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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장 서유럽으로부터의 이송;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텐마크, 이탈리아
제3제국의 지도자들이 극찬한 특성인 '무자비한 강인성'은
여하튼 '유대인 문제 고문관으로 아이히만 사무실에서 다른 나라로 파견된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덕성을 최고도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즉 1941~42년 가을과 겨울, 그들의 주요 임무는 해당국의 다른 독일인 관료들, 특히 명목상의 독립국에 있는 독일 대사들과 점령 지역에 있는 제국 최고 책임자들과 만족할 만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두 경우 모두 유대인 문제에서 사법권에 대해서는 항상 갈등이 있었다.
1942년 6월 아이히만은 프랑스와 벨기에 및 네덜란드에 있는 고문관을 이들 나라로부터의 이송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소환했다.
프랑스, 비시 경부는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특별부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그 수장은 처음에는 자비에 발랑이, 그리고 다르퀴에 드 펠레푸아가 담당했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유명한 반유대주의자들이었다.
몸든 인구 계층에 퍼져 있던 강력한, 일반적으로 국수주의적 성향의 인종중심주의와 직결된 프랑스 판 반유대주의의 허용에 따라 외국계 유대인에 대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1942년 이래로 외국계 유대인 절반 이상이 무국적 상태가 되었다.
그 작전은 대략 10만 명의 무국적 유대인을 이송하는 것으로 시작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는 비시 정부의 동의뿐만 아니라 프랑스 경찰의 능동적인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이들은 독일에서 치안경찰이 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외국계 유대인은 프랑스에서는 항상 문젯거리”였으며,
따라서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제거할 기회를 프랑스에게 부여한 독일의 태도 변화를 기뻐했기” 때문이었다. 라발(수상)과 페탱(원수)은 이 유대인이 동부에서 재정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은 덧붙여 두어야 한다. 그들은 '재정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1942년 여름에 일어났다.
(1) 첫째 사건은 7월 15일에 보르도를 출발하기로 한 기차와 관련된 일이었다. 겨우 150명의 무국적 유대인만이 보르도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아주 흥분을 했고, 그의 부하들에게 이 일이 '특권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가 원했다면 ‘프랑스를 누락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2)두 번째 사건은 ...이미 아유수비츠로 이송된 부모와 떨어진 4000명의 아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프랑스 돌격대장) 단네커에게 전화를 걸어 “열차편을 [폴란드의] 일반정부로 다시 급파하자마자 아이들을 수송할 수 있도록 하라' 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6세 이하의 아이들도 수송되어야 한다 고 제안한 사람은 라발 자신이었음을 ... 이 모든 섬뜩한 에피소드가 상부명령의 결과조차도 아니고 프랑스와 독일의 최고위급에서 협상한 결과였다는 점이다.
1942년 여름과 가을 동안 2만 7000명의 무국적 유대인(파리에서 1만 8000명, 비시 정부에서 9000명)이 아우수비츠로 이송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유대인을 독일인에게 인도하기를 완강히 거부한 것이다.
'재정착에 대한 최초의 소문이 프랑스에 도달했다.
반유대주의자들조차도 대량학살의 공범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열심히 생각해보았던 조치, 즉 1927년 이후(또는 1933년 이후)에 유대인에게 부여한 귀화권의 박탈 조치를 취하기를 거부했다.
프랑스로부터 유대인을 소개시키려는 모든 야심찬 계획들이 사실상 '취소되어야 했다.
수만 명의 무국적자들이 숨었고, 또한 수천 명이 이탈리아령의 프랑스 지역인 코테다주르로 도피했다.
1943년 여름. 독일이 유대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1944년 4월, 연합군이 프랑스에 발을 디디기 두 달 전에는 이 나라 안에 아직도 25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고, 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이 문제의 진실은 게슈타포 요원들조차도 무자비함과 연약함을 같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1942년 6월에 베를린에서 있었던 회의에서... 벨기에에서는 1만 명의 유대인이, 그리고 네덜란드에서는 1만 5000명이 가까운 장래에 체포되어 이송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쟁 발발 전에는 9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대략 3만 명은 독일계 유대인 난민들이었고. 5만 명이 다른 유럽 국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있다.
1940년 말까지 거의 4만 명의 유대인이 이 나라를 탈출했고, 남아 있던 5만 명 가운데 벨기에 태생인 시민은 기껏해야 5000명밖에 없었다. 게다가 탈출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주 중요한 유대인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어쨌든 외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귀화한 무국적 유대인 (체코, 폴란드, 러시아, 독일 출신으로,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아주 최근에 도착한 사람들이었음)은 쉽게 인지하는 것이 기능했고, 이 작고 완전히 산업화된 국가에서는 숨기가 이주 어려웠다.
1942년 말까지 1만 5000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1944년 가을까지, 즉 연합군이 이 나라를 해방시킬 때까지 총 2만 5000명이 살해되었다.
네덜란드로부터의 이송도 무국적 유대인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번 경우는 이 유대인 거의 모두가 독일로부터 온 난민들로, 전쟁 전의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바람직하지 않은 존재라고 공개적으로 선언된 사람들이었다.
전체 15만 명의 유대인 인구 가운데 외국계는 3만 5000명이었다.
이 작은 나라는 전적으로 독일의 처분에 달려 있었다.
(친위대 소속의 아이히만의) '고문’은 빌리 죄프이다.
그는 1941년 4월에 하이드리히에 의해 네덜란드로 파견되었다.
예루살렘의 검사는 한편으로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아이히만과 연관지으려는 목적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관료의 복잡한 업무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서 헤어나질 못해 이 모든 관료들이 아이히만의 명령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위층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는 힘러로부터 직접 지시만을 받았고, 당시 아직도 라자코비치가 아이히만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을 개연성은, 특히 그 후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사건에 비추어보아 거의 없다.
아이히만은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진 조정상태에 대해 특히 화가 났다.
왜냐하면 아이히만 자신의 이송 시각을 상당히 곤란하게 만든 사람들이 현장에 있던 요원들이었다.
아이히만의 콧대를 꺾어 놓은 사람이 바로 힘러 자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의 마지막 충돌은 1944년에 일어났다.
세파르디계 유대인은 비록 살로니카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는 했어도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태생의 세파르디계 유대인은 면제가 되었다.
힘러가 네덜란드에서 자신의 고위층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들을 통해 일하기를 선호한 이유는 단순하다. 이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일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독일로부터 온 난민들에 대한
네덜란드 정부의 아주 비우 호적인 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네덜란드에서의 반유대주의가 외국계 유대인을 향한 것이라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이것은 나치스가 유대인위원회를 상대적으로 쉽게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유대인위원회는 오랫동안 오직 독일계 유대인과 외국계 유대인만이 이송의 희생물이 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면서 존속했다.
또 친위대가 네덜란드의 경찰병력뿐만 아니라 유대인 경찰력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비록 폴란드에서와는 달리 네덜란드 국민들은 수많은 유대인을 숨도록 허용하는 태도를 가졌지만, 그러나 숨어 지내던 상당수의 유대인, 적어도 그들의 절반 가량이 결국 발각되었다.
1944년 7월까지 11만 3000명의 유대인이 이송되어
이들 대부분은 폴란드의 루블린 지역의 버그 강변에 있는 소비보르로 갔다
네덜란드에 살던 전체 유대인의 4분의 3이 살해되었는데 여기에는 네덜란드 태생의 원주민 유대인의 3분의 2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4년 가을에 마지막 이송이 이루어졌다
숨어서 살아남은 1만 명의 유대인 가운데 약 75퍼센트가 외국계였다.
반제회의에서 외무성의 마르틴 루터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잠시 동안 철수할 것을 제안했다.
이 일은 덴마크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는 독립 정부가 있었고, 비록 1940년 4월에 독일 군대가 침공하기는 했어도 1943년 가을까지는 중립국으로 존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덴마크에서는 언급할 가치가 있는 파시스트나 나치스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협력자도 없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에서 독일인들은 열정적인 지지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스웨덴이 처벌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망명을 허용하고 때로는 스웨덴 국적까지도 허용한 것이다.
한 나라에서 불법적으로 떠나는 것은 항상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지만,
허가 없이 피란지를 찾거나 이주 당국을 속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덴마크 유대인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하며, 덴마크인들과 덴마크 정부의 행위는 유럽의 모든 나라들 가운데 독특한 것이었다.
분명히 유럽의 몇몇 다른 나라에서는 적절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고,
따라서 사실상 그들 대부분은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해결책에는 반대했다.
덴마크와 마찬가지로 스웨덴과 이탈리아, 불가리아도 반유대주의에 거의 면역되어 있었지만 이 세 나라는 독일의 영향권에 있었고, 그래서 오직 덴마크인들만 그들의 주인인 독일인들에게 이 주제에 대해 감히 소리내어 말할 수 있었다.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대략 6400명의 유대계 덴마크인들과, 전생 이전에 이 나라로 망명을 왔고 이제는 독일 정부에 의해 무국적자라고 선언받은 1400명의 독일계 유대인 난민들을 구별하는 아주 중요한 조치를 독일인들이 도입하지도 못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귀화를 단적으로 부정하고 노동허가조차 주지 않은 사람들을 정부가 보호하는 것은 아주 '비논리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덴마크인들은 무국적 난민들이 더 이상 독일 시민이 아니기 때문 에 나치스는 덴마크의 동의 없이 그들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없다고 독일 관리인들에게 말했다.
유대인을 구한 것이 무국적성 자체가 아니라 그 반대로 덴마크 정부가 그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살인을 위한 관료제의 수립을 위해 그토록 중요한 그 어떠한 예비 적 조치들도 수행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작전은 1943년 가을까지 연기되었다.
1943년 8월 스웨덴 정부는 독일 군대가 자국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독일과의 1940년 협정을 파기했다.
덴마크 조선소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거기서 조선 노동자들은 독일 배의 수리를 거부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힘러는 이때가 오랫동안 미루어져온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수행할 적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히만의 사무실에서 가장 뛰어난 한 사람을 덴마크로 보냈는데, 그는 필수적 자질인 '무자비한 강인성' 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어느 누구로부터도 고발당하지 않은 롤프 권터였다.
(제국 전권대사 베르너 베스트 박사) 베스트는 베를린으로 가서 모든 덴마크 출신 유대인이 그들의 소속에 관계없이 테레지엔슈타트로 보낸다는 약속을 얻었다.
운명의 날을 며칠 앞두고 베스트로부터 정보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한 독일인 운송담당자 게오르크 F. 두크비츠가 모든 계획을 덴마크 정부 관리들에게 폭로했고, 이들은 다시 서둘러서 유대인 공동체 수장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만일 덴마크인들이 스웨덴을 이웃한 축복을 받지 않았더라면 유대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유대인이 스웨덴으로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였고, 이 일은 덴마크 어부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의 경우 유대인은, 1인당 5000달러 내지 1 만 달러에 해당되는 금액을 오직 현금으로만 받고 탈출허가증을 판 친위대의 '합법적인’ 협정을 해서 결국 자신의 재산을 다 바쳐야 했다.
덴마크와 스웨덴을 갈라놓은 5마일 내지 15마일의 바다를 가로질러 10월 어느 좋은 날 모든 유대인을 싣고 페리호는 떠났다.
스웨덴은 5919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는데, 이 가운데 적어도 1000명은 독일 태생이었고 1310명은 반쪽 유대인이었으며, 686명은 유대인과 결혼한 비 유대인이었다.
비덴마크계 유대인은 이전보다 살기가 나아졌고, 모두가 노동허가를 받았다. 독일경찰이 체포한 수 백 명의 유대인은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송되었다.
이 모든 일이 지났을 때 아이히만이 숙고해서 내린 의견은 “여러 이유에서 덴마크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행동은 실패였다”
정치적으로 또 심리학적으로 이 사건의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덴마크 내의 독일 당국이 취한 역할, 즉 베를린으로부터 온 명령에 대해 그들이 명백히 사보타주를 했다는 것이다.
그들 자신은 분명히 민족 전체의 처형을 더 이상 당연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이 재판에서 피고들은 서로를 고발하고 배신했으며.
자신들은 “항상 거기에 반대했다'고 세상을 납득시키려 하거나
또는 아이히만이 그런 것처럼 자신들의 최상의 재능이 상관들에 의해 “오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권력에 있는 자를 이 자신의 “복종심”을 오용했다고 고발했다. “좋은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행운이고, 나쁜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불운이다. 나는 운이 없었다”)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나치 이데올로기를 옹호할 용기를 갖지 않았다.
베르너 베스트는 뉘른베르크에서 자신은 복잡한 이중역할을 수행했다고,
그리고 덴마크 관리들이 임박한 파국에 대해 경고를 받은 것은 자기 덕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진정으로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을 덴마크 법정이 만족할 만큼 입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탈리아는 독일에게 유럽 내의 유일한 진정한 동맹이었고, 동등한 취급을 받았으며 주권 독립국가로 존중을 받았다.
나치스가 이탈리아의 파시즘보다 스탈린식의 공산주의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솔리니의 편에서는 독일에 대한 큰 신뢰나 히틀러에 대한 큰 경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전체주의의 국가형태와 파시즘적 국가형태 사이의 깊고 결정적인 차이점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세상에 전적으로 이해된 적은 없었다.
그 차이점들은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데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났다.
1943년 여름에 .. 아이히만과 그 요원은 ...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 이탈리아 방식을 프랑스와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등의 국가들의 이탈리아의 점령지에서 만났다.
처형될 유대인이 끊임없이 이 지역으로 탈출했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임시 망명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이히만보다 훨씬 높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최종 해결책에 대한 이탈리아의 사보타주가 상당히 심각하게 다가왔는데
이는 주로 유럽의 다른 파시스트 정부(프랑스의 페탱, 헝가리의 호르티,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 스페인의 프랑코)에 대한 무솔리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만일 이탈리아가 자국의 유대인을 살려두기를 중지하지 않는다면
독일의 위성 국가들도 동일한 시도를 할 것 같았다.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대략 5만 명의 유대인이 안전하게 지내고 있었다.
독일의 상당한 압력으로 이탈리아인 '유대인 문제 최고책임관이 임명되었는데, 그의 유일한 임무는 이 지역의 모은 유대인을 등록받아 지중해 연안으로 추방시키는 것이었다.
2만 2000명의 유대인이 체포되어 이탈리아 지역 내부로 이송되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가장 거친 요원 가운데 한 사람인 알로이스 브루너를 니스와 마르세유로 보냈다.
제국중앙보안본부에서 일종의 조사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하튼 유대인은 거기에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탈리아 내의 인전한 곳으로 달아났고, 주변 산에 숨이 있던 사람들은 스위스나 스페인으로 갔다.
이탈리아인들이 유고슬라비아의 점령지를 포기했을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유대인은 이탈리아 군대와 함께 떠났고 피우메에서 피난지를 찾았다.
독일의 압력을 받은 무솔리니가 1930년대 후반에 반유대적 법률을 도입 했을 때 그는 통상적인 예외를 약속했지만, 그는 한 범주, 즉 과거의 파시스트당의 요원과 그의 부모와 조부모, 아내와 자녀 및 증손을 추가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이탈리아 유대인이 예외가 되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대인이 다른 이탈리아인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20년 동안 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했을 때 일어난 것이기 때문인데,
이때 공무원직은 오직 파시스트 당원만이 할 수 있었다.
파시스트에 반대한 유대인, 주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더 이상 이 나라에 있지 않았다.
아이히만도 언급했지만, 보통의 친위대원 가운데도 유대인이 있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수수께끼의 열쇠는 이탈리아가 실제로 유럽 국가들 가운데, 모든 반유대적 조치들이 단정적으로 인기가 없었던 몇 안 되는 국기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무자비한 강인성‘에서 압도되지 않을 이탈리아 파시즘은 이 국가에서 전쟁 발발 전에 외국계 및 무국적 유대인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그 시도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생사의 문제와 연관된 일에 대해서는 그들은 자신의 주권을 유지한다는
구실로 이와 관계된 유대인 주민들을 버리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이 외국인들은 자국민 사이의 민족적, 문화적 동질성에 기초한 모든 유럽의 민족국가에서 그러한 것처럼, 자연적으로 이탈리아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덴마크에서 진정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귀결, 즉 시민과 독립의 전제조건 및 책임에 대한 타고난 이해였던 것이 이탈리아에서는 오랜 문명화된 민족의 거의 자동적인 일반적 인류애(humanity)의 산물이었다.
1943년 12월 독일 외무성이 아이히만의 상관인 뮐러의 도움을 공식적으로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탈리아에 독일 관리들의 감독 하에 두는 것이 긴급하고도 필수적이라고 여긴다”
이에 따라 루블린 지역의 죽음의 수용소 출신 오딜로 글로보크니크와 같은 유명한 유대인 킬러들이 이탈리아로 피송되었다.
아이히만의 사무실에서는 예하 부서에 '이탈리아 국적의 유대인은 즉각적으로 '필요한 조차를 따라야 한다’ 는 회람 통지를 내렸다.
그리고 최초의 타격은 로마에 있는 8000명의 유대인에게 가해졌는데, 이들은 이탈리아 경찰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온 독일 경찰 부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제는 이탈리아 유대인이 비록 면제 대상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지만 이송되지는 않았고 이탈리아 수용소에 수용되기만 했다. 이 '해결책은 이탈리아에는 충분히 '최종적'이었던 것 같다.
1944년 봄 독일인들은 약속을 깨고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간 7500명 가운데 겨우 600명만이 돌아 왔다.
제11장 발칸 지역으로부터의 이송;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루마니아
제국(북으로는 러시아 제국, 남으로는 오스트리아-형가리 제국, 남동으로는 터키 제국)의 점령 하에서 수세기 동안 살아온 수많은 민족 집단들에게는 새로운 정치적 질서가 부여되었다.
그 결과 생겨난 민족국가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정치적 제도의 모범으로 삼은 구 유럽 국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적 동질성을 비슷하게라도 가진 나라는 한 나라도 없었다.
그 결과 이 나라들은 현 정부에 격렬히 적대적인 거대한 민족 집단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민족적 열망은 자신들보다 약간 더 많은 수의 이웃들에 의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1939년 3월에 프라하로 행진해 들어갔을 때 그는 독일 소수계인 수데텐도이치족뿐만 아니라 슬로바키아족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는데, 슬로바키아족은 히틀러로부터 '독립'국가 제안을 받아 해방되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거기서 다수족이며 이 나라의 통치자가 된 세르비아는 적으로 간주되었고, 크로아티아 소수민족에게는 그 자신의 민족 정부가 주어졌다.
헝가리와 루마니아, 불가리아 자신의 영역을 관대하게 확정시킴으로써 (독일, 이탈리아, 일본) 추축국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새롭게 합병된 지역에 있는 유대인은 국민으로서의 지위가 거부되었다.
그들은 자동적으로 무국적 상태가 되었고, 따라서 서부 유럽의 난민들과 똑같은 운명을 겪게 되었다.
그들은 분명히 가장 먼저 이송되고 학살될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 시절에 붕괴된 것은 소수민족 조약들의 정교한 체계였다.
유대인은 모든 계승국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소수민족이었다.
서구의 교육받은 유대인' 귀족들 대다수는
일종의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자율성은 원했지만 정치적 자율성을 원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동부 유럽의 유대인은 동지나 적 모두에게서 분명한 하나의 민족으로 인정받았다.
동화를 하는 것이 하나의 규칙처럼 된 서부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지위를 갖게 해주었다.
서부와 중부 유럽에서는 중산층 유대인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특징인데, 동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동부는) 중상층 가족들로 이들은 실제로는 지배계층에 속했고, 그들의 이방 사회에 대한(돈과 세례, 종족간 결혼을 통한) 동화의 정도는 서부의 대부분의 유대인의 동화 정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정부 설립 3주 후에 아주 의무감을 가지고 반유대인 법안을 도입했다.
그리고 독일에 있는 수십 명의 크로아티아계 유대인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정부는 그들이 '동부로 이송되는 것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송작업은 크로아니아인들 자신, 특히 강력한 파시스트 운동의 요원인 우스타쉐 당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인들은 나치스에게 각 유대인의 이송비로 30마르크씩 지불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이주지들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
국가는 자신의 국경 안에 머무르다 살해당한 유대인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래서 1943년 가을까지 3만 명의 유대인이 죽음의 센터로 이송되었다.
그제야 독일인들은 이 나라가 아직도 유대인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로아티아의 거의 모는 지배자들이 유대인과 결혼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의 유대인 가운데 살아남은 1500여 명은 분명히 모두가 이처럼 고도로 동화된, 그리고 극도로 부유한 유대인 집단이었다.
“세르비아 유대인을 다루는 일상적 명령 체계가 우리에게는 아주 분명하게 인지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어떠한 유대인도 이송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모두 현장에서 해결되었다.
1942년 8월에 군사정부 민간인 부서장인 하랄 투르너 추밀원 고문관은 자부심에 차서 세르비아는 ‘유대인 문제와 집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유일한 나라’라고 보고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피하고 자신이 죄를 범한 나라에서도 재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거나 독일의 법정에서 가능한 최고의 '이해‘를 얻었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일을 떠올렸는데, 그 공화국이 한 일이라고는 정치적 살인자가 폭력적인 반공화국적 우파 단체에 속해 있다면 그 살인행위를 용서해 주는 것이었다.
불가리아는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그리스를 대가로 상당한 정도의 영토를 확장했다.
반유대주의가 집단마다 강력히 퍼져 있던 혼합 민족지역 가운데 속하는 불가리아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도무지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1941년 1월에 불가리아 정부는 ... 대략 1만 5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5000명의 유대인이 추가로 특권(유대인인 개종하면 면제 부여)을 부여받았다.
1942년 1월에 아이히만은 ... 불가리아 정부에 접근하여 소피아에 있는 경찰 무관이 “이송을 기술적으로 완료하도록 할 것” 이라는 점을 외무성에 분명히 말할 것을 제안했다.
불가리아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과업에 최고 우선권이 주어졌던 것은 어떤 일이든 달성하려면 상당한 속도가 필수적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베를린이 입수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서야 그들은 '근본적' 조치의 방향으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1942년 11월에 ... 독일의 큰 압력을 받은 불가리아 정부는 결국 모든 유대인을 소피아에서 변방 지역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그 조치는 유대인을 집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의회와 민중이 분명히 유대인을 편들고 있었다.
단네커, 그는 공개적으로“신이 유대인의 운명을 결정했고, 인간이 유대인을 고문하고 처형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 고 선언했다.
여러 민족들이 섞여서 살고 있는 지역에서 독특한 경우에 해당하는
불가리아인들의 행위에 대해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나는 알지 못한다.
독일인들에게 북쪽을 점령당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 남쪽이 점령당한 그리스는 어떤 특별한 문제를 야기기하지 않고 따라서 그 나라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순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943년 2월 아이히만의 두 전문가는 살로니카에서...유대인을 이송시키기 위한 모든 준비를 위해 도착했다.
그곳은 그리스계 유대인의 3분의2인 약5만 5000명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지역이었다.
이것은 '유럽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의 근본를‘ 안에서 이루어진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특권을 받은 계층은 외국 여권을 가진 유대인과 늘 그렇듯 유대인위원회 요원들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합쳐서 수백 명을 넘지 않았다
같은 해(1943년) 가을, 이탈리아 군대가 괴멸했을 때 아테네와 그리스 섬들을 포함한 그리스 남부 지역 출신의 1만 3000명가량의 유대인의 소개가 신속히 완료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그리스계 유대인은 이른바 죽음의 부대에 고용되어 있었는데, 이 부대는 가스실과 화장터에서 작업을 했다.
(군당국을 대변했던, 전쟁관리위원) 메르텐 박사는 ...자기가 몰랐던 운명으로부터 유대인을 구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베를린에서 피고 측과 검찰 양쪽의 대리인이 임석한 가운데 한 피고를 위한 그의 증언도 상당히 독특했다.
아이히만이 살로니카에 있던 약 2만 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구하는데 상당히 도움을 주었으며, 또 모든 악한 일은 비슬리케니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아이히만 본인은 이 모든 것을 부인했다. 그는 살로니카에 가본 적도 없었고 도움을 준 메르텐 박사를 만난 적도 없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조직적 재능, 즉 그의 사무실에서 이루어진 소개와 이주에 대한 조정 작업이 사실상 희생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 차례 이상 주장했다.
