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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정의의 집 (49-113, 제1장-제3장)
2022. 10.11 화. 여여
제1장 정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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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정의의 집).
통역사들의 불어 통역은 탁월하 고 영어 통역은 참고 들어줄 만한데, 독일어 통역은 완전 코미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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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시들의 행동에 극적인 요소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재판장 모세 란다우 (Moshe Landau)는 통역사가 통역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답한 적이 거의 없었다. 또 종종 통역에 끼어들어 고치고 수정해 주기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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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대질심문 때에는, 심지어 아이
리만과 대화 시 동료 재판관들에게 그들의 모국이인 독일어를 사용하 라고 권유리기도 했다.
전반적인 재판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은 란다우 판사였다.
이스라엘 수상인 다비드 벤구리온(Daⅵd Ben-Gurion) 이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하여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책' 1) 에 대한 그의 역할을 재판하도록 예루살렘 지방법원으로 압송하기로 결정했을 때 염두에 뒀던 쇼와 같은 재판을 위해서 이 법정은 분명히 그리 나쁜 장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의 설계사라는 적 절한 칭호로 불렸던 벤구리온은 이 소송 절차의 보이지 않는 무대 매니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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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대에 오른 것은 그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유대인의 고통이나 독일 민족 또는 인 류, 심지어는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
재판 기간 동안 검사에게 기자회견과 Tv 인터뷰가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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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은둔을 요구하고, 분노보다는 슬픔을 허 용하며. 그 자신을 주목받는 자리에 놓음으로써 갖게 되는 모든 쾌락을 이주 조심스럽게 피하도록 처방한다.
이번 경우는 “유대인의 비극 전체가 주요 관심사가 될 것이다.” ...“
우리가 어떤 인종차별도 하지 않기 때 문이다.” ...이 소송사건은 아이 히만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이 무엇을 겪었느냐를 바탕으 로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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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오로지 유대인 법정만이 유대인에게 정의를 실현해줄 수 있으며, 그들의 적들을 심판 하는 자리에 앉는 것은 바로 유대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그는 믿었다.(법무장관 하우스너)
따라서 “우리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호언장담을 하게 된 것이다,
랍비의 법으로 유대인 시민권에 대한 개인 자격을 규정하는 이 스라엘에서는 어떤 유대인도 비유대인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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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비유대인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고, 오직 이스라엘에서만 유대인은 안전하고 명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흐국국1시켜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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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나름 대로의 결론을 이끌기 위해 이 재판이 필요하지도 않은, 나처럼 유럽 에서 이주한 중년과 노년의 '생존자들이었다.
유리 부스 안의 인물은 더욱더 창백해지고 더욱더 유령과 같은 모 습으로 변해가서, “바로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괴물이 앉아 있다" 고 소리치며 손가락질해도 그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지 못할 것처 럼 보였다
재판이란 희생자가 아니라 행위자와 함께 시작되고 끝나는 연극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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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파도 위에서 출령이는 배'와 같은, 피투성이의 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재판은 결코 연극이 되지는 않았지만, 벤구리온이 처음에 염두에 두었던 쇼, 즉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간 단히 말해 전 세계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교훈을 담은 쇼는 이루어졌다. 바로 이 쇼에서 얻은 교훈은 교훈 받을 사람에 따라 다르
다고 생각했다. 왜 이스라엘이 피고를 납치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 해 재판 시작 전에 벤구리온*(수상)이 작성한 많은 글에서 이 교훈들은 개괄 되었다. 비유대인의 세계에 주는 교훈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100여만 명의 아기들이 단지 유대인의 아 기라는 이유 때문에, 어떻게 나치스에 의해 살해되었는기를 우리는 세계 만방에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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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이후에 성 장한 이스라엘의 세대는' 유대 민족과의 연관성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이는 그들 자신의 역사와의 연관성 상실을 의미한다. “우리의 젊 은이들은 유대 민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실에 대해 그들이 알기 원한다." (벤구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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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또한 달리 설명되지 않는, 초기 단계의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 유대인 공동체의 협상적 태 도를 설명해 주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 위험성이 드 러나게 된 것은 수년 뒤 전쟁이 발발한 후, 유대인 단체들과 나치 관료 사이의 일상적 계약 때문에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이 유대인 탈출을 돕 는 일과 나치스가 유대인의 이동 격리를 돕는 것과의 차이점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게 된 때였다).
모든 실제적 차원에서 유대 국 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벤구리온 수상이 이런 종류의 '유대적 의식을 강화하려고 했다면 그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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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종교적으로 기초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낡아빠진 불행한 이분법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복수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16년 전에 모든 집단수용소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비밀경찰의 승리를 위해서 고문당한 희생자들이 저항 없이 스스로 교수대에 목을 매고,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이상 긍정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포기하도록 요구되었다.
교수대로 올라가기 전에 희생자를 이미 파괴하는 데 성공한 체제가....한 민족을 노예상태로 , 다른 것에 비교할 수 없을만큼 최상의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안다. 복종하는 가운데 바보처럼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 인간의 행진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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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서 유대인 편에서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려고 한 계획적인 시도는 무엇보다 바로 이 점에서 더 두드러지게 진리를, 더욱이 유대인의 진리를 왜곡시켜 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발생한 폭동의 영예와, 저항을 선택한 몇몇 사람들의 영웅 주의는 바로 나치스가 제시한 비교적 쉬운 죽음(형장에서 처형당하거 나 가스실에서 죽는 죽음)에 대해 거절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리 고 저항과 반란, 즉 '홀로코스트의 역사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작은 지하에 대해 증언한 예루살렘의 증인들은 아주 젊은 사람들만이 ‘우리는 양처럼 가서 학살될 수 없다고 결심’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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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다른 나치스와 그들 수백명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아랍 국가들의 경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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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 게 1958년에 서독에 의해 창설된, 에르빈 쉴레 검사가 이끄는 중앙나치 범죄수사국은 한편으로는 독일인 증인들이 협조를 꺼려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법원이 수사국의 자료들을 기초로 하여 기소하기를 꺼 려하는 태도 때문에 발생한 온갖 종류의 난점에 부딪혔다. 이 예루살렘 의 재판이 아이히만의 협력자들을 밝혀내는 데 필요한 어떤 새롭고 중 요한 증거를 찾아낸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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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다른 나치스들)에게 부과된 놀랄 만큼 관대한 형량을 보면 이들의 범죄 에 대해 기소하기를 꺼려하는 지방법원들의 태도가 드러난다
새로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나치 정권에서 대단히 활약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들 대부분은 독일 법정에서 이미 나치스의 협의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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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혹독한 선고도 부과되쩠기 만, 그런 선고가 친위대 고위층과 경찰 간부대의 장성이었던 에리히 폰 뎀 바흐결레브스기와 같은 법죄가들에게 주어긴 것은 기대에 월 썬 못 미치는 조치였다.
이 두 재판 어디에서도 바흐-첼레브스키가 동부전선에서 반당분자의 수장이었다 는 사실이나 그가 백러시아의 민스크와 모길레프에서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언급이 없다. 독일 법정은 전쟁 중에 저질러진 범죄는 범죄 가 아니라는 핑계로 '인종차별'을 한 것인가?
그는 1952년에 대량학살에 대한 책임이 있다 고자기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결코 이 때 문에 기소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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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1만 1500여명의 판사들 가운데 5000여 명이 히틀러 치하의 버법정에서 활동했다고 추정된다.
