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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람시의 옥중수고 2 』 1장 3절 이탈리아 역사에 대한 수고 20220520 개벽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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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소르지멘토 기간중의 도시농촌 관계와 국가구조 내에서의 도시농촌

 

이탈리아에서는 도시 인구와 농촌 인구 사이의 관계가 단순하고 도시적인 유형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먼저 근대 문명에서 도시적인 것농촌적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정해 둘 필요가 있다. 때로는 농촌적인 유형이 자칭 도시적이라고 하는 유형보다 더 진보적인 역설적 현상이 일어난다. ‘공업도시는 유기적으로 그에 의존하는 농촌 지역보다 언제나 더 진보적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들이 공업적인 것은 아니다.(119)

 

도시에는 모든 사회 집단들 사이에 농촌에 대립하는 도시적인 이념적 통일이 존재하며, 문명 기능의 측면에서 보아 가장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핵심들조차 이러한 통일의 예외가 아니다. ‘농민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있으며 농촌의 요구에 대항하는 암묵적인 공동 전선이 이루어져 있다.(120)

 

도시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루포 추기경의 부대로 지직된 농촌에 의하여 분쇄되었다. 공화국은 그 초기의 귀족적 단계와 그 이후의 부르주아적 단계 모두에 걸쳐 농촌을 전적으로 무시했다. 또 한편으로 나폴리의 대중들은, 자코뱅적 대변혁이 그 농지수입을 나폴리에서 소비하는 토지재산을 몰수하고 대다수 민중의 수입과 생계의 원천을 상실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음을 보고, 공화국에 대해 적대적이지는 않더라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리소르지멘토 기간 중에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정치적 위기 속에서 행동을 시작한 것은 남부-1799년의 나폴리, 1820~21년의 팔레르모, 1847년의 메시나와 시칠리아, 1847~48년의 시칠리아와 나폴리 등-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운동이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북부와 남부의 중도적인 방식을 닮은 특이한 성격을 띠었다는 점이다.(121)

 

대중 주도의 시기는 1815년에서 1849년까지 계속되었으며 투스카니와 교황령 국가들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이러한 특이성은 그 이후에도 계속 반복되었는데, 18146월 사태는 중부의 몇 몇 지역에서 정점에 달했으며, 1893년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위기는 남부와 루니지아로 확산되었다가 1898년 밀라노에서 정점에 달했고, 1919년 남부와 시칠리아에서 토지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1920년에는 북부에서 공장점거가 있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1815년 이래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정치경제적 구조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122)

 

북부와 남부의 지식인 계층은 구조와 출신이 다르다. 남부에서 지배적인 유형은 아직도 협잡배같은 법률가이며 이들이 농민 대중과 지주 및 국가기구 사이의 접촉을 관장한다. 북부에서 지배적인 유형은 노동자 대중과 경영진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공장 기술자이다. 국가와의 연결은 보통 전혀 새로운 지식인 계층에 의해 주도되는 정당조직과 노동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123)

 

경제와 북부의 헤게모니를 강화해주는(산업가와 노동자의)‘도시블록을 북부에서 창출하려는 목표가 들어있다. 남부는 반식민지적 시장, 저축과 조세의 원천이라는 지위로 전략하였고 두 가지 조치에 의해 그러한 기강이 유지되었다.’

 

1. 경찰적 조치로서 농민들을 주기적으로 학살하여 일체의 대중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2, 정치경찰적 조치로서 지식인계층 혹은 팔리에타에 대한 개인적인 혜택을 배푸틑 것이었다.

 

남부의 불만은 지도의 결여로 인해 정상적인 정치적 형태를 취하지 못하고 단지 무정부적 소요로 표현됨으로써 법정과 경찰의 소관 사항이 되어버렸다.(124)

 

지올리티의 강령은 다음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엉망이 되었다.

1.사회당 내에서 무솔리니의 지도하에 비타협주의자들이 전면에 등장했고 그들이 남부주의자들과 밀회함으로써 북부의 도시 블록을 깨뜨렸다.

