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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국가(天下國家)』 1부 8~9장 김한규 2021.12.19. 바다사자
제1부 중국적 세계질서
제8장 청, 改土歸流
1619년 살이호 전쟁은 요동이 요동 세력에 의해 통일되었고 중국을 지배하는 상황이 한 번 더 재현되었다. 누르하치는 1621년 살이호성에서 요양으로, 1625년 심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1627년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청이라 했다(294). 만주는 여진을 주축으로 대청국을 구성한 요동인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여진인, 몽고인, 한국인, 중국인 등을 융합하여 생성된 ‘만주’라는 새로운 역사 공동체가 출현하게 되었다.
*살이호(사르흐) 전투1619: 명과 후금간의 가장 중요한 결전, 병력을 집중시켜 각개격파의 전술을 사용하여 5일안에 3로의 명군을 차례로 패퇴시키고 명군 십여만명을 섬멸했으며 대량의 군용물자를 획득했다. 이 전투 이후 공수가 역전된다. 명은 대거 쇠퇴하여 수비로 전환하게 되고 후금은 힘이 급증하여 공격으로 전환하게 된다.(고구려때 흑수말갈, 9세기에 여진, 16세기에 건주여진, 해서여진, 동해여진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누루하치는 건주여진에 속한다)
만주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팔기제는 입관 전에 이미 제도화되었다. 만력 42년(1614)에 정황,정백,정홍,정람의 4기, 43년에 양황,양백(295),양홍,양람의 4기 추가, 모든 기에는 우두머리를 두는데 고산액진(고사이어전)이라 부른다. 평소에는 농사 등 생산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군인이 된다.(매 기마다 7500명의 병사를 조직할 수 있다. 총6만명의 규모) 사회조직과 군사 조직이 일치된 여진 고유의 팔기 제도는 사회의 통일 뿐만 아니라 요동과 중국의 통합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1642년 한국팔기를 증편했고 후에 몽고팔기를 확대 편성하여 모두 400개의 우록이 확보되어 누루하치 때 병력의 배가 되었다
1627년 후방의 걱정거리를 제거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하여 강도화약을 맺고 형제의 나라임을 약속받았고 1636년 군신관계로 전환시켰다. 1635년 막남 몽고 차카르부를 멸망시켜 장성 이북까지 통합했다.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망하자(296)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청군을 맞이함으로써 청이 북경에 도읍하게 되자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이 다시 요동 방향으로 이동했다. 청의 통치구조는 몽원의 것과 흡사했다. 둘 다 요동의 역사 공동체였지만, 몽고는 동호계에서 파생되었고 만주는 숙신계의 전통을 이었다.
청초 오삼계, 상가희, 경중명 등 청을 도운 명조의 장수들은 운남, 복건, 광동(‘삼번’) 강남에 제후왕으로 포진하여 청의 안정적 중국 지배를 위협했다(297). 강희제는 산해관의 ‘철번’을 명했는데 이는 철폐를 의미했다. 오삼계는 거병했고(1673) 다른 두 번도 동참하여 ‘삼번의 난‘이라 불린 대규모의 장기 변란이 일어났는데 강희 20년(1681)에 진압되어 청의 장기적, 안정적 중국 지배라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한 대 이후 유지되어 온 중국의 군국 체제는 종식되었다. 또 하나의 복명 운동 세력으로 중국 동남 해안에서 활약한 정성공이 있었는데 대만을 근거지로 했다(299). 강희 22년(1683) 대만에 정난이 일어나자 대군을 보내 정가 왕조를 멸망시키고 복건성에 예속시켰다. 당시에는 대만의 대부분이 생번의 땅(원주민)으로 남아 있었지만 이 사건은 대만과 중국의 관계에서 획기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청의 중국 지배 방법은 중국적 방식과 만주 방식을 결합시키고 회유와 강압을 조화시키는 복합형이었다. 중국 역사상 전례없는 황제 권력을 강화시키는 체제를 성공시켰다(300). 중앙 정부는 내각과 군기처가 최고의 권력기관이었지만 황제 권력의 실현 수단이었을 뿐, 중앙과 지방의 모든 권력 기관은 황제에게 직속되어 있었다(301). 중국을 모두 18개의 성으로 나누고 그 아래 부와 현을 두었다. 총독은 1~3개 성의 민정과 군정으로 총괄하고 순무는 1개성에 배치했지만 각각 황제의 명을 직접 받아 집행했다. 제국 체제의 이념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것이었다. 이는 10세기 이후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진행된 발전과 유기적 관련이 있었고 요,금,원,청 등 국가가 연속으로 중국을 지배한 특수한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관맹상제‘라는 강온 양면의 방책을 구사했는데 명조 황릉에 제사하고 명조 후예를 봉작하며 장관직에 만인과 한인을 겸용했고 <사고전서>,<고금도서집성> 같은 대규모 편찬 사업을 벌여 중국 사대부의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회유책을 썼다. 저항하는 중국인은 잔혹하게 탄압하고 변발과 호복 착용 강요, 중국인이 편찬한 도서는 철저하게 검열하여 ’문자옥‘을 일으키는 등 강압책을 병용했는데 특히 지식인 지배층을 교묘하게 농락했다(302).
