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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그래 발제문(에로스와 문명).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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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욕에서 에로스로

 

억압적 이성의 독재에서 해방되어 본능은 자유롭고 지속적인 실존적 관계를 향하여 새로운 현실 원칙을 생성한다. (p. 241)

 

새로운 현실원칙 (억압없는 본능적 질서) – 문명화된 합리성에 의하여 획득된 수준의 이전으로 퇴행한다. 리비도의 초기단계를 회복하며, 현실자아가 존재하는 사회제도를 소멸시킨다. 문명과정의 역전이며 문화의 전복일 것이다. (p. 242)

 

성욕에 비추어 이를 검토

-> 강화된 억제는 유기체를 사회적으로 유용한 수행의 주체-객체로 만들기 위해서 신체의 비성화를 영구하게 한다 -> 문명이 의존하는 개인상호간의 지속적인 관계의 전자 (p. 244)

 

문명화된 도덕의 충만한 힘은 신체를 쾌락의 객체, 수단 도구로 사용하는데 반대하여 총동원 되었다.

억압 없는 현실원칙의 출현은 전시간을 노동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육체는 다시 성화될 것이다. (p.245)

 

리비도의 단순한 해방이 아니라 리비도의 변형을 포함한다. 성기 우위에 억제된 성욕을 개성전체의 에로스화로 변형하는 것이다 -> 사회적인 관계로의 확장을 의미하며 단순히 성욕만 해방하는 것과는 다름 (p. 246)

 

문명에 의해 현재는 억압되어 있는 본능이지만 이것은 더 좋은 미래에 대한 약속, 행복에 근접하는 약속일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행복을 선사적인 소망의 후대적 충족으로 정의했고 그것이 부()가 행복을 초래하지 않는 이유이다. “돈은 유아의 소망이 아니다.” (p. 248)

 

승화

 

억압적 현실원칙 아래서 미리 정해진 본능구조 아래서 이루어지는 과정 억압적인 요소를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으로 옮긴다 (사회적 가치가 뚜렷하게 되는 본능의 대상과 목적을 변경시키는 것)

프로이트는 사회적인 관계(문명적 공동체)가 승화된 리비도적 유대만이 아니라 승화되지 않은 리비도적 유대에도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자유로운 리비도적 관계에 의하여 유지되고, 자유로운 리비도적 관계로부터 전개되는 문명의 관념을 암시한다.

 

생식기 우위에서 벗어나 유기체 전체를 에로스화 하는 것인 듯하다.

억압없는 승화의 가능성을 거의 승인하는 것이다. (p. 250~253)

 

성욕의 자기승화 억압적 조직에 예속되지 않고도 고도로 문명화된 인간관계를 창조할 수 있다. 리비도는 하나의 사회현상으로서만 자기승화의 길을 걸을 수 있다. 만일 유기체가 소외된 노동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실현의 주체로서 존재한다면 그 자신이 문화건설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p. 255)

 

에로스의 문화건설 능력은 억압없는 승화이다. 성욕은 자기의 목적을 획득하면 더 완전한 만족을 찾아서 다른 목적들로 초월한다.

프로이트는 에로스를, 생명이 지속되고 더 높은 발전이 이룩되도록 살아있는 실체를 더 큰 단위로 형성하려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p. 257)

 

프로이트가 리비도를 매우 생생한 욕구의 충족만이 아니라 충족을 획득하려는 인간의 노력, 즉 노동의 과정과 연결했다는 것은 주목되어야 한다. (p. 259)

 

희소성과 소외를 정복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은 다형의 성적 흥분의 회복이다. 변경된 사회조건은 일을 놀이로 변형시키기 위한 본능의 기초를 창조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만족을 획득하려는 노력이 지배의 이익에 의해서 강요되거나 지시되지 않으면 않을수록 리비도는 매우 생생한 욕구의 충족을 더 잘 돕게 된다. (p. 261~262)

 

노동을 쾌락으로 변형하는 것은 푸리에의 거대한 사회주의 유토피아에 나타나는 중심 개념이다.