그것이 유대인의 운명을 보다 쉽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은 자신이 '강제이주’를 통해 수만 명의 유대인의 생명을 구했다는 그의 어리석고도 집요한 주장과 길은 법주에 속하는 말이다.
루마니아에서는 친위대조차도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구식의 자발적인 유대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루마니아가 전쟁 전 유럽에서 가장 반유대주의가 심한 나라라고 하는 것은 거의 과장이 아니다.
심지어 19세기에도 루마니아는 반유대주의가 잘 구축된 것이 사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모든 루마니아계 유대인(수백 명에 해당하는 세파르디계 가족들과 일부 독일계 유대인은 예외)은 여전히 외국인 거주자 신분이었다.
이 때(1938년) 히틀러 독일의 힘을 신뢰한 루마니아인들은 소수자 협정(소수자 시민권 부여, 연합군이 설득)을 자신의 ‘주권’에 대한 강압으로 간주하여 무효를 선언함으로써 전체 유대인 인구의 약 4분의 1 되는 수십만 명의 유대인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하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을 갖게 했다.
1940년 8월,...새로운 철권 독재정부의 수장인 이온 안토네스쿠 제독(루마니아) 은 모든 루마니아 유대인이 무국적자라고 선포했다.
같은 그는 또한 독일을 포함한 전 유럽에서 가장 혹독한 반유대인 법을 제도화했다.
루마니아가 1941년 2월에 전쟁에 참전하여 루마니아 지역은 곧 있을 러시아 침공 시에 고려에 넣은 군사지역이 되었다.
오데사에서만 루마니아 병사들은 6만 명을 학살한 책임이 있었다.
루마니아 정부는 처음부터 동부에서 이루어지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아주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1941년 여름에도 루마니아 병사들은 같은 해 1월보다 작은 규모이지만...학
살과 이송 계획에 여전히 참여했다.
루마니아 스타일이란 5000명을 열차 화물칸에 발디딜 틈 없이 태우고는 여러 날 동안 목적지도 계획도 없이 교외를 계속 달리게 하여 질식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루마니아 공포의 강제수용소는 동부로의 이송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마니아인들 스스로 만들고 운영했는데, 우리가 독일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 어떤 일들보다도 더 교묘하고 잔혹한 것이었다.
아이히만 본인은 이 단계에서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한 이 같은 비조직적이고 비성숙한 루마니아의 노력을 중지해달라고 1942년 4월 외무성에 보낸 한 편지에서 탄원했다.
따라서 8월 중순(이때까지 루마니아인들은 거의 어떠한 독일의 도움 없이30만에 가까운 유대인을 죽였다)에 외무성은 안토네스쿠와 ‘유대인의 루마니아로부터의 소개 작업’을 독일 군대가 수행한다는 협정을 마쳤다.
그런데 킬링거 대사가 보고한 것처럼 제독(안토네스쿠)은 이제 유대인을 '편안한 방식으로' 제거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유대인을 현금(1인당 1300달러를) 받고 해외로 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루마니아인들은 유대인 이민에 대해 가장 열광적으로 집착했다.
이것이 바로 전쟁 기간 중 루마니아가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유대인을 이주시킨 몇 안 되는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된 이유이다.
붉은 군대가 다가옴에 따라 안토네스쿠는 훨씬 더 '온건'해져서, 이제는 기꺼이 유대인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안토네스쿠 제독이 처음부터 끝까지(히틀러가 생각한 것처럼) 나치스보다더' 철저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진행에 항상 한걸음만 앞서 있었다
그는 모든 유대인에게서 국적을 최초로 박탈했고, 또 나치스가 아직도 첫 실험을 하느라 분주했을 때 대량학살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또한 부끄러움 없이 자행하기 시작했다...
루마니아의 학살자들은 모두 정식으로 처형되었다.
제12장 중부유럽으로부터의 이송; 헝가리, 슬로바키아
옛날 옛적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헝가리의 왕이었고, 보다 최근인1806년 이후 다뉴브 지역에는 황제 같은 왕의 왕정이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왕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불안하게 지배되고 있었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 하에 있었던 1930년대 초에는 이른바 활 십자가인(Arrow Cross men)이라는 강력한 파시스트 운동이 일어났고, 1938년에는 이탈리아를 따라 그들의 첫 번째 반유대인 법들을 통과시켰다.
인종주의에 기초한 완전히 포괄적인 반유대주의가 공식적인 정부 정책이 되었을 때, 11명의 유대인이 의회 고위직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헝가리는 동부 전선에 유대인 부대(13만 명으로 비전투 지원부대였지만 헝가리 제복을 입었음)를 파병한 유일한 추축국이었다.
헝가리의 주권은 1944년 3월까지 나치스 정부가 존중해준 결과 유대인에게 이 나라는 '파괴의 대양' 가운데 있는 안전한 섬이 되었다.
베젠마이어가 1943년 12월에 외무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명시했듯이
유대인의 '전멸‘이 '헝가리가 전쟁에 참여하는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해결’은 80만 명의 유대인과 약 10만 또는 15만 명의 개종 유대인의 소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이 일의 중대성 때문에 1944년 4 월 전 부서원들과 함께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아이히만 특별 돌격대는 부다페스트에 본부를 차렸을 때 대략 10명의 요원들과 몇 명의 서기보조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바로 그날 밤에 아이히만과 그의 요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모임에 불러내어 유대인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설득했다.
이 위원회를 통하여 명령도 내리고, 그 대가로 헝가리의 모든 유대인에 대한 절대적 사법권을 부여하려고 했다.
교황 대사의 말처럼 이때는 “전 세계가 이송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 때였다.
유대인중앙위원회의 위원이 된 사람들은 이웃나라 슬로바키아로부터, 지금 자신들의 협상 대상자인 비슬리케니가 뒷돈을 잘 쟁기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고 또 모든 뇌물을 받고서도 그는“모든 슬로바키아의 유대인을 이송해버렸다...” 것도 알고 있었다.
이 같은 어려운 협상에서 발휘된 아이히만의 가장 영악한 속임수는 그와 그의 요원들이 부패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기만전술로 부패한 척했지만, 곧 실제상황이 되어 버렸다.
유대인이 그토록 많은 돈을 쓰고도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 이상한 카스의 씨의 말로 하자면, “자신의 목숨과 자기 가족의 목숨으로 떨고 있던 유대인은 돈에 대한 모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크루마이는 1944년 4월에 프로이디거로부터 25만 달러나 받았고, 구출위원회는 비슬리케니와 친위대 정보부원 몇 명을 만나는 특권을 얻는 데에만 2만 달러를 지불했다.
비슬리케니는 이른바 유럽 계획이라는 것을 다시 끄집어냈다.
이 계획(1942년 제안) 에 따르면 힘러가 폴란드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유대인에게 몸값으로 200만 내지 300만 달러를 받고 살려준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이 일을 하는 가운데 재정적으로 이익을 취했다는 점은 입증할 수 없었지만 검찰은 아이히만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생활수준이 아주 높은 것을 적절히 강조했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단체가 있었는데, 그 지도자는 적어도 자기기만에 적게 빠져 있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늘 헝가리에서는 특히 강력했다
구호구출위원회(Vaadat Ezra va Haxalah)는 팔레스타인 사무실과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었으며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유고슬 라비아와 루마니아에서 온 난민들을 돕고 있었다.
이 위원회는 자신의 활동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미국연합기부위원회와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 소수의 유대인을 합법적 또는 불법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 위원회는 세례 증명서인 '크리스천 서류‘를 위조해서 그것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지하에 은닉한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전쟁이 한창일 때 유대인 100만 명의 생명을 1만 대의 트력과 바꾸자는 힘러의 제안을 연합군 측에 제시하기 위해 파견된 불행한 밀사 조엘 브란트는 구호구출위원회의 지도적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리프 폰 프로이디거와 마찬가지로 아이히만과의 이 거래에 대해.... 브란트가 들었던 것은 '한 이상주의적 독일인이 지금 이상주의적인 유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온주의자들과의 만남에서는 아이히만이나 다른 특별 돌격대원들이
유대인위원회 위원들을 이용하기 위해 순전한 거짓말 전
략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언어규칙'도 유예되었다
구호구출위원회가 필요한 국제적 연결을 갖고 있었기에 보다 쉽게 외환을 민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헝가리의 시온주의자 대표들은 유대인위원회 위원들에게 부여된 통상적인 일시적 구속 및 이송 면책권보다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유대인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은 빈과 프라하, 베를린에서의 경험이 있는 아이히만에게는 단 2주면 되는 일이었다.
형가리에서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그 자신이 직접 계약을 성사시길 수 있 었다는 것이다. 처음 관계된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아이히만은 모든 일들, 즉 각 지역에서의 포고령 반포와 유대인의 집결 등의 일을 '번개와 같은 속도’로 확실히 진행할 수 있었다.
문제는 거의 50만 명의 유대인의 수송을 포함하고 있었다.
가스실에 투입된 죽음의 소대의 수는 224개에서 860개로 증가했으며,
하루에 6000명에서 1만 2000명을 죽일 수 있는 모든 준비가 이루어졌다.
열차가 도착하기 시작한 1944년 5월에 극소수의 '일할 수 있는 남자‘가 사역하기 위해 뽑혔고 이 소수의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에 있는 크루프의 휴즈 회사에서 일했다.
헝가리에서의 모든 작전은 두 달이 채 안 되게 진행되다가 7월에 들어서자 곧 중지되었다.
주로 시온주의자들 덕분에 이 작전은 유대인의 파국의 어떤 다른 국면보다도 더 잘 공론화되었다.
그래서 호르티에게는 중립 국가들과 바티칸으로부터 항의가 쇄도했다.
그러나 교황전권 대사는 바티칸의 저항이 '잘못된 동정심’(‘무자비한 강인성’ 대비) 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3만 3000명의 유대인이 중립국의 보호하에 부다페스트의 특별 가옥에서 살았다.
따라서 모든 측면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호르티는 이송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헝가리를 떠나 아우슈비츠로 가는 마지막 열차인 것 같다.
1944년 8월 에 붉은군대가 루마니아에 있었는데, 아이히만은 그곳으로 그의 가망 없는 일을 하러 갔었다. ... 자신들이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인들이 부다페스트에서 불과 100마일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자 나치스는 호르티 정부를 전복하여 활 십자가인 리더 페렌츠 잘라시를 국가수반으로 임명하는 데 성공했다.
학살 시설이 거의 해체될 지경이었으므로 더 이상의 운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같은 때 독일의 노동력 부족 상황은 점차 심각해졌다.
이제 5만 명의 유대인(남자16-60, 여자40세 이하)을 제국으로 이송시키는 허가를 얻기 위해 형가리 내 무장관과 협상한 사람은 제국 전권대사 베젠마이어였다.
1944년 11월에 도보행진이 시작되었다
철도 시설이 더 이상 있지 않기 때문에 1944년 11월에 도보행진이 시작되었다.
원래 80만 명의 유대인 인구 가운데 대략 16만 명 경도가 부다페스트 게토에서 살아남은 것 같고, 이 가운데 수만 명은 임의의 학살 희생자가 되었다.
1945년 2월13일 이 나라는 붉은군대에 항복했다.
이 학살에 대한 헝가리의 주요 피의자들은 모두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슬로바키아는 크로아티아와 마찬가지로 독일 외무성의 창작품이었다.
슬로바키아인들은 1939년 3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기 전에 ‘독립’을 위해 스스로 베를린에 왔다.
이때 그들은 괴링에게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데 독일을 충실히 따를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때는 어느 누구도 최종 해결책에 대해 듣지 못한 1938~39년 겨울이었다,
당시 이 나라는 가톨릭 사제인 조제프 티소(Josef Tiso) 신부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성직자 파시스트들 또는 파시스트 성직자들의 열렬한 반유대주의는 그들의 스승 독일의 초현대적 인종차별주의와는 스타일과 내용 모두에서 달랐다.
나치스는 당연히 원칙적으로 반유대적인 만큼이나 반기독교적이었다.
슬로바키아인이 기독교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영세받은 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을 나눈다.
이 모든 문제를 중세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다
그들에게 '해결책'이란 유대인을 추방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뺏는 것을 의미하지, 그들이 때때로 살인을 꺼리지는 않으나 체계적인 '학살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독립'한 지 처음 1년 반 동안 슬로바키아인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주했다.
그들은 대규모 유대인 기업을 비유대인에게 넘겼다
결론적으로 그(총돌격대장, 비슬리케니)는 친위대에서 이주 처음으로 '온건한‘ 경향을 발전시킨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이히만이 2만명의 '노동할수 있는 젊고 강한 유대인을 소개하는 협상을 위해 브라티슬라바에 나타났을 때인 1942년 3 월까지 슬로바키아에서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4주일 후 하이드리히 자신이 지금까지 예외시킨 개종한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을 동부지역에 재정착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보이텍 투카 수상을 만나러 왔다.
성직자를 수장으로 하는 이 정부는 종교를 이유로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는 '근본 결함을 수정하는 데 아무런 꺼림이 없었다,
그래서 1942년 6월까지 5만 2000명의 유대인이 슬로바키아 경찰에 의해 폴란드의 학살센터로 이송되었다.
이 나라에는 아직도 약3만 5000명의 유대인이 남아 있고 이들 모두는 예외 범주에 속해 있었다. 바로 이때, 즉 대부분의 유대인이 이미 '재정착'되있을 때, ... 브리티슬라바 유대인구호구출위원회가 비슬리키니를 매수하여 이송 속도를 늦추는 데 합의하고 또 이른바 유럽 계획도 제안했다.
바로 이때 바티칸은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재정착’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1943년 12월 에드문트 베젠마이어 박사가 티소 신부(슬로바키아 통치자)를 직접 만나러 브라티슬라바에 왔다.
티소는 1만 6000명에서 1만 8000명의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을 집단수용소에 넣을 것과 약 1만 명의 영세받은 유대인을 위한 특별수용소를 만들 것을 약속했지만 그는 이송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제 형가리의 제국 전권대사가 된 베젠마이어는 1944년 6월에 다시 나타나 이 나라에 남아 있는 유대인을 헝가리 작전에 포함시키라고 요구했다.
티소는 다시 거부했다.
붉은군대가 점차 다가옴에 따라 1944년 8월에 폭동이 슬로바키아 전역에서 일어나 독일은 이 나라를 점령했다.
제국중앙보안본부는 남은 유대인을 체포하여 이송하기 위해 알로이스 브루너를 브라티슬라바로 보냈다.
브루너는 먼저 구호구출위원회 직원들을 체포하여 이송했고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독일 비밀경찰대의 도움을 받아 또 다른 1만 2000명 또는 1만 4000명을 이송했다.
The End. 2022.10.31
- 제10장 서유럽으로부터의 이송;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텐마크, 이탈리아
제3제국의 지도자들이 극찬한 특성인 '무자비한 강인성'은
여하튼 '유대인 문제 고문관으로 아이히만 사무실에서 다른 나라로 파견된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덕성을 최고도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즉 1941~42년 가을과 겨울, 그들의 주요 임무는 해당국의 다른 독일인 관료들, 특히 명목상의 독립국에 있는 독일 대사들과 점령 지역에 있는 제국 최고 책임자들과 만족할 만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두 경우 모두 유대인 문제에서 사법권에 대해서는 항상 갈등이 있었다.
1942년 6월 아이히만은 프랑스와 벨기에 및 네덜란드에 있는 고문관을 이들 나라로부터의 이송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소환했다.
프랑스, 비시 경부는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특별부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그 수장은 처음에는 자비에 발랑이, 그리고 다르퀴에 드 펠레푸아가 담당했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유명한 반유대주의자들이었다.
몸든 인구 계층에 퍼져 있던 강력한, 일반적으로 국수주의적 성향의 인종중심주의와 직결된 프랑스 판 반유대주의의 허용에 따라 외국계 유대인에 대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1942년 이래로 외국계 유대인 절반 이상이 무국적 상태가 되었다.
그 작전은 대략 10만 명의 무국적 유대인을 이송하는 것으로 시작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는 비시 정부의 동의뿐만 아니라 프랑스 경찰의 능동적인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이들은 독일에서 치안경찰이 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외국계 유대인은 프랑스에서는 항상 문젯거리”였으며,
따라서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제거할 기회를 프랑스에게 부여한 독일의 태도 변화를 기뻐했기” 때문이었다. 라발(수상)과 페탱(원수)은 이 유대인이 동부에서 재정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은 덧붙여 두어야 한다. 그들은 '재정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1942년 여름에 일어났다.
(1) 첫째 사건은 7월 15일에 보르도를 출발하기로 한 기차와 관련된 일이었다. 겨우 150명의 무국적 유대인만이 보르도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아주 흥분을 했고, 그의 부하들에게 이 일이 '특권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가 원했다면 ‘프랑스를 누락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2)두 번째 사건은 ...이미 아유수비츠로 이송된 부모와 떨어진 4000명의 아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프랑스 돌격대장) 단네커에게 전화를 걸어 “열차편을 [폴란드의] 일반정부로 다시 급파하자마자 아이들을 수송할 수 있도록 하라' 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6세 이하의 아이들도 수송되어야 한다 고 제안한 사람은 라발 자신이었음을 ... 이 모든 섬뜩한 에피소드가 상부명령의 결과조차도 아니고 프랑스와 독일의 최고위급에서 협상한 결과였다는 점이다.
1942년 여름과 가을 동안 2만 7000명의 무국적 유대인(파리에서 1만 8000명, 비시 정부에서 9000명)이 아우수비츠로 이송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유대인을 독일인에게 인도하기를 완강히 거부한 것이다.
'재정착에 대한 최초의 소문이 프랑스에 도달했다.
반유대주의자들조차도 대량학살의 공범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열심히 생각해보았던 조치, 즉 1927년 이후(또는 1933년 이후)에 유대인에게 부여한 귀화권의 박탈 조치를 취하기를 거부했다.
프랑스로부터 유대인을 소개시키려는 모든 야심찬 계획들이 사실상 '취소되어야 했다.
수만 명의 무국적자들이 숨었고, 또한 수천 명이 이탈리아령의 프랑스 지역인 코테다주르로 도피했다.
1943년 여름. 독일이 유대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1944년 4월, 연합군이 프랑스에 발을 디디기 두 달 전에는 이 나라 안에 아직도 25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고, 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이 문제의 진실은 게슈타포 요원들조차도 무자비함과 연약함을 같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1942년 6월에 베를린에서 있었던 회의에서... 벨기에에서는 1만 명의 유대인이, 그리고 네덜란드에서는 1만 5000명이 가까운 장래에 체포되어 이송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쟁 발발 전에는 9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대략 3만 명은 독일계 유대인 난민들이었고. 5만 명이 다른 유럽 국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있다.
1940년 말까지 거의 4만 명의 유대인이 이 나라를 탈출했고, 남아 있던 5만 명 가운데 벨기에 태생인 시민은 기껏해야 5000명밖에 없었다. 게다가 탈출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주 중요한 유대인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어쨌든 외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귀화한 무국적 유대인 (체코, 폴란드, 러시아, 독일 출신으로,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아주 최근에 도착한 사람들이었음)은 쉽게 인지하는 것이 기능했고, 이 작고 완전히 산업화된 국가에서는 숨기가 이주 어려웠다.
1942년 말까지 1만 5000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1944년 가을까지, 즉 연합군이 이 나라를 해방시킬 때까지 총 2만 5000명이 살해되었다.
네덜란드로부터의 이송도 무국적 유대인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번 경우는 이 유대인 거의 모두가 독일로부터 온 난민들로, 전쟁 전의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바람직하지 않은 존재라고 공개적으로 선언된 사람들이었다.
전체 15만 명의 유대인 인구 가운데 외국계는 3만 5000명이었다.
이 작은 나라는 전적으로 독일의 처분에 달려 있었다.
(친위대 소속의 아이히만의) '고문’은 빌리 죄프이다.
그는 1941년 4월에 하이드리히에 의해 네덜란드로 파견되었다.
예루살렘의 검사는 한편으로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아이히만과 연관지으려는 목적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관료의 복잡한 업무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서 헤어나질 못해 이 모든 관료들이 아이히만의 명령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위층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는 힘러로부터 직접 지시만을 받았고, 당시 아직도 라자코비치가 아이히만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을 개연성은, 특히 그 후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사건에 비추어보아 거의 없다.
아이히만은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진 조정상태에 대해 특히 화가 났다.
왜냐하면 아이히만 자신의 이송 시각을 상당히 곤란하게 만든 사람들이 현장에 있던 요원들이었다.
아이히만의 콧대를 꺾어 놓은 사람이 바로 힘러 자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의 마지막 충돌은 1944년에 일어났다.
세파르디계 유대인은 비록 살로니카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는 했어도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태생의 세파르디계 유대인은 면제가 되었다.
힘러가 네덜란드에서 자신의 고위층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들을 통해 일하기를 선호한 이유는 단순하다. 이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일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독일로부터 온 난민들에 대한
네덜란드 정부의 아주 비우 호적인 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네덜란드에서의 반유대주의가 외국계 유대인을 향한 것이라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이것은 나치스가 유대인위원회를 상대적으로 쉽게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유대인위원회는 오랫동안 오직 독일계 유대인과 외국계 유대인만이 이송의 희생물이 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면서 존속했다.
또 친위대가 네덜란드의 경찰병력뿐만 아니라 유대인 경찰력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비록 폴란드에서와는 달리 네덜란드 국민들은 수많은 유대인을 숨도록 허용하는 태도를 가졌지만, 그러나 숨어 지내던 상당수의 유대인, 적어도 그들의 절반 가량이 결국 발각되었다.
1944년 7월까지 11만 3000명의 유대인이 이송되어
이들 대부분은 폴란드의 루블린 지역의 버그 강변에 있는 소비보르로 갔다
네덜란드에 살던 전체 유대인의 4분의 3이 살해되었는데 여기에는 네덜란드 태생의 원주민 유대인의 3분의 2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4년 가을에 마지막 이송이 이루어졌다
숨어서 살아남은 1만 명의 유대인 가운데 약 75퍼센트가 외국계였다.
반제회의에서 외무성의 마르틴 루터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잠시 동안 철수할 것을 제안했다.
이 일은 덴마크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는 독립 정부가 있었고, 비록 1940년 4월에 독일 군대가 침공하기는 했어도 1943년 가을까지는 중립국으로 존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덴마크에서는 언급할 가치가 있는 파시스트나 나치스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협력자도 없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에서 독일인들은 열정적인 지지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스웨덴이 처벌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망명을 허용하고 때로는 스웨덴 국적까지도 허용한 것이다.
한 나라에서 불법적으로 떠나는 것은 항상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지만,
허가 없이 피란지를 찾거나 이주 당국을 속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덴마크 유대인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하며, 덴마크인들과 덴마크 정부의 행위는 유럽의 모든 나라들 가운데 독특한 것이었다.
분명히 유럽의 몇몇 다른 나라에서는 적절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고,
따라서 사실상 그들 대부분은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해결책에는 반대했다.
덴마크와 마찬가지로 스웨덴과 이탈리아, 불가리아도 반유대주의에 거의 면역되어 있었지만 이 세 나라는 독일의 영향권에 있었고, 그래서 오직 덴마크인들만 그들의 주인인 독일인들에게 이 주제에 대해 감히 소리내어 말할 수 있었다.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대략 6400명의 유대계 덴마크인들과, 전생 이전에 이 나라로 망명을 왔고 이제는 독일 정부에 의해 무국적자라고 선언받은 1400명의 독일계 유대인 난민들을 구별하는 아주 중요한 조치를 독일인들이 도입하지도 못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귀화를 단적으로 부정하고 노동허가조차 주지 않은 사람들을 정부가 보호하는 것은 아주 '비논리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덴마크인들은 무국적 난민들이 더 이상 독일 시민이 아니기 때문 에 나치스는 덴마크의 동의 없이 그들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없다고 독일 관리인들에게 말했다.
유대인을 구한 것이 무국적성 자체가 아니라 그 반대로 덴마크 정부가 그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살인을 위한 관료제의 수립을 위해 그토록 중요한 그 어떠한 예비 적 조치들도 수행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작전은 1943년 가을까지 연기되었다.
1943년 8월 스웨덴 정부는 독일 군대가 자국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독일과의 1940년 협정을 파기했다.