모든 독일 문제 전문가들이 지난 15년 간 의문시해 왔던, 독일 민족 자신의 과거에 대한 태도는 이때 가장 분 명하게 입증되었다. 독일인 스스로는 이러저런 이유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또 살인지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지 않은 채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데 대해 별로 못마땅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만일 세계 여론이 끈질기게 이러한 사람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한 다면, 그들은 전적으로 기꺼이 어느 정도까지는 의무감을 가지고 수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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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유는 독일이 사형제도를 폐지했으며 , 따라서 아이 히만이 응당받이야 할 형량을 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일 법정 이 나치스의 대량학살지들에게 보여준 관대함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주장을 불성실한 것이라고 의심하기는 어렵다. 물론 독일에서 아이히 만에 대한 재판을 할 때 초래될 가장 큰 정치적 위험은, 안센이 지적한 것처럼• 범죄 의도(mens rea)가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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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단기 히틀러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들을 수행하기 위해 모였올 뿐 이었다
왜냐하면 이 기소사건과 관련된 한 재판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역사 였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재판의 심판대에 서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아 니고 나치 정부도 아니며 바로 역사 전체에 나타나는 반유대주의이다." 이것은 벤구리온이 설정한 기조였고, 이를 하우스너 씨는 충실하게 따 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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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민족이 걸어간 핏자국 난 길을 표시한 이정표에 필수적인 반유대주의의 결백한 집행자일 뿐이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이 민족의 운명의 근거에는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어떤 비합리적인 동기들이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히틀러는 유대인의 살육에 대한 죄가 없고 시온주의자들의 희생자였으며, 시온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목표(이스라엘 창건)를 결국 달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범죄를 그가 수행하도록 강요했다(사부라, *이집트 외무장관)
피고가 설명하는 역사철학을 따라가며 역사를 시온의 장로들이 이끌어 간다는 식으로 말했다(세르바티우스 박사)
제2장 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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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저녁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에서 체포되어 9일 후에 이스라엘로 압송, 1961년 4월 11일에 예루살렘 지방 법원으로 재판받기 위해 이송된 뒤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재판의 근거가 되는 1950년에 입안된 나치스 및 나치 협력자 (처벌)법은 “이러한-~ 범죄 가운데 하나라도 범한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각의 죄목에 대해 아이히만은 '기소장이 의미하는 바대로는 무죄' 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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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
나치 법률체계하 국가적 공식행위,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 행사할 수 없다
아이히만 자신의 태도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살인죄에 대한 기소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 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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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에서의 최종 해결책의 이행은 6개월 뒤에 시작되었다. 이때 여자와 아이들은 모아서 이동식 가스 화물차 안에서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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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가 살인의 방조자로 기소되있다면 유죄라고 인정헀을까? 아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조건들을 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은 회고를 할 때에만 범죄일 뿐, 자기는 언제나 법률을 준 수하는 시민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최선을 다해 수행한 히 들러의 명령은 제3제국에서는 '법의 효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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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을 분개 하게 만든 것은 “경찰 소속이 아닌 사람에 의해 이주 문제가 다루어졌 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추방을 돕고 실행해야 할 사람은 나였고, 내가 전문가인 이주 문제가 이 부대의 신참자에게 맡겨졌기 때문입니 다
그는 지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 심의 가책을 받았을 거라는 점을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이란수백만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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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판정(정신과의사), 매우 긍정적인 사람(성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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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나치 정권 아래에서 예외가 아 니었다•는 점에서는 정상이었다. 하지만 제3제국의 조건 하에서는 오 직 예외들만이 정상적으로 반응할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다. 이러 한 간단한 진실은 판사들이 해결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딜레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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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스는 군대를 명령을 받는 자 (Befehlsempfänger)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Befehlsträger)로 바 꾸어 놓았다. 이는 옛날의 '나쁜 소식의 사자와 같이 명령을 실행해야 하는 자들 위에 놓인 중요하고 책임성 있는 부담을 암시했다. 더구나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이히만은 공식적으 로 비밀의 사자(Gehimnisträger)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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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희생자들에게 어떠한 나쁜 감정을 가진 적이 없었고, 게 다가 그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상당히 긴 시간을 들여 증명하려 했다.
. 그가 유대인 의 '강제이주를 아주 성공적으로 수행한 빈에서 그는 린츠 출신의 '옛 애인을 유대인 정부로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유대인과의 성교를 의미하는 민족보호법위반(Rassenschande) 죄는 친위대 요원에게는 죄 가운데 가장 큰 범죄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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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1932년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해 4월 에 그는 린츠의 젊은 변호사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권고로 나치당에 가입 했고 친위대에 들어갔다. 칼텐브루너는 나중에 제국안전부 본부의 우두머리가 된다. 제국안전부의 6개 주요부서 가운데 하인리히 뮐러가지휘히는 제4국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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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간에 그는 신념을 가지고 당에 가입한 것도 아니었고, 또 어떤 신념에 설득된 적도 없었다.
그는 제대로 정보를 입 수할 시간도 없었고, 알고 싶은 욕구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당의 정강 도 몰랐고『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다. 칼텐브루너가 그에게 “친위대에 가입하는 것이 어때?'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지 다라고 대답했다. 일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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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새로운 직업들은 그 시작부터 그다지 전망이 밝지 않았다.친위대에 가입한 모든 이들은 모두 정규 직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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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그는 독일 여권을 소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오스트리아인이 되었다. 그는 1933년 8 월부터 1934년 9월까지 이 훈련소에 머물러 소대 지휘관3)으로 승진 했고, 군인으로서 직업을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충분 히 가졌다.
매일매일, 군복무의 년수힘을 니는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미칠 듯 이 지루한 생활에서 그는 친위대 제국지휘관 소속 보안대(힘러 보안대 S.D.) 에 자리가 나자 즉시 신청했다
제3장 유대인 문제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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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아이히만이 직장을 얻는 데 성공했을 때, 친위대 제국지휘관 소속 보안대 (이하 보안대)는 친위대 내의 비교적 새로운 기구였다.
이 기구의 초기의 임무는 당원들을 염탐하는 것이었고, 따라
서 보안대는 정규 당기구에 대해서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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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란 원래 당 지도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된 특수기구였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실망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고, 다시 밑바닥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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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으로 돌아가보면, 분명한 것은 정권을 잡은 나치 정부의 첫 조 치 중 하나가 공직 (독일에서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의 모든 교직과 라디오, 극장, 오페라, 콘서트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오락 예술 산업이 공직에 포함된다)에서 유대인을 축출하는 것이었는데, 일반적으로 공 직에서 그들을 퇴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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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다른 유럽 국 가에서도 별로 미래가 없니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가 몇몇 유대인 이민자들은 이 시기에 실제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이 꿈에서 깨어나는 데는 크리스탈나호트(Kristallnacht), 깨진 유리의 밤이라 불리는 1938년 11월의 조직적인 학살이 필요했다. 이때 7500곳의 유대인 가게 유리가 깨졌고, 모든 회당이 불타올랐으며 , 2만 명의 유대인 남자가 집단수용소로 끌려갔다.
뉘른베르크 법은 유대인에게서 정치적 권리를 월배앗았지만 시 민적 권리를 빼앗진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국민(Reichsbürger)이 아 니지만, 독일 국가의 일원(Staatsangehörige)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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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뉘른베르크 법은 독일 제국에서 유대인이 처 하게 된 새로운 상형을 안정시킨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말하면 그 들은 1933년 1월 30일 이후로는 2급 시민이었다. 이들이 나머지 주민으로부터 거의 완벽히 분리되기까지는 몇 주 또는 몇 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일은 공포를 줌으로써,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일상적인 묵 인을 통해서 기능하게 되었다.
