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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와문명』 발문 - 마르쿠제 2021.12.29. 바다사자
발문 신프로이트학파의 수정주의 비판
20세기에 혁명의 격변으로 인간성의 기본적 불변성에 대한 사회의 믿음 때문에 정신분석의 인간개념은 ‘반동적’인 것처럼 보여 정신분석에 수정이 가해졌다
빌헬름 라이히는 프로이트에 내재하는 비판적 사회이론을 발전시켰다. 지배와 착취의 이익을 위해 성적 억압이 동원되었으나 성본능의 역사적 동태, 그리고 파괴충동과 성본능이 융합하는 역사적 동태를 고려하지 않았다. 성 해방이 만병통치약이 되었고 승화는 경시된다(290). 그의 만년에는 전면적 원시주의가 성행하게 된다.
칼 융의 심리학은 반계몽주의적인 가짜 신화체계가 되었다. 수정주의 중도파는 문화학파와 인간관계학파로 구체화되었다. 신프로이트 학파들은 문명들을 구속과 고통의 치유-억압에 대한 승리로 승격시킨다. 이는 본능의 역동성을 제거하고 축소시킴으로써 수행되고 (291) 본능적이고 사회적인, 개성의 폭발적 뿌리들을 버렸다. 개성의 형성에 미치는 사회현실의 영향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회적 제도들과 관계들의 기원이 아니라 기성이 물화된 형태의 제도와 관계들이 완성하리라 기대된 개성에 미친 영향을 파악하는 실패한다.
에리히 프롬은 프로이트의 이론이 결부되어 있는 현대사회와의 유대로부터 풀어놓으려 하고 본능구조와 경제구조의 정신분석적 개념들을, 아버지중심의 취득문화를 넘어선 진보의 가능성을(292) 시도한다. 사회학적 내용을 강조한다. 어머니중심의 문화 이념이 지배의 이익이 아니라 사람들의 리비도적 관계에 적응하는 현실원칙을 그려낸다고 한다. 본능의 구조는 제도들의 변형을 통해서 자유로운 문명의 발생을 오히려 요구한다(294). 리비도의 요구는 자유와 인간욕구의 보편적 만족을 향한 진보를 추진한 반면 성욕이론 약화로 사회비판의 약화와 사회적 내용이 축소된다. 문화학파들의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프롬은 아버지중심의 권위주의적 금기들을 거부하고 환자와 적극적 관계로 들어가 행복에 대한 환자의 요구를 무조건 긍정하고 ‘금기적 성격들로부터 도덕을 해방하는’ 특징을 갖춘다. 그러나 딜레마는 행복의 요구는 사회와의 갈등을 악화시키고 사회유지에 필수적인 보호층위의 공격을 확대한다. 행복과 개성의 생산적 발전이 일반적 가치와 양립할(296) 때에만 긍정적 실행이 가능하게 된다. 결국 사회비판과 정신분석의 폭발적 내용 자체를 차례로 약화시킨다.
신프로이트학파 심리학의 후기단계의 논의는 정신분석이론의 비판적 의미를 선명하게 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이론은 개인의 병이 문명의 병에 의해 야기되고 치료는 병든 문명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으면서 계속 기능할 수 있도록 개인을 치유하는 데 목표를 둔다(297). 정신적 건강은 성공적이고 능률적인 인종이다. 정상이란 적당히 행복한 만족으로 나타나는 불확실한 조건이다. 문명이 우세하려면 억압과 불행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개인이 정신적·육체적으로 꺽이지 않고(298) 얼마나 많은 인종을 견딜 수 있느냐이며 치료는 인종의 과정이다. 수정주의 학파들은 이론을 치료에 동화시킴으로써 이론과 치료의 모순을 제거했다. 첫째, 죽음 본능, 원시유목(299)부족이라는 가설, 최초의 아버지 살해 개념들을 축소하거나 폐기했다. 이 과정에서 이드와 자아의 관계, 무의식의 기능, 성욕의 폭발적인 함축성이 거의 없어졌다. 개인과 사히, 본능의 구조와 의식 영역 사이의 갈등의 심층 차원은 납작해졌다. 수정주의자들은 새로운 이론으로 전환시켰다. 프롬, 카렌 호니, 해리 설리반, 클라라 톰슨 등이다.