2.보통 선거권의 도입으로 인하여 남부의 의회기반이 전례없을 정도로 팽창하였기 때문에 개별적인 매수가 어렵게 되었다.(125)

 

지올리티는 파트너를 바꾸고 도시 블록을 젠틸로니 협정으로 대체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북부의 공업과, ‘유기적이고 정상적인농촌의 농민 사이에 형성된 블록이었다.(126)

 

1913년에 선거권이 확대되자, 전쟁을 통하여 농민 대중이 정치조직적 경험을 획득한 결과 1919~21년에 그 절정에 이르게 될 현상의 초기징후, 즉 남부 농촌 블록이 상대적으로 와해되고 일부 지식인들의 주도하에 농민들이 대토지소유자들로부터 일탈하는 현상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농민 대중의 자치는 사르디니아에서 남부를 거쳐 시칠리아로 갈수록 그 중요성이 점차 감소되며 대토지소유자들이 행사하는 조직된 힘, 위신, 이념적 압력에 의존하게 된다.(127)

 

지식인들의 사회정치적 기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접하게 되는 기본 계급들에 대하여 어떠한 심리적 태도를 가지는가를 조사하고 검토해야 한다. 리소르지멘토 기간 중 소위 행동당은 온정주의적태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대다수 인민 대중을 국가와 접촉하게 하는 데에 극히 제한된 정도로밖에는 성공할 수 없었다. 도시와 농촌 사이의 관계는, 이탈리아 역사의 기본적인 추진력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리소르지멘토 기간 중 행동당의 정책들을 고려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요체는 무엇인가를 연구하는데 필요한 출발점이 된다.

 

다음과 같은 도식적인 설정을 해보자.

 

1.북부의 도시 세력, 2남부의 농촌 세력, 3.중부의 농촌 세력, 4.시칠리아의 농촌 세력, 5.사르디나아의 농촌 세력

 

이 세력들 중 첫 번째의 것은 기관차와 같은 기능을 담당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속도로 역사를 뚫고 앞으로 달릴 수 있는 기차를 만들기에 가장 유리한결합은 어떠어떠한 것일까를 검토하는 일이다. 한편 첫 번째 세력은 우선은 자체 문제, 즉 내부적인 문제- 조직의 문제, 동질성을 분명히 하는 문제, 정치군사적 지도의 문제를 지닌다.(128)

 

리소르지멘토의 여러 국면을 볼 때 이 첫 번째 세력이 외세 지배에 대한 투쟁에서 비타협적인 입장을 취하면 남부의 진보적인 세력들도 들고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북부가 투쟁을 선도하면 중부는 평화적으로 넘어왔고 남부에서도 가리발디의 공격에 의해 부르봉 왕조가 몰락했다. 이것은 온건파가 북부와 중부를 조직한 후 행동당이 적시에 개입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적 동시성을 조직했던 것은 동일한 정치군사적 지도력이 아니라, 성공적으로 통합한 두 지도부의 협조였다.(129)

 

남부의 도시 세력들은 북부와 동일한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북부의 도시 세력들은 남부의 도시 세력들에게, 그들의 지도적 기능은 북부의 남부에 대한 헤게모니가 일반적인 도시농촌 관계의 형태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선에서 제한되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하여야 했다. 남부 도시 세력들의 지도적 기능은 북부 도시 세력들의 보다 광범한 지도적 기능의 종속적 계기 이상일 수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로 인해 가장 껄끄러운 모순이 형성되었다. 남부의 도시 세력들의 보다 광범한 지도적 기능의 종속적 계기 이상일 수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로 인해 가장 껄끄러운 모순이 형성되었다. 남부의 도시 세력은 북부의 그것으로부터 독립된 독자적인 것으로 간주 될 수 없었다. 문제를 그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치유불가능한 국민적균열-너무나 심각하여 연방제주의적 해결책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균열을 조급하게 주장하는 것을 의미하였을 것이다.(130)

 

