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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감벤은 ‘장치(dispositif)’라는 단어가 미셸 푸코의 사유 전략에서 결정적인 전문용어라는 가설을 제안코자 한다(p. 15).
장치(p. 17-18)
(1) 그 이름에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잠재적으로 무엇이든지(담론, 제도, 건축물, 법, 경찰조치, 철학적 명제 등) 포함하는 이질적 집합이다. 장치 자체는 이런 요소들 사이의 네트워크이다.
(2) 장치는 늘 구체적인 전략적 기능을 갖고 있으며, 늘 권력관계 속에 기입된다.
(3) 장치 그 자체는 권력관계와 지식관계의 교차로부터 생겨난다.
2. 장치의 역사적 맥락
‘실정성’ 1960년대의 푸코 / 장 이폴리트의 『헤겔 역사철학 입문』
이폴리트에 따르면 … ‘실정성’이라는 용어는 헤겔에게서 ‘자연종교’와 ‘실정종교’ 사이의 대립에서 그 고유한 장소를 차지한다(p. 19).
자연종교가 인간 이성과 신적인 것 사이의 무매개적이고 일반적인 관계에 관한 것인 반면, 실정종교 혹은 역사종교는 여러 가지 신앙‧규칙‧의례 등 어떤 주어진 사회, 이러저러한 역사적 순간에 외부로부터 개인들에게 부과된 전체를 포함한다.
어떤 의미에서 헤겔은 실정성을 인간의 자유에 대한 장애물로 간주하며 단죄한다(p. 20-21).
이폴리트에 따르면 ‘실정성’이란 청년 헤겔이 역사적 요소에 부여한 이름이다.
푸코는 이 용어를 빌려와 (이것이 나중에 ‘장치’가 된다) 어떤 결정적인 문제에 대해 입장을 취한 것이다. 푸코 자신의 가장 고유한 문제, 즉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개인과 역사적 요소와의 관계라는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여기서 역사적 요소란 무릇 권력관계가 구체화되는 장으로서의 여러 가지 제도, 주체화 과정, 규칙의 전체를 의미한다(p. 21-22).
3.
푸코의 전략에서 장치라는 용어는 그가 ‘보편적인 것들’이라고 비판적으로 정의한 것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장치들은 단순히 이러저러한 경찰조치나 이러저러한 권력의 테크놀로지가 아닐 뿐만 아니라, … “이런 요소들 사이에서 세워지는 네트워크”이다(p. 23).
프랑스어 사전에서의 ‘디스포지티프(dispositif, 장치)’
(1) 엄밀한 법적 의미: “판결 이유에서 따로 떼어 결정 내용만을 담고 있는 판결의 일부분.”
(2) 기술적 의미: “기계나 메커니즘의 부품이 배치되는 방식. 넓게는 그 메커니즘 자체.”
(3) 군사적 의미: “작전 계획에 따라 배치된 수단들의 집합.”
‘디스포지티프’라는 용어: 어떤 긴급함에 직면하고, 많든 적든 즉각적인 효과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메커니즘과 실천 전체를 가리키는 듯하다(p. 24).
[장치라는] 이 현대 용어는 어떤 프락시스나 사유의 전략, 어떤 역사적 맥락에 기원을 두고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프락시스)을 이론(觀想)이나 제작(포이에시스)과 구별하여 윤리적·정치적 행동에 한정한다.” -위키 백과-
4. 오이코노미아
2세기 경 삼위일체에 대한 교회 내부에서의 저항 → 오이코노미아라는 용어 사용
“신은 그 존재와 실체에 관해서는 분명히 하나이다. 그렇지만 신의 오이코노미아에 관해서는, 즉 신의 가정, 신의 삶, 신이 창조한 세계를 관리하는 방식에 관해서 신은 삼중이다(p. 26).”
“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간의 역사의 ‘경제,’ 행정, 통치를 위임한다(p. 27).”
오이코노미아는 삼위일체의 교리, 그리고 섭리에 토대를 둔 신의 세계통치라는 관념, 이 두가지를 그리스도교 신앙 속에 도입하는 장치가 됐다.
이 근본적인 그리스 용어는 라틴어를 사용한 교부들이 쓴 글에서 어떻게 번역됐을까? 디스포지티오(Dispositio)이다(p. 28).
우리의 용어 ‘디스포지티프’의 기원인 라틴어 디스포지티오는 신학적 오이코노미아가 가진 복잡한 의미론의 영역 전체를 홀로 떠맡게 되었다.
장치라는 용어는 존재 안에 어떤 토대도 두지 않는 순수 통치활동이 그것으로, 그것에 의해 실현되는 것을 명명한다. 이 때문에 장치들은 항상 주체화 과정을 내포해야 한다. 즉 장치들은 그 주체를 생산해야만 한다.