덴마크 조선소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거기서 조선 노동자들은 독일 배의 수리를 거부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힘러는 이때가 오랫동안 미루어져온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수행할 적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히만의 사무실에서 가장 뛰어난 한 사람을 덴마크로 보냈는데, 그는 필수적 자질인 '무자비한 강인성' 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어느 누구로부터도 고발당하지 않은 롤프 권터였다.
(제국 전권대사 베르너 베스트 박사) 베스트는 베를린으로 가서 모든 덴마크 출신 유대인이 그들의 소속에 관계없이 테레지엔슈타트로 보낸다는 약속을 얻었다.
운명의 날을 며칠 앞두고 베스트로부터 정보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한 독일인 운송담당자 게오르크 F. 두크비츠가 모든 계획을 덴마크 정부 관리들에게 폭로했고, 이들은 다시 서둘러서 유대인 공동체 수장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만일 덴마크인들이 스웨덴을 이웃한 축복을 받지 않았더라면 유대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유대인이 스웨덴으로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였고, 이 일은 덴마크 어부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의 경우 유대인은, 1인당 5000달러 내지 1 만 달러에 해당되는 금액을 오직 현금으로만 받고 탈출허가증을 판 친위대의 '합법적인’ 협정을 해서 결국 자신의 재산을 다 바쳐야 했다.
덴마크와 스웨덴을 갈라놓은 5마일 내지 15마일의 바다를 가로질러 10월 어느 좋은 날 모든 유대인을 싣고 페리호는 떠났다.
스웨덴은 5919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는데, 이 가운데 적어도 1000명은 독일 태생이었고 1310명은 반쪽 유대인이었으며, 686명은 유대인과 결혼한 비 유대인이었다.
비덴마크계 유대인은 이전보다 살기가 나아졌고, 모두가 노동허가를 받았다. 독일경찰이 체포한 수 백 명의 유대인은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송되었다.
이 모든 일이 지났을 때 아이히만이 숙고해서 내린 의견은 “여러 이유에서 덴마크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행동은 실패였다”
정치적으로 또 심리학적으로 이 사건의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덴마크 내의 독일 당국이 취한 역할, 즉 베를린으로부터 온 명령에 대해 그들이 명백히 사보타주를 했다는 것이다.
그들 자신은 분명히 민족 전체의 처형을 더 이상 당연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이 재판에서 피고들은 서로를 고발하고 배신했으며.
자신들은 “항상 거기에 반대했다'고 세상을 납득시키려 하거나
또는 아이히만이 그런 것처럼 자신들의 최상의 재능이 상관들에 의해 “오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권력에 있는 자를 이 자신의 “복종심”을 오용했다고 고발했다. “좋은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행운이고, 나쁜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불운이다. 나는 운이 없었다”)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나치 이데올로기를 옹호할 용기를 갖지 않았다.
베르너 베스트는 뉘른베르크에서 자신은 복잡한 이중역할을 수행했다고,
그리고 덴마크 관리들이 임박한 파국에 대해 경고를 받은 것은 자기 덕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진정으로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을 덴마크 법정이 만족할 만큼 입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탈리아는 독일에게 유럽 내의 유일한 진정한 동맹이었고, 동등한 취급을 받았으며 주권 독립국가로 존중을 받았다.
나치스가 이탈리아의 파시즘보다 스탈린식의 공산주의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솔리니의 편에서는 독일에 대한 큰 신뢰나 히틀러에 대한 큰 경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전체주의의 국가형태와 파시즘적 국가형태 사이의 깊고 결정적인 차이점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세상에 전적으로 이해된 적은 없었다.
그 차이점들은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데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났다.
1943년 여름에 .. 아이히만과 그 요원은 ...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 이탈리아 방식을 프랑스와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등의 국가들의 이탈리아의 점령지에서 만났다.
처형될 유대인이 끊임없이 이 지역으로 탈출했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임시 망명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이히만보다 훨씬 높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최종 해결책에 대한 이탈리아의 사보타주가 상당히 심각하게 다가왔는데
이는 주로 유럽의 다른 파시스트 정부(프랑스의 페탱, 헝가리의 호르티,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 스페인의 프랑코)에 대한 무솔리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만일 이탈리아가 자국의 유대인을 살려두기를 중지하지 않는다면
독일의 위성 국가들도 동일한 시도를 할 것 같았다.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대략 5만 명의 유대인이 안전하게 지내고 있었다.
독일의 상당한 압력으로 이탈리아인 '유대인 문제 최고책임관이 임명되었는데, 그의 유일한 임무는 이 지역의 모은 유대인을 등록받아 지중해 연안으로 추방시키는 것이었다.
2만 2000명의 유대인이 체포되어 이탈리아 지역 내부로 이송되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가장 거친 요원 가운데 한 사람인 알로이스 브루너를 니스와 마르세유로 보냈다.
제국중앙보안본부에서 일종의 조사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하튼 유대인은 거기에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탈리아 내의 인전한 곳으로 달아났고, 주변 산에 숨이 있던 사람들은 스위스나 스페인으로 갔다.
이탈리아인들이 유고슬라비아의 점령지를 포기했을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유대인은 이탈리아 군대와 함께 떠났고 피우메에서 피난지를 찾았다.
독일의 압력을 받은 무솔리니가 1930년대 후반에 반유대적 법률을 도입 했을 때 그는 통상적인 예외를 약속했지만, 그는 한 범주, 즉 과거의 파시스트당의 요원과 그의 부모와 조부모, 아내와 자녀 및 증손을 추가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이탈리아 유대인이 예외가 되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대인이 다른 이탈리아인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20년 동안 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했을 때 일어난 것이기 때문인데,
이때 공무원직은 오직 파시스트 당원만이 할 수 있었다.
파시스트에 반대한 유대인, 주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더 이상 이 나라에 있지 않았다.
아이히만도 언급했지만, 보통의 친위대원 가운데도 유대인이 있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수수께끼의 열쇠는 이탈리아가 실제로 유럽 국가들 가운데, 모든 반유대적 조치들이 단정적으로 인기가 없었던 몇 안 되는 국기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무자비한 강인성‘에서 압도되지 않을 이탈리아 파시즘은 이 국가에서 전쟁 발발 전에 외국계 및 무국적 유대인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그 시도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생사의 문제와 연관된 일에 대해서는 그들은 자신의 주권을 유지한다는
구실로 이와 관계된 유대인 주민들을 버리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이 외국인들은 자국민 사이의 민족적, 문화적 동질성에 기초한 모든 유럽의 민족국가에서 그러한 것처럼, 자연적으로 이탈리아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덴마크에서 진정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귀결, 즉 시민과 독립의 전제조건 및 책임에 대한 타고난 이해였던 것이 이탈리아에서는 오랜 문명화된 민족의 거의 자동적인 일반적 인류애(humanity)의 산물이었다.
1943년 12월 독일 외무성이 아이히만의 상관인 뮐러의 도움을 공식적으로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탈리아에 독일 관리들의 감독 하에 두는 것이 긴급하고도 필수적이라고 여긴다”
이에 따라 루블린 지역의 죽음의 수용소 출신 오딜로 글로보크니크와 같은 유명한 유대인 킬러들이 이탈리아로 피송되었다.
아이히만의 사무실에서는 예하 부서에 '이탈리아 국적의 유대인은 즉각적으로 '필요한 조차를 따라야 한다’ 는 회람 통지를 내렸다.
그리고 최초의 타격은 로마에 있는 8000명의 유대인에게 가해졌는데, 이들은 이탈리아 경찰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온 독일 경찰 부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제는 이탈리아 유대인이 비록 면제 대상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지만 이송되지는 않았고 이탈리아 수용소에 수용되기만 했다. 이 '해결책은 이탈리아에는 충분히 '최종적'이었던 것 같다.
1944년 봄 독일인들은 약속을 깨고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간 7500명 가운데 겨우 600명만이 돌아 왔다.
제11장 발칸 지역으로부터의 이송;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루마니아
제국(북으로는 러시아 제국, 남으로는 오스트리아-형가리 제국, 남동으로는 터키 제국)의 점령 하에서 수세기 동안 살아온 수많은 민족 집단들에게는 새로운 정치적 질서가 부여되었다.
그 결과 생겨난 민족국가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정치적 제도의 모범으로 삼은 구 유럽 국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적 동질성을 비슷하게라도 가진 나라는 한 나라도 없었다.
그 결과 이 나라들은 현 정부에 격렬히 적대적인 거대한 민족 집단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민족적 열망은 자신들보다 약간 더 많은 수의 이웃들에 의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1939년 3월에 프라하로 행진해 들어갔을 때 그는 독일 소수계인 수데텐도이치족뿐만 아니라 슬로바키아족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는데, 슬로바키아족은 히틀러로부터 '독립'국가 제안을 받아 해방되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거기서 다수족이며 이 나라의 통치자가 된 세르비아는 적으로 간주되었고, 크로아티아 소수민족에게는 그 자신의 민족 정부가 주어졌다.
헝가리와 루마니아, 불가리아 자신의 영역을 관대하게 확정시킴으로써 (독일, 이탈리아, 일본) 추축국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새롭게 합병된 지역에 있는 유대인은 국민으로서의 지위가 거부되었다.
그들은 자동적으로 무국적 상태가 되었고, 따라서 서부 유럽의 난민들과 똑같은 운명을 겪게 되었다.
그들은 분명히 가장 먼저 이송되고 학살될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 시절에 붕괴된 것은 소수민족 조약들의 정교한 체계였다.
유대인은 모든 계승국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소수민족이었다.
서구의 교육받은 유대인' 귀족들 대다수는
일종의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자율성은 원했지만 정치적 자율성을 원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동부 유럽의 유대인은 동지나 적 모두에게서 분명한 하나의 민족으로 인정받았다.
동화를 하는 것이 하나의 규칙처럼 된 서부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지위를 갖게 해주었다.
서부와 중부 유럽에서는 중산층 유대인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특징인데, 동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동부는) 중상층 가족들로 이들은 실제로는 지배계층에 속했고, 그들의 이방 사회에 대한(돈과 세례, 종족간 결혼을 통한) 동화의 정도는 서부의 대부분의 유대인의 동화 정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정부 설립 3주 후에 아주 의무감을 가지고 반유대인 법안을 도입했다.
그리고 독일에 있는 수십 명의 크로아티아계 유대인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정부는 그들이 '동부로 이송되는 것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송작업은 크로아니아인들 자신, 특히 강력한 파시스트 운동의 요원인 우스타쉐 당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인들은 나치스에게 각 유대인의 이송비로 30마르크씩 지불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이주지들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
국가는 자신의 국경 안에 머무르다 살해당한 유대인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래서 1943년 가을까지 3만 명의 유대인이 죽음의 센터로 이송되었다.
그제야 독일인들은 이 나라가 아직도 유대인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로아티아의 거의 모는 지배자들이 유대인과 결혼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의 유대인 가운데 살아남은 1500여 명은 분명히 모두가 이처럼 고도로 동화된, 그리고 극도로 부유한 유대인 집단이었다.
“세르비아 유대인을 다루는 일상적 명령 체계가 우리에게는 아주 분명하게 인지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어떠한 유대인도 이송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모두 현장에서 해결되었다.
1942년 8월에 군사정부 민간인 부서장인 하랄 투르너 추밀원 고문관은 자부심에 차서 세르비아는 ‘유대인 문제와 집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유일한 나라’라고 보고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피하고 자신이 죄를 범한 나라에서도 재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거나 독일의 법정에서 가능한 최고의 '이해‘를 얻었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일을 떠올렸는데, 그 공화국이 한 일이라고는 정치적 살인자가 폭력적인 반공화국적 우파 단체에 속해 있다면 그 살인행위를 용서해 주는 것이었다.
불가리아는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그리스를 대가로 상당한 정도의 영토를 확장했다.
반유대주의가 집단마다 강력히 퍼져 있던 혼합 민족지역 가운데 속하는 불가리아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도무지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1941년 1월에 불가리아 정부는 ... 대략 1만 5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5000명의 유대인이 추가로 특권(유대인인 개종하면 면제 부여)을 부여받았다.
1942년 1월에 아이히만은 ... 불가리아 정부에 접근하여 소피아에 있는 경찰 무관이 “이송을 기술적으로 완료하도록 할 것” 이라는 점을 외무성에 분명히 말할 것을 제안했다.
불가리아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과업에 최고 우선권이 주어졌던 것은 어떤 일이든 달성하려면 상당한 속도가 필수적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베를린이 입수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서야 그들은 '근본적' 조치의 방향으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1942년 11월에 ... 독일의 큰 압력을 받은 불가리아 정부는 결국 모든 유대인을 소피아에서 변방 지역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그 조치는 유대인을 집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의회와 민중이 분명히 유대인을 편들고 있었다.
단네커, 그는 공개적으로“신이 유대인의 운명을 결정했고, 인간이 유대인을 고문하고 처형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 고 선언했다.
여러 민족들이 섞여서 살고 있는 지역에서 독특한 경우에 해당하는
불가리아인들의 행위에 대해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나는 알지 못한다.
독일인들에게 북쪽을 점령당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 남쪽이 점령당한 그리스는 어떤 특별한 문제를 야기기하지 않고 따라서 그 나라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순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943년 2월 아이히만의 두 전문가는 살로니카에서...유대인을 이송시키기 위한 모든 준비를 위해 도착했다.
그곳은 그리스계 유대인의 3분의2인 약5만 5000명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지역이었다.
이것은 '유럽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의 근본를‘ 안에서 이루어진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특권을 받은 계층은 외국 여권을 가진 유대인과 늘 그렇듯 유대인위원회 요원들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합쳐서 수백 명을 넘지 않았다
같은 해(1943년) 가을, 이탈리아 군대가 괴멸했을 때 아테네와 그리스 섬들을 포함한 그리스 남부 지역 출신의 1만 3000명가량의 유대인의 소개가 신속히 완료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그리스계 유대인은 이른바 죽음의 부대에 고용되어 있었는데, 이 부대는 가스실과 화장터에서 작업을 했다.
(군당국을 대변했던, 전쟁관리위원) 메르텐 박사는 ...자기가 몰랐던 운명으로부터 유대인을 구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베를린에서 피고 측과 검찰 양쪽의 대리인이 임석한 가운데 한 피고를 위한 그의 증언도 상당히 독특했다.
아이히만이 살로니카에 있던 약 2만 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구하는데 상당히 도움을 주었으며, 또 모든 악한 일은 비슬리케니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아이히만 본인은 이 모든 것을 부인했다. 그는 살로니카에 가본 적도 없었고 도움을 준 메르텐 박사를 만난 적도 없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조직적 재능, 즉 그의 사무실에서 이루어진 소개와 이주에 대한 조정 작업이 사실상 희생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 차례 이상 주장했다.
그것이 유대인의 운명을 보다 쉽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은 자신이 '강제이주’를 통해 수만 명의 유대인의 생명을 구했다는 그의 어리석고도 집요한 주장과 길은 법주에 속하는 말이다.
루마니아에서는 친위대조차도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구식의 자발적인 유대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루마니아가 전쟁 전 유럽에서 가장 반유대주의가 심한 나라라고 하는 것은 거의 과장이 아니다.
심지어 19세기에도 루마니아는 반유대주의가 잘 구축된 것이 사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모든 루마니아계 유대인(수백 명에 해당하는 세파르디계 가족들과 일부 독일계 유대인은 예외)은 여전히 외국인 거주자 신분이었다.
이 때(1938년) 히틀러 독일의 힘을 신뢰한 루마니아인들은 소수자 협정(소수자 시민권 부여, 연합군이 설득)을 자신의 ‘주권’에 대한 강압으로 간주하여 무효를 선언함으로써 전체 유대인 인구의 약 4분의 1 되는 수십만 명의 유대인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하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을 갖게 했다.
1940년 8월,...새로운 철권 독재정부의 수장인 이온 안토네스쿠 제독(루마니아) 은 모든 루마니아 유대인이 무국적자라고 선포했다.
같은 그는 또한 독일을 포함한 전 유럽에서 가장 혹독한 반유대인 법을 제도화했다.
루마니아가 1941년 2월에 전쟁에 참전하여 루마니아 지역은 곧 있을 러시아 침공 시에 고려에 넣은 군사지역이 되었다.
오데사에서만 루마니아 병사들은 6만 명을 학살한 책임이 있었다.
루마니아 정부는 처음부터 동부에서 이루어지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아주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1941년 여름에도 루마니아 병사들은 같은 해 1월보다 작은 규모이지만...학
살과 이송 계획에 여전히 참여했다.
루마니아 스타일이란 5000명을 열차 화물칸에 발디딜 틈 없이 태우고는 여러 날 동안 목적지도 계획도 없이 교외를 계속 달리게 하여 질식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루마니아 공포의 강제수용소는 동부로의 이송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마니아인들 스스로 만들고 운영했는데, 우리가 독일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 어떤 일들보다도 더 교묘하고 잔혹한 것이었다.
아이히만 본인은 이 단계에서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한 이 같은 비조직적이고 비성숙한 루마니아의 노력을 중지해달라고 1942년 4월 외무성에 보낸 한 편지에서 탄원했다.
따라서 8월 중순(이때까지 루마니아인들은 거의 어떠한 독일의 도움 없이30만에 가까운 유대인을 죽였다)에 외무성은 안토네스쿠와 ‘유대인의 루마니아로부터의 소개 작업’을 독일 군대가 수행한다는 협정을 마쳤다.
그런데 킬링거 대사가 보고한 것처럼 제독(안토네스쿠)은 이제 유대인을 '편안한 방식으로' 제거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유대인을 현금(1인당 1300달러를) 받고 해외로 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루마니아인들은 유대인 이민에 대해 가장 열광적으로 집착했다.
이것이 바로 전쟁 기간 중 루마니아가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유대인을 이주시킨 몇 안 되는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된 이유이다.
붉은 군대가 다가옴에 따라 안토네스쿠는 훨씬 더 '온건'해져서, 이제는 기꺼이 유대인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안토네스쿠 제독이 처음부터 끝까지(히틀러가 생각한 것처럼) 나치스보다더' 철저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진행에 항상 한걸음만 앞서 있었다
그는 모든 유대인에게서 국적을 최초로 박탈했고, 또 나치스가 아직도 첫 실험을 하느라 분주했을 때 대량학살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또한 부끄러움 없이 자행하기 시작했다...
루마니아의 학살자들은 모두 정식으로 처형되었다.
제12장 중부유럽으로부터의 이송; 헝가리, 슬로바키아
옛날 옛적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헝가리의 왕이었고, 보다 최근인1806년 이후 다뉴브 지역에는 황제 같은 왕의 왕정이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왕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불안하게 지배되고 있었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 하에 있었던 1930년대 초에는 이른바 활 십자가인(Arrow Cross men)이라는 강력한 파시스트 운동이 일어났고, 1938년에는 이탈리아를 따라 그들의 첫 번째 반유대인 법들을 통과시켰다.
인종주의에 기초한 완전히 포괄적인 반유대주의가 공식적인 정부 정책이 되었을 때, 11명의 유대인이 의회 고위직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헝가리는 동부 전선에 유대인 부대(13만 명으로 비전투 지원부대였지만 헝가리 제복을 입었음)를 파병한 유일한 추축국이었다.
헝가리의 주권은 1944년 3월까지 나치스 정부가 존중해준 결과 유대인에게 이 나라는 '파괴의 대양' 가운데 있는 안전한 섬이 되었다.
베젠마이어가 1943년 12월에 외무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명시했듯이
유대인의 '전멸‘이 '헝가리가 전쟁에 참여하는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해결’은 80만 명의 유대인과 약 10만 또는 15만 명의 개종 유대인의 소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이 일의 중대성 때문에 1944년 4 월 전 부서원들과 함께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아이히만 특별 돌격대는 부다페스트에 본부를 차렸을 때 대략 10명의 요원들과 몇 명의 서기보조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바로 그날 밤에 아이히만과 그의 요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모임에 불러내어 유대인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설득했다.
이 위원회를 통하여 명령도 내리고, 그 대가로 헝가리의 모든 유대인에 대한 절대적 사법권을 부여하려고 했다.
교황 대사의 말처럼 이때는 “전 세계가 이송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 때였다.
유대인중앙위원회의 위원이 된 사람들은 이웃나라 슬로바키아로부터, 지금 자신들의 협상 대상자인 비슬리케니가 뒷돈을 잘 쟁기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고 또 모든 뇌물을 받고서도 그는“모든 슬로바키아의 유대인을 이송해버렸다...” 것도 알고 있었다.
이 같은 어려운 협상에서 발휘된 아이히만의 가장 영악한 속임수는 그와 그의 요원들이 부패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기만전술로 부패한 척했지만, 곧 실제상황이 되어 버렸다.
유대인이 그토록 많은 돈을 쓰고도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 이상한 카스의 씨의 말로 하자면, “자신의 목숨과 자기 가족의 목숨으로 떨고 있던 유대인은 돈에 대한 모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크루마이는 1944년 4월에 프로이디거로부터 25만 달러나 받았고, 구출위원회는 비슬리케니와 친위대 정보부원 몇 명을 만나는 특권을 얻는 데에만 2만 달러를 지불했다.
비슬리케니는 이른바 유럽 계획이라는 것을 다시 끄집어냈다.
이 계획(1942년 제안) 에 따르면 힘러가 폴란드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유대인에게 몸값으로 200만 내지 300만 달러를 받고 살려준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이 일을 하는 가운데 재정적으로 이익을 취했다는 점은 입증할 수 없었지만 검찰은 아이히만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생활수준이 아주 높은 것을 적절히 강조했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단체가 있었는데, 그 지도자는 적어도 자기기만에 적게 빠져 있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늘 헝가리에서는 특히 강력했다
구호구출위원회(Vaadat Ezra va Haxalah)는 팔레스타인 사무실과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었으며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유고슬 라비아와 루마니아에서 온 난민들을 돕고 있었다.
이 위원회는 자신의 활동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미국연합기부위원회와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 소수의 유대인을 합법적 또는 불법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 위원회는 세례 증명서인 '크리스천 서류‘를 위조해서 그것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지하에 은닉한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전쟁이 한창일 때 유대인 100만 명의 생명을 1만 대의 트력과 바꾸자는 힘러의 제안을 연합군 측에 제시하기 위해 파견된 불행한 밀사 조엘 브란트는 구호구출위원회의 지도적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리프 폰 프로이디거와 마찬가지로 아이히만과의 이 거래에 대해.... 브란트가 들었던 것은 '한 이상주의적 독일인이 지금 이상주의적인 유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온주의자들과의 만남에서는 아이히만이나 다른 특별 돌격대원들이
유대인위원회 위원들을 이용하기 위해 순전한 거짓말 전
략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언어규칙'도 유예되었다
구호구출위원회가 필요한 국제적 연결을 갖고 있었기에 보다 쉽게 외환을 민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헝가리의 시온주의자 대표들은 유대인위원회 위원들에게 부여된 통상적인 일시적 구속 및 이송 면책권보다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유대인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은 빈과 프라하, 베를린에서의 경험이 있는 아이히만에게는 단 2주면 되는 일이었다.
형가리에서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그 자신이 직접 계약을 성사시길 수 있 었다는 것이다. 처음 관계된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아이히만은 모든 일들, 즉 각 지역에서의 포고령 반포와 유대인의 집결 등의 일을 '번개와 같은 속도’로 확실히 진행할 수 있었다.
문제는 거의 50만 명의 유대인의 수송을 포함하고 있었다.
가스실에 투입된 죽음의 소대의 수는 224개에서 860개로 증가했으며,
하루에 6000명에서 1만 2000명을 죽일 수 있는 모든 준비가 이루어졌다.
열차가 도착하기 시작한 1944년 5월에 극소수의 '일할 수 있는 남자‘가 사역하기 위해 뽑혔고 이 소수의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에 있는 크루프의 휴즈 회사에서 일했다.
헝가리에서의 모든 작전은 두 달이 채 안 되게 진행되다가 7월에 들어서자 곧 중지되었다.
주로 시온주의자들 덕분에 이 작전은 유대인의 파국의 어떤 다른 국면보다도 더 잘 공론화되었다.
그래서 호르티에게는 중립 국가들과 바티칸으로부터 항의가 쇄도했다.
그러나 교황전권 대사는 바티칸의 저항이 '잘못된 동정심’(‘무자비한 강인성’ 대비) 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3만 3000명의 유대인이 중립국의 보호하에 부다페스트의 특별 가옥에서 살았다.
따라서 모든 측면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호르티는 이송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헝가리를 떠나 아우슈비츠로 가는 마지막 열차인 것 같다.
