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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분리할 수 없는 변증법적 관계에서 이론은 실천으로부터 나오고 실천은 이론으로부터 나오며, ‘부르주아사회과학의 위장된 객관성은 분명히 기만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르크스 자신의 말을 자세히 검토함으로써, 과학적 연구와 실천적 교훈의 결합은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밀접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가 주장한 것들의 필연적 관련에 대해서는 자신의 깊은 도덕적 확신을 제외하고 거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음이 더욱더 분명해졌다.

- 사회주의의 승리가 노동자 계급의 우위를 보증하리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 계급의 우위는 결국 모든 계급의 계시적 종언에 의해 소멸될 것인가?

- 계시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 역사적 사고의 전체적인 발전에 어긋나는 철저하게 비역사적인 개념이 아니었던가?(88)

 

사회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도덕적 설교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대조를 통해 우리는 의문에 도달한다. 사회과학자로서의 마르크스는 분명히 계몽주의의 합리적 전통에 속해 있었다. 학자의 입장에서 그는 관대하고 공정했으며, 적들의 저술도 공평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예언자로서의 마르크스는 분노한 사람이었고 논쟁에서는 반대론자들에게 악의에 찬 조소를 퍼부었다. 후자의 입장에서 그의 저술은 우파에 의해서도 좌파에 의해서도 계몽주의의 무덤을 파는 인부의 교과서로 이용되었다.(89)

 

분노한 마르크스와 상냥한 이성을 가진 마르크스라는 대립은 물론 항상 있어온 것이었다. 정치적인 면에서 이러한 대립은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 내의 수정주의자또는 개량주의자와 혁명파 사이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유럽 사회주의자의 유일한 논리적 전술은 의회 활동에 의한 점진적 개혁의 가능성을 최대한도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베른슈타인은 주장했다. 레닌은 혁명적 전복이라는 목적을 지치지 않고 추구하는 견고한 음모적 정당의 필요성을 주장했다.(91)

 

유럽 사회민주주의 내부의 당파 싸움은, 이전에는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이 없던 매우 유능한 사상가들이 왜 1890년대에 마르크스주의를 주목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만 중요하다. (뒤르켐, 파레토, 소렐, 크로체) 그들은 모두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과학적타당성이라는 결정적인 문제에 심취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정말로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불가피하게 그 이상의 문제, 곧 사회에 관한 과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한 과학적 지식 전체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마르크스주의 중에서 타당하지 않은 것을 버리면서 유용하고 암시적인 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1890년대의 혁신자들은 사회 현실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이론을 수립하는 첫발을 내디뎠다.(93)

 

 

[1]. 뒤르켐과 도덕적 정열로서의 마르크스주의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면서 추상적 사변이 아니라 경험적 자료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학의 지적 가능성을 발견했다.(92) 그는 원래 사회주의와 개인에 관한 책을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개인과 사회 일반에 대한 연구로 차츰 확대되었고, 더 나아가서 사회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보다 견고한 기반 위에 다시 세우려는 노력으로 변했다. 뒤르켐이 제시한 견해는, 당시의 사회주의 이론 비판의 대부분이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과학적 타당성이라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본질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적으로 미래를 지향하는것이고, 따라서 참된 과학적 성격을 갖지 못했다. 사회주의는 사실상 하나의 이상이었다.(95) 따라서 사회주의의 항구적인 호소력은, 그 이론의 과학적 위장의 배후를, 곧 그 이론이 나온 구체적 사회환경을 파헤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경우, 양심적인 사회과학자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그리고 마찬가지로 양심적인 사회주의자라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태도-유보와 신중성이라는 태도이다.(96)

 

 

[2]. 파레토와 엘리트 이론

 