유대인은 이제 자신 만의 법을 부여받았으므로 더 이상 법적 국외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어차피 그들에게 강요된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끼리 산다면 간 섭받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독일 소재 유대인 제국대변단의 말에 의하면, 뉘른베르크 법령의 의도는 '독일 과 유대 민족 간에 참을 만한 관계 수준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친위대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유대인 은 행복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대체로 잠정협상(modus vivendi)이 기능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들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협조하겠다고 제의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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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기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을 기음으로 만났을 때, 시온주의자들과 동화론자들 모두 위대한 '유대인의 부용이나 '독일계 유대인의 위 대한 건설 운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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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일에 대한 그의 학습이 거의 전적으로 시온주의와 관 련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모두 오랫동안 지위를 유지해온 저명한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과 그의 첫 개인적인 접촉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가 '유대인 문제'에 그렇게 매혹된 이유는 그 자신의 '이상주의' 때문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상주의자란 자신 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었고(따라서 사업가 같은 사람은 아 니었음),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회 생시길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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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만단 가장 위대한 '이상주의자'는 그가 헝가리에서 유대인 추방을 협 상한 루돌프 카스트니 (Rudolf Kastner) 박사였다. 아이히만이 수천 명의 유대인을 불법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보내는 대신(기차는 사실 상 독일 경철에 의해 보호되었음), 여러 수용소(그곳에서 몇십만이 아 수수비츠로 보내졌음)에서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오스트리아의 독일제국합병 (Anschluss) 이후인 1938년 3월에 아이히만은 빈으로 보내져 독일에 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이민을 계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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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인은 완전한 시민(full-fledged citizens)이 될 수 없었고, 공무원이 될 수 없었으며, 언론 활동에서 배제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 2일 이후로 독일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은 국적이 박탈되 있는데, 이는 추방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나치당 강령=바이마르 헌법)
하지만 1938년 3월 빈에서 일어난 일은 완전히 달랐다. 아이히만의 임무는 '강제이주로 규정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그들의 바람이나 시 민권과 관계없이 모든 유대인은 강제이주, 보통 말로 하면, 추방될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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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적인 유대인 조직과 이념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에 대해 칭찬받았다.
8개월 동안 4만 5000명의 유대인이 오 스트리아에서 떠났지만, 같은 기간 독일에서는 기껏 1만 9000명만이 떠났다. 18개월 이내에 오스트리아 유대인 인구의 약 60피센트인 10만 5000명이 오스트리아에서 정호b'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다 '합법적으 로' 떠났다. 심지어 전쟁이 터진 후에도 대략6만 명의 유대인이 탈출할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해냈을까? 이 모든 것을 기능케 한 기본 생각은 물론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분명 그를 빈으로 보낸 장본인 하이드리히의 상세한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총 괄적인 책임'이라는 환상적인 주장에 사로잡혀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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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업무진행 과정에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었고, 여기서 아이히만은 생전 처음으로 자신에게 및 가지 특별한 재능이 있음을 발 견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남들보다 뛰어났다. 그는 조 직능력과 협상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협동작업라인'을 고안해 냈다. “그 시작 부분에 첫 번째 서류가 제출되면, 이어 다른 문서가 제출 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마지막에는 완제품으로 여권이 생산'되는 방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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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끝에서 당신이 어느 경 도의 재산, 공장, 가게, 아니면 은행계좌를 가진 유대인을 집어넣으면, 그는 이 청구에서 저 창구로,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움직이며 이 건물 안을 통과하면, 다른 끝에서 돈 한문도, 아무런 권리도 없이, 단지 '당신은 2주일 안에 이 나리를 떠나야 합니다. 아니면 당신은 수용소로 보내집니다라고 쓰인 여권만을 갖고 나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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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치스 간부와 당국의 노력을 함께 기울인 결과인 500 만 명의 유대인 죽음을 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 자신도 잘 알듯이, 터무니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이 저주받을 말을 들어줄 만한 모든 이들 에게 이 말을 역겹도록 반복했다.
자신이 게토 체계를 '발명'했다든가, 모든 유 럽의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보낼 '생각을 해만 척한 것은 완전히 허풍이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한 아이히만 의 기여는 그가 좋아한 뢰벤해르츠 박사에게 대부분 의존한 것이었다. 400만여 명의 유대인을 어떻게 전쟁 후 유럽에서 수송할 것인지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인 생각를을 하기 위해 그는 뢰벤해르츠 박사를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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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허풍 떠는 것은 일반적인 악덕인 반면, 더 구체적이고 결정적 인 아이히만의 성격 결함은 그에게 그 어느 것도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성격 결함이 빈에서의 에 피소드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만큼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와 그 의 부하들과 유대인은 모두 '함께 노력하고 있었고,' 문제가 있을 때마 다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은 그에게 달려와 가습을 털어놓고', 그에게 '그들의 모든 슬픔과 비애'를 얘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유대인은 이민 가기를 '원했고,' 자기 자신 즉 아이히만은 그들을 돕기 위해 거기에 있 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우연히 나치 당국은 제국을 유대인이 없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 두 욕구가 일치했고, 그 자신 즉 아이히만은 “양쪽 모두에게 공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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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29일부터 1961년 1월 17일까지 행해진 경찰심문 녹음의 독일어 번역본의 각 페이지마다 아이히만이 교정한 후 승인했는데, 이 는 심리학자에게는 말 그대로 금광을 이룬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를 분명 히 괴롭혔을 결점 (경미한 실어증 증세)을 희미하게 깨닫고 있던 그는 사과하면서, 관청용어(Amtssprache)만이 나의 언어입니다'라고 말했 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관청용어가 그의 언어가 된 것은 상투 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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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만든 문장을 하나 말하더라도 그는 이 밀이 상투어가 될 때기지 계속 만복했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 회고록을 쓸 때나 김철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년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 수록, 그의 밀서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 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기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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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지 과거를 상기하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세상과 그는 한대 완벽 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8000만 명으로 이루어진 독일 사회가 동일한 방법, 동일한 자기기만, 거짓말, 어리석음을 통해 현실과 사실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 아이히만의 정신 속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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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독일 국민 전체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기짓말은 히들러나 괴벨스가 만든 독일 민족을 위한 운명의 전투'(der Schicksalskampf des deutschen Volkes)리는 구호였다. 이 구호는 세 가지 면에서 쉽게 자기기만에 빠 지게 해주었다. 그것은 첫째로 전쟁은 전쟁이 아니라고 암시했다. 둘째 로 전생을 시작한 것은 운명이지 독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셋째로 전 생은 독일인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이들은 적을 전멸시켜야지, 그렇 지 않으면 전멸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만약 그가 “그들을 이송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도살자에게로 인도되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인정'하라는 것인 가7'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가 계속한 말은 “그는〔자신의〕과거의 적 들과 화해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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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터무니없는 상투어는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지신들이 만들어낸 관용구로서, 사람들이 12년 동안이나 믿고 살아온 그 상투어만큼이나 현실 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피고가 자산의 인 생의 모든 시기와 모든 활동마다 그것에 대해 의기양양함을 느끼게 하 는 다른 상투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판시들은 당황한 동시에 분 노했다. 그의 정신 속에서는 종전 무렵에 걸맞은 “나는 내 무덤에 웃으 며 뛰어들 것이다라는 말과, “나는 지상의 모든 반유대주의자들에 대 한 경고로 기쁘게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할 것이다라는 말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었다. 이 말은 아주 다른 상황들 가운데서도 그의 기 분을 북돋우는 데 완전히 똑같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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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내게 부여한 얼마 안되는 재능 가운데 하나는 진실에 대한 능력입니다.
정리가 안 된 장황한 메모 속에서 그는 '여 기에 기록된 이 진실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미래의 역사가들은 충 분히 객관적이도록 하라는 환상적인 경고를 했다.
그가 행한 최악의 광대짓들은 거의 주목받지 않았고 거의 보도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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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에게는 이것은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들이었고, 그가 기억 속에서나 즉흥적으로 자신의 기분을 북돋우는 관용구들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모순' 따위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주 만족스러 워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 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The End. 2022. 10.10
제1장 정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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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정의의 집).
통역사들의 불어 통역은 탁월하 고 영어 통역은 참고 들어줄 만한데, 독일어 통역은 완전 코미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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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시들의 행동에 극적인 요소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재판장 모세 란다우 (Moshe Landau)는 통역사가 통역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답한 적이 거의 없었다. 또 종종 통역에 끼어들어 고치고 수정해 주기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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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대질심문 때에는, 심지어 아이
리만과 대화 시 동료 재판관들에게 그들의 모국이인 독일어를 사용하 라고 권유리기도 했다.
