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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6 지식인들의 망명 발제 개벽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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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의 망명 H. 스튜어트 휴즈/ 22. 01. 26./ 개벽크

 

 

3장 파시즘 비판

 

유럽의 지식인들은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지도하는 운동을 제어할 만한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파시즘이 혁명적인지 반동적인지 좌파에 속한 것인지 우파에 속한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94)

 

파시즘의 기원을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민족통일의 지연과 불완전함, 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그에 따른 두 국민의 실망감, 전쟁 직후의 경제혼란과 1930년대 초의 대량 실업 등으로 추적해 들어갈 수 있었다.(95)

 

파시즘에대한 연구는 환경 혹은 기질상의 요인 때문에 전혀 가치 중립적이지 못했던 과거의 연구와는 달리, 과연 우리가 일종의 장기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판단들에 도달할 수 있을 것 이냐하는 문제가 파시스트 체제의 연구를 통해 제기되었던 것이다.(96)

 

 

 

1.최초의 시각 : 보르게세, 만하임, 프롬

 

가장 영향력이 있는 파시즘 비판가 세 명인 보르게세, 만하임, 프롬은 모두 파시즘 현상에 대한 연구를 마지막이나 도입부에 배치한 것으로 보았을 때 파시즘에 대해서 암시 또는 단초만을 제공하고 전면적인 분석을 시도하지 않았다.(97)

 

보르게세는 파시즘 특유의 요소들은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것이었으며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의 관념적 정서적 배경속에서 찾았다. 파시즘은 무엇보다도 문화적 정치적 낭만주의의 타락한 형태였으며, 혁명이 아니라 퇴화였다. 힘이 곧 정의를 만들어낸다는 믿음과, 정의의 이념을 힘의 이념으로 대치하는 과정 속에서 파시즘은 하층 중산계급의 신조가 되었다. 파시즘이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국민들이 영광과 쇠퇴가 극적으로 혼합된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98)

 

보르게세는 나중에 무솔리니는 훌륭한 소설가의 시각에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보르게세는 파시즘을 감정주의와 반지성주의의 폭발로 규정한. 그리고 그 정의에 충실하게 죄는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구원도 마음속에서부터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99)

 

1차 세계대전 직전 부다페스트의 청년 만임은, 루카치의 지도하에 지식인을 미래사회의 구원자로 간주하는 일군의 좌익 경향의 작가집단-그들 중 대다수가 만하임처럼 유대인 혈통이었다-에 속해 있었다. 만하임의 경우, 마르크스주의 및 정치적 좌익과의 관계는 보다 모호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자유로이 떠도는정신으로 보던 과거의 견해는 지식인을 타고난 사회 개혁자라기보다는 여러 계급과 여러 이해관계의 조정자로 보는 견해 속에 그대로 반영되었다.(101)

 

만하임은 권위주의적 통치의 출현을 합리성의 부식과 연결시켰고 기술적 합리성과 대중감정 간의 운명적인 이율배반-, 정교한 장치와 그 속에 내재하는 야만주의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서 만하임은 파시즘 운동의 심리학적 차원을 간파할 수 있었다.(103)

 

만하임은 보르게세와는 다른 경로를 통해서 결국 같은 사회계급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보르게세가 반 지식층의 신낭만주의를 19세기 원천으로 추적해 들어갔다면, 만하임은 프로이트화한 베버의 설명을 좇아 엘리트에 의한 부정적 선택을 묘사했다.(104)

 

프롬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헤겔주의자들과도 결별하고 7년 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출판했을 때, 그는 이미 프로이트 수정주의 및 그와 유사하게 희석된 마르크스주의를 독특하게 융합시킴으로써 새로 이주한 나라에서 광범위한 독자를 확보하게 되었다.(106)

 

프롬은 20세기에서처럼 16세기에도 그 결과는 강제적인 확실성 추구” “불안으로부터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지도자, 즉 루터나 히틀러의 품 안으로의 절망적인 도피였다고 말했다.(105)

 

프롬의 저서인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역사적 대비-종교개혁기의 독일과 바이마르 나치기의 독일-를 너무 무리하게 끌고 나갔으며, 설명상의 종합-프로이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을 지나칠 정도로 번듯하게 짜 맞추어 놓았던 것이다.(107)

 

 

2.살베미니 : 학문과 논쟁 사이에서

 

보통 가에타노 살베미니는 이미 멸종된 이탈리아의 지적 거장들 가운데 최후의 인물로 기술된다. 그는 급진적 프티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대변인이라는 특징을 이룬다.(108)

 