『淸史稿』는 外夷에 관한 3종의 열전이 있다. 토사 열전, 번부 열전, 속국 열전인데 청이 파악하는(304) 세계의 구조적 특성을 보여준다. 토사 열전에는 호광과 사정, 운남, 귀주, 광서 등 강저와 만월의 공동체에 관한 것이고 번부 열전은 막북, 막남, 막서 몽고와 서역의 위구르 제부 및 티베트를 담고 있다. 속국 열전은 조선과 유구, 월남, 미얀마 등 독립 국가들에 관한 것이다. 넷을 구분한 것은 대응 방식과 제도적 관계가 달랐으며 세계 질서에서 이들 4자가 점하는 위상이 각각 달랐음을 의미한다(305).
土司 체제는 강저와 만월계 공동체들에 대한 청의 지배 체제였다. 토관제라고 부린 토사제는 원대에 발생했지만 명대에 제도적으로 완비되어 크게 발전했고 청대에 이르러 파괴되었다. 옹정제 시기 ’개토귀류‘가 광범하게 진행되어 서남이 지역에서 토사 체제가 전면적으로 붕괴되었다(306). 토사 체제는 형식은 군현 체제이나 실제는 책봉-조공 체제라는 면에서 한의 변군 체제나 당대의 기미부주 체제와 본질적으로 같다. 청도 처음에는 토사 체제를 채택했으나 초기에 국한되었다(310). 토사의 강계를 엄격하게 획정하고 권한을 제한하여 유관(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으로 대체시켜나갔다. 청의 개토귀류는 반란이나 불법, 분쟁, 청원, 자원 등의 이유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원인을 제공하지 않는 토사는 철폐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내지를 우선으로, 저항하는 토사를 우선으로 서서히 진행되었다. 토사 체제의 소멸은 강저와 만월 역사공동체의 위상에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일차적 목적은 외이를 분리시켜(312) 통일 국가의 출현을 예방한다는 것이었으며 철저한 군현 체제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번부의 개념은 송화강 흑룡강 유역에서 서쪽으로 대막에서 금산까지, 정령과 선비 강역, 남으로 곤륭과 석지, 거수, 흑수까지를 말한다(313). 내번 몽고와 외번 몽고란 장성 이북 대막 이남의 막남 몽고와 대막 이북의 막북 칼카 몽고를 가리킨다. 둘은 역사적 배경의 차이로 제도적 관계가 달랐다. 내번 몽고에는 팔기제, 외번 몽고에서는 맹기제를 실시했다(314).
