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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국가(天下國家)21장 김한규 2021.12.26. 바다사자

 

2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사이

 

오래 전부터 중국인들은 세계가 오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방이란 중국사이를 합한 것이다. 동방은 이, 남방은 만, 서방은 융, 북방은 적이라고 했는데 이외 훨씬 더 많은 역사 공동체들이 병존하고 있었음에도 가장 대표적인 역사 공동체로 이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350). 이들 역사 공동체의 정체성은 지리적 범주나 혈통적 차별성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문화적 특성이다(351).

역사 공동체는 국가의 개념과는 구별되는 역사적 실체였다. 특정한 공간에서 동질적 문화를 공유하고 역사를 함께 한 공동체였다. 한 역사 공동체가 여러 국가를 건립하기도 하고 한 국가가 여러 역사 공동체를 통합, 지배하기도 했다(352). 복수의 역사 공동체가 한 국가에 의해 통합, 지배되는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면 융합의 과정을 통해 개별 역사 공동체의 정체성은 서서히 소멸된다. 대표적인 예가 였는데 동이로도 불린 이 공동체는 신석기 시대부터 독자적이고 높은 수준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앙소 문화와 같은 시기에 산동의 대문구 문화가 산동 용산 문화를 경유하여 동이 문화로 이어졌다. 서주 시기 회이와 서융 등 동이 역사 공동체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정치적으로도 강대한 역량을 갖추어 황화 중류 유역 세력과 빈번하게 충돌, 갈등했다(353). 진 통일 이후 동이는 진인의 일부로 편입되었으며 중국과 융합하여 역사 공동체적 정체성을 상실했다. 진한 이후 동이는 중국의 동쪽 요동과 한국, 왜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중국사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역사 체계를 구축해온 역사 공동체는 한국과 월남, 몽고, 일본이었다. 장구한 기간 독자적 역사 공동체로 존속해 오다가 최근에 중국에 병합된 역사 공동체들은 초원 유목 공동체와 요동, 서역, 티베트, 강저, 만월, 대만 등이다. 이들은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하였다.

중국은 역사적 경험과 역사 의식을 공유하는 공동체 즉 역사(354) 공동체의 명칭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가의 이름이다. 둘은 개념상의 차이 외에도 범주의 간격도 존재한다. 현재의 중국인에게는 변강에 지나지 않겠지만 전통시대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중국과 엄연히 구별되는 독립된 역사 공동체들이었다. ’변강의 역사적 의미를 되찾기 위해 초원 유목 공동체와 요동, 서역, 티베트, 강저, 만월, 대만 등의 역사적 정체성을 하나하나 확인할 것이다(355).

중화인민공화국밖의 역사 공동체들과 안의 역사 공동체들 사이의 차이란 오직 현재 독립 국가를 보전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의 차이일 뿐이다(356).

 

1장 초원 유목 역사 공동체

중국과 유목 공동체는 만리장성을 기점으로 나뉘어져, 농경 사회와 유목 사회를 대표하면서 서로 힐항했다. 장성 이북의 초원 유목 사회는 북적이라 총칭되던 유목 제부가 흉노라는 통일 제국으로 통합되고 나아가서 돌궐, 회흘 등 철륵의 제부가 차례로 초원 유목 사회를 통일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흉노와 돌궐, 회흘 등이 동일한 혈통 집단, 혹은 민족에 의해 건립된 국가였는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유동성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 광대한 초원에 분산되어 생활하는 특수한 조건으로 인해 혈동의 계보를 추적하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357). 단지 역사적 조건에 따라 고급한 국가를 건립하여 장성 이남의 중국과 힐항하면서 독자적인 역사 공동체를 구성,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다.

 

북방 초원의 공간적 범주는 실로 광범하다. 남북으로는 장성에서 사막을 경유하여 막북(고비사막 이북)의 남시베리아까지, 동서로는 대흥안령 서록에서 천산 이북의 중앙 아시아까지 전개되었다. 그러나 중심은 언제나 오르도스 북쪽과 고비 사막 남북인 막남과 막북에 위치하여 오르도스를 가운데에 놓고 중국의 중심인 관중과 대치했다.

북방지명도

오르도스 지역

 

송, 요, 연운16주

10세기에 심각한 변화가 초래되었다. 대흥안령 이동의 요동이 동아시아 세계의 새로운 중심이 된다. 연운 16주를 중심으로 한 중국 산동과 요동의 새로운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요동에서 발생한 국가가 중원과 초원까지 통합, 지배하게 되어 장성 북방의 광활한 초원은 요동인에 의해 장악되고 기존의 공동체 성원들이 서방으로 밀려나거나 새로운 공동체의 성원으로 융합, 흡수되었다. 거란, 여진, 몽고, 만주 등이 그들이다(358).

