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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몫 – 조르주 바타유 /1부 이론적 입문 / 24.03.13. / 화니짱
1장. 일반경제의 의미
지구상의 에너지 과정에 대한 경제의 의존 관계
p27 : 산업 발전의 총체 안에는 사회적 갈등과 전 지구적 전쟁이 꼭 있지 않은가, 한마디로 인간의 전체적 행위 안에는 오직 경제의 일반적 여건들을 연구한다는 조건하에서만 파악이 가능할 원인과 결과들이 있지 않은가?
2. 체계의 성장에 이용 불가한 에너지 과잉을 이득 없이 상실할 필연성에 대하여
p30 : 과잉의 에너지(부富)는 어떤 체계(예를 들어 어떤 유기체)의 성장에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체계가 더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되면, 또는 에너지의 과잉이 그 성장에 전적으로 흡수될 수 없다면, 자발적이든 아니든, 영광스러운 방식으로든 아니면 파국적인 방식으로든, 필연적으로 그러한 과잉은 이득 없이 상실되고 소비되어야 한다.
3. 유한한 유기체 또는 총체 들의 빈곤과 살아 있는 자연이 지닌 부의 과잉
p32 : 지구 표면에서 이러한 생명체 일반에게 에너지는 언제나 과잉 상태에 있으며, 그래서 문제는 언제나 이러한 사치/과잉의 형태로 제기되는 것인데, 바로 그때 우리의 선택은 부를 어떻게 탕진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제한된다. 필요라는 문제는 그저 특정한 생물 혹은 그러한 생물들의 제한적인 전체에만 제기되는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단순히 생물계나 다른 인간과 자원의 몫을 두고 다투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33)인간은 멈출 줄 모르는 생명체의 누출(낭비)이라는 일반적 운동에 의해 활성화되는 존재이다.
필요에 굶주린 분리된 존재로서의 인간에 내재하는 궁핍과 필요에 대한 의식이 우리를 끊임없이 구속하기에, 인간은 이(34)러한 누출/낭비의 운동을 부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부정이 에너지의 전 지구적 운동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에너지가 생산적 힘들 안에서 무제한적으로 축적될 수는 없으며, 종국에 그 에너지는, 마치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처럼, 우리로부터 벗어나 우리를 위해 소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 과잉 에너지의 파국적 소비로서 고찰되는 전쟁
p35 : 고대 사회들은 유용성을 전혀 갖지 못하는 장엄한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세웠고, 우리 사회는 이러한 과잉을 삶의 고충들을 완화시키는 여러 ‘서비스들’을 증대하는 데에 쓰면서 여가 시간의 증가를 통해 그 과잉의 일부를 재흡수하는 경향을 띤다. 하지만 이러한 여흥들은 언제나 충분하지 못했는데, 그러한 여흥이 (어느 정도에서는)과잉을 해소해주었음에도 여전히 과잉되게 존재하는 그 에너지는 어느 시대에나 수많은 인간과 엄청난 양의 유용한 재화를 전쟁이라는 파괴에 바쳤던 것이다.
2장. 일반경제의 법칙들
생화학적 에너지의 과다, 그리고 성장
p41 : 만약 송아지를 도축하지 않는다면, 그 송아지의 점점 둔화되는 성장이 점점 증대되는 과잉 에너지의 총체를 더이상 소비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그렇게 하여 송아지가 성적 성숙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 생생한 힘은 원칙적으로 수컷의 경우에는 소란을 피우는 황소의 힘에 쓰이게 되고 암컷의 경우에는 새끼를 잉태하거나 우유를 만드는 데에 쓰이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생식이란, 개별적 성장으로부터 집단의 성장으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42) 식물 또한 동물과 동일한 과잉을 드러내지만, 식물의 경우에 이는 훨씬 더 특징적이다. 식물들은 전적으로 성장과 생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무한정한 넘침은, 바로 그 넘침을 가능하게 하는 – 동시에 그 넘침을 제한하는 – 조건들과 관련하여 고찰되어야 한다.
2. 성장의 한계
p43 : 태양에너지가 생명이 지닌 넘쳐흐르는 발전의 원리라는 사실이다. 우리 부의 원천과 핵심은 태양광선을 통해 주어지는 것인데, 태양광선은 그렇게 아무런 보상 없이 에너지 – 곧, 부 –를 우리에게 나누어 준다.