1944년 8월 에 붉은군대가 루마니아에 있었는데, 아이히만은 그곳으로 그의 가망 없는 일을 하러 갔었다. ... 자신들이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인들이 부다페스트에서 불과 100마일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자 나치스는 호르티 정부를 전복하여 활 십자가인 리더 페렌츠 잘라시를 국가수반으로 임명하는 데 성공했다.
학살 시설이 거의 해체될 지경이었으므로 더 이상의 운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같은 때 독일의 노동력 부족 상황은 점차 심각해졌다.
이제 5만 명의 유대인(남자16-60, 여자40세 이하)을 제국으로 이송시키는 허가를 얻기 위해 형가리 내 무장관과 협상한 사람은 제국 전권대사 베젠마이어였다.
1944년 11월에 도보행진이 시작되었다
철도 시설이 더 이상 있지 않기 때문에 1944년 11월에 도보행진이 시작되었다.
원래 80만 명의 유대인 인구 가운데 대략 16만 명 경도가 부다페스트 게토에서 살아남은 것 같고, 이 가운데 수만 명은 임의의 학살 희생자가 되었다.
1945년 2월13일 이 나라는 붉은군대에 항복했다.
이 학살에 대한 헝가리의 주요 피의자들은 모두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슬로바키아는 크로아티아와 마찬가지로 독일 외무성의 창작품이었다.
슬로바키아인들은 1939년 3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기 전에 ‘독립’을 위해 스스로 베를린에 왔다.
이때 그들은 괴링에게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데 독일을 충실히 따를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때는 어느 누구도 최종 해결책에 대해 듣지 못한 1938~39년 겨울이었다,
당시 이 나라는 가톨릭 사제인 조제프 티소(Josef Tiso) 신부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성직자 파시스트들 또는 파시스트 성직자들의 열렬한 반유대주의는 그들의 스승 독일의 초현대적 인종차별주의와는 스타일과 내용 모두에서 달랐다.
나치스는 당연히 원칙적으로 반유대적인 만큼이나 반기독교적이었다.
슬로바키아인이 기독교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영세받은 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을 나눈다.
이 모든 문제를 중세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다
그들에게 '해결책'이란 유대인을 추방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뺏는 것을 의미하지, 그들이 때때로 살인을 꺼리지는 않으나 체계적인 '학살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독립'한 지 처음 1년 반 동안 슬로바키아인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주했다.
그들은 대규모 유대인 기업을 비유대인에게 넘겼다
결론적으로 그(총돌격대장, 비슬리케니)는 친위대에서 이주 처음으로 '온건한‘ 경향을 발전시킨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이히만이 2만명의 '노동할수 있는 젊고 강한 유대인을 소개하는 협상을 위해 브라티슬라바에 나타났을 때인 1942년 3 월까지 슬로바키아에서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4주일 후 하이드리히 자신이 지금까지 예외시킨 개종한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을 동부지역에 재정착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보이텍 투카 수상을 만나러 왔다.
성직자를 수장으로 하는 이 정부는 종교를 이유로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는 '근본 결함을 수정하는 데 아무런 꺼림이 없었다,
그래서 1942년 6월까지 5만 2000명의 유대인이 슬로바키아 경찰에 의해 폴란드의 학살센터로 이송되었다.
이 나라에는 아직도 약3만 5000명의 유대인이 남아 있고 이들 모두는 예외 범주에 속해 있었다. 바로 이때, 즉 대부분의 유대인이 이미 '재정착'되있을 때, ... 브리티슬라바 유대인구호구출위원회가 비슬리키니를 매수하여 이송 속도를 늦추는 데 합의하고 또 이른바 유럽 계획도 제안했다.
바로 이때 바티칸은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재정착’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1943년 12월 에드문트 베젠마이어 박사가 티소 신부(슬로바키아 통치자)를 직접 만나러 브라티슬라바에 왔다.
티소는 1만 6000명에서 1만 8000명의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을 집단수용소에 넣을 것과 약 1만 명의 영세받은 유대인을 위한 특별수용소를 만들 것을 약속했지만 그는 이송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제 형가리의 제국 전권대사가 된 베젠마이어는 1944년 6월에 다시 나타나 이 나라에 남아 있는 유대인을 헝가리 작전에 포함시키라고 요구했다.
티소는 다시 거부했다.
붉은군대가 점차 다가옴에 따라 1944년 8월에 폭동이 슬로바키아 전역에서 일어나 독일은 이 나라를 점령했다.
제국중앙보안본부는 남은 유대인을 체포하여 이송하기 위해 알로이스 브루너를 브라티슬라바로 보냈다.
브루너는 먼저 구호구출위원회 직원들을 체포하여 이송했고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독일 비밀경찰대의 도움을 받아 또 다른 1만 2000명 또는 1만 4000명을 이송했다.
The End. 2022.10.31.
- 제10장 서유럽으로부터의 이송;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텐마크, 이탈리아
제3제국의 지도자들이 극찬한 특성인 '무자비한 강인성'은
여하튼 '유대인 문제 고문관으로 아이히만 사무실에서 다른 나라로 파견된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덕성을 최고도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즉 1941~42년 가을과 겨울, 그들의 주요 임무는 해당국의 다른 독일인 관료들, 특히 명목상의 독립국에 있는 독일 대사들과 점령 지역에 있는 제국 최고 책임자들과 만족할 만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두 경우 모두 유대인 문제에서 사법권에 대해서는 항상 갈등이 있었다.
1942년 6월 아이히만은 프랑스와 벨기에 및 네덜란드에 있는 고문관을 이들 나라로부터의 이송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소환했다.
프랑스, 비시 경부는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특별부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그 수장은 처음에는 자비에 발랑이, 그리고 다르퀴에 드 펠레푸아가 담당했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유명한 반유대주의자들이었다.
몸든 인구 계층에 퍼져 있던 강력한, 일반적으로 국수주의적 성향의 인종중심주의와 직결된 프랑스 판 반유대주의의 허용에 따라 외국계 유대인에 대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1942년 이래로 외국계 유대인 절반 이상이 무국적 상태가 되었다.
그 작전은 대략 10만 명의 무국적 유대인을 이송하는 것으로 시작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는 비시 정부의 동의뿐만 아니라 프랑스 경찰의 능동적인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이들은 독일에서 치안경찰이 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외국계 유대인은 프랑스에서는 항상 문젯거리”였으며,
따라서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제거할 기회를 프랑스에게 부여한 독일의 태도 변화를 기뻐했기” 때문이었다. 라발(수상)과 페탱(원수)은 이 유대인이 동부에서 재정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은 덧붙여 두어야 한다. 그들은 '재정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1942년 여름에 일어났다.
(1) 첫째 사건은 7월 15일에 보르도를 출발하기로 한 기차와 관련된 일이었다. 겨우 150명의 무국적 유대인만이 보르도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아주 흥분을 했고, 그의 부하들에게 이 일이 '특권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가 원했다면 ‘프랑스를 누락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2)두 번째 사건은 ...이미 아유수비츠로 이송된 부모와 떨어진 4000명의 아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프랑스 돌격대장) 단네커에게 전화를 걸어 “열차편을 [폴란드의] 일반정부로 다시 급파하자마자 아이들을 수송할 수 있도록 하라' 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6세 이하의 아이들도 수송되어야 한다 고 제안한 사람은 라발 자신이었음을 ... 이 모든 섬뜩한 에피소드가 상부명령의 결과조차도 아니고 프랑스와 독일의 최고위급에서 협상한 결과였다는 점이다.
1942년 여름과 가을 동안 2만 7000명의 무국적 유대인(파리에서 1만 8000명, 비시 정부에서 9000명)이 아우수비츠로 이송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유대인을 독일인에게 인도하기를 완강히 거부한 것이다.
'재정착에 대한 최초의 소문이 프랑스에 도달했다.
반유대주의자들조차도 대량학살의 공범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열심히 생각해보았던 조치, 즉 1927년 이후(또는 1933년 이후)에 유대인에게 부여한 귀화권의 박탈 조치를 취하기를 거부했다.
프랑스로부터 유대인을 소개시키려는 모든 야심찬 계획들이 사실상 '취소되어야 했다.
수만 명의 무국적자들이 숨었고, 또한 수천 명이 이탈리아령의 프랑스 지역인 코테다주르로 도피했다.
1943년 여름. 독일이 유대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1944년 4월, 연합군이 프랑스에 발을 디디기 두 달 전에는 이 나라 안에 아직도 25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고, 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이 문제의 진실은 게슈타포 요원들조차도 무자비함과 연약함을 같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1942년 6월에 베를린에서 있었던 회의에서... 벨기에에서는 1만 명의 유대인이, 그리고 네덜란드에서는 1만 5000명이 가까운 장래에 체포되어 이송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쟁 발발 전에는 9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대략 3만 명은 독일계 유대인 난민들이었고. 5만 명이 다른 유럽 국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있다.
1940년 말까지 거의 4만 명의 유대인이 이 나라를 탈출했고, 남아 있던 5만 명 가운데 벨기에 태생인 시민은 기껏해야 5000명밖에 없었다. 게다가 탈출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주 중요한 유대인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어쨌든 외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귀화한 무국적 유대인 (체코, 폴란드, 러시아, 독일 출신으로,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아주 최근에 도착한 사람들이었음)은 쉽게 인지하는 것이 기능했고, 이 작고 완전히 산업화된 국가에서는 숨기가 이주 어려웠다.
1942년 말까지 1만 5000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1944년 가을까지, 즉 연합군이 이 나라를 해방시킬 때까지 총 2만 5000명이 살해되었다.
네덜란드로부터의 이송도 무국적 유대인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번 경우는 이 유대인 거의 모두가 독일로부터 온 난민들로, 전쟁 전의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바람직하지 않은 존재라고 공개적으로 선언된 사람들이었다.
전체 15만 명의 유대인 인구 가운데 외국계는 3만 5000명이었다.
이 작은 나라는 전적으로 독일의 처분에 달려 있었다.
(친위대 소속의 아이히만의) '고문’은 빌리 죄프이다.
그는 1941년 4월에 하이드리히에 의해 네덜란드로 파견되었다.
예루살렘의 검사는 한편으로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아이히만과 연관지으려는 목적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관료의 복잡한 업무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서 헤어나질 못해 이 모든 관료들이 아이히만의 명령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위층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는 힘러로부터 직접 지시만을 받았고, 당시 아직도 라자코비치가 아이히만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을 개연성은, 특히 그 후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사건에 비추어보아 거의 없다.
아이히만은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진 조정상태에 대해 특히 화가 났다.
왜냐하면 아이히만 자신의 이송 시각을 상당히 곤란하게 만든 사람들이 현장에 있던 요원들이었다.
아이히만의 콧대를 꺾어 놓은 사람이 바로 힘러 자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의 마지막 충돌은 1944년에 일어났다.
세파르디계 유대인은 비록 살로니카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는 했어도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태생의 세파르디계 유대인은 면제가 되었다.
힘러가 네덜란드에서 자신의 고위층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들을 통해 일하기를 선호한 이유는 단순하다. 이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일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독일로부터 온 난민들에 대한
네덜란드 정부의 아주 비우 호적인 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네덜란드에서의 반유대주의가 외국계 유대인을 향한 것이라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이것은 나치스가 유대인위원회를 상대적으로 쉽게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유대인위원회는 오랫동안 오직 독일계 유대인과 외국계 유대인만이 이송의 희생물이 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면서 존속했다.
또 친위대가 네덜란드의 경찰병력뿐만 아니라 유대인 경찰력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비록 폴란드에서와는 달리 네덜란드 국민들은 수많은 유대인을 숨도록 허용하는 태도를 가졌지만, 그러나 숨어 지내던 상당수의 유대인, 적어도 그들의 절반 가량이 결국 발각되었다.
1944년 7월까지 11만 3000명의 유대인이 이송되어
이들 대부분은 폴란드의 루블린 지역의 버그 강변에 있는 소비보르로 갔다
네덜란드에 살던 전체 유대인의 4분의 3이 살해되었는데 여기에는 네덜란드 태생의 원주민 유대인의 3분의 2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4년 가을에 마지막 이송이 이루어졌다
숨어서 살아남은 1만 명의 유대인 가운데 약 75퍼센트가 외국계였다.
반제회의에서 외무성의 마르틴 루터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잠시 동안 철수할 것을 제안했다.
이 일은 덴마크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는 독립 정부가 있었고, 비록 1940년 4월에 독일 군대가 침공하기는 했어도 1943년 가을까지는 중립국으로 존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덴마크에서는 언급할 가치가 있는 파시스트나 나치스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협력자도 없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에서 독일인들은 열정적인 지지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스웨덴이 처벌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망명을 허용하고 때로는 스웨덴 국적까지도 허용한 것이다.
한 나라에서 불법적으로 떠나는 것은 항상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지만,
허가 없이 피란지를 찾거나 이주 당국을 속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덴마크 유대인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하며, 덴마크인들과 덴마크 정부의 행위는 유럽의 모든 나라들 가운데 독특한 것이었다.
분명히 유럽의 몇몇 다른 나라에서는 적절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고,
따라서 사실상 그들 대부분은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해결책에는 반대했다.
덴마크와 마찬가지로 스웨덴과 이탈리아, 불가리아도 반유대주의에 거의 면역되어 있었지만 이 세 나라는 독일의 영향권에 있었고, 그래서 오직 덴마크인들만 그들의 주인인 독일인들에게 이 주제에 대해 감히 소리내어 말할 수 있었다.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대략 6400명의 유대계 덴마크인들과, 전생 이전에 이 나라로 망명을 왔고 이제는 독일 정부에 의해 무국적자라고 선언받은 1400명의 독일계 유대인 난민들을 구별하는 아주 중요한 조치를 독일인들이 도입하지도 못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귀화를 단적으로 부정하고 노동허가조차 주지 않은 사람들을 정부가 보호하는 것은 아주 '비논리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덴마크인들은 무국적 난민들이 더 이상 독일 시민이 아니기 때문 에 나치스는 덴마크의 동의 없이 그들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없다고 독일 관리인들에게 말했다.
유대인을 구한 것이 무국적성 자체가 아니라 그 반대로 덴마크 정부가 그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살인을 위한 관료제의 수립을 위해 그토록 중요한 그 어떠한 예비 적 조치들도 수행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작전은 1943년 가을까지 연기되었다.
1943년 8월 스웨덴 정부는 독일 군대가 자국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독일과의 1940년 협정을 파기했다.
덴마크 조선소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거기서 조선 노동자들은 독일 배의 수리를 거부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힘러는 이때가 오랫동안 미루어져온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수행할 적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히만의 사무실에서 가장 뛰어난 한 사람을 덴마크로 보냈는데, 그는 필수적 자질인 '무자비한 강인성' 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어느 누구로부터도 고발당하지 않은 롤프 권터였다.
(제국 전권대사 베르너 베스트 박사) 베스트는 베를린으로 가서 모든 덴마크 출신 유대인이 그들의 소속에 관계없이 테레지엔슈타트로 보낸다는 약속을 얻었다.
운명의 날을 며칠 앞두고 베스트로부터 정보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한 독일인 운송담당자 게오르크 F. 두크비츠가 모든 계획을 덴마크 정부 관리들에게 폭로했고, 이들은 다시 서둘러서 유대인 공동체 수장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만일 덴마크인들이 스웨덴을 이웃한 축복을 받지 않았더라면 유대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유대인이 스웨덴으로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였고, 이 일은 덴마크 어부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의 경우 유대인은, 1인당 5000달러 내지 1 만 달러에 해당되는 금액을 오직 현금으로만 받고 탈출허가증을 판 친위대의 '합법적인’ 협정을 해서 결국 자신의 재산을 다 바쳐야 했다.
덴마크와 스웨덴을 갈라놓은 5마일 내지 15마일의 바다를 가로질러 10월 어느 좋은 날 모든 유대인을 싣고 페리호는 떠났다.
스웨덴은 5919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는데, 이 가운데 적어도 1000명은 독일 태생이었고 1310명은 반쪽 유대인이었으며, 686명은 유대인과 결혼한 비 유대인이었다.
비덴마크계 유대인은 이전보다 살기가 나아졌고, 모두가 노동허가를 받았다. 독일경찰이 체포한 수 백 명의 유대인은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송되었다.
이 모든 일이 지났을 때 아이히만이 숙고해서 내린 의견은 “여러 이유에서 덴마크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행동은 실패였다”
정치적으로 또 심리학적으로 이 사건의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덴마크 내의 독일 당국이 취한 역할, 즉 베를린으로부터 온 명령에 대해 그들이 명백히 사보타주를 했다는 것이다.
그들 자신은 분명히 민족 전체의 처형을 더 이상 당연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이 재판에서 피고들은 서로를 고발하고 배신했으며.
자신들은 “항상 거기에 반대했다'고 세상을 납득시키려 하거나
또는 아이히만이 그런 것처럼 자신들의 최상의 재능이 상관들에 의해 “오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권력에 있는 자를 이 자신의 “복종심”을 오용했다고 고발했다. “좋은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행운이고, 나쁜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불운이다. 나는 운이 없었다”)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나치 이데올로기를 옹호할 용기를 갖지 않았다.
베르너 베스트는 뉘른베르크에서 자신은 복잡한 이중역할을 수행했다고,
그리고 덴마크 관리들이 임박한 파국에 대해 경고를 받은 것은 자기 덕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진정으로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을 덴마크 법정이 만족할 만큼 입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탈리아는 독일에게 유럽 내의 유일한 진정한 동맹이었고, 동등한 취급을 받았으며 주권 독립국가로 존중을 받았다.
나치스가 이탈리아의 파시즘보다 스탈린식의 공산주의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솔리니의 편에서는 독일에 대한 큰 신뢰나 히틀러에 대한 큰 경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전체주의의 국가형태와 파시즘적 국가형태 사이의 깊고 결정적인 차이점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세상에 전적으로 이해된 적은 없었다.
그 차이점들은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데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났다.
1943년 여름에 .. 아이히만과 그 요원은 ...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 이탈리아 방식을 프랑스와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등의 국가들의 이탈리아의 점령지에서 만났다.
처형될 유대인이 끊임없이 이 지역으로 탈출했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임시 망명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이히만보다 훨씬 높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최종 해결책에 대한 이탈리아의 사보타주가 상당히 심각하게 다가왔는데
이는 주로 유럽의 다른 파시스트 정부(프랑스의 페탱, 헝가리의 호르티,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 스페인의 프랑코)에 대한 무솔리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만일 이탈리아가 자국의 유대인을 살려두기를 중지하지 않는다면
독일의 위성 국가들도 동일한 시도를 할 것 같았다.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대략 5만 명의 유대인이 안전하게 지내고 있었다.
독일의 상당한 압력으로 이탈리아인 '유대인 문제 최고책임관이 임명되었는데, 그의 유일한 임무는 이 지역의 모은 유대인을 등록받아 지중해 연안으로 추방시키는 것이었다.
2만 2000명의 유대인이 체포되어 이탈리아 지역 내부로 이송되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가장 거친 요원 가운데 한 사람인 알로이스 브루너를 니스와 마르세유로 보냈다.
제국중앙보안본부에서 일종의 조사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하튼 유대인은 거기에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탈리아 내의 인전한 곳으로 달아났고, 주변 산에 숨이 있던 사람들은 스위스나 스페인으로 갔다.
이탈리아인들이 유고슬라비아의 점령지를 포기했을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유대인은 이탈리아 군대와 함께 떠났고 피우메에서 피난지를 찾았다.
독일의 압력을 받은 무솔리니가 1930년대 후반에 반유대적 법률을 도입 했을 때 그는 통상적인 예외를 약속했지만, 그는 한 범주, 즉 과거의 파시스트당의 요원과 그의 부모와 조부모, 아내와 자녀 및 증손을 추가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이탈리아 유대인이 예외가 되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대인이 다른 이탈리아인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20년 동안 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했을 때 일어난 것이기 때문인데,
이때 공무원직은 오직 파시스트 당원만이 할 수 있었다.
파시스트에 반대한 유대인, 주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더 이상 이 나라에 있지 않았다.
아이히만도 언급했지만, 보통의 친위대원 가운데도 유대인이 있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수수께끼의 열쇠는 이탈리아가 실제로 유럽 국가들 가운데, 모든 반유대적 조치들이 단정적으로 인기가 없었던 몇 안 되는 국기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무자비한 강인성‘에서 압도되지 않을 이탈리아 파시즘은 이 국가에서 전쟁 발발 전에 외국계 및 무국적 유대인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그 시도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생사의 문제와 연관된 일에 대해서는 그들은 자신의 주권을 유지한다는
구실로 이와 관계된 유대인 주민들을 버리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이 외국인들은 자국민 사이의 민족적, 문화적 동질성에 기초한 모든 유럽의 민족국가에서 그러한 것처럼, 자연적으로 이탈리아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덴마크에서 진정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귀결, 즉 시민과 독립의 전제조건 및 책임에 대한 타고난 이해였던 것이 이탈리아에서는 오랜 문명화된 민족의 거의 자동적인 일반적 인류애(humanity)의 산물이었다.
1943년 12월 독일 외무성이 아이히만의 상관인 뮐러의 도움을 공식적으로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탈리아에 독일 관리들의 감독 하에 두는 것이 긴급하고도 필수적이라고 여긴다”
이에 따라 루블린 지역의 죽음의 수용소 출신 오딜로 글로보크니크와 같은 유명한 유대인 킬러들이 이탈리아로 피송되었다.
아이히만의 사무실에서는 예하 부서에 '이탈리아 국적의 유대인은 즉각적으로 '필요한 조차를 따라야 한다’ 는 회람 통지를 내렸다.
그리고 최초의 타격은 로마에 있는 8000명의 유대인에게 가해졌는데, 이들은 이탈리아 경찰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온 독일 경찰 부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제는 이탈리아 유대인이 비록 면제 대상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지만 이송되지는 않았고 이탈리아 수용소에 수용되기만 했다. 이 '해결책은 이탈리아에는 충분히 '최종적'이었던 것 같다.
1944년 봄 독일인들은 약속을 깨고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간 7500명 가운데 겨우 600명만이 돌아 왔다.
제11장 발칸 지역으로부터의 이송;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루마니아
제국(북으로는 러시아 제국, 남으로는 오스트리아-형가리 제국, 남동으로는 터키 제국)의 점령 하에서 수세기 동안 살아온 수많은 민족 집단들에게는 새로운 정치적 질서가 부여되었다.
그 결과 생겨난 민족국가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정치적 제도의 모범으로 삼은 구 유럽 국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적 동질성을 비슷하게라도 가진 나라는 한 나라도 없었다.
그 결과 이 나라들은 현 정부에 격렬히 적대적인 거대한 민족 집단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민족적 열망은 자신들보다 약간 더 많은 수의 이웃들에 의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1939년 3월에 프라하로 행진해 들어갔을 때 그는 독일 소수계인 수데텐도이치족뿐만 아니라 슬로바키아족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는데, 슬로바키아족은 히틀러로부터 '독립'국가 제안을 받아 해방되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거기서 다수족이며 이 나라의 통치자가 된 세르비아는 적으로 간주되었고, 크로아티아 소수민족에게는 그 자신의 민족 정부가 주어졌다.
헝가리와 루마니아, 불가리아 자신의 영역을 관대하게 확정시킴으로써 (독일, 이탈리아, 일본) 추축국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새롭게 합병된 지역에 있는 유대인은 국민으로서의 지위가 거부되었다.
그들은 자동적으로 무국적 상태가 되었고, 따라서 서부 유럽의 난민들과 똑같은 운명을 겪게 되었다.
그들은 분명히 가장 먼저 이송되고 학살될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 시절에 붕괴된 것은 소수민족 조약들의 정교한 체계였다.
유대인은 모든 계승국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소수민족이었다.
서구의 교육받은 유대인' 귀족들 대다수는
일종의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자율성은 원했지만 정치적 자율성을 원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동부 유럽의 유대인은 동지나 적 모두에게서 분명한 하나의 민족으로 인정받았다.
동화를 하는 것이 하나의 규칙처럼 된 서부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지위를 갖게 해주었다.
서부와 중부 유럽에서는 중산층 유대인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특징인데, 동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동부는) 중상층 가족들로 이들은 실제로는 지배계층에 속했고, 그들의 이방 사회에 대한(돈과 세례, 종족간 결혼을 통한) 동화의 정도는 서부의 대부분의 유대인의 동화 정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정부 설립 3주 후에 아주 의무감을 가지고 반유대인 법안을 도입했다.