 

1. 북적(北狄)

초원 유목민의 신석기 문화는 세석시 문화와 부하 문화가 있었다. 작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기가 대표하는 세석기 문화는 내몽고와 흑룡강, 길림, 오녕, 하북, 산서, 영하, 서역과 티베트 등에 광범하게 분포했다. 수렵과 목축을 주된 산업으로 영위했다. 타제 석기와 흑색의 소박한 도기를 사용한 부하 문화인은 주로 내몽고 서랍목륜하 이북에 거주하면서 유목에 종사했다. 청동기 문화로는 오르도스 문화가 있었다(359).

춘추 시대 칭호는 융과 적이었다. 융은 북융‘ ’산융으로 적은 적적‘ ’백적장적등으로도 쓰였다. 북융은 제하와 전쟁 혹은(360) 회맹 관계에 있었다. 산융은 산악 지역의 융인으로 북융의 일부로 간주되다가, 전국 이후에는 동호로 불려졌다. 춘추 시대의 백적, 적적, 장적 등은 남하하여 제하의 분포 지역에 섞여 살았다. 춘추 후기에 에 의해 적적이 멸망된 후 중원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산서, 하북, 섬서 등의 북부와 그 이북 지역으로 되돌아갔다. 복장은 피발 좌임하고, 혹은 우의를 입고 혹은 갈건(갈포로 만든 두건)을 쓰고 가죽옷을 입었다고 한다. 주거는 혈거혹은 여장에서 살았다. 용맹하여 항상 싸우기를 좋아했(361). 개를 기르는데 유목, 수렵했기 때문이다

전국 시대의 공동체로는 호, 동호, , 임호, 누번, 흉노, 융 등의 명칭이 있었다. 각각 계곡에 분산해 살면서 스스로 군장을 갖고 백여 융이 모이기도 했지만 서로 통일하지는 못했다. 임호, 누번, 동호는 역사에서 三胡라고 불렸는데 전국 시대 연, 등의 주요 적국이었다. 적인 국가와 부락들은 전국 시대에 멸망하거나 땅을 뺏기고 북으로 옮겨갔다(362).

 

2. 흉노(匈奴)

 

흉노 영역

전국시대 말부터 등장한다. 북적의 일부로서 趙國의 북(362)방에 위치하면서 빈번하게 침범했다. 남북조 초기까지 7세기 동안 존속했다(263). 주요 거주 지역은 신석기 시대에는 세석기 분포 지역이고 청동기 시대에는 하가점 상층 문화와 오르도스 문화권이었다. 하가점 상층 문화의 시기는 서주와 춘추 시기에 해당하고 오르도스 문화 시기는 상말에서 춘추 시대까지 해당했다. 세 문화는 모두 초원에서 상호 계승 관계를 가지면서 발전했다. 전국 시대에 적과 융 외 호라는 칭호가 사(364)용되기 시작했다. 호는 처음에는 삼호를 가리켰지만 뒤에 북방 유목민의 범칭으로 사용되었다. 전국시대부터 진한 시대에는 호와 흉노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흉노는 한대 이후 주로 막북에서 활동했다(365). 이란 으로 쓰기도 하는데 지금의 내몽고와 외몽고 사이의 고비사막 지대를 가리킨다. 두 지역의 자연조건 차이는 매우 크다. 막남은 생존에 유리하여 흉노의 원유가 되었으나 뒤에 북해와 그 주위의 정령 등을 복속시키면서 멀리 막북까지 이르렀다. 가축을 따라 방목하여 옮겨 다니고 장막으로 만든 집에서 사는 것 등 전형적인 유목 사회의 하나였다(367). 의식주 생활은 모두 유목 생활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368). 흉노의 사회 경제와 생산 단위는 이었다. 부모와 자녀가 1개 궁려를 단위로 1, 1낙을 이루었던 것이다. 대체로 1가는 7인 정도로 구성되었다. 가축 등 주요 생산 자료의 소유는 각 가를 단위로 이뤄졌으나 목장에는 일정한 범위의 집체가 점유했고 최고의 소유권은 선우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선우는 직접 관리하는 토지를 제외한 나머지를 왕, 장 등에게 분봉해 주었다. 좌우현왕, 좌우곡려왕 등을 두었고 항상 태자를 좌도기왕으로 삼았으며 여러 대신은 모두 관직을 세습했다. 좌방의 왕장은 동방에 위치하여 상곡군과 그(369) 이동의 맞은평에 있어 예맥과 조선과 접했고 우방의 왕장은 서방에 위치하여 상군과 이서의 맞은편에 있어 월지, 저강과 접했다. 흉노는 일종의 봉건제로 유지되었다.

