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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 『권력의 정신적 삶』 4장 “양심은 우리 모두를 주체로 만든다” 20221007/ 개벽크
pszizek 2022. 10. 7. 21:23
알튀세르의 예속화
알튀세르의 호명 원칙은 언어 작용의 결과로 생성되지만 항상 그 조건 안에 머무르는 주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현대의 주체형성 논쟁의 틀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157)
실제로, 호명이 벤야민적 의미에서 우화적인 것이라면 그 우화에 의해 표현된 과정은 정확히 서술에 저항하는 어떤 것이자 사건을 이야기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호명은 사건이 아니라 부름을 극화 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158)
왜 주체형성은 오직 죄의식을 수용하는 경우에만 나타나는가? 죄의식에 자신을 귀속시키지 않고서는, 순응요구를 받아들이고 법에 종속되지 않고서는 ‘나’란 존재는 자신에게 자리를 찾아 줄 수 없고 말속에서 자신을 알릴 수도 없다.(158)
법에 대한 개방성 및 취약성이 법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능성에 앞서 존재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정체성을 추출해 낼 수 있다는 기대 속에서 법을 향해 돌아서는 행위 속에서 예증된다. 실제로 법은 법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기 이전에 이미 위반되었고 죄는 죄에대해 깨닫기 전에 이미 존재한다.
‘내’가 나의 비판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나’그자체가 내 존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나의 공모적 욕망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 이해되어야 한다. 비판을 행하는 사람이 자신이 행하는 비판에 의해 자신도 파헤쳐진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법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 양심의 힘을 풀어 헤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일 법이 자기 동일적인 주체의 이름으로 말한다면(알튀세르는 유대 신의 말 “나는 곧 나이니라”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양심은 어떻게 “나, 여기 있어”라는 언어적 통합의 전제조건이 되는 자기-정체성에 대한 가정을 자아에게 전달하거나 회복시켜 줄 수 있을까?(160)
호명 원리는 양심의 우선상과 가공되지 않은 어떤 양심의 원리를 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마치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묘사한 자기 자신에게 등 돌리기와 유사한 양식이다.(161)
알튀세르가 분명히 ‘교회’를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단순한 예로 제시하고 있지만 종교적 권위의 은유학 없이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에데올로기의 추정적 “영원성”, “이데올로기의 자명함”과 사도 바울의 “로고스”개념의 유비, 무릎 꿇는 자세가 시간이 흐르면서 믿음을 낳게 되는 의식의 심급으로서 파스칼의 기도 즉 제도적으로 재생산된 이데올로기의 조건으로서 믿음 그 자체로서 파스칼의 기도, ‘가족’, ‘교회’, ‘학교’, ‘국가’ 등의 신격화된 황용 등이 바로 그것이다.(162)
알튀세르는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유비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하면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호명을 수행적 신성함에 흡수시켜버렸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예는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사고하기 위한 패러다임이라는 지위를 얻게 되는데 이 패러다임에서는 종교적인 은유를 통하여 이데올로기의 불가피한 구조가 텍스트적으로 정립된다.(163)
이데올로기의 목소리가 가진 권위, 즉 호명의 목소리는 거부가 거의 불가능한 목소리로 형상화된다. 알튀세르의 이론에서 호명의 힘은 이데올로기가 표면적으로 예증되는 예들로부터 유도되는데, 베드로를 부르는 신의 목소리나 국가 권위의 대표로 추정되는 목소리 속에 나타나는 종교적 목소리의 세속화가 바로 그러한 예들이다.
이름 부르는 행위의 신성한 힘이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구성을 설명하는 호명 이론의 구조를 규정한다. 세례는 주체가 언어적 수단에 의해 사회적 존재로 강제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신은 베드로의 이름을 부르고 이러한 접근은 신을 베드로의 존재의 기원으로 수립한다.(164)
법 수용에서 죄는 법의 개입을 보장하고 나아가 주체의 존재로서의 연속성을 보장한다. 만일 주체가 법의 관점에서 그/그녀의 존재를 보장할 수 있다면 법은 주체화를 위한 예속화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도착적이기는 하지만 존재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법에 굴복할 것이다. 이와 같은 법에의 굴복은 지속적 존재유지를 향한 나르시스적인 애착의 강제적 결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167)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주체형성 과정을 설명할 때 죄와 양심은 생명을 불어넣는 질책이라 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요구와 은밀히 관계하면서 작동한다. 이 장에서는 어떻게 호명이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예를 통해 형상화되는지를 보이기 위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다시 읽을 것이다. 종교적 권위의 범례적인 지위는 주체형성의 가능성이 종교적인 예 안에서 비난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인정에 대한 정념적 추구’에 의존하게 되는 방식의 역설을 강조한다.(168)
알튀세르의 종교적인 유비가 단순한 예시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 유비는 하나의 교육적 표현으로 텍스트 자체의 엄격한 주장으로부터 어느 정도 분리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종교적인 권위의 목소리가 지닌 수행적인 힘은 호명이론을 위한 범례가 되고 또 그 수행적 힘은 이 예를 통해 신성한 이름 부르기의 추정적 힘을 주체를 사회적 존재로 호명하는 사회적인 권위로 확장한다.
