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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2장 pp82~116 알튀세르 2022.9.2. 바다사자
2장 안토니오 그람시의 절대적 경험주의
그람시가 실재적인 무언가를 건드렸다면, 그는 어떻게 한 것일까? 그람시는 역사에 관한 하나의 규범적 철학이라는 덮개 아래에서 순수하게 표면적인 묘사들만을 제시했다. 표면적인 것을 무시할 수 없으나 표면적인 것은 표면적일 뿐이다(82). 지배계급이 과업들을 완수할 수 있었다고 하나 대중운동이 존재했다면 지배계급과 동일한 과업을 수행했을까? 동일한 과업을 미리 정해버리는 역사에 관한 종말목적론적 개념화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83). 국민국가의 구성이나 혁명의 완수와 같은 과업들이 역사적으로 역사의 ‘현재적 의제’일 때에 인민대중이 현존하기도 부재하기도 하다는 점을 그람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역사적 소여로써 설명하고자 하나 표면적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어려움의 해결에 절(84)대로 도달할 수 없다. 그람시가 하나의 소여를 다른 소여에서 가져온 다른 요소들과 비교하는 것은 현실적 인식들이 아니라 인식에 대한 허상들을 생산한다. ‘절대적 역사주의’에 관한 철학적 ‘자기 의식’ 때문에 그는 자신만의 진리라고 믿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이 때문에 역사적 소여의 한계 속에 엄격히 스스로를 가두며 한계를 절대로 넘어서지 않는다(85). 그람시에게서 역사는 하나의 종말/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의 이론가가 아니라 역사의 독자일 뿐이다. 모든 허상이 이 지점에 존재한다(87).
그람시는 왜 허상 속에서 살았는가? 그람시는 지성, 힘, 번뜩임이 있는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러나 정치에 집중하는 것과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철학적 테제를 지지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89). (알튀세르는) 철학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항상 그람시가 원용하는 철학, 절대적 인간주의와 동일한 것인 절대적 역사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람시는 ‘프락시스의 철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언급한다. ‘역사유물론’ 혹은 계급투쟁의 조건들과 형태들에 대한 인식의 원리들과 ‘마르크스주의적 철학’ 사이의 구분을 부정한다. 그람시는 ‘역사유물론’이 ‘프락시스의 철학’ 내부로 되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이라는 표현을 거부한다(90). 둘은 동일한 것이다. 과학적 특징을 지닌 하나의 인식은 본질상 하나의 철학적 테제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철학적인 것이다. ‘프락시스의 철학’은 모든 것이 철학이라는 점에서 모든 인간이 철학자라는 점을 인식했던 유일무이한 것이다. 철학적 활동이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보게 해줌으로써 인간에게 과학, 정치 등등이 자신들도 모르는 채로 자기들 내부에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진리를 폭로하는 하나의 비판 속에 놓여있다(91).
그람시의 놀라운 점은 모든 인간 속에 기거하는 철학적 진리가 모든 것이 철학이라는 언표로 언표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철학에 대해 말하는 그람시는 ‘프락시스의 철학’에 대해 말하고 있다(92). 이는 그람시 자신의 고유한 사상을 표현해주고 있다. ‘실천의 철학’이라는 용어는 모든 실천, 즉 활동의 내부성을 강조했다. 활동이 철학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프락시스의 철학’은, 철학의 본질이 정말로 활동인 것이라면, 모든 것이 철학이라는 테제를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이 활동이다’라는 명제는 ‘인간들’, 구체적 개인들이 본질적으로 능동적(94)이라는 경험적 사실을, 그리고 역사를 만드는 것‘은 바로 이들의 활동이라는 경험적 사실을 평면적으로 지시할 뿐이다.
그람시에 따르면 모든 것은 철학이다. 모든 철학의 진리는 ’프락시스의 철학‘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활동이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바로 개인들의 활동이라는 점이다.