선우의 성은 연제씨이고 탱려고도선우라고 부른다. 천을 가리켜 탱려라 하고 아들은 고도라 하며 선우란 광대한 모양을 가리키는 말로서 하늘을 닮아서 광대함을 말한다. 이성에는 호연씨, 수복씨, 구림씨, 난씨 등이 있어 이들 4성을 국중 명족으로 여기는데 항상 선우와 혼인한다(370).

24장은 모두 병력을 통솔하고 일정한 영지를 보유하면서 지위를 세습하여 상당한 독립성을 갖고 선우와 신속 관계를 갖는다. 큰 전쟁이나 선우 계승 등 국가의 대사가 있으면 선우가 전단하지 않고 왕장 대신 회의를 소집했다. 흉노는 보통 皮布稅를 징수했다. 간이한 관습법이 통용되었다. 법관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371). 문자가 없어 언어로써 약속했고 노비가 존재하여 사유제와 계급 분화가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신분의 구별이 엄격하였다. 선우는 반드시 연제씨에서만 나왔고 계승법은 부자 상속과 형제 상속을 겸했다. 귀족은 성씨가 있지만 일반인은 성씨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였지만, 일부다처의 경우 적지 않았다. 귀한 부인은(372) 전거연지라하고 그 다음은 대연지, 그 다음에도 여러 연지가 있었다. 아비가 죽으면 그 후모를 처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모두 그 처를 처로 삼는다는 전방제가 유행했다. 이는 군혼제의 자취로서 오손, 선비, 오환, 유연, 돌궐, 토욕혼, 여진, 몽고 등 북방 초원 사회와 강저 토번 등에서 광범하게 성행했다. 전쟁을 통해 인구와 재부를 약탈함을 가장 중시했다(373). 젊은이가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늙은이는 나머지를 먹었는데 스스로 지키려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부자가 모두 오래도록 보전할 수 있다고 여겼다(374).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국의 견적으로 버틸 수 있었다. 통장이 실행되었는데 관과 곽, 금은 의상이 있지만 분봉이나 상복은 없고 종신과 노비 가운데서 따라 죽는 이가 많았다. 종교는 조상숭배와 자연 숭배가 결합한 다신 신앙이었다(275). 가장 중시한 신은 천신이었는데 선우는 천명을 받아 흉노를 통치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社神도 깊이 믿어 잰쟁이나 대사가 있으면 사신에게 제사지냈다. 이 제사는 胡巫에 의해 집전되었다.

진은 기원전 214년에 서북으로 흉노를 쫓아내고 하상에 성을 쌓아 새로 삼았다. 몽염을 시켜 황하를 건너 땅을 빼앗고 정장을 쌓아 융인을 몰아냈다. 흉노를 방비하기 위해 장성을 쌓았는데, 지형에 따라 새를 설치하여 임조에서 요동까지 만여리나 뻗쳤다. 흉노의 두만 선우는 진을 이기지 못해 북쪽으로 밀려났다(376). 아비 두만을 죽이고 자립한 묵특 선우는 몽염에게 뺏긴 흉노 땅을 모두 수복하고 연과 대를 침입했다. 이때 한은 항우와 대항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흉노는 이 틈을 타 강대해졌다. 유방이 위협을 느껴 흉노를 공격했으나 묵특은 정예병 40만 기로 유방을 백등(평성)에서 7일간 포위하여(377) 유방은 궁지에 몰리자 선우의 부인에게 후한 뇌물을 바쳐 비참하게 도주했다. 선우에게 공주를 출가시키고 화친을 맺었다(378). 화친의 기본 내용은 한이 공주와 세폐를 보내면 흉노는 한의 변경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흉노는 한을 능멸했으나 한 초의 무위이치도 크게 작용하여 화친은 지속되었다(379). 무제 시기에 휴식정책을 버리고 화친을 폐기했는데 제국 즉 황제 지배 체제의 지향을 의미했다. 무제의 공격을 실패했고(380) 전쟁은 40년 이상 지속되었다. 무제 말 이사장군 이광리가 흉노에 투항한 사건을 계기로 무제는 전쟁을 멈췄다(381). 45년간의 긴 전쟁을 통해 한은 흉노를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오르도스를 빼앗았고 서역으로 통하는 길목인 하서를 빼앗아 흉노를 막북으로 쫓는데 성공했다. 흉노는 극도의 피폐로 고통을 받아 쇠퇴했고 중국도 수많은 인명과 재(382)물을 상실했다.

