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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_ 신비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성경제학
슈트라서는 맑스주의자들이 영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의 의미를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만일 맑스의 말처럼 종교가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일련의 착취 속에서 자라는 하나의 화초에 불과하다면, 종교가 수천 년을 견뎌왔다는 사실, 특히 기독교는 2천년동안 거의 변화하지 않았고, 더욱이 그 초기에는 혁명의 희생자를 모두 합한 것보다도 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215)
종교적 감정의 세 가지 기본요소
종교적 감정은 아주 단순한 경건한 신앙심에서 완전한 종교적 황홀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종교적 흥분은 어떤 특정한 점에서 오르가즘적 흥분현상과 조우한다. 종교적 흥분이라는 개념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예배에 참석할 때 발생하는 정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복종적인 대중이 사랑받는 지도자의 연설을 들을 때 발생하는 흥분과 인상적인 자연 현상에 압도될 때 경험하는 흥분도 여기에 포함되어야 한다.(216)
사회학적 연구는 종교의 형태와 다양한 종교의 내용이 사회경제적 관계의 발달단계와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동물을 숭상하는 종교는 원시인들의 생활양식과 부합한다.
종교예식의 형성은 개별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서 기인하는 사회학적 형성체인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신에 대한 표상이 아버지에 대한 표상과 동일하며, 성모 마리아에 대한 표상이 종교를 믿는 모든 개인의 어머니에 대한 표상과 동일하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어린아이라는 삼자 관계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속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종교의 심리적 내용은 유년기의 가족관계에서 끌려나온 것이다.(217)
모든 계급사회에서 가부장적 종교들은 항상 권력을 가진 계층의 이해에 봉사하며, 대중들의 비참함을 신의 의지로 돌리고 내세에 관한 멋진 말로 행복에 대한 요구를 연기시킴으로써 대중들의 비참함을 제거하는 것을 실제로 방해하고 있다.
*성경제학적 연구의 종교에 관한 기존의 지식에 대한 질문 추가.
1. 사회에서 만들어지고 가족에서 재생산되는 신의 개념, 원죄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심판 이데올로기 같은 것들이 어떻게 개인들의 내면에 깊이 고착되는가? 다시 말해서,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종교의 기본개념들을 수용하게 하고, 그것들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열렬하게 확언하게끔, 또한 실제로 자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그것들을 옹호하고 간직하게끔 만드는가?
2. 이러한 종교의 개념들이 언제 인간의 내면에 깊이 고착되는가?
3. 어떤 에너지의 도움으로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는가? (218)
모든 가부장적 종교의 근본이념은 성적 욕망의 부정이다. 종교적인 것과 성적인 것을 하나의 통일체로 지니고 있었던 성적인 것에 긍정적인 원시 종교를 제외한다면 이 사실은 예외가 없다.
자연법칙에 기반한 가모장제-> 가부장제-> 가부장적 계급 사회로 이행하면서 종교예식과 성적 예식의 통일성이 깨졌다.
종교적 흥분이 반성적인 동시에 성을 대체한다는 모순을 통해서만 종교의 힘과 지속력이 파악될 수 있다.(219)
진정한 종교적 인간의 흥분구조는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설명될 수 있다. 성-부정적인 종교적 상상을 수용했고 처벌의 두려움도 습득했기 때문에 자연스런 성적 긴장과 만족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계속해서 억제해야만 하는 만성적으로 지나치게 긴장된 육체적 흥분상태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된다. 그렇기에 세속적인 행복은 성취할 수 없는 것 일 뿐만아니라, 심지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고 내세에서 은혜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현세에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감정에 굴복하게 된다.
교회의 신비적인 어둠은 개인의 내적 생활에 대한 초개인적 감수성의 효과를 증대시키며 또한 그러한 효과를 얻기 위해 행해지는 설교, 성가 등의 소리에 대한 감수성도 증대시킨다.(220)
종교적 인간이 종교적 상상의 도움으로 강력한 흥분 속으로 빠지게 되면, 만족에 거의 도달하지만 실제의 육체적 긴장완화는 가져오지 않는 생장적으로 짜증스러운 상태도 육체적 흥분과 함께 증가된다.
정신질환이 있는 성직자를 치료할 때 종교적으로 황홀한 상태가 최고조에 달하면 무의식적인 사정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즉 정상적인 오르가즘적 충족은 성기가 배제된 채,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우발적으로 부분적 긴장완화가 일어나는 일반적인 육체적 흥분상태로 대체되는 것이다.
