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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제5장, 제6장 (115-180)
제4장 첫 번째 해결책;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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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눈에 뜨인 일들 외에도 아이히만의 빈에서의 행위에 대한 자신의 기괴한 설명에 대해 다른 것이 없는지, 그리고 그의 현실 왜곡이 실제로 한 개인의 거짓말하는 버릇 그 이상의 어떤 것 때문이 아닌지를 알아내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재 판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아이히만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사실 은 의심할 나위 없이' 확립되었...
세르바티우스 박사가 무시하기로 선택한 어떤 사실들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 지 않으면, 아이히만 재판과는 구별되는 아이히만 사건에 대한 어떠한 보고도 완전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대질심문에서 그는 재판장에게 빈에서 “유대인을 서로 수용할 만하고 서로에게 공평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상대로 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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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런 해결책에 도달할 수 있도록 기쁘 고 즐겁게 협조했는데, 이는 그것이 유대인 자신이 움직여 승인한 방식 의 해결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적합한 해결책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이 나라에서 떠나는 것이 모 든 유대인에게 이익이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도와야 했고 누군가가 이 지도층 인사들이 행동하도록 도와야 했는데 , 그것이 바로 제가 한 일입 니다."
요약하면 그들은 바로 작은 톱니바퀴였는데, 피고 측에 의하면 아이히만이 그 와 같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총통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의미 한다면 그들은 모두 작은 톱니바퀴였다.
아이히만의 현실 왜곡은, 그 왜곡과 관련된 공포스런 일 때문에 끔직 한 것이지만, 히틀러 이후의 독일에서 통용되고 있는 사태와 원칙적으 로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선거운동을 펼쳤던 전 국방장관 프란츠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있다. 슈 트라우스는 “당신은 그 12년 동안 독일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 까? 우리는 여기 독일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습니 다라는 널리 알려진 매우 성공적인 질문을 브란트에게 던졌다.
오늘날 독일 인들이 히틀러 시대를 지칭하기 위해 종종 사용하는 '야만이라는 단어 자체가 현실 왜곡이다. 그것은 마치 유대인과 비유대인 지식인들이 그 들에게 어울릴 만큼 더 이상 충분히 세련'되지 못한 나라를 떠난 것처 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시행한 유대인 정 책의 첫 단계에서 나치스가 친시온주의적 태도를 채택하는 것이 적절 하다고 생각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고”*, 아이히만이 유대인에 관 한 교훈을 배운 것은 이때였다. 이 '친시온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결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독일계 유대인 지신들조차도 '이화 (異化, dissimilation) 작업을 통해 '동화 (assimilation)를 해체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으로 생각하고 시온주의 운동에 대거 가담했다.
『유대인 룬트사우』의 편집장 로베르트 벨치가 고안하여 그 당시 가장 유행한 슬로건, '자부심을 갖고 착용하라, 노란별을!'은 당시 의 일반적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1939년, 유대인 최종해결)
이 슬로건이 담고 있는 논쟁의 초점은 '동화주의기를 과, 새로운 '혁명적 발전'에 합류하기를 거부한 사람들, 즉 '언제나 시 대에 뒤처진 사람들:(die ewig Gestrigen)을 겨냥했다.
매우 탁월 한 언론인 로베르트 벨치는, 당시 장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측할 수 있 었다면 절대로 그 슬로건을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최근에 말한 점 을 그 증인들은 잊어버리고 언급하지 않았다.
그 몇 년 동안 히틀러의 정권 장악이 시온주의자들 에게는 주로 '동회주의의 결정적인 패배'로 보였다. 따라서 시온주의자 들은 적어도 한동안 나치 당국과 어느 정도 범죄가 아닌 일에 협조할 수 있었다. 시온주의자들 또한 '이화와, 유대인 청년들과 희망사항인 유대인 자본가들의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가 함께 이루어진다면 이것 은 '서로에게 공정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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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들도 이 의견을 기지고 있있고.
나치스가 임명한 제국연합회(Reichsvereinigung)의 모든 주도적 직책들은 시온주의자들이 차지했다고 전한다
나치스에 의하면 시온주의자들도 역시 “민족적' 관점 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점잖은' 유대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아이히만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시온주의자들이나 팔레스타인 담당 유대인 기관의 명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게슈타포나 친위대와 접촉하 곤 하는 팔레스타인 밀사들이었다.
그들은 빈에서 아이히만과 협상했는데, 그가 “예의바 른” '소리 지르는 타입이 아니며," 심지어 그들에게 장래의 이민자들 을 위한 직업훈련학교를 세우는 데 농장과 시설을 제공하기도 했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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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들의 임무가 아니었다." 그들은 적절한 자원을 고르기 원했다. 유대인 몰살계획이 있기 전 그들의 주적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같이 자신이 살던 옛 나라에서 살 수 없도록 한 지들이 아니라 새로운 모국 으로의 접근을 막은 자들이었다. 적은 분명코 영국이었지 독일이 아니 었다.
물론 그들은 이 계약이 함축하고 있는 사악한 점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그것은 아직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생존을 위해서 유대인을 고르는 것이라면 유대인 자신들이 직접 골라야 한다고 어떻든 믿고 있 었다. 이 근본적인 판단 착오가 결국은 선택받지 못한 유대인이 필연적 으로 두 적 (나치 당국과 유대인 당국)을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낳았다. 빈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서만은, 즉 법정에서 비웃음을 산 몇십만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아이히만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유대민족의 최고 학살자 중 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될 사람이 유럽에서의 유대인을 구출하는 데 활발한 일꾼으 로 기록된 것이다."