살베미니의 단순한 그의 성격이 형성된 요소들 가운데 그가 이탈리아 남부의 불안한 중산계급 하층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가족은 치열한 노력으로 소농에서 프티부르주아로 상승했으나 1890년대의 경제불황으로 다시 프롤레타리아화 되고 말았다.(110)

 

살베미니의 유년기는 그람시와 아주 흡사했다. 그람시보다 반세대 앞섰던 살베미니는, 그보다 20년이나 일찍 이탈리아의 사회주의가 남부와 도서지방의 농민들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111)

 

살베미니는 마르크스의 저서 가운데 공산당 선언과 프랑스 현대사에 관한 것들 외에는 읽지 못했다. 사적 유물론을 수년에 걸쳐 주의 깊게 연구한 크로체와는 달리, 살베미니는 마르크스에게서 계급투쟁의 개념을 성급하게 채택했으며 결국 거기서 그치고 말았다. 그의 이데올로기 투쟁과정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증주의 성향의 급진주의자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졌다.(112)

 

살베미니는 논쟁으로서의 역사학과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을 양립시킨다는 점에서, 살베미니는 그의 전생애를 통해 계몽주의와 19세기 실증주의의 전통에 충실했던 것이다. 당연히 크로체는 그런 과정을 방법론적으로 조잡하며 철학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 하여 배척했다.(115)

 

살베미니는 고향 몰페타에서 하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그의 기본적인 목적-그리고 남부의 이해와 각성에 끼친 그의 큰 공헌은 남부의 대중을 정치화하는 것이었다. 농민들이 자신을 지키고 스스로를 위해 투쟁할 수 있도록 기동시키는 것은 보통선거권뿐이라고 살베미니는 주장했다.(116)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살베미니는 이탈리아가 영국과 프랑스의 편으로 참전하는 데 동의함으로써 과거의 동지, 즉 사회주의자들과 완전히 결별했다.(117)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살베미니도 무솔리니에 대해 오판을 했다. 토리노의 좌익 사회주의자들이 살베미니에게 하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할 것을 제의했다. 그들은 살베미니의 출마가 북부 산업노동자들과 남부 농민들의 연대감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살베미니는 거절하고 무솔리니를 추천했다.(118)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무솔리니)와 마치니적 평화옹호자(살베미니) 사이의 간격이 조금씩 벌어지면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119)

 

살베미니는 파시즘을 와해시키는 유일한 길은, 서구 민주주의 열강들이 그것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살베미니는 역사가로서의 훈련과 경험을 십분 활용해 이탈리아에서 배달된 신문 정부간행물 등에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함으로써, 정권의 과장된 수사 밑에 숨어 있는 진실을 밝혀내려했다.(120)

 

이탈리아에서 가장 활동적인 반체제 인사 로셀리에 설득되어 살베니는 새로운 정치운동 정의와 자유를 출범시키는 데 조력했다. 자유주의의 전통과 사회주의의 전통을 융합하려는 로셀리의 생각은 살베니와 일치했으나 정의와 자유가 토리노의 지하운동원들의 영향 아래 공산주의자들 살베미니가 항상 혐오하던 것과 협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자 로셀리의 운동에 대한 그의 신뢰도 점점 시들해져갔다.(122)

 

살베미니는 무솔리니 체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저서 파시즘의 위협 아래에서가 쓰였다. 그는 파시즘 정권의 외교정책에 대한 연구 외교가 무솔리니1932년 파리에서 이미 출판한 바 있었다. 앞의 책과 같이 외교가 무솔리니도 위트 있는 철저한 논쟁서였다.(124)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군수뇌, 고급관료, 대기업가, 당지도자 등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는 일종의 집단과두체제라는 것이 살베미니의 설명이다. 이 과두체제에서는 결코 대자본가들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고용주들은 보호받는 동시에 위협도 받고 있었다.(126)

 

한 세대 전 졸리티가 보통선거권을 부여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솔리니 역시 살베미니가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있던 상태에서 몰락했다. 살베미니는 조국의 통치자와의 대결에 나섰다. 수상 데 가스페리의 기독민주당은 교권주의를 통해 암암리에 보수세력의 이익을 신장시키고 있었던 탓에, 그 것은 졸리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그의 마음에 맞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기독민주당원들의 죄과는 파시스트들과 별로 먼 거리에 있지 않았다.(127)

 

살베미니의 파시즘에 관한 저술들은, 그것의 단편적이고 논쟁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문제점들을 제기했다. 그 이후 모든 파시즘 연구자들은 그가 중단한 지점 즉 무솔리니 통치의 20년 동안 이익을 본 사람들과 손해를 본 사람들에 대한 계급분석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했다.(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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