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머리말
국가와 역사 공동체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국가 간의 관계와 역사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일치시키려는 태도는 동아시아 세계의 역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저해하는 가장 근본적 요소의 하나가 된다(10).
역사상 중국인들이 ‘변강’이라고 부른 곳은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 ‘중국’의 밖, 별개의 역사 공동체들을 가리킨다. 이들 ‘변강’은 중국과는 구별되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였으니 특히 요동과 티베트가 그러한 특성이 강하다(11).
현재의 상태를 기준으로 하여, 과거에 엄연히 존재한 독립적 역사 공동체를 부정하고 일개 ‘변강’으로만 차치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 시각으로만 세계를 보는 협소한 ‘애국주의’적 사고방식의 표현일뿐이다(13).
사료상의 사실을 역사적 지식으로 만드는 일은 역사가만의 고유한 몫이다. 이에는 세 가지 작업이 필요하다(16〜17).
첫째 | 이념과 실제 차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
둘째 | 개벌과 전체를 한 시가 안에 포섭해서 총합사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
셋째 | 실증적으로 복원된 사실은 이론의 틀 안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
동아시아 세계는 어떠한 역사 공동체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었으며 서로 어떤 유기적 관련을 갖고 그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는지를 총합적으로 정리하려는 것(18).
문제의 제기
오로지 현재의 관점에서 현재의 가치 기준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재단하면, 역사적 사실의 객관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25).
니시지마 사다오는 문화권으로서 완결되고 그 자체가 자율적 발전성을 가진 역사적 세계로서의 ‘동아시아 세계’개념을 처음으로 설정했다. 한국, 월남, 중국 등을 포함하는 전근대의 동아시아가 ‘자기 완결적 역사 구조’를 가진 독자적 ‘세계’였음을 전제하고(26) 이러한 세계는 중국에 기원을 둔 한자, 유교, 불교, 율령제 등 4대 문화적 요소를 공유하는 독자적 문화권일 뿐만 아니라 완결된 정치구조를 가진 정치권으로 보았다. 동아시아 세계는 ‘책봉 체제’의 구축을 통해 성립되었다. 중국 왕조와 주변 각 국가 사이에 맺어진 군신 관계의 체제 혹은 질서를 가리킨다(27).
니시지마의 책봉 체재론의 문제점들을 확인한 다음 이를 기초로 고대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구조적 특성에 대해 새롭고 발전된 형태의 이론적 틀에 접근하겠다.
용어의 역사적 개념이 정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
첫째,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범위가 지나치게 자의적인 ‘세계’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30) |
둘째, ‘책봉 체제’라는 말은 ‘책봉조공 체제’라는 말로 바꿔야 한다(31). |
셋째, 외신(外臣)이 점하는 위치에 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32). |
넷째, 고대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운영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설명했다(33). |
다섯째, 한대에 출현한 책봉 체제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각각이 다르게 나타난 특징적 측면을 무시하였다(36). |
여섯째,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와해와 변용을 명료하게 이루어져야 한다(38). |
일곱째, 역사 공동체와 국가의 개념을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 역사적 중국은 현재의 중국과 달리 다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중국을 일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적 접근이라 할 수 없다(39). 역사 공동체란 국가와는 달리 생활 공간과 문화, 역사적 경험과 역사의식 등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가리킨다. 동아시아 세계는 수많은 역사공동체들로 구성되었던 만큼 그 문화적 성분도 매우 다양했다(40). |
