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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이탈리아 역사에 대한 수고

그람시는 두 개의 다른 르네상스를 구별했다.

인문주의와 르네상스는 밀접한 두 계기였다. 이탈리아에서 나타났지만 역사 과정은 유럽적이었다. 그러나 1000년 이후 진보적인 운동은 바로 이탈리아에서 쇠퇴하였다.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국민 국가의 형성과 세계적 팽창 속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절대 국가로서의 교황정치 조직이 있었는데 여타 지역을(59) 분열시켰다. 르네상스는 새로운 지식인 계급이 창출되던 역사 과정의 문화적 표현이었다. 지식인 계급은 두 갈래 계급으로 나눠졌는데 하나는 반동적인 것으로 교황정치와 연계하에 세계시민적 기능을 수행했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 추방으로 인해 이탈리아 밖에서 형성되었는데 그 나라의 진보적 기능을 수행하거나 군대나 정치, 공학 분야에서 기술적인 요소로서 역할했다.

그람시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도시 부르주아가 경제적·조합주의적국면을 넘어 국민국가를 창출하는 데 실패한 결과 특유의 역사적 후진성, 교황정치의 세계시민적성격을 함의한다.

종교 개혁용어는 대중 참여를 강조하기 위해 루터주의와 캘빈주의의 특성으로 사용하였다.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가 개혁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다수의 개념쌍들이 사용되는데(60) 혁명/종교 개혁은 국가/시민사회, 강제/동의, 지배/지도, 기동전/진지전 등 옥중수고 전체에 사용되는 다른 개념쌍들과 연관된다.

그람시의 역사서술은 리소르지멘토에 초점이 있다. 이것에는 프랑스의 자코뱅에 해당할만한 것이 이탈리아에는 없다는 점으로 특징지어진다. 그의 기본적 문제는 리소르지멘토에서 생겨난 이탈리아 국민국가의 허약성을 규명하는 일이었다. 이 허약성은 60년 후 파시즘이 정권을 잡았을 때 정점에 달했다. 리소르지멘토는 무엇이 아니었는가 하는 질문이 출발점이다. 마치니와 행동당은 농민을 통일 과정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토지 개혁도 추진하지 않았다. 민중적 특성을 부여하거나 자신들에게 계급적 기초를 부여하는 데 실패했다(61). 그래서 한 국가(피에몬테)가 사회 집단을 지도하는 수동적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수동적 혁명이란 그의 정치 사상의 요체이다. 대중 참여가 없는 혁명-리소르지멘토, 사회의 외피 아래에서 일어나는 분자적인 사회 변혁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다. 수동적 혁명 일체의 강령을 명백히 비난하지만 종종 모호하게도 사용한다. ’진지전용어 개념도 일관적이지 않다. 또 혁명의 정세 분석과 전략에 관한 어떤 것을 풀어가는 데에도 수동적 혁명을 사용한다. 크로체의 역사 편찬과 미국주의와 포드주의에서 이 개념을 파시스트 정권과 결부시킨다(62).

그람시 사상의 모순점으로 봉건적 국가 형태 하에서의 부르주아지의 상황과, 부르주아 지배 하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황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내부에서 사회주의적 생산 관계가 발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난관에 접할 때 마다 그람시는 어떤 단정을 내리기보다는 질문을 제기하는 쪽을 택한다. 지금까지 어떤 파시스트 정권도 내부 세력에 의해 전복된 경우가 없음을 볼 때 정면공격과 청산주의라는 두 개의 비변증법적인 일탈을 반대하는 데 만족했던 것은 다행한 일이다(63).

 

 

이탈리아 역사에 대한 수고

하위 계급들의 역사 : 방법론적 기준

근본적인 역사적 통일성은 국가 혹은 정치 사회와 시민 사회사이의 유기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위 계급들은 스스로 국가가 될 수 있기까지 통일되지 않는다. 그들의 역사는 시민 사회의 역사와 뒤섞여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국가 집단의 역사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위 사회집단은 기존 집단의 정서와 이데올로기와 목표를 보유한다. 지배적인 정치적 조직과 합류하고 조직의 해체, 혁신, 새로운(70)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 지배집단은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하위집단의 동의를 확보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하위 집단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산출한다. 하위 집단들의 자율성을 주장한다. 조직들이 완전한 자율성을 주장한다.

