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8. 영광의 고고학
p. 407-466
8.1. 발타자르
신학 영역에서 영광에 대한 연구들은 발타자르의 『영광. 신학적 미학』이라는, 언뜻 장대해 보이는 작업에 의해 오랫동안 잘못된 길로 이끌려 왔다(p. 408).
영광: (독일어)Herrschaft 지배, Herrschen 지배한다 / (성경의 원래적 의미) Kabhod 지배, 주권
‘영광을 미학화해’ 진정 ‘정치적인’ 개념을 미의 영역으로 옮기려는 발타자르의 시도와 반대로 영광에 대한 우리의 독해는 영광이 처음 속해 있는 맥락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p. 409).
『성경』에서 Kabhod[영광], doxa[영광]: 여호와의 무시무시한 출현, 왕국, 심판, 왕좌와 관련됨.
8.2. 마이모니데스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
영광 Kabhod …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하느님이 어떤 곳에 기적을 통해 나타나도록 창조한 빛을 나타낸다(p. 410).
1) 「출애굽기」(40장 34절) ‘여호와의 영광’은 유대인들에게 사방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타고 있는 불로 나타나고 있다(p. 411). - ‘창조된 빛’
2) 모세의 얼굴 피부에 내린 영광의 빛 → 모세는 너울로 얼굴을 덮음.
‘영광’의 배후에 숨어있는 ‘신의 참된 존재’
3) 피조물들에 의한 찬양. 찬양은 모종의 방식으로 영광에서 유래.
여호와 자신과 동일시되는 ‘영광’의 의미는 … ‘찬양’이라는 ‘객관적’ 의미와 대립되게 된다(p. 412).
‘영광’의 이중적 의미, 동명성과 양의성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p. 413)
영광 | 주관적 ‘영광’ | 하느님의 현실 |
찬양 | 객관적 ‘영광’ | 인간의 실천 |
א : 알레프 / 히브리어의 첫글자 / 황소, 수소 / 원동력 / 신적 의미
א 랍비적 전통:
1) ‘여호와의 영광’ - 현전(‘거주하는 일, 머무는 일’)
2) 종말론에서의 ‘영광’ - 충일한 계시(시온 산에 구름, 솟아오르는 연기, 환한 불길)
8.3. 70인역, 요한
영광: ‘doxa’로 번역
‘kabhod’의 변형(외적인 요소인 하느님의 현전 → 삼위일체적 오이코노미아의 내적 관계)
「요한복음서」, 13장 31~32절에서의 영광: 오이코노미아의 완전한 순환성
사람의 아들 → 하느님 → 사람의 아들
예수가 지상에서 완수한 일―구원의 오이코노미아―은 사실 아버지를 찬양하는 것이다. 즉 영광의 오이코노미아이다(p. 416).
아들에게 맡긴 구원의 오이코노미아가 지상의 시간이 끝나면 완성에 이르는 데 비해 영광의 오이코노미아는 처음도 끝도 없다(p. 417).
영광 → 예수 → 사람들
삼위일체의 영광의 오이코노미아에 인간고 신 사이의 상호 찬양이 대응한다.
א 호메로스의 그리스어에서의 ‘영광’
‘doxa’가 아니라 ‘kleos’(단어들의 영역, 들리는 것)
호메로스의 세계에 존재하는 영광의 형상은 전적으로 사람의 일, 단지 찬양일 뿐이다(p. 419).
8.4. 바울
영광의 오이코노미아는 오직 시각적 용어로만 표현된다(p. 420).
“영광의 아버지”(「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17절)인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당신의 영광을 내비추면 이를 그리스도가 받아들여 메시아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거울처럼 반사해, 퍼뜨린다.
요한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찬양이 아니라 영광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그리고 메시아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퍼져나가는 것이다. 바울의 복음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삼위일체적 오이코노미아가 아닌 메시아적 구원이다(p. 421).