마치니의 종교 개혁에 대한 요구 때문에 행동당의 농민에 대한 행동은 무력해 지고 말았다. 종교 개혁은 대다수 농민 대중에게 관심 밖의 일이었고 오히려 농민들로 하여금 새로운 이교도에 대한 반대 선동에 고무되게 만들었다. 프랑스 혁명의 예를 보면, 자코뱅당은 농촌 문제의 지형 위에서 지롱드당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우익 정당들을 분쇄하는 데에 성공했고, 파리에 대항하는 농촌 연합의 결성을 방지했을 뿐 아니라 지방에서 자신들의 지지자를 배가시키는 뎅0도 성공했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종교 개혁-비록 그 개혁이 실제의 역사 과정에서 당면한 중요성과 구체성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진한 것으로 인해 손상을 입었다.(133)

 

 

온건파와 지식인

 

온건파가 다수 지식인에 관한 한 유리 한 지위를 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지오베르티는 지식인들에게 독창적이면서도 민족적인 것처럼 보이는 철학, 적어도 이탈리아를 보다 발전한 국가들과 같은 수준으로 올려놓고 이탈리아의 사상에 새로운 품위를 부여할 것같은 철학을 제공하였다. 반면에 마치니는 모호한 설명과 철학적 암시만을 제공했을 뿐이며 많은 지식인과 나폴리 사람들에게는 공허한 수다로 비쳤을 것임에 틀림없다.(134)

 

온건파 측의 활동- 감독 교습이라는 교육 원리의 도입(콘팔로니에리, 카포니 등), 페란테 아포르티의 운동과 빈곤 문제와 관련한 기아 학교 등이 있었다. 유익한 구체적인 교육운동은 예수회식학교에 반대하여 나타났고 이는 그러한 운동의 대가로 학교교육 내에서 독자성을 부여받은 사람에게나, 자유주의적이고 반 예수회적인 성직자들에게 효과를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각급의 학교교육 활동은 모든 계급의 지식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당시에 소부르주아지가 주도권을 발휘하기에는 사회구조가 협소했고 그 길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그 의미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컸다.(오늘날에는 저널리즘, 정당, 산업체, 대단히 방대한 국가기구 등이 고용 기회를 전례가 없을 정도로 늘렸다.)(135)

 

지식인에 대한 지도적 중심의 헤게모니는 다음 두 개의 중요한 통로를 통해서 행사된다.

1.삶의 일반적 개념으로서의 철학(지오베르티). 이것은 강제에 의해 지배권을 행사하던 구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원리를 제공함으로써 그 추종자들에게 지적인 긍지와 구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투쟁의 요소를 부여한다.

2.학교교육계획, 교육원리, 그리고 독창적인 교육학. 이것은 가장 동질적이고 가장 수가 많은 지식은 일파(교사, 초등학교 교사에서 대학교 교수까지)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분야이며, 전문분야에서 그들에게 활동의 독자성을 부여한다.

 

리소르지멘토 초기에 수차 조직된 학자들의 대회는 이중적인 효과를 낳았다.

1.그것은 최고 등급의 지식인들을 집중시키고 그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그들을 재편성하였다.

2.그것은 통상 신분관념상 대학교수와 대학자들을 추종하는 경향이 있는 낮은 등급의 지식인들의 결집을 촉진시켰고 그들에게 더욱 확고한 지향점을 부여하였다.(136)

 

 

피에몬테의 기능

 

이탈리아에서 리소르지멘토에서 피에몬테의 기능은 지배 계급으로서의 기능이었다. 실제로 문제가 된 것은 새로운 이탈리아 국민국가의 형성을 규정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136)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지도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도자지도받는자를 전제로 하는데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핵들에 의해 지도받았던가?’ 이 핵들은 누구도 지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지배였지 지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그들의 인자가 지배하는 것을 원했다기보다는 그들의 이해가 지배하는 것을 원했다. 그들은 새로운 독립적인 세력이 국민국가의 전권자가 되기를 원했다. 바로 그 세력이 피에몬테였으며 따라서 그것은 군주의 기능이기도 하였다. 피에몬테에는 정당과는 또 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요컨대 피에몬테는 군대와 외교 활동 등을 구비한 하나의 사실상의 국가였다는 것이다.(137)

 

수동적 혁명에서 피에몬테식의 기능이 지니는 의미를 보다 깊이 분석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여 갱생을 위한 투쟁을 지도하는 데서 한 국가가 지역 사회집단들을 대신한다는 사실에 대한 분석이다. 우리는 이러한 집단들이 지도의 기능이 없이 지배의 기능을 지닌다는 것, 즉 헤게모니 없는 독재임을 보게 된다. 여기서는 한 집단이 자코뱅적 모델에 따라 운동에 동력을 주고 운동을 급진화하는 등의 일을 하기 위하여 다른 세력들에게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의 일부가 그 집단 전체에 대해 헤게모니를 행사할 것이다.(138)

 

수동적 혁명의 개념

 

수동적 혁명의 개념은 정치학의 두 기본원리로부터 엄밀하게 도출해내어야 한다.