그리고 독일에 있는 수십 명의 크로아티아계 유대인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정부는 그들이 '동부로 이송되는 것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송작업은 크로아니아인들 자신, 특히 강력한 파시스트 운동의 요원인 우스타쉐 당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인들은 나치스에게 각 유대인의 이송비로 30마르크씩 지불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이주지들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
국가는 자신의 국경 안에 머무르다 살해당한 유대인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래서 1943년 가을까지 3만 명의 유대인이 죽음의 센터로 이송되었다.
그제야 독일인들은 이 나라가 아직도 유대인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로아티아의 거의 모는 지배자들이 유대인과 결혼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의 유대인 가운데 살아남은 1500여 명은 분명히 모두가 이처럼 고도로 동화된, 그리고 극도로 부유한 유대인 집단이었다.
“세르비아 유대인을 다루는 일상적 명령 체계가 우리에게는 아주 분명하게 인지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어떠한 유대인도 이송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모두 현장에서 해결되었다.
1942년 8월에 군사정부 민간인 부서장인 하랄 투르너 추밀원 고문관은 자부심에 차서 세르비아는 ‘유대인 문제와 집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유일한 나라’라고 보고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피하고 자신이 죄를 범한 나라에서도 재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거나 독일의 법정에서 가능한 최고의 '이해‘를 얻었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일을 떠올렸는데, 그 공화국이 한 일이라고는 정치적 살인자가 폭력적인 반공화국적 우파 단체에 속해 있다면 그 살인행위를 용서해 주는 것이었다.
불가리아는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그리스를 대가로 상당한 정도의 영토를 확장했다.
반유대주의가 집단마다 강력히 퍼져 있던 혼합 민족지역 가운데 속하는 불가리아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도무지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1941년 1월에 불가리아 정부는 ... 대략 1만 5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5000명의 유대인이 추가로 특권(유대인인 개종하면 면제 부여)을 부여받았다.
1942년 1월에 아이히만은 ... 불가리아 정부에 접근하여 소피아에 있는 경찰 무관이 “이송을 기술적으로 완료하도록 할 것” 이라는 점을 외무성에 분명히 말할 것을 제안했다.
불가리아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과업에 최고 우선권이 주어졌던 것은 어떤 일이든 달성하려면 상당한 속도가 필수적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베를린이 입수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서야 그들은 '근본적' 조치의 방향으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1942년 11월에 ... 독일의 큰 압력을 받은 불가리아 정부는 결국 모든 유대인을 소피아에서 변방 지역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그 조치는 유대인을 집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의회와 민중이 분명히 유대인을 편들고 있었다.
단네커, 그는 공개적으로“신이 유대인의 운명을 결정했고, 인간이 유대인을 고문하고 처형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 고 선언했다.
여러 민족들이 섞여서 살고 있는 지역에서 독특한 경우에 해당하는
불가리아인들의 행위에 대해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나는 알지 못한다.
독일인들에게 북쪽을 점령당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 남쪽이 점령당한 그리스는 어떤 특별한 문제를 야기기하지 않고 따라서 그 나라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순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943년 2월 아이히만의 두 전문가는 살로니카에서...유대인을 이송시키기 위한 모든 준비를 위해 도착했다.
그곳은 그리스계 유대인의 3분의2인 약5만 5000명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지역이었다.
이것은 '유럽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의 근본를‘ 안에서 이루어진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특권을 받은 계층은 외국 여권을 가진 유대인과 늘 그렇듯 유대인위원회 요원들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합쳐서 수백 명을 넘지 않았다
같은 해(1943년) 가을, 이탈리아 군대가 괴멸했을 때 아테네와 그리스 섬들을 포함한 그리스 남부 지역 출신의 1만 3000명가량의 유대인의 소개가 신속히 완료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그리스계 유대인은 이른바 죽음의 부대에 고용되어 있었는데, 이 부대는 가스실과 화장터에서 작업을 했다.
(군당국을 대변했던, 전쟁관리위원) 메르텐 박사는 ...자기가 몰랐던 운명으로부터 유대인을 구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베를린에서 피고 측과 검찰 양쪽의 대리인이 임석한 가운데 한 피고를 위한 그의 증언도 상당히 독특했다.
아이히만이 살로니카에 있던 약 2만 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구하는데 상당히 도움을 주었으며, 또 모든 악한 일은 비슬리케니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아이히만 본인은 이 모든 것을 부인했다. 그는 살로니카에 가본 적도 없었고 도움을 준 메르텐 박사를 만난 적도 없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조직적 재능, 즉 그의 사무실에서 이루어진 소개와 이주에 대한 조정 작업이 사실상 희생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 차례 이상 주장했다.
그것이 유대인의 운명을 보다 쉽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은 자신이 '강제이주’를 통해 수만 명의 유대인의 생명을 구했다는 그의 어리석고도 집요한 주장과 길은 법주에 속하는 말이다.
루마니아에서는 친위대조차도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구식의 자발적인 유대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루마니아가 전쟁 전 유럽에서 가장 반유대주의가 심한 나라라고 하는 것은 거의 과장이 아니다.
심지어 19세기에도 루마니아는 반유대주의가 잘 구축된 것이 사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모든 루마니아계 유대인(수백 명에 해당하는 세파르디계 가족들과 일부 독일계 유대인은 예외)은 여전히 외국인 거주자 신분이었다.
이 때(1938년) 히틀러 독일의 힘을 신뢰한 루마니아인들은 소수자 협정(소수자 시민권 부여, 연합군이 설득)을 자신의 ‘주권’에 대한 강압으로 간주하여 무효를 선언함으로써 전체 유대인 인구의 약 4분의 1 되는 수십만 명의 유대인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하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을 갖게 했다.
1940년 8월,...새로운 철권 독재정부의 수장인 이온 안토네스쿠 제독(루마니아) 은 모든 루마니아 유대인이 무국적자라고 선포했다.
같은 그는 또한 독일을 포함한 전 유럽에서 가장 혹독한 반유대인 법을 제도화했다.
루마니아가 1941년 2월에 전쟁에 참전하여 루마니아 지역은 곧 있을 러시아 침공 시에 고려에 넣은 군사지역이 되었다.
오데사에서만 루마니아 병사들은 6만 명을 학살한 책임이 있었다.
루마니아 정부는 처음부터 동부에서 이루어지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아주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1941년 여름에도 루마니아 병사들은 같은 해 1월보다 작은 규모이지만...학
살과 이송 계획에 여전히 참여했다.
루마니아 스타일이란 5000명을 열차 화물칸에 발디딜 틈 없이 태우고는 여러 날 동안 목적지도 계획도 없이 교외를 계속 달리게 하여 질식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루마니아 공포의 강제수용소는 동부로의 이송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마니아인들 스스로 만들고 운영했는데, 우리가 독일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 어떤 일들보다도 더 교묘하고 잔혹한 것이었다.
아이히만 본인은 이 단계에서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한 이 같은 비조직적이고 비성숙한 루마니아의 노력을 중지해달라고 1942년 4월 외무성에 보낸 한 편지에서 탄원했다.
따라서 8월 중순(이때까지 루마니아인들은 거의 어떠한 독일의 도움 없이30만에 가까운 유대인을 죽였다)에 외무성은 안토네스쿠와 ‘유대인의 루마니아로부터의 소개 작업’을 독일 군대가 수행한다는 협정을 마쳤다.
그런데 킬링거 대사가 보고한 것처럼 제독(안토네스쿠)은 이제 유대인을 '편안한 방식으로' 제거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유대인을 현금(1인당 1300달러를) 받고 해외로 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루마니아인들은 유대인 이민에 대해 가장 열광적으로 집착했다.
이것이 바로 전쟁 기간 중 루마니아가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유대인을 이주시킨 몇 안 되는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된 이유이다.
붉은 군대가 다가옴에 따라 안토네스쿠는 훨씬 더 '온건'해져서, 이제는 기꺼이 유대인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안토네스쿠 제독이 처음부터 끝까지(히틀러가 생각한 것처럼) 나치스보다더' 철저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진행에 항상 한걸음만 앞서 있었다
그는 모든 유대인에게서 국적을 최초로 박탈했고, 또 나치스가 아직도 첫 실험을 하느라 분주했을 때 대량학살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또한 부끄러움 없이 자행하기 시작했다...
루마니아의 학살자들은 모두 정식으로 처형되었다.
제12장 중부유럽으로부터의 이송; 헝가리, 슬로바키아
옛날 옛적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헝가리의 왕이었고, 보다 최근인1806년 이후 다뉴브 지역에는 황제 같은 왕의 왕정이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왕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불안하게 지배되고 있었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 하에 있었던 1930년대 초에는 이른바 활 십자가인(Arrow Cross men)이라는 강력한 파시스트 운동이 일어났고, 1938년에는 이탈리아를 따라 그들의 첫 번째 반유대인 법들을 통과시켰다.
인종주의에 기초한 완전히 포괄적인 반유대주의가 공식적인 정부 정책이 되었을 때, 11명의 유대인이 의회 고위직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헝가리는 동부 전선에 유대인 부대(13만 명으로 비전투 지원부대였지만 헝가리 제복을 입었음)를 파병한 유일한 추축국이었다.
헝가리의 주권은 1944년 3월까지 나치스 정부가 존중해준 결과 유대인에게 이 나라는 '파괴의 대양' 가운데 있는 안전한 섬이 되었다.
베젠마이어가 1943년 12월에 외무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명시했듯이
유대인의 '전멸‘이 '헝가리가 전쟁에 참여하는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해결’은 80만 명의 유대인과 약 10만 또는 15만 명의 개종 유대인의 소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이 일의 중대성 때문에 1944년 4 월 전 부서원들과 함께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아이히만 특별 돌격대는 부다페스트에 본부를 차렸을 때 대략 10명의 요원들과 몇 명의 서기보조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바로 그날 밤에 아이히만과 그의 요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모임에 불러내어 유대인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설득했다.
이 위원회를 통하여 명령도 내리고, 그 대가로 헝가리의 모든 유대인에 대한 절대적 사법권을 부여하려고 했다.
교황 대사의 말처럼 이때는 “전 세계가 이송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 때였다.
유대인중앙위원회의 위원이 된 사람들은 이웃나라 슬로바키아로부터, 지금 자신들의 협상 대상자인 비슬리케니가 뒷돈을 잘 쟁기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고 또 모든 뇌물을 받고서도 그는“모든 슬로바키아의 유대인을 이송해버렸다...” 것도 알고 있었다.
이 같은 어려운 협상에서 발휘된 아이히만의 가장 영악한 속임수는 그와 그의 요원들이 부패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기만전술로 부패한 척했지만, 곧 실제상황이 되어 버렸다.
유대인이 그토록 많은 돈을 쓰고도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 이상한 카스의 씨의 말로 하자면, “자신의 목숨과 자기 가족의 목숨으로 떨고 있던 유대인은 돈에 대한 모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크루마이는 1944년 4월에 프로이디거로부터 25만 달러나 받았고, 구출위원회는 비슬리케니와 친위대 정보부원 몇 명을 만나는 특권을 얻는 데에만 2만 달러를 지불했다.
비슬리케니는 이른바 유럽 계획이라는 것을 다시 끄집어냈다.
이 계획(1942년 제안) 에 따르면 힘러가 폴란드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유대인에게 몸값으로 200만 내지 300만 달러를 받고 살려준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이 일을 하는 가운데 재정적으로 이익을 취했다는 점은 입증할 수 없었지만 검찰은 아이히만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생활수준이 아주 높은 것을 적절히 강조했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단체가 있었는데, 그 지도자는 적어도 자기기만에 적게 빠져 있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늘 헝가리에서는 특히 강력했다
구호구출위원회(Vaadat Ezra va Haxalah)는 팔레스타인 사무실과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었으며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유고슬 라비아와 루마니아에서 온 난민들을 돕고 있었다.
이 위원회는 자신의 활동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미국연합기부위원회와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 소수의 유대인을 합법적 또는 불법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 위원회는 세례 증명서인 '크리스천 서류‘를 위조해서 그것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지하에 은닉한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전쟁이 한창일 때 유대인 100만 명의 생명을 1만 대의 트력과 바꾸자는 힘러의 제안을 연합군 측에 제시하기 위해 파견된 불행한 밀사 조엘 브란트는 구호구출위원회의 지도적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리프 폰 프로이디거와 마찬가지로 아이히만과의 이 거래에 대해.... 브란트가 들었던 것은 '한 이상주의적 독일인이 지금 이상주의적인 유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온주의자들과의 만남에서는 아이히만이나 다른 특별 돌격대원들이
유대인위원회 위원들을 이용하기 위해 순전한 거짓말 전
략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언어규칙'도 유예되었다
구호구출위원회가 필요한 국제적 연결을 갖고 있었기에 보다 쉽게 외환을 민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헝가리의 시온주의자 대표들은 유대인위원회 위원들에게 부여된 통상적인 일시적 구속 및 이송 면책권보다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유대인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은 빈과 프라하, 베를린에서의 경험이 있는 아이히만에게는 단 2주면 되는 일이었다.
형가리에서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그 자신이 직접 계약을 성사시길 수 있 었다는 것이다. 처음 관계된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아이히만은 모든 일들, 즉 각 지역에서의 포고령 반포와 유대인의 집결 등의 일을 '번개와 같은 속도’로 확실히 진행할 수 있었다.
문제는 거의 50만 명의 유대인의 수송을 포함하고 있었다.
가스실에 투입된 죽음의 소대의 수는 224개에서 860개로 증가했으며,
하루에 6000명에서 1만 2000명을 죽일 수 있는 모든 준비가 이루어졌다.
열차가 도착하기 시작한 1944년 5월에 극소수의 '일할 수 있는 남자‘가 사역하기 위해 뽑혔고 이 소수의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에 있는 크루프의 휴즈 회사에서 일했다.
헝가리에서의 모든 작전은 두 달이 채 안 되게 진행되다가 7월에 들어서자 곧 중지되었다.
주로 시온주의자들 덕분에 이 작전은 유대인의 파국의 어떤 다른 국면보다도 더 잘 공론화되었다.
그래서 호르티에게는 중립 국가들과 바티칸으로부터 항의가 쇄도했다.
그러나 교황전권 대사는 바티칸의 저항이 '잘못된 동정심’(‘무자비한 강인성’ 대비) 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3만 3000명의 유대인이 중립국의 보호하에 부다페스트의 특별 가옥에서 살았다.
따라서 모든 측면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호르티는 이송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헝가리를 떠나 아우슈비츠로 가는 마지막 열차인 것 같다.
1944년 8월 에 붉은군대가 루마니아에 있었는데, 아이히만은 그곳으로 그의 가망 없는 일을 하러 갔었다. ... 자신들이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인들이 부다페스트에서 불과 100마일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자 나치스는 호르티 정부를 전복하여 활 십자가인 리더 페렌츠 잘라시를 국가수반으로 임명하는 데 성공했다.
학살 시설이 거의 해체될 지경이었으므로 더 이상의 운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같은 때 독일의 노동력 부족 상황은 점차 심각해졌다.
이제 5만 명의 유대인(남자16-60, 여자40세 이하)을 제국으로 이송시키는 허가를 얻기 위해 형가리 내 무장관과 협상한 사람은 제국 전권대사 베젠마이어였다.
1944년 11월에 도보행진이 시작되었다
철도 시설이 더 이상 있지 않기 때문에 1944년 11월에 도보행진이 시작되었다.
원래 80만 명의 유대인 인구 가운데 대략 16만 명 경도가 부다페스트 게토에서 살아남은 것 같고, 이 가운데 수만 명은 임의의 학살 희생자가 되었다.
1945년 2월13일 이 나라는 붉은군대에 항복했다.
이 학살에 대한 헝가리의 주요 피의자들은 모두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슬로바키아는 크로아티아와 마찬가지로 독일 외무성의 창작품이었다.
슬로바키아인들은 1939년 3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기 전에 ‘독립’을 위해 스스로 베를린에 왔다.
이때 그들은 괴링에게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데 독일을 충실히 따를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때는 어느 누구도 최종 해결책에 대해 듣지 못한 1938~39년 겨울이었다,
당시 이 나라는 가톨릭 사제인 조제프 티소(Josef Tiso) 신부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성직자 파시스트들 또는 파시스트 성직자들의 열렬한 반유대주의는 그들의 스승 독일의 초현대적 인종차별주의와는 스타일과 내용 모두에서 달랐다.
나치스는 당연히 원칙적으로 반유대적인 만큼이나 반기독교적이었다.
슬로바키아인이 기독교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영세받은 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을 나눈다.
이 모든 문제를 중세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다
그들에게 '해결책'이란 유대인을 추방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뺏는 것을 의미하지, 그들이 때때로 살인을 꺼리지는 않으나 체계적인 '학살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독립'한 지 처음 1년 반 동안 슬로바키아인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주했다.
그들은 대규모 유대인 기업을 비유대인에게 넘겼다
결론적으로 그(총돌격대장, 비슬리케니)는 친위대에서 이주 처음으로 '온건한‘ 경향을 발전시킨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이히만이 2만명의 '노동할수 있는 젊고 강한 유대인을 소개하는 협상을 위해 브라티슬라바에 나타났을 때인 1942년 3 월까지 슬로바키아에서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4주일 후 하이드리히 자신이 지금까지 예외시킨 개종한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을 동부지역에 재정착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보이텍 투카 수상을 만나러 왔다.
성직자를 수장으로 하는 이 정부는 종교를 이유로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는 '근본 결함을 수정하는 데 아무런 꺼림이 없었다,
그래서 1942년 6월까지 5만 2000명의 유대인이 슬로바키아 경찰에 의해 폴란드의 학살센터로 이송되었다.
이 나라에는 아직도 약3만 5000명의 유대인이 남아 있고 이들 모두는 예외 범주에 속해 있었다. 바로 이때, 즉 대부분의 유대인이 이미 '재정착'되있을 때, ... 브리티슬라바 유대인구호구출위원회가 비슬리키니를 매수하여 이송 속도를 늦추는 데 합의하고 또 이른바 유럽 계획도 제안했다.
바로 이때 바티칸은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재정착’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1943년 12월 에드문트 베젠마이어 박사가 티소 신부(슬로바키아 통치자)를 직접 만나러 브라티슬라바에 왔다.
티소는 1만 6000명에서 1만 8000명의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을 집단수용소에 넣을 것과 약 1만 명의 영세받은 유대인을 위한 특별수용소를 만들 것을 약속했지만 그는 이송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제 형가리의 제국 전권대사가 된 베젠마이어는 1944년 6월에 다시 나타나 이 나라에 남아 있는 유대인을 헝가리 작전에 포함시키라고 요구했다.
티소는 다시 거부했다.
붉은군대가 점차 다가옴에 따라 1944년 8월에 폭동이 슬로바키아 전역에서 일어나 독일은 이 나라를 점령했다.
제국중앙보안본부는 남은 유대인을 체포하여 이송하기 위해 알로이스 브루너를 브라티슬라바로 보냈다.
브루너는 먼저 구호구출위원회 직원들을 체포하여 이송했고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독일 비밀경찰대의 도움을 받아 또 다른 1만 2000명 또는 1만 4000명을 이송했다.
The End. 2022.10.31.
**사정상 차량내에서 접속할게요.
- 제10장 서유럽으로부터의 이송;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텐마크, 이탈리아
제3제국의 지도자들이 극찬한 특성인 '무자비한 강인성'은
여하튼 '유대인 문제 고문관으로 아이히만 사무실에서 다른 나라로 파견된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덕성을 최고도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즉 1941~42년 가을과 겨울, 그들의 주요 임무는 해당국의 다른 독일인 관료들, 특히 명목상의 독립국에 있는 독일 대사들과 점령 지역에 있는 제국 최고 책임자들과 만족할 만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두 경우 모두 유대인 문제에서 사법권에 대해서는 항상 갈등이 있었다.
1942년 6월 아이히만은 프랑스와 벨기에 및 네덜란드에 있는 고문관을 이들 나라로부터의 이송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소환했다.
프랑스, 비시 경부는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특별부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그 수장은 처음에는 자비에 발랑이, 그리고 다르퀴에 드 펠레푸아가 담당했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유명한 반유대주의자들이었다.
몸든 인구 계층에 퍼져 있던 강력한, 일반적으로 국수주의적 성향의 인종중심주의와 직결된 프랑스 판 반유대주의의 허용에 따라 외국계 유대인에 대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1942년 이래로 외국계 유대인 절반 이상이 무국적 상태가 되었다.
그 작전은 대략 10만 명의 무국적 유대인을 이송하는 것으로 시작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는 비시 정부의 동의뿐만 아니라 프랑스 경찰의 능동적인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이들은 독일에서 치안경찰이 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외국계 유대인은 프랑스에서는 항상 문젯거리”였으며,
따라서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제거할 기회를 프랑스에게 부여한 독일의 태도 변화를 기뻐했기” 때문이었다. 라발(수상)과 페탱(원수)은 이 유대인이 동부에서 재정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은 덧붙여 두어야 한다. 그들은 '재정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1942년 여름에 일어났다.
(1) 첫째 사건은 7월 15일에 보르도를 출발하기로 한 기차와 관련된 일이었다. 겨우 150명의 무국적 유대인만이 보르도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아주 흥분을 했고, 그의 부하들에게 이 일이 '특권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가 원했다면 ‘프랑스를 누락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2)두 번째 사건은 ...이미 아유수비츠로 이송된 부모와 떨어진 4000명의 아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프랑스 돌격대장) 단네커에게 전화를 걸어 “열차편을 [폴란드의] 일반정부로 다시 급파하자마자 아이들을 수송할 수 있도록 하라' 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6세 이하의 아이들도 수송되어야 한다 고 제안한 사람은 라발 자신이었음을 ... 이 모든 섬뜩한 에피소드가 상부명령의 결과조차도 아니고 프랑스와 독일의 최고위급에서 협상한 결과였다는 점이다.
1942년 여름과 가을 동안 2만 7000명의 무국적 유대인(파리에서 1만 8000명, 비시 정부에서 9000명)이 아우수비츠로 이송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유대인을 독일인에게 인도하기를 완강히 거부한 것이다.
'재정착에 대한 최초의 소문이 프랑스에 도달했다.
반유대주의자들조차도 대량학살의 공범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열심히 생각해보았던 조치, 즉 1927년 이후(또는 1933년 이후)에 유대인에게 부여한 귀화권의 박탈 조치를 취하기를 거부했다.
프랑스로부터 유대인을 소개시키려는 모든 야심찬 계획들이 사실상 '취소되어야 했다.
수만 명의 무국적자들이 숨었고, 또한 수천 명이 이탈리아령의 프랑스 지역인 코테다주르로 도피했다.
1943년 여름. 독일이 유대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1944년 4월, 연합군이 프랑스에 발을 디디기 두 달 전에는 이 나라 안에 아직도 25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고, 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이 문제의 진실은 게슈타포 요원들조차도 무자비함과 연약함을 같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1942년 6월에 베를린에서 있었던 회의에서... 벨기에에서는 1만 명의 유대인이, 그리고 네덜란드에서는 1만 5000명이 가까운 장래에 체포되어 이송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쟁 발발 전에는 9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대략 3만 명은 독일계 유대인 난민들이었고. 5만 명이 다른 유럽 국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있다.
1940년 말까지 거의 4만 명의 유대인이 이 나라를 탈출했고, 남아 있던 5만 명 가운데 벨기에 태생인 시민은 기껏해야 5000명밖에 없었다. 게다가 탈출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주 중요한 유대인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어쨌든 외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귀화한 무국적 유대인 (체코, 폴란드, 러시아, 독일 출신으로,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아주 최근에 도착한 사람들이었음)은 쉽게 인지하는 것이 기능했고, 이 작고 완전히 산업화된 국가에서는 숨기가 이주 어려웠다.
1942년 말까지 1만 5000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1944년 가을까지, 즉 연합군이 이 나라를 해방시킬 때까지 총 2만 5000명이 살해되었다.
네덜란드로부터의 이송도 무국적 유대인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번 경우는 이 유대인 거의 모두가 독일로부터 온 난민들로, 전쟁 전의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바람직하지 않은 존재라고 공개적으로 선언된 사람들이었다.