8.5. 리옹의 이레나이우스
리옹의 이레나이우스는 하느님은 인식 불가능하다는 『성경』의 주장에 예언적 성령에 의한, 무엇보다 먼저 영광의 참된 ‘주해자’, ‘관리자’, 영광을 노래하는 자인 아들에 의한 하느님의 계시를 대치시킨다(p. 421-422).
구원의 오이코노미아는 영광의 오이코노미아를 전제할 뿐만 아니라 영광의 오이코노미아는 인간들의 삶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삶에서도 그렇지 않았더라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채로 있게 되었을 것에 대한 ‘주해’이기도 하다. 즉 영광이란 오이코노미아들의 오이코노미아이다(p. 422-423).
8.6. 오리게네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상호 찬양 과정은 하느님의 “자기지(自己地, autosophia)”로 이해되는 하느님의 자기-인식과 일치한다. 이 과정은 너무나 깊은 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찬양은 아들로 인해서가 아니라 오직 아들 속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p. 426).
수난의 오이코노미아와 계시의 오이코노미아는 영광 속에서 일치하며, 영광(아니 오히려 찬양)이 삼위일체적 관계 전체를 규정한다. 삼위일체란 영광송이다(p. 427).
8.7.
‘오이코노미아적 삼위일체’(계시의 삼위일체): 실천과 오이코노미아
‘내재적 삼위일체’(실체적 삼위일체): 존재론과 신학
본연구가 재구성하려는 것은 이러한 원초적 양극성이 상이한 수준들에서 초월적 질서와 내재적 질서, 왕국과 통치, 일반 섭리와 특수섭리라는 양극성으로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양극성이 하느님에 의한 세계 통치 기계의 기능을 규정한다. 오이코노미아적 삼위일체(통치)는 내재적 삼위일체(왕국)를 전제하는데, 이 내재적 삼위일체가 오이코노미아 삼위일체를 정당화하고 정초한다(p. 428).
신학과 오이코노미아 사이의 관계를―이어서 통치 기계의 기능을―표시해온 복잡한 메커니즘에 따라 이 두 삼위일체는 비록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에도 서로 구별되어 있다(p. 429).
영광이란 내재적 삼위일체와 오이코노미아적 삼위일체, ‘신학’과 ‘오이코노미아’, 존재와 실천, 하느님 자신에서의 하느님과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이의 어려운 양립을 신학이 사유하려는 장소이다(p. 429).
오이코노미아적 삼위일체성과 내재적 삼위일체성, 하느님의 구원의 실천과 하느님의 존재는 영광 속에서 하나로 연결되고, 서로를 통해 움직인다(p. 430).
오이코노미아가 존재를 찬양하며, 마찬가지로 존재는 오이코노미아를 찬양한다.
영광의 빛에서만 처음으로 존재와 오이코노미아, 왕국과 통치는 한순간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광의 오이코노미아는 완전히 대칭적, 상호적이어먄 기능할 수 있다. 모든 오이코노미아는 영광이어야만 하고 모든 영광은 오이코노미아가 되어야만 한다.
8.8.
세속적 영역에서 영광이 통치가 아니라 왕국의 속성이며, 시중드는 자들이 아니라 주권자의 속성인 거과 마찬가지로 영광송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오이코노미아가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미 살펴본 대로 왕국은 통치가 없어졌을 때도 남아 있는 것이며 통치는 왕국이 제거되어도 남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통치 기계는 항상 이 양극성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존재한다(p. 435).
이 기계의 중심은 비어있으며 영광이란 단지 이 비어있음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에 불과하다.
8.9. 바르트 『교회교의학』
어느 지점에서 바르트는 돌연 영광에 관한 이 분석을 미(美)라는 “바로 근접한” 영역으로 이동시키면서 이 미라는 개념을 “[부수적] 보조 개념”으로 사용해 영광의 신학적 구상에 존재하는 “흑점”처럼 보이는 것과 전략적으로 대결하고자 한다(p. 436).