아이히만의 기억은 그의 경력에 직 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들에 대해서만 작동했다.
이런 작은 성공 외에 이이히만은 단지 당시의 기분과 그에 맞추어서 만들어낸 선전문구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생각과 감정에는 일관성이 완전히 결여되었기 때문에, ...나치 운동은 그 성질상 계속 움직였고 한달 한달 지날 때마다 점점 더 과격해졌지 만, 가장 눈에 띄는 나치 요원들의 특징은 심리적으로 나치 운동보다 항상 한 걸음 뒤처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운동에 보조를 맞추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그들은 “자 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빈에는 그가 이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 는 몇 명의 유대인(뢰벤해르츠 박사와 상업 고문관 스토르퍼)이 있었 지만, 이들은 그의 이야기를 뒷받침해줄지도 모르는 팔레스타인의 밀 사들이 아니었다.
요제프 뢰벤해르츠는는 나치 당국을 돕기 위해 유대인 공동체 전체를 조직하여 기구화 한 첫 번째 유대인 고위층 인사였다
상업고문관 스토르퍼는 아이히 만의 도움으로 유럽 절반이 나치스에게 점령당한 1940년에 약 3500명 의 유대인을 유럽에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고, 팔레스타인들과 일을 해결하는 데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세 번째 유대인은 자신의 전쟁 전의 활동과 관련해서 아이히만이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한 파울 엡슈타인 박사로, 베를린에서 제국연합회(나치스가 임명한 유대 인 중앙 조직) 의 최종 시기에 이민을 담당했다.
아이히만이 기억한 유대인은 모두 전적으로 그의 권 력 아래에 있던 사람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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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유대인 고위층 인사들은 ”불평과 요구를 제시할 수 있었으며, 모종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아이히만은 '강제이주에 대한 그의 새로운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 독일계 유대인 지도자들을 빈으로 호 출했다.
검 찰과 판사들은 아이히만이 집행권을 지닌 직책으로 승진했을 때 진정 한 항구적인 인격 변화를 경험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때 아이히만은 또다시 시온주의 문제 에 대해 큰 관심을 표명했다.
??? 시온주의에 대한 다른 접근 해석; 자멸? 뿌린대로 거둔다.
빈에서 그는 지신의 열정을 증명했고, 이제 그 는 유대인 문제' , 즉 유대인 조직과 시온주의 당피들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의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이주와 소개(evacuation)의 '권위자 로,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법을 이는 '대가로 인정받았다.
아마도 하이드리히가 주도한 바에 따라 괴링은 베를린에 유대인 이주를 위한 제국본부를 창설하기로 결 심했는데, 그의 지령을 담은 편지에서 아이히만의 빈 사무소를 중앙본 부 설립의 모델로 사용하라는 특별한 언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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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3월
아이히만은 즉각 프라하에 또 다른 유대인 이주본부를 만들도록 임명받았다.
빈의 모델을 단순히 복사해서 프라하로 옮겼다. 그래서 모든 일이 자동적으로 시작 되었다."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몇 년 사이에 그들의 고향을 떠났고, 수백만 명이 그들 뒤에 대기하고 있었다. 폴란드와 루마니아 정부도 공식 선언을 통해 유대인을 제거하 고 싶다는 뜻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위대하고 교양 있는 국 가의 발자취를 따르는 데 세계가 왜 분개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유럽 내에서의 도피 가능성이 벌써 고갈된 것처럼 해외로 이민 기는 길도 이제 막히고 있었다.
전쟁은 1939년 9월에 발발했고, 한 달 뒤 아이히만은 베를린으로 소환되어 유대인 이주를 위한 제국본부의 수장으로 뮐러의 뒤를 이었다.
동부에서는 유대인이 이미 강제거주구역(게토)으로 수용되고 있었고 또한 돌격대에 의해 살해당하고 있긴 했지만. 베를린에서 아무리 '협동 작업라인 원칙'에 맞추어서 영리한 시스템을 만든다 해도 이민이 점차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전문영역인 유대인 문제가 이민 문제로 머물러 있는 한, 그 는 곧 실직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제5장 두 번째 해결책;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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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9월 1일, 전쟁이 발발하자 비로소 나치 정부는 공개적으로 전체주의적으로 되었고, 또 공개적으로 범죄적 성향을 띠었다.
게슈타포뿐만 아니라 형사경찰, 치안담당경찰에 속하는 모든 경찰 간 부들은 당원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의 이전 계급에 따라 친위대 계급이 부여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루 만에 과거 공무원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나치스 계통에서 가장 근본적인 부분으로 통합되 었다는 것이다.
쿠르트 달뤼에게 장군 휘하의 치안담당 경찰본부였는데 유대인의 체포가 그 책무였다. 친위대 행정경제본부의 수장은 오스발트 폴이었는네, 이 기관은 집단수용소를 담당했고, 후에는 유대인 몰살의 '경 제적' 측면을 담당했다.
이러한 '객관적인' 태도(집단수용소를 '행정을 중심으로, 죽음의 수 용소를 '경제'를 중심으로 나루는 태도)는 친위대 정신구조에 전형적인 것으로, 아이히만이 법정에서도 여전히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 었다.