국민적 리소르지멘토를 주도한 혁신 세력들을 검토하고 어떻게 지배 집단으로 발전하는가에 대한 연구는(71) 자율성과 지원의 각 단계들을 찾아내고 규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탈리아 부르주아지는 민중들을 자신의 주위로 통일시킬 능력이 없었는데 이것이 패배한 원인이자 방해물이었다(72). 리소르지멘토에서도 협애한 이기주의가 강력한 혁명을 저지했다(73).

하위 사회집단의 역사는 단편적이고 삽화적일 수밖에 없다. 통일을 향한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지배 집단들의 활동에 의해 계속 저지되며, 하나의 주기가 성공으로 귀결될 때에야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지배 집단에 예속되며 오직 영구적인승리를 거두었을 때에만 종속이 타파되는데 그것도 즉각적으로 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하위 집단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일 때도차도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골몰할 뿐이다(74).

이탈리아에서 국민과 근대국가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정치적 지도의 문제

온건파는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사회집단을 대표하였으며 지도력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행동당은 특수한 역사적 계급 기반이 없었으며 지도기관의 동요는 온건파의 이익에 따라 해소되었다. 즉 역사적으로 온건파에 의해 지도되었던 것이다.

구엘프 Vs. 기벨린
GuelfiGhibellini는 중세 유럽, 특히 북 이탈리아에서 각각 교황파(구엘프)와 신성로마황제파(기벨린)로 나뉘어 12~13세기에 서로 치열하게 투쟁한 일종의 파벌이다. 이해 관계에 따라 도시별로 반목했지만, 같은 지역(피렌체)안의 계층간에도 갈등했다. 이는 11세기부터 시작된 황제의 서임권 분쟁에서 기인하게 되었다. 유럽의 벨프가와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독일 황제 자리를 놓고 12세기 치열하게 다투었다. 이들의 투쟁이 프리드리히 1세 때 이탈리아로 건너와서 변형된 것이다. 프리드리히가 이탈리아를 원정할 때 그의 편에 가담해 권력과 특권을 강화하려는 이탈리아인들을 기벨린파로 불렀다. 이에 대항해 교황의 지원을 받아 1167년에 구성한 롬바르디아 동맹 등 자유 도시들은 구엘프파로 칭했다. 롬바르디아 동맹은 1176년 레냐노 전투에서 프리드리히를 격파하여 황제는 명목상의 종주권과 도시의 완전 자치를 허용하게 되었다.
구엘프파는 부유한 신흥 상업적 가문들이 지지하게 되었고, 반대로 기벨린파는 전통적인 귀족 가문의 지배를 받는 계층이 지지하게 되었다. 구엘프 도시들은 황제를 위협적으로 보았고, 기벨린파 도시들은 교황령의 확대가 더 즉각적인 위협이라고 보았다. 작은 도시들은 주변의 큰 도시가 구엘프파가 되면 기벨린파로 되는 경향을 보였다.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초기에는 구엘프가 지배하는 피렌체와 그 동맹 도시들, 즉 몬테풀키아노·볼로냐·시에나·피스토이아·아레초 사이에 여러 차례 전쟁이 일어났다. 구엘프와 기벨린은 코무네(자치시) 내에서도 행정권을 놓고 서로 끊임없이 싸웠는데 이러한 싸움은 대개 패배한 쪽이 도시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국제적인 영역에서 구엘프는 앙주 가문의 남부 이탈리아 지배를 지지하는 세력들을 모아 동맹을 이루었다. 여기에는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앙주 가문 출신의 군주를 비롯해 교황, 피렌체·토스카나 지방의 피렌체 동맹도시들이 들어 있었다. 구엘프는 승리를 거둔 여러 도시에서 보수세력이자 재산가 집단으로 자리잡았고, 이들은 재산을 몰수당한 기벨린 사람들을 계속 추방상태에 묶어두려 했다. 14세기 이후, 신성 로마 황제가 이탈리아에 관여하지 않고 교황도 프랑스 아비뇽으로 자리를 옮기자 국제적으로 별 의미가 없어졌다. 구엘프와 기벨린은 단지 지역 정파를 의미하게 되었다. 19세기에 기벨린과 구엘프는 이탈리아 통일운동과 맞물려 다시 부활한다. 이때 새로운 구엘프파의 대표적인 사람은 빈첸초 조베르티로 그는 1843년 교황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도시국가 연방을 만들려 했다. 이에 대하여 기벨린파는 교황이 오히려 이탈리아 통일의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구엘프 대 기벨린은 애초에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해 친/반으로 대결했고 다음에는 황제와 교황에 대해, 나중에는 지역간 계층간으로 반목하는 경향에 대한 용어로 의미가 변한다.

