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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방쿵 : 보르도 몽테뉴 대학 철학과 교수, 주디스 버틀러, 대니얼 가버와 협업하는 등 국제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음.
데카르트 및 데카르트주의, 스피노자를 중심으로 후기 중세철학 연구, 고전주의 시대 철학적 유산을 현대적으로 활용하는데 주목 |
주체의 문제에 초점, 주체 개념의 발전과 비판의 철학적 역사 연구 |
사회철학과 젠더 연구로 확장, 푸코와 들뢰즈의 테제를 근대철학과의 관계 속에서 검토하는 것과 현대적으로 해석한 헤겔의 인정투쟁 개념을 바탕으로 사회적 주체의 상호주관적 생산의 문제를 다룸 |
주디스 버틀러는 “자신에 관해 진리를 말하는 것에는 대가가 따르며, 이 대가는 진리 체제를 향한 비판적 관계의 중단에 해당한다”를 주장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타당하다. 푸코는 자신의 문제가 언제나 진실 말하기와 자기에 대한 자기의 반성성의 형식들과 진리 말하기 사이의 관계였음을 주장한다. 알튀세르주의적 호명의 통념은 양심이 주체 형성에 본질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반성성을 개시하는 것은 타자 앞에서의 책임이다. 책임(302)이 오직 호명 또는 타인에 의해 실시된 조사에 대한 대답으로 일어난다.
호명의 상황은 필연성이 형식을 취한다. 이 형식을 통해 나 자신을 주체로 형성한다. 호명의 구조는 정작 주체에게 파악되지 않는 기원을 지닌다. 출생 당시에 주어진 이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대타자에 의해 주어졌음을 알아채게 된다. 자기에 대한 관계는 정신적이며 막연하다. “나”의 존재가 “관계성”에 의해, 상실에 의해 짜여져 있기에 어떤 ‘나’도 자신에게 속하지 않으며 탈취된 채로만 자기 자신에 대해 실질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303).
버틀러는 자기에 관해 푸코와 다른 개념화를 내보인다. 푸코는 “권력의 정신적 삶”을 사유하기를 회피했다. 푸코에게 자기에 대한 관계는 비판적이다(304).
비판과 탈예속화
푸코는 비판에는 덕과 유사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평가하며 그것을 통치화와 연결한다(305). 비판은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태도이자 “통치받지 않는 기술, 이런 식으로는, 이런 대가를 치르는 식으로는 통치받지 않는 기술”을 사유하는 방법이다. 문제는 진리 정치의 틀 안에서 탈예속화의 문제다. 근대는 예속화를 유발하는 지식-권력의 장치들을 연구하는 데 특권화된 역사적 시기다.
버틀러는 푸코의 ① 저항이 덕으로서 기술된다는 점, ② 통치화와 통치의 구별이 예속화의 통념과 탈예속화의 통념에 의해 형성된 쌍에 해당한다는 점, ③ 비판은 행위이며 자유의 실천이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인다(306). ① “저항”은 “덕‘으로서 기술된다. 1978년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라는 공리만 있고 주체의 저항에 대한 해명은 없다. 자기에 대한 관계가 규범의 산물로 환원되지 않으며, 예속화가 주체에 대한 최종적 표현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은, 주권적 주체로 돌아가지 않으면서 주체화를 주체에게 자율성의 형태를 부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307). 주체화는 덕과 ”자발적“ 태도, 에토스에 호소하거나 주체의 태생적 종속은 무시하는 영혼의 힘에 호소한다. 우리는 자유의 실천과 관계하지 선천적 자유와 관계하지 않는다.
② 통치화는 ”진리를 주장하는 권력 메커니즘을 통해“ 제도화된 개인들을 예속화하는 실천을 가리킨다. 규범들하에서 살 만한 혹은 살 만하지 않은 삶의 윤리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버틀러는 생명 정치에 대한 푸코주의적 통념을 발전시킨다. 삶의 통념을 가지고 있기에 이에 공명한다. 이 개념은 하버마스의 문제인 국가권력의 합리성에 대한 비판의 문제와 관계한다. 하지만 푸코는 이 문제를 예속화된 주체의 역사의 틀 속에서 사유한다. 경험적으로 규정 가능한 시대의 특권화된 관계 속에서(308) ”진리들의 권력에 예속되어 있는 인류에 속하는 나, 인류의 이 순간에 속해 있는 나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항상 특정한 진리 체제에 따라 말해지는 자기에 대한 진리를 말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대타자로부터의 배제다.
비판과 ”자결적 의지“
푸코는 자결적 의지란 통치받지 않으려는 의지로 이해한다. “모든 통치에 반발하는 본원적 자유”일 근본적 무정부주의에 의거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푸코에게 본원적 자유는 없는데, 왜냐하면(309) 통치받는 것에 대한 절대적 거부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란적이라는 점이 본원적 자유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는 ”금세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비판적 간격이 우리 앞에서 펼쳐진다“는 언급에서 이 중단이 용기의 형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근원적 자유'를 발화하면서 푸코는 근원적 자유를 정립하고 그것을 회수한다고 버틀러는 말한다(310).- ‘본원적 자유’가 사는 인식적인 정치의 한가운데서 일시적으로 해방시키는 이 발화 행위는 또한 진리의 정치 한가운데서 주체의 어떠한 탈예속화를 수행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311).