원래 자연적으로 성적 쾌락은 인간을 일반적인 자연과 결합시켜 주는 좋고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성적 감정과 종교적 감정이 분리되었고, 성적인 것은 나쁜 것, 지옥같은 것, 악마적인 것이 되었다.(222)
육체적으로 긴장완화를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적 흥분을 매우 고통스럽고 성가시며 파괴적인 것으로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성적 흥분은 매우 파괴적이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성을 악마적 힘으로 보거나, 사람을 파멸시켜 최후의 심판으로 이끄는 것으로 보는 종교적 상상은 실질적인 육체의 과정 속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성에 대한 태도는 분리될 수밖에 없다. 즉 ‘선’과 ‘악’,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성스러움’과 ‘악마적인 것’ 등의 전형적인 종교적 ․ 도덕주의적 가치부여는 성적 충족의 상징이며, 성적 충족에 대한 처벌의 상징인 것이다.
의식적으로는 ‘죄악’의, 무의식적으로는 성적 긴장의 발현과 구원에 대한 깊은 열망이 동시에 방어된다. 종교적 황홀상태는 결코 방출 될 수 없는 자율 신경체계의 성적 흥분일 뿐이다. 종교적 흥분은 반성적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대단히 성적인 것이기도 하다. 금욕적인 교회 집단만큼 히스테리와 도착이 많이 발생하는 사회적 계층은 없다.(223)
종교적 감정이 장신의 기원과 무의식적인 충족 요구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신을 은폐하려 할 때 종교적 감정의 순수성은 상실된다. 목사와 종교적인 사람들의 위선적으로 선량한 태도는 바로 이러한 거부와 은폐를 통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1. 종교적 흥분은 자율신경적이고 성적인 은폐된 흥분이다.
2. 이 흥분의 신비화를 통하여 종교적 인간은 성적인 것을 부정한다.
3. 종교적 황홀은 오르가즘적인 자율신경 흥분상태의 대체물이다.
4. 종교적 황홀은 성적으로 긴장을 완화시키지 못하며, 기껏해야 근육과 정신의 피로를 낳을 뿐이다.
5. 종교적 감정은 주관적으로는 순수한 감정이며, 생리적인 토대 또한 가지고 있다.
6. 종교적 흥분의 성적 속성을 거부하면, 개인의 성격은 순수성을 상실하게 된다.(224)
우리는 환자를 치료하면서 성기 근육 경련의 조건을 제거하게 되면 신에 대한 표상과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은 틀림없이 기반을 상실한다. 따라서 성기경련은 종교적 두려움이 생리적 ․ 구조적으로 닻을 내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로 인해 모든 종교적 도덕성의 핵심을 이루는 쾌락에 대한 공포가 발생하게 된다.(226)
성적 공포를 통한 종교의 정박(碇泊)
성에 적대적인 종교성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의 산물이다. 모든 가부장적 종교에서 발견되는 아들-아버지 관계는 당연하게도 사회적으로 결정된 종교적 경험의 내용일 뿐이다. 종교의 기능은 확고한 토대인 성적 억압에 의해 변형된 가부장적 인간구조에 의존한다. 육체적 쾌락에 대한 부정이 바로 종교적 태도의 살아 있는 원천이며 모든 종교적 교리의 축인 것이다.(226)
충동적 삶의 지배를 받느라 완전한 인간됨을 결코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강력한 충동 그 자체가 슬퍼해야 할 이유인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강력한 충동은 풍요로움과 삶의 향상을 의미한다. 충동은 크고 강력한 사랑과 더 나은 작업능력과 실행능력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232)
동물로서의 삶을 살고 싶은가, 정신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은가? 우리의 시대는 병들어 있다. 예전의 사람들은 성적인 사랑을 규제하고 그것에 책임을 지도록 요구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은 더 이상 규제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대도시에 살고 있는 현대인이 점점 더 신경질적이 되고, 의지가 약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더 많은 규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233)
신과 성이라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초인이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도 무성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지만, 어쨌든 무성은 그 성취의 우선적인 전제조건이다. ‘동물’과 ‘영적인 사람’을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은 ‘성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대립을 지향한다. 이러한 대립설정은 모든 신지학적 도덕철학의 토대 형성에서 볼 수 있는 반정립이다. 그러나 이 반정립은 그것의 토대, 즉 성의 부정에 이의가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확고한 것이었다.(240)