한 사회집단의 우위성은 지배지적·도덕적 지도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77)난다. 적대집단을 복종시키고자 하고, 동맹집단들을 지도한다. 한 사회집단은 통치권을 획득하기 전에 이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또 발휘해야 한다. 온건파는 줄곧 행동당을 지도했으며 변신이란 지적·(78)도덕적·정치적 헤게모니 행동의 의회적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1848년 이래 이탈리아 국가의 상태는 변신-신구엘프주의자와 연방제주의자의 유토피아의 몰락이라는 사실 내에서 광범위한 지배계급의 형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계급의 형성과정은 동맹집단이 산출한 적극적 분자와 적대집단까지 지속적으로 흡수하는 것이었다. 온건파의 정책은 효과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 물리적인 힘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이 점이(79) 리소르지멘토가 혁명없는 혁명‘, ’수동적 혁명(쿠오코)‘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온건파의 지배 장치 수립은 자유주의적형태와 수단, 개별적이고 분자적이고 사적인 기획을 통해서였다(80). 온건파들은 자신들의 사회집단들과 유기적 성격의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응결된지식인들이었다. 각 급의 지식인 대중에게 교육과 행정을 제공함으로써 강력한 흡인력을 자연스럽게발휘했다.

독립적인 지식계급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회집단은 그 자신의 지식인 계층을 형성하려고 한다. 진보적인 계급의 지식인들은 다른 사회집단들의 지식인들을 흡수해 버린다. 모든 지식인들 사이의 연대체계를 창출한다. 그러나 지배적인 사회집단이 그 기능을 다하자마자 이념적인 블록은 무너지고 자생성강제로 바뀌고 강제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형태를 띠어가다가 공공연한 경찰 개입과 쿠데타에 이르게 된다.

행동당은 위와 같은 흡인력을 지닐 수 없었을 뿐 아니라(81) 스스로 흡인되고 영향받았다. 행동당이 인민적·민주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온건파들의 경험적활동 대신 인민 대중, 특히 농민의 본질적 요구를 반영하는 유기적인 정치강령을 제시했어야 했다. 초기 근대주의, 그 후의 인민(82)주의는 리소르지멘토의 자유 카톨릭 운동과 유사한 운동으로, 상층 계급의 세속적 지식인들의 근대적 역사주의에 의해서, 실천 철학의 실천적 운동에 의해서 자연스러운 흡인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행동당은 구체적인 정치 강령조차 결여하고 있었다. 내부의 불화와 내분, 마치니의 정치적 지도력 부족 때문이었다(83). 행동당은 이탈리아 문학의 전통적인 수사학에 빠져 있었다. 문화적 통일을 대다수 민중의 정치적·영토적 통일과 혼동했다. 대다수 민중은 그러한 문화적 전통이 낯설었고 전통의 존재를 알았다 하더라도 아무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었다(84). 행동당은 은연 중 반 프랑스적이었지만 이탈리아 반도 자체의 역사 속에서 전통을 발견했다. 중세 도시국가의 역사 속에는 적절한 경험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85).

