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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사회 스튜어트 휴즈 / 4. 무의식의 회복 / 2022.02.04. / 화니짱

 

철학적 과학적 배경

파레토와 프로이트는 파이잉거의 유명한 마치~처럼이라는 지식의 정의를 암암리에 반영한 사람들이었다. (131) 과학에서의 허구라는 그의 개념은 후에 베버가 이념형이라고 부른 것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파이잉거는 자기 자신의 입장을 실증주의적 관념론’, ‘관념론적 실증주의’, ‘비판적 실증주의심지어는 논리실증주의라고 다양하게 정의했다. 그의 저서 대부분은, 20세기의 처음 10년 동안 공유재산이 된 지적 일반화의 허구적 성격에 대한 견해를 장황하고 분명하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파이잉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허구와 가설을 명확하게 구별했다. 과학적 가설의 자연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그는 실증주의(132)자에 끼게 되었다. 한편으로 허구의 인위성을 강조함으로써 그는 실증주의자들의 적들이 대담한 상상을 펼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2. 베르그송과 직관의 사용

베르그송의 공격적인 반실증주의는, 지난날 실증주의에 대한 충성심을 부정함으로써 생긴 것이었다. 그는 제논의 역설이 그동안 만족스럽게 논파되지 않은 이유를 언제나 잘못된 방식으로 접근한 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단 한걸음만 나서면 기계론적 주지주의적 사고의 모든 기초가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이 접근법의 오류가 운동을 통과한 거리와 혼동하고, 시간을 공간과 혼동한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 논의는 운동과 시간을 거리와 공간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은 근본적으로 비례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베르그송은 주장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듯이, 자연과학과 논리학은 공간(또는 그 형이상학적 모사인 물질)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었고 경험적 연속성이라는 의미의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말할 수 없었다. (137)

우리는 자신의 의식에 정신을 집중시킴으로써만 인간의 경험을, 습관적으로 잘라놓은 분리된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적 이해가 바로 우리가 흔히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해서 시간은 적극적인 개념이 되었다. 시간은 시인과 사상가들이 불멸성의 탐구에 의해 저지하려고 한 변화와 쇠퇴의 단순한 원천이 아니라 자발적인 창조의 수단으로 확립된 것이다.

<창조적 진화>는 매우(138)불확실한 생물학적 유추에 근거를 두었고, 베르그송의 언어의 마술로 그 논리적 결함을 은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기본적 방향만은 명확하다. ‘보다 높은정신적, 도덕적 가치를 온건하게 옹호하고 인격의 불멸성이라는 관념에 아양을 떨기를 방향을 정해놓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말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에 실제로 입교하지는 않았지만 충심의 공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페기는 베르그송의 추론의 방향은 근대 과학과 일치하지만, 사실 그것은 실증주의적 배경 속에서 자라난 세대를 종교적 신앙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가능한 최상의 길을 제시한 것이며, 교회의 가르침과 베르그송의 기억과 습관의 이론 사이에는 깊은 평행관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139) 결과적으로 베르그송이 한 일은 위대한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이 언제나 깨닫고 있던 인간의 경험에 관한 어떤 핵심적 진리를 준과학적 용어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140)

그러나 베르그송주의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 베르그송은 스스로 설명하려다가 그의 적들처럼 주지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베르그송은 낭만주의적 전통의 반과학적 철학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을 실증주의자들이 부여한 것보다 더 높은 위치로 끌어올렸다고 변명했다. (141) 베르그송 자신은 반동이 정치학에 철저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의 이론을 반동의 정치학에 응용하기 시작했다.

베르그송 철학이 과도적 역할을 한 데는 적어도 두 가지 방향이 있었다. 지속의 강조(자연과학의 방법과 직관적 공감 또는 내적 이해 사이의 근본적 대립의 강조)는 역사적 지식의 문제와 직접 이어져 있었다. 독일인이 이해라고 부른 것, 크로체가 역사 이해의 섬광이라고 부른 것, 이러한 것들은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에 함(144)축되어 있었다.

