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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1장 (22.08.26 화니짱).hw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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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 : 노동자-인민의 계급투쟁의 방향 설정과 조직화를 보조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방향 설정 혹은 정치적 노선이 조직화에 선행한다는 점을 알고 있는데, 이는 당과 당의 구축에 대한 정치적 노선의 우위, 정치적 노선에 따른 당의 조직화에 대한 정치적 노선 자체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p13 : 마르크스가, 최소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관련해서는, 대립물들에 대한 모순의 우위라는 테제, 그러니까 계급에 대한 계급 적대의 우위를 옹호한 것이 사실이라면, 바로 이 적대 자체가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p14 : 왜냐하면 이러한 적대가 역사적으로 취하는 형태들이 어떠한지, 그리고 이 적대가 어떠한 역사적 형태들을 이 적대 자신이 구성하는 계급들에게 부여하는지를 그 세부 지점까지 보기위해 우리가 직접 가야 하는 곳은 바로 현장, 그러니까 구체적인 것의 안이기 때문이다.

 

p15 : 노동자들은 훨씬 많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노동자들이 훨씬 적게 안다고 믿고 있는 바에 의해 감추어져 있(16). 또한 이 인터뷰는 하나의 구체적 분석을 위한 재료 중 하나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의 구체적 분석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구체적 분석과 마르크스주의이론 혹은 인식의 조건들에 대한 정치적 의식이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지 대상의 층위만 다를 뿐인 것이다.

 

레닌은 노동자계급은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바를 아는 것,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 인식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으며, 부르주아 계급 내에서 일어나는 바를 보고 이해하기 위해 그곳으로 달려가야만 한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적대를 두 항을 구성하는 것으로 포착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계급들을 계급들로 분할함으로써 계급들을 구성하는 것으로 계급투쟁을 파악할 수 있도록, 적대의 두 항 모두를 동시에 고려하기 위한 것이다.

 

p21 : 마르크스는 계급적 이해관계에 대한 의식화와 집합적 투쟁의 조직화에 있어서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집적이 행하는 역할을 강조했다. (22) 착취의 안전성을 위협한 이러한 중대한 위협 앞에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전략을 변경했다. 부르주아지는 공장 주변에 노동자 지구를 건설하는 낡은 실천을 포기했고, 그 실천에서 얻을 수 있던 모든 이점을 포기하고 다른 방향의 전략을 취하게 되었다.

 

p23 : 극대화된 이윤 추구에 종속되어 있는 자본의 이동성은 노동의 이동성을, 다시 말해 공장 근처에 있어야만 했던 주거 지역에서 노동력이 해방되도록 사실상 강제했다.

 

p24 : 완전히 노골적으로 노동자들이 각각 작은 집과 작은 정원을 교외에서 구입할 수 있게 허락함으로써 자(25)신들의 재산에 관심을 쏟게 만들고 대신 계급투쟁을 내팽기치도록 유도했다. 이는 그 어떠한 숨김도 없이 공개적으로 선언된, 노동자 계급의 탈정치화를 위해 필수적인, 명확히 의도적으로 고안된 주택 정책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자동차는, 노동력에 대한 부르주아 정책, 즉 자동차의 대량생산을 개시했던 이 부르주아 정책이라는 저 거대한 방향 전환에서 대중을 위한 생산물, 즉 노동자를 위한 생산물이었으며, 또한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의 주거지에서 공장 문 앞까지 이동할 수 있게 해주고 예전처럼 노동자가 공장 바로 근처에 살았을 때만큼이나 활기찬 모습으로 출근할 수 있게 해주는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p26 : 자동차가 기술진보 혹은 생산성 향상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 투쟁의 전략 속에서 경이로운 방향 전환의 역사를 통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은 알파 로메오의 가장 의식 있는 노동자들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이다.

 

p31 : 인간은 인간들, 노동 그리고 이들의 세계에 대한 관념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관념들은 항상 관념들 전체의 체계들, 즉 우리가 이데올로기들이라고 부르는 체계들 하에서 한 지점으로 다시 모이게 된다. 왜냐하면 이 관념들은 이전에 이데올로기들 하에서 이미 모였던 적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경험이 취하는 우연이 사회적 개인들에게 강제되기 위해 이 이데올로기들이 취하는 형태일 뿐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의 관념들의 총합이 아니며, 대신 이데올로기는 비탄력적이거나, 탄력적이거나, 가장 많은 경우에는 비탄력적이면서 동시에 탄력적인 체계들이다. 이데올로기는 순수하고(32)단순한 관념들이 아니라, 대신 항상 실천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항상 실천적인 판단과 태도의 특정한 체계를 살아 숨 쉬게 만듦으로, 우리는 이 이데올로기들을 이 이데올로기들의 신체 내에서, 그 신체의 활동 내에서, 그러므로 또한 신체들 내에서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 신체는 국가 전체와 그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제도들이다. 이 이데올로기적 전체 영역들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와 피지배 이데올로기들 사이의 거친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이 벌어진다.

노동자와는 훨씬 더 거리가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모든 것은, 그러나 사실은 우리를 노동자, 바로 그곳으로 정확히 인도해준다. 왜냐하면 바로 이 노동자가 그 자신의 신체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이데올로기들이 서로 대립하는 바로 그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이데올로기적 적대는 이 노동자에게 자연스럽게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p49 : 만일 모든 것이 변화한다면, 만일 구체적인 것이 변화하는 것이라면, 변화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변화할 것에 관한 진리 전체를 자기 자신 안에 이미 소유하고 있다는 어느 한 이론의 주장은 완전히 터무니없고 부조리한 것이라는 점은 매우 명백하다. 더욱이 만일 결국 구체적인 것이 변화하는 것이라면, 이 구체적인 것이 변화하는 이유는 우리가 단순히 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있는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이러한 언급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 맞서 싸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마르스크주의는 자신의 대상에 대한 진리를 사전에 소유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마르크수주의 이론은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대상에 대한 예방적 특징, 즉 역사적 특징을 부여함으로써만이 이러한 위험을 경고할 수 있게 된다.” ,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이며, 또한 그람시라는 이름이 결부되어 있는 절대적 역사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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