이러한 변형은 사회제도의 완전한 변화(필요에 따르는 사회적 생산물의 분배, 개인의 능력과 성격에 따른 역할의 분담, 역할의 끊임없는 전환, 짧은 작업시간 등)을 필요로 함 (p. 264)

 

완전히 성숙한 문명의 조건이라는 미래로 향하고 있다. 성욕을 에로스로 변형하고, 에로스를 지속적이고 리비도적인 작업 관계로 확장하는 것은 거대한 산업기구,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적 분업, 믿을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인 에너지의 합리적 재조직, 광범위한 대중의 협력 등을 전제로 한다. (p. 263)

 

만일 쾌락이 실제로 일하는 행위 속에 있고 외생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쾌락은 성감대를 활동시키거나 육체 전체를 에로스화하면서 활동하는 신체의 기관과 신체 그 자체에 기인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그 쾌락은 리비도적 쾌락임에 틀림없다. (p. 267)

 

(p. 263) 성욕을 에로스로 변형하고, 에로스를 지속적이고 리비도적인 작업 관계로 확장하는 것은 거대한 산업기구,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적 분업, 믿을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인 에너지의 합리적 재조직, 광범위한 대중의 협력 등을 전제로 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지배의 요구조건에서 해방되어 노동시간과 노동의 에너지가 양적으로 감소하면 인간존재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성욕이 에로스로 변형됨으로써 삶의 본능은 자신의 감성적인 질서를 전개한다.

지속적인 만족에 대한 요구는 리비도적인 관계(생활공동체)의 질서를 확장할 뿐 아니라 이러한 질서를 더 높은 수준에서 영구화 한다.

만족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 된다. (p.272~273)

 

본능 자체 안에 에로스의 추동력을 억제하는 내적 장치가 있을까? 억압적인 현실원칙에 의하여 바깥에서 부과된 것이 아니고 본능 자체가 설정하고 수락한 장애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장애와 한계는 고유한 리비도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p.275)

 

약간의 장애는 리비도의 흐름이 그 절정에서 계속 팽창할 수 있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절대적인 만족에 대한 장애

즉각적인 충족으로 그 자신이 소멸되는 것에 대한 거절, 만족을 강화하기 위하여 장애를 건설하고 사용하는 능력이다.

리비도적이 아닌 관계를 에로스화하고 생물학적인 긴장과 이완을 자유로운 행복으로 변형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각자가 자기자신의 삶을 형성하면서 진정한 개인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본능적인 도덕의 관념은 초자아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에 의해서도 암시된다. 많은 경우에 초자아는 자아와 외부세계에 대항해서 이드의 요구를 보호하면서 이드와 은밀한 동맹관계에 있는 듯하다.

현실원칙을 수락하기 이전에 나타나는 성기전기와 오이디푸스 전기의 선사적인 유사도덕의 정신적 표현을 초이드라고 불렀다 -> 이것은 원시적인 모권에 대한 기억이며 동시에 여성의 특권상실에 대항하는 상징적인 수단이며 퇴행 경향의 유풍일 것이다.

초자아의 도덕은 현실원칙(아버지, 부권)과 대림

전자아와 현실의 관계라는 일차적인 단계에서 자기애적인 에로스와 모성적인 에로스는 하나

어머니의 이미지가 자유로운 미래의 이미지를 의미하는 것은 오로지 현실원칙을 넘어서야 가능하다. (p.277~280)

 

에로스를 죽음의 본능에 결속시키는 유대가 발생

죽음은 시간의 마지막 부정이지만 기쁨은 영원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종말에 대한 예상은 리비도적인 관계에 억압적인 요소를 끌어들이고 쾌락 자체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모든 유한한 것에서 태어나는 시간은 죽음의 시간이라는 것 (p.281)

 

시간의 흐름은 인간에게 더 좋은 과거와 더 좋은 미래를 잊게 한다.

망각할 수 있는 능력은 고통을 야기시킨 세력을 용서하는 것, 문명화된 삶의 필요 조건

기억할 수 있는 능력도 문명의 산물인데 편파성을 가지고 있다. 자유에 대한 약속과 행복이 아니라 처벌에 대한 공포와 불행이 기억 안을 서성거린다.

행복과 자유는 시간의 탈환, 다시 찾은 시간과 관계되어 왔다.

에로스는 시간에 의하여 지배되는 세계 속에서 시간을 이겨내려는 노력에 기억을 사용한다. (p.282~283)

 

만일, 본능의 목적이 삶의 종결이 아니라 고통의 종결이라면, 본능의 입장에서 역설적으로 볼 때 삶과 죽음의 갈등이 감소되면 감소될수록 삶은 만족의 상태에 더 가깝게 간다. 쾌락원칙과 열반원칙이 수렴한다. (p.285)

 

그러나 억압된 문명에서는 죽음 자체가 억압의 도구가 된다. 죽음을 승인하라고 가르치는 교육은 처음부터 삶 속으로 항복-포기와 굴종을 끌어들인다. 그러한 권력은 죽음과 깊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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