행동당과 온건파 구성원들 사이의 차이는 기질의 차이이다. 이탈리아의(87) 자코뱅주의는 정력적이고 단호하며 광신적인 정치가, 즉 자신의 이상의 힘을 광적으로 확신하는 정치가를 가리킨다. 인민대중의 요구를 자신의 것으로 하는 건설적인 요소보다 경쟁자와 적에 대한 증오에서 파생되는 파괴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국민적·정치적 요소보다는 파벌과 소집단과 방종한 개인주의의 파당적 요소를 더 강조한다(88).

크리스피
고귀한 자코뱅식의 강박관념은 나라의 정치적·영토적 통일이었다. 비단일국가론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통일을 신뢰하지 않았다. 군주제가 단일국가론적 입장을 취하지 않을(88)수 없다고 판단하여 군주제와 제휴했고, 박력와 열정으로 피에몬테의 헤게모니 원리를 옹호했다. 파시 운동(농민조직, 1893~94년 경제위기 시 농민들이 봉기했으나 크리스피에 의해 잔인무도하게 진압됨) 후 시칠리아를 분쇄했다. 시칠리아의 대토지소유자들과 긴밀히 동맹했으며 북부의 산업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남부와 도서 지역의 희생도 주저하지 않았다. 좌파는 오직 안전판 역할을 했을 뿐이고 우파를 답습했다(89). 크리스피는 진정한 신흥 부르주아지의 일원이었다. ‘경제적 자코뱅주의를 지지할 의사가 없었던 그는 개척된 식민지라는 신기루를 고안해냈다. 그의 제국주의는 경제적·재정적 기초도 없는 수사적인 제국주의였다. 미성숙한 단계의 이탈리아는 수출한 자본도 없었고 오히려 외국 자본을 끌어다 써야 할 형편이었다. 이탈리아 제국주의는 실질적 추진력이 결여되어 있었고 농민들의 대중적 열정이 추진력을 대신했다. 농민의 문제는 긴급한 국내정치 현안이었고 크리스피는 영원히 보류함으로써 해결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남부에서 땅이라는 신화를 창출해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90).
그는 단일국가론적 광신주의를 창출했으나 시칠리아의 대토지소유자들을 막지는 못했다.
지올리티는 크리스피의 자코뱅주의 기질을 관료주의적 근면성과 연속성으로 대치시켰다. 식민지 정책에서 토지의 신기루를 유지하면서 방어적인 군사적 전망하에 팽창의 자유를 위한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그 정책을 지지했다(91).

  크리스피의 강압적인 단일국가 정책의 의미를 평가할 때 남부에 대한 북부의 복합적인 감정을 고려해야 한다. 북부에게 남부의 빈곤이란 설명불가능한것이었다. 통일이 평등의 기초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남부에 대한 북부의 헤게모니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북부의 경제적·공업적 이득은 남부의 경제와 농업의 빈곤화와 정비례하였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남부 주민의 타고난 무능력, 원시성, 생물학적 열등성 등이 실증주의 사회학자들에 의해 공고해졌고 실제로 이론화되었(94).

행동당이 온건파에 대하여 반대세력으로서 효과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농촌 대중, 특히 남부의 농촌 대중과 동맹해야 했으며, 또 외적인 형식이나 기질 면에서만 자코뱅일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내용을(98) 지닌 자코뱅이었어야 했다. 즉 농민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면, 여러 정통주의적·성직자적 지식인 계층을 통하여 반동적인 블록으로 묶인 다양한 농촌 계급들 간의 연계를 해체시킴으로써 새로운 자유주의적·국민적 결속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농민과 지식인으로부터 지지를 획득하는 활동은 상호 변증법적인 관계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농민당이란 관료적 조직이 아니라 강력한 여론의 흐름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단지 뼈대 조직의 존재만으로도, 선별하는 메커니즘으로서 그리고 지식인 집단들을 통제하여 신분적 이익에 따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이한 지반 위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장치로서 큰 효용을 발휘한다(99).