평범한 젊은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성과 두려움 사이의 날카로운 갈등이 존재하는 권위주의적인 가정을 통하여 이런 대립을 준비해 왔다.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은 팸플릿은 세상의 어려움은 제거해 주지도 못하면서 젊은이들을 신비주의의 방향으로 몰아붙인다. 가톨릭교회는 자위에 대한 고해성사를 젊은이들에게 주기적으로 행함으로써 곤경에서 빠져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가톨릭교회는 스스로 다른 어려움 속으로 빠져든다. 교회는 두 가지 조치를 통해 대중적 기반을 유지한다. 즉 성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는 것과 반자본주의적 태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대중들을 교회에 묶어둔다.(241)
종교는 성기적 성을 억압하는 데에서 자신의 힘을 끌어내는데, 이 억압은 수동적이며 피학적인 동성애와 같은 이차적인 퇴행을 촉발한다. 따라서 충동의 역동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종교는 성기적 두려움에 그 토대를 두고 있으며, 성기성을 청소년에게 이미 자연스러운 충동이 아닌 이차적 충동으로 대체하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 종교적 – 신비주의적 영향아래 있는 청소년들에 대한 성경제학의 과업은 자연스런 성기적 요구가 이차적(동성애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충동과 맞붙어 싸우도록 만드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과제는 성경제학적 영역에서 사회적 진보의 객관적인 발전 노선, 즉 성기성의 부정을 지양하고 청소년의 성기적 성을 긍정하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243)
마리아 숭배는 순결을 관철시키는 데 매우 성공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런 영향력에 복종하는 청년 대중들을 주로 성기적 충동을 억누르는 것으로 활용한다. 가톨릭 청년들의 정서 생활 속에서 성모는 청년들의 어머니 역할을 떠맡게 되며, 가톨릭 청년은 한 때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쏟았던 모든 사람, 즉 첫 번째 성기적 욕구의 열렬한 사랑을 성모 마리아에게 쏟는다. 그렇지만 근친상간 금지는 그 청년의 성기적 욕구를 오르가즘에 대한 갈망과 성적이지 않는 애정으로 나누어버린다.
건강한 젊은이가 사랑하는 사람과 오르가즘을 경험할 때 내놓는 것과 똑같은 생명력 있는 힘과 거대한 사랑을 신비주의적 인간은 성기적 욕구가 억압된 후의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신비주의적 숭배를 지지하는 데 사용한다. 바로 이것이 신비주의가 자신의 힘을 끌어내는 원천인 것이다. 그 힘이야 말로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지배해 온 신비주의의 능력과, 대중들의 책임에 반하여 작용하는 억압을 잘 설명해준다.(248)
동정녀 마리아나 다른 우상에 대한 숭배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모든 새로운 세대에 신비주의적 인간구조를 생산하는 문제인 것이다.(249)
건강한 자존심과 신경증적 자존심
현대인의 성교에 대한 혐오는 성생활의 실제적인 타락에 의하여 정당화된다. 이렇게 타락한 성생활은 일반적인 성의 전형이 된다. 따라서 강제적 도덕성은 나중에 바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증거로 끌어들이는 것(“성적인 것은 비사회 적이다”)을 만들어 낸다.
성적 쾌락에 대한 인식과 오르가즘을 봉쇄하기 위해, 신비적 흥분은 생물적 – 심리적 기관에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켜야만 한다. 실제 성생활은 가치를 ᄄᅠᆯ어뜨리는 어떤 것으로 경험된다.(250)
민족주의적인 정서와 마찬가지로 신비주의적 인간의 자존심 역시 방어적 태도에서 창출된다. 신비주의적 인간의 자존심은 겉으로 보기에도 자연스러운 성기적 만족에서 도출되는 자존심과 다르다. 신비주의적 인간은 과장되고 자연스럽지 못한 행동을 보이며, 성적 열등감을 그 특징으로 갖는다. 이 점이 신비주의적이거나 민족주의적 ‘도덕’ 교육을 받은 인간들이 왜 ‘명예’, ‘순수성’ 등과 같은 정치적 반동의 표어에 쉽게 감동하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명예롭고 순수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부단히 일깨워야 한다. 성기적 성격은 자발적으로 순수하며 명예롭기 때문에 스스로를 일깨울 필요가 없다.(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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