하서회랑
흉노계보

 

흉노는 5명의 선우가 분립하여 서로 싸우는 분열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선제(53)때 흉노의 호한야 선우 정에서 한에 입조칭신하는 문제로 논란이 일어났다(386). 결국 다음해 정월에 입조하여 칭신하고 자제를 보내 입시케 했다(387). 선제와 원제는 흉노와 장성 이남은 천자가 갖고, 장성 이북은 선우가 갖는다고 약속했다. 그후 60여년 간 평화를 유지했다. 왕망 시대에 사이가 틀어졌으나(388) 패망한 뒤 후한이 흉노에 사자를 보내 새수를 다시 주었다. 이때 선우는 왕망을 치고 변경을 공허하게 하여 한이 부흥할 수 있도록 했으니 자신을 받들어야 한다고 했으나 한은 제하를 평정한 지 얼마되지 않아 대응할 수 없었다. 이 무렵, 중국 각지에 할거하고 있던 세력들 가운데 흉노와 결탁하기도 했는데 노방이 대표적인 경우였다(389). 흉노가 매해 재해를 입어 피폐해지자 호환이 흉노를 격파하여 북으로 수천 리 옮겨가고 막남 땅이 비게 되었다. 흉노는 다시 분열되어 여러 선우가 쟁립하고 결국은 남북 선우가 다투게 되어 남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한에 내항했다(390). 건무 28(52)에 북흉노가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자 광무제는 상사로써 응답했다. 65년 북흉노가 다시 서하를 침입하자 명제는 북흉노를 진압했다. 결과 북흉노는 크게 쇠퇴하여 화제(89) 때에 공격당하자 북선우는 도주했고 선비가 그 땅으로 옮겨가 점거했다. 남은 낙은 모두 선비를 자칭하여 선비는 이로 인해 점차 번성했다. 한과 남흉노가 함께 북흉노를 정벌한 뒤 남흉노의 인구가 크게 번성했다(391). 216년 남선우가 입조하였으나 징세하지 않았다. 새내에 오래도록 거주하여 편호와 같았으나 공부를 바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북흉노가 서북으로 옮겨간 뒤 고지에 잔류한 흉노인은 선비라 자칭하면서 선비와 융합되었다. 연연 혹은 예예로도 불린 유연도 흉노의 별종이라 했고 돌궐도 흉노의 별종이라 했으며 회흘도 흉노의 후예라 했다.

서진 시기 진 땅에 거주한 흉노는 모두 19종이었는데 서로 섞이지 않았다. 동진 16국 시기에는 흉노인이 전조, 후조, 북향, 대하 등을 건국했는데 전조는 유연의 族子 요가 세웠다. 후조는 갈(392)인 석륵이 세웠는데 갈은 흉노의 별종이었다. 북량은 저거몽손이 세웠는데 선조는 흉노 좌저거였다. 대하는 혁연발발이 세웠는데 유연의 친족이었다. 남북조 시기에 북조의 통치를 받은 흉노는 선비나 중국에 융합되었고 남은 자들은 계호, 토경호, 산호라 칭해혔는데 계호는 당대까지 존속했으나 그 뒤부터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한과 흉노의 경제문화 교류는 주로 화친과 공납, 상사와 호시를 통해 이루어졌다(393). 호시를 통해 한의 철기와 동기, 도기, 금은, 비단, 곡물 등 생활용품과 흉노의 목축, 수렵 제품이 대량으로 교환되었다

한 초에서 무제 말까지 화친, 노략, 전쟁, 도망 등을 통해, 많은 수의 한인이 흉노로 유입되었다. 조파노가 군사 2만을 데리고 투항했고 이사장군 이광리가 7만 군사를 이끌고 항복했다. 공주가 화친을 위해 흉노 선우에게 출가할 때도 많은 수의 사람들을 대동했고, 한의 북변 제군의 백성과 노비들이 흉노로 도망한 경우도 많았다. 최소한 10만 이상이었는데 대부분은 노예로 생산에 동원되어 점차 흉노에 융합했다(395).

흉노는 원래 문자가 없었으나 후에 한자를 차용했고 한으로부터 악기와 고거, 동루 등을 들여왔다. 중국식 관제를 사용하기도 했고 한제에게도 제사드렸다. 위진남북조 시기에 흉노의 한화는 더욱 심해져서 선우들은 한성을 사용했다(396).