이와 같은 접근법은 비유를 본질적으로 분열적인 것으로 그리며 낭만적으로 묘사하게 된다. 하지만 비유는 개념적인 요구를 증가시키고 강화할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은 보다 구체적인 텍스트적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의도는 어떻게 비유- 예와 유비-가 종교적 권위의 이데올로기적 신성화 과정(이때 텍스트는 그 권위를 재연 할 때에만 이 이데올로기적 신성화를 드러낼 수 있다)에 텍스트를 연루시키면서 개념화를 통지하고 확장하는지 보이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의 유효성은 부분적으로 양심의 구성에 달려 있고 이때 양심이라는 개념은 말해질 수 있는 것에 제한을 가하는 것,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표상될 수 있는 것에 제한을 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169)
양심은 시민-주체의 생산과 규제에 있어 근본적인데 그 이유는 양심이 개인을 돌아서게 하고 그/그녀를 책망의 주체화 양식에 이용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은 이 책망을 재이중화한다.(170)
‘적합하게 말한다는 것’은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심급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 과정은 주체의 형성 과정에서 중심적이다. 노동력의 다양한 기술들이 재생산되어야만 하는데, 점차로 이러한 재생산은 회사 바깥에서 그리고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즉 이 재생산은 생산 과정의 외부와 교육제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보통 언어기술이 숙달하는 것, 또는 숙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는 한다. 그러나 알튀세르에 의하면 이러한 숙달(정복)은 복종의 일종이기도 하다. “노동력의 재생산은 기술(노동자)의 재생산뿐만 아니라 동시에 기존 질서가 제시하는 규칙에의 복종을 재생산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171)
위와 같은 내용은 예속화의 문제틀로 연결되는데, 이 문제틀은 이중의 의미를 짊어지게 된다. 즉 예속화란 규칙에의 굴복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복종과정을 통해 사회성의 틀 안에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중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실천을 더 숙달하면 할수록 더 완전한 예속화가 성취된다. 굴복과 숙달은 동시에 발생하는데 이 역설적인 동시성은 예속화의 양가성을 구성한다. 역설적이게도 복종은 숙달에 의해 표시된다.(172)
알튀세르가 정확하고 역설적인 방식으로 복종을 숙달의 일종으로 재규정할 때 숙달/복종의 이항적 틀은 힘을 잃게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복종이나 정복은 모두 주체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숙달로 체험된 복종과 복종으로 체험된 숙달의 동시성은 주체 출현 가능성의 조건이다.(173)
알튀세르에게 양심적으로 업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이른바 그 임무를 계속해서 수행하는 것, 그 기술을 재생산하고 또 그 기술을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기술을 숙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알튀세르는 “양심적으로”라는 말에 인용 부호를 붙이면서 노동이 도덕화되는 과정을 부각시켰다. 불어 ‘s’acquitter’가 지닌 도덕적 의미는 그것이 영어 ‘to perform’, ‘수행하다’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사라져 버렸다.(174)
지배 이데올로기의 규칙으로의 ‘복종’이란 혐의에 맞서 무죄를 증명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복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복종은 증거요구에의 복종이자 그 증명의 실행이며 심문하는 법에 응하는 과정 안에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주체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가 되는 것은 죄를 지었다고 추정된 후 심판을 거쳐 무죄를 선고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죄 선언은 단일한 행위가 아니라 계속 재생산되는 어떤 상태이기 때문에 ‘주체’가 되는 것은 죄를 지었다는 혐의로부터 자신을 사면하는 지속적인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75)
돌라르의 논문「호명을 넘어서」는 알튀세르가 라캉의 상상 이론을 자주 이용하지만 정신분석학이 지닌 분열적인 잠재력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그는 알튀세르는 주체화가 불가능한 영역을 지칭하는 개념으로서 ‘실재계’라는 개념의 잠재력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178)
돌라르는 주체성이 내면과 관념성에 있다면, 물질성은 이를 상쇄하는 외부 세계, 즉 그 반대에 속한다고 가정한다. 이렇게 안과 바깥을 구분하는 방식을 알튀세르의 이론적 특징을 규정하는 방식으로서 보거나 또는 그에 대한 외적 보충물로 보는 것은 이상한 면이 없지 않다. 결국 알튀세르의 가장 궁극적인 공헌은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가정하고 있는 물질적 토대와 관념적·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구분의 이분법의 근거를 허문 것이라고 할 수 있다.(180)