전반적인 재판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은 란다우 판사였다.
이스라엘 수상인 다비드 벤구리온(Daⅵd Ben-Gurion) 이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하여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책' 1) 에 대한 그의 역할을 재판하도록 예루살렘 지방법원으로 압송하기로 결정했을 때 염두에 뒀던 쇼와 같은 재판을 위해서 이 법정은 분명히 그리 나쁜 장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의 설계사라는 적 절한 칭호로 불렸던 벤구리온은 이 소송 절차의 보이지 않는 무대 매니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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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대에 오른 것은 그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유대인의 고통이나 독일 민족 또는 인 류, 심지어는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
재판 기간 동안 검사에게 기자회견과 Tv 인터뷰가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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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은둔을 요구하고, 분노보다는 슬픔을 허 용하며. 그 자신을 주목받는 자리에 놓음으로써 갖게 되는 모든 쾌락을 이주 조심스럽게 피하도록 처방한다.
이번 경우는 “유대인의 비극 전체가 주요 관심사가 될 것이다.” ...“
우리가 어떤 인종차별도 하지 않기 때 문이다.” ...이 소송사건은 아이 히만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이 무엇을 겪었느냐를 바탕으 로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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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오로지 유대인 법정만이 유대인에게 정의를 실현해줄 수 있으며, 그들의 적들을 심판 하는 자리에 앉는 것은 바로 유대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그는 믿었다.(법무장관 하우스너)
따라서 “우리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호언장담을 하게 된 것이다,
랍비의 법으로 유대인 시민권에 대한 개인 자격을 규정하는 이 스라엘에서는 어떤 유대인도 비유대인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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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비유대인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고, 오직 이스라엘에서만 유대인은 안전하고 명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흐국국1시켜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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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나름 대로의 결론을 이끌기 위해 이 재판이 필요하지도 않은, 나처럼 유럽 에서 이주한 중년과 노년의 '생존자들이었다.
유리 부스 안의 인물은 더욱더 창백해지고 더욱더 유령과 같은 모 습으로 변해가서, “바로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괴물이 앉아 있다" 고 소리치며 손가락질해도 그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지 못할 것처 럼 보였다
재판이란 희생자가 아니라 행위자와 함께 시작되고 끝나는 연극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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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파도 위에서 출령이는 배'와 같은, 피투성이의 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재판은 결코 연극이 되지는 않았지만, 벤구리온이 처음에 염두에 두었던 쇼, 즉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간 단히 말해 전 세계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교훈을 담은 쇼는 이루어졌다. 바로 이 쇼에서 얻은 교훈은 교훈 받을 사람에 따라 다르
다고 생각했다. 왜 이스라엘이 피고를 납치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 해 재판 시작 전에 벤구리온*(수상)이 작성한 많은 글에서 이 교훈들은 개괄 되었다. 비유대인의 세계에 주는 교훈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100여만 명의 아기들이 단지 유대인의 아 기라는 이유 때문에, 어떻게 나치스에 의해 살해되었는기를 우리는 세계 만방에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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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이후에 성 장한 이스라엘의 세대는' 유대 민족과의 연관성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이는 그들 자신의 역사와의 연관성 상실을 의미한다. “우리의 젊 은이들은 유대 민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실에 대해 그들이 알기 원한다." (벤구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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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또한 달리 설명되지 않는, 초기 단계의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 유대인 공동체의 협상적 태 도를 설명해 주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 위험성이 드 러나게 된 것은 수년 뒤 전쟁이 발발한 후, 유대인 단체들과 나치 관료 사이의 일상적 계약 때문에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이 유대인 탈출을 돕 는 일과 나치스가 유대인의 이동 격리를 돕는 것과의 차이점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게 된 때였다).
모든 실제적 차원에서 유대 국 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벤구리온 수상이 이런 종류의 '유대적 의식을 강화하려고 했다면 그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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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종교적으로 기초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낡아빠진 불행한 이분법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복수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16년 전에 모든 집단수용소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비밀경찰의 승리를 위해서 고문당한 희생자들이 저항 없이 스스로 교수대에 목을 매고,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이상 긍정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포기하도록 요구되었다.
교수대로 올라가기 전에 희생자를 이미 파괴하는 데 성공한 체제가....한 민족을 노예상태로 , 다른 것에 비교할 수 없을만큼 최상의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안다. 복종하는 가운데 바보처럼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 인간의 행진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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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서 유대인 편에서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려고 한 계획적인 시도는 무엇보다 바로 이 점에서 더 두드러지게 진리를, 더욱이 유대인의 진리를 왜곡시켜 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발생한 폭동의 영예와, 저항을 선택한 몇몇 사람들의 영웅 주의는 바로 나치스가 제시한 비교적 쉬운 죽음(형장에서 처형당하거 나 가스실에서 죽는 죽음)에 대해 거절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리 고 저항과 반란, 즉 '홀로코스트의 역사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작은 지하에 대해 증언한 예루살렘의 증인들은 아주 젊은 사람들만이 ‘우리는 양처럼 가서 학살될 수 없다고 결심’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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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다른 나치스와 그들 수백명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아랍 국가들의 경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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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 게 1958년에 서독에 의해 창설된, 에르빈 쉴레 검사가 이끄는 중앙나치 범죄수사국은 한편으로는 독일인 증인들이 협조를 꺼려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법원이 수사국의 자료들을 기초로 하여 기소하기를 꺼 려하는 태도 때문에 발생한 온갖 종류의 난점에 부딪혔다. 이 예루살렘 의 재판이 아이히만의 협력자들을 밝혀내는 데 필요한 어떤 새롭고 중 요한 증거를 찾아낸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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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다른 나치스들)에게 부과된 놀랄 만큼 관대한 형량을 보면 이들의 범죄 에 대해 기소하기를 꺼려하는 지방법원들의 태도가 드러난다
새로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나치 정권에서 대단히 활약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들 대부분은 독일 법정에서 이미 나치스의 협의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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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혹독한 선고도 부과되쩠기 만, 그런 선고가 친위대 고위층과 경찰 간부대의 장성이었던 에리히 폰 뎀 바흐결레브스기와 같은 법죄가들에게 주어긴 것은 기대에 월 썬 못 미치는 조치였다.
이 두 재판 어디에서도 바흐-첼레브스키가 동부전선에서 반당분자의 수장이었다 는 사실이나 그가 백러시아의 민스크와 모길레프에서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언급이 없다. 독일 법정은 전쟁 중에 저질러진 범죄는 범죄 가 아니라는 핑계로 '인종차별'을 한 것인가?
그는 1952년에 대량학살에 대한 책임이 있다 고자기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결코 이 때 문에 기소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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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1만 1500여명의 판사들 가운데 5000여 명이 히틀러 치하의 버법정에서 활동했다고 추정된다.