동아시아 세계질서에 참여하는 각국의 위상이 서로 달랐고 외교 체제도 다원적으로 운영되었다. 근접 지역은 내속되었고 먼 지역은 외신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중간 지역은 군현제적 형식과 봉건제적 내용을 갖춘 절충적 체제 안에 편입되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첩적 동심원을 그리면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외곽에는 중국의 국가와 대등하고 독립적인 국인 인적국도 있었다(42)
다양한 운영 체제(43)
1양식 | 비중국적 요소들은 중국 국가의 군현 체제로 편입되어 편호제민화됨 | 책봉조공 체제에 의해 규정됨(형식은 군현제, 실제는 봉건제적 지배 체제), 형식과 실제가 괴리된 체제에 의해 규정됨(형식은 봉건제적 지배 체제이나 실제로는 독립된 상태) |
2양식 | 변군이나 기미부주 체제로 편입됨(일반적) | |
3양식 | 외신으로 책봉됨(일반적) | |
4양식 | 인적국으로서 화친 체제를 유지함 |
제1부 중국적 세계질서
제3장 진(秦)과 한(漢), 화친(和親)과 내속(內屬)
진왕 정이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뒤 ‘황제’라는 칭호가 출현했다. 이는 동아시아사 상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국의 이념을 선포하는 정치적 의미를 가지며 새로운 국가 체제의 출현이었다. ‘제’란 ‘상국(은)’인들이 섬긴 최고의 귀신이다. 상은 황하 중류 중원에 분포한 수많은 성읍 국가들로 구성된 특정한 국제 사회의 중심 국가 즉 ‘중국’이었기 때문에 각 성읍 국가의 여러 신들을 함께 봉숭했는데 제는 지상의 위계와 천상의 위계가 상응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주는 그 국제적 위상을 계승하게 되자 주인의 신이 제를 대신했는데 이것은 ‘천’이었다. 이로써 ‘천명’ 관념이 발생했다. 천은 천하를 통치하기 위해 유덕한 인물을 골라 천자를 세우라는 명령인 ‘천명’을 내리는데 천명을 받은 천자가 실덕할 때 다른 이로 천명이 바뀐다. 이를 ‘혁명’이라 한다. 천명 관념을 이론화한 맹자는 천명의 소재는 민의에 있다고 하여 민본사상을 혁명론의 바탕 위에서 체계화했다(80). 그런데 ‘제’라는 신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천과 같이 병존시킴으로써 제가 곧 천이라는 관념을 유지했다. 황제란 제 즉 천을 자칭함이며 민의 그 자체를 뜻하는 천명의 제약을 받는 천자 권력의 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절대 권력 그 자체를 창출했음을 뜻한다.
황제 절대 권력은 민의 직접적·개별적 지배 체제인 군현 체제에 의해 실현되며 관료제에 의해 직접 관철된다. 천하를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에는 수와 위, 감을 두었다. 진시황제는 전 중국을 36개의 군으로 재편성함으로써 중국을 일원적으로 통치할 수 있게 되었으나 중국을 제외한 세계의 다른 부분이 제외될 수 없으므로 황제 권력을 중국 밖에까지 확대 실현하여 황제 개념의 명분과 실제를 일치시키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다(81).
한도 진의 황체 칭호를 계승했다. 그러나 전 세계를 일원적으로 지배할 능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도 군현적으로 지배하지 못했다. 황제는 관중과 그 주변 15개 군만을 보유했을 뿐 대부분은 9개 제후왕국에 의해 분할 점유되었고 제휴는 독자적인 정부와 군대, 재정수입을 보유하면서 한과 대립하는 별개의 국가를 구성하고 있었다(83)
한 무제 시기에 진행된 중국 중심의 일원적 세계질서의 구축은 한과 흉노의 화친 관계를 극복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87). 한과 흉노의 ‘화친지약’은 공주의 출가, 세폐의 공급, 형제의 맹약, 변경 불침 등 4개 조로 구성되었는데 핵심은 중국의 물자를 정기적으로 공급하는 대가로 흉노는 한의 변경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힘의 열세에 놓여 있던 한이 흉노에 ‘봉공’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88). 당시 한인들은 흉노와의 화친을 수치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화친은 무제 시기에 이르러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 적극적으로 극복되었다(89).
