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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의 망명 H. 스튜어트 휴즈

220209_지식인들의망명 3장(2)_꽃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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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2. 2. 9.()

발제 : 꽃지

 

3. 노이만 : 마르크스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에서(P96)

 

- 독일출신 망명 지식인들 중 지도급 인사, 미국 사회과학계의 중요인물(영국->미국). 노이만의 자연적인 성향이 두 번의 결정적인 사건으로부터 방해받았다. 나치즘, 냉전(134)

- 모든 공허한 것들과 허위 혐오. 기존의 제도와 구조에 대한 비판자, “순응주의적 정치이론은 전혀 이론이 아니다.” ‘폭로를 정치학자의 주된 임무로 주장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충실. 국가사회주의 경제 구조와 기능을 분석할 때 법과 행정의 형식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135)

- 비히모스사회경제적 분석 : 국가사회주의 경제는 기업의 이익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생명력을 긍정하는 것. 독일의 지배계급은 이해관계가 얽히고 상호보완적인 네 개의 집단 대기업, , 관료, 군부- 중 첫 두 집단 간 관계가 전체제의 작동에 핵심적인 역할(공생관계). “폭력을 휘두르던 자들은 점점 기업가로 변신해가고 있으며, 기업가들은 점점 폭력을 휘두르는 자로 변화해가고 있다.”(136)

- 비히모스보조적 분석 : 소련과 독일은 다른 원칙에 의거해 작동되며, 나치 독일은 더 이상 전통적 의미에서의 국가라고 할 수 없다. 윤리나 법이 완전히 해체된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모든 관습적인 규범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사회의 구별도 전반적인 대중정치화경향 속에서 완전히 해소되었다.(138)

- 빗나간 예측 : 대중적인 반유대주의 세력을 과소평가 독일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덜 반유대주의적인 민족이라 평가. 인종주의적, 사회적 제국주의는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중 가장 위험한 공식이지만, 그것이 독일의 노동계급을 심각하게 오염시켰다는 사실만은 부정했고, 나치 정권은 연합군 세력 뿐 아니라 독일 피압박 대중의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에 의해서도 전복될 것이라는 신념 견지. 또한, 45년 이후 4년간 좌절의 시기에 독일 재건은 전통적인 중산계급을 근간으로 이루어졌다. , 그가 비히모스에서 이미 해체되었다고 공언했던 그것(139)

-독재론에 관한 노트: 제도화된 권위에 불복종하려는 결단은 각 개인의 자기 양심에 의거해서 스스로 내릴 수밖에 없다. 산업사회가 현대사회의 정반대되는 두 가지 추세, 자유화 추세억압강화 추세두 가지를 동시에 다 강화하고 있음을 발견(141)

- 냉전결과 나타난 지적, 도덕적 가치의 왜곡 현상에 대해 항의(마키아밸리즘, 선동과 비방을 통한 독립적인 사고방식의 전도, 워싱턴의 충성심사계획 등). 어떻게 하면 스탈린주의나 정치적 반동을, 혹은 동시에 양자 모두를 이롭게 하지 않으면서 서구 민주주의의 비판자라는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의 딜레마 속에서 노이만은 이 고민스런 자문의 강도가 과거의 나치즘 경험 및 그에 따른 모든 환상의 박탈로 말미암아 그 극한에까지 도달한 경우(142-3)

- 불안과 정치: 불안의 정치적 의미. 새로운 정치학에 대한 구상이면서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 사조를 받아들임. 현대세계를 괴롭히고 있는 고뇌와 죄의식이 사실은 히틀러 같은 독재자나 매카시 같은 선동가의 조작이었음을 이해(143-4)

- 독일인들에게 경험적 연구에, 미국인들에게는 역사와 이론에 좀 더 큰 관심을 보여 그들의 경험주의적 정열에 균형을 이루라고 충고. 미국에서는 계량주의적이고 행태주의적인 접근방식이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 노이만은 정치보다 역사에 포괄적 영향을 줌. ‘역사연구는 반드시 경제관계와 계급관계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배후에 숨어 있는 이해집단들의 압력을 무시하고서는 정치학이나 이데올로기도 이해하기 힘들다.’(146-7)

- 국내정책 우위 주장 : 대외문제는 지속적인 합의에 근거한 국가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지배적 경제관계와 이데올로기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과거의 사상사와는 달리, 노이만의 계승자들은 그 사상들을 그것이 배태된 역사적 배경의 전체 맥락 속에 위치해 놓음 : 사상의 사회사(148)

