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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의식과 사회 2장 발제.hw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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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890년대의 10:실증주의에의 반항

 

 

선구적인 사상가들이 마치 지적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 행위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는 어떤 시기가 있는데, 1890년대의 10년간이 바로 이러한 시기였다. 10년 동안과 그 직후의 10년 동안에 18세기 및 19세기 사회사상의 기본적 전제들은 비판적인 재검토를 받았고, 이를 통해 현대의 특징이 되고 있는 새로운 전제들이 나왔다.(p50)

 

19세기 말의 연구자들은 거의 모두가 어떤 형태로든 심각한 심리적 변화를 겪었다. 애덤스처럼 낡고 심미적인 해석을 한 학자들에게 1890년대는 세기말로 통했다. 심미적 해석과 지적인 해석의 중간에서는 신낭만주의 또는 신신비주의로 규정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극소수의 사람-페기나 융 같은 2류 사상가들-에게만 적합했고, 위대한 사상가들은 신낭만주의적 경향을 적대시했거나, 프로이트나 베버처럼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 낭만주의를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신낭만주의적 경향은 보다 낮은 차원의 사상, 오히려 반쯤은 통속적인 선동의 차원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90년대의 사회사상가들은 비합리적인 것을 제거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고, 인간의 건설적 목표를 위해 사용하려고 했다. 소렐, 파레토, 뒤르켐, 프로이트-그들은 자기 자신을 기술자나 전문가로 생각했고, 과학이나 의학에 관여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이는 관념론과 선험철학, 1세기 반 전의 추상적 사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암시한다.

 

이들의 과거 지적유산에 대한 공격 전선은 1890년대의 저술가들이 실증주의라고 부르기로 한 것에 집중되었다. 그들은 이 말을 자연과학으로부터의 유추에 의해 인간의 행동을 논하려고 하는 경향 전체를 규정했다. 이러한 경향에 반발하면서, 1890년대의 혁신자들은 그들 시대에 가장 많이 보급된 지적 원리를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씌워놓은 정신적 멍에를 벗어버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1890년대 젊은 반항자들은 실증주의를 어떻게 보았는가? 실증주의를 특별한 원리의 체계라고 보지 않고, 널리 보급된 지적 경향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실증주의는 다윈주의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기묘한 변화를 겪었다. 원래의 18세기적 또는 공리주의 형태에서 실증주의는 사회에서 인간의 문제는 쉽게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한 주지주의적 철학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다윈주의의 영향 아래 실증주의는 그 합리주의적 특색을 상실했다. 유전환경이 인간 행동의 주요한 결정 요인으로서 의식적이고 논리적인 선택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과학적 운명론’, 철저한 반주지주의철학이 되었다.(55p) 그러므로 사회적 다윈주의가 지배적인 문화적 배경에서 본다면, 1890년대의 젊은 사상가들은 비합리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 탐구의 권리를 옹호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1880년대가 종말에 가까워짐에 따라 젊은이들이 질식할 듯한 느낌을 받기 시작한 것은 정신생활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10년과 더불어, 그 끝무렵의 몇 년 동안, 전에는 소박한 자신감을 고취하던 사회적. 정치적 환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실증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물질적 진보에 대한 자기만족적인 숭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20년 동안 불안한 균형이 계속된 다음 유럽의 주요 나라들의 제도적 기구가 다시금 문제로 등장했다.(58p) 독일의 경우에는 1890년 비스마르크 하야 이후 조령모개(朝令暮改)적인 정책에 의해서, 이탈리아의 경우는 세기말 사회질서의 문란과 권위주의적 정치에 의해서, 프랑스에서는 드레퓌스사건으로 인해 드레퓌스 대위의 옹호자나 반대자들이 의지하고 있던 전통적 이데올로기를 재검토하게 한 자극이 되었다. 사회질서의 문란, 경제위기, 제도의 불환전한 기능 등은 사회주의 정당의 성장과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보급에 기여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1890년대의 지적 혁신자들이 맞닥뜨린 가장 선명한 최초의 과제였다. (프로이트는 새로운 영역으로 사회사상을 확대했으며, 파레토와 같은 사람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적 논점을 회의적인 태도로 논박했으며, 크로체와 소렐같은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이를 원래의 의도와는 아주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틀 속에서 마르크스의 원래 사고 범주는 현실성을 잃고 단지 상징적이고 방법론적인 편법으로 변했다.(59p)

 

문학의 재평가라는 과제 전체는 여러 공통된 문제들과 관련이 있지만, 서부와 중부 유럽의 주요 국민공동체에서는 각기 다른 음색과 성격을 갖게 되었다.