흉노 선우를 마읍으로 유인하여 제거하려 한 마읍사건은 ‘문경지치’로 축적된 한의 국력과 회복된 한인의 자신감이었다. 마읍 사건 이후 한은 대규모의 원정군을 편성하여 여러 차례 흉노 선우를 공격했다. 특히 하서의 탈취는 한과 흉노의 군사적 균형을 깨뜨리는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90). 하서 4군의 설치는 흉노와 강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서역과 통하는 하서회랑을 여는 효과를 가져와서 흉노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하던 서역 제국을 장악함으로써 흉노가 서서히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무제는 치세 말년에 ‘윤대의 조’를 발포하여 40년을 끌어온 흉노와의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런데 오랜 전란으로 극도로 피폐해진 흉노는 스스로 붕괴되어 ‘5선우’ 시대라는 대분열기를 맞이했고 치열한 내전의 결과 남부 흉노가 한에 스스로 굴복하는 의외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흉노를 굴복시킨 후 남원과 조선도 제압했다. 두 나라는 진 말, 한 초의 혼란기에 중국인 이주민, 혹은 유망민을 세력 기반으로 하여 건립되었다. 조선왕 만은 원래 연인이었는데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가자 만은 망명하여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상투 틀고 만이의 옷을 입고 동쪽을 도망쳐서 패수를 건너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만이와 옛 연, 제의 망명자들을 역속하여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을 정했다. 두 국가를 구성한 인구의 대부분은 토착 원주민이었으며 이들을 대표하는 것이 상권(相權)이었다(93).
조선에는 복수의 상이 존재했는데 맥인의 원 조선 외에도 예인의 다른 정치 집단을 함게 통합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후에 예계의 진번, 임둔, 옥저 등을 통합 지배했다. 남원과 조선은 중국계 왕권과 토착 상권이 타협적으로 결합된 독특한 권력 구조를 갖고 있었다(94).
남월왕 조타는 한 고제와 조약을 맺어 ‘외신’이 되기를 약속하고 ‘남원왕’으로 책봉받아 조공했다. 조선왕 위만도 한 고제 유방과 조약을 맺어 ‘외신’이 되었다. 위만 조선 역시 ‘조선왕’으로 책봉을 받고 조공하는 관계로 진입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양자의 실제 관계는 대등하고 독립적인 관계였다. 이로 인해 ‘화친했다’고 표현했다. ‘외신지약’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관시의 개통을 통한 중국 물자의 공급이었으며 그 결과는 남월과 조선 국력의 비약적 발전이었다. 철기의 대규모 수입(95)은 철제 무기와 농기구로서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적 기초를 확보할 수 있게 했다. 양국이 강대한 통합국가로 발전하는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문제 시기 이후 양국은 한을 위협할 만한 강국으로 성장했다. 무제 시기에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96).
남월이 국가적 자립성을 제고하면서 한과 힐항했을 때 조선도 한과의 외교적 분쟁을 피하지 않았다(97). 한은 대병을 일으켜 기원전 112년에 남월을 침공, 멸망시키고 B.C108년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등 4군을 만들었다(98).
패망의 과정은 양국이 비슷했다. 상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한에 투항하고 왕을 죽여 내항한 ‘적전내홍’으로서 양국의 권력 구조가 모두 중국계 왕권과 토착 원주민계 상권이 타협적으로 결합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들 상들은 한에 투항 할 때 중국계 왕권과의 타협적 결합이 재현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현실에서는 한의 군현적 지배로 나타났기 때문에 모반을 다시 꾀했다.
