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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배려의 인문학 1-5,6장 강민혁 / 닥홍 / 211001

211001 자기배려의인문학 5-6장 닥홍.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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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자기배려와 진실, 주체를 변형시키는 운동 : 플라톤

 

쟁론술: 모순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다

 

소피스트들은 일단 논의에 참여하기만 하면 논변을 통해 자신의 지혜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 구사하는 기술이 쟁론술이다. 이 기술은 말 그대로 다툼을 위한 기술, 말로 싸워 이기려고 구사하는 기술이다. 소피스트들은 거짓이든 진실이든 상관없이 상대방을 말로 이기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문제 제기 자체는 중요한 것으로 보았지만, 그들이 제시한 해결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의 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의 무조건적인 상대주의와 막무가내식 유명론이 초래하는 공동체 정신의 훼손은 심각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이데아론도 소피스트와의 대결하는 과정에서 진실을 귀환시키려는 노력으로 도출된 이론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데아라고 불리는 실체가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보다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망이 먼저였다는 말이다.

 

연설술: 현혹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다.

 

아테네에서 연설은 중요한 기술이었다. 권력의 기술이자 생존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연설회를 일종의 말잔치로 표현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앎과 기술은 자주 동일시된다. 기술은 반드시 참된 앎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설프게 한 것은 참된 앎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설술로 번역되는 레토리케가 과연 기술이냐는 의문은 그것이 참된 앎을 동반하냐는 질문과 같다. 고르기아스는 연설술을 말로 설득하는 능력이라고 하며 진실과는 무관한 설득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연설술은 진실의 문제에 무지하다. 아첨의 기술에 가깝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칼리클레스의 강자의 논리도 문제가 있다. 강자의 논리는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지만 자기는 다스리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구도에서 칼리클레스의 강자란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여 무절제한 쾌락에 빠져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자 아첨하는 기만적인 활동일 뿐이다.

 

문답법: 아포리아로 내가 무너지다.

 

논변 전에 규정할 것을 명확히 확인하는 절차를 밟는 것은 문답식 대화의 기본이다. 소크라테스는 논의를 하는 중에도 섣부른 추측이나 비약을 피하기 위해서, 당여한 것도 놓치지 않고 캐묻는다. A란 무엇인가를 묻고 대답을 기다린다. 상대방이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다수의 A인 것들로부터 AA이게끔 해주는 하나의 A를 구별해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추출해 낸 하나의 A인 단일 존재를 소크라테스는 형상이라고 부른다.

소크라테스의 형상과 본질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다. 그것은 기존의 인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현재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무참히 깨는 것으로 출현한다. 형상과 본질은 그 자체로서 고요히 존재한다기보다, 기존의 인식을 깨는 힘으로 작동한다. 진실은 전기가오리처럼 상대방을 파괴하는 힘이다.

문답법은 완성된 앎을 생산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무지를 알게 하는 기계로서 작동할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문답법적 대화에 들어서면, 전에 이미 알았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알지 못하는 상태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문답법은 차라리 아포리아 자체를 생각하는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대화의 마지막에 가서 그들은 이제 비로소 같이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문답법은 오로지 아포리아를 산출하고 무지를 깨닫게 해서 공통 탐구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일차적인 목표가 있다.

결국 내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가 필요한가로 귀결된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변형시켜야, 다시 말하면, 나는 나 자신을 무엇으로 만들어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가?이다. 결국 진실에 접근하는 능력은 진실을 변형시키는 능력이다. 주체는 주어진 원래의 상태를 가지고서는 결코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 이것은 소크라테스-플라톤 시대를 비롯하여 고대의 보편적인 특성이고 근본적인 원리였다. 바로 자기배려는 진실을 향해 운동하는 주체의 혁명이다. 거꾸로 말하면 주체의 혁명을 수반하는 진실의 운동이다. 이데아, 그것은 이 운동을 일으키는 최초의 철학적 장치였을 뿐이다. 따라서 진실은 주체를 변형시키는 하나의 운동 그 자체라고 말해야 할 듯 싶다.

 

 

1-6. 자기배려, 저항하는 주체의 생성 나는 나에게 저항한다 : 미셸 푸코

 

푸코의 질문: 주체의 문제

 

푸코가 보기에 나는 근대 담론이 만든 인간 가면을 쓰고 국가 장치들에 둘러싸여 정상성이라는 옷을 입고 살아간다.

라캉은 주체란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기본적인 어떤 것과 관련하여 주체가 의존하여 구성될 뿐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여기서 주체가 의존하고 있는 정말로 기본적인 어떤 것은 시니피앙이다. 시니피앙(기표)은 단어의 음성이미지 글자체계를 시니피에(기의)는 글자의 의미를 지칭한다. 시니피앙은 주체가 의존하고 있는 내면화된 권력이다. 언어체계에서 기의가 기표에 의존하는 것처럼 사회체계에서 주체는 내면화된 권력에 의존하여 생성된다.

이처럼 구조주의 이론은 권력에 종속된 주체가 어떻게 생산되는지에 주목하였다. 이것은 장치를 통해서 이뤄진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자장치라는 용어를 제시하였다. 푸코가 제시하는 규율권력이 장치의 개념과 연결된다.

이런 상황에서 주체-권력관계에서 주체는 사라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떤 의미에서 주체는 그저 권력이라는 객체 속에 머문다. 나 밖의 권력장치가 나의 의식(주체)을 구성하는 터라, 내가 나를 구성하는 능동성은 내 안에 있을 수 없다.