- 노이만의 전 저작에는 절망에의 유혹에 대한 투쟁이 관통해 있다. 한 개인이 그가 아무리 성실하고 똑똑하고 용감하다 하더라도- 역사의 진로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도 무력한 역사적 상황들이 있다. 기존 사회구조와 제도에 관한 비판적 분석이야말로 정치학자들이 시도해볼 만한 유일한 일. 그의 인생이 하나의 고귀한 실패였다.(149)

-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도 파시즘에 대해서도 침묵해야 한다. 파시즘의 경제구조와 정치조직 사이에 중요한 연관관계(150-1)

파시스트 지배란 사실 독점자본주의의 지배를 가려주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파시즘 체제가 의도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기능했다.

파시즘이란 독점자본주의의 적절한 표현양식이며, 아직 파시즘화되지 않은 주요 산업국가들도 곧 그렇게 될 것.

대기업가들은 처음에는 망설이지만 일단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권력을 잡기만 하면 대부분 그들을 지지하게 되며, 그 대가로 파시스트 정권으로부터 실질적인 이익을 부여받는다. 살베미니, 노이만(대기업과 당의 관계 강조. 당의 지도권이 결국은 최종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있음. 파시즘이 독점자본주의의 유일한 혹은 필연적인 표현형태라고 보지는 않았다. 기업의 상부지도층과 당 사이에 일종의 공생관계가 형성되었고, 이 상호관계가 전 체제의 작동에 결정적인 역할)(150-1)

 

4. 아렌트와 전체주의의 위협(P152)

 

- 냉전의 부산물로 파시즘이라는 표현은 점점 사라지고, 전체주의라는 표현 통용. ‘나치즘(파시즘)과 공산주의(전체주의)는 동일하다.’ 새로운 형태의 지적 순응주의 (152)

- 아렌트전체주의의 기원: 냉전 절정시기 1951년 출판. 19세기 말 외관상으로는 서로 아무 상관없어 보이던 세 가지 운동이 모두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전체주의 탄생에 기여했다. 유럽의 계급구조와 민족국가 개념 붕괴를 반영(계급과 민족국가만이 각종 인권에 실체를 제공해 왔기 때문에 그것들이 제거될 때 인권은 한낱 추상적인 수식어로 전락하고 말았다.)(153-4)

반유대주의 : 유대인과 민족국가 간의 밀접한 관계때문에 필연적으로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은 유럽 여러 정부에서 재정가 역할을 함으로써, 그 국가를 정복해야 할 적으로 삼고 있는 여러 정치운동의 미움을 샀다. 그러나 반유대주의가 성행하던 시기는 유대인들이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때로, 그들은 그들의 무용한 재산 때문에 보편적인 증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동시에 권력의 상실로 말미암아 경멸의 대상이 된 것(154)

해외 제국주의 : 팽창을 위한 팽창이론인 제국주의는 유럽의 정치구조 안에 전혀 통합될 수 없던 후진지역들을 민족국가의 지배 아래로 끌어들였다. 인종주의가 자의식적인 이론과 실천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가 인류 역사상 처음이었다. 노동에 대한 경멸감, 영토상의 제한에 대한 증오, 자기 근거의 전반적인 상실, 신성한 선민의식에 대한 행동주의적 신앙으로 인한 만행과 대량학살(155)

종족적 민족주의 :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외형상 목표아래 사실상 그중 한 지배 인종의 세계 지배 주창. 민족적, 개인적 야망이 좌절된 사람들에게 그들의 우월성을 확신시켜주는 위안책으로 작용(155)

- 사회의 전 구성원이 계급 상 몰락을 겪는 과정에서 군중도 대중으로 분해. 대륙적으로 사고하고 세기적으로 느끼는 운동을 위해 자신의 무력한 개인성 포기. 상식이 완전히 무시당하는 광기 상태(155)

- 역사해석의 미숙함과 충격요법. 전체주의 현상들 가운데 나치 방식과 소력 방식의 차이를 무시 또는 간과한 채, 양자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취급. 소련의 공산주의가 나치즘과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갖는다고 제시하면서 그에 따른 근거는 없음. 전체주의와 광기를 동일시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실천 가운데 경제적 합리성을 아예 무시해버렸고, 소련의 현실은 나치의 방법에 비해 보다 합리적인 동시에 보다 전체주의적이기도 했는데 그러한 일반화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두 체제 차이점에 대한 평가 결여(157)

