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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 「무엇을 할 것인가? -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
2장. 안토니오 그람시의 절대적 경험주의 上(pp.52-82)
“‘경험주의(empiricism)' 자체에 경험적 인식을 절대적으로 여긴다는 의미가 담겨있음에도, 그 앞에 ’절대적‘이라고 덧붙여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생각에서부터 발제를 시작합니다. 경험주의는 인식에 있어 이성보다 경험의 우위를, 우리의 판단과 신념의 근거는 경험에 있음을 주장합니다.
2장. 안토니오 그람시의 절대적 경험주의
‘절대적 경험주의’라는 개념은 우리의 인식이 ‘이론’의 단순한 ‘적용’에 의해 개념화 하는 ‘매우 심각한 위험’을 피하게 해줍니다.(54) 우리는 앞서 그람시를 읽으면서 보르디가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부 일부 세력의 도그마주의적인 극좌적 태도에서 그람시가 거리를 두고 ‘심원한 독창성을 지녔던 이탈리아 공산당의 역사’(54)를 위해 했던 투쟁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람시 이후 톨리아티와 이탈리아 공산당이 그람시의 사유를 통해서 ‘절대적 역사주의’로의 변형과 ‘그람시의 사상을 활용할 수 있었다는 이러한 행운’(54)으로부터, ‘스탈린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실천’(54)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독창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람시의 입장 또한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알튀세르의 관점입니다. “우리는 그람시에게서 역사주의가 반도그마주의의 하나의 비규정적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54)
안토니오 그람시 |
팔미로 톨리아티 |
[그림1] 이탈리아 공산당의 중심 인물인 그람시와 톨리아티
‘하나의 비규정적 형태’라는 알튀세르의 표현은, 역사주의 또한 도그마주의에 대립하는 하나의 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의 이론적 취약점 또한 인지하도록’(55)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구체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 우리가 구체적인 것은 항상 변화한다고, 역사를 변화와 동일시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단순한 변화로만 간주된 역사라는 매우 빈약한 관념의 함정 속에 빠지기 때문이다.”(55) 다음 문장 또한 인상적입니다.
“역사가 변화이고, 변화일 뿐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역사 내에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구조들이 존재하며, 이 구조들은 이 구조들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들 아래에서 오랜 기간 지속된다.”(55)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라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하나의 구조의 기반’(56)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설명하였지만, 이 안정적인 구조가 노동 계급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에 의해 유지된다는 역설을 탁월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자기 자신의 안정성을 영속화하는 수단으로서 자기 고유의 적대적 항들의 변화를 생산한다는 조건하에서만 이 동일한 구조 그 자체로 안정적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56)는 것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가 존재’(56)합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서 역사는 생산수단에서 나타나는 착취에 대한 계급투쟁의 형태에 대한 역사이고, 적대적 관계들의 계급들이 자신의 전략과 수단, 형태를 변화해 온 역사입니다.(57) (자신들 사이의 ‘경쟁 상태’(57)) 이런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주의는 단순한 변화이거나, 관점의 변화, 관점의 전체의 총합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변화에 따라 정의하지만, 그 변화는 생산양식과 구조의 변화로서, ‘안정적 구조의 재생산을 위한 조건과 수단’(58)으로 정의됩니다.
따라서 ‘구체적’ 변화를 ‘구체적으로’ 이해(58)하기 위해서는 이 안정적 구조를 이해하고 정의해야 한다 말합니다. 계급투쟁의 변화가 영속되고 있는 그 구조 자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구조가 지속되고 역사로 존재하는 데에는 그 구조의 안정성이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의 ‘영원성’과 역사적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서 구체적인 양상을 소묘해왔다 설명합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역사주의적 환원은, 역사적인 것만을 홀로 존재하게 하며, 모든 것이 역사적이라는 결론을 산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주의는 바퀴가 없는 자전거”(60)로 고정된 관점으로 환원(축소)하는 경향을 가지게 됩니다. “역사주의는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이 인지하고 있는 현존하는 모든 현실적 차이들을 결국에는 ‘역사’라는 단 하나의 것 앞에 놓이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서로서로를 환원[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62) 이런 ‘중대한 차이들을 말소’(62)하는 경향이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절대적 역사주의’로 환원된다고 알튀세르는 지적합니다.