1.어떠한 사회구성체도, 그 내부에서 성장한 생산력이 아직도 발전할 여지가 있는 한 소멸하지 않는다.

2.사회는 그 해결을 위한 필요조건들이 이미 배태되어 있지 않은 과제를 스스로 제기하지 않는다.

이들 원리는 상황이나 세력들의 균형을 판별할 수 있게 하는 세가지 국면에 대한 기술과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그 세 국면 가운데 두 번째 국면(정치 세력들의 균형)과 특히 세 번째 국면에 국면(정치군사적 균형)은 최대한 강조되어야 한다.(139)

 

최근 인도에서 유행하고 있는 간디주의 현상과 톨스토이의 악에 대한 무저항 이론은 모두 기독교 사상의 초기 단계(밀라노 칙령 이전)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간디주의와 톨스토이주의는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소박한 수동적 혁명이론들이다.(140)

 

수동적 혁명의 개념은, 빈첸초 쿠오코가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의 초기에 부여했던 의미 가운데 기동전에 대비되는 진지전의 개념과 연관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하면 그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의미를 지니는가? 그리고 소렐주의가 1871년 파리 대학살 뒤이은 공포라는 경지에서 설명될 수 있듯이, 프루동과 지오베르티라는 한쌍의 인물이 1793년의 공포 정치로부터 형성된 공포라는 견지에서 설명될 수 있는가?

 

카보우르마치니 투쟁에서, 이때 카보우르는 수동적 혁명 / 진지전의 대표자였고 마치니는 대중혁명 / 기동전의 대표자였는데, 양 측은 모두 똑같이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카보우르는 마치니의 역할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고 있었음에 반하여, 후자는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고 있었음에 반하여, 후자는 자신의 역할도 카보우르의 역할도 자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141)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에서 행동당의 한층 새로운 요소들이 카보우르주의로 넘어옴에 따라 온건파의 세려구 구성이 어떻게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그 결과 어떻게 한편으로는 신구엘프주의가 일소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니주의 운동이 빈곤화되는가 하는 점들이 밝혀진다. 이러한 요소는 후에 변신이라고 불리는 현상의 초기의 국면인데, 역사 발전의 한 형태로서의 그 중요성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142)

 

카보우르와 마치니의 역학을 철학의 빈곤에서 제기되었던, 변증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이론적인 문제의 한 실례다. 변증법적 대립의 양 쪽은 각자가 전체가 되도록 해야 하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일체의 정치적도덕적 자원을 투쟁에 투입해야 하며,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자신의 대립물에 대한 변증접적 지양이 가능하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을 프루동이나 마치니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이 점에 대해 지오베르티 혹은 수동적 혁명이나 혁명 / 복고의 이론자들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는 반론이 제기되겠지만 사실 그들은 경우가 다르다.

 

정치 투쟁이 기동전에서 진지전으로 이행하는 문제는 분명 이와 관련하여 고려되어야 한다. 군사 이론은 기동전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마치니와 같은 사람으로서는 이러한 문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치니주의의 군사이론가였던 피사카네에게서 어떤 비슷한 언급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143)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에서 수동적 혁명 / 진지전관계의 다른 측면들 역시 연구될 수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한편으로는 인적측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동원의 측면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인적 측면- 세계개전 당시 한편으로는 현역 직업장교와 예비군에서 차출된 장교 사이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징집병과 지원병 / 돌격대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을 통해 정확하게 비교될 수 있다.(144)

 

직업장교들은 리소르지멘토에서 정규적이고 유기적이며 전통적인 등등의 정당들에 대응되는데, 이들은 행동의 순간(1848)에 스스로 무기력 해지거나 거의 무기력하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1848~49년에는 대중적마치니적민주적 파도에 휩쓸려 버렸다.