전체 15만 명의 유대인 인구 가운데 외국계는 3만 5000명이었다.
이 작은 나라는 전적으로 독일의 처분에 달려 있었다.
(친위대 소속의 아이히만의) '고문’은 빌리 죄프이다.
그는 1941년 4월에 하이드리히에 의해 네덜란드로 파견되었다.
예루살렘의 검사는 한편으로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아이히만과 연관지으려는 목적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관료의 복잡한 업무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서 헤어나질 못해 이 모든 관료들이 아이히만의 명령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위층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는 힘러로부터 직접 지시만을 받았고, 당시 아직도 라자코비치가 아이히만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을 개연성은, 특히 그 후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사건에 비추어보아 거의 없다.
아이히만은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진 조정상태에 대해 특히 화가 났다.
왜냐하면 아이히만 자신의 이송 시각을 상당히 곤란하게 만든 사람들이 현장에 있던 요원들이었다.
아이히만의 콧대를 꺾어 놓은 사람이 바로 힘러 자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의 마지막 충돌은 1944년에 일어났다.
세파르디계 유대인은 비록 살로니카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는 했어도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태생의 세파르디계 유대인은 면제가 되었다.
힘러가 네덜란드에서 자신의 고위층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들을 통해 일하기를 선호한 이유는 단순하다. 이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일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독일로부터 온 난민들에 대한
네덜란드 정부의 아주 비우 호적인 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네덜란드에서의 반유대주의가 외국계 유대인을 향한 것이라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이것은 나치스가 유대인위원회를 상대적으로 쉽게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유대인위원회는 오랫동안 오직 독일계 유대인과 외국계 유대인만이 이송의 희생물이 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면서 존속했다.
또 친위대가 네덜란드의 경찰병력뿐만 아니라 유대인 경찰력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비록 폴란드에서와는 달리 네덜란드 국민들은 수많은 유대인을 숨도록 허용하는 태도를 가졌지만, 그러나 숨어 지내던 상당수의 유대인, 적어도 그들의 절반 가량이 결국 발각되었다.
1944년 7월까지 11만 3000명의 유대인이 이송되어
이들 대부분은 폴란드의 루블린 지역의 버그 강변에 있는 소비보르로 갔다
네덜란드에 살던 전체 유대인의 4분의 3이 살해되었는데 여기에는 네덜란드 태생의 원주민 유대인의 3분의 2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4년 가을에 마지막 이송이 이루어졌다
숨어서 살아남은 1만 명의 유대인 가운데 약 75퍼센트가 외국계였다.
반제회의에서 외무성의 마르틴 루터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잠시 동안 철수할 것을 제안했다.
이 일은 덴마크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는 독립 정부가 있었고, 비록 1940년 4월에 독일 군대가 침공하기는 했어도 1943년 가을까지는 중립국으로 존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덴마크에서는 언급할 가치가 있는 파시스트나 나치스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협력자도 없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에서 독일인들은 열정적인 지지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스웨덴이 처벌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망명을 허용하고 때로는 스웨덴 국적까지도 허용한 것이다.
한 나라에서 불법적으로 떠나는 것은 항상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지만,
허가 없이 피란지를 찾거나 이주 당국을 속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덴마크 유대인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하며, 덴마크인들과 덴마크 정부의 행위는 유럽의 모든 나라들 가운데 독특한 것이었다.
분명히 유럽의 몇몇 다른 나라에서는 적절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고,
따라서 사실상 그들 대부분은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해결책에는 반대했다.
덴마크와 마찬가지로 스웨덴과 이탈리아, 불가리아도 반유대주의에 거의 면역되어 있었지만 이 세 나라는 독일의 영향권에 있었고, 그래서 오직 덴마크인들만 그들의 주인인 독일인들에게 이 주제에 대해 감히 소리내어 말할 수 있었다.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대략 6400명의 유대계 덴마크인들과, 전생 이전에 이 나라로 망명을 왔고 이제는 독일 정부에 의해 무국적자라고 선언받은 1400명의 독일계 유대인 난민들을 구별하는 아주 중요한 조치를 독일인들이 도입하지도 못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귀화를 단적으로 부정하고 노동허가조차 주지 않은 사람들을 정부가 보호하는 것은 아주 '비논리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덴마크인들은 무국적 난민들이 더 이상 독일 시민이 아니기 때문 에 나치스는 덴마크의 동의 없이 그들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없다고 독일 관리인들에게 말했다.
유대인을 구한 것이 무국적성 자체가 아니라 그 반대로 덴마크 정부가 그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살인을 위한 관료제의 수립을 위해 그토록 중요한 그 어떠한 예비 적 조치들도 수행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작전은 1943년 가을까지 연기되었다.
1943년 8월 스웨덴 정부는 독일 군대가 자국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독일과의 1940년 협정을 파기했다.
덴마크 조선소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거기서 조선 노동자들은 독일 배의 수리를 거부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힘러는 이때가 오랫동안 미루어져온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수행할 적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히만의 사무실에서 가장 뛰어난 한 사람을 덴마크로 보냈는데, 그는 필수적 자질인 '무자비한 강인성' 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어느 누구로부터도 고발당하지 않은 롤프 권터였다.
(제국 전권대사 베르너 베스트 박사) 베스트는 베를린으로 가서 모든 덴마크 출신 유대인이 그들의 소속에 관계없이 테레지엔슈타트로 보낸다는 약속을 얻었다.
운명의 날을 며칠 앞두고 베스트로부터 정보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한 독일인 운송담당자 게오르크 F. 두크비츠가 모든 계획을 덴마크 정부 관리들에게 폭로했고, 이들은 다시 서둘러서 유대인 공동체 수장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만일 덴마크인들이 스웨덴을 이웃한 축복을 받지 않았더라면 유대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유대인이 스웨덴으로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였고, 이 일은 덴마크 어부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의 경우 유대인은, 1인당 5000달러 내지 1 만 달러에 해당되는 금액을 오직 현금으로만 받고 탈출허가증을 판 친위대의 '합법적인’ 협정을 해서 결국 자신의 재산을 다 바쳐야 했다.
덴마크와 스웨덴을 갈라놓은 5마일 내지 15마일의 바다를 가로질러 10월 어느 좋은 날 모든 유대인을 싣고 페리호는 떠났다.
스웨덴은 5919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는데, 이 가운데 적어도 1000명은 독일 태생이었고 1310명은 반쪽 유대인이었으며, 686명은 유대인과 결혼한 비 유대인이었다.
비덴마크계 유대인은 이전보다 살기가 나아졌고, 모두가 노동허가를 받았다. 독일경찰이 체포한 수 백 명의 유대인은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송되었다.
이 모든 일이 지났을 때 아이히만이 숙고해서 내린 의견은 “여러 이유에서 덴마크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행동은 실패였다”
정치적으로 또 심리학적으로 이 사건의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덴마크 내의 독일 당국이 취한 역할, 즉 베를린으로부터 온 명령에 대해 그들이 명백히 사보타주를 했다는 것이다.
그들 자신은 분명히 민족 전체의 처형을 더 이상 당연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이 재판에서 피고들은 서로를 고발하고 배신했으며.
자신들은 “항상 거기에 반대했다'고 세상을 납득시키려 하거나
또는 아이히만이 그런 것처럼 자신들의 최상의 재능이 상관들에 의해 “오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권력에 있는 자를 이 자신의 “복종심”을 오용했다고 고발했다. “좋은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행운이고, 나쁜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불운이다. 나는 운이 없었다”)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나치 이데올로기를 옹호할 용기를 갖지 않았다.
베르너 베스트는 뉘른베르크에서 자신은 복잡한 이중역할을 수행했다고,
그리고 덴마크 관리들이 임박한 파국에 대해 경고를 받은 것은 자기 덕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진정으로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을 덴마크 법정이 만족할 만큼 입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탈리아는 독일에게 유럽 내의 유일한 진정한 동맹이었고, 동등한 취급을 받았으며 주권 독립국가로 존중을 받았다.
나치스가 이탈리아의 파시즘보다 스탈린식의 공산주의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솔리니의 편에서는 독일에 대한 큰 신뢰나 히틀러에 대한 큰 경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전체주의의 국가형태와 파시즘적 국가형태 사이의 깊고 결정적인 차이점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세상에 전적으로 이해된 적은 없었다.
그 차이점들은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데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났다.
1943년 여름에 .. 아이히만과 그 요원은 ...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 이탈리아 방식을 프랑스와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등의 국가들의 이탈리아의 점령지에서 만났다.
처형될 유대인이 끊임없이 이 지역으로 탈출했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임시 망명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이히만보다 훨씬 높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최종 해결책에 대한 이탈리아의 사보타주가 상당히 심각하게 다가왔는데
이는 주로 유럽의 다른 파시스트 정부(프랑스의 페탱, 헝가리의 호르티,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 스페인의 프랑코)에 대한 무솔리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만일 이탈리아가 자국의 유대인을 살려두기를 중지하지 않는다면
독일의 위성 국가들도 동일한 시도를 할 것 같았다.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대략 5만 명의 유대인이 안전하게 지내고 있었다.
독일의 상당한 압력으로 이탈리아인 '유대인 문제 최고책임관이 임명되었는데, 그의 유일한 임무는 이 지역의 모은 유대인을 등록받아 지중해 연안으로 추방시키는 것이었다.
2만 2000명의 유대인이 체포되어 이탈리아 지역 내부로 이송되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가장 거친 요원 가운데 한 사람인 알로이스 브루너를 니스와 마르세유로 보냈다.
제국중앙보안본부에서 일종의 조사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하튼 유대인은 거기에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탈리아 내의 인전한 곳으로 달아났고, 주변 산에 숨이 있던 사람들은 스위스나 스페인으로 갔다.
이탈리아인들이 유고슬라비아의 점령지를 포기했을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유대인은 이탈리아 군대와 함께 떠났고 피우메에서 피난지를 찾았다.
독일의 압력을 받은 무솔리니가 1930년대 후반에 반유대적 법률을 도입 했을 때 그는 통상적인 예외를 약속했지만, 그는 한 범주, 즉 과거의 파시스트당의 요원과 그의 부모와 조부모, 아내와 자녀 및 증손을 추가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이탈리아 유대인이 예외가 되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대인이 다른 이탈리아인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20년 동안 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했을 때 일어난 것이기 때문인데,
이때 공무원직은 오직 파시스트 당원만이 할 수 있었다.
파시스트에 반대한 유대인, 주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더 이상 이 나라에 있지 않았다.
아이히만도 언급했지만, 보통의 친위대원 가운데도 유대인이 있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수수께끼의 열쇠는 이탈리아가 실제로 유럽 국가들 가운데, 모든 반유대적 조치들이 단정적으로 인기가 없었던 몇 안 되는 국기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무자비한 강인성‘에서 압도되지 않을 이탈리아 파시즘은 이 국가에서 전쟁 발발 전에 외국계 및 무국적 유대인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그 시도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생사의 문제와 연관된 일에 대해서는 그들은 자신의 주권을 유지한다는
구실로 이와 관계된 유대인 주민들을 버리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이 외국인들은 자국민 사이의 민족적, 문화적 동질성에 기초한 모든 유럽의 민족국가에서 그러한 것처럼, 자연적으로 이탈리아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덴마크에서 진정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귀결, 즉 시민과 독립의 전제조건 및 책임에 대한 타고난 이해였던 것이 이탈리아에서는 오랜 문명화된 민족의 거의 자동적인 일반적 인류애(humanity)의 산물이었다.
1943년 12월 독일 외무성이 아이히만의 상관인 뮐러의 도움을 공식적으로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탈리아에 독일 관리들의 감독 하에 두는 것이 긴급하고도 필수적이라고 여긴다”
이에 따라 루블린 지역의 죽음의 수용소 출신 오딜로 글로보크니크와 같은 유명한 유대인 킬러들이 이탈리아로 피송되었다.
아이히만의 사무실에서는 예하 부서에 '이탈리아 국적의 유대인은 즉각적으로 '필요한 조차를 따라야 한다’ 는 회람 통지를 내렸다.
그리고 최초의 타격은 로마에 있는 8000명의 유대인에게 가해졌는데, 이들은 이탈리아 경찰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온 독일 경찰 부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제는 이탈리아 유대인이 비록 면제 대상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지만 이송되지는 않았고 이탈리아 수용소에 수용되기만 했다. 이 '해결책은 이탈리아에는 충분히 '최종적'이었던 것 같다.
1944년 봄 독일인들은 약속을 깨고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간 7500명 가운데 겨우 600명만이 돌아 왔다.
제11장 발칸 지역으로부터의 이송;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루마니아
제국(북으로는 러시아 제국, 남으로는 오스트리아-형가리 제국, 남동으로는 터키 제국)의 점령 하에서 수세기 동안 살아온 수많은 민족 집단들에게는 새로운 정치적 질서가 부여되었다.
그 결과 생겨난 민족국가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정치적 제도의 모범으로 삼은 구 유럽 국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적 동질성을 비슷하게라도 가진 나라는 한 나라도 없었다.
그 결과 이 나라들은 현 정부에 격렬히 적대적인 거대한 민족 집단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민족적 열망은 자신들보다 약간 더 많은 수의 이웃들에 의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1939년 3월에 프라하로 행진해 들어갔을 때 그는 독일 소수계인 수데텐도이치족뿐만 아니라 슬로바키아족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는데, 슬로바키아족은 히틀러로부터 '독립'국가 제안을 받아 해방되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거기서 다수족이며 이 나라의 통치자가 된 세르비아는 적으로 간주되었고, 크로아티아 소수민족에게는 그 자신의 민족 정부가 주어졌다.
헝가리와 루마니아, 불가리아 자신의 영역을 관대하게 확정시킴으로써 (독일, 이탈리아, 일본) 추축국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새롭게 합병된 지역에 있는 유대인은 국민으로서의 지위가 거부되었다.
그들은 자동적으로 무국적 상태가 되었고, 따라서 서부 유럽의 난민들과 똑같은 운명을 겪게 되었다.
그들은 분명히 가장 먼저 이송되고 학살될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 시절에 붕괴된 것은 소수민족 조약들의 정교한 체계였다.
유대인은 모든 계승국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소수민족이었다.
서구의 교육받은 유대인' 귀족들 대다수는
일종의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자율성은 원했지만 정치적 자율성을 원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동부 유럽의 유대인은 동지나 적 모두에게서 분명한 하나의 민족으로 인정받았다.
동화를 하는 것이 하나의 규칙처럼 된 서부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지위를 갖게 해주었다.
서부와 중부 유럽에서는 중산층 유대인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특징인데, 동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동부는) 중상층 가족들로 이들은 실제로는 지배계층에 속했고, 그들의 이방 사회에 대한(돈과 세례, 종족간 결혼을 통한) 동화의 정도는 서부의 대부분의 유대인의 동화 정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정부 설립 3주 후에 아주 의무감을 가지고 반유대인 법안을 도입했다.
그리고 독일에 있는 수십 명의 크로아티아계 유대인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정부는 그들이 '동부로 이송되는 것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송작업은 크로아니아인들 자신, 특히 강력한 파시스트 운동의 요원인 우스타쉐 당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인들은 나치스에게 각 유대인의 이송비로 30마르크씩 지불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이주지들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
국가는 자신의 국경 안에 머무르다 살해당한 유대인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래서 1943년 가을까지 3만 명의 유대인이 죽음의 센터로 이송되었다.
그제야 독일인들은 이 나라가 아직도 유대인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로아티아의 거의 모는 지배자들이 유대인과 결혼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의 유대인 가운데 살아남은 1500여 명은 분명히 모두가 이처럼 고도로 동화된, 그리고 극도로 부유한 유대인 집단이었다.
“세르비아 유대인을 다루는 일상적 명령 체계가 우리에게는 아주 분명하게 인지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어떠한 유대인도 이송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모두 현장에서 해결되었다.
1942년 8월에 군사정부 민간인 부서장인 하랄 투르너 추밀원 고문관은 자부심에 차서 세르비아는 ‘유대인 문제와 집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유일한 나라’라고 보고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피하고 자신이 죄를 범한 나라에서도 재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거나 독일의 법정에서 가능한 최고의 '이해‘를 얻었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일을 떠올렸는데, 그 공화국이 한 일이라고는 정치적 살인자가 폭력적인 반공화국적 우파 단체에 속해 있다면 그 살인행위를 용서해 주는 것이었다.
불가리아는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그리스를 대가로 상당한 정도의 영토를 확장했다.
반유대주의가 집단마다 강력히 퍼져 있던 혼합 민족지역 가운데 속하는 불가리아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도무지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1941년 1월에 불가리아 정부는 ... 대략 1만 5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5000명의 유대인이 추가로 특권(유대인인 개종하면 면제 부여)을 부여받았다.
1942년 1월에 아이히만은 ... 불가리아 정부에 접근하여 소피아에 있는 경찰 무관이 “이송을 기술적으로 완료하도록 할 것” 이라는 점을 외무성에 분명히 말할 것을 제안했다.
불가리아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과업에 최고 우선권이 주어졌던 것은 어떤 일이든 달성하려면 상당한 속도가 필수적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베를린이 입수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서야 그들은 '근본적' 조치의 방향으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1942년 11월에 ... 독일의 큰 압력을 받은 불가리아 정부는 결국 모든 유대인을 소피아에서 변방 지역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그 조치는 유대인을 집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의회와 민중이 분명히 유대인을 편들고 있었다.
단네커, 그는 공개적으로“신이 유대인의 운명을 결정했고, 인간이 유대인을 고문하고 처형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 고 선언했다.
여러 민족들이 섞여서 살고 있는 지역에서 독특한 경우에 해당하는
불가리아인들의 행위에 대해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나는 알지 못한다.
독일인들에게 북쪽을 점령당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 남쪽이 점령당한 그리스는 어떤 특별한 문제를 야기기하지 않고 따라서 그 나라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순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943년 2월 아이히만의 두 전문가는 살로니카에서...유대인을 이송시키기 위한 모든 준비를 위해 도착했다.
그곳은 그리스계 유대인의 3분의2인 약5만 5000명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지역이었다.
이것은 '유럽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의 근본를‘ 안에서 이루어진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특권을 받은 계층은 외국 여권을 가진 유대인과 늘 그렇듯 유대인위원회 요원들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합쳐서 수백 명을 넘지 않았다
같은 해(1943년) 가을, 이탈리아 군대가 괴멸했을 때 아테네와 그리스 섬들을 포함한 그리스 남부 지역 출신의 1만 3000명가량의 유대인의 소개가 신속히 완료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그리스계 유대인은 이른바 죽음의 부대에 고용되어 있었는데, 이 부대는 가스실과 화장터에서 작업을 했다.
(군당국을 대변했던, 전쟁관리위원) 메르텐 박사는 ...자기가 몰랐던 운명으로부터 유대인을 구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베를린에서 피고 측과 검찰 양쪽의 대리인이 임석한 가운데 한 피고를 위한 그의 증언도 상당히 독특했다.
아이히만이 살로니카에 있던 약 2만 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구하는데 상당히 도움을 주었으며, 또 모든 악한 일은 비슬리케니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아이히만 본인은 이 모든 것을 부인했다. 그는 살로니카에 가본 적도 없었고 도움을 준 메르텐 박사를 만난 적도 없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조직적 재능, 즉 그의 사무실에서 이루어진 소개와 이주에 대한 조정 작업이 사실상 희생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 차례 이상 주장했다.
그것이 유대인의 운명을 보다 쉽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은 자신이 '강제이주’를 통해 수만 명의 유대인의 생명을 구했다는 그의 어리석고도 집요한 주장과 길은 법주에 속하는 말이다.
루마니아에서는 친위대조차도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구식의 자발적인 유대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루마니아가 전쟁 전 유럽에서 가장 반유대주의가 심한 나라라고 하는 것은 거의 과장이 아니다.
심지어 19세기에도 루마니아는 반유대주의가 잘 구축된 것이 사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모든 루마니아계 유대인(수백 명에 해당하는 세파르디계 가족들과 일부 독일계 유대인은 예외)은 여전히 외국인 거주자 신분이었다.
이 때(1938년) 히틀러 독일의 힘을 신뢰한 루마니아인들은 소수자 협정(소수자 시민권 부여, 연합군이 설득)을 자신의 ‘주권’에 대한 강압으로 간주하여 무효를 선언함으로써 전체 유대인 인구의 약 4분의 1 되는 수십만 명의 유대인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하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을 갖게 했다.
1940년 8월,...새로운 철권 독재정부의 수장인 이온 안토네스쿠 제독(루마니아) 은 모든 루마니아 유대인이 무국적자라고 선포했다.
같은 그는 또한 독일을 포함한 전 유럽에서 가장 혹독한 반유대인 법을 제도화했다.
루마니아가 1941년 2월에 전쟁에 참전하여 루마니아 지역은 곧 있을 러시아 침공 시에 고려에 넣은 군사지역이 되었다.
오데사에서만 루마니아 병사들은 6만 명을 학살한 책임이 있었다.
루마니아 정부는 처음부터 동부에서 이루어지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아주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1941년 여름에도 루마니아 병사들은 같은 해 1월보다 작은 규모이지만...학
살과 이송 계획에 여전히 참여했다.
루마니아 스타일이란 5000명을 열차 화물칸에 발디딜 틈 없이 태우고는 여러 날 동안 목적지도 계획도 없이 교외를 계속 달리게 하여 질식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루마니아 공포의 강제수용소는 동부로의 이송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마니아인들 스스로 만들고 운영했는데, 우리가 독일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 어떤 일들보다도 더 교묘하고 잔혹한 것이었다.
아이히만 본인은 이 단계에서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한 이 같은 비조직적이고 비성숙한 루마니아의 노력을 중지해달라고 1942년 4월 외무성에 보낸 한 편지에서 탄원했다.
따라서 8월 중순(이때까지 루마니아인들은 거의 어떠한 독일의 도움 없이30만에 가까운 유대인을 죽였다)에 외무성은 안토네스쿠와 ‘유대인의 루마니아로부터의 소개 작업’을 독일 군대가 수행한다는 협정을 마쳤다.
그런데 킬링거 대사가 보고한 것처럼 제독(안토네스쿠)은 이제 유대인을 '편안한 방식으로' 제거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유대인을 현금(1인당 1300달러를) 받고 해외로 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루마니아인들은 유대인 이민에 대해 가장 열광적으로 집착했다.
이것이 바로 전쟁 기간 중 루마니아가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유대인을 이주시킨 몇 안 되는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된 이유이다.
붉은 군대가 다가옴에 따라 안토네스쿠는 훨씬 더 '온건'해져서, 이제는 기꺼이 유대인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안토네스쿠 제독이 처음부터 끝까지(히틀러가 생각한 것처럼) 나치스보다더' 철저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진행에 항상 한걸음만 앞서 있었다
그는 모든 유대인에게서 국적을 최초로 박탈했고, 또 나치스가 아직도 첫 실험을 하느라 분주했을 때 대량학살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또한 부끄러움 없이 자행하기 시작했다...
루마니아의 학살자들은 모두 정식으로 처형되었다.
제12장 중부유럽으로부터의 이송; 헝가리, 슬로바키아
옛날 옛적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헝가리의 왕이었고, 보다 최근인1806년 이후 다뉴브 지역에는 황제 같은 왕의 왕정이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왕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불안하게 지배되고 있었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 하에 있었던 1930년대 초에는 이른바 활 십자가인(Arrow Cross men)이라는 강력한 파시스트 운동이 일어났고, 1938년에는 이탈리아를 따라 그들의 첫 번째 반유대인 법들을 통과시켰다.
인종주의에 기초한 완전히 포괄적인 반유대주의가 공식적인 정부 정책이 되었을 때, 11명의 유대인이 의회 고위직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헝가리는 동부 전선에 유대인 부대(13만 명으로 비전투 지원부대였지만 헝가리 제복을 입었음)를 파병한 유일한 추축국이었다.
헝가리의 주권은 1944년 3월까지 나치스 정부가 존중해준 결과 유대인에게 이 나라는 '파괴의 대양' 가운데 있는 안전한 섬이 되었다.
베젠마이어가 1943년 12월에 외무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명시했듯이
유대인의 '전멸‘이 '헝가리가 전쟁에 참여하는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해결’은 80만 명의 유대인과 약 10만 또는 15만 명의 개종 유대인의 소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이 일의 중대성 때문에 1944년 4 월 전 부서원들과 함께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아이히만 특별 돌격대는 부다페스트에 본부를 차렸을 때 대략 10명의 요원들과 몇 명의 서기보조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바로 그날 밤에 아이히만과 그의 요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모임에 불러내어 유대인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설득했다.