이제는 우리가 우선권을 에너지의 소비보다는 그 획득에 부여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영광 자체도 이제는 유용성의 영역 안에서느 영광스러운 사태의 결과들에 의해서만 정당화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러한 비생산적이고 헤픈 낭비/소비에 대한) 고대의 감정은, 비록 그것이 실리적인 판단에 의해 – 그리고 기독교적인 도덕에 의해 – 이전보다 흐려지긴 했으나, 여전히 살아 있다.
3. 압력
p45 : 생명은 사실 가용한 모든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이러한 국지적 여건들은 생명에 의해 모든 방향에서 실행되는 압력의 강도를 결정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에게 가용한 공간이 증가했을 때 그 공간이 그와 이웃하는 공간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즉각 점유된다는 의미에서만, 이 압력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일은 지구의 어느 지점에서든 삼림 화재나 화산 현상 또는 인간의 손에 의해 생명이 일단 파괴될 때마다 똑같이 발생한다. (46) 압력은 언제나 존재하고, 어떤 종류의 생명이든 극도로 임박한 한계 속에서 숨이 막힐지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불가능한 성장을 끝없이 열망하는 법인데, 그때 생명은 거대한 낭비를 가능케 하기 위해 과잉 자원의 지속적인 흐름을 해방시킨다. 성장의 한계에 다다르면, 생명은 꽉 닫힌 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끓어오름의 상태로 돌입하는 것이다. 곧, 그 극단의 넘침은 폭발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폭발의 극한으로 수렴하는 운동으로 흘러나오게 된다.
이익이라는 어법 자체가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욕망과 상반되는 것이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행동하고자 할 때마다 우리 행위의 유용성만을 고려한다. 유용성은 이점이나 유지나 증대를(47)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넘침의 현상에 답해야 할 때를 생각해보자.
성장에 사용될 수 없다면 에너지의 과잉은 그 즉시 소멸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가피한 소멸이 어떤 명목으로든 유용한 것으로 통용될 수 없음은 또한 자명하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유쾌한 소멸인데, 이는 또다른 불쾌한 소멸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다. 더이상 유용성이 문제가 아니라 즐거움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의 여파는 결정적이다.
4. 압력의 첫번째 효과: 확장
p48 : 삶의 가능성들은 무한정으로 실행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가능성들은, 마치 군중의 입장이 경기장의 좌석 수에 의해 제한되듯, 공간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압력의 첫번째 효과는 경기장의 좌석 수를 늘리는 일에 있을 것이다. (49) 마찬가지로 대지는 우선 생명에게 물과 지표면이라는 근본적 공간을 개시한다. 하지만 재빠르게 생명은 대기의 영역을 점령한다.
5. 압력의 두번째 효과: 낭비 혹은 사치
p49 : 때로는 압력이 새로운 공간의 개시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또한 때로는 가용한 자리에(50)비한 과잉 때문에 가능성들이 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바로 이 후자의 효과는 자연 속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진행된다.
그 가장 현저한 형태는 바로 죽음이다. (51) 생명체 안에서의 압력의 불균형은 지속적으로 죽음에 의해 마련된 자리를 성장에 제공한다.
달리 말하자면, 가능한 성장이란 결국 실행된 파괴에 대한 보상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역설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성장은 없다는 사실, 오직 에너지의 사치스러운/과잉적인 낭비만이 모든 형태로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지상에서 생명의 역사는 원칙적으로 어떤 광적인 넘침의 효과이다.
6. 자연의 세 가지 사치/과잉: 먹는 행위, 죽음, 유성생식
p54 : 죽음이라는 사치/과잉을 성이라는 사치/과잉과 같은 방식으로 고찰해볼 수 있을 텐데, 우선은 그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일종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이어서 어떤 급작스러운 전복 안에서, 삶이 표출되는 운동의 심오한 진리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55) 동물에게 생식이란 한순간에 그 가능성의 극단에 도달한 에너지 자원을 급작스럽고도 격정적으로 낭비하는 계기이다.
7. 노동과 기술에 의한 확장, 그리고 인간의 사치/과잉
p56 : 기술은 생명이 그 가능성의 한계 안에서 실행하는 성장의 기본적 운동을 확장할 – 회복할 – 수 있는 일을 총체적으로 가능하게 해주었다. 아마도 문제는 발전이 지속적이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다는 점일 것이다. (59) 한 세기 동안의 인구 증가와 산업 평화가 있은 후로 발전이 일시적 한계에 봉착하게 되자, 양차 세계대전이란, 역사에 기록된 부의 그리고 인류의 최대 난교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59) 모든 생물들 중에서 인간은, 생명의 압력이 그 운동의 태양적 기원에 딱 맞게 모두 태워버리기를 바라는 저 에너지의 과잉을 강렬하고도 사치스럽게 소진/소모하는 일에 가장 적합한 사치/과잉의 존재인 것이다.