푸코의 철학적 여정은 이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니체는 스파노자가 비웃지 말고, 탄식하지 말고, 저주하지 말고 인식하라고 했던 말을 비틀어 인식은 오히려 비웃고, 한탄하고, 저주하는 충동들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칸트에서처럼 인식이란 초월적 시선에 의해서 경험적 표상들을 반성하고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라, 차리라 투쟁하는 충동들에서 나온다고 본 것이다. 충동들은 서로 투쟁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힘에 따라 서로 어떤 관계를 구성하게 된다. 충동들간의 화해와 협약으로 새로운 인식이 생기고 싸움이 계속되며 새로운 인식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인식한다는 사실 속에는 이미 지배하고 지배받는 관계, 즉 권력관계가 스며들어 있는 셈이 된다. 즉 인식이란 충동들 사이의 권력투쟁이다. 푸코는 이 투쟁을 사회적 장에서 힘들 사이의 투쟁으로 전환하여 독해한다. 인식은 이 투쟁들이 우리 의식에 만들어 놓은 효과이다. 인식은 권력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 내 안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장에서 이루어지는 투쟁들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인식은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무엇이 아니다.

 

푸코의 아포리아: 저항의 문제

 

푸코에게 권력은 끊임없는 투쟁과 대결로서 힘의 관계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게임이자 전략이다. 권력은 하나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 권력지배의 효과는 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열, 조작, 전술, 기술, 작용 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주체가 의존하는 권력이란 바로 다수의 세력관계로서 제압과정과 저항이 뒤엉킨 그 무엇이 된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다만 매번 투쟁 속에서 새로운 권력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이 지배-복종 관계 자체를 뒤집지는 못한다. 권력관계라는 게임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기는 하지만 게임은 종료된다. 이런 구도라면 권력은 항상 승리할 수밖에 없다.

 

푸코의 돌파: 자기의 문제

 

규율권력은 개개인의 신체를 감시 훈육하고, 자신의 신체를 자신이 통제하는 반성적이고 규제적 자아를 만들어 냈다. 프로이트도 자아는 외부세계의 자극과 그 자극에 대한 신체의 반작용에 따라 형성된다고 보았다. 규율권력 메커니즘은 프로이트의 반성 메커니즘과 동일하다. 바로 그렇게 구성된 자아가 스스로 자신의 신체적인 힘을 조절한다. 유용성의 측면에서는 신체의 힘을 증가시키지만, 복종의 측면에서는 그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자볹의 사회에서 그 흔한 자기계발은 이런식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유용한 신체의 기술은 증대시키지만,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힘으로 커지지 않는 데까지만 그렇게 한다. 더군다나 우리는 증대된 신체의 힘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 타자에 의해 구성된 욕망들(명문대 입학, 승진, 급여 인상 등)에 투여되어 소비될 뿐이다. 자기계발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권력에 예속된다. 자기계발은 자기를 탕진하는 작업이다.

푸코는 규제적 자아와 완전히 다른 능동적인 힘으로서 자기를 발견한다. 신체의 감옥으로서의 혼, 즉 반성적인 자아를 능동적인 자기로 전환시킴으로서, 기존의 자기를 넘어서도록 저항의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쏟아붓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규제적이지 않고, 오히려 주체의 존재 양태를 변용시키는 시선으로 작용한다는 주장이다.

세네카는 외부의 규범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 반성하지 않는다. 외부의 규범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다. 세네카와 에픽테토스는 이를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하여 자신을 돌보는 행위라고 부른다. 자기가 스스로의 깃발을 가지고, 자기를 스스로 바꾸어 가는 오직 자기만의 행위인 것이다. 그는 저녁의 점검을 통해 매일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한다. 그것은 생활에 스며든 복종적 태도를 끊임없이 털어내는 저하의 태도이기도 하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습관을 바꾸는 것, 그것 자체가 권력에 저항하는 출발이 된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그 누구도 아닌 자기로부터 생성되고 있었다. 푸코는 여기서 칸트적 주체(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로부터 윤리적 주체(자기배려하고 저항하는 주체)로의 변용을 시도하였다. 이 윤리적 주체가 지향하는 목표는 일반적인 도덕과 다르다. 도덕적 주체화는 구성원의 행동 규칙을 보편화함으로써 공동체의 규범과 법에 적응시키는 것이라면, 윤리적 주체화는 자신의 행동을 개별화하고 변조하며, 자신의 행위에 단독적인 광채를 부여할 수 있는 태도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자기, 단 한 번도 그렇게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를 구성해 낸다. 결국 도덕으로 대표되는 규율권력은 일반적인 규범을 개체에게 부과하는 장치로서 작용한다면, 윤리적 주체화는 개별적인 힘으로서 특이성을 스스로 구성하고 조직화하는 실천이다.

 

물론 푸코는 저항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라야 구성된다고 말한다. 나쁜 습관들을 버리고 존재방식을 변형시키려면 스승이나 친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자기 스스로 자기를 교정할 수 있어야 그 존재변형이 궁극적으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자기의 혼종성은 매우 근본적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 변형의 모험은 자기 안에 이미 다른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모험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배려는 본래적인 자기가 되는 일이며, 수많은 자기로 들끊는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신 자체가 혼종적인 공동체이고 나라는 장이 이미 사회적인 장이다.

매순간 우리는 사회 속에 있다. 그러나 사회는 언제나 이미 내 안의 수많은 자기들과 함께 뒤섞인 것이다. 나에겐 이미 사회가 외부의 사회일 수 없으며, 수많은 나의 자기들로 둘러싸이고, 뒤섞여 있는 혼종적인 사회이다. 아마도 내 습관에 대항하는 저항은 사회 속에 뒤섞여 있는 수많은 자기들을 촉발하는 힘으로 운동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나를 바꾸는 저항은 그것 자체로 사회를 바꾸는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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