 

이러한 인적측면은 동원의 측면과 연결된다. 마치니의 주도권에 타격을 가한 것은 언제나 혁명적 동원의 기술적 어려움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145)

 

리소르지멘토의 진행과정에서, 우연히 급조된 지도자들을 갖춘 선동적대중운동의 커다란 중요성이 부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은 실제로 전통적인 유기적 세력들 즉 합리적으로 구성된 지도자들을 갖춘, 오랜 기간을 이어 온 정당들 에 의해 흡수되고 말았다.(146)

 

세계대전에서 예비병들에 대한 전통적인 직업 장교들의 승리도 유사한 경우이다. 여하튼 급진적 민중세력들은 반대 세력의 역할에 대한 인식을 결여함으로 해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각자의 실제적인 개입역량에 비례하여 최종적인 세력균형을 가늠해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진보적이고 근대적인 노선에 입각한 더욱 전진될 결과를 규정해내는 데에도 실패했다.(147)

 

 

첫 번째 후기

수동적 혁명이라는 명제. 이 명제의 효용성과 위험성. 역사적 패배주의, 즉 무관심주의의 위험성. 그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은 모두 일종의 숙명론적 신념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하지만 이 개념은 여전히 변증법적이다. 다시 말하여 그것은 모든 자체 발전잠재력을 비타협적으로 제공해 줄 수 있는 강력한 반명제를 필수조건으로 제기하며, 또한 확실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리소르지멘토에서 이탈리아 자유주의자들의 계획으로서 수동적 혁명이론이 아니라, 다른 쪽의 활동적 분자들이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도로까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해석 기준으로서 수동적 혁명 이론인 것이다.(148)

 

 

크로체의 두 개의 역사에 대하여 그 비판적 논문을 위한 자료

 

혁명에 의하여 창출된 근대 프랑스 국가와 유럽 대륙의 다른 근대 국가들 사이의 역사적 관계, 이 비교는, 추상적인 사회학적 도식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 비교는 네 가지 요소에 대한 연구를 기초로 하여야 한다.

1.사회적정치적 관계의 급진적이고 격렬한 변화를 수반하는, 프랑스에서의 혁명적 폭발.

2.프랑스 혁명 및 그것의 계급적 노선에 따른 팽창에 대한 유럽의 반대.

3.공화국이나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와 나머지 유럽 국가들 사이의 전쟁

4.프랑스의 헤게모니에 대한 민족적 항거들, 그리고 최초의 프랑스 혁명과 같은 혁명적 폭발보다는 연속적인 조그마한 개혁의 물결을 통한 근대적 유럽 국가들의 탄생.(149)

 

프랑스유럽의 모델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기위해서 혹은 통치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 적지 않게 중요한 정신을 창출해 왔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이 이 길고도 은밀히 진행된 복고의 정치사회적 해체 과정에서 자신들이 수행했다고 생각하는 기능의 문제이다. 독일의 고전철학은 이 시기의 철학으로서, 1848년부터 1870년까지의 자유주의적 국민운동을 활성화시켰다. 여기서 또한 프랑스의 실천과 독일의 사색 사이에 헤겔적인 대응을 소생케 할 여지가 있다. 즉 기본적인 계급에게는 실천에 속하는 것이 그 계급의 지식인들에게는 합리성이자 사색이 되는 것이다.

 

사회 계급들의 생산적 기능에 따른 국가 개념은,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하여 19세기 전반에 걸친 유럽과 이탈리아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에 기계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비록 기본적인 생산 계급들(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와 근대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국가란 단지 특정한 경제 영역, 특정한 생산 체계의 구체적인 형태로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수단과 목적의 관계가 쉽게 결정될 수 있다거나 혹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단순한 도식의 형태를 띤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150)

 

진보의 동력이, 인위적으로 제한되고 저지되고 있던 광범한 지역 경제의 발전과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그 대신 선진국들의 이념적 조류-선진국의 생산적 발전을 기반으로 하여 탄생한 조류를 주변부로 전파하는 국제적 발전을 반영하고 있을 때, 그 새로운 사조를 수용하는 집단은 경제 집단이 아니라 지식인 계층이며, 따라서 그들에 의해 옹호되는 국가 개념은 그 모습이 변질되어 본질적인 어떤 것 혹은 절대 이성으로 파악되게 된다.(151)

 

리소르지멘토 시기에 대한 역사적문화적 평가를 위한 전통적 기준 가운데 어떤 것은 수정되거나 때로는 전도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수 있다.