모든 독일 문제 전문가들이 지난 15년 간 의문시해 왔던, 독일 민족 자신의 과거에 대한 태도는 이때 가장 분 명하게 입증되었다. 독일인 스스로는 이러저런 이유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또 살인지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지 않은 채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데 대해 별로 못마땅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만일 세계 여론이 끈질기게 이러한 사람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한 다면, 그들은 전적으로 기꺼이 어느 정도까지는 의무감을 가지고 수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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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유는 독일이 사형제도를 폐지했으며 , 따라서 아이 히만이 응당받이야 할 형량을 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일 법정 이 나치스의 대량학살지들에게 보여준 관대함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주장을 불성실한 것이라고 의심하기는 어렵다. 물론 독일에서 아이히 만에 대한 재판을 할 때 초래될 가장 큰 정치적 위험은, 안센이 지적한 것처럼• 범죄 의도(mens rea)가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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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단기 히틀러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들을 수행하기 위해 모였올 뿐 이었다
왜냐하면 이 기소사건과 관련된 한 재판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역사 였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재판의 심판대에 서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아 니고 나치 정부도 아니며 바로 역사 전체에 나타나는 반유대주의이다." 이것은 벤구리온이 설정한 기조였고, 이를 하우스너 씨는 충실하게 따 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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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민족이 걸어간 핏자국 난 길을 표시한 이정표에 필수적인 반유대주의의 결백한 집행자일 뿐이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이 민족의 운명의 근거에는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어떤 비합리적인 동기들이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히틀러는 유대인의 살육에 대한 죄가 없고 시온주의자들의 희생자였으며, 시온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목표(이스라엘 창건)를 결국 달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범죄를 그가 수행하도록 강요했다(사부라, *이집트 외무장관)
피고가 설명하는 역사철학을 따라가며 역사를 시온의 장로들이 이끌어 간다는 식으로 말했다(세르바티우스 박사)
제2장 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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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저녁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에서 체포되어 9일 후에 이스라엘로 압송, 1961년 4월 11일에 예루살렘 지방 법원으로 재판받기 위해 이송된 뒤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재판의 근거가 되는 1950년에 입안된 나치스 및 나치 협력자 (처벌)법은 “이러한-~ 범죄 가운데 하나라도 범한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각의 죄목에 대해 아이히만은 '기소장이 의미하는 바대로는 무죄' 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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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
나치 법률체계하 국가적 공식행위,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 행사할 수 없다
아이히만 자신의 태도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살인죄에 대한 기소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 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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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에서의 최종 해결책의 이행은 6개월 뒤에 시작되었다. 이때 여자와 아이들은 모아서 이동식 가스 화물차 안에서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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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가 살인의 방조자로 기소되있다면 유죄라고 인정헀을까? 아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조건들을 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은 회고를 할 때에만 범죄일 뿐, 자기는 언제나 법률을 준 수하는 시민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최선을 다해 수행한 히 들러의 명령은 제3제국에서는 '법의 효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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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을 분개 하게 만든 것은 “경찰 소속이 아닌 사람에 의해 이주 문제가 다루어졌 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추방을 돕고 실행해야 할 사람은 나였고, 내가 전문가인 이주 문제가 이 부대의 신참자에게 맡겨졌기 때문입니 다
그는 지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 심의 가책을 받았을 거라는 점을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이란수백만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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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판정(정신과의사), 매우 긍정적인 사람(성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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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나치 정권 아래에서 예외가 아 니었다•는 점에서는 정상이었다. 하지만 제3제국의 조건 하에서는 오 직 예외들만이 정상적으로 반응할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다. 이러 한 간단한 진실은 판사들이 해결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딜레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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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스는 군대를 명령을 받는 자 (Befehlsempfänger)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Befehlsträger)로 바 꾸어 놓았다. 이는 옛날의 '나쁜 소식의 사자와 같이 명령을 실행해야 하는 자들 위에 놓인 중요하고 책임성 있는 부담을 암시했다. 더구나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이히만은 공식적으 로 비밀의 사자(Gehimnisträger)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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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희생자들에게 어떠한 나쁜 감정을 가진 적이 없었고, 게 다가 그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상당히 긴 시간을 들여 증명하려 했다.
. 그가 유대인 의 '강제이주를 아주 성공적으로 수행한 빈에서 그는 린츠 출신의 '옛 애인을 유대인 정부로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유대인과의 성교를 의미하는 민족보호법위반(Rassenschande) 죄는 친위대 요원에게는 죄 가운데 가장 큰 범죄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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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1932년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해 4월 에 그는 린츠의 젊은 변호사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권고로 나치당에 가입 했고 친위대에 들어갔다. 칼텐브루너는 나중에 제국안전부 본부의 우두머리가 된다. 제국안전부의 6개 주요부서 가운데 하인리히 뮐러가지휘히는 제4국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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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간에 그는 신념을 가지고 당에 가입한 것도 아니었고, 또 어떤 신념에 설득된 적도 없었다.
그는 제대로 정보를 입 수할 시간도 없었고, 알고 싶은 욕구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당의 정강 도 몰랐고『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다. 칼텐브루너가 그에게 “친위대에 가입하는 것이 어때?'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지 다라고 대답했다. 일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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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새로운 직업들은 그 시작부터 그다지 전망이 밝지 않았다.친위대에 가입한 모든 이들은 모두 정규 직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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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그는 독일 여권을 소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오스트리아인이 되었다. 그는 1933년 8 월부터 1934년 9월까지 이 훈련소에 머물러 소대 지휘관3)으로 승진 했고, 군인으로서 직업을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충분 히 가졌다.
매일매일, 군복무의 년수힘을 니는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미칠 듯 이 지루한 생활에서 그는 친위대 제국지휘관 소속 보안대(힘러 보안대 S.D.) 에 자리가 나자 즉시 신청했다
제3장 유대인 문제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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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아이히만이 직장을 얻는 데 성공했을 때, 친위대 제국지휘관 소속 보안대 (이하 보안대)는 친위대 내의 비교적 새로운 기구였다.
이 기구의 초기의 임무는 당원들을 염탐하는 것이었고, 따라
서 보안대는 정규 당기구에 대해서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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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란 원래 당 지도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된 특수기구였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실망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고, 다시 밑바닥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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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으로 돌아가보면, 분명한 것은 정권을 잡은 나치 정부의 첫 조 치 중 하나가 공직 (독일에서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의 모든 교직과 라디오, 극장, 오페라, 콘서트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오락 예술 산업이 공직에 포함된다)에서 유대인을 축출하는 것이었는데, 일반적으로 공 직에서 그들을 퇴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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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다른 유럽 국 가에서도 별로 미래가 없니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가 몇몇 유대인 이민자들은 이 시기에 실제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이 꿈에서 깨어나는 데는 크리스탈나호트(Kristallnacht), 깨진 유리의 밤이라 불리는 1938년 11월의 조직적인 학살이 필요했다. 이때 7500곳의 유대인 가게 유리가 깨졌고, 모든 회당이 불타올랐으며 , 2만 명의 유대인 남자가 집단수용소로 끌려갔다.
뉘른베르크 법은 유대인에게서 정치적 권리를 월배앗았지만 시 민적 권리를 빼앗진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국민(Reichsbürger)이 아 니지만, 독일 국가의 일원(Staatsangehörige)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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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뉘른베르크 법은 독일 제국에서 유대인이 처 하게 된 새로운 상형을 안정시킨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말하면 그 들은 1933년 1월 30일 이후로는 2급 시민이었다. 이들이 나머지 주민으로부터 거의 완벽히 분리되기까지는 몇 주 또는 몇 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일은 공포를 줌으로써,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일상적인 묵 인을 통해서 기능하게 되었다.
유대인은 이제 자신 만의 법을 부여받았으므로 더 이상 법적 국외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어차피 그들에게 강요된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끼리 산다면 간 섭받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독일 소재 유대인 제국대변단의 말에 의하면, 뉘른베르크 법령의 의도는 '독일 과 유대 민족 간에 참을 만한 관계 수준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친위대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유대인 은 행복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대체로 잠정협상(modus vivendi)이 기능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들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협조하겠다고 제의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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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기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을 기음으로 만났을 때, 시온주의자들과 동화론자들 모두 위대한 '유대인의 부용이나 '독일계 유대인의 위 대한 건설 운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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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일에 대한 그의 학습이 거의 전적으로 시온주의와 관 련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모두 오랫동안 지위를 유지해온 저명한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과 그의 첫 개인적인 접촉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가 '유대인 문제'에 그렇게 매혹된 이유는 그 자신의 '이상주의' 때문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상주의자란 자신 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었고(따라서 사업가 같은 사람은 아 니었음),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회 생시길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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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만단 가장 위대한 '이상주의자'는 그가 헝가리에서 유대인 추방을 협 상한 루돌프 카스트니 (Rudolf Kastner) 박사였다. 아이히만이 수천 명의 유대인을 불법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보내는 대신(기차는 사실 상 독일 경철에 의해 보호되었음), 여러 수용소(그곳에서 몇십만이 아 수수비츠로 보내졌음)에서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오스트리아의 독일제국합병 (Anschluss) 이후인 1938년 3월에 아이히만은 빈으로 보내져 독일에 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이민을 계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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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인은 완전한 시민(full-fledged citizens)이 될 수 없었고, 공무원이 될 수 없었으며, 언론 활동에서 배제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 2일 이후로 독일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은 국적이 박탈되 있는데, 이는 추방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나치당 강령=바이마르 헌법)
하지만 1938년 3월 빈에서 일어난 일은 완전히 달랐다. 아이히만의 임무는 '강제이주로 규정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그들의 바람이나 시 민권과 관계없이 모든 유대인은 강제이주, 보통 말로 하면, 추방될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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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적인 유대인 조직과 이념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에 대해 칭찬받았다.