- 이념형으로서의 전체주의는 1950년대 말 단순히 도식적인 분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이데올로기 상황 속에서 점점 효력을 상실했고, 양극세계의 개념이 무너지고, 자유와 전체주의적 지배 간의 명백한 구분도 효력을 잃었다. 1960년대 제3세계에서 그 양자 사이에 무한한 단계가 있으며, 전혀 단절 없이 이어진다고 말하는 게 훨씬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다.(158)

- 전체주의론은 사회현실보다도 통제기술-생활의 공포스러운 표면-에 주목해 히틀러나 스탈린의 완전한 권력 요구만을 표면상의 가치로 내세웠다.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자신이 결코 이룩할 수 없었던 정권을 기술하기 위해 무솔리니가 만들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역사적 현실보다는 이상, 열망 등으로서 제기되었던 것이다.(158)

 

 

5. 우익급진주의(P158)

 

- 파시즘 재정의 : 1960년대 파시즘이라는 용어 북귀, 최소한의 개념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여러 나라의 변종들을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정의(159)

- 놀테 파시즘의 세 얼굴: 1930년대 중요한 자료 배제하고 이념적 서술방식 채택. 파시즘 추종자들의 사회학보다 주요 지도자들의 이데올로기적 전기 강조. 파시즘은 넓은 의미에서 반모더니즘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의 산물이라는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파시즘을 구성하는 여러 제도의 구체적인 작동방식들을 거의 해명할 수 없었다. 반모더니즘적이고 반합리주의적이라고 정의되는 운동들이 어떻게 경제적 집중과 대기업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160)

- 사회경제적 해석(이탈리아) : 기업가들에게는 경제가 모든 것이었던데 반해 무솔리니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정치였다. 각각은 상대방을 이용했으며, 각각은 서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자본주의는 손상을 입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사적 자본가에게 수익을 내지 못한 조치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동시에 마음껏 투자에 전력해서 이윤을 올릴 수 있게 풀어주었다.(161) 국가의 이론적 토대가 전혀 도전받지 않았음. 파시스트 통치의 정상적인형식(162,3)

- 사회경제적 해석(독일) : 히틀러는 대기업의 재정적 지원에 별 도움을 받지 못함, 나치의 통치는 이탈리아보다 더 광범위한 사회변동을 몰고 옴, 3제국의 정치와 이데올로기적 지배는 경제력에 대해 우월한 힘을 행사 사회적 규범의 해체, 특이하고도 극단적인 측면(162)

- 1960년대 새로운 파시즘의 사회경제적 토대 분석. 전 산업적 전통이 강력하게 잔존하고, 산업화와 거리가 먼 곳에, 따라서 산업화의 대두가 과거와는 큰 단절 및 비공업계급의 실질적인 손실을 낳은 곳에서 파시즘이 융성했다. 파시즘은 산업화 과정에서 패배한 자들의 운동. 파시즘적인 우익 급진주의는 근대사회의 타락과 과거의 훌륭한 가치에로의 귀환(전 산업적 가치 다시 회복된 공동체 내에서의 계급 간의 화해-)을 설교. 결국 혁명적인 대중운동의 목표가 흥미롭게도 반혁명적인 것으로 귀착되는 모순을 낳고 말았다.(164)

- 실패이유 : 대규모 산업자본의 세력이 분쇄되지 않았다. 전쟁 시 경제적 토대를 제공해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중공업만 가능. 파시스트 체제에서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성이라는 주장은 마침애 기묘한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경제의 현상질서는 유지되었던 반면, 그 운동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하던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희생되었다.(165)

-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의 공업국가로 근대화 과정은 역전시킬 수 없었으며, 오히려 파시즘 몰락 이후 더욱 가속화되었다. 파시즘이 권력을 잡고 나서 펼쳐 보인 중요한 사회적 드라마는 중산계급의 두 분파 , 자신의 충성심에 대해 별로 보상받지 못했던 구 중산계급 하층 출신의 충실한 추종자들과, 자신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이윤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상층 신 산업부르주아지-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필사적 투쟁이었다는 계급관계의 분석 입증(165-6)

- 마르크스주의적 해석방식 : 파시즘 비판에서 여타의 도식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헤겔적인 소외 개념 재강조. 파시즘에 비해 보다 폭넓고 침투력도 컸던 한 현상에 대한 철학적 비판, 즉 대중사회라고 불리게 된 것에 대한 비판에 영향을 미침(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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