수정주의자들의 이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프로이트는 개인과 그의 신경증이 환경과의 갈등을 지나치게 경시했다(300). 성격이 늦어도 6살에 본질적으로 고착되며 개인의 운명을 성욕의 관점으로 해석했다. 수정주의자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생물학적 층위에서 문화적 층위로, 개인 소질에서 개인 문화로 옮긴다. 리비도라는 개념을 폐기하면 정신분석의 주제는 ‘세계와의 연관 속에서’ 드러나는 ‘全的 개성’이 된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에는 어떠한 윤리학도 포함되지 않았으나(301) 수정주의자들은 ‘비교문화의 연구에 근거하여’ ‘인간은 고착된 동물적 충동들을 타고나지 않으며 사회의 유일한 기능은 충동들을 통제하는 데 있다’고 이해한다. 사회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형성되는 경험과 행태의 성장, 변화, 발전하는 그물 조직이라고 주장한다(302).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삶은 열악하고 억압적이고 파괴적이지 않다.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국면들도 있는 것이다. 문명의 충격 때문에 그 국면들이 본능의 동력학 자체 안에서 서로 연관되고 이로 하나가 불가피하게 다른 하나로 전환하는 방식을 증명하는 데 프로이트의 과제가 있었다. 이 증명의 결여 때문에 수정주의적 개선은 근본적이고 이론적인 개념구성이 폐기된 이론적 공백상태를 구성하고 만다(303). 프로이트 이론의 수정주의적 보완, 특히 문화적 환경적 요인들의 인증은 문명의, 현존하는 사회의 그릇된 그림을 신성하게 만든다. 갈등의 폭과 깊이를 최소화하면서 용이하게 잘못된 해결을 공개한다.
수정주의자들은 개인의 전적 개성을 정신분석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의식 형태)와 현실을 혼동한다. 개성과 개성의 발전은 가장 깊은 본능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미리 형성되어 있으며, 축적된 문명은 개인적 ‘성장’의 다양성과 자율성이 이차적인 현상임을 의미한다. 개별성의 배후에 존재하는 거대한 현실은 문명의 일정한 단계에 억압적 통제의 범위와 형태와 효력에 의해 결정(305)된다. 개성은 권력과 기능의 위계에 의하여, 기술적·지성적·문화적 장치에 의해 기운다(306).
정신분석은 개인의 경험 안에 있는 보편적인 것들을 해명한다. 그렇게 하는 정도에 따라 인간관계가 돌처럼 응고되는 소외의 세계를 깨뜨릴 수 있다. 수정주의자들은 개인을 교환할 수 있는 기능(307)으로 만들고 개성을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현실의 소외상태를 인식하지 못한다. 반대로 프로이트의 ‘생물학주의적’ 기본 개념들은 이데올로기를 넘어선다. 물화된 사회를 그물조직으로 다루고 현실의 참된 개념을 포함한다. 유기체의 ‘기본’ 방향은 긴장의 이완을 향하는 충족과 휴식과 피동을 향하는, 집요한 충동들 안에서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시간에 저항하는 것은 자기애적 에로스의 본질만은 아니다. ‘진보’와 ‘정신건강’이 여러모로 부적당한 사회 질서에서 나타나는 사실과 반대되는 의미를 가질려면 가학-피학적(308) 경향들을 정신적 건강의 진보적 방향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순응주의적 심리학은(설리반) 정신적 건강을 ‘적응의 성공’ 및 진보와 동일시 하는 조작주의적 인식으로 프로이트가 비인간적 사회에의 적응이라는 치료의 목적에 보류시켜놓은 조건들을 제거하고 정신분석을 지나치게 이 사회에 맡겨 버린다. ‘개성’(311)은 억압과 공격을 내면화하고 성공적으로 이용한, ‘쇠약해진’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상주의 윤리학의 착각을 프로이트는 파괴한다. 개성발달의 차이는 인류 공통의 운명인, ‘나날의 불행’의 균형 없는 몫과 균형 있는 몫의 차이이다. 불행의 균형 있는 분배는 치료가 성취할 수 있는 극한인 것이다.
이 ‘최소계획’에 반대하여 프롬과 수정주의자들은 ‘인간 잠재력의 최적 발달과 그의 개별성의 실현’을 선언한다(312). 프롬은 개성의 생산적 실현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첫째, 쾌락 원칙의 ‘정화’와 행복과 자유의 내면화, 둘째, 구속과 불행의 합리적인 억제라는 이중의 억압에 의해서만 계속될 수 있다. 생산성·사랑·책임은 체념을 포함하는 한에서만, 사회적으로 유용하거나 행복의 포기를 통해서만 가치들이 된다(313). 사랑은 성욕에 부가된, 승인조건들에 맞춘 반쯤 승화되고 금지된 리비도일 수밖에 없다. ‘현실주의적’인 의미가 된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용법은 기존의 현실원칙에 현실원칙의 너머에서만 구원될 수 있는 약속의 위엄을 부여함으로써, 둘을 동시에 뜻하는 모호성을 이용한다. 그들의 문체는 설교가나 사회사업가의 문체이다. 고상하고 명확하며 선의와 관용을 담으면서 초월적 가치들을 일상의 사실로 만드는 근엄한 정신에 의해 움직인다. 가짜가 진짜로 여겨진다. 프로이트의 용법은 보이지 않는 물음표가 있거나 부정적 내용이 명확히 진술되어 있다(314). 신프로이트 학파의 사회학적이거나 문화적인 정향은 적응의 치료는 거부되고 성공의 신성화는 비난된다. 정신분석 자체가 일종의 사회비평이라고 한다(315). 프로이트의 저작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건강과 지식, 정상과 자유의 긴장이 여기서 사라진다.