8개월 동안 4만 5000명의 유대인이 오 스트리아에서 떠났지만, 같은 기간 독일에서는 기껏 1만 9000명만이 떠났다. 18개월 이내에 오스트리아 유대인 인구의 약 60피센트인 10만 5000명이 오스트리아에서 정호b'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다 '합법적으 로' 떠났다. 심지어 전쟁이 터진 후에도 대략6만 명의 유대인이 탈출할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해냈을까? 이 모든 것을 기능케 한 기본 생각은 물론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분명 그를 빈으로 보낸 장본인 하이드리히의 상세한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총 괄적인 책임'이라는 환상적인 주장에 사로잡혀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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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업무진행 과정에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었고, 여기서 아이히만은 생전 처음으로 자신에게 및 가지 특별한 재능이 있음을 발 견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남들보다 뛰어났다. 그는 조 직능력과 협상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협동작업라인'을 고안해 냈다. “그 시작 부분에 첫 번째 서류가 제출되면, 이어 다른 문서가 제출 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마지막에는 완제품으로 여권이 생산'되는 방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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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끝에서 당신이 어느 경 도의 재산, 공장, 가게, 아니면 은행계좌를 가진 유대인을 집어넣으면, 그는 이 청구에서 저 창구로,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움직이며 이 건물 안을 통과하면, 다른 끝에서 돈 한문도, 아무런 권리도 없이, 단지 '당신은 2주일 안에 이 나리를 떠나야 합니다. 아니면 당신은 수용소로 보내집니다라고 쓰인 여권만을 갖고 나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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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치스 간부와 당국의 노력을 함께 기울인 결과인 500 만 명의 유대인 죽음을 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 자신도 잘 알듯이, 터무니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이 저주받을 말을 들어줄 만한 모든 이들 에게 이 말을 역겹도록 반복했다.
자신이 게토 체계를 '발명'했다든가, 모든 유 럽의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보낼 '생각을 해만 척한 것은 완전히 허풍이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한 아이히만 의 기여는 그가 좋아한 뢰벤해르츠 박사에게 대부분 의존한 것이었다. 400만여 명의 유대인을 어떻게 전쟁 후 유럽에서 수송할 것인지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인 생각를을 하기 위해 그는 뢰벤해르츠 박사를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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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허풍 떠는 것은 일반적인 악덕인 반면, 더 구체적이고 결정적 인 아이히만의 성격 결함은 그에게 그 어느 것도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성격 결함이 빈에서의 에 피소드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만큼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와 그 의 부하들과 유대인은 모두 '함께 노력하고 있었고,' 문제가 있을 때마 다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은 그에게 달려와 가습을 털어놓고', 그에게 '그들의 모든 슬픔과 비애'를 얘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유대인은 이민 가기를 '원했고,' 자기 자신 즉 아이히만은 그들을 돕기 위해 거기에 있 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우연히 나치 당국은 제국을 유대인이 없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 두 욕구가 일치했고, 그 자신 즉 아이히만은 “양쪽 모두에게 공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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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29일부터 1961년 1월 17일까지 행해진 경찰심문 녹음의 독일어 번역본의 각 페이지마다 아이히만이 교정한 후 승인했는데, 이 는 심리학자에게는 말 그대로 금광을 이룬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를 분명 히 괴롭혔을 결점 (경미한 실어증 증세)을 희미하게 깨닫고 있던 그는 사과하면서, 관청용어(Amtssprache)만이 나의 언어입니다'라고 말했 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관청용어가 그의 언어가 된 것은 상투 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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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만든 문장을 하나 말하더라도 그는 이 밀이 상투어가 될 때기지 계속 만복했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 회고록을 쓸 때나 김철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년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 수록, 그의 밀서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 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기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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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지 과거를 상기하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세상과 그는 한대 완벽 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8000만 명으로 이루어진 독일 사회가 동일한 방법, 동일한 자기기만, 거짓말, 어리석음을 통해 현실과 사실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 아이히만의 정신 속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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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독일 국민 전체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기짓말은 히들러나 괴벨스가 만든 독일 민족을 위한 운명의 전투'(der Schicksalskampf des deutschen Volkes)리는 구호였다. 이 구호는 세 가지 면에서 쉽게 자기기만에 빠 지게 해주었다. 그것은 첫째로 전쟁은 전쟁이 아니라고 암시했다. 둘째 로 전생을 시작한 것은 운명이지 독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셋째로 전 생은 독일인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이들은 적을 전멸시켜야지, 그렇 지 않으면 전멸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만약 그가 “그들을 이송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도살자에게로 인도되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인정'하라는 것인 가7'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가 계속한 말은 “그는〔자신의〕과거의 적 들과 화해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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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터무니없는 상투어는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지신들이 만들어낸 관용구로서, 사람들이 12년 동안이나 믿고 살아온 그 상투어만큼이나 현실 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피고가 자산의 인 생의 모든 시기와 모든 활동마다 그것에 대해 의기양양함을 느끼게 하 는 다른 상투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판시들은 당황한 동시에 분 노했다. 그의 정신 속에서는 종전 무렵에 걸맞은 “나는 내 무덤에 웃으 며 뛰어들 것이다라는 말과, “나는 지상의 모든 반유대주의자들에 대 한 경고로 기쁘게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할 것이다라는 말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었다. 이 말은 아주 다른 상황들 가운데서도 그의 기 분을 북돋우는 데 완전히 똑같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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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내게 부여한 얼마 안되는 재능 가운데 하나는 진실에 대한 능력입니다.
정리가 안 된 장황한 메모 속에서 그는 '여 기에 기록된 이 진실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미래의 역사가들은 충 분히 객관적이도록 하라는 환상적인 경고를 했다.
그가 행한 최악의 광대짓들은 거의 주목받지 않았고 거의 보도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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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에게는 이것은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들이었고, 그가 기억 속에서나 즉흥적으로 자신의 기분을 북돋우는 관용구들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모순' 따위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주 만족스러 워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 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The End. 2022. 10.10
2022. 10.11 화. 여여
제1장 정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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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정의의 집).
통역사들의 불어 통역은 탁월하 고 영어 통역은 참고 들어줄 만한데, 독일어 통역은 완전 코미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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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시들의 행동에 극적인 요소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재판장 모세 란다우 (Moshe Landau)는 통역사가 통역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답한 적이 거의 없었다. 또 종종 통역에 끼어들어 고치고 수정해 주기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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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대질심문 때에는, 심지어 아이
리만과 대화 시 동료 재판관들에게 그들의 모국이인 독일어를 사용하 라고 권유리기도 했다.
전반적인 재판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은 란다우 판사였다.