청해는 강인의 거주지였지만 청초 몽고 제부가 점유하고 있었다. 옹정 3년(1725)에 청해 오이라트 등이 칼카 몽고와 함께(315) 귀순하자 황하를 기준으로 티베트인은 그 이남에, 몽고인은 이북에 거주하도록 했다. 내외번 몽고에 장군과 도통을 설치하여 맹기를 감독, 통할, 절제하게 했다. 맹기제는 군사조직이자 행정단위였다(316). 맹은 몽고 고유의 맹회에서 기원했는데 5년에 한번씩 회맹했다. 약간의 기로 하나의 맹을 구성하고 맹에는 맹장이 있어 황제가 선임하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몽고의 한(칸)들이 맹장이 되었다. 이 체제로 인해 몽고 사회가 고유한 질서와 체제를 상실하지 않았다. 기는 몽고 고유의 아타크를 기초로 편제되었다. 맹장과 기장은 몽고의 왕공 귀족들이었고 기민과 기장의 관계는 기존의 지배질서를 그대로 반영했다. 몽고인의 집단 생활이 기와 맹 단위로 청의 장군과 도통, 대신 등에 의해 감독, 감시되었을 뿐이었다(317). 또 몽고 제부를 통제하기 위해 왕공들과 혼인을 맺고 높은 작으로 책봉했다. 외번 몽고의 왕공을 위해 친왕, 군왕, 패륵, 패자, 공, 태길, 탑포낭 등 7등급의 작위를 만들었는데 청 황제의 자제와 종실이 받는 작과 동일했다.
서역도 번부였는데(318) 신강이라 불리기도 했다. 새로 획득한 강역이라는 뜻이다. 이들의 고유한 습속을 존중하여 한인 지역은 중국식 주현제, 몽고인 거주지역은 맹기제, 위구르인의 거주지역에는 백극제를 실행했다. 천산 이남, 타림 분지 주변의 위구르인 지역은 이슬람교도이기에 회부라고 불렀는데 위구르인 왕공 귀족들을 백극으로 임용하여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했다. 백극이란 관리란 뜻이다(319).
요동도 토착 사회의 자치 조직을 통할하는 방식이 실행되었는데 3개 장군의 관할 범위로 3분했다. 요동의 중심은 성경이기에 성경장군이 길림장군, 흑룡강장군의 일을 아울러 장악했다. 군사뿐 아니라 민정까지 관할했지만 일반 민간의 일은 관장하지 않았다. 요동의 팔기 기인을 관리했다. 청은 요동에서 기와 민을 분치하여 민은 부주현이 관리하고 기는 장군과 도통 등이 관할하게 했는데 기인과 민인을 분리시켜 팔기의 순결성과 전투력을 온전하게 보전하기 위한 제도적 표현이었다(320).
티베트도 원제국 때와 동일하게 관리했다. 5세 달라이 라마는 청을 지원하는 대가로 정교 양 방면의 권위를 인정받았다(321). 청의 이 같은 조치는 티베트의 불교 특히 겔룩파의 황교를 독신하여 청의 국가 건설에 황교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사고 속국전에 수록된 나라는 조선, 유구, 월남이었다. 전형적인 책봉-조공 관계로서 조선과의 관계가 가장 전형적인 관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둘은 전쟁 관계로 시작되었는데 (324)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력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선과 청은 서로 국경선을 정하고 ’호시‘를 열었으며 서로 왕래를 엄격하게 통제했다(326).
조선처럼 엄격하게 경계를 지키면서 책봉과 조공의 예를 교환한 대표적인 국가는 안남이었다(326).
유구도 명대의 책봉-조공 관계를 성실하게 잘 유지했다. 작고 가난하여 중국을 믿고 의지했으나 그 자본은 일본에서 빌린 것이 많았다. 통용 화폐는 일본의 관영전이었고 판매 화물은 일본에서 운송해 온 것이 10중 8,9였다. 중국에 빈번하게 입공하면서도 공순하지만은 않았던 것은 그 나라가 처한 형세가 그러했기 때문이다.(일본의 실질적인 지배하에 있었고 일본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 유구를 정치적으로 병합하지 않고 있다가 19세기 후반에 병합하려했다. 유구는 청에 군사적 도움을 요구했으나 청은 그동안의 상황으로 실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보아 이를 묵살했다)(329).
조선과 월남, 유구 등은 국제사회의 동심원 가운데서 비슷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속국전에 있는 면전, 섬라, 남장, 소록, 고르카, 호환, 감거제 등 여러 나라가 입전되었는데 3국과 달리 외곽에 위치해 있었고 책봉-조공 관계도 일시적이며 불안정한 것이었다(330).