그람시에게서는 상부구조의 현상만 남은 상황에서, 하부구조와 맺는 관계들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합니다. 알튀세르에게 있어서는 그 관계의 지배의 역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람시의 이론은 상부구조가 발현되는 수준의 분석에서 멈추고 상부구조만이 존재합니다. 이는 상부-하부의 구조적 연결과 관계들에 의해 나타나는 지배의 양상을 살펴볼 수 없습니다. “그람시는 상부구조, 다시 말해 [하부구조라는 짝을 가지지 않은] 상부구조 하나만의 즐거움에 풍덩 빠질 수 있게 된다.”(64) 물론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침투한다는 암시는 분명하지만, ‘상부구조의 관점에서 사고’되었다는 점은 당시 스탈린주의적 정치에 대립하는 그람시 정치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람시의 ‘상부구조를 상부구조 그 자체를 통해 사고하도록 강제’되는(65)것이 알퉤세르의 비판점이며, 사태와 사물의 있음을 ‘사태/사물은 원래 그러하다’(66)는 사실 만으로 묘사하여 설명할 수밖에 없는 한계이자, 그람시에게 역사주의는 경험주의이게 됩니다.
“명백히 이데올로기와 관련해 경험주의는 그 무엇도 말해주지 않았다. [경험주의에 따르면 이는] 그저 원래 그러할 뿐이다.”(67)
알튀세르는 ‘지식인의 문제’도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의 기능으로 통념화 되었다며 비판을 전개합니다. 이런 통념이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람시에게 있어 역사는 하나의 총체성 상태에서 실현된 것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통념에 따라서 지식인은 문화를 발견하고, 이를 실현하면 되는 수준에 멈추게 됩니다. 그람시에게 있어 참된 역사적 블록과 역사적 시기, ‘그렇게 존재해야만 하는 바 그대로의 정상적인 역사적 블록’(69)의 관계로 보기 때문에, 정형화된 헤게모니의 상태만을 상정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유기적 지식인은 특정 역사적 블록을 달성하기 위한 교육과 과업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람시가 바라보는 이탈리아의 상황과 지식인에 대한 성찰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어느 한 국가가 자신의 인민에게서 하나의 진정한 보편적인 윤리적 통일체를 실현하는 데 실패할 때, 국가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그리고 ‘코스모폴리스적 지식인’이 됨으로써 더 이상 자기 자신들을 이 국가 안으로 가두지 않게 되는 이 지식인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71)
알튀세르의 그람시 비판은, 하부구조에 대한 무시 외에도, 생산양식을 역사적 블록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면서, 생산양식을 ‘안정적인 사회-물질적 관계’라는 ‘역사주의의 논리’로 설명 가능한 것으로 환원하게 되는 경향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72) 생산양식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단순히 사건화 되고, 역사주의적으로 언급되게 된다면, 우리는 앞서 지적한 역사주의적 환원에 빠져있다는 부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알튀세르는 그람시에게 이데올로기 이론이 없으며, 이에 대해 질문할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람시의 관심은 ‘아름다운 윤리적 총체성’으로 실현된 본질(74) 자체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통일체로서 사고하고 있음을, 그 사고 방식이 역사주의적 환원으로 빠지게 되는 것에 대한 우려이자 비판입니다. 이런 환원은 그람시의 관념적인 사고에서 가능한 것이고,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계급과 계급투쟁의 양상을 찾을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75).
알튀세르의 그람시 비판은, 그람시가 헤게모니의 개념을 통일체로서만 다루어지는 ‘모델’이자, 생산양식과 계급투쟁의 구체성을 가지지 못했던, 역사를 ‘단 하나의 유일한 범주, 즉 혁명이라는 범주하에서만 사고’(80)하고 설명했던 것에 대한 비판으로 보입니다.
마르크스가 활동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반면,(81) 그람시는 역사의 본질을 ‘혁명의 정상적인 혹은 비정상적인 형태들을 통한 활동’(80)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람시를 그토록 매혹하는 활동은 바로 실천 그 자체의 내적 진리’(81)로서 활동의 관념론을 추구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그람시의 사고 방식이 잘못 되었지만, 일관적으로 사고했다는 점을 인정하며, 혁명 자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고가 그람시의 역사주의이자 경험주의적 원리로 작동해왔다는 점은 분명하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가 현실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공백들을 채워주지 못함을 알튀세르는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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