버틀러는 근원적 자유에 관한 푸코의 입장-근원적 자유가 담론 속에서 정립되기 때문에-을 인식론적 장의 한계에서 언어 행위로 일컫는다. 근원적 자유를, 주체를 조직하는 한계에서 자신의 주체 관념이 처한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 있는 행위로서 보여준다(312). 누군가가 자신의 무지의 지점과 접하는 데에 이를 때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버틀러는 말한다. 버틀러에게 자기는 심리적인 것이고 비판은 작업이다. 주체를 형성하는 규범들에 관한 비판적 작업이다. 살 많나 삶은 이 비판에서 기준의 역할을 한다. 이로부터 인간적이고 비폭력적인 윤리, 판단 너머의 윤리가 유래한다. 이는 주체들이 이끄는 비판적 투쟁과 주체들이 전념하는 미학적 작업이 인정과 용서의 윤리적 형식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푸코에게 비판이(313)란 우리 자신이 주체로 구성하도록, 주체로 인정하도록 이끄는 진리 체제들에 대한 비판이다. 태도, 에토스, 사유하고 느끼는 방법인 비판에 관해 말하는 일은 자기와의 관계라는 윤리 속에, 사유에 대한 사유 자신의 비판적 작업이라는 윤리 속에 비판을 기입하는 것이다. 이 윤리는 진리를 말하는 자유로운 용기의 윤리다.
철학의 실재는 권력과의 관계를 통한 진리 진술의 실천 속에 있다. 폴리테이아(정치체제)는 철학자가 개입할 대상이 되어야 한다. 철학은 권력을 향한 청원의 양식이다. 자기 통치와 타자 통치의 문제를 표명하는 데 있다(314). 철학의 실재는 정치를 향한 개방성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며, 철학적 담론은 폐쇄적이거나 폭력적인 담론이 되지 않은 채 다른 담론들과 자신의 차이점을 단호하게 표명한다. 버틀러는 심리적으로 공명하는 ‘자기’ 개념으로써 주권적 주체의 유혹 너머로 인간학적인 주체를 갖게 한다. 정신분석에서의 자기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진실말하기는 심리에 전적으로 기초하지 않으며 윤리적 결단에 기초한다는 푸코에 동의해야 한다(315).
심리현상과 정치: 영향받기 쉬운 주체 또는 규범들에 대한 비판
버틀러는 주체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자유로운 윤리적 결단보다는 행위역량 또는 코나투스에 놓는다(316). 버틀러는 알튀세르를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통해 읽는다. 주체의 형성을 주체가 양심의 가책으로서 산출되는, 자기를 향한 반성적 회귀로서의 호명 속에서 해석한다. 알튀세르의 접근은(317) 이데올로기에 대한 모든 탐구의 관심사인 ”오인의 구조“ 속에서 이뤄진다(318). 알튀세르는 돌아섬을 죄의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양심을 개인-주체들에게 할당된 직위를 맡는 단순한 행동과 동일시한다. 실제로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에게 사회적 정체성 속에서 스스로/서로를 인지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상상적 이윤을 구성하는데, 이 인정의 세계는 원초적 실재성 속에서의 오인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인정 속에서 작동하는 오인 가운데 존재를 획득하게 되는 것을 인정의 이데올로기적 명증성 속에서 생산 관계들과 그로부터 유래하는 종속 또는 지배 관계의 재생산이 이뤄진다. 버틀러는 『윤리적 폭력 비판』에서 알튀세르를 푸코를 통해 읽자고 제안한다. 알튀세르가 라캉주의적 이론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구조주의적 분석에 기여할 수 있는 것(320)을 강조하는 반면에 불복종의 유형들은 고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법은 개정되도록 강제될 수 있다. 주체가 행위역량, 자유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제약들의 장 속에서 실행되는 투쟁 속에 있다고 본다.
『권력의 정신적 삶』에서 주체의 실존은 규범(법)을 향한 ”정념적 애착“에 기초한다고 번역한다. 이 공모성은 법을 문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건 짓고 한계 짓는다(321). “비판적인 탈-주체화“, 있지 않으려는 어떤 의지를 구성하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 ”부정적인“ 이 의지를 버틀러는 존재를 구성하는 욕망, 역량으로 해석한다. 주체 및 주체 범주의 해체는 한계를 갖는 것으로 해석한다. 탈-주체화란 자기동일적인 또는 실체적인 주체의 해체에 있으며 대타자에게 영향을 받는 주체라는 데 있다. 이것은 주체의 전적인 해체가 아니다(322). 이 주체는 가능성 혹은 역량으로서 자기 실존의 단순한 사실인데 실제로 버틀러는 주체의 존재를 역량으로써 재해석하기를 권한다. 역량은 행위와 역량의 동일성이 표명되는 행위역량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주체는 주체화의 장소이며 수행적인 것의 정치학 속에서 발견된다(323).
정치적 주체화로서, 특정한 규범 속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는 삶들을 비가시화하고, 살 수 없게끔 하는 인정의 규범들에(324) 대한 비판으로서 가치를 갖는 수행적 모순을 실행하는 그런 주체는 살아 있는 신체들을 규범에 의해 사회적으로 산출된 것으로서 꾸준히 고찰한다. 결국, 규범들에 대한 비판의 자원을 이루는 것을 바로 살아 있는 신체들이다(325).
정신분석의 비판적 사용은 권력의 정신적 삶을 사유하기 위해 필수적인 데다, 정신분석은 살아 있는 신체로서, 비판적 자원으로서 활동 중인 자아를 사유하도록 해준다(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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