 

3. 유연(柔然)

흉노가 초원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유연이 나타났다. 연연, 예예, 영여, 유연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유연은 차록회의 자칭으로 시작되었다. 동호의 후예, 흉노의 후예, 선대가 대위에서 나왔다라는 등 분분한데 이는 흉노와 선비, 칙륵과 돌궐 등 다양한 요소가 융합되어 형성된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지배 계층은 탁발 선비에서 나왔다. 시조 목골려는 탁발 선비의 노예로 노획되었다 기졸로 활동했고 유연이란 이름은 그 아들 차록회 때부터 스스로 불렀는데 탁발 선비에 역속되었다. 유연이 막북을 통일하여 서로 언기의 땅, 동으로 조선 땅, 북으로 사막을 넘어 한해에 미치고 남으로 대적에 이르렀다(397).

북위와 20여차례의 대규모 전쟁을 치렀는데 북위에게 후고의 걱정거리였다. 유연은 후진과 북연, 남조 등과 연합하여 북위에 대항했다. 5세기 말에 유연에 속해 있던 칙륵이 이탈하여 고거를 세우고 서역을 장악함에 이르자 유연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북위가 동, 서위로 분열되자 유연도 점차 세력을 회복하여 화친하였다. 552년에 돌궐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뒤 유민의 일부가 서쪽으로 옮겨갔고 일부는 막부에 남아 돌궐, 거란 등과 융합했다. 중원에 들어간 유연의 일부는 탁발 선비와 융합했다(398). 언어는 선비어와 같은 알타이 어계 몽고 어족에 속했다. 자연을 숭배하여 무술과 무의가 성행했다. 족외혼이었고 수계혼과 보수혼도 성행했다. 천막의 문을 모두 동으로 향하게 했는데 태양이 뜨는 곳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땋고 비단 옷을 입었으며 작은 소매의 외투를 입고 소구의 바지를 입었다. 목이 깊은 가죽신을 신었다(399).

 

4. 칙륵(勅勒)

돌궐은 칙륵, 철륵의 한 가지였다. 칙륵은 위로는 정령, 아래로는 돌궐과 회흘을 열었으며 적적, 칙륵, 고거, 정령 등은 모두 같은 역사 공동체의 다른 이름이다(399).

, 당 시기부터 칙륵이 점차 철륵으로 대체되었다. 기원은 고대의 정령이나 적적으로 올라간다. 원래 정령은 남부 시베리아에 분포해 있었지만 16국 시대에 장성 이북의 오르도스에서 음산, 대군 이북지역, 농서와 진, 양 일대, 하북과 산서, 하남 일대 등에 광범하게 분포해 있었다. 351년에 전연에 귀항했다.

주로 유목을 했으며 장막에 살고(400) 수레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 교역도 발달하여 마필과 초피 등을 중원의 양식, 포필, 비단, 철기 등과 교환했다. 전체를 다스리는 대수는 없고 각 종에는 각각 준장이 따로 있었다. 씨족에는 막불이라는 추장이 있었다. 가정은 부계제이나 모계제 사회의 유풍도 남아 있었다(401).

5세기 초 유연이 대마 남북에서 일어난 뒤 칙륵 제부는 모두 유연에 역속되어 공부를 납부하고 약탈 전쟁에 동원되었다. 426년 북위에 귀부했다. 고거는 유연을 격퇴함과 동시에 북위에 사자를 보내고 고창을 통제했다. 고창은 중국과 서역, 중앙 아시아를 통하는 문호와 같고 타림 분지를 제압할 군사적 요출지였기에 북위, 유연(402), 고거, 토욕혼 등이 고창에 관심을 두었다. 돌궐이 흥기한 뒤에는 무리가 분산되어 북위, 유연으로 도주했다. 541년에 멸망하여 전후 54, 7대 만에 멸망했고 돌궐에 복속했다(403).

 

5. 돌궐(突厥)

돌궐지역

5세기의 동아시아

 

돌궐은 돌궐 한국, 6세기 초에 금산(알타이산) 서남록에서 일어난 유목 국가를 가리켰지만 넓은 뜻의 돌궐은 그 이전과 이후의 돌궐어를 사용하는 부락을 총칭했다. 정령, 칙륵과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철륵(카자흐)의 한 가지, 철륵까지 포함한 총칭으로 이해되기도 한다(403).