청사고의 ’속국‘전의 나라들은 어디까지나 편찬된 시기의 중국인의 의식을 표현하는 것일 뿐 청대 당시의 중국인이나 만주인의 의식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었다. 청대 당시의 자료들 가운데에서 ’속국‘이라 지칭된 나라들은 비교적 제한되어 있었다(333). 책봉을 받고 조공을 해온 나라들만을 가리켜 ’속국‘으로 간주했지만 청사고의 찬자는 ’조공‘만 해온 나라들도 모두 ’속국‘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중화주의적 의식의 잔재에 불과한 것이었다. 청인들은 ’속국‘과 동의어로 ’외번‘이라는(334) 말을 자주 사용했다. ’외번‘들은 모두 만청과 책봉과 조공을 교환한 ’봉공지국‘이었으며 청인으로부터 ’속국‘으로 간주되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335).
’번부’와 ’토사’의 차이는 번부가 북방 초원 유목민 공동체의 제부를 가리키고 토사는 중국 서남방의 강저와 만(337)월 공동체의 부락들을 지칭했다는 차이 외에도, 전자가 행성의 군현 체제 안에 내포되어 있었는데 반해 후자는 행성 체제의 외연에 놓여 있었다는 차이가 있었다(338).
제9장 청말, ‘天下의 해체’
두 차례에 걸친 아편 전쟁의 패전으로 청은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힘과 무게를 상실하게 되었고, 청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어온 동아시아 세계질서는 제국주의 세력의 침범으로 인해 신속하게 붕괴되었다. 토사 체제에 편입되어 있던 강저와 만월 계통 인구가 외부의 충격에 자극 받아 도처에서 청의 지배에 저항했고, 번부 체제에 들어 있던 몽고와 티베트가 이탈했으며, 청과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하면서 청의 ‘속국’으로 존속해온 유구와 미얀마, 월남, 조선 등이 차례로 자주와 독립을 선언했다.
가장 먼저 청이 상실한 ‘속국’은 유구였다. 광서 5년 1879년에 ‘일본은 유구를 침입하여 멸망시키(339)고 충승(오키나와) 현으로 만들고 그 왕과 세자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월남의 이탈은 1858년 프랑스가 사이공을 탈취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340). 건륭 14년1749년 프랑스 루이 15세가 통상을 도모했지만 월남국왕이 거절했다. 동치 원년 1862년 프랑스가 해군으로 침공해서 차린항을 빼앗고 강화했다. 광서9년 1883 월남이 프랑스에 항복하고 27조 조약을 체결했다. 1조가 중국은 월남의 일에 간여할 수 없다이고 그 외 정권과 이권을 모두 프랑스인에게 귀속시켰다(341).
월남과 접경하고 있던 라오스도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했다. 광서 11년 1885 라오스 땅이 메콩강의 중간에 위치해 있고 통상길로 삼기 위해 태국을 보호하게 되면서 프랑스로 들어갔다.
미얀마는 영국이 떼어갔다(342)
청의 ’속국‘ 중 태국은 스스로 자립하여 근대 국가로 거듭 태어났다(344). 청사고 찬자는 ’섬라는 영명한 군주가 계속 나와서 정치를 밝게 닦았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대국의 속지에 끼어있으면서도 독립을 지킬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중앙아시아의 호한도 광서 29년 1903에 러시아인이 멸망시켰다.
조선이 청의 ’속국‘ 그룹에서 이탈한 것은 ’속국‘론 시비로부터 비롯되었다. 강화도 12조 조약으로 일본에게 개항했고 1894년 청일전쟁으로 종식되었다. 광서 21년 1895년 3월에 시모노세케(마관) 조약 1조에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하고 공헌 등 전례는 모두 폐지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이 청의 ’속국‘이 된지 258년 만에 독립자주국이 되었다. 1897년 국호를 대한으로 고치고 광무라는 연호를 스스로 세우면서 왕이 황제를 자칭함으로써, 조선은 전통적 동아시아 세계로부터 명실상부하게 이탈했다(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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