농업문제 전문가주세페 페라리
-농업노동자란 단지 토지가 없는 농민일 뿐이다. 리소르지멘토 시기 예속 노동이 훨씬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그들의 심리 상태는 농민과 소소유자의 심리 상태와 동일했다.
-농업 노동자들의 문제는 남부보다 성격이 더 은폐되어 있었던 포 계곡에서 첨예한 형태로 제기되었다. 이것은 경제외적 원인에 의한 것이었는데 인구 과잉, 공공사업 정책을 통해 인위적으로 유지되었다. 토지소유자들이 농업 노동자들과 소작인들로 이루어진 단일 계급이 형성되는 것을 막았다(100).
-페라리의 입장은 연방제주의에 의해 한층 약화되었다. 연방제주의는 프랑스의 이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게 했다. 실제로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극히 싫어했다. 프랑스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스위스 형의 소국들의 무리로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온건파는 1848년 이후 자신들의 헤게모니 하에 국민적 블록을 형성했다(101).

자코뱅당은 결사적인 투쟁을 통하여 지도하는당이라는 자신의 기능을 쟁취했다. 대단히 전진된 위치로 부르주아지를 이끌어 갔다. 그 위치는 역사적 전제들이 허용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훨씬 더 전진된 것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반동과 나폴레옹 1세의 역할이 나타났던 것이다(102).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주의적 특징
-양상: 사태의 강요, 기정사실화, 부르주아지를 앞으로 내모는 정력적이고 단호한 인간집단
-3신분은 동질적인 것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이질적인 지식인 엘리트와 경제적으로는 앞서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온건한 한 집단을 가지고 있었다(102). 그들은 조합주의적이익만 제기했다. 혁명의 선발대는 아주 작은 온건한 개혁론자들이었다.
-점차 부르주아지를 전체 민중 세력의 헤게모니 집단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새로운 엘리트가 선별되어 나왔다. 구사회 세력들의 저항과 국제적인 위협이 요인이었다.
-자코뱅은 굴복하지 않는 구사회의 인자들과 반동으로 돌아선 혁명가들을 단두대로 보냈다. 결국 자코뱅당은 혁명 과정의 유일한 정당이었다. 특정 집단의 구체적인 개인들의 요구만이 아니라 기본적 집단에 동화되어야 할 모든 국민적 집단들의 요구를 반영했다. 마키아벨리적인 현실주의자들이었다. 평등과 우애와 자유를 절대적인 진리로 확신했고 거대한 인민 대중 역시 진리임을 확신했던 것이다(103).
-농촌의 프랑스는 파리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구제도를 분쇄하기 위해 제3신분의 가장 선진적인 분자들과 블록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자코뱅당은 부르주아 정권만을 조작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했다. 부르주아 국가를 창출하여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국민을 지도하는 헤게모니 계급이 되도록 했다. 새로운 국가에 항구적인 기초를 제공했고 치밀한 근대 프랑스 국가를 창출했던 것이다. 자코뱅은 언제나 부르주아지의 지반 위에 서 있었다.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최고가격제 법안을 통과시켜 파리의 도시 블록을 깨뜨렸고 테르미도르가 차지하게 되었다.
-혁명이 광범한 계급적 한계에 부딪혀 동맹과 영구혁명 정책은 당시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종말을 맞았고 오직 군사독재를 통해서만 수습되었다(105).

  행동당에는 자코뱅적 태도, 지도하는정당이 되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가 없었다(106). 이탈리아에서의 투쟁은 구조약들과 당시 국제 질서에 맞서는 투쟁과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나타났다. 프랑스의 자코뱅당은 외부의 적을 쳐부수기 위해 9월 대학살(마라)을 단행해 적의 동맹자를 분쇄했다. 이탈리아에서 행동당은 이들을 적발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다소 애국적 긍지에 관한 문제로 변형되어 논쟁만 일으켰다(107).