파레토의 사회주의 연구에는, 그의 사상이 전문적, 그리고 특히 수리적 경제학의 문제들로부터 일반적 사회학 체계로 옮겨온 과정이 나타나 있다. 뒤르켐과 마찬가지로 파레토도 사회주의의 길을 통해 사회학에 도달한 것이다. 뒤르켐과 마찬가지로 실증주의자였던 파레토는, 마르크스의 거의 모든 저서에 과학적 타당성이 없다고 부정한 점에서는 뒤르켐의 뒤를 따랐다. / 파레토가 조건부의 공감이라는 뒤르켐의 태도와는 거리가 먼 기질적인 적대감으로 사회주의를 연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온갖 계급적 편견 이외에도 고전적 경제학자이며 독단적인 자유무역 옹호자라는 그의 입장 때문에 그는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를 싫어했다.(98)

 

사회과학자의 과제는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이론을 개략적으로 받아들여 그중에서 참된 것과 참되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것이었다. ‘자본노동사이의 투쟁이 끝나면 넓은 의미의 계급적 갈등도 끝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파레토는 결론지었다. 계급의 갈등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파레토는 주저 없이 인정했으나, 그 결정 요인은 단지 경제법칙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이라고 했다.

 

사적 유물론은 근본적으로 다른 이론보다 사회주의에 더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사적 유물론은 보수주의로 방향을 돌려서 위협받고 있는 엘리트들에게 새로운 결의와 자신감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파레토는 14년 후에 그를 현대의 권위주의적 보수주의를 합리화한 위대한 이론가로서 유명하게 만든 사회조직이론의 윤곽을 이미 제시한 셈이다.(101)

 

 

[3]. 크로체와 역사해석 기준으로서의 사적 유물론

 

크로체가 5년 동안 마르크스주의에 기울인 관심은, 그 이전의 그의 지적 생활 및 그 후의 그의 주요한 관심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그의 스승) 라브리올라는 철학자요 학자였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는 확고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당파정치와 관계가 없는 크로체의 경우, 마르크스주의는 자극적인 새로운 지적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크로체는 무엇보다도 역사철학자였다. 그러므로 그가 마르크스 이론과 겨룬 것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역사해석의 관념들을 명확하게 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첫째, 그는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은 역사철학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사실 그는 역사발전의 법칙을 결정하는 역사철학이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하기에 이르렀다. 둘째, 그는 사적 유물론의 올바른 이론은 통속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유물론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헤겔주의자들이 관념(idea)’을 신격화한 것처럼, 형이상학적 유물론은 사실상 물질을 신격화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제외했을 때, 사적 유물론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사적 유물론은 해석의 기준이었고 사료(史料)의 미로에서 방향을 찾는 길잡이였다. 사적 유물론이란 문제를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조명하는 것이었다.(106)

 

과학적으로 문제를 설명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공식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크로체는 말했다. 마르크스의 잘못은 역사에 바탕을 둔 그의 지식을 그 기점 또는 근원을 넘어서서 너무 멀리 확대하려고 한 점에 있다고 크로체는 생각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르크스는 어떤 기존의 사회와도 정확한 관계가 없는 이상적이고 도식적인정의에 도달했던 것이다. 크로체는 준과학적 가설과 역사의 특수한 사료는 확실하게 구별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뒤르켐과 파레토는 사실로부터 논리적 귀납을 한다는 단순하고도 본질적인 실증주의적 공식으로 만족했다. ‘모든 과학적 법칙은 추상적 법칙이라고 크로체는 주장했다. 이 점에서 그의 동시대인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달리 말한다면, 사회과학의 법칙은 경험의 구체적인 자료와는 어떤 확실한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함으로써-그리고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현대의 모든 사회과학을 비판함으로써-크로체는 인간 활동의 연구를 위한 자신의 신()관념론적 기준을 거의 공식화했던 것이다.(108)

 

 