이스라엘 수상인 다비드 벤구리온(Daⅵd Ben-Gurion) 이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하여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책' 1) 에 대한 그의 역할을 재판하도록 예루살렘 지방법원으로 압송하기로 결정했을 때 염두에 뒀던 쇼와 같은 재판을 위해서 이 법정은 분명히 그리 나쁜 장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의 설계사라는 적 절한 칭호로 불렸던 벤구리온은 이 소송 절차의 보이지 않는 무대 매니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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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대에 오른 것은 그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유대인의 고통이나 독일 민족 또는 인 류, 심지어는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
재판 기간 동안 검사에게 기자회견과 Tv 인터뷰가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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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은둔을 요구하고, 분노보다는 슬픔을 허 용하며. 그 자신을 주목받는 자리에 놓음으로써 갖게 되는 모든 쾌락을 이주 조심스럽게 피하도록 처방한다.
이번 경우는 “유대인의 비극 전체가 주요 관심사가 될 것이다.” ...“
우리가 어떤 인종차별도 하지 않기 때 문이다.” ...이 소송사건은 아이 히만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이 무엇을 겪었느냐를 바탕으 로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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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오로지 유대인 법정만이 유대인에게 정의를 실현해줄 수 있으며, 그들의 적들을 심판 하는 자리에 앉는 것은 바로 유대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그는 믿었다.(법무장관 하우스너)
따라서 “우리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호언장담을 하게 된 것이다,
랍비의 법으로 유대인 시민권에 대한 개인 자격을 규정하는 이 스라엘에서는 어떤 유대인도 비유대인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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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비유대인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고, 오직 이스라엘에서만 유대인은 안전하고 명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흐국국1시켜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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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나름 대로의 결론을 이끌기 위해 이 재판이 필요하지도 않은, 나처럼 유럽 에서 이주한 중년과 노년의 '생존자들이었다.
유리 부스 안의 인물은 더욱더 창백해지고 더욱더 유령과 같은 모 습으로 변해가서, “바로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괴물이 앉아 있다" 고 소리치며 손가락질해도 그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지 못할 것처 럼 보였다
재판이란 희생자가 아니라 행위자와 함께 시작되고 끝나는 연극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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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파도 위에서 출령이는 배'와 같은, 피투성이의 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재판은 결코 연극이 되지는 않았지만, 벤구리온이 처음에 염두에 두었던 쇼, 즉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간 단히 말해 전 세계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교훈을 담은 쇼는 이루어졌다. 바로 이 쇼에서 얻은 교훈은 교훈 받을 사람에 따라 다르
다고 생각했다. 왜 이스라엘이 피고를 납치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 해 재판 시작 전에 벤구리온*(수상)이 작성한 많은 글에서 이 교훈들은 개괄 되었다. 비유대인의 세계에 주는 교훈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100여만 명의 아기들이 단지 유대인의 아 기라는 이유 때문에, 어떻게 나치스에 의해 살해되었는기를 우리는 세계 만방에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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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이후에 성 장한 이스라엘의 세대는' 유대 민족과의 연관성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이는 그들 자신의 역사와의 연관성 상실을 의미한다. “우리의 젊 은이들은 유대 민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실에 대해 그들이 알기 원한다." (벤구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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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또한 달리 설명되지 않는, 초기 단계의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 유대인 공동체의 협상적 태 도를 설명해 주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 위험성이 드 러나게 된 것은 수년 뒤 전쟁이 발발한 후, 유대인 단체들과 나치 관료 사이의 일상적 계약 때문에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이 유대인 탈출을 돕 는 일과 나치스가 유대인의 이동 격리를 돕는 것과의 차이점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게 된 때였다).
모든 실제적 차원에서 유대 국 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벤구리온 수상이 이런 종류의 '유대적 의식을 강화하려고 했다면 그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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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종교적으로 기초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낡아빠진 불행한 이분법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복수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16년 전에 모든 집단수용소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비밀경찰의 승리를 위해서 고문당한 희생자들이 저항 없이 스스로 교수대에 목을 매고,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이상 긍정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포기하도록 요구되었다.
교수대로 올라가기 전에 희생자를 이미 파괴하는 데 성공한 체제가....한 민족을 노예상태로 , 다른 것에 비교할 수 없을만큼 최상의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안다. 복종하는 가운데 바보처럼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 인간의 행진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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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서 유대인 편에서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려고 한 계획적인 시도는 무엇보다 바로 이 점에서 더 두드러지게 진리를, 더욱이 유대인의 진리를 왜곡시켜 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발생한 폭동의 영예와, 저항을 선택한 몇몇 사람들의 영웅 주의는 바로 나치스가 제시한 비교적 쉬운 죽음(형장에서 처형당하거 나 가스실에서 죽는 죽음)에 대해 거절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리 고 저항과 반란, 즉 '홀로코스트의 역사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작은 지하에 대해 증언한 예루살렘의 증인들은 아주 젊은 사람들만이 ‘우리는 양처럼 가서 학살될 수 없다고 결심’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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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다른 나치스와 그들 수백명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아랍 국가들의 경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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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 게 1958년에 서독에 의해 창설된, 에르빈 쉴레 검사가 이끄는 중앙나치 범죄수사국은 한편으로는 독일인 증인들이 협조를 꺼려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법원이 수사국의 자료들을 기초로 하여 기소하기를 꺼 려하는 태도 때문에 발생한 온갖 종류의 난점에 부딪혔다. 이 예루살렘 의 재판이 아이히만의 협력자들을 밝혀내는 데 필요한 어떤 새롭고 중 요한 증거를 찾아낸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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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다른 나치스들)에게 부과된 놀랄 만큼 관대한 형량을 보면 이들의 범죄 에 대해 기소하기를 꺼려하는 지방법원들의 태도가 드러난다
새로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나치 정권에서 대단히 활약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들 대부분은 독일 법정에서 이미 나치스의 협의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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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혹독한 선고도 부과되쩠기 만, 그런 선고가 친위대 고위층과 경찰 간부대의 장성이었던 에리히 폰 뎀 바흐결레브스기와 같은 법죄가들에게 주어긴 것은 기대에 월 썬 못 미치는 조치였다.
이 두 재판 어디에서도 바흐-첼레브스키가 동부전선에서 반당분자의 수장이었다 는 사실이나 그가 백러시아의 민스크와 모길레프에서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언급이 없다. 독일 법정은 전쟁 중에 저질러진 범죄는 범죄 가 아니라는 핑계로 '인종차별'을 한 것인가?
그는 1952년에 대량학살에 대한 책임이 있다 고자기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결코 이 때 문에 기소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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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1만 1500여명의 판사들 가운데 5000여 명이 히틀러 치하의 버법정에서 활동했다고 추정된다.