무제 시기 서남이의 제국도 군사적으로 공격하여 군현을 설치했다. 강저 역사공동체를 일컫는 것으로 대부분 티베트 고원의 동남부 뿌리에 위치해 있어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수십의 군소 국가로 분립되어 있었다(99). 인구나 거주지, 물산 때문이 아니라 서남이가 갖는 전략적 가치 때문이었다. 첫째, 남월 경략과(100) 관련된 전략적 가치가 유발하여 군을 설치했는데 실제 효력이 없었다. 공격하기도 전에 남월이 평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서역 경략과 관련되어 있었다. 목표를 실현하지 못했으나 이 과정을 통해 서남이의 존재가 한인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일원적 세계 지배에서 제외될 수는 없었다(102). 모두 7개의 군이 새로 설치되어 무제 시대에 호, 월, 매, 예, 강, 저 등 주변의 여러 역사 공동체에 건립된 국가들을 군사적으로 공략하여 그 영토와 인민을 빼앗고 수십 개의 변군을 설치했다. 31개의 변군이 무제 시기에 설치되었는데 9개는 흉노, 10개는 월, 5개는 요동, 7개는 서남이 지역에 설치되었다. 그 후 지속적으로 증설되어 막북의 초원 유목 지역과 티베트 고원, 옥문관 밖의 서역 등을 제외한 동아시아 전 지역에 한의 군현이 설치되었다(103). 그러나 이는 당시 한인이 갖고 있던 역량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지속적인 전쟁으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황실 재정을 국가 재정으로 돌리기도 하고 오수전 등 화폐를 남발하고, 염철주 등 기간 산업 전매, 균수 평준 등 경제 정책을 통해 물자 유통까지 국가가 장악했으며 재산세를 부과하고 방위성금을 독촉하기도 했으나 모두 임시 방편일 뿐이었고(104) 무제 말년에 물가가 폭등하고 재정이 파탄에 빠졌으며 대규모 도적이 일어나 체제가 붕괴되기 직전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105).
‘윤대의 조’는 무제 말기 한인들의 깊은 반성과 새로운 결의가 표현되어 있었다. B.C881년 소제 때 ‘염철회의’는 무제 시대를 재평가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노력의 적극적인 표현이었다(106). 그 배경에는 정치적 권력투쟁이 있었다. 내조와 외조의 권력투쟁인데 내조란 무제가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중서, 상서, 시중 등 비서진으로 구성한 정책 심의 조직으로 승상을 영수로 한 정부인 외조와 대응했다. 염철회의가 끝난 뒤 외조는 권력 투쟁에서 패퇴하여 형해화했다(107). 염철회의는 권력투쟁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의 한 표현이었다. 무제 시기와 문제 시기의 교묘한 절충과 타협이었는데 염철주 전매 정책을 전면적으로 폐기하지 않고 부분적 조정으로 결론지어졌듯이, 국정 전반의 현안이 대부분 타협적 결론으로 귀결되었다(108). 유법 투쟁의 경우(109) 유가로써 법가를 분식하는 형태로 유가와 법가라는 두 이질적 사상 체계가 타협적으로 결합하여 한대적 체제 이념으로 새로 조직된 것이다.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 운영 체제도 한인의 현실적 역량에 맞추어 재조정되었다.
한대의 변군은 중국에 설치된 내군과 달리 군현 형식과 운영의 실제가 심각하게 괴리되어 있었다. 변군 안에 군현 체제의 모순되는 봉건 왕국이 내포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두세, 요역, 병역의 수취도 못했고, 한의 법률도 적용되지 못하고 원주민의 고유한 습속과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110). 군현 형식 안에 봉건제 내포되는 ‘변군체제’는 염철회의 이후 중국의 사방 변경에서 광범하게 발견된다(111).
전한 시대에 고구려와 한이 책봉조공 관계에 있었다(114). 부여도 한의 변군 체제 안에서 한과 책봉조공 관계를 갖고 있었다. 세역을 수취하지도 못하고 한법을 시행할 수도 없다면, 그곳은 독립된 정치 실체이므로 변군 체제 하의 정치 집단이 한과 책봉조공 관계를 가진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116).