프롬은 ‘시장경제’와 그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데 문제는 생산성과 ‘더 높은 자기’라는 가치들의 재평가에 이르지 않는다. 수정주의 철학의 성격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들을 동화시킨다. 긍정이 비판을 흡수한다. ‘더 높은 가치들’이 이를 배반하는 그 조건들 안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것처럼 방치한다. 내면화의 억압적 특징들을 증명한 프롬이 내면화의 이데올로기를 다시 유행시키고 있는 것이다(316).
인간의 열망들과 그 충족이 ‘더 높은 자기’로 내면화되고 승화되면, 사회문제들은 주로 정신의 문제들이 되고 해결은 도덕의 과제가 된다. 수정주의자들의 사회학적 주체성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정적인 투쟁은 인간의 ‘영혼’안에서 벌어진다. 생물학적 영역, 특히 성욕의 경시는 무게중심을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드에서 자아로, 아직 승화되지 않은 표현들에서 이미 승화된 표현들로 옮긴다. 본능적 억압이 뒷전으로 물러나고 인간 실현에 미치는 결정적 중요성을 상실함에 따라 사회적 억압의 깊이도 감소한다. 결국 신경증적 개성의 발달에 끼치는 ‘사회조건들’에 대한 수(320)정주의적 강조는 사회학적으로도 심리학적으로도 프로이트의 ‘무시’보다 훨씬 더 비논리적이다. 물질적 욕구들은 평가인하되고 사회가 차지하는 부분이 경시된다. 신경증은 본질적으로 도덕의 문제로 나타나고 자기실현에 실패한 원인이 개인에게 있다고 여겨진다.
프롬은 리비도의 역할을 극소화하고 프로이트 이론의 내면적 방향을 역전시킨 오이디(325)푸스 복합심리를 ‘성의 영역에서 대인관계의 영역으로’ 재해석한다. 근친상간적 소망의 본질이 ‘성적 갈망’이 아니고 보호받고 안전한 어린애로 남아있고 싶어하는 욕망이라고 본다. 프롬의 이데올로기적 해석은 자유란 만족에서 분리되는 불행의 수락을 의미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고통스럽고 억압적인 자유를 거부하는 항의라고 암시한다. 오이디푸스의 ‘성적 갈망’은 여자로서의 어머니, 만족의 여성적 원(326)리이다. 여기서 수용성, 휴식, 고통 없고 완전한 만족의 에로스는 죽음의 본능(자궁으로 돌아감)에 가까워지고 쾌락원칙은 열반원칙에 가까워진다. 만일 오이디푸스적 소망이 보호와 안전을 추구하는 소망일 따름이라며 이의 복합심리는 본질적으로 교육의 문제가 된다. 그것 자체가 사회의 본능적 위험지대를 폭로하지 않고도 처리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327).
수정주의는 죽음 충동을 거부한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파괴하기 위하여 산다고 가정하지 않았다. 파괴의 필요를 제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안전과 행복을 지키고 싶기에 파괴를 원한다는, 개인과 국가의 공격을 정당화하는 데는 정신분석이론이 필요치 않다(327).
수정주의적 논의는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충동들이 역사의 ‘변화’에 지배되므로 상당히 변경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경시한다. 죽음의 본능의 에너지가 ‘더 좋은 미래’를 획득하려는 노력들을 반드시 ‘마비시키지는’ 않는다. 시장 ‘경쟁’의 잔인성의 제거만으로는 ‘더 좋은 미래’를 실현하지 못한다. 문화구조의 근본적 변화뿐 아니라 본능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현재와 미래를 가르는 틈을 은폐하는 수정주의적 ‘정신화’ 때문에 마비된다. 프로이트는 장래의 사회변화가 인간의 본성을 충분히 바꾸리라고 믿지 않았다(330).
신프로이트주의자들은 무게중심을 유기체에서 개성으로, 물질적 토대들에서 관념적 가치들로 옮겨서 프로이트의 내적 방향을 역전시킨다. ‘문화적 적응’은 객관적 실체들-주어진 사실들의 형태로 완성된 결과들인, 사(331)회적 제도들과 사회적 관계들을 만난다. 발달된 의식 수준에서만 문화적 환경이 생물학적 수준 이상으로 성격과 개성을 결정한다고 정의함으로써 심리학적 중점을 초기상태에서 성숙상태로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 반대로 생물학적 요인들을 경시함으로써만, 본능이론을 절단함으로써만 개성은 객관적 문화 가치들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본능적 욕구들의 영속적인 진리가치를 포기하면서 수정주의자들은 현실원칙의 부정적 특징(도덕의 문제, 종교적 태도)들에 굴복한다(332).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 마르쿠제의 논리는 프로이트의 ‘본능의 억압’ 가설에 충실하고 본능의 해방을 목표로 삼는 것. 현대 자본주의 사회나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 모든 개인의 행복을 지향함. 서구의 전통 사유(근대성)를 부정하고 불행의 원인을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에 있다고 봄. 그러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이성의 사용에 있다고 보아 새로운 합리성으로, 이성 능력을 회복하자는 것. 근대의 산업화 기계화가 인간을 철저하게 지배하는 부정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함.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마르쿠제)가 본능을 다룬 것이 특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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