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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2,3장 아감벤

2022.5.1. 바다사자

 

2장 친구

 

1.

철학이라는 이름 안에 필로스philos, 즉 친구가 들어 있을 정도로 우정과 철학의 내밀한 관계는 상당히 깊다. 고대 세계에서 친구와 철학자가 뒤범벅되어 있으며 그 둘이 거의 동질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은 자명했다(49). 오늘날 우정과 철학의 관계는 신임을 잃었다.

우정의 필연성, 그리고 동시에 친구들에 대한 어떤 불신은 니체 철학의 전략상 아주 중요했다(54).

 

2.

친구라는 용어의 특수한 의미론적 지위가 근대 철학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친구라는 단어는 언어학자들이 비술어적이라고 정의한 용어의 부류에 들어간다. 즉 해당 술어가 속한 모든 대상을 포괄하는 부류를 구축하는 게 불가능한 그런 용어들의 부류이다. 욕도 비술어적인 용어이다(55). 욕은 진위문 노릇을 하기 보다는 외려 고유명 노릇을 한다. 욕에서 공격하는 것은 순수한 언어경험이지 세계에 있는 어떤 지시대상이 아니다. ‘친구라는 용어는 이 조건을 욕하고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 용어들과도 공유한다. 철학 용어들은 객관적 외시를 갖지 않는다. 그저 언어를 의미할 뿐이다(56).

 

3.

조반디 세로디네의 순교의 길에서 만나 성 베드로와 성 바울그림은(56) 우정에 대한 완벽한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우정이란 우리가 표상도, 개념도 만들 수 없는 그런 근접성이다. 누군가를 친구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어떤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정은 한 주체의 속성이나 성질이 아니다(59).

 

4.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8~9권을 우정에 할애했다. , 친구들 없이는 살 수 없다. 이로움 내지 즐거움에 바탕을 둔 우정과 친구 그 자체를 좋아하는 덕스러운 우정을 구별해야 한다(59). 등등. 그러나 충분히 관심을 받지 못한 구절이 있는데 1170a28-1171b35 구절은 [우정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의 존재론적 기초를 담고 있다.

좋은 사람은 자신에 대해 느끼는 것을 친구에 대해서도 느낀다. [친구는 또 다른 자기이니까.] 각자에게 자신의 존재가 선택할 만한 것이든 친구의 존재도 선택할 만한 것, 혹은 거의 그럴 만한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이 선택할 만한 것이 되는 것은 자신이 좋은 사람임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지각은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다. 따라서 친구가 존재한다는 것을 [친구와] 함께 지각하는 일이 필요한데, 이것은 함께 살며 서로 행위와 생각을 나누는 일을 통해 성립한다(61). 우정은 공통의 교제이며, 자기 자신을 대하듯이 친구를 대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기가 존재하고 있음에 대한 지각이 선택할 많나 일이며, 친구가 존재함을 지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선택할 만한 일이다.

 

5.

1) 순수 존재에 대한 지각, 즉 존재함에 대한 지각이 있다(62). 자기가 존재하고 있음은 무엇임에 반대되는 존재함이다.

2) 존재함에 대한 지각은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다.

3) 존재한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과 사는 것을 지각하는 것은 등가적이다.

4) 우정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감 속에서 친구의 존재를 함께-지각하는 심급이다. 하지만 이는 우정이 존재론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지위를 가짐을 의미한다. 존재함에 대한 지각은 사실 항상(63) 이미 분할되고 함께 나뉜 것이다. 우정은 함께 나눔[공유]을 명명한다.

5) 그렇기 때문에 친구는 또 다른 자기인 것이다. 친구는 또 다른 자아가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내재하는 타자성, 자기 자신의 타자되(64)기이다. 나의 존재를 즐거운 것으로 지각하는 지점에서 나의 지각은 그 지각을 탈구시켜 친구, 즉 다른 자신에게로 이송하는 함께-지각하기에 의해 관통된다. 우정은 자기의 가장 내밀한 지각 한가운데에 있는 탈주체화이다.

 

6.

우정은 제1철학에 속한다. 우정은 존재함에 대한 지각자체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범주적이지 않고 존재적이며 이 존재적임 역시 정치적 역량 같은 무언가를 추동하는 강도에 의해 관통된다. 여기서 강도라는 것은 지각 자체, 이미 공유된 함께이다(65).

함께 산다는 것은 순전히 존재적인 함께 나눔, 대상 없는 함께-나눔으로 정의된다. 우정은 존재한다는 순수한 사실을 함께-지각하는 것이다. 우정은 분할에 앞서는 함께 나눔이다. 나뉘어야 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사실,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대상 없는 나눔, 이 근원적인 함께-지각함이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근원적이고 정치적인 함께-지각함이 시간이 흐르면서 합의가 되어버렸을까. 민주주의가 그 진화의 최종적이고, 극단적이며, 탈진한 국면 속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송두리째 내맡겨버린 바로 그 합의말이다(67).

 

3장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

1.

참으로 자신의 시대에 속하는 자, 참으로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와 완벽히 어울리지 않는 자, 자기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 자, 그래서 비시대적인/비현실적인 자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이 간극과 시대착오 때문에 동시대인은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시대를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다.

이 시간의 어긋남은 동시대인이 다른 시간에 사는 자, 즉 향수에 젖은 자를 뜻하지 않는다. 똑똑한 인간은 자신의 시대를 증오할 수 있을지언정, 자신이 자신의 시대에 돌이킬 수 없이 속하며, 자신의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71).