중국인들은 언제나 변군, 변민, 북변, 변경, 사경 등을 중국의 상대 개념으로 간주했다. 변군이 아무리 군현이라 해도 내용이 이적이기 때문에 결코 ‘중국’으로 인식될 수 없었으며 그 통치 방식도 내군, 즉 중국의 그것과 같을 수 없었다(117). 이념과 현실이 현저히 괴리된 체제를 선택한 것은 염철회의 이후 한인들이 ‘기미지의’라는 독특한 외교 원칙을 정립한 것과 관계가 깊다. 소나 말의 고삐를 잡듯이 이적을 통제한다는 뜻으로(118) 염철회의 이후 흉노가 입조해 올 당시 그 대책을 논의할 때부터 중국이 이적에 대응하는 기본 원리의 하나로 정립되었다(119). 기미지의는 매우 미묘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반고의 기미론에 의하며 ‘기미의 뜻’의 요체는 ’사곡재피‘ 즉 중국과 이적의 관계를 상대방이 선택하고 결정하게 함으로(120)써 중국의 책임을 철저하게 절약하는데 있으니 ’그들이 오면 경계하여 대비하고 그들이 가면 방비하여 지킨다‘는 것이 그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기미부절이이‘의 ’이이(而已)‘에 있다. 고삐를 잡고서 관계를 끊지 않을 뿐 그 이상의 적극적인 조치는 취하는 않는다는 뜻이다. 화이 분별 의식에 근거하여 중국과 이적의 혼일을 거부하고 중국의 안정을 지향하는 한인 특유의 묘책이었다(121).
한대의 각종 체제들은 융합을 통한 모순의 극복에서 출발했음에도 모순이 미봉된 경우가 많았고 한 체제의 모순이 다른 체제의 모순과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대 중국적 세계 질서의 와해는 실로 전면적이요 총체적이었다(122).
대토지 소유제의 진행으로 소농민이 몰락하고 호족이 소농민을 사역하자 한 제국의 직접·개별적 인민 지배를 직접적으로 방해했으니 호족은 국가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존재였다. 무제 시기 이런 호족 집단의 약화를 위해 다양한 정책들이 전개되었다(123). 왕망의 신은 중국 안의 대초지 소유제를 부정하고 토지를 소농에게 균분하여 전 인민을 제민화하려 한 것과 중국 밖의 각 국 군장을 신속시켜 일원적 세계 질서를 정립하려 한 것은 모두 제국의 이상을 현실에 실현시키려는 노력이었지만 염철회의를 전후한 역사적 흐름에 대한 반동적인 행동이었다(129).
후한의 건립은 호족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토지 소유제는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광범하게 전개되어(130) 소농 경제의 몰락과 파탄이 뒤를 이었다. 유민의 증가를 저지할 수 없었고 유민이 유적화하여 한말에 ’황건적‘이라는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황건 농민 반란은 대토지 소유제의(131) 전개가 초래한 계급적 모순의 표출이기도 했지만 유교가 그 취약성을 적극적으로 노출시킨 사건이기도 했다(132).
민간신앙이 대규모 농민반란들을 지도(134)하게 된 까닭은 유교가 더 이상 체제 교학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주의화, 형식주의화의 모순을 노정하고 있었다. 전자는 동중서 이후 유학이 재이 사상과 참위 사상을 수용했기 때문이며 후자는 무제 시기부터 개시된 금고문 논쟁으로 인해 유학자들의 학문적 역량이 경전의 훈고에만 매몰되었기 때문이다(135). 한 대 유학이 본래의 모습과 생명력을 상실한 것은 한 국가의 역량을 현저히 저하시켰고 한 말의 두 차례 당고 사건은 치명적이었다. 당고란 당인들을 금고에 처했다는 뜻이고 ’당‘이란 황제 지배 체제 하에서는 존재가 용납되지 않는 조직적 집단을 말한다. 금고는 피선거권을 박탈하여 무재나 효렴 등을 통해 관직에 오를 수 없게 하는 조처를 말한다(140). 당고 사건은 황건 농민 반란과 함께 한 제국의 명맥을 끊은 살수가 되었지만 사회경제적 성격은 서로 달랐다. 당고 주인공은 모두 호족의 기반이었으나 황건은 적빈 소농민 출신이었다. 황제(142) 권력은 호족과 소농민이라는 상호 모순된 두 계층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으나 한 말에 그 기반을 모두 상실하게 된 것이다(143). 변군 체제도 당연히 와해되었다. 서방의 변군들이 가장 먼저 무너졌다(144).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장이 광역화하자 도처에서 군벌이 발생하여 중국의 분열이 전개되었다. 군벌이란 전쟁이 장기화한 전장에서 야전군 사령관이 군대를 사병화하여 군 통수권뿐만 아니라 지역의 행정권과 재정권까지 장악하고 중앙 정부의 임면권을 배척하여 세습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사실상 독립된 왕국을 형성하여 국가를 분열시킨 역사적 실체를 말한다(146).