(p59) 독일은 전성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우위를 차지, 확고한 과학적역사적 훈련을 추구하는 모든 나라의 연구자들이 몰려드는 나라였다. 마이네케는 독일 전체에서 1890년을 전후해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 지적으로도 새로운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사태가 기울어지고 있었으나 지적으로는 다시 향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적 관심의 부활은 참된 것에 대한 새롭고 보다 깊은 갈망이 새로운 감각으로 나타났다.

시대적 변화의 첫 조짐은 1890교육자로서의 렘브란트랑벤의 저작에서 비롯되었다. 랑벤은 자기 시대를 몰락의 시대라고 공격했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교수와 전문가들이라는 것이다. ‘거짓 객관성을 공격하며, 그는 지식을 보다 철학적으로, 보다 종합적으로, 즉 지적 및 예술적 추구에서 객관성에서 주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최대 지적 중심지로 수도 베를린이 충성스럽고 규율 있는 지적 활동을 암시하는 곳이었다면, 뮌헨은 화려하고 보헤미안적인 곳이었다. 여기에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진 많은 젊은 학자들-예술과 과학을 결합시키려고 한 철학자, 역사가, 사회학자들-이 정착했다(빈델반트와 그의 제자 리케르트). 사람들은 반실증주의적 성격이 뚜렷한 남서독일 철학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남서부로 이주해온 프로이센인들의 정신적 방향을 변화시킨 또 다른 하나는 젊은 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나우만 목사에 있다. 그는 낡은 정치적, 계급적 분열을 넘어섬으로써 선량한 독일인들을 통합하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는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정직하고 사회적 비전을 가진 인격적인 영향력으로 베버나 마이네케 같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우리에게 나우만의 계획은 엄청난 모순으로 보이지만, 전쟁 전 독일의 지성인들이 힘겹게 맞서고 있던 핵심 딜레마-독일의 국력향상-를 교의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 문제를 해결한 방식에 국가적 가치를 위한 자유주의적 가치의 희생이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비스마르크의 방식을 항의도 없이, 오히려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던 아버지세대, 이것이 베버나 마이네게 같은 사람들이 성장한 분위기였다.

독일 지성인들은 빌헬름 치하의 독일의 사회적 분위기-허풍, 벼락부자적인 속물근성, 아첨-에 어떤 형태로든 반발을 느꼈지만 동시에 무수한 실에 의해 그 사회 안의 지배 세력에 묶여 있었다. 베버만이 이러한 상황을 분명하게 폭고했다.