동시대성이란 거리를 두면서도 들러붙음으로써 자신의 시대와 맺는 독특한 관계이다.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 시대에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이다. 모든 점에서 시대와 완벽히 어울리는 자들이 동시대인인 것이 아니다. 그런 자들은 시대를 보지 못하고, 시대에 보내는 시선을 고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72).

2.

1923년 만델슈탐은 시 세기에서(72) 자신의 삶[목숨]을 자신의 동시대성에 대가로 지불해야 했다. 시인이란 자신의 세기-야수의 동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자신의 피로 시대의 부서진 등을 접합해야 하는 자이다. 두 시대란 한 개인의 일생과 집단적 역사의 시간이다. 20세기의 등은 부서졌다. 동시대인으로서 시인은 이 골절이다. 시간이 다시 모이는 것을 막는 자이며, 동시에 자신의 피로써 그 째진(73) 곳을 봉합해야 한다. 생물의 시간과 세기의 시간 사이의 평행이 이 시의 중심 테마 중 하나를 이룬다. 다른 하나는 세기의 부서진 척추, 그리고 그것의 접합이라는 테마이다. 이는 개인이 할 일이다(74).

시대-야수의 척추는 부서졌다. 세기는 척추가 끊어진 자가 하기엔 불가능한 몸짓으로 뒤로 몸을 돌려 자신의 흔적을 되돌아보려고 한다(75).

 

3.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빛이(75) 아니라 어둠을 지각하는 자이다. 이 어둠을 볼 줄 아는 자, 현재의 암흑에 펜을 적셔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는 자이다. 어둠은 우리 망막의 산물이다. 어둠을 지각한다는 것은 특수한 활동이자 능력을 함축하는 바, 시대에서 유래하는 빛을 중화시킴으로써(76) 결국 그 시대의 암흑을 발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시대의 암흑, 시대의 특별한 어둠이 시대의 빛과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기의 빛에 눈멀지 않고 그 속에서 그림자의 몫, 그 내밀한 어둠을 식별할 수 있는 자만이 동시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시대인이란 자기 시대의 어둠을 자신과 관계있는 어떤 것, 자신을 끊임없이 호명하는 어떤 것, 그 어떤 빛보다도 더 자기 쪽으로 직접, 그리고 독특하게 돌아서는 어떤 것으로 지각한다(77). 자신의 시대에서 유래하는 암흑의 빛줄기를 온 얼굴로 받는 자이다.

 

4.

현재의 어둠 속에서 우리에게 도달하려 애쓰지만 그럴 수 없는 빛을 지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용기의 문제이다(78). 시대의 어둠에 시선을 고정할 수 있으며 어둠 속에서 우리를 향하지만 우리에게서 무한히 멀어지는 빛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시대성이 지각하는 현재는 척추가 끊어져 있다. 어찌해도 현재는 우리에게 도달할 수 없기까지 하다. 현재의 등은 부서졌고, 우리는 정확히 골절 지점에 달라붙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동시대인이다. 반시대성, 시대착오 덕분에 우리는 너무 늦은형태이자 너무 이른형태로, ‘아직 아닌형태이자 이미의 형태로 우리의 시대를 포착할 수 있다(79).

 

5.

유행(/패션은 서명’, 즉 기호, 문장, 명제 등을 이해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 또는 사물들에 표식을 만드는 것의 특권적인 영역이다(80))하고 있음은 사람들이 유행하고 있음을 유행으로 알아보고 자기도 옷을 그렇게 입는 사실에 달려 있다. 유행의 시간은 그 자신에 앞서고, 바로 이 까닭에 또한 늘 늦는다. 유행의 시간은 늘 아직 아님더 이상 아님사이의 포착할 수 없는 문턱의 형태를 띤다(81).

유행하고 있음은 동시대성처럼 어떤 여유’, 어떤 시차를 함축하고 있는 바 그것들을 통해 유행의 시대성은 그 자체 안에 작은 몫이나마 바깥을 마치 유행에 뒤진 음영 마냥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유행의(82) 시간성은 다른 시간들과 특수한 관계를 수립한다. 유행의 시간성은 그것이 가차 없이 분할 했던 것을 관련짓고, 죽었다고 선언했던 것을 데려오고, 다시 부르고, 되살릴 수 있다.

 

6.

동시대성은 현재를 무엇보다 의고적인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스스로를 그 현재에 등록한다. 의고적이라는 말은 아르케, 기원과 가깝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 생성과 동시대적이며, 쉬지 않고 그것에 작동한다(83). 동시대성을 정의하는 간극의 토대는 기원과의 근접에 있다. 기원은 현재에서 더 강하게 고동친다. 현재에 접근하는 길이 반드시 고고학의 형태를 띤다고 말할 수 있다. 고고학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체험할 수 없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만든다. 체험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그것은 결코 도달하지 못(84)하면서도 바로 그 기원에 쉬지 않고 들러붙어 있다. 현재 속에서 체험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많은 것이 현재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 체험되지 않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동시대인의 삶이다.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있어보지 못한 현재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85).

 

7.

동시대인이 그의 시대의 척추를 부셨다면(균열이나 금간 지점을 지각했다면), 바로 그가 이 골절을 시간들 사이의, 세대들 사이의 약속과 만남의 장소로 만든다(86). 동시대인이란 시간을 분할하고 가필함으로써 시간을 변형할 수 있고, 다른 시간과 관련지을 수 있으며, 역사를 미증유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고 그것을 필연에 따라 인용할수 있는 자이기도 한다. 필연은 자의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요청에서 비롯한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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