미는 다름 아니라 주권이라는 ‘사실’을 넘어 영광을 생각할 수 있고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라는 어휘를 미학의 영역으로 이동시켜 ‘탈정치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상의 것’을 명명한다(p. 437).
미학적 입장이라는 위험은 그야말로 영광의 이론을 ‘권력’의 영역에서 떼어내려면 지불해야 할 대가이다(p. 438).
8.10.
영광이 미학화된 이면에는 또 다른 동기도 존재한다. 즉 그것은 신학의 역사에서 항상 현전하지만 끊임없이 회피되고 있는 문제에 새로운 수단으로 맞설 수 있도록 해준다(p. 438).
영광이 가진 … 이중적 형상에 대해 신학자들이 제공하는 설명은 여전히 특이해 보인다(p. 440).
“하느님을 칭찬하는 유일한 이유는 하느님이 칭찬 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순환적인 논증 노선에 의해 주관적 영광은 객관적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이 된다.
8.11.
심지어 바르트의 논고도 영광의 순환성을 피하고 있지 못하다. 그와 반대로 이 순환은 이 논고에서 극단적 형태를 띠는데, 거기서 영광의 신학과 관련된 루터적 전통의 유보는 무시된다(p. 442).
영광의 순환성은 존재론적 정식화에 도달한다. 즉 피조물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자신이 존재하는 것 자체에서 영광에 의해 구성되어 있음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광으로 인해 우리는 영광을 축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 영광을 축하한다.
만약 피조물들이 본질적으로 영광, 즉 하나님의 영광이 신 자신에게 바치는 영광에 대한 찬양이라면 피조물의 삶이 왜 “복종”에서 정점에 달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여기에는 하느님에게 감사하고 봉사함 외에 다른 것이 남아있지 않다. 영광스럽게 함은 이 감사와 봉사에서 자기 자신 외에 다른 것을―그 이상도 이하도―바칠 것이 없다”. 이 일을 위한 탁월한 곳이 교회이다(p. 443).
영광 이론으로부터 정치 영역에 대한 모든 참조를 예비적으로 배제하면 어떤 의미에서 논의가 헤매게 될지를 이제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페테르존과 관련해 살펴본 대로 신학에서 정치를 억압하면 그렇게 억압된 정치는 영광송이라는 부적절한 형태로 재출현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피조물들을 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기능으로 절대적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비잔틴 그리고―바르트가 자발적으로 버리고 떠난―1930년대의 독일의 세속적 권력이 시민들에게 요구했던 행동을 분명히 상기시킨다(p. 443-444).
8.12.
영광의 역설
1. a) 영광은 옛날부터 영원히 오직 하느님께만 속하며 영원히 하느님 안에서 동일한 것으로 머무를 것이다(p. 444).
b) 모든 피조물이 항상 끊임없이 하느님께 돌려주어야 할 무엇, 하느님이 피조물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2. 피조물들이 하느님께 돌려주어야 할 칭찬의 찬가로써의 영광은 실제로는 하느님의 영광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3. 하느님이 완성하는 모든 것, 즉 창조와 관련된 일들과 구원의 오이코노미아를 하느님은 오직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완성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들은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려야만 한다.
레시우스 『신의 완성과 덕성에 대해』
“하느님은 세계 창조와 세계 통치로부터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p. 446)?”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통치하는 것이 내적 영광을 획득하거나 증가시키기 위해서 일리는 없다. 내적 영광이라면 하느님은 이미 “충분히”갖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목표는 외적 영광의 획득과 증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p. 447).
하느님이 질투하는 것은 외적 영광에 대해서이다. 그리고 인간이 모든 행동의 목적으로 제시해야하는 것은 이 영광이다(p. 448).
8.13.
인간의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영광의 고유한 가치는 기이하게도 궁극적으로 하느님도 또 인간도 영광을 필요로 하거나 영광으로부터 유용성을 끌어내지 않는 데 있다(p. 453).