베르그송이 공간과 수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의식의 심층이라고 부른 것을 프로이트는 보다 정확하게 무의식이라고 이름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프로이트는 베르그송이 단지 엿본 데 지나지 않은 지식의 영역을 열어놓았다. 베르그송의 기억과 습관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사실 멀리 떨어져서 곁눈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실제로 정복한 사람은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와 베르그송은 생리학을 통해 인간의 의식에 대한 본질적으로 비물질적인 개념(과거의 전체적 보존)에 도달했다. (144)

 

3. 프로이트 : 인식론과 형이상학

어린 시절에는 친구도 적도 동일했다. 프로이트 사상의 이원성과 양극성은 어린 시절의 갈등(한 살 위의 조카)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었다.

일생을 통해 프로이트는 과학자인 동시에 예술가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예술가적 경향이 우세하게 되었다. “젊었을 때, 나는 사변에 강한 매력을 느꼈으나 이러한 경향을 무자비하게 억제했다.” (147)

프로이트에게는 속기 쉬운 성향(플리스)이 있다. “그는 불가능한 일, 뜻밖의 일을 즐겨 믿으라고 했다. 이것은 헤라클레이토스가 수세기 전에 지적한 것처럼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프로이트는 실증주의자였는가? 분명히 그는 외부 세계의 실재를 의심한 적이 한번도 없었고 또 이러한 실재의 본질에 대한 사변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연구의 일반적인 틀 속에서 프로이트는 원래의 입장에서 실증주의자에 속한다.

그는 유물론자였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주 분명하게 부정적이다. 그에게 물질은 마음의 작용에 본질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호간의 직접적 관계를 밝혀주는 실마리는 없다.

역설적이지만, 임상적 자료에 대해서는 단일한 결정 요인보다 오히려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 : 한 관계에는 다른 관계들이 이미 들어와 있으며, 도잇에 이 관계가 다른 관계들의 존재조건이 된다는 개념) 요인을 강조하면서도, 프로이트는 이러한 자료의 단일한 원천을 추구했다. 이른바 초심리학에서 그는 경제학, 지형학, 역학으로부터 끌어낸 비유에 의해 마음을 설명했다. 물리학적 지유에 의한 마음의 설명을 통해 우리는 프로이트의 잔재적 실증주의의 최종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측면에 도달한다. (153)

프로이트의 이론은 조잡한 실증주의적 용어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그가 늙어갈수록 이러한 용어는 더욱 적합하지 않게 되었다. 프로이트 말년의 사회적 사변을 다룬 저서에서는 그의 공상은 그때까지의 단조로운 이미지에서 끊임없이 벗어나고 있었다. 창조적인 상상(이것은 무의식 자체의 작용이다), 원래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 고안된 용어와 결부될 수 없는 것이었다. (154)

프로이트는 말년에 과학자와 의학자인 동시에 철학적 문학적 인물이 되었다. 실증주의의 용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실증주의적인 심성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베르그송과는 달리, 무의식의 복원을 경험으로서의 시간이라는 문학적 감각의 용어로만 표현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무의식의 작용을 정연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의식은 통상의 논리 규칙에 따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비논리적인 논리가 작용할 때 따르는 기묘한 규칙을 밝히려고 했다.(155)

 

4. 프로이트 : 사회철학

프로이트는 보수주의이길 자처했다. 그리고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그의 회의에서 파레토와 모스카, 그리고 그 밖의 20세기 초 보수주의적 이론가들의 태도와 비슷한 것을 발견한다.