이 위원회를 통하여 명령도 내리고, 그 대가로 헝가리의 모든 유대인에 대한 절대적 사법권을 부여하려고 했다.
교황 대사의 말처럼 이때는 “전 세계가 이송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 때였다.
유대인중앙위원회의 위원이 된 사람들은 이웃나라 슬로바키아로부터, 지금 자신들의 협상 대상자인 비슬리케니가 뒷돈을 잘 쟁기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고 또 모든 뇌물을 받고서도 그는“모든 슬로바키아의 유대인을 이송해버렸다...” 것도 알고 있었다.
이 같은 어려운 협상에서 발휘된 아이히만의 가장 영악한 속임수는 그와 그의 요원들이 부패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기만전술로 부패한 척했지만, 곧 실제상황이 되어 버렸다.
유대인이 그토록 많은 돈을 쓰고도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 이상한 카스의 씨의 말로 하자면, “자신의 목숨과 자기 가족의 목숨으로 떨고 있던 유대인은 돈에 대한 모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크루마이는 1944년 4월에 프로이디거로부터 25만 달러나 받았고, 구출위원회는 비슬리케니와 친위대 정보부원 몇 명을 만나는 특권을 얻는 데에만 2만 달러를 지불했다.
비슬리케니는 이른바 유럽 계획이라는 것을 다시 끄집어냈다.
이 계획(1942년 제안) 에 따르면 힘러가 폴란드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유대인에게 몸값으로 200만 내지 300만 달러를 받고 살려준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이 일을 하는 가운데 재정적으로 이익을 취했다는 점은 입증할 수 없었지만 검찰은 아이히만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생활수준이 아주 높은 것을 적절히 강조했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단체가 있었는데, 그 지도자는 적어도 자기기만에 적게 빠져 있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늘 헝가리에서는 특히 강력했다
구호구출위원회(Vaadat Ezra va Haxalah)는 팔레스타인 사무실과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었으며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유고슬 라비아와 루마니아에서 온 난민들을 돕고 있었다.
이 위원회는 자신의 활동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미국연합기부위원회와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 소수의 유대인을 합법적 또는 불법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 위원회는 세례 증명서인 '크리스천 서류‘를 위조해서 그것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지하에 은닉한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전쟁이 한창일 때 유대인 100만 명의 생명을 1만 대의 트력과 바꾸자는 힘러의 제안을 연합군 측에 제시하기 위해 파견된 불행한 밀사 조엘 브란트는 구호구출위원회의 지도적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리프 폰 프로이디거와 마찬가지로 아이히만과의 이 거래에 대해.... 브란트가 들었던 것은 '한 이상주의적 독일인이 지금 이상주의적인 유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온주의자들과의 만남에서는 아이히만이나 다른 특별 돌격대원들이
유대인위원회 위원들을 이용하기 위해 순전한 거짓말 전
략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언어규칙'도 유예되었다
구호구출위원회가 필요한 국제적 연결을 갖고 있었기에 보다 쉽게 외환을 민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헝가리의 시온주의자 대표들은 유대인위원회 위원들에게 부여된 통상적인 일시적 구속 및 이송 면책권보다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유대인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은 빈과 프라하, 베를린에서의 경험이 있는 아이히만에게는 단 2주면 되는 일이었다.
형가리에서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그 자신이 직접 계약을 성사시길 수 있 었다는 것이다. 처음 관계된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아이히만은 모든 일들, 즉 각 지역에서의 포고령 반포와 유대인의 집결 등의 일을 '번개와 같은 속도’로 확실히 진행할 수 있었다.
문제는 거의 50만 명의 유대인의 수송을 포함하고 있었다.
가스실에 투입된 죽음의 소대의 수는 224개에서 860개로 증가했으며,
하루에 6000명에서 1만 2000명을 죽일 수 있는 모든 준비가 이루어졌다.
열차가 도착하기 시작한 1944년 5월에 극소수의 '일할 수 있는 남자‘가 사역하기 위해 뽑혔고 이 소수의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에 있는 크루프의 휴즈 회사에서 일했다.
헝가리에서의 모든 작전은 두 달이 채 안 되게 진행되다가 7월에 들어서자 곧 중지되었다.
주로 시온주의자들 덕분에 이 작전은 유대인의 파국의 어떤 다른 국면보다도 더 잘 공론화되었다.
그래서 호르티에게는 중립 국가들과 바티칸으로부터 항의가 쇄도했다.
그러나 교황전권 대사는 바티칸의 저항이 '잘못된 동정심’(‘무자비한 강인성’ 대비) 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3만 3000명의 유대인이 중립국의 보호하에 부다페스트의 특별 가옥에서 살았다.
따라서 모든 측면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호르티는 이송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헝가리를 떠나 아우슈비츠로 가는 마지막 열차인 것 같다.
1944년 8월 에 붉은군대가 루마니아에 있었는데, 아이히만은 그곳으로 그의 가망 없는 일을 하러 갔었다. ... 자신들이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인들이 부다페스트에서 불과 100마일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자 나치스는 호르티 정부를 전복하여 활 십자가인 리더 페렌츠 잘라시를 국가수반으로 임명하는 데 성공했다.
학살 시설이 거의 해체될 지경이었으므로 더 이상의 운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같은 때 독일의 노동력 부족 상황은 점차 심각해졌다.
이제 5만 명의 유대인(남자16-60, 여자40세 이하)을 제국으로 이송시키는 허가를 얻기 위해 형가리 내 무장관과 협상한 사람은 제국 전권대사 베젠마이어였다.
1944년 11월에 도보행진이 시작되었다
철도 시설이 더 이상 있지 않기 때문에 1944년 11월에 도보행진이 시작되었다.
원래 80만 명의 유대인 인구 가운데 대략 16만 명 경도가 부다페스트 게토에서 살아남은 것 같고, 이 가운데 수만 명은 임의의 학살 희생자가 되었다.
1945년 2월13일 이 나라는 붉은군대에 항복했다.
이 학살에 대한 헝가리의 주요 피의자들은 모두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슬로바키아는 크로아티아와 마찬가지로 독일 외무성의 창작품이었다.
슬로바키아인들은 1939년 3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기 전에 ‘독립’을 위해 스스로 베를린에 왔다.
이때 그들은 괴링에게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데 독일을 충실히 따를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때는 어느 누구도 최종 해결책에 대해 듣지 못한 1938~39년 겨울이었다,
당시 이 나라는 가톨릭 사제인 조제프 티소(Josef Tiso) 신부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성직자 파시스트들 또는 파시스트 성직자들의 열렬한 반유대주의는 그들의 스승 독일의 초현대적 인종차별주의와는 스타일과 내용 모두에서 달랐다.
나치스는 당연히 원칙적으로 반유대적인 만큼이나 반기독교적이었다.
슬로바키아인이 기독교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영세받은 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을 나눈다.
이 모든 문제를 중세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다
그들에게 '해결책'이란 유대인을 추방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뺏는 것을 의미하지, 그들이 때때로 살인을 꺼리지는 않으나 체계적인 '학살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독립'한 지 처음 1년 반 동안 슬로바키아인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주했다.
그들은 대규모 유대인 기업을 비유대인에게 넘겼다
결론적으로 그(총돌격대장, 비슬리케니)는 친위대에서 이주 처음으로 '온건한‘ 경향을 발전시킨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이히만이 2만명의 '노동할수 있는 젊고 강한 유대인을 소개하는 협상을 위해 브라티슬라바에 나타났을 때인 1942년 3 월까지 슬로바키아에서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4주일 후 하이드리히 자신이 지금까지 예외시킨 개종한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을 동부지역에 재정착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보이텍 투카 수상을 만나러 왔다.
성직자를 수장으로 하는 이 정부는 종교를 이유로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는 '근본 결함을 수정하는 데 아무런 꺼림이 없었다,
그래서 1942년 6월까지 5만 2000명의 유대인이 슬로바키아 경찰에 의해 폴란드의 학살센터로 이송되었다.
이 나라에는 아직도 약3만 5000명의 유대인이 남아 있고 이들 모두는 예외 범주에 속해 있었다. 바로 이때, 즉 대부분의 유대인이 이미 '재정착'되있을 때, ... 브리티슬라바 유대인구호구출위원회가 비슬리키니를 매수하여 이송 속도를 늦추는 데 합의하고 또 이른바 유럽 계획도 제안했다.
바로 이때 바티칸은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재정착’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1943년 12월 에드문트 베젠마이어 박사가 티소 신부(슬로바키아 통치자)를 직접 만나러 브라티슬라바에 왔다.
티소는 1만 6000명에서 1만 8000명의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을 집단수용소에 넣을 것과 약 1만 명의 영세받은 유대인을 위한 특별수용소를 만들 것을 약속했지만 그는 이송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제 형가리의 제국 전권대사가 된 베젠마이어는 1944년 6월에 다시 나타나 이 나라에 남아 있는 유대인을 헝가리 작전에 포함시키라고 요구했다.
티소는 다시 거부했다.
붉은군대가 점차 다가옴에 따라 1944년 8월에 폭동이 슬로바키아 전역에서 일어나 독일은 이 나라를 점령했다.
제국중앙보안본부는 남은 유대인을 체포하여 이송하기 위해 알로이스 브루너를 브라티슬라바로 보냈다.
브루너는 먼저 구호구출위원회 직원들을 체포하여 이송했고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독일 비밀경찰대의 도움을 받아 또 다른 1만 2000명 또는 1만 4000명을 이송했다.
The End. 2022.10.31.
**사정상 차량내에서 접속할게요.
- 제10장 서유럽으로부터의 이송;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텐마크, 이탈리아
제3제국의 지도자들이 극찬한 특성인 '무자비한 강인성'은
여하튼 '유대인 문제 고문관으로 아이히만 사무실에서 다른 나라로 파견된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덕성을 최고도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즉 1941~42년 가을과 겨울, 그들의 주요 임무는 해당국의 다른 독일인 관료들, 특히 명목상의 독립국에 있는 독일 대사들과 점령 지역에 있는 제국 최고 책임자들과 만족할 만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두 경우 모두 유대인 문제에서 사법권에 대해서는 항상 갈등이 있었다.
1942년 6월 아이히만은 프랑스와 벨기에 및 네덜란드에 있는 고문관을 이들 나라로부터의 이송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소환했다.
프랑스, 비시 경부는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특별부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그 수장은 처음에는 자비에 발랑이, 그리고 다르퀴에 드 펠레푸아가 담당했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유명한 반유대주의자들이었다.
몸든 인구 계층에 퍼져 있던 강력한, 일반적으로 국수주의적 성향의 인종중심주의와 직결된 프랑스 판 반유대주의의 허용에 따라 외국계 유대인에 대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1942년 이래로 외국계 유대인 절반 이상이 무국적 상태가 되었다.
그 작전은 대략 10만 명의 무국적 유대인을 이송하는 것으로 시작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는 비시 정부의 동의뿐만 아니라 프랑스 경찰의 능동적인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이들은 독일에서 치안경찰이 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외국계 유대인은 프랑스에서는 항상 문젯거리”였으며,
따라서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제거할 기회를 프랑스에게 부여한 독일의 태도 변화를 기뻐했기” 때문이었다. 라발(수상)과 페탱(원수)은 이 유대인이 동부에서 재정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은 덧붙여 두어야 한다. 그들은 '재정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1942년 여름에 일어났다.
(1) 첫째 사건은 7월 15일에 보르도를 출발하기로 한 기차와 관련된 일이었다. 겨우 150명의 무국적 유대인만이 보르도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아주 흥분을 했고, 그의 부하들에게 이 일이 '특권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가 원했다면 ‘프랑스를 누락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2)두 번째 사건은 ...이미 아유수비츠로 이송된 부모와 떨어진 4000명의 아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프랑스 돌격대장) 단네커에게 전화를 걸어 “열차편을 [폴란드의] 일반정부로 다시 급파하자마자 아이들을 수송할 수 있도록 하라' 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6세 이하의 아이들도 수송되어야 한다 고 제안한 사람은 라발 자신이었음을 ... 이 모든 섬뜩한 에피소드가 상부명령의 결과조차도 아니고 프랑스와 독일의 최고위급에서 협상한 결과였다는 점이다.
1942년 여름과 가을 동안 2만 7000명의 무국적 유대인(파리에서 1만 8000명, 비시 정부에서 9000명)이 아우수비츠로 이송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유대인을 독일인에게 인도하기를 완강히 거부한 것이다.
'재정착에 대한 최초의 소문이 프랑스에 도달했다.
반유대주의자들조차도 대량학살의 공범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열심히 생각해보았던 조치, 즉 1927년 이후(또는 1933년 이후)에 유대인에게 부여한 귀화권의 박탈 조치를 취하기를 거부했다.
프랑스로부터 유대인을 소개시키려는 모든 야심찬 계획들이 사실상 '취소되어야 했다.
수만 명의 무국적자들이 숨었고, 또한 수천 명이 이탈리아령의 프랑스 지역인 코테다주르로 도피했다.
1943년 여름. 독일이 유대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1944년 4월, 연합군이 프랑스에 발을 디디기 두 달 전에는 이 나라 안에 아직도 25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고, 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이 문제의 진실은 게슈타포 요원들조차도 무자비함과 연약함을 같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1942년 6월에 베를린에서 있었던 회의에서... 벨기에에서는 1만 명의 유대인이, 그리고 네덜란드에서는 1만 5000명이 가까운 장래에 체포되어 이송될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쟁 발발 전에는 9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대략 3만 명은 독일계 유대인 난민들이었고. 5만 명이 다른 유럽 국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있다.
1940년 말까지 거의 4만 명의 유대인이 이 나라를 탈출했고, 남아 있던 5만 명 가운데 벨기에 태생인 시민은 기껏해야 5000명밖에 없었다. 게다가 탈출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주 중요한 유대인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어쨌든 외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귀화한 무국적 유대인 (체코, 폴란드, 러시아, 독일 출신으로,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아주 최근에 도착한 사람들이었음)은 쉽게 인지하는 것이 기능했고, 이 작고 완전히 산업화된 국가에서는 숨기가 이주 어려웠다.
1942년 말까지 1만 5000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1944년 가을까지, 즉 연합군이 이 나라를 해방시킬 때까지 총 2만 5000명이 살해되었다.
네덜란드로부터의 이송도 무국적 유대인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번 경우는 이 유대인 거의 모두가 독일로부터 온 난민들로, 전쟁 전의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바람직하지 않은 존재라고 공개적으로 선언된 사람들이었다.
전체 15만 명의 유대인 인구 가운데 외국계는 3만 5000명이었다.
이 작은 나라는 전적으로 독일의 처분에 달려 있었다.
(친위대 소속의 아이히만의) '고문’은 빌리 죄프이다.
그는 1941년 4월에 하이드리히에 의해 네덜란드로 파견되었다.
예루살렘의 검사는 한편으로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아이히만과 연관지으려는 목적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관료의 복잡한 업무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서 헤어나질 못해 이 모든 관료들이 아이히만의 명령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위층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는 힘러로부터 직접 지시만을 받았고, 당시 아직도 라자코비치가 아이히만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을 개연성은, 특히 그 후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사건에 비추어보아 거의 없다.
아이히만은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진 조정상태에 대해 특히 화가 났다.
왜냐하면 아이히만 자신의 이송 시각을 상당히 곤란하게 만든 사람들이 현장에 있던 요원들이었다.
아이히만의 콧대를 꺾어 놓은 사람이 바로 힘러 자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의 마지막 충돌은 1944년에 일어났다.
세파르디계 유대인은 비록 살로니카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는 했어도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태생의 세파르디계 유대인은 면제가 되었다.
힘러가 네덜란드에서 자신의 고위층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들을 통해 일하기를 선호한 이유는 단순하다. 이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일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독일로부터 온 난민들에 대한
네덜란드 정부의 아주 비우 호적인 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네덜란드에서의 반유대주의가 외국계 유대인을 향한 것이라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이것은 나치스가 유대인위원회를 상대적으로 쉽게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유대인위원회는 오랫동안 오직 독일계 유대인과 외국계 유대인만이 이송의 희생물이 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면서 존속했다.
또 친위대가 네덜란드의 경찰병력뿐만 아니라 유대인 경찰력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비록 폴란드에서와는 달리 네덜란드 국민들은 수많은 유대인을 숨도록 허용하는 태도를 가졌지만, 그러나 숨어 지내던 상당수의 유대인, 적어도 그들의 절반 가량이 결국 발각되었다.
1944년 7월까지 11만 3000명의 유대인이 이송되어
이들 대부분은 폴란드의 루블린 지역의 버그 강변에 있는 소비보르로 갔다
네덜란드에 살던 전체 유대인의 4분의 3이 살해되었는데 여기에는 네덜란드 태생의 원주민 유대인의 3분의 2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4년 가을에 마지막 이송이 이루어졌다
숨어서 살아남은 1만 명의 유대인 가운데 약 75퍼센트가 외국계였다.
반제회의에서 외무성의 마르틴 루터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잠시 동안 철수할 것을 제안했다.
이 일은 덴마크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는 독립 정부가 있었고, 비록 1940년 4월에 독일 군대가 침공하기는 했어도 1943년 가을까지는 중립국으로 존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덴마크에서는 언급할 가치가 있는 파시스트나 나치스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협력자도 없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에서 독일인들은 열정적인 지지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스웨덴이 처벌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망명을 허용하고 때로는 스웨덴 국적까지도 허용한 것이다.
한 나라에서 불법적으로 떠나는 것은 항상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지만,
허가 없이 피란지를 찾거나 이주 당국을 속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덴마크 유대인의 이야기는 아주 특별하며, 덴마크인들과 덴마크 정부의 행위는 유럽의 모든 나라들 가운데 독특한 것이었다.
분명히 유럽의 몇몇 다른 나라에서는 적절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고,
따라서 사실상 그들 대부분은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해결책에는 반대했다.
덴마크와 마찬가지로 스웨덴과 이탈리아, 불가리아도 반유대주의에 거의 면역되어 있었지만 이 세 나라는 독일의 영향권에 있었고, 그래서 오직 덴마크인들만 그들의 주인인 독일인들에게 이 주제에 대해 감히 소리내어 말할 수 있었다.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대략 6400명의 유대계 덴마크인들과, 전생 이전에 이 나라로 망명을 왔고 이제는 독일 정부에 의해 무국적자라고 선언받은 1400명의 독일계 유대인 난민들을 구별하는 아주 중요한 조치를 독일인들이 도입하지도 못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귀화를 단적으로 부정하고 노동허가조차 주지 않은 사람들을 정부가 보호하는 것은 아주 '비논리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덴마크인들은 무국적 난민들이 더 이상 독일 시민이 아니기 때문 에 나치스는 덴마크의 동의 없이 그들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없다고 독일 관리인들에게 말했다.
유대인을 구한 것이 무국적성 자체가 아니라 그 반대로 덴마크 정부가 그들을 보호하기로 결정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살인을 위한 관료제의 수립을 위해 그토록 중요한 그 어떠한 예비 적 조치들도 수행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작전은 1943년 가을까지 연기되었다.
1943년 8월 스웨덴 정부는 독일 군대가 자국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독일과의 1940년 협정을 파기했다.
덴마크 조선소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거기서 조선 노동자들은 독일 배의 수리를 거부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힘러는 이때가 오랫동안 미루어져온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수행할 적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히만의 사무실에서 가장 뛰어난 한 사람을 덴마크로 보냈는데, 그는 필수적 자질인 '무자비한 강인성' 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어느 누구로부터도 고발당하지 않은 롤프 권터였다.
(제국 전권대사 베르너 베스트 박사) 베스트는 베를린으로 가서 모든 덴마크 출신 유대인이 그들의 소속에 관계없이 테레지엔슈타트로 보낸다는 약속을 얻었다.
운명의 날을 며칠 앞두고 베스트로부터 정보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한 독일인 운송담당자 게오르크 F. 두크비츠가 모든 계획을 덴마크 정부 관리들에게 폭로했고, 이들은 다시 서둘러서 유대인 공동체 수장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만일 덴마크인들이 스웨덴을 이웃한 축복을 받지 않았더라면 유대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유대인이 스웨덴으로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였고, 이 일은 덴마크 어부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의 경우 유대인은, 1인당 5000달러 내지 1 만 달러에 해당되는 금액을 오직 현금으로만 받고 탈출허가증을 판 친위대의 '합법적인’ 협정을 해서 결국 자신의 재산을 다 바쳐야 했다.
덴마크와 스웨덴을 갈라놓은 5마일 내지 15마일의 바다를 가로질러 10월 어느 좋은 날 모든 유대인을 싣고 페리호는 떠났다.
스웨덴은 5919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는데, 이 가운데 적어도 1000명은 독일 태생이었고 1310명은 반쪽 유대인이었으며, 686명은 유대인과 결혼한 비 유대인이었다.
비덴마크계 유대인은 이전보다 살기가 나아졌고, 모두가 노동허가를 받았다. 독일경찰이 체포한 수 백 명의 유대인은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송되었다.
이 모든 일이 지났을 때 아이히만이 숙고해서 내린 의견은 “여러 이유에서 덴마크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행동은 실패였다”
정치적으로 또 심리학적으로 이 사건의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덴마크 내의 독일 당국이 취한 역할, 즉 베를린으로부터 온 명령에 대해 그들이 명백히 사보타주를 했다는 것이다.
그들 자신은 분명히 민족 전체의 처형을 더 이상 당연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이 재판에서 피고들은 서로를 고발하고 배신했으며.
자신들은 “항상 거기에 반대했다'고 세상을 납득시키려 하거나
또는 아이히만이 그런 것처럼 자신들의 최상의 재능이 상관들에 의해 “오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권력에 있는 자를 이 자신의 “복종심”을 오용했다고 고발했다. “좋은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행운이고, 나쁜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불운이다. 나는 운이 없었다”)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나치 이데올로기를 옹호할 용기를 갖지 않았다.
베르너 베스트는 뉘른베르크에서 자신은 복잡한 이중역할을 수행했다고,
그리고 덴마크 관리들이 임박한 파국에 대해 경고를 받은 것은 자기 덕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진정으로 자신이 최선을 다했음을 덴마크 법정이 만족할 만큼 입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탈리아는 독일에게 유럽 내의 유일한 진정한 동맹이었고, 동등한 취급을 받았으며 주권 독립국가로 존중을 받았다.
나치스가 이탈리아의 파시즘보다 스탈린식의 공산주의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솔리니의 편에서는 독일에 대한 큰 신뢰나 히틀러에 대한 큰 경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전체주의의 국가형태와 파시즘적 국가형태 사이의 깊고 결정적인 차이점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세상에 전적으로 이해된 적은 없었다.
그 차이점들은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데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났다.
1943년 여름에 .. 아이히만과 그 요원은 ...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 이탈리아 방식을 프랑스와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등의 국가들의 이탈리아의 점령지에서 만났다.
처형될 유대인이 끊임없이 이 지역으로 탈출했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임시 망명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이히만보다 훨씬 높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최종 해결책에 대한 이탈리아의 사보타주가 상당히 심각하게 다가왔는데
이는 주로 유럽의 다른 파시스트 정부(프랑스의 페탱, 헝가리의 호르티,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 스페인의 프랑코)에 대한 무솔리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만일 이탈리아가 자국의 유대인을 살려두기를 중지하지 않는다면
독일의 위성 국가들도 동일한 시도를 할 것 같았다.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대략 5만 명의 유대인이 안전하게 지내고 있었다.
독일의 상당한 압력으로 이탈리아인 '유대인 문제 최고책임관이 임명되었는데, 그의 유일한 임무는 이 지역의 모은 유대인을 등록받아 지중해 연안으로 추방시키는 것이었다.
2만 2000명의 유대인이 체포되어 이탈리아 지역 내부로 이송되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가장 거친 요원 가운데 한 사람인 알로이스 브루너를 니스와 마르세유로 보냈다.
제국중앙보안본부에서 일종의 조사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하튼 유대인은 거기에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탈리아 내의 인전한 곳으로 달아났고, 주변 산에 숨이 있던 사람들은 스위스나 스페인으로 갔다.
이탈리아인들이 유고슬라비아의 점령지를 포기했을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유대인은 이탈리아 군대와 함께 떠났고 피우메에서 피난지를 찾았다.