이리를 토템으로 삼았고 시조 여성이 고창 서북의 한 큰 산 분지에서 살았다. 10명의 아이 중 아사나를 성씨로 본 부락의 군장이 되었다. 준가르 분지의 북족에서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니며 유목, 수렵했다. 철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고 5세기 중엽에 유연의 鍛奴가 되어 금산 남쪽에 살았다. 각종 철제품을 유연에 공납하여 단노라고 멸시되었다. 그들이 제현한 철기는 서역 36국에서 사용했다. 5세기 중엽에 돌궐이라 불려졌다. 아사나씨는 수령을 세습하다가 한국을 세운 뒤에 왕실이 되었고 돌궐은 한국의 명칭이 되었다. 초기 철륵 제부와 연합하면서 성장했다. 유연에 청혼했다 거절당하자 서위와 화친했다. 552년에 고거와 연합하여 유연을 멸망시키고 막북의 중심이 되었다(404). 2대 목간가한 때 요하 상류로 동진하여 거란이 동으로 도피했고 1만 호 이상이 고구려로 옮겨갔다. 서방의 토욕혼을 공격하고 중앙아시아까지 원정했다. 원정 책임자는 목간 가한이 숙부인 실점밀이었는데 이리 가한의 아우로서 그 형과 함께 돌궐 한국을 공동으로 창건했다. 페르샤와 결맹하여 563-567년에 서역 엽달을 쳐서 멸했다. 이후 돌궐은 흉노의 강역보다 더 광활한 대 유목 한국을 건립했다.

3대 타발 가한 세력이 강대하여 북주와 북제는 모두 대량의 재물을 보내 비호와 지지를 얻으려 했다(405). 타발 가한이 죽은 뒤 돌궐은 3가한으로 분열되었다.
사발략 가한(동돌궐) 579년 북주와 화친하여 천금공주와 혼인했으나 부친이 양견에게 피살되자 돌궐과 수의 관계는 크게 약화되었다. 수는 이들의 분거를 활용해 반간의 계책으로 돌궐을 분열시켰다(406). 583년 돌궐 한국은 정식으로 동서 양대 한국으로 분열되었는데 경계는 금산이었다. 585년 달두 가한과 거란의 협공을 답다 대막 이남으로 옮겨 영구히 번부가 될 것을 약속했다. 이에 동돌궐 한국의 통치는 대막 이남과 도근산 이동의 지역에 국한되었다(407).
막하 가한 동돌궐 한국을 다시 통일했다.
588년 도람 가한 수의 이간책에 의해 서돌궐의 달두 가한과 연합하여, 중국의(407) 북변을 침략했다.

수가 돌궐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간시켜 둘로 분열되었다. 수당전환기에 북방 일부 세력들이 동돌궐에 투항했다(408).

당 태종이 즉위하자 위수까지 침범해온 동돌궐과 회맹했는데 이후 날로 쇠약해지고 그 아래 철륵 제부가 흥기했다. 철륵은 동서 돌궐에 분속되어 있었고 돌궐이 건국할 때 이들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북방을 제압할 수 있었다. 605년 서돌궐에 항거하여 스스로 가한을 옹립했다. 당태종은 그를 책봉하였고 동으로 말갈, 서로는 서돌궐 한국, 남으로 고비사막과 접했다. 동돌궐은 위협을 느껴 당에 화친을 요청했으나 630년 당태종의 공격으로 멸망했다(410). 십 수 만이 당에 귀항했으나 원래의 부락을 보전하고 풍속과 습관을 바꾸지 않은 채 인구가 희소한 곳에 거주시켜 산서, 섬서, 영하의 북부에 순주 등 4개 도독부를 설치했다. 639년 태종 암살사건 이후 황하 이남의 돌궐인과 호인들은 북으로 쫒겨났다. 647년 금산 북쪽의 돌궐을 정벌하여 기미주를 설치함에 따라 동돌궐 한국의 전 영토를 기미부주 체제 안으로 편입했다. 당이 항상 돌궐 각부를 징발(412)하여 종군 출정케하여 돌궐인의 불만이 쌓여 679년 반기를 들었고 684년 후돌궐 한국이 건립되었다. 거란과 교전하던 측천무후는 거란을 고립시키기 위해 후돌궐을 책봉함에 따라 강성해졌다. 당 현종 727년 호시를 열어 매년 수십만 필의 비단과 돌궐의 군마와 교환했다. 그 뒤 후돌궐은 회흘 등 철륵 제부의 공격의 받아 745년에 멸망했다(413).