그 다음이 그람시의 최종 목적지이다. 모든 활동들에는 공통된 하나의 본질이 존재한다. 서로 다른 여러 활동들 중에 다른 활동들의 본질임과 동시에 활동 그 자체(95)의 고유한 본질인 하나의 활동이 존재한다. 바로 정치라는 활동이다. 모든 철학이 정치라고 선언한다. 이 지점에서 그람시는 모든 진리와 가능한 행동의 아르키메데스점에서 자신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탁월한 방식으로 ’근대의 군주‘인 공산당에 의해 국가권력의 쟁취라는 방향으로 인도되는 대중의 혁명적인 정치적 행위를 의미하고 있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에 의해 절망적인 기간 정치적 고독 속에서 사유된 그의 거대한 사유 전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미래와 마주하고 있다는 허상을 가득 채우고서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람시의 사상을 면밀히 검토하는 이유는 그의 사상이 세계 전체에 광범위한 대중 속으로 침투했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97).
그람시가 정치를 통해 형성하는 개념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이 너무나도 독창적이서 어느 정도까지 그의 사상을 마르크스와 관련지을 수 있을지 질문해봐야 할 정도의 방식으로 사유한다(98). 그람시가 무시했던 것 중 상부구조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 전체를 지배하는 ’재생산’이 있다. 상부구조의 무언가가 하부구조로 침투한다는 것을 보여주자마자 그람시는 마르크스에게서 매우 멀찍이 떨어져서 구축하기 시작한다. 상부구조, 하부구조 구분 대신에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구분을 제시한다(99). 시민사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는데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라는 부르주아적인 법률적 구분의 내부에서 사고함으로써, 시민사회를 국가 바깥에 존재하는 사적 연합체들 전체로 제시한다. 국가는 공적이다. 사적 연합체들은 사적이다. 그 예로 교회, 학교, 정당, 노동조합 등등을 나열한다.
사적 연합체들은 공적이지 않고, 법의 관점에서 국가와 어떤 관계로 맺고 있지 않다. 시민사회의 사적 특징을 마르크스주의 국가 이론에서 ‘장치’, 레닌주의적 전통에서 ‘헤게모니’라는 용어를 취해 ‘헤게모니적 장치들’로 형언한다(100). 무엇도 말해주지 않으며 단지 ‘장치들’이라는 점만 알뿐이다. 인민대중에게 동의의 효과를 생산하므로 이를 ‘헤게모니적‘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장치들이 추구하는 효과와 동일한 것을 목적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원인이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101).
힘 또한 헤게모니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힘은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행사될 수 있다. 어떻게 헤게모니가 보증되는지, 수용되는지 말하고 있지 않다. 항상 묘사에 머무르고 있다(102). 혁명가 그람시는 국가권력의 쟁취를 혁명의 제1 과제에 놓았고 ’시민사회‘ 이론을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본질과 성공적으로 연결시킨다. 여전히 하부구조와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무시하면서 소여들의 묘사와 철학적 전제(모든 소여는 역사적이며, 모든 정치적 소여는 자기 자신 안에 자기 자신만의 빛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라는 근본적 방법을 적용한다. 부르주아적 ’정치 이론‘을 개시함으로써 모든 국가들이 두 가지 ’계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힘 혹은 독재라는 계기(103)와 헤게모니, 동의, 일치라는 계기이다. 두 번째 계기에 숨겨져 있는 것이 ’시민 사회‘이다. 헤게모니적 장치들이므로 ’시민사회‘의 기능은 동의의 획득이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하지 않은데 ’사적‘이기에 국가와 구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 바깥에서 사고되었던 것이 국가의 두 번째 ’계기‘를 구성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 역설적 관계에 대해 사고하고 상대적으로 올바른 개념을 부여해야 한다. ’국가 안과 국가 바깥‘이라는 모순을 종결짓고, 자신의 개념 안에 헤게모니적 장(104)치들의 기능 작용 양식에 대한 형식적 지표-이데올로기-를 기입한다는 이중적 이점을 지니는 정식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람시는 이 모순을 그대로 유지하기 원한다. 모순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105).
