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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배려의 인문학
1부 철학 창구
1-1장부터 1-4장 발제 by 복둥이
1-1장. 자기배려와 철학, 현재의 자신을 넘어서기 : 소크라테스, 플라톤
p18 그래서 이런 앎들은 살아남는 기술이 되어 만들어지고, 보관되고, 전달된다. 모자라기 짝이 없는 우리로선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술을 쫓아갈 뿐이다. 이제 이 기술들을 쫓아 획득하는 것이 삶의 최대 과제로 떠오른다. 사람들은 고용량 PC를 사듯 이런 앎들만을 앞다퉈 가지려 한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도 ‘산다는 것’을 잘 알게 되는 것이고, 아울러 당연히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국 ‘산다는 것’은 ‘살아남는 것’이고 , ‘잘 산다는 것’은 ‘살아남는 기술’을 최대한 잘 이용하는 것이 된다.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하다.
p18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이 믿어 의심치 않는 것에 의문을 던지고 시비를 건다. “당신은 정말 알고 있는가?” 혹시 당신이 안다고 하는 그 앎, 즉 살아남는 방법들이 당신이 겪은 사태들에 우연히 들어맞았을 뿐이고, 다른 상황에는 전혀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살아남는 그 숱한 방법들은 그저 우연히 들어맞았을 뿐이지, ‘산다는 모든 것’을 참으로 알려 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p19 “너 자신을 알라”란 말도 엘렝코스를 통해 “나는 정말 모르고 있었구나”라고 깨닫도록 이끄는 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알지 못하고 있었고(무지), 더군다나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무지의 무지).
p21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착각하여 자신만큼은 남들과 달리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를 끝까지 심문하며 나무라겠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결국 그는 무엇이든 자기에게 붙어있는 어떤 것들(즉, 자신이 소유한 것들로서 육체, 지위, 재산 등)에 마음을 쓰기 보다는, ‘자기 자신 자체에 대해서 마음 쓰기’(즉, 자기 자신을 돌보기, 자기배려)를 요청하고 있었다.
p22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남는 것에 전념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살아남기 위한 기술과 사물에 예속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삶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p23 금식, 금욕 등을 하며 절제하는 사람들도 다른 쾌락들을 빼앗기는 게 두려워서 절제한다. 즉 그것들은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나 ‘천국으로 가려는 것’ 등등의 쾌락에 예속되어 행하는 절제들일 수 있다. 현상만 보면 마치 예속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들어가 보면 평판이나 건강 같은 다른 쾌락에 예속되어 있는 셈이다.
p24 이 막다른 골목에서 소크라테스가 돌파하며 제안하고 있는 것은 죽음 그 자체를 수련하라는 말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죽은 것과 최대한 가까운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p25 따라서 이 수련은 자신을 스스로 매번 경계에 데려가는 수련, 그리고 자신이 주인이 되도록 자기가 자기에게 사용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철학은 온갖 예속상태로부터 전향하여 인생 전체에 걸쳐 존재 전반을 ‘자기 자신’으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구성하도록 하는 ‘삶의 기술’로서 제시된다. 죽음이 삶을 위해서 사유된다.
p27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중간자로서 에로스는 좋은 것이 자신에게 늘 있기를 바란다. 따라서 에로스는 자기에게 없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려는 자이다. 이것은 자기 것을 넘어서 좋은 것을 추구하는 존재로서의 에로스를 말한다. 사실 중간자는 추한 것이나 나쁜 것이 아니며 또한 항상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결여하기 때문에 항상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을 추구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에로스는 자기 것을 항상 뛰어넘으려고 한다. 자기 것을 뛰어넘어 자기가 갖고 있지 않는 것, 소크라테스 말대로라면 자기에게 결여된 것을 끊임없이 자기 것으로 늘 있게 하려는 존재가 바로 에로스이다.
p29 따라서 삶은 결코 상투적일 수 없다. 삶은 언제나 이미 전위적이었고, 앞으로도 항상 전위적일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야 하는 에로스적 운명은 아침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일터에 가고, 저녁에 잠이 드는 바로 그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넘어서야만 하는 운명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오히려 삶은 상투적인 것이 되고, 예속상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아마도 ‘산다는 것’은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며 항상 전위적으로 ‘살아지는 것’일 터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항상 다시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사라지지만, 언제나 새로 태어난다.