세르바티우스는 “유골의 수집, 종족 근절, 가스를 사용한 살인,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의학적 문제를'에 대한 책임에 기초한 고소 내용에 대해서는 무죄라고 선언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의사가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것 은 살인의 문제이고, 살인 역시 의학적 문제입니다:
그는 다시, 아이히만이 아니라 그의 부하 중 한 사 람인 를프 권터가 “의학적 문제에 항상 개입했다'고 말했다.
전시조직 상태에서...제국중앙보안본부는
제Ⅳ부는 게슈타포 사무실이었고 부장은 하인리히 뮐러 (소 장)였는데...그 의 임무는 '국가에 적대적인 작과 전투를 하는 것으로 이는 두 범주로 나뉘고 이에 따라 이를 다루는 두 예하부서가 있었다. 예하부서 제IV-A 부는 공산주의, 사보타주, 자유주의, 암살행위로 고발된 '적를을 다루 었고, 예하부서 제Ⅳ-B부는 '분파를 즉 가톨릭, 개신교, 프리메이슨 ,그리고 유대인 을 다루었다,
이들은 각각 히틀러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는 힘러의 지휘 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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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러는 자신의 수하에 있던 열두 개의 본부 외에도 완전히 다른 조직 구성을 주관했는데, 이것도 또한 최종 해결책의 수행과정에서 지대한 역힐을 하게 된다. 이 조직은 친위대 고위층과 지역조직을 관장한 경찰 수뇌부의 네트워크였다.
기술 적으로 또 조직상 아이히만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의 지위가 그처럼 중요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이유에서 유대인 문 제가 전시기간 동안 매일, 매주, 매달 점점 더 중요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인데, (1943년 이래로) 전쟁에서 패하는 해까지 그 문제의 중요성은 환상적인 비례로 증가했다.
나아가 이 모든 기관들이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면서 서로 격렬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야심은 항상 같은 것, 즉 가능한 한 많 은 유대인을 죽이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지신의 직책상 무죄를 입증하는 것이 당사 자의 바람이 된 것이다.
그 비망록에는 아이히 만이 자기가 결코 하지도 않았고 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도 않다고 주장한 일들을 한 것으로 고발되어 있었다.
우리가 전에 만났던 한스 글로브케 박사는 뉘른베르크에서 검사에 게 증언할 때 외무부의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이 몸담은 내무부의 무죄 를 주장하려 했다. 한편 아이히만은 항상 튈러와 하이드리히 , 칼텐브루 너를 변호하려고 했다.
아이히만이 제국중앙보안본부 제Ⅳ부의 새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도 한편으로는 '강제이주'가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식적 방법이지 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주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유쾌하지 않은 딜 레마에 여전히 직면해 있었다.
자기가 끝없이 고생한 이유란, 자기와 자기 부하들이 결코 독자적으로 활동하 도록 내버려둔 적이 없었다는 것, 국가와 당의 다른 사무실에서 '해결 책' 가운데 자신의 몫을 원했고, 그 결과 여기저기에서 한 무더기의 이 른바 '유대인 전문가들'이 갑자기 나타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공을 세 우려고 열을 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이 사람들을 아주 몹시 경멸했는데,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신참들이었기 때문이고, 부분 적으로는 그들이 부자가 되려고 했고, 또 종종 자기 일을 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부를 모을 수 있기 때문이며,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무지했기 때문에, 즉 그들은 한두 권의 기본서적 조차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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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영토가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분할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독일 부 분은 제국으로 통합된 서부 지역과, 이른바 일반정부(the General Government)라고 알려진, 바르샤바를 포함한 동부지역으로 구성되었다.
동부지역은 잠시 동안 점령지로 취급되었다.
이 시기에 유대인 문 제의 해결책은 여전히 '강제이주였다. 독일을 유대인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합병지역에 있던 폴란드계 유대인이 제국 의 다른 지역에 남아 있던 유대인과 함께 일반정부 지역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아이히만이나, 프라하와 빈에서 그의 상관이 었던 프란츠 슈탈렉케르 여단지휘관은 일이 이렇게 발전하리라고 수개 월 전에 예견했음이 분명하다
1939년 9월로 아직 독일 군대가 폴란 드 영토를 점령하는 데 분주했고, 아이히만과 슈탈렉케르 박사가 동부 지역에서 보안대가 어떻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가에 대해 '사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섭정의 형태로 자율적인 유 대인 국가를 수립하기세해 개척할 수 있는, 폴란드에서 가능한 한 넓 은 지역이었다. 이것은 최고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서 그들은 더 나아가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스스로 주도적으로 사전 조사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러시아 국경에서 많이 떨어져 있지 않은 산 강가의 라돔 구역으로 가서, 거기서 “넓은 땅과 마을, 시장, 작은 도 시들을 보았다: ...
이 것이 적어도 일정한 기간 동안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 (그들 발 아래의 확고한 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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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대의 모는 '부서장들'의 회의를 소집해서 가까운 미래를 위한 일반 적인 지시를 내렸다. 그것은 유대인을 게토에 수용하고 유대인 장로들 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만들며 모든 유대인을 일반정부 지역으로 이송 하는 것이었다. ...