제4장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막부(幕府) 체제
삼국의 변방 개척은 ’중국‘의 공간적 범주를 확장시키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이적에 의한 중국의 침삭 과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151).
남흉노의 ’입거’는 연변8군의 회복이 아니라 사실상 연변 8군의 상실을 의미했다(152). 흉노인이 중국의 북변으로 들어가 중국인과 섞여 사는 상황은 당시 중국인의 공포를 유발했다(153). 이적이 침공이 아니라 내란의 형식으로 중국을 전복시킨 것이 오호십육국의 난이다. 오호의 난은 역시 내사 흉노인에 의해 개시되었다(156)
135년간에 걸친 5호 16국의 동란을 종식시키는 역사적 과업은 북위를 세운 선비 탁발부였다(163). 북위는 중국 전통적 체제를 재구축하려 노력했지만 초기에 5호 16국적 성격을 완전히 탈각하지 못하여 많은 국가적 모순을 보였다(164). 효문제 탁발홍 시기에 이르러 보다 철저하게 중국화의 길로 들어셨다.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의복의 제도를 바꾸었으며 북속의 언어를 조정에서 사용할 수 없게 하고(165) 북인의 성을 상세하게 정하게 했다. 황실의 성은 원씨로 바꾸고 기타 선비인의 성도 모두 한성으로 바꾸었다. 주거와 복식, 언어, 성씨, 혈통 등 광범위한 방면에서 선비와 중국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기도했던 것이다. 중국식 제국 체제를 중원에서 복원하는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토지의 균등한 분배와 정액세의 부과로 제민을 창출했다(166). 이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관료제의 하부 조직이 원활하게 가동되도록(167) 삼장제라는 자치 조직을 활용하여 황제의 직접적·개별적 인신 지배를 철저하게 관철하려 했다. 그러나 한화정책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168). 수구 세력은 육진의 반란을 주도하여 북위를 양분시켰다. 이는 선비와 중국이라는 별개의 두 역사 공동체가 북위하는 한 국가 체제 안에서 공존하면서 상호 융합을 시도했지만 결국은 공동체적 정체성의 완강한 저항에 의해 국가 분열로 가게 된 사건이었다. 북위가 동서로 쪼개진 뒤, 동위와 서위를 각각 멸망시키고 북제와 북주를 건립한 세력은 선비화한 중국인과 중국화한 선비인이었다. 북제를 세(169)운 고환은 원래 발해인이었으나 할아버지 때부터 선비에 동화되었다. 북제의 선양을 받아 수를 세운 양견과 수를 이어 중국을 재통일한 당의 이연도 육진 출신이었다. 북제, 북주, 수, 당 등 역대 왕조가 누대에 걸쳐 육진, 특히 무천진에 살면서 선비에 동화된 ‘중국인’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것은 5호 16국의 동란 이래로 중원에서 장기간 전개된 화이 융합이 이른바 위진남북조 시기 중국사 상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를 이루고 있었음을 의미한다(170).
강남에선 ‘중국’의 주도 하에 화이의 융합이 전개되었다. 동진, 송, 제, 양, 진 등 육조는 모두 ‘중국’ 밖에서 중국인이 건립한 국가였지만 화이의 융합을 끊임없이 시도했다(171).
남북조 시기에도 중국 안에서 실시된 지배 체제를 중국 밖에까지 확연하여 외형상으로는 전 세계가 중국 국가의 황제에 의해 일원적으로 지배받는 형태를 취하려 했는데 이 시기에 중국 안에서 실현된 지배 체제는 곧 막부 체제였다. 막부에 의한 지배 체제는 이미 전한 중기, 무제 시기 이후부터 보정의 한 양식을 개시되었고 남북조 시대의 특징적 지배 체제를 구성했다. 보정이란 국가 권력이 황제에 의해 장악되지 않고 특정한 장군에게로 일시 이동하는 정치적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왕조를 전환시킬 위험성은 언제나 내포하고 있었다. 보정 장군이 귀정을 거부함으로써 왕조가 교체되는 전통이 세워졌다(173).