8. 저주받은 몫
p60 : 저주의 감정은 이렇듯 우리에게 부의 소진/소모를 요구하는 운동의 이중적 왜곡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한 요구가 괴물적인 형태의 옷을 입고서 행해지는 전쟁에 대한 거부, 그리고 그 전통적인 형태가 이후에는 불의를 의미하게 되는 사치스러운 낭비에 대한 거부가 모두 그러하다. 부의 증가분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큰 바로 이 순간, 우리의 눈에 그러한 증가분은 결국 그것이 어떤 방식에서 계속 지니고 있었던 저주받은 몫의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다.
9. 일반적 관점과 개별적 관점의 대립
p61 : 성은 언제나 죽음과 육식이라는 추문에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저주의 분위기는 불안을 전제하며, 한편으로 그러한 불안은 삶의 넘침에 의해 실행되는 압력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불안을 느끼는 이가 과다/과잉의 감정으로 자신을 팽팽히 긴장시키지 않을 때, 불안은 발생한다.
p62 : 이제 우리는 현재의 역사적 상황을 고찰해 볼 텐데, 여기서는 일반적 상황과 관계되는 판단들이 개별적 관점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이 이러한 우리의 상황을 특징짓는다. 원칙상 개별적 존재는 언제나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사멸할 수 있는 위험에 놓여 있다. 이와는 반대로 일반적 존재가 지닌 자원은 항상 과잉의 상태에 있으며 그러한 존재에게 죽음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개별적 관점에서 출발해보면, 문제들은 일차적으로 불충분한 자원에 의해 제기된다. 그러나 일반적 관점에서 출발한다면, 문제들은 일차적으로 그 과잉에 의해 제기되는 것이다. (63) 그렇기에 일반경제의 입장에서라면 이러한 상황에 대한 올바른 방안으로 미국의 부를 아무런 보상 없이 인도로 이전하기를 제시할 것이다. 일반경제는 인도인의 삶의 발전으로 세계 속에서 실행되는 압력 – 그리고 그러한 압력의 불균등 – 으로부터 발생하는 미국에 대한 위협을 이러한 목적에서 계산에 넣게 되는 것이다.
10. 일반경제의 해결책, 그리고 ‘자기의식’
p64 : 하지만 우리는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해결책이 이토록 잘 결정되어 있다 한들, 그러한 해결책을 우리가 원하는 단계로 착수하는 일은 너무나 어렵기에 애초부터 그러한 기획이 호응을 받을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65) 어떠한 저주가 있을 때 그것을 걷어내는 일은, 인간에게, 그리고 오직 인간에게만 달려 있다는 점을, 하지만 그러한 저주가 기초하고 있는 운동이 명백히 의식 안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저주는 그렇게 제거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파국에 대한 치료제로서 오직 ‘생활수준의 향상’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기만적으로 보인다. 내가 이미 말했던 바, 소위 ‘생활수준의 향상’만을 주장하는 이러한 호소는 진리 안에서 그에 상응하고자 하는 요구를 바라보지 않으려는 의지와 결부되어 있다. (66) 분명 일반경제의 실천은 공공사업에 대한 개입을 포함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그리고 보다 심오하게 말해서, 그러한 일반경제의 실천이 추구하는 것은 의식이며, 또한 그것이 정비하고자 하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이 일련의 역사적 형식들에 대한 명석한 통찰 속에서 궁극적으로 실천하게 될 자기의식이다.
이렇게 하여 일반경제는 이제 그 역사적 여건들에 대한 서술을 시작으로 이후 현재적 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자기의식 (역주) : 바타유에게서 일반경제와 자기의식의 관계는 이렇듯 전도되고 뒤틀린 헤겔 철학의 외양을 취하게 되는데, 그에게서 일반경제가 실천의 목표이자 중핵으로 삼는 자기의식이란 어떤 ‘절대지’로서의 완성을 전제하거나 목표로 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 그 자체로 극단적인 양극(소모와 생산, 과잉과 안정, 불안과 주권 등) 사이를 오가는 내적 경험의 동요하는 주체성이 지닌 부정성과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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