한 친위대 장교(에리히 라자코비치로, 후에 네덜란드계 유 대인의 이송을 책임지게 됨)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총통 께서 유대인에게 새로운 고향을 으쓱하셨다. 그곳에는 살 곳도 집도 없 다. 너희들이 지으려면, 너희들 머리 위에다 지붕을 둘 수 있을 것이다. 물도 없고, 주위의 우물에는 병균이 득실거리고, 콜레라와 이질, 장티 푸스가 있다. 너희들이 구명을 뚫어 우물을 발견하게 된다면 먹을 물을 얻게 될 것이다."
‘자기의’ 유대인을 위한 영토를 획득하려는 아이히만의 일성은 그 가 친의 경력을 중심으로 이주 잘 이해될 수 있다.
'유대인 발아래 확고한 땅을 두려는' 아이히만의 두 번째 시도는 마 다가스카르 계획이었다.
'유대인 국가는 힘러의 관할 하에 경찰총독 을 갖게 될 것이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국가라는 이념을 주장한 유대인 테오도어 해르출이 한따1 꾸었던 꿈'을 자신이 꾸고 있었 다고 늘 주장했다.
폴란드 정부가 거의 3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죽이기 않고 그 곳으로 배로 운송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하튼 아이히만은 1940 년 여름 그의 이주사업이 완전히 중지되었을 때 400만의 유대인을 마 다가스카르로 소개하는 세부계획을 수립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 기 획을 위해 그 다음해 러시아 침공이 시작될 때까지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한 것 같다.
마다가스카르 계 획은 항상 모든 서유럽 유대인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일을 준비하는 외투로 사용하려는 의도에서 수립되었다.
이 계획의 가장 큰 장점은 유대인을 유럽으로부터 완전히 제거하는 것 외에는 어떤 조치도 충분하지 않다는 예비적 관념을 관계자 모두에 게 친숙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떠한 특별법도, 어떠한 '이화(異化) 도, 어떠한 게토도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말이다.
'옮겨 놓을 수 있는 어떠한 지역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일한 '해결책'은 전멸뿐 이었다.
그 중 하나는 하이드리히가 텔레타이프로 쓴 편 지로 돌격대에 내리는 어떤 지시를 담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오랜 시 간을 필요로 하는 최종 목표와 '이 최종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를 처음으로 구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히만은 이 문서를 조심스럽게 읽은 뒤 즉각적으로 '최종 목표가 '신체적 전멸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고 말하 며, “이 기본적 생각은 고위 지도자들과 최상층 인사들의 마음속에 이 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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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발발한 때 (히틀러는 1939년 1월 30일 국경일에 있었던 연설에서 전쟁이 ‘유럽에서 유대 인종을 멸절시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러시아 침공 시기 사이에 분명히 그때도 제국과 합병된 지역에서는 여러 부서에서 '적,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겠지만 어떠한 통일된 정책은 없었을 것이다. 모든 부서가 각각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적용하도록 허가를 받았거나 다른 부서와 해결책을 찾도록 했을 것이다.
러시아에 대한 전쟁이 “갑자기 청천벽력처럼” 발발했다. 그것은 그의 꿈의 종말을 의미했고, “양편의 이익에 맞추어 해결을 추구하려던 시대”의 종말을 고한 것이다.
“개별 유대인을 다루기 위한 법과 조례와 칙령이 존재하는 시대의 종말' 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의 경력의 종언이기 도 했다.
모든 유대인 문제에서 최종적 권위체가 되었을 자신의 직책이 이제 는 “유대인 문제에 관한 최종 해결책에 관련된 한에서는 두 번째 자리 로 밀려나게 되었고, 지금 시작되는 일들은 다른 부서로 이송되었으며 협상은 전 제국지도자 겸 독일 경찰청장의 휘하에 있는 다른 본부에 의 해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산이 이루어진 것 은 다양한 살상 설비들의 수용능력에 따른 것이고, 또 일부 죽음의 수용소들 인근에 지시를 차려놓고 노예 노동자들을 이용하여 이익을 보려는 수많은 기업체들의 노동력에 대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노동 조건을 고려해 보면 분명히 노동을 통한 살인을 생각 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위로를 받 은 유일한 일은 1941년 10월에 있었던 상급대대 지휘관으로의 승진이 었다.
1942년 9월의 일로 이때는 러시아 침공 후 3개월이 지난 때였다. 하이드리히는 기자회견을 가졌고 8주 일 후면 자신의 통치지역에서 유대인은 없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여기에 대해 아이히만은 “만일 당신이 선언한 것을 철회하지 않으려면 오직 한 가지 가능성만이 존재합니다. 보호지역 내에 지금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을 이송해 모아놓을 수 있는 공간(디아스포라로 망명지에 흩어져 있는 자들을 모아 놓을 유대인의 고향)을 충분히 주십시오'라 고 말했다.
독일 출신의 특권층의 유대인을 위해 사용할 게토로 처음부터 하이 드리히가 고안한 것이었음을 알고 있다.
이 마을은 너무나 협소한 것이 입증되어 이 게토가 지이진 지 1년 뒤인 1943년에는 인구과다를 규칙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살빼 기' 또는 '감축' 절차가 (아우수비츠로 이송시키는 방식으로) 시작되었 다.
그의 기억은 인간적 관심을 끄는 최악의 이 야기로 기득 찬 창고와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가 브라티슬라바로 파견된 이유가 '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을 이주시키 는 현재의 행위'를 넘겨받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서류를 대 면하게 되었다.
유대인을 소개하고 이송하는 것은 통상적인 업무가 되었다.
??? 같은 업무가 지속되면, 무감각해질 것이다.