1890년에서부터 1914년까지의 독일에서 상보적이면서도 모순되는 두 과정-문화적 부활과 지식인의 이탈의 시작-을 보았다. 이 두 과정의 긴장관계로 말미암아, 독일의 지적생활은 가장 위태로운 4반세기에 고통스러운 자기 탐구라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p68) 프로이드가 살던 빈의 경우, 성적(性的)인 것과 정신병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원인을 당시 생활의 성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태인 의사였던 프로이트의 개인적 접촉은 그와 동류인 의사였고, 환자 대부분은 동구에서 온 외국인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의 특징인 민족(유대인)과 계급간의 대립은 빈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에는 문학적 응집력이 없었을지라도 사회 내부의 여러 가지 대립은 지적 소산에 다양성과 자극을 주었다. 전성기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세계와 슬라브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p70) 프랑스의 지적 생활은 독일의 지적 생활과 비교해볼 때, 문화적 활동의 중앙집중과 상당히 비판적 정신을 가진 지성인들의 자기 나라 정부에 대한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였다. 1890년대와 1900년대 초의 프랑스 생활의 외적 환경은 정신생활에 유리했다. 국가의 자유주의적 태도와 동료들의 우정이 뒷받침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랑스 문화생활에서 파리가 차지하는 독특하고 압도적인 지위는, 각자의 길을 가면서 문학적 동료들과의 쓸데없는 논쟁으로 그들의 지적 재산을 낭비했다. 알랭은 에세이를 통해 파리의 지나친 자부심에 대항해 작은 도시들의 항의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인재의 중앙집중에는 이점도 있었다. 작가들이 서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지적 생활의 속도와 자극과 활기를 띠게 되었다. 공개적이거나 비공개적인 사상 논쟁은 계몽주의의 참된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지적 우정이 이루어지는 가장 좋은 장소는 프랑스의 고등교육기관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였다. 이 특수 학교는 인문 분야를 가르치기 위해 국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처럼 미래 엘리트를 보충하는 방법은 계획적이고 민주적이었지만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산계급 출신이 아닌 사람이 문화의 상층부에 등장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독일과는 달리 정부에 불만을 덜 가졌다. 또한 프랑스가 공화국이었다는 점과 계몽주의가 통례였다는 점도 정부에 불만이 덜한 이유였다.

프랑스의 주역인 베르그송, 방다, 뒤르켐이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유대인이 높은 비율로 프랑스의 지적생활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베르그송과 뒤르켐의 경력은 20세기 초 처음 15년 동안, 프랑스의 지적 생활 전체의 특징이 되는 한두 가지의 공통점에서 분화가 얼마나 심했는지도 보여준다. 사실상 프랑스 지식인들 전체에서 볼 때 애국심은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이었다. 프랑스의 저술가나 학자들은 프랑스가 문명세계의 중심이며 프랑스어가 지적 소통을 위한 가장 완벽한 수단이라고 확신했다. 프랑스 지성인들에게 동료의 자극은 생활필수품이었다.

(p76) 1890년대의 10년이 지나가는 동안, 저술가들의 마음을 뒤흔든 새로운 관심은 정신적인 부분에 대한 자각이었다.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서 철학자 부트루의 강의, 베르그송의 강의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노르말 학생들이 강렬한 영향을 받은 것은 이 학교 도서관원 에르로부터였다.

에르는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의 도서관이 프랑스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사회주의로 전향시키기에는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 이 사명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후에 영향력 있는 청년 정치가와 교수가 된 조레스는 도서관으로 돌아와 에르의 가르침을 도왔다.

그러나 그 후에 드레퓌스 옹호자의 승리는 그들의 해제를 의미했다. 공화파 좌파가 승리를 횡령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등을 돌렸다.

 

(p78)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에 존재했던 것과 같은 대규모의 영향력 있는 지적 집단을 찾아볼 수 없다. 이탈리아 대부분은 너무나 시골이었고 교양계층이 그리 광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890년대의 로마는 성직자와 여행자와 공무원의 도시였다. 가장 활발한 지적 활동은 관심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인 지방 그룹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탈리아가 189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문학상. 철학상 르네상스를 맞이하는데, 이는 재야 학자 크로체 한사람이 이룩한 업적이었다. 크로체의 영향은 점차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크로체는 이탈리아가 (이탈리아적) 문화와 관습을 지방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외부세계와의 접촉과 사상적 교류를 통해 지적 생활의 기반을 향상시키려 했다.

 

(p82) 이것이 우리가 1890년대의 새로운 지적 관심에 부여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특징이다. 이러한 지적 관심은 사회사상의 축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부분적으로 의식적인 미지의 동기 영역으로 옮겨놓았다. 심리적인 과정이 가장 긴급한 연구과제로서 외적인 현실을 대신하게 되었다. 인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관심을 끈 것은 의식적으로 합리화된 것보다는 무의식의 차원에서 느끼는 것이었다. 인간 행동에 대한 확실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만일 순간적인 주관적 직관이나 편의적인 허구의 창조에 의거해야 한다면, 정신은 실증주의적 방법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유를 사색하고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었다. 사회사상은 무한히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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