6.7세기 동아시아

돌궐 한국의 군주는 가한이라고 했는데 유연 한국에서 계승한 것으로 황제와 같은 뜻을 갖고 있다. 군주는 대가한, 동생이나 아들, 조카를 소가한으로 삼기도 했다. 관직에는 엽호, 차설, 특근, 차사리발, 차토둔발 등 28이 있었는데 모두 세습했다. 엽호는 가한의 형제, 아들, 조카 등이 맡았고 가한의 자제들은 특근이라 했다. 병력을 통솔하는 별부의 우두머리는 설이라 했다. 엽호, 특근, 3직은 가장 중요한 귀관이었다(414). 부락과 씨족에는 복이라는 수령이 있었다. 형법에 반란, 살인, 간음, 마반의 절도는 사형에 처했고 부인은 남편의 소유이고 여아는 부친 재산의 일부였다. 가축은 개인이 소유했으나 목장은 부락에 예속되었다. 귀신을 공경하고 무격을 믿었다. 두발은 머리 위에 흐트러졌고 의복은 옷깃이 왼편을 향하게 한 가죽옷이나 모직물을 입었다. 육식을 주로 하고 우유를 마셨으며 노인을 경시하고 장년을 중시했다. 아비, , 백숙부가 죽은 후 후모나 숙모, 형수 등을 처로 삼았다. 喪葬을 중시하여 시신을 모신 장막 앞에 양과 말을 잡아 제사드린 후 시신을 말에 태우고 화장했다. 뼈와 재를 거두어 땅에 묻었는데 생전에 1명을 죽였으면 묘 옆에 돌 하나를 놓았다(415). 문자는 호(서역인)와 비슷했는데 주로 아랍 문자의 자모를 채용한 독자적 문자를 사용했다.

 

6. 회흘(回紇)

철륵(카자흐족, 키르키스족)의 또 다른 한 가지였다. 돌궐문자로는 위구르로 읽혀졌고 연합의 뜻을 갖고 있었다. 남북조 시대에 원흘이라 하여 고거 6부의 하나로 포함되었다. 수 시대에 이르러 회흘은 위흘과 오호 등 두(416) 갈래로 나뉘어졌다. 처음에는 군장도 없고 고정된 거처도 없이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녔다. 용감하고 강건하며 말타고 활쏘기를 잘했다. 돌궐 한국에 신속해 있었는데 서돌궐이 철륵 제부를 습격하여 수령 수백명을 살해하자 철륵이 돌궐에서 이탈했고 이 때 위흘의 추장도 사근(돌궐 수장)을 자칭했다. 당 태종 정관 초에 돌궐과 충돌하여 기병 10만을 패퇴시키고 대항했다. 646년 설연타를 공격하여 가한을 살해하고 그 땅을 점령했다. 당에 조공하니 64713개 철륵 부락에 기미부주를 설치하고 옛 선우대에 연연 도호부를 두어 6개 도독부를 관할하게 했다. 663년 연연 도호부를 회흘 본부로 옮기고 한해 도호부라 개명하여 막북의 각족을 통할하게 했다(417).741년 후돌궐이 내란에 빠지자 당과 남북으로 협공하여 돌궐 옛 땅으로 남천했다. 영토가 동으로 실위와 접하고 서로는 금산, 남으로는 고비사막에 이르렀다.

안록산의 난에 당조를 도와 화친을 맺었고 대가로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되었다(418). 840년 철륵 제부의 하나인 힐알사가 회흘을 공격해 회흘을 멸망시켰다. 힐알사인은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붉으며 얼굴이 희고 눈동자가 푸르렀다. 벼와 기장, 보리, 청과 등을 경작했고 철기를 생산하여 돌궐인에게 공급했다. 군장은 아열이라 했고 초피와 청서피 등을 부세로 냈다. 관직에는 재상과 도독, 장사, 장군 등이 있었다. 법률은 엄격하여 싸움에서 지거나 사신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도적질을 하면 모두 참수형에 처했다. 언어와 문자가 회골과 같았고 겨울에는 나무 집에서 나머지는 모직물로 만든 방에서 생활했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한 뒤 1년 후에 뼈와 재를 무덤에 묻었다. 힐알사가 강성하자 동돌궐 한국은 공주를 힐알사 수령에게 시집보냈다. 3명의 추장이 있어 함께 국정을 담당했다. 당태종은 연연 도호부의 통제를 받게 했다(420).

 

7. 사타(沙陀)

당 초에 처음 출현했고 서돌궐의 별부인 처월종이다. 사타는 당 말, 오대에 이르러 동아시사의 역사 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당 말의 하동 번진 이극용이 사타 출신이었다. 그는 황소의 난을 격파한 후 하동에 군림했으며 895년 진왕으로 책봉되었다. 거란과 연합한 주전충에 패퇴했다. 907년 주전충이 대량 황제에 오르자 이극용의 뒤를 이어 진왕이 된 이존욱이 거란을 격파하고 923년 대당을 건립, 제위에 올랐다. 후량을 멸하고 낙양으로 천도한 후당은 925년 전촉을 멸하여 화북의 대부분을 점유했다(421).