존재자 | |
생명체들(실체들) | 장치들 |
피조물들의 존재론 | 장치들의 오이코노미아 |
푸코가 말하는 장치는 이미 아주 넓은 부류인데 이 것을 더 일반화해 아감벤은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제, 제어, 보장하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장치라고 부를 것이다(p. 33).
생명체들과 장치들이 맺는 관계의 결과, 이른바 양자가 맞대결한 결과로 생겨나는 것을 주체라고 부르기로 한다(p. 34).
오늘나 주체성이라는 범주가 동요하면서 일관성을 잃고 있다는 인상을 자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주체의 소멸이나 지양이 아니라 산종(散種)이다. 이 산종은 모든 인격적 정체성에 늘 따라다니는 가면무도회의 모습을 극단으로까지 밀어붙인다.
7.
어쩌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적 발전의 최종 단계를 장치들의 거대한 축적과 증식으로 정의한다 해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확실히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이래 장치는 늘 존재했다(p. 35).
장치들을 단순히 파괴한다거나, 순진한 사람들이 제안하듯이 장치들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열쇠가 아니다.
장치는 인간이 우연히 부딪치는 사고가 아니라,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표제어로 분류하는 동물을 ‘인간적’이라고 간주하는 ‘인간화’ 과정 자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p. 36).
장치들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에게서 분리된 가장 동물적인 행동을 무화시키려 한다(p. 38).
모든 장치의 뿌리에는 행복에 대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욕망이 있다.
8. 우리가 장치들과 맞대결할 때 채택해야 할 전략이 단순할 수 없다. 장치들에 의해 포획‧분리된 것을 해방시켜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돌리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세속화: “세속적인 것이란 본디 성스럽거나 종교적이었던 것에서 인간들이 사용하고 소유할 수 있게 되돌려진 것을 말한다.”
세속화란 희생제의에 의해 분리‧분할된 것을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돌리는 역-장치이다(p. 40).
9. 자본주의나 현대 권력의 형상은 종교를 정의하는 것인 분리 과정을 일반화하고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듯하다(p. 41).
사실 모든 장치는 주체화 과정을 내포하며, 이 과정이 없다면 장치는 통치장치로 기능할 수 없고 그저 폭력 행사가 되어버린다.
장치란 무엇보다 주체화를 생산하는 하나의 기계이다. 그리고 그런 기계이기에 비로소 통치 기계이기도 하다. 고해성사는 그 분명한 예이다.
현 단계의 자본주의에서 우리가 직시할 필요가 있는 장치들을 정의해주는 것은, 이 장치들이 더 이상 주체의 생산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탈주체화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을 통해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p. 43).
모든 장치에는 각각 정해진 주체화 과정이 (이 경우에는 탈주체화 과정인데) 대응한다. 따라서 장치의 주체가 장치를 ‘올바르게’ 사용하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장치들을 똑바로 사용하면 된다고 하는 담론은 이 사실을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이와 비슷한 담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을 포획하는 미디어 장치의 결과로 생겨난 자들이다(p. 44).
10.
현대사회는 이처럼 박대한 탈주체화 과정에 의해 관통되는 관성을 지닌 물체의 모습을 띤다. 그리고 이 탈주체화 과정에 부합하는 어떤 현실적인 주체화도 없다. 그리하여 현실적인 정체성(노동운동, 부르주아지등)이나 주체를 전제로 삼았던 정치가 쇠퇴하고, 그 자신의 재생산만을 겨냥하는 순수한 통치활동인 오이코노미아가 승리한다(p. 44-45).
후기산업 민주주의의 시민이 주문 받은 것은 뭐든지 열심히 수행하면서도 일상적인 몸짓이나 건강, 휴식이나 일, 영양섭취나 욕망을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장치들에 의해 지휘되고 통제되도록 내버려둘 때, 권력은 이런 독도 약도 되지 않는 시민을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게 된다(p. 46-47).
장치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 그 권력을 침투시키고 분산시키면 시킬수록, 통치의 앞에는 붙잡을 수 없는 요소가 더 많이 출현하게 된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예고 대신 우리가 사실 목도하고 있는 것은 [통치]기계의 끊임없는 공회전이다.
이 세계 통치는 세계를 구원하기는커녕 세계를 파국으로 이끌어간다(p. 48).
장치들을 세속화하는 문제, 즉 장치들 안에 포획되고 분리됐던 것을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돌리는 문제는 그만큼 더욱더 긴급한 사인이다. 이 문제를 짊어진 자들이 주체화 과정이나 장치들에 개입할 수 있게 되고, ‘통치될 수 없는 것’에 빛을 비추게 될 때에야 비로소 이 문제는 올바르게 제기될 것이다. 이 ‘통치될 수 없는 것’이야말로 모든 정치의 시작이기도 하며 소실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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