독일의 압력을 받은 무솔리니가 1930년대 후반에 반유대적 법률을 도입 했을 때 그는 통상적인 예외를 약속했지만, 그는 한 범주, 즉 과거의 파시스트당의 요원과 그의 부모와 조부모, 아내와 자녀 및 증손을 추가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이탈리아 유대인이 예외가 되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대인이 다른 이탈리아인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20년 동안 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했을 때 일어난 것이기 때문인데,
이때 공무원직은 오직 파시스트 당원만이 할 수 있었다.
파시스트에 반대한 유대인, 주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더 이상 이 나라에 있지 않았다.
아이히만도 언급했지만, 보통의 친위대원 가운데도 유대인이 있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수수께끼의 열쇠는 이탈리아가 실제로 유럽 국가들 가운데, 모든 반유대적 조치들이 단정적으로 인기가 없었던 몇 안 되는 국기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무자비한 강인성‘에서 압도되지 않을 이탈리아 파시즘은 이 국가에서 전쟁 발발 전에 외국계 및 무국적 유대인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그 시도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생사의 문제와 연관된 일에 대해서는 그들은 자신의 주권을 유지한다는
구실로 이와 관계된 유대인 주민들을 버리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이 외국인들은 자국민 사이의 민족적, 문화적 동질성에 기초한 모든 유럽의 민족국가에서 그러한 것처럼, 자연적으로 이탈리아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덴마크에서 진정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귀결, 즉 시민과 독립의 전제조건 및 책임에 대한 타고난 이해였던 것이 이탈리아에서는 오랜 문명화된 민족의 거의 자동적인 일반적 인류애(humanity)의 산물이었다.
1943년 12월 독일 외무성이 아이히만의 상관인 뮐러의 도움을 공식적으로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탈리아에 독일 관리들의 감독 하에 두는 것이 긴급하고도 필수적이라고 여긴다”
이에 따라 루블린 지역의 죽음의 수용소 출신 오딜로 글로보크니크와 같은 유명한 유대인 킬러들이 이탈리아로 피송되었다.
아이히만의 사무실에서는 예하 부서에 '이탈리아 국적의 유대인은 즉각적으로 '필요한 조차를 따라야 한다’ 는 회람 통지를 내렸다.
그리고 최초의 타격은 로마에 있는 8000명의 유대인에게 가해졌는데, 이들은 이탈리아 경찰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온 독일 경찰 부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제는 이탈리아 유대인이 비록 면제 대상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지만 이송되지는 않았고 이탈리아 수용소에 수용되기만 했다. 이 '해결책은 이탈리아에는 충분히 '최종적'이었던 것 같다.
1944년 봄 독일인들은 약속을 깨고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간 7500명 가운데 겨우 600명만이 돌아 왔다.
제11장 발칸 지역으로부터의 이송;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루마니아
제국(북으로는 러시아 제국, 남으로는 오스트리아-형가리 제국, 남동으로는 터키 제국)의 점령 하에서 수세기 동안 살아온 수많은 민족 집단들에게는 새로운 정치적 질서가 부여되었다.
그 결과 생겨난 민족국가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정치적 제도의 모범으로 삼은 구 유럽 국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적 동질성을 비슷하게라도 가진 나라는 한 나라도 없었다.
그 결과 이 나라들은 현 정부에 격렬히 적대적인 거대한 민족 집단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민족적 열망은 자신들보다 약간 더 많은 수의 이웃들에 의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1939년 3월에 프라하로 행진해 들어갔을 때 그는 독일 소수계인 수데텐도이치족뿐만 아니라 슬로바키아족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는데, 슬로바키아족은 히틀러로부터 '독립'국가 제안을 받아 해방되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거기서 다수족이며 이 나라의 통치자가 된 세르비아는 적으로 간주되었고, 크로아티아 소수민족에게는 그 자신의 민족 정부가 주어졌다.
헝가리와 루마니아, 불가리아 자신의 영역을 관대하게 확정시킴으로써 (독일, 이탈리아, 일본) 추축국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새롭게 합병된 지역에 있는 유대인은 국민으로서의 지위가 거부되었다.
그들은 자동적으로 무국적 상태가 되었고, 따라서 서부 유럽의 난민들과 똑같은 운명을 겪게 되었다.
그들은 분명히 가장 먼저 이송되고 학살될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 시절에 붕괴된 것은 소수민족 조약들의 정교한 체계였다.
유대인은 모든 계승국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소수민족이었다.
서구의 교육받은 유대인' 귀족들 대다수는
일종의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자율성은 원했지만 정치적 자율성을 원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동부 유럽의 유대인은 동지나 적 모두에게서 분명한 하나의 민족으로 인정받았다.
동화를 하는 것이 하나의 규칙처럼 된 서부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지위를 갖게 해주었다.
서부와 중부 유럽에서는 중산층 유대인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특징인데, 동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동부는) 중상층 가족들로 이들은 실제로는 지배계층에 속했고, 그들의 이방 사회에 대한(돈과 세례, 종족간 결혼을 통한) 동화의 정도는 서부의 대부분의 유대인의 동화 정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정부 설립 3주 후에 아주 의무감을 가지고 반유대인 법안을 도입했다.
그리고 독일에 있는 수십 명의 크로아티아계 유대인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정부는 그들이 '동부로 이송되는 것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송작업은 크로아니아인들 자신, 특히 강력한 파시스트 운동의 요원인 우스타쉐 당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인들은 나치스에게 각 유대인의 이송비로 30마르크씩 지불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이주지들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
국가는 자신의 국경 안에 머무르다 살해당한 유대인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래서 1943년 가을까지 3만 명의 유대인이 죽음의 센터로 이송되었다.
그제야 독일인들은 이 나라가 아직도 유대인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로아티아의 거의 모는 지배자들이 유대인과 결혼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의 유대인 가운데 살아남은 1500여 명은 분명히 모두가 이처럼 고도로 동화된, 그리고 극도로 부유한 유대인 집단이었다.
“세르비아 유대인을 다루는 일상적 명령 체계가 우리에게는 아주 분명하게 인지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어떠한 유대인도 이송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모두 현장에서 해결되었다.
1942년 8월에 군사정부 민간인 부서장인 하랄 투르너 추밀원 고문관은 자부심에 차서 세르비아는 ‘유대인 문제와 집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유일한 나라’라고 보고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피하고 자신이 죄를 범한 나라에서도 재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거나 독일의 법정에서 가능한 최고의 '이해‘를 얻었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일을 떠올렸는데, 그 공화국이 한 일이라고는 정치적 살인자가 폭력적인 반공화국적 우파 단체에 속해 있다면 그 살인행위를 용서해 주는 것이었다.
불가리아는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그리스를 대가로 상당한 정도의 영토를 확장했다.
반유대주의가 집단마다 강력히 퍼져 있던 혼합 민족지역 가운데 속하는 불가리아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도무지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1941년 1월에 불가리아 정부는 ... 대략 1만 5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5000명의 유대인이 추가로 특권(유대인인 개종하면 면제 부여)을 부여받았다.
1942년 1월에 아이히만은 ... 불가리아 정부에 접근하여 소피아에 있는 경찰 무관이 “이송을 기술적으로 완료하도록 할 것” 이라는 점을 외무성에 분명히 말할 것을 제안했다.
불가리아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과업에 최고 우선권이 주어졌던 것은 어떤 일이든 달성하려면 상당한 속도가 필수적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베를린이 입수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서야 그들은 '근본적' 조치의 방향으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1942년 11월에 ... 독일의 큰 압력을 받은 불가리아 정부는 결국 모든 유대인을 소피아에서 변방 지역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그 조치는 유대인을 집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의회와 민중이 분명히 유대인을 편들고 있었다.
단네커, 그는 공개적으로“신이 유대인의 운명을 결정했고, 인간이 유대인을 고문하고 처형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 고 선언했다.
여러 민족들이 섞여서 살고 있는 지역에서 독특한 경우에 해당하는
불가리아인들의 행위에 대해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나는 알지 못한다.
독일인들에게 북쪽을 점령당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 남쪽이 점령당한 그리스는 어떤 특별한 문제를 야기기하지 않고 따라서 그 나라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순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943년 2월 아이히만의 두 전문가는 살로니카에서...유대인을 이송시키기 위한 모든 준비를 위해 도착했다.
그곳은 그리스계 유대인의 3분의2인 약5만 5000명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지역이었다.
이것은 '유럽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의 근본를‘ 안에서 이루어진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특권을 받은 계층은 외국 여권을 가진 유대인과 늘 그렇듯 유대인위원회 요원들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합쳐서 수백 명을 넘지 않았다
같은 해(1943년) 가을, 이탈리아 군대가 괴멸했을 때 아테네와 그리스 섬들을 포함한 그리스 남부 지역 출신의 1만 3000명가량의 유대인의 소개가 신속히 완료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그리스계 유대인은 이른바 죽음의 부대에 고용되어 있었는데, 이 부대는 가스실과 화장터에서 작업을 했다.
(군당국을 대변했던, 전쟁관리위원) 메르텐 박사는 ...자기가 몰랐던 운명으로부터 유대인을 구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베를린에서 피고 측과 검찰 양쪽의 대리인이 임석한 가운데 한 피고를 위한 그의 증언도 상당히 독특했다.
아이히만이 살로니카에 있던 약 2만 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구하는데 상당히 도움을 주었으며, 또 모든 악한 일은 비슬리케니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아이히만 본인은 이 모든 것을 부인했다. 그는 살로니카에 가본 적도 없었고 도움을 준 메르텐 박사를 만난 적도 없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조직적 재능, 즉 그의 사무실에서 이루어진 소개와 이주에 대한 조정 작업이 사실상 희생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 차례 이상 주장했다.
그것이 유대인의 운명을 보다 쉽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은 자신이 '강제이주’를 통해 수만 명의 유대인의 생명을 구했다는 그의 어리석고도 집요한 주장과 길은 법주에 속하는 말이다.
루마니아에서는 친위대조차도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구식의 자발적인 유대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루마니아가 전쟁 전 유럽에서 가장 반유대주의가 심한 나라라고 하는 것은 거의 과장이 아니다.
심지어 19세기에도 루마니아는 반유대주의가 잘 구축된 것이 사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모든 루마니아계 유대인(수백 명에 해당하는 세파르디계 가족들과 일부 독일계 유대인은 예외)은 여전히 외국인 거주자 신분이었다.
이 때(1938년) 히틀러 독일의 힘을 신뢰한 루마니아인들은 소수자 협정(소수자 시민권 부여, 연합군이 설득)을 자신의 ‘주권’에 대한 강압으로 간주하여 무효를 선언함으로써 전체 유대인 인구의 약 4분의 1 되는 수십만 명의 유대인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하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을 갖게 했다.
1940년 8월,...새로운 철권 독재정부의 수장인 이온 안토네스쿠 제독(루마니아) 은 모든 루마니아 유대인이 무국적자라고 선포했다.
같은 그는 또한 독일을 포함한 전 유럽에서 가장 혹독한 반유대인 법을 제도화했다.
루마니아가 1941년 2월에 전쟁에 참전하여 루마니아 지역은 곧 있을 러시아 침공 시에 고려에 넣은 군사지역이 되었다.
오데사에서만 루마니아 병사들은 6만 명을 학살한 책임이 있었다.
루마니아 정부는 처음부터 동부에서 이루어지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아주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1941년 여름에도 루마니아 병사들은 같은 해 1월보다 작은 규모이지만...학
살과 이송 계획에 여전히 참여했다.
루마니아 스타일이란 5000명을 열차 화물칸에 발디딜 틈 없이 태우고는 여러 날 동안 목적지도 계획도 없이 교외를 계속 달리게 하여 질식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루마니아 공포의 강제수용소는 동부로의 이송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마니아인들 스스로 만들고 운영했는데, 우리가 독일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 어떤 일들보다도 더 교묘하고 잔혹한 것이었다.
아이히만 본인은 이 단계에서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한 이 같은 비조직적이고 비성숙한 루마니아의 노력을 중지해달라고 1942년 4월 외무성에 보낸 한 편지에서 탄원했다.
따라서 8월 중순(이때까지 루마니아인들은 거의 어떠한 독일의 도움 없이30만에 가까운 유대인을 죽였다)에 외무성은 안토네스쿠와 ‘유대인의 루마니아로부터의 소개 작업’을 독일 군대가 수행한다는 협정을 마쳤다.
그런데 킬링거 대사가 보고한 것처럼 제독(안토네스쿠)은 이제 유대인을 '편안한 방식으로' 제거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유대인을 현금(1인당 1300달러를) 받고 해외로 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루마니아인들은 유대인 이민에 대해 가장 열광적으로 집착했다.
이것이 바로 전쟁 기간 중 루마니아가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유대인을 이주시킨 몇 안 되는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된 이유이다.
붉은 군대가 다가옴에 따라 안토네스쿠는 훨씬 더 '온건'해져서, 이제는 기꺼이 유대인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안토네스쿠 제독이 처음부터 끝까지(히틀러가 생각한 것처럼) 나치스보다더' 철저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진행에 항상 한걸음만 앞서 있었다
그는 모든 유대인에게서 국적을 최초로 박탈했고, 또 나치스가 아직도 첫 실험을 하느라 분주했을 때 대량학살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또한 부끄러움 없이 자행하기 시작했다...
루마니아의 학살자들은 모두 정식으로 처형되었다.
제12장 중부유럽으로부터의 이송; 헝가리, 슬로바키아
옛날 옛적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헝가리의 왕이었고, 보다 최근인1806년 이후 다뉴브 지역에는 황제 같은 왕의 왕정이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왕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불안하게 지배되고 있었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 하에 있었던 1930년대 초에는 이른바 활 십자가인(Arrow Cross men)이라는 강력한 파시스트 운동이 일어났고, 1938년에는 이탈리아를 따라 그들의 첫 번째 반유대인 법들을 통과시켰다.
인종주의에 기초한 완전히 포괄적인 반유대주의가 공식적인 정부 정책이 되었을 때, 11명의 유대인이 의회 고위직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헝가리는 동부 전선에 유대인 부대(13만 명으로 비전투 지원부대였지만 헝가리 제복을 입었음)를 파병한 유일한 추축국이었다.
헝가리의 주권은 1944년 3월까지 나치스 정부가 존중해준 결과 유대인에게 이 나라는 '파괴의 대양' 가운데 있는 안전한 섬이 되었다.
베젠마이어가 1943년 12월에 외무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명시했듯이
유대인의 '전멸‘이 '헝가리가 전쟁에 참여하는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해결’은 80만 명의 유대인과 약 10만 또는 15만 명의 개종 유대인의 소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이 일의 중대성 때문에 1944년 4 월 전 부서원들과 함께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아이히만 특별 돌격대는 부다페스트에 본부를 차렸을 때 대략 10명의 요원들과 몇 명의 서기보조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바로 그날 밤에 아이히만과 그의 요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모임에 불러내어 유대인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설득했다.
이 위원회를 통하여 명령도 내리고, 그 대가로 헝가리의 모든 유대인에 대한 절대적 사법권을 부여하려고 했다.
교황 대사의 말처럼 이때는 “전 세계가 이송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 때였다.
유대인중앙위원회의 위원이 된 사람들은 이웃나라 슬로바키아로부터, 지금 자신들의 협상 대상자인 비슬리케니가 뒷돈을 잘 쟁기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고 또 모든 뇌물을 받고서도 그는“모든 슬로바키아의 유대인을 이송해버렸다...” 것도 알고 있었다.
이 같은 어려운 협상에서 발휘된 아이히만의 가장 영악한 속임수는 그와 그의 요원들이 부패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기만전술로 부패한 척했지만, 곧 실제상황이 되어 버렸다.
유대인이 그토록 많은 돈을 쓰고도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 이상한 카스의 씨의 말로 하자면, “자신의 목숨과 자기 가족의 목숨으로 떨고 있던 유대인은 돈에 대한 모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크루마이는 1944년 4월에 프로이디거로부터 25만 달러나 받았고, 구출위원회는 비슬리케니와 친위대 정보부원 몇 명을 만나는 특권을 얻는 데에만 2만 달러를 지불했다.
비슬리케니는 이른바 유럽 계획이라는 것을 다시 끄집어냈다.
이 계획(1942년 제안) 에 따르면 힘러가 폴란드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유대인에게 몸값으로 200만 내지 300만 달러를 받고 살려준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이 일을 하는 가운데 재정적으로 이익을 취했다는 점은 입증할 수 없었지만 검찰은 아이히만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생활수준이 아주 높은 것을 적절히 강조했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단체가 있었는데, 그 지도자는 적어도 자기기만에 적게 빠져 있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늘 헝가리에서는 특히 강력했다
구호구출위원회(Vaadat Ezra va Haxalah)는 팔레스타인 사무실과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었으며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유고슬 라비아와 루마니아에서 온 난민들을 돕고 있었다.
이 위원회는 자신의 활동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미국연합기부위원회와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 소수의 유대인을 합법적 또는 불법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 위원회는 세례 증명서인 '크리스천 서류‘를 위조해서 그것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지하에 은닉한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전쟁이 한창일 때 유대인 100만 명의 생명을 1만 대의 트력과 바꾸자는 힘러의 제안을 연합군 측에 제시하기 위해 파견된 불행한 밀사 조엘 브란트는 구호구출위원회의 지도적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리프 폰 프로이디거와 마찬가지로 아이히만과의 이 거래에 대해.... 브란트가 들었던 것은 '한 이상주의적 독일인이 지금 이상주의적인 유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온주의자들과의 만남에서는 아이히만이나 다른 특별 돌격대원들이
유대인위원회 위원들을 이용하기 위해 순전한 거짓말 전
략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언어규칙'도 유예되었다
구호구출위원회가 필요한 국제적 연결을 갖고 있었기에 보다 쉽게 외환을 민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헝가리의 시온주의자 대표들은 유대인위원회 위원들에게 부여된 통상적인 일시적 구속 및 이송 면책권보다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유대인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은 빈과 프라하, 베를린에서의 경험이 있는 아이히만에게는 단 2주면 되는 일이었다.
형가리에서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그 자신이 직접 계약을 성사시길 수 있 었다는 것이다. 처음 관계된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아이히만은 모든 일들, 즉 각 지역에서의 포고령 반포와 유대인의 집결 등의 일을 '번개와 같은 속도’로 확실히 진행할 수 있었다.
문제는 거의 50만 명의 유대인의 수송을 포함하고 있었다.
가스실에 투입된 죽음의 소대의 수는 224개에서 860개로 증가했으며,
하루에 6000명에서 1만 2000명을 죽일 수 있는 모든 준비가 이루어졌다.
열차가 도착하기 시작한 1944년 5월에 극소수의 '일할 수 있는 남자‘가 사역하기 위해 뽑혔고 이 소수의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에 있는 크루프의 휴즈 회사에서 일했다.
헝가리에서의 모든 작전은 두 달이 채 안 되게 진행되다가 7월에 들어서자 곧 중지되었다.
주로 시온주의자들 덕분에 이 작전은 유대인의 파국의 어떤 다른 국면보다도 더 잘 공론화되었다.
그래서 호르티에게는 중립 국가들과 바티칸으로부터 항의가 쇄도했다.
그러나 교황전권 대사는 바티칸의 저항이 '잘못된 동정심’(‘무자비한 강인성’ 대비) 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3만 3000명의 유대인이 중립국의 보호하에 부다페스트의 특별 가옥에서 살았다.
따라서 모든 측면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호르티는 이송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헝가리를 떠나 아우슈비츠로 가는 마지막 열차인 것 같다.
1944년 8월 에 붉은군대가 루마니아에 있었는데, 아이히만은 그곳으로 그의 가망 없는 일을 하러 갔었다. ... 자신들이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인들이 부다페스트에서 불과 100마일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자 나치스는 호르티 정부를 전복하여 활 십자가인 리더 페렌츠 잘라시를 국가수반으로 임명하는 데 성공했다.
학살 시설이 거의 해체될 지경이었으므로 더 이상의 운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같은 때 독일의 노동력 부족 상황은 점차 심각해졌다.
이제 5만 명의 유대인(남자16-60, 여자40세 이하)을 제국으로 이송시키는 허가를 얻기 위해 형가리 내 무장관과 협상한 사람은 제국 전권대사 베젠마이어였다.
1944년 11월에 도보행진이 시작되었다
철도 시설이 더 이상 있지 않기 때문에 1944년 11월에 도보행진이 시작되었다.
원래 80만 명의 유대인 인구 가운데 대략 16만 명 경도가 부다페스트 게토에서 살아남은 것 같고, 이 가운데 수만 명은 임의의 학살 희생자가 되었다.
1945년 2월13일 이 나라는 붉은군대에 항복했다.
이 학살에 대한 헝가리의 주요 피의자들은 모두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슬로바키아는 크로아티아와 마찬가지로 독일 외무성의 창작품이었다.
슬로바키아인들은 1939년 3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기 전에 ‘독립’을 위해 스스로 베를린에 왔다.
이때 그들은 괴링에게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데 독일을 충실히 따를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때는 어느 누구도 최종 해결책에 대해 듣지 못한 1938~39년 겨울이었다,
당시 이 나라는 가톨릭 사제인 조제프 티소(Josef Tiso) 신부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성직자 파시스트들 또는 파시스트 성직자들의 열렬한 반유대주의는 그들의 스승 독일의 초현대적 인종차별주의와는 스타일과 내용 모두에서 달랐다.
나치스는 당연히 원칙적으로 반유대적인 만큼이나 반기독교적이었다.
슬로바키아인이 기독교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영세받은 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을 나눈다.
이 모든 문제를 중세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다
그들에게 '해결책'이란 유대인을 추방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뺏는 것을 의미하지, 그들이 때때로 살인을 꺼리지는 않으나 체계적인 '학살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독립'한 지 처음 1년 반 동안 슬로바키아인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주했다.
그들은 대규모 유대인 기업을 비유대인에게 넘겼다
결론적으로 그(총돌격대장, 비슬리케니)는 친위대에서 이주 처음으로 '온건한‘ 경향을 발전시킨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이히만이 2만명의 '노동할수 있는 젊고 강한 유대인을 소개하는 협상을 위해 브라티슬라바에 나타났을 때인 1942년 3 월까지 슬로바키아에서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4주일 후 하이드리히 자신이 지금까지 예외시킨 개종한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을 동부지역에 재정착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보이텍 투카 수상을 만나러 왔다.
성직자를 수장으로 하는 이 정부는 종교를 이유로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는 '근본 결함을 수정하는 데 아무런 꺼림이 없었다,
그래서 1942년 6월까지 5만 2000명의 유대인이 슬로바키아 경찰에 의해 폴란드의 학살센터로 이송되었다.
이 나라에는 아직도 약3만 5000명의 유대인이 남아 있고 이들 모두는 예외 범주에 속해 있었다. 바로 이때, 즉 대부분의 유대인이 이미 '재정착'되있을 때, ... 브리티슬라바 유대인구호구출위원회가 비슬리키니를 매수하여 이송 속도를 늦추는 데 합의하고 또 이른바 유럽 계획도 제안했다.
바로 이때 바티칸은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재정착’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1943년 12월 에드문트 베젠마이어 박사가 티소 신부(슬로바키아 통치자)를 직접 만나러 브라티슬라바에 왔다.
티소는 1만 6000명에서 1만 8000명의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을 집단수용소에 넣을 것과 약 1만 명의 영세받은 유대인을 위한 특별수용소를 만들 것을 약속했지만 그는 이송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제 형가리의 제국 전권대사가 된 베젠마이어는 1944년 6월에 다시 나타나 이 나라에 남아 있는 유대인을 헝가리 작전에 포함시키라고 요구했다.
티소는 다시 거부했다.
붉은군대가 점차 다가옴에 따라 1944년 8월에 폭동이 슬로바키아 전역에서 일어나 독일은 이 나라를 점령했다.
제국중앙보안본부는 남은 유대인을 체포하여 이송하기 위해 알로이스 브루너를 브라티슬라바로 보냈다.
브루너는 먼저 구호구출위원회 직원들을 체포하여 이송했고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독일 비밀경찰대의 도움을 받아 또 다른 1만 2000명 또는 1만 4000명을 이송했다.
The End. 202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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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정의의 집 (49-113, 제1장-제3장)2022. 10.11 화. 여여 (1) | 2022.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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