생물학을 강조하는 것은 문화가 만능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성질에는 문화적 제어를 넘어서는 잔재가 있고 이(158)러한 잔재는 자연적인 것이기는 하되 문화 자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만들고 문화가 절대적인 것으로 되는 것을 방해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마르쿠제는 프로이트 이론의 땅 밑의 흐름-비억압적인 문화는 불가능하다라는 합리화를 뚫고 나오는 요소들-을 추적했다. 프로이트의 사회적 사변은 문명과 야만, 진보와 고뇌, 자유와 불행 사이의 내면적 결합의 엄청난 필연성을 드러내어 문제로 삼으려 하는, 항상 새로워지는 시도라고 마르쿠제는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희망에 대해 거의 환상을 갖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과 환자들의 무의식을 너무나 깊이 조사했기 때문에 인간이 선을 행할 가능성에 대한 관습적인 신뢰를 가질 수 없었다. (170)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발견은 바로 낙관적 기대의 승리를 증명하는 것이다. 즉 역설적이게도 어느 누구보다도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의 정당성을 파괴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인 프로이트가 사실은 우리 세기가 알고 있는 계몽주의의 소산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근본적 전제는 진리탐구는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되며 지식만이 이성을 움직이게 하고 이성만이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71)

프로이트는 이성과 실재론과 인간애를 현명하게 결합해 존재라는 현실과 직면했다. 그는 종교의 위안을 거부하는 용기를 가졌고, 더 나아가 순수하게 세속적인 자신의 신념을 솔직하게 발표하는 보다 큰 용기를 갖고 있었다. “삶을 견뎌내고 싶거든 죽음을 준비하라고 그는 권고했다.(172)

 

5. 융과 집단 무의식

융은 베르그송과 프로이트의 접점이다. 리비도 개념을 생의 에너지의 충일(성적 함축을 제거함으로써)이라고 일반화하여 정의함으로써, 융은 리비도를 베르그송의 생의 약동과 동일한 것으로 만들었다.

융의 해석자는 그와 프로이트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로이트는 역사를 이해하지 못했고 종교를 이해하지 못했다.” (174) 융은 긴 생애를 통해 베르그송보다 훨씬 더 신비주의에 기울어졌다. 이러한 지적 경향으로 말미암아 그는 역사의 모호성에 대해 프로이트의 감각보다는 참된 역사가의 감각에 더 가까운 감각을 갖게 되었다. 융은 공공연한 직관주의자, 비합리주의자가 되었다. 이 연구의 등장인물들 중에서 참된 의미에서 낭만주의자 또는 비합리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와 폐기뿐이다. (175)

프로이트는 아주 분명하게 집단적 마음을 말하고 있다. 문외한이라면 집단적 마음과 집단적 무의식은 어떠한 점에 차이가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프로이트 정통파는 기억의 흔적이 유전된다는 관념은 어떠한 위인이라도 벗어나기 어려운 실수 중의 하나이며 프로이트 이론의 주요 윤곽에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무시해왔다. (177)

정통파의 엄격한 검토를 통해, 융의 가르침은 프로이트가 생애를 바쳐 그 불충분성을 밝힌 강단의 의식심리학에서 가르치는 것과 거의 다름없음이 밝혀진다. 기본적으로 그의 가르침은 도덕적, 정신적 향상의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상 신비주의자들이 언제나 알고 있었던 것, 그리고 앞에서 본 것처럼 참으로 전달할 수 없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178)

그러나 융을 협잡꾼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이리라. 융은 보다 철저하게 훈련받은 프로이트의 정신에서 간과한 역사, 종교, 신화에 관한 일을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은 기껏해야 융이 과학자이자 프로이트의 후계자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지적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비법전수자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가르침을 보다 깊이 하려고 했으면서도 그가 이루어놓은 일은 정반대였다. 그는 정신분석이론이 점령한 모든 전진기지로부터 후퇴했다. 그는 정신분석의 최소한의 원리인 무의식, 유아성욕, 억압, 갈등, 전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거나 완전히 완화했다. 그의 비판자들은 이렇듯 확고한 토대 위에서 그를 반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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