이탈리아에서 자코뱅당이 형성되지 않은 이유는 부르주아지의 상대적 허약성과 1815년 이후 유럽의 상이한 역사적 풍토에 있다(109).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
프랑스 가장 다채로웠고 적극적 능동적 정치적 분자가 가장 풍부했던 곳
독일 -1848 운동은 실패했으나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은 민족문제와 중간적 형태의 계급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었다. 부르주아지는 경제·산업상의 권위를 획득했으며 구봉건 계급들은 군대, 행정, 토지에 대한 특권을 유지하면서 국가의 정치적 통치 계층으로서 위치를 고수했다.
-구계급은 출신 신분과 전통에서 비롯된 특수한 기질을 가진 채 국민적 기능을 수행했으며 부르주아지의 지식인이 되었다.
-자본주의가 발전했음에도 융커와 황제독재주의가 권좌를 유지한 이유는 산업 발전에 의해 창출된 계급 관계에서 부르주아 헤게모니는 한계에 부딪혔고 진보적 계급들 사이의 위치가 역전됨으로써, 부르주아지는 구제도적 외관의 일정 부분을 잔존케 하여 자신의 실제적인 지배를 은폐했다(110).
영국 크롬웰의 의회당원들의 막강한 힘에도 불구하고 구 귀족은 특권을 지닌 통치 계층으로 남았고 영국 부르주아지의 지식인 계층이 되었다(110).

    국제 관계는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에 매우 중요한 요소였지만 온건당은 과장하여 받아들였으며 카보우르도 당적인 이유로 그렇게 했다. 그는 어떤 직업외교관적인 왜곡벽이 있었는데 이것이 너무나 많은어려움을 맛보게 했고 그를 모사가적인과장 및 교활과 음모의 천재로 이끌었다(111).

1848년 이후 군사적 지도란 오스트리아를 몰아내는 일이었다(112). 우익 피에몬테 정당들이 취한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소심하면서도 무모한 정책이 패배의 일차적 이유였다. 대중 정책의 결여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113). 군사적 지도는 적의 배후에서 봉기하여 적의 이동과 병참 지원을 차단할 수 있는 민중 세력들의 정치·폭동적 동원이 포함되며 보조 세력과 예비 세력을 창출하는 문제도 포함된다. 민중 동원 정책은 1849년 이후에조차도 수행되지 않았다(114).

리소르지멘토의 두 번째 시기에는 우익의 민족 정책이 보나파르티즘 하의 프랑스의 지원을 얻기 위해 포함되었는데 프랑스와의 동맹으로써 오스트리아 세력과 균형을 이루었으나 우파의 정책은 반도의 통일을 20년 이상이나 지연시켰다. 분열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군사적 결과를 예견하지 못한 채 정치적 지도를 변경시킨 자들이다(115).

수많은 대중이 도덕적 힘이라는 커다란 원군의 도움 아래 육체적·신경적·정신적 긴장을 감내해야 하는 진지전은 인간집단의 가장 은밀한 열망과 감정까지도 헤아릴 줄 아는 뛰어난 정치적 지도만이 이들의 해체와 패배를 막을 수 있다. 군사적 지도는 언제나 정치적 지도에 종속되어야 한다. 전략적 계획은 정밀한 일반 정책의 군사적 표현이어야 한다. 시저의 갈리아 전기는 정치적 기예와 군사적 기예의 현명한 결합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예이다. 병사들은 시저를 군사적 지도자로만 본 것이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 민주주의의 지도자로 보았던 것이다(116).

파국에 대한 책임은 온건파나 행동당에게 돌려져야 한다. 결국 지배계급들의 미숙성과 비효율성에 돌려져야 한다. 그들은 인민을 지도할 능력이 없었으며 인민의 열정과 열의를 불러일으킬 능력이 없었다. 불량 모사품만 만들었을 뿐이다. 민중을 새로운 국가의 틀에 통합시킨다는 목표도 달성하지 못했다. 1870년부터 1900년까지의 형편없는 정치 행태, 이탈리아 민중의 근원적이고도 풍토병적인 반항심, 회의적이고 겁많은 지배 계층의 왜소하고도 발육부진적인 존재, 이 모든 것들이 그러한 실패의 결과이다, 또 새로운 국가의 실제적 자주성을 결한 국제(118)적 지위이다. 그 자주성은 교황령과 대다수 민중의 음울한 소극성으로 인해 약화되었던 것이다. 리소르지멘토의 우파들은 대단한 선동정치가들이었다. 그들은 민중·국민을 도구, 대상물로 만들었으며 그 지위를 격하시켰다(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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