일상의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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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던 때가 정치적 해결책의 시대가 가고 신체적 해결책의 시대가 시작한 때이다.
하이드리히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날짜까지 실 제로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 것은 유대인이 쉽게 죽음의 센터 로까지 이송될 수 있도록 하는 지점들에로 수용하고 이동시킨다는 것 을 의미할 뿐이다.
제6장 최종 해결책: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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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7월 31일 히틀러의 대리인 역할을 담당한 해로만 괴링 제 국원수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하이드리히가 이러한 지시를 받았을 때 그는 이미 “유대 인 문제 최종 해결책을 준비하는 과제를 수년 동안 위임받아 왔다." (라이트링거) 그리고 러시아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줄곧 그는 동부 지역에서 돌격대를 통한 대량학살을 책임지고 있었다.
하이드리히는 '이주에 관한 간단한 말로 아이히만과 면담하기 시작 했다.
총통께서는 유대인의 신체적 전멸을 명령하셨다."
이제 저는 모든 것, 제 일에 대한 모든 기쁨, 모든 주도 권, 모든 관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지쳐버렸습니다. 그리 고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 그는 유대인을 제 거하기 위해 러시아 탱크용 참호를 이용하는 것 같아.' 저는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해요. 제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말을 잊지 못할 겁니다.
그 말은 실제 학살 과정 에서의 자신의 권한 문제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상당한 불 이익을 가져다줄 내용이었다. 그(글로보크니크, 경찰수뇌부)는 아이히만에게 전체계획이 “친위대 행정경제본부의 권한 아래 두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몰살을 위한 공식 암호는 '최종 해결책이 라고도 말했다.
1941년 3월까지 유대인이 곧 제거되는 것은 당 고위직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었다.
아이히만은 결코 당 고위층에 속해 있지 않았다.
총통의 명령을 명시적으로 들었던 사람들은 더 이상 단 순한 '명령을 받은 자가 아니라 '비밀을 가진 자가 되었고 따라서 그 들은 특별서약을 했다.
이 문제를 다루는 모든 문서들은 엄격한 '언어규칙'을 따랐 다.
제거' '박멸' 또는 '학살 같 은 명백한 의미의 단어들이 쓰여 있는 보고서를 발견하기는 거의 드문 일이다. 학살을 처방하는 암호는 '최종 해결책' 소개'(Aussiedlung)와 '특별취급' (Sonder-behandlung) 등이었다.
이송에는 ( '거주지 변경' 이라고 불린 특권층 유대인을 위한 '노인들의 게토' 테레지엔슈타트로 가는 유대인을 포함한 경우는 제외하고) '재정착' (Umsiedlung)과 '동 부지역 노동(Arbeitseinsatz im Oste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외무부 고위관료가 바티칸과 교환되는 모든 서신에
유대인 학살을 '근본 해결책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 규칙은 이 문제 처리에 본질적이었던 아주 다양한 많은 협조체제를 이루어 갈 때 질서와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음이 입증되었다. 더욱이 '언어규칙'(sprachregulung)이란 용어 자체가 암호였다.
그 말은 일상어로는 거짓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지칭할 수 있었다. '비밀을 가진 자가 외부에서 온 사람을 만날 때 명령과 더불어 '언어규칙'을 받았다.
이러한 거짓말 체계의 통상적 효과는 자신들 이 하고 있는 일을 그와 같은 사람들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살 상과 거짓말에 대한 그들의 오랜 '정상적인' 지식과 동일시하지 않도 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 체계는 아이히만이 곧 발견하는 것처럼 현실에 대한 완전 한 방패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최종 해결책이라는 표현을 자신의 신분을 확신시기기 위한 일종의 암호처럼 사용했다.
회스의 비망록에 따르면 그 상 해한 내용이란 기스시용에 관한 것이었다. 아이히만은 이 점을 극구 부 인했다. 그가 아마도 옳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가스 사용에 대해서는 아이히만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회스에게 정기적으로 가서 의논한 제부사항이란 수용 소의 (1)학살 능력 (주당 얼마나 많은 이송 분량을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 한 것이었고, 또 아마도 (2)수용소 확장에 대한 계획도 있었던 것 같다.
치안 경찰 경위 (범죄 담당관, 독일에서 '치료할 수 없을 만큼 병든 사람를 에 대한 가스 사용의 책임자)가 설명했다. “통속적이고 교육받지 않은 어투로" “러시아제 잠수함용 엔진을 기동시켜 이 건물로 가스가 들어와 유대인 을 독살하도록 하는 이 모든 설비들이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를"
그해 가을에 그는 직속상관인 뮐러의 지시에 따라, 제국에 통합된 바르테기우라고 불렸던 폴란드 서부 지역의 학살센터를 조사하러 갔 다.
이 죽음의 수용소는 쿨름(폴란드 말로는 해움노)에 있었는데, 이곳 은 유럽 전역에서 이송되어 우츠(Lödz) 게토에 '재정착한 30만 명 이 상의 유대인이 1944년에 실해된 곳이다.
가스실 대신 이동용 가스차량이 사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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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트럭은 넓게 파인 구덩이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고 그리로 시신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일은 그가 또다시 튈러의 명으로 백러시아 민스크로 파견되었을 때 일어났다.
... 잠을 잘 수도 없으며, 악몽을 꾼다고 아이히만이 뮐러에게 말했지만, 뮐러는 약 9개월 후에 그를 루블린 지역으로 다시 보냈다.