[4]. 소렐과 사회시로서의 마르크스주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모든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 중에 가장 탐구적이고 집요했으며 가장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이고(30여년) 가장 독창적인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재해석하려고 한 사람은 소렐이었다. 소렐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이것이 미덕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사회현실을 보다 원숙하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1899년에 우리는 그가 베른슈타인과 수정주의자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8년 후, 그는 폭력론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혁명적 생디칼리슴의 실천에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그는 레닌의 옹호자라는 사실을 보여준다.(110)

 

크로체와 마찬가지로 소렐은 과학을 본질적으로 실용적인 관점에서 정의했다. 그러나 그는 구체적 현실과 과학의 추상화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크로체와 달랐다. 과학적 명제는 근사치 또는 작업 가설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사회과학 분야에서-마르크스가 제공한 것도 이러한 근사치의 하나였다. 분명히 그것은 불완전했다. 분명히 그것은 부분적이고 감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견해에서 모든 과학적 타당성을 부정해야만 할 것인가?(112)

 

크로체와 마찬가지로 소렐도 사회과학의 성립 근거가 무엇인가를 새로이 정의하려고 했다. ‘필연성운명이라는 개념을 함부로 남용해 이 문제를 혼란에 빠지게 한 것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후계자들이라고 소렐은 주장했다. 사회과학에 결정론을 용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렐은 크로체와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호소력의 감정적 측면에 주목함으로써 다시 한번 이탈리아 친구들을 넘어섰다. 그의 재해석의 도덕적인, 또는 심리적인 측면이다. (나중에 고찰하겠지만) 소렐은 무엇보다도 모럴리스트였다.(113)

 

소렐은 마르크스주의가 추상적 명제로는 그 내용의 반도 결코 제시하지 못한다는 자신의 주장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뒤르켐도 파레토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영원한 호소력을 부여하는 것은 과학적 엄밀성이 아니라 도덕적 정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소렐은 더 나아가 이 거대한 도덕운동 자체에 공감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 이 운동의 본질을 이해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소렐의 경우, 마르크스주의는 종교처럼 결국 상징적 형식에 파묻힌 부정확한 의미의 집합체가 되었다. 그는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만들려는 모든 생각을 포기하고사회주의를 사회시로 재정의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114) 진정한 문제는, 역사의 큰 사건에서 사실상 사람들을 움직여 행위자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상징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재정의함으로써, 소렐은 사회행동을 신화라고 하는 심리적 실재의 가시적 표현으로서 더욱 광범위하게 바꾸어 말할 수 있는 지적 준비를 완료했다.

 

 

[보론]. 그람시와 마르크스주의적 휴머니즘

 

1900년 이후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이중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정당활동을 고무했고, 또 한편으로는 과학적 타당성을 주장하는 최초의 포괄적 사회이론으로서 경험적 사회과학의 기준에 대한 최초의 시금석을 마련했다. 20세기의 이론가와 실천가들 중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가장 정교하고 독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 사람-자유와 강제에 대한 상반되는 충동을 종합하는, 가장 어려운 일을 시도한 사람-은 이탈리아 공산당의 수호성자 그람시였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나타날 새로운 문화의 성격이었다. 그리고 특히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자신과 같은 지성인들의 역할이었다. 그람시는 주요 공산주의 지도자들 중에서 거의 혼자, 낡은 사회로부터 새로운 사회로 옮겨가는 결정적 변화가 될 자유로의 도약이라는 마르크스의 생각을 진지하게 다루었다. 인간의 의지와 개인적 자발성의 결정적 중요성을 다시 강조한 점에서 그는 레닌과 의견이 같았다.(121)

 

소렐과 마찬가지로 그람시도 무엇보다도 모럴리스트였다.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를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나 18세기 계몽주의와 비교하는 것을 좋아했다. 종교개혁이나 계몽주의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는 대중적 성격새로운 통합적 문화를 창조할 임무를 갖고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람시는 크로체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자신의 지적 생활의 한 괄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미래의 문화에서 자신의 사상이 갖게 될 잠재적 중요성에는 무감각했다고 비난했다.(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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