힘과 헤게모니의 ’용량‘에 따라 서로 다른 유형을 국가를 보게 된다는 점은 명명백백하다. 한 극단은 힘이 압도적으로 우위이고 헤게모니는 없는 국가(제정 러시아), 다른 극단에서 힘은 가장 강한 정도로 축소되며 헤게모니는 그만큼 거대해진다(106).
그람시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유를 자신의 사유 안으로 포섭하는 것 자체가 지니는 난점을 해결하지 못했다. 국가가 지배계급의 손에 쥐어진 ’도구‘이기도 하다는 점을, 그리고 힘과 헤게모니 사이의 가변적 비율에 대한 묘사 뒤에 국가라는 수단에 의해 행사되는 계급독재가 존재한다. 이는 국가가 계급독재와 비교해 부차적이라는 의미이다(107). 그람시는 계급독재, 계급지배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거부한다. 힘과 헤게모니 개념들에 사로잡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대신 계급독재 대체물 역할을 사실상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터무니없을 정도로 ’부풀린‘다. 이것이 말뿐인 이론적 업적이다. 최소한 어떠한 ’사적‘이고 제한된 영역에 시민사회가 속해 있는지 알고 있으나 이제 이 시민사회는 국가와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를 포괄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레닌주의자가 되기 위해 그람시는 국가를 헤게모니로 사고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108).
국가를 헤게모니로 사고하면서 계급투쟁을 표상하기 위해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헤게모니 투쟁‘이라는 정식을 찾아냈다. 힘과 헤게모니 사이의 구분으로부터 출발했지만 결국 힘을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헤게모니라는 용어가 계급지배(109)를 대신하는 것 같은데 또다시 하나의 경험적 소여와 마주하게 된다.
국가 전체를 요약해버리는 ’헤게모니‘는 이데올로기와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헤게모니는 평화롭고 보편적인 지배가 아니다. 정치적이다. 모든 인간의 ’체험‘ 그 자체인 동시에 ’체험‘이 인간의 본질과 인간 활동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두 번째 결정요소는 첫 번째 결정 요소의 원인이다. 모든 인간의 의식 속에서 ’명령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정치‘이다. 정치가 경험주의적 의미에서 정치하는 점은 정치의 운명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다(111). 이데올로기적 가치가 역사의 동력이 아니며 이 이데올로기적 가치는 ’규제된 국가‘안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정치에 의해서만 강제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그람시는 진정한 정치가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의 사유이다.
그람시는 피지배계급의 권력 쟁취 이전의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열렬히 강조했던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다. 헤게모니는 당파의 관념이 취하는 영향력과 그 관객을 사회 전체로 확장하는 것, 국가를 장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시민사회 권력의 중심들을 장악해 시민사회 그 자체를 장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시민사회가 차지하는 위치 안에서만 이해 가능하다(112).
국가는 고립된 작은 공간의 중심에 있으며 힘은 벽으로 둘러싸인 곳의 안쪽에, 벽의 뒤에 자리하고 있다. 그람시 사상의 핵심은, 강고한 포곽망, 강고한 시민사회와 함께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 안에서의 권력 쟁취를 위한 대안 즉 하나의 전략이다. ’진지전‘ 전략은 ’유로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공산당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114).
그람시는 ’시민사회‘를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사실 그람시는 시민사회에 대한 정의를 ’헤게모니적 장치들‘ 전체로 한정하지는 않는다. 그의 사유에서 국가를 제거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115).
그람시는 하부구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만큼, 하부구조를 시민사회 내에 위치시키지 않을 만큼 이 하부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의 체계 안에는 하나의 거대한 공백이 존재하고 있다. 생산관계, 착취와 관련된 모든 것, 그 물질적 조건을 구성하는 모든 것, 즉 자본, 제국주의, 노동력, 노동력의 재생산 등등. 백색 지대의 현실, 세부 지점, 메커니즘 그리고 역할로 절대 진입하지 않는다(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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