저는 그 모든 것들을 가까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벌거벗은 한 무리의 유대인이 가스가 투입될 큰 홀로 어떻게 줄지어 들어가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는 살상 설비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서, 학살 방법으로는 총살과 가스 주입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총살은 돌격대가 실행했고 가스 주입은 수용소에서, 즉 작은 방 에서 또는 이동차량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수용소에서는 희생자들을 끝까지 속이기 위해서 면밀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제 대로 알 만큼만은 보았다.
이 사실들은 재판이 시 작되기 오래전에 입증이 되었고, 그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고백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종종 지적한 대로
그를 교수형에 처하고도 남을 만큼 증거는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학살이 아니라 수송에 종사했기 때문에 그가 적어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알고 있었는 지는 법적, 형식적으로 의문이 남아 있었다.
이 모든 의문들 가운데 가장 혼란스러웠던 마지막 질문 한 가지가 판시들, 특히 주심 판사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유대인 학살이 자신의 양심에 어긋난 것이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첫째, ...그가 '임박한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동을 한 것이라는 이유로 그가 형사적 책임을 면할 수 있는가? ...
그가 '불법행위의 결과가 가져올 위험을 경감시키려고 최선을 다하거나 또는 귀결된 결과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회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그는 정상참작을 청원할 수 있는가?
유대인 특별부대는 '임박한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범죄행위를 했으며, 유대인위원회( Joodsche Raad)와 장로회는 '귀결된 결과보다 더 심각한 결괴를 회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협력했다.
뉘른베르크 보고서에서는 “처형에 참여하기를 거절한 이유로 사형을 받은 친위대 대원들은 단 한 사람도 발견되지 않았다”*
. “다른 부대로 전근을 신청하는 방식으로 임무를 회피하는 것은 기능했다. 분명한 것은 개개의 경우 어떤 정계성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생명에 위협을 가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친위대 대원이었기 때문에 결코 군법회의에 회부되지 않을 것이고. 단지 경찰 또는 친위대 법정에 회부될 뿐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일이 허용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항상 생각했고 그것은 단지 또 다른 월급을 많이 받는 일로 전환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임박한 죽음의 위합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맹세한 대로 모든 명 령에 복종했고, “자신이 의무를 항상 완수'하는 데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사형선고는 기정 사실화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감의 가능성은 범죄의 흉악성에 비추어 볼 때 아주 희박했다. (피고 측 변호사가 상관의 명령이라는 점에 호 소하지 않고 '국가적 행위‘라고 주장하며 그런 이유에서 무죄석방을 요구한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적 행위' 란 독일 법 에서는 그 효과를 보다 잘 설명해 주는 방식으로 이름이 붙어져 '면책 의'(gerichtsfreie) 또는 '재판권이 면제된 사법적 행위'(justizlose Hoheitsakte)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주권적 권력의 행사에 의존하는 것이다*
만일 아이히만이 한 일들이 국가적 행위였다면, 그의 상관 들 즉 국가수반인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어떠한 법정에서도 재판받을 수 없다.
-동부지역의 학살센터를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직후인 1941년 9월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희망에 따라 독일과 보호령으로부터 첫 번째 대량 이송을 체계화했다.
자발적인 제안조차 원하지 않아서 항상 '지시'해 주 기를 바란 아이히만이 이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명령과 반대되 는 제안을 했다.
그런데 준비상황을 제가 보았 기 때문에 사용 기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 사람들을 우츠로 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피고 측 변호사는 이 사건에서 아이히만이 할 수만 있다면 언제나 유대인을 구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
그를 심문한 검사는 아이히만 본인이 모든 선적의 최종 도착지를 결정했고, 따라서 이송된 특정한 사람들이 처형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했다는 점을 입증하려 했다.
따라서 우리는 과연 피고가 양심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한 란다우 판사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 그렇다. 그는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양심은 4주 동안 예상한 방식으로 기능을 했지만 그 후에 그것은 정반대 방향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총통의 명령에 대해 알기 전까지 아이히만은 동부에서 돌격대의 살인적 만행을 알고 있었다.
“보다 신속한 어떤 수단을 통해 일할 수 없는 유대인을 살해 하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해결책이 아닌가. 여하튼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을 굶겨 죽이는 것보다 더 낫지 않은가'라고 제안하며 이를 고려해 보라는 메모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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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이 제안은 단지 현지의 유대인만 관련된 것이지 제국이나 다른 서방국가 출신의 유대 인과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양심은 살인이라는 생각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살해되는 사람이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생각에 저항한 것이다.
러시아 점령지 총경이 있던 빌헬름 쿠베(1942)는
”그러나 나와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 들은 동물과 같은 토착민 군중들과는 분명히 다른 존재요."
오늘날 독일인들 가운데에는 '오직 동부 유럽 유대인만 학살당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못된 정보에 대한 확고 한 믿음이 존재한다.
'원시적인' 사람과 '문화적인' 사람들에 대한 학살을 구별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독일인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인종주의의 소산?
바론(salo w. Baron) 교수의 증언과 관련해 하리 물리슈 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어떻게 갑자기 자신에게 떠올랐는지를 말했다.
“유대인이 만일 문화가 없는 민족이라면 그들의 죽음은 보다 덜 악한 일이 되었겠는가?
아이히만은 인간 도살자로 재판을 받고 있는가 아니 면 문화의 파괴자로 재판을 받고 있는가?