돌라르의 주된 비판적 관심은 알튀세르가 주체화에 만들어지는 ‘잔여물’, 즉 비현상적인 ‘내부성의 중핵’을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있다. 돌라르는 “대상의 내투사”에 의해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1차적 대상이 내투사되고 그 내투사는 주체의 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대상의 회복 불가능성이 주체의 조건을 지탱할 뿐만 아니라 주체의 일관성을 해치는 위협이 되기도 한다. ‘실재계’라는 라캉주의적 개념은 주체의 근본적인 한계일 뿐만 아니라 내투사의 최초 행위로 제시된다.(181)
돌라르는 이와 같은 의식을 ‘의미없는 의례’라고 칭하고, 신념과 의례들이 가정의 효과라는 점과 의례가 믿음을 따르지만 믿음의 생산조건은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위해 알튀세르적인 설명을 전도시킨다. 돌라르는 왜 기도를 하는지 그 동기를 잘 설명하지 못하는 알튀세르의 의례적 실천 이론의 무능력을 강조한다.(182)
비트겐슈타인은 “우리는 말하고 단어들을 입 밖에 낸다. 그리고 그런 후에야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뿐이다”라고 썼다. 의미의 예상이 말이라고 하는 ‘텅 빈’ 의례를 지배하고 의례의 반복성을 보장한다. 이와 같이 이해할 때 우리는 무릎을 꿇기 전에 믿어야 할 필요도 없고, 말하기 전에 그 의미를 알아야 할 필요도 없게 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 두 행위는 발화 속에서, 그리고 발화를 통해서 의미가 도착할 것이라는 믿음(노에마적인 만족에 대한 보장이 통제할 수 없는 기대) 속에서 행해진다. 만일 가정하고 동의하는 것이 가정과 동의의 언어 바깥에서 사고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무릎 꿇기로 동의하는 행위는 무릎 꿇는 행위보다 더 의례적이지도 않고, 덜 의례적이지도 않다.(184)
돌라르는 의례가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을 생산하는 것이며 의례들이 상징적이거나 반복적인 논리, 즉 비물질적인 논리에 의해 규제되는 한에서만 주체성을 생산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돌라르에게 주체성이란 “의례들을 물질적으로 따를 때 발생하는 것”으로, 이때 “발생”이 그 자체로 물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따르는” 행위는 물질적인 차원을 갖는다. 주체성은 물질적이고 의례적인 수행으로부터 비물질적으로 발생한다.(186)
관념은 의례들에 의해 규제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행동들 속에 각인되어 존재한다. 그렇다면 관념들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바깥에 관념이 존재할 수 있을까? 물질적인 것을 규제된 반복으로서뿐만 아니라 완전히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를 생산하는 반복으로 다시 사고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주체의 믿음은 파스칼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 이 둘은 모두 알튀세르가 ‘물질성’이라고 부른 반복적인 주술의 결과이다.(187)
돌라르는 사랑이 아마도 호명을 ‘넘어선’ 것이라는 제안은 매우 중요하다. 어떻게 법이 정념적 애착의 대상, 이상한 사랑의 장면의 대상이 되는지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면, 알튀세르는 그로부터 큰 득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거리의 행인으로 하여금 뒤돌아서도록 강제하는 양심 또는 살인자로 하여금 경찰을 찾아 헤매도록 촉구하는 양심을 추동한 것이 실은 의례적인 처벌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법에 대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189)
이 분석을 향해 제스처를 취하면서 알튀세르는 꾸짖음 속에서 얻는 국가의 인정을 정념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주체가 구성되는지 설명한다. 주체가 법을 향해 돌아서거나 달려간다는 것은 주체가 법에 대한 정념적인 기대 속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랑은 호명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랑은 오히려 정념적인 원을 형성하는데 이 원 안에서 주체는 그 자신의 상태에 의해 옭매이게 된다.(190)
언어적인 생존은 이 탈주체화된 영역에서 어떤 형태를 취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 어떤 용어를 통해 존재가 인정되고 또 어떤 용어를 통해 존재가 인정되어질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이곳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양심의 문제에 선행하는 질문들을 지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질문들은 스피노자, 니체, 조르조 아감벤 등을 사로잡았던 문제들을 지시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가 구성적 욕망으로서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틀 안에 양심과 호명을 재배치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회적 존재의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 예속에 굴복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이와 같은 욕망이 단수형으로서 법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법에 의해서 착취될 수 있는가?
아감벤은 특정한 양심의 형식과는 거리를 두며 존재하려는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윤리학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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