 요동을 먼저 장악, 고려를 침략 1258년에 몽고에 항복, 티베트 고원까지 지배,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한 역사 공동체를 막강한 군사력으로 굴복, 안남과 일본만이 정복되지 않았다.

몽고 쿠빌라이 칸은 역사 공동체를 통합하여 지배할 새로운 국가 원을 세웠다. 몽원은 국인과 색목인, 한인, 남인을 각각 차등적으로 지배, 형법, 부역, 선거, 임관 등 여러 방면의 불평등이 법률로써 규정되었다. 또한 몽원의 지배체제 안에 포섭된 역사 공동체들을 각기 다른 양식을 통해 몽원 제국에 참여했다. 중국에는 10개의 행중서성이 설치되어 군현적 방식으로 직접 지배했다. 몽고의 발원지인 막북의 초원에는 영북행성이 설치되었다. 이곳은 훈구 중신들이 다스렸고, 하나의 거대한 군진을 이루고 있었다. 요동에는 요양행성이 설치, 몽고 황실의 중요한 봉지로 활용, 봉지내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독립왕국이었다. 운남행성은 원세조가 직접 복속시킨 곳으로 친왕이 주재하게 하고, 북인, 나라, 백이 등 여러 공동체들은 토착의 군장과 고속(古俗)에 의한 자치를 향유했다. 티베트는 명목상으로 몽고 황실의 봉지로 존재했고, 실제로는 토번인의 자치가 이루어졌다.

 

몽고가 세계질서를 주도했으나, 동아시아 제국의 역사 공동체적 성격과 위상이 각각 달랐기에 몽고와의 관계도 다르게 설정, 그 나라에 맞는 체제가 운영되어 고유한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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