인간 도살자가 그 과정에서 문화도 또한 파괴했다면 그 죄는 더 무거운가?"
“그〔하우스너 씨〕는 그렇다고 생각하고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7월 음모자들은 실제로 전 나치스였기나 제3제국에서 고위 직에 있던 지들이었다.
게르하르트 리터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전쟁 기간 에는 어떠한 조직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저항도 독일에서 존개하기 않 았기 때문이다.
독일인 절대 다수가 히틀러를 신봉하고 있었다.
전쟁이 계속되고 패배가 확실해졌을 때. 경기적 입장의 가기는 그다 지 중요히지 입게 되었고 정치적 행위가 보다 시급하게 이루져야만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음모자 모임에서는 정부의 범죄에 깊이 연 루된 상당수의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1943년 여름, 힘러의 지시에 따른 학살 프로그램이 절정에 달했을 때 괴르델러는 힘러와 괴벨스를 잠정적 동지로 고려했 다.
히틀러에게 등돌린 이들은 아무리 뒤늦게라도 가신의 생명을 바쳐야 했고 이주 끔직한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거의 전적 으로 독일이 앞으로 패배하고 폐허가 될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움직였다.
고위 관료층은 히틀러의 이른바 '위원회의 명랑이 1941년 5월에 발표되어 다가오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모든 소련 관료 들은 물론 모든 유대인이 간단히 학살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분명히 갈등을 겪었다. 괴르델러가 말한 것처럼 “점령지에서 유대인에 대해 인간 말살 기술과 종교적 처형 기술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관해 이 모임은 관심을 두었다.
그들이 맹목적인 증오로 인해 '국가주의적'이고 '비이성적'이라고 손쉽게 비판 한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와 이러한 잔혹한 일들이 모종의 연관성 을 갖고 있다는 생각도 그들에게는 결코 들지 않았다. 1943년 독일이 결국 패배할 것이 거의 확실해졌을 때, 그리고 이 시기 이후에도 그들 은 히틀러가 얼마나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또 정당한 근거가 없는 전 생을 시작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이 '동등한 자 격으로' '정의로운 평화를 위한 협상을 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정의로운 평화에 대한 그들의 기준이었다.
그런데 핵심적인 것은, '정권의 가장 파렴치한 점'이 다기올 패배로 인해 발생하게 될 파국에 대한 '책임을 군 지휘관들'에게 물으려 했다는 것이었다.
분명 한 것은 괴르델러가 “독일계 유대인의 죽음과 잘못된 대우에 대해 보상 할 것"을 제안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안이 있었던 1942년에 는 그것이 단지 독일계 유대인의 문제만이 아니었고, 단지 잘못 대우받거나 약탈당하던 때가 아니라 가스로 살해당하던 때였다.
이는 이른바 '영구적 해결책'이라는 것으로 “[모든 유렵의 유대인을〕유럽의 '객(客) 민족이라는 다소 바람직하지 못한 그들의 지위로부터 구원하려는" 것이었다. (아이히만의 어법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에게 “그들 발아래 확고한 땅을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래도 괴르델러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영구적 해결책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 그리고 괴르델러는 당과 심지어 친위대의 상층부 내에서 자신의 프로그램의 이 부분에 대한 수 많은 '잠재적 동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이렇게 쌓인 증거로부터 사람들은 양심 자체 가 독일에서 명백히 사라졌으며, 사람들이 양심에 대해 거의 기억조차 못하고, 이 놀라운 '새로운 독일적 가치가 외부 세계와는 공유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다고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독일에는 이 정권의 초기부터 결코 동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레크말레체벤이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 등의 극소수 사람만이 대중적으로 알려짐).
보다 많은 사람들, 특히 베를린의 노동자들과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자신과 안면 있는 유대인을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실질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이러한 사람들의 입장은 음모자들의 입장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는 그들의 능력은 온전하게 남아 있 었고 결코 '양심의 위기를 경험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영웅도 성인도 아니었고 완전한 침묵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그들의 선생 쿠르트 후버의 영향을 받은 숄 남매는 그 유명한 전단을 뿌렸는데 거기서 그들은 히틀러를 마침내 그의 실재의 모습대로, 대량 학살자라고 불렀다.
나치 고위층 가운데 양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재능이 있었던 요원은 힘러였다.
'나의 명예는 나의 충성심(1931 히틀러의 친위대 연설)'과 같은 슬로건들을 만들어 냈다. 이러 한 구절들을 아이히만은 '날개 달린 말들이라고 불렀고 재판관들은 '공허한 말들'이라고 불렀다.
아이히만은 이 말들 가운데 한 가지만을 기억해서 계속 반복했다. 그것은 “이는 미래의 세대들이 다시는 싸울 필요가 없는 전쟁이다'는 것으로 여성과 아이들, 노인들, 그리고 다른 '쓸모없는 입들’에 대한 전쟁임을 암시했다.
“인간적 연약함으로 인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 것을 참고 견디는 것, 품위를 지키며 남는 것, 그것이 우리를 강하게 만 드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결코 쓰인 적이 없었고 결코 쓰이게 되 지도 않을 우리 역사의 영광의 한 페이지이다.”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 라는 명령, 이것은 한 조직이 받을 수 있는 명령 가운데 가장 무서운 명령이다”(힘러가 돌격대 지휘관들과 친위대 고 위층과 경찰 지도자들 앞에서 행한 연설).