1.프랑스식 합리주의와 추상적 계몽주의로 낙인찍힌이탈리아의 조류들은, 실은 그것들이 진행중에 있는 이탈리아의 경제적 발전의 구체적인 형태로서 국가를 파악하는 한, 이탈리아의 현실에 가장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조류일는지도 모른다.

2.이탈리아적인 전통을 발전시킨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가장 토착적인 것으로 보이는 조류들이야말로 진짜 자코뱅이다. ‘이탈리아적인문화란 제국과 교회의 전통에 연결된 중세 세계주의의 연장에 불과하다.(152)

 

마키아벨리는 국민적 목표를 위해 쓰고자 노력했지만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했다. 군주론은 사실상 스페인, 프랑스, 영국이 국민적 통일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경험을 발전시킨 것이었다.(153)

 

 

수동적 혁명으로 본 유럽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유기적으로 취급하지 않은 채 19세기의 유럽사를 서술할 수 있을까? 리소르지멘토의 투쟁을 다루지 않고서 근대 이탈리아사를 쓸 수 있을까? 두 경우 크로체는 비본질적이고 편파적인 이유를 들어 구조를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투쟁의 계기를 배제하고, 문화적 혹은 윤리정치적 확산의 계기만을 평온하게 역사라고 간주한다.(153)

 

1789년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공화주의자와 나폴레옹의 군대를 통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까지 확산된 위대한 혁명의 수동적측면 구제도를 강력하게 밀어붙임으로써, 프랑스에서처럼 구제도를 즉각적으로 붕괴시킨 것이 아니라 1870년에 이르기까지 점차 개량주의적으로 침식해 들어가게 한 측면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크로체가 다루고 있는 시대, 즉 프랑스에서는 자코뱅나폴레옹적으로 표현되었던 요구들이 개량주의적 방식으로 토지 개혁과, 특히 1831, 1848년의 자코뱅주의의 시기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인민 대중의 정치 참여 등을 회피한 채 구봉건 계급들의 정치적경제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합법적으로 충족되던 복고혁명의 시대에 조응하는 이데올로기적 운동을 창출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154)

 

지난 세기의 온건 보수적 자유주의 운동에 조응하는 것은 바로 파시즘 운동이다. 아마도, 파시즘이 초창기에 구 역사적우파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 사실에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크로체 자신이 연구에 몰두하는 사이에 실제로는 파시즘의 강화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사실 표면상 낭만주의적이지만 괴테를 본뜬 자신의 고전주의적 평정에 대한 초조와 같은 파시즘의 여러 가지 부차적인 특성들을 제거한 다음 파시즘에 지적인 정당화를 간접적으로 부여했다는 사실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역설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파시즘의 도식이 특히 도시와 농촌의 광범한 소 부르주아지와 같은 이탈리아의 특정 사회 집단들에게는 기대와 희망의 시대를 창출할 수 있다는 그리고 실제로 창출한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 도식은 전통적 지배 계급들의 수중에 있는 헤게모니 체계와 군사적시민적 억압의 힘을 강화시킨다.(155)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수동적 혁명이 정치 영역에서 작용했던 것처럼 국제 경제의 영역에서 진지전의 요소로서 작용한다. 1789년부터 1870년까지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에서의 기동전과 1815년부터 1870년까지 계속된 장기적인 진지전이 있었다. 최근에 19173월에서 19213월까지 기동전이 정치적 측면에서 일어났으며 그 이후에는 진지전이 실천적(이탈리아) 이면서 동시에 이념적(유럽)으로 이어졌는데,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파시즙이다.[193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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