1-2장. 자기배려와 공부, 지금 있는 곳을 떠나기 : 세네카
p35 이것은 매우 현대적인 구조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인에게 유용한 것을 내게 유용한 것인 양 착각하며 공부한다. 사실 행복해 보여야만 공부에 대한 욕망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을 위한 공부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다. 아마도 소득이라든지 존경이라든지 하는 것이 그런 것일 게다. 그 흔한 자기계발이 이런 프레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우리가 그들을 추종하여 행복해하며, 그들의 척도에 맞춰 공부하는 동안, 그들은 우리의 유용성을 사용한다.
p38 세네카는 아이에게 아이의 풍요를 원하는 부모의 염원조차 경멸하라는 말로 아이의 의식을 급진화시킨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실제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아이는 기만적 구조로 끌어들이는 부모를 공격하라는 뜻이다. 부모가 끌어들이는 감옥과 다른 배치에서 앎을 획득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부모의 욕망대로 이루려면 다른 사람의 것을 뺴앗아야 한다. 따라서 부모의 욕망이 이루어질수록 아이의 사회적 관계는 감옥의 배치로 변해 간다.
p39 아이가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누구보다 부모의 욕망이 해체되어야 한다. 부모의 욕망이 해체되지 않고서 아이의 해방은 불가능하다.
1-3장. 자기배려와 우정, 자기 없는 자기로 존재하기 : 에피쿠로스, 키케로, 세네카
p43 우정은 무서움을 없애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다. 이 점에서 에피쿠로스는 우리와 출발점을 공유하는 듯 하다. 마땅히 친구는 폭풍우에 대비해 그것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바로 이어서, 그렇다고 ‘항상’ 도움을 청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덧붙인다. 아마도 친구는 도움을 ‘항상’ 청하는 사람이여서는 안 되고, 정말 절실한 상황에서만 청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우정을 현실적인 도움과 아무 관련 없는 것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정은 일단 미래에 도움을 주리라는 기대를 피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정은 유용해야만 성립될 수 있지만, 항상 유용하기만을 바라고 대하지는 않는 그런 관계다.
p45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우정은 난관을 대신 돌파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단지 그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그 난관을 대면할 수 있게 할 믿음을 줄 뿐이다. 따라서 우정이란 오로지 그런 아포리아 앞에 같이 있어주는 것이다.
p50 더군다나 키케로는 그런 관계의 상대로서 ‘진정한 친구’를 ‘제2의 자아’라고 단언하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그런 자연의 이치에 맞게, 다시 말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과 똑 같은 감정으로 친구를 대하지 않는 한, 진정한 친구를 구할 수 없다. 여기서 타자와의 관계인 우정은 자기가 자기와 맺는 관계로서 결정적으로 되돌아 온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정은 모든 유용성에 대한 의존성을 뚫고 진정한 타자, 바로 자기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자신과 친구 되기’이다.
p54 사실 우정이 탁월한 자들 간의 관계라고 했을 때 이런 분할은 예견되었던 것이다. 푸코의 말대로 자기배려는 이미 생활방식의 선택, 다시 말해서 이런 방식의 생활을 선택한 자와 그렇지 않는 자들 간의 분할을 내포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정의 관계는 통념적인 것만으로 단순히 성취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 존재 그 자체 때문에, 또 인간 공동체에 단순히 속한다는 사실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드디어 우정은 정치적 관계로서 나타나고, 좋은 우정이란 퇴행적인 모습을 끊임없이 깨고, 그런 의존적인 자기를 해방시키는 특별한 정치행위로서 드러난다. 마침내 우정은 통념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관계, 새로운 자기를 지향하는 운동으로 전환된다.
1-4장. 자기배려와 사랑, 진리로 함께 날아오르기 : 플라톤, 에픽테토스
p64 뤼시아스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을 지독히 노예적으로 만들기에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의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는 기만적인 결론을 도출해 버린다. 이런 어이없는 주장은 계산적인 태도에서 나온 궤변이다. 뤼시아스는 파이드로스의 육체에만 관심을 갖는 아주 지능적인 쾌락주의자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런 접근법으로는 진실을 말할 수 없다며 사랑과 진실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뜻밖에 광기에 대한 예찬으로 시작한다.
p65 광기에 대한 예찬으로 시작한 소크라테스의 연설은 플라톤 철학의 정수를 보여 준다. 플라톤에게 사랑은 천상의 이데아로 가는 하나의 여행이다. 하지만 인간 영혼이 천상을 여행하는 것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사실상 이 여행은 일종의 전투와도 같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이데아가 천상에 있다는 묘사보다 전투와도 같다는 이 여행의 과정이다.
p67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사랑은 아름다움을 체험하고 영혼이 이데아로 상승하도록 돕는 조력자다. 그러니까 이데아로 날아가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신, 즉 ‘프테로스’이다. 이렇게 되면 사랑을 주고, 그 대가로 무엇을 받아야만 하는 교환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제 사랑은 이데아를 향한 여행으로서 새로운 기반을 얻는다. 사랑은 교환 행위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p68 이런 관점에서 푸코는 파이드로스에 나타난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연애술이 진실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된다고 보았다. 즉 그것은 상대방에게 환심을 사려는 연애술이 아니라, 주체의 금욕과 진리를 향한 공동의 접근에 초점을 맞춘 연애술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한쪽이라도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서로의 눅눅한 마음을 적신다. 그리고 그 적신 자리에서 모두의 날개가 돋는다. 그런 뒤 진리로 함께 날아오른다. 이건 묘한 진실게임과도 같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에 의해 발명된 사랑의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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