레시우스의 『신의 완성과 덕성에 대해』와는 반대로 칭찬은 하느님께 외재적이지 않다.
하느님은 말 그대로 칭찬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가장 내밀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된다.
내적 영광과 외적 영광 사이의 구별은 다름 아니라 찬양과 신성의 실체가 이처럼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감추는 데 이용되고 있을지도 모른다(p. 454).
8.14.
힐책(improperia)
이 영광송의 독특함은 그것이 당신의 백성에게 몸을 돌려 질책하는 교송에 의해 도입되는 데 있다(p. 454).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칭찬을 요구하는 것이 하느님 자신이라는 것이다(p. 455).
하느님의 권능은 비교 불가능하며 ‘표상 불가능한’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은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것(‘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면 왜 영광송들에서 끊임없이 주의 영광을 말하고 표상해야만 할까? 왜 하느님을 ‘주권자’라 부를까? 왜 “신의 영광을 내보이기 위해” 천사나 대천사의 “부대나 군대”를 언급할까?
8.15. <사은찬미가>
<사은찬미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련의 환호송으로 구성되는데, 거기서 삼위일체나 그리스도교론적 요소는 본질적으로 한결같은 영광송적인, 찬가적인 맥락 속에 삽입된다(p. 457).
그리소도교적 의식에서의 환호송이 대규모로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느님은 칭찬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신학자들이 끊임없이 확인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느님은 끊임없이 칭찬받아야 할까? 서로 장단을 맞추고 있는 내적 영광과 외적 영광 사이의 구별은 정말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와 반대로 이 구별은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 설명하지 않은 채 놔두기에는 너무 당혹스러운 무엇인가를 숨기려는 시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p. 461)?
8.16. 모스
기도는―칭찬이나 찬미 형태를 취하는 경우에도―무엇보다 먼저 구술 의례이며, 따라서 모든 의례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사물과 관련되어 있으며 성스러운 사물에 작용하는 “효과적 행위”이다(p. 462).
“기도는 구술적 종교 의례로 성스러운 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p. 464)”.
영광보다 영광에 대한 찬양이 우위에 있다는 가설을 새로운 빛 아래 조명해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 영광에 대한 찬양은 단지 하느님의 영광에 최고로 어울리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의례를 통해 영광을 창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영광이 신(성)의 실체 자체이며 신성의 오이코노미아의 참된 의미라면 신(성)은 본질적인 방법으로 영광에 대한 찬양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신성이 힐책이나 명령을 통해 찬양을 요구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p. 465).
'세미나 발제문 >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식인들의 망명- H. 스튜어트 휴즈 / 22. 03. / 16.개벽크 (0) | 2022.03.16 |
---|---|
『정의론』 3부 목적론-8장(69-72) 존 롤즈 2022.3.6. 바다사자 (0) | 2022.03.06 |
왕국과 영광 / 조르조 아감벤 / 7장 권력과 영광 (0) | 2021.12.05 |
『정의론』 3부 목적론-7장(64-68) 존 롤즈 2021.11.28. 바다사자 (0) | 2021.11.27 |
왕국과 영광 / 조르조 아감벤 / 6. 천사론과 관료제 (0) | 2021.11.21 |
- Total
- Today
- Yesterday
- 루이 알튀세르
- 로마사논고
- 레비스트로스
- 의식과사회
- 이탈리아공산당
- 딘애치슨
- 한국전쟁의기원
- 마키아벨리
- 이데올로기
- 공화국
- 프롤레타리아 독재
- 옥중수고
- 무엇을할것인가
- 검은 소
- 루이알튀세르
- 헤게모니
- 그람시
- 옥중수고이전
- 알튀세르
- 계급투쟁
- 개인심리
- virtù
- 신학정치론
- 브루스커밍스
- 스피노자
- 안토니오그람시
- 집단심리
- 생산관계
- 생산양식
- 야생의사고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