살인자들은 사디스트나 천성적인 살인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육체적 쾌락을 얻는 사람들을 모두 색출하는데 체계적인 노력이 기울여졌다.
따라서 문제는 양심을 어떻게 극복하 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이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는 데서 느끼게 되는 동물적인 동정심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 는 것이었다.
힘러가 사용한 책략은 아주 단순했고 또 아주 효과적이었 던 것 같다. 그것은 이러한 본능을 뒤집는 것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 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 을 하고 있는가, 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 라고 살인자들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힘러의 독창적인 표어들과 관련된 아이히만의 결함 있는 기억은 양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다른 더 효과적인 장치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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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종종 '주검들을 도처에서 볼 때',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무관심하게 기대하게 될 때, 수음에 내해 다른 개인적 대로를 갖게 된다는 점을 종종 주장했 다.
이 같은 폭력적 죽음 속에서 특히 효과적인 것은 마지막 단계로 들 어간 최종 해결책으로 총살, 즉 폭력을 통해 수행하지 않고, 가스 공장 에서 수행했디는 사실이다. 이는 개전 후 몇 주일이 지나 히틀러가 명 령한 '안락사 계획과 처음부터 끝까지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러시 아 침공 때까지 독일에서는 정신병에 적용시킨 계획이었다.
그들에게 희생된 전체 유대인의 수는 힐비1르크에 따르면 기의 150만에 달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 체 유대인에게 신체적 처형을 하라는 총통의 명령에 따른 결과가 아니 었다. 그것은 그 이전의 명령, 즉 히틀러가 힘러에게 1941년 3월에 내 린 '러시아에서 특별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친위대와 경찰을 준비하라 는 명령의 결과였다.
러시아와 폴란드계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을 처형하라는 총통의 명령은 비록 나중에 내려졌지만 훨씬 이전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총통의 자문실(Chancellery), 즉 히틀러의 개인 사무실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전쟁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 고 군사적 필요를 핑계로 삼은 적이 없었다. 동부지역의 가스공장 학살 계획은 히틀러의 안락사 계획에서 싹텄다;
그리고 아이히만의 재판이 '역사적 진실'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이러한 사실적 연관성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은 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 개별 사안, 팩트 규명에 골몰하느라, 전체 흐름, 맥락을 놓쳤다
최초의 가스 방들은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한 1939년 9월 1일자 포교령을 이행하기 위해 그해 건설 되었다.
1935년에 이 미 히틀러는 자신의 제국 의학지도자 게르하르트 바그너에게 “전쟁이 발발하면 이 안락사 문제를 나루고 해결하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전시 에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 쉽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었다.
이 포고령은 정신병자들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수행되어 1939년 12월과 1941년 8월 사이에 대략 5만 명의 독일인들이 시설에서 일산화탄소 가스로 살 해되었다. 이 시설에 설치된 죽음의 방들은 나중에 아우슈비츠에서 그랬던 것(샤워실 또는 목욕실로)과 똑같이 위장되었다.
동부지역에서의 가스 사용(나치스의 용어로 하면 자람들 에게 안락사를 허용함으로써'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는 살인)은 독일 에서의 가스 사용이 중지된 거의 같은 날에 시작되었다. 독일에서 안락 사 계획에 고용된 사람들은 이제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한 새로운 시설들을 만들기 위해 동부로 보내졌다.
기만과 은폐를 위해 교묘하게 고안된 다양한 '언어규칙' 가운데 이처 럼 히틀러가 첫 번째 전쟁을 벌이는 데 살인자들의 정신상태에 작용한 것보다도 더 결정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은 없었다. 여기서 '살인이라 는 말 대신 '안락사 제공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을 일으키는 것이었다는 것이 아직도 너무나 확고하게 그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를 진정으로 동요하게 만든 일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비난이 아니라 자기 가 유대인 소년을 때려죽인 적이 있었다는 (법정에 의해 기각된) 한 증 인의 비난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가스실의 수용능력이 계속 증가함으로써 이런 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마도 안도했을 것이다. 이 새로운 방식이 사용된 것은 유대인에 대한 나치 정부의 태도가 결정적 으로 향상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앞서 언급한 레크말레체벤은 농부들에게 격려 연설을 하기 위해 1944년 여름에 바바리아로 갔던 한 여성 '지도자는 다가올 패배에 대해 농부들에게 솔직히 말했고, 여기에 대해 훌륭한 독일인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총통이 “자비심 많게도 모든 독일 국민들을 위해 전쟁이 불행한 종말을 맞을 경우를 대비하여 가스 사용을 통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
이 사건은 1945년 1월, 러시아가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폐허지를 점령하여 연방으로 합병시키기 며칠 전 독일의 다른 민방인 동프러시아의 괴니히스베르크에 서 일어났다.
'러시아인들은 결코 우리를 잡지 못할 것이에요.
총통께서는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그가 우리에게 가스를 줄 것이니까요.
???일본 2차대전 함락시, 미군상륙전, 섬주민들에게 집단자결 명령했던 사례, 거부하면 죽음을 도와주었던 사례.
나는 은밀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말이 정상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아차린 것 같지 않았다."
한 목소리, 더 욱이 여성의 목소리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들려왔다. 이제 그 모든 좋고 값비싼 가스를 모두 유대인에게 낭비해버렸으니 !
???유대인에게는 가스 조차 아까웠다?
The End. 2022.10.18.
가스가 지닌 유용성의 가치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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