거란의 야율덕광에 의해 후당은 전후 4, 14년 만에 멸망했다. 거란의 도움을 받아 후진을 건국한 석경당은 선대가 사타부민이었는데 4대 조 시기에 당에 내부했고 아비는 이극용, 존욱 부자를 따라 무공을 세웠다. 그는 거란과 부자지국의 관계를 맺고 유주 등 16개 주를 거란에 할양했다. 거란의 침공으로 946211년 만에 멸망했다. 후진 멸망 후 석경당의 부장이었던 유지원이 947년 태원에서 거란을 중원에서 몰아내고 낙양과 변주를 점령, 대한을 건국했다. 후한은 24년 만에 멸망하고 유지원의 아우 유숭이 다시 진양에서 북한을 세웠다. 거란과 부자지국을 맺고(422) 거란과 함께 후주에 대항했다. 북한은 429년 만인 991년에 멸망했다. 사타의 중국 통치는 57년간 412제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뒤 사타는 중국과 거란, 당항, 달단 등에 분산, 융합되었다. 송대 이후 사타라는 이름은 기록에서 지워졌다.

유목생활을 했고 사타마는 유명했다. 돌궐어와 돌궐문자를 사용했고 중국에 들어간 뒤에도 번어를 사용했다. 귀신을 경배하고 무격을 빋었다. 혼인풍습, 상장은 돌궐과 같았다(423).

 

8. 회골(回鶻)

당대에 회흘이 스스로 바꾸어 사용한 새로운 이름이다. 회골이 힐알사에 격파되자 그 한 가지가 토번에 다른 한 가지는 안서로 갔다. 안서로 간 회골의 한 가지는 수령이 엽호를 자칭하다 가한으로 개칭하면서 안서회골국을 건립했다. 9세기 중엽에 힐알사를 공격하여 천산 이북을 빼앗고 토번을 공격하여 서주를 점령해서 회골 유민의 共主가 되었다. 와해된 후 하서와 고창, 언기 등지에서 감주회골, 고창회골, 객라한왕조 등 3개 집단이 형성되었다. 감주회골은 감주 중심 회골인의 총칭으로 하서주랑 일대에 거주해 하서회골이라고도 불렸다. 토번에 역속되었다가 사주의 진 귀의군 절도사 장의조에 예속되기도 했다. 905년 사주를 공격하였다(424). 924년 후당이 감주회골 가한을 영의 가한으로 책봉했고 전성기 때는 서주회골까지 역속시켜 감주, 사주, 서주 등을 지배했다. 감주회골은 오대부터 중국 왕조에 공물을 바치며 책봉을 받아 신복을 표시했고 1036년 서하의 공격으로 멸망당했다.

고창회골은 서주회골, 화주회골이라고도 했는데 9세기 중엽부터 문헌에 나타났다. 처음에 안서회골국에 예속되었다가 안서회골굴이 분열된 뒤에 감주회골국에 예속되었는데 981년에 처음으로 한국을 칭했다. 강성했을 때 동으로 합밀, 서로 천산 서부, 남으로 우전, 북으로 알타이산에 이르렀다. 요가 멸망하면서 서천했을 때 서요의 부용이 되었다. 몽고가 일어나자 자진하여 서요의 소감을 살해하고 칭신했다(425). 몽고의 일부로 편입되었으나 여전히 역도호의 칭호를 보전하면서 조세를 징수하는 등 자치했다.

객라한 왕조는 합랍한 왕조라고도 하는데 가한 왕조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우전국을 멸망시키고 한국으로 발전했으나 곧 동서 양 한국으로 나뉘어졌다. 1009년에 송조에 내조했고 1063년에 책봉을 받았다. 요와는 933년에 처음으로 관계를 맺은 후 조공했으며 화친 관계를 맺기도 했다.

감주회골은 감주로 서천하기 전에 궁려에 거주하고 우유를 마시며 가죽옷을 입고 소와 말을 길렀으나 하서로 옮긴 뒤로는 농업에도 종사하며 정착했다. 회골인은 원래 고유한 샤머니즘을 믿었지만 8세기 중반에 마니교로 개종했다. 서천 전에는 옛 돌궐문자를 썼으나 9세기 전기에 속특자모에 의거하여 새 문자를 창제했는데 회골문이 그것이다. 고창회골도 고창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목축에 종사했으나 고창의 토지가 비옥하여 농업을 했다. 포도의 재배가 성행했고 회골문자를 사용했으며 칠요력이라는 독자적인 달력을 사용했다. 원래 마니교였지만 점차 불교로 개종했다. 경교와 이슬람교도 신봉했다(426). 객라한 왕조도 농사를 지었으며 중서 교통의 요충지이요 비단길의 공도여서 무역도 발전했다. 언어는 회골-갈라록 방언을 사용했고 속특어와 페르시아어도 유행했다. 문자는 회흘문자를 사용했으며 이슬람교를 믿었다(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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