국가 권력의 분화로 인해 국가 안에는 복수의 장군들이 막부를 개설하여 성장시키며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최강의 막부 부주는 보정 장군에 오르고 그의 막부는 조정의 역할을 대행했는데 이 막부를 패부라 불렀다. 보정 장군은 예외 없이 영상서사 혹은 녹상서사로서 황제의 역할을 대행하고 도독중외제군사로서 전국의 군 지휘권을 총괄함으로써 황제와 같은 예우를 받는 구석이라는 특전을 받게 되는데 보정 장군이 구석을 받을 때는 이미 기존의 왕조는 멸망의 수순을 밟게 된다. 이 과정은 반드시 선양의 형식을 취한다(174).
불안정하고 미약한 황제 권력은 보정 제도로써 보완되었고 끊임없는 전쟁은 장군 제도로써 대응했다. 대토지 소유자인 호족과 자립적 귀족인 청유, 현학과 명절로써 여론의 높은 지지를 받은 명 등은 막부 제도를 통해 제도적으로 통합할 수도 있었다. 분열시기였지만 진·한 이래 황제국가의 전통은 명분한 계속 잇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지배 체제를 중국 밖에까지 확연함으로써 일원적 지배를 형식적으로나마 유지하고자 했다(175).
고구려와 백제, 왜 등이 중국의 남북조에 사신을 보낼 때 막료의 직명을 띠고 가게 한 까닭은 이들 국가의 군주가 당시 남북조의 황제로부터 장군으로 책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176)
중국 밖의 여러 ‘이적 ’국가들의 군장들은 중국 황제로부터 장군으로 책봉 받음으로써 일정한 국제적 위상과 국내의 정치적 지위를 국제사회에서 공인 받을 수 있었고, 중국 황제는 여러 이적 국가들을 의제적 막부 체제 안으로 포함시킴으로써 형식적으로나마 전 세계에 대한 일원적 지배를 관철하려 했다(178). 물론 중국 밖으로 확연될 때 일률적·직선적으로 확장된 것은 아니다(179).
막부 체제를 통해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운용되었던 시기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국한되었다. 분산된 다수의 정치권력을 하나의 국가 체제 안으로 통합하기 위한 의미가 있었던 막부체제가 수, 당 통일 시기에 이르러 사실상 소멸되었기 때문이다(180).
'세미나 발제문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하국가(天下國家)』1부 8~9장 김한규 2021.12.19. 바다사자 (0) | 2021.12.19 |
---|---|
2021.10.03. 철학사 2.5기세미나. 『천하국가』1부 5-6장 발제. 풍경 (0) | 2021.10.03 |
『천하국가』1. 2장 발제 (0) | 2021.07.29 |
서양음악사(그라우트) 7판상 p37~42 / 헬레니즘 시대 9월29일(일) / 화니짱 (0) | 2019.09.29 |
서양미술사(곰브리치) p108~115 / 헬레니즘 시대 9월29일(일) / 화니짱 (0) | 2019.09.29 |
- Total
- Today
- Yesterday
- 프롤레타리아 독재
- 개인심리
- 로마사논고
- 레비스트로스
- 집단심리
- 공화국
- virtù
- 옥중수고이전
- 딘애치슨
- 이탈리아공산당
- 생산관계
- 스피노자
- 이데올로기
- 브루스커밍스
- 알튀세르
- 그람시
- 신학정치론
- 안토니오그람시
- 검은 소
- 루이 알튀세르
- 생산양식
- 한국전쟁의기원
- 의식과사회
- 마키아벨리
- 무엇을할것인가
- 옥중수고
- 계급투쟁
- 야생의사고
- 헤게모니
- 루이알튀세르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