모든 독일 문제 전문가들이 지난 15년 간 의문시해 왔던, 독일 민족 자신의 과거에 대한 태도는 이때 가장 분 명하게 입증되었다. 독일인 스스로는 이러저런 이유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또 살인지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지 않은 채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데 대해 별로 못마땅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만일 세계 여론이 끈질기게 이러한 사람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한 다면, 그들은 전적으로 기꺼이 어느 정도까지는 의무감을 가지고 수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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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유는 독일이 사형제도를 폐지했으며 , 따라서 아이 히만이 응당받이야 할 형량을 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일 법정 이 나치스의 대량학살지들에게 보여준 관대함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주장을 불성실한 것이라고 의심하기는 어렵다. 물론 독일에서 아이히 만에 대한 재판을 할 때 초래될 가장 큰 정치적 위험은, 안센이 지적한 것처럼• 범죄 의도(mens rea)가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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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단기 히틀러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들을 수행하기 위해 모였올 뿐 이었다
왜냐하면 이 기소사건과 관련된 한 재판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역사 였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재판의 심판대에 서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아 니고 나치 정부도 아니며 바로 역사 전체에 나타나는 반유대주의이다." 이것은 벤구리온이 설정한 기조였고, 이를 하우스너 씨는 충실하게 따 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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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민족이 걸어간 핏자국 난 길을 표시한 이정표에 필수적인 반유대주의의 결백한 집행자일 뿐이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이 민족의 운명의 근거에는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어떤 비합리적인 동기들이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히틀러는 유대인의 살육에 대한 죄가 없고 시온주의자들의 희생자였으며, 시온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목표(이스라엘 창건)를 결국 달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범죄를 그가 수행하도록 강요했다(사부라, *이집트 외무장관)
피고가 설명하는 역사철학을 따라가며 역사를 시온의 장로들이 이끌어 간다는 식으로 말했다(세르바티우스 박사)
제2장 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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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저녁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에서 체포되어 9일 후에 이스라엘로 압송, 1961년 4월 11일에 예루살렘 지방 법원으로 재판받기 위해 이송된 뒤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재판의 근거가 되는 1950년에 입안된 나치스 및 나치 협력자 (처벌)법은 “이러한-~ 범죄 가운데 하나라도 범한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각의 죄목에 대해 아이히만은 '기소장이 의미하는 바대로는 무죄' 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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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
나치 법률체계하 국가적 공식행위,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 행사할 수 없다
아이히만 자신의 태도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살인죄에 대한 기소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 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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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에서의 최종 해결책의 이행은 6개월 뒤에 시작되었다. 이때 여자와 아이들은 모아서 이동식 가스 화물차 안에서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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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가 살인의 방조자로 기소되있다면 유죄라고 인정헀을까? 아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조건들을 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은 회고를 할 때에만 범죄일 뿐, 자기는 언제나 법률을 준 수하는 시민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최선을 다해 수행한 히 들러의 명령은 제3제국에서는 '법의 효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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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을 분개 하게 만든 것은 “경찰 소속이 아닌 사람에 의해 이주 문제가 다루어졌 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추방을 돕고 실행해야 할 사람은 나였고, 내가 전문가인 이주 문제가 이 부대의 신참자에게 맡겨졌기 때문입니 다
그는 지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 심의 가책을 받았을 거라는 점을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이란수백만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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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판정(정신과의사), 매우 긍정적인 사람(성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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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나치 정권 아래에서 예외가 아 니었다•는 점에서는 정상이었다. 하지만 제3제국의 조건 하에서는 오 직 예외들만이 정상적으로 반응할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다. 이러 한 간단한 진실은 판사들이 해결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딜레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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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스는 군대를 명령을 받는 자 (Befehlsempfänger)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Befehlsträger)로 바 꾸어 놓았다. 이는 옛날의 '나쁜 소식의 사자와 같이 명령을 실행해야 하는 자들 위에 놓인 중요하고 책임성 있는 부담을 암시했다. 더구나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이히만은 공식적으 로 비밀의 사자(Gehimnisträger)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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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희생자들에게 어떠한 나쁜 감정을 가진 적이 없었고, 게 다가 그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상당히 긴 시간을 들여 증명하려 했다.
. 그가 유대인 의 '강제이주를 아주 성공적으로 수행한 빈에서 그는 린츠 출신의 '옛 애인을 유대인 정부로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유대인과의 성교를 의미하는 민족보호법위반(Rassenschande) 죄는 친위대 요원에게는 죄 가운데 가장 큰 범죄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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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1932년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해 4월 에 그는 린츠의 젊은 변호사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권고로 나치당에 가입 했고 친위대에 들어갔다. 칼텐브루너는 나중에 제국안전부 본부의 우두머리가 된다. 제국안전부의 6개 주요부서 가운데 하인리히 뮐러가지휘히는 제4국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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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간에 그는 신념을 가지고 당에 가입한 것도 아니었고, 또 어떤 신념에 설득된 적도 없었다.
그는 제대로 정보를 입 수할 시간도 없었고, 알고 싶은 욕구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당의 정강 도 몰랐고『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다. 칼텐브루너가 그에게 “친위대에 가입하는 것이 어때?'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지 다라고 대답했다. 일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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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새로운 직업들은 그 시작부터 그다지 전망이 밝지 않았다.친위대에 가입한 모든 이들은 모두 정규 직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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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그는 독일 여권을 소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오스트리아인이 되었다. 그는 1933년 8 월부터 1934년 9월까지 이 훈련소에 머물러 소대 지휘관3)으로 승진 했고, 군인으로서 직업을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충분 히 가졌다.
매일매일, 군복무의 년수힘을 니는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미칠 듯 이 지루한 생활에서 그는 친위대 제국지휘관 소속 보안대(힘러 보안대 S.D.) 에 자리가 나자 즉시 신청했다
제3장 유대인 문제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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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아이히만이 직장을 얻는 데 성공했을 때, 친위대 제국지휘관 소속 보안대 (이하 보안대)는 친위대 내의 비교적 새로운 기구였다.
이 기구의 초기의 임무는 당원들을 염탐하는 것이었고, 따라
서 보안대는 정규 당기구에 대해서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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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란 원래 당 지도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된 특수기구였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실망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고, 다시 밑바닥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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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으로 돌아가보면, 분명한 것은 정권을 잡은 나치 정부의 첫 조 치 중 하나가 공직 (독일에서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의 모든 교직과 라디오, 극장, 오페라, 콘서트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오락 예술 산업이 공직에 포함된다)에서 유대인을 축출하는 것이었는데, 일반적으로 공 직에서 그들을 퇴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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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다른 유럽 국 가에서도 별로 미래가 없니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가 몇몇 유대인 이민자들은 이 시기에 실제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이 꿈에서 깨어나는 데는 크리스탈나호트(Kristallnacht), 깨진 유리의 밤이라 불리는 1938년 11월의 조직적인 학살이 필요했다. 이때 7500곳의 유대인 가게 유리가 깨졌고, 모든 회당이 불타올랐으며 , 2만 명의 유대인 남자가 집단수용소로 끌려갔다.
뉘른베르크 법은 유대인에게서 정치적 권리를 월배앗았지만 시 민적 권리를 빼앗진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국민(Reichsbürger)이 아 니지만, 독일 국가의 일원(Staatsangehörige)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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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뉘른베르크 법은 독일 제국에서 유대인이 처 하게 된 새로운 상형을 안정시킨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말하면 그 들은 1933년 1월 30일 이후로는 2급 시민이었다. 이들이 나머지 주민으로부터 거의 완벽히 분리되기까지는 몇 주 또는 몇 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일은 공포를 줌으로써,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일상적인 묵 인을 통해서 기능하게 되었다.
유대인은 이제 자신 만의 법을 부여받았으므로 더 이상 법적 국외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어차피 그들에게 강요된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끼리 산다면 간 섭받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독일 소재 유대인 제국대변단의 말에 의하면, 뉘른베르크 법령의 의도는 '독일 과 유대 민족 간에 참을 만한 관계 수준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친위대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유대인 은 행복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대체로 잠정협상(modus vivendi)이 기능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들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협조하겠다고 제의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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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기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을 기음으로 만났을 때, 시온주의자들과 동화론자들 모두 위대한 '유대인의 부용이나 '독일계 유대인의 위 대한 건설 운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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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일에 대한 그의 학습이 거의 전적으로 시온주의와 관 련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모두 오랫동안 지위를 유지해온 저명한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과 그의 첫 개인적인 접촉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가 '유대인 문제'에 그렇게 매혹된 이유는 그 자신의 '이상주의' 때문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상주의자란 자신 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었고(따라서 사업가 같은 사람은 아 니었음),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회 생시길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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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만단 가장 위대한 '이상주의자'는 그가 헝가리에서 유대인 추방을 협 상한 루돌프 카스트니 (Rudolf Kastner) 박사였다. 아이히만이 수천 명의 유대인을 불법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보내는 대신(기차는 사실 상 독일 경철에 의해 보호되었음), 여러 수용소(그곳에서 몇십만이 아 수수비츠로 보내졌음)에서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오스트리아의 독일제국합병 (Anschluss) 이후인 1938년 3월에 아이히만은 빈으로 보내져 독일에 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이민을 계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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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인은 완전한 시민(full-fledged citizens)이 될 수 없었고, 공무원이 될 수 없었으며, 언론 활동에서 배제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 2일 이후로 독일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은 국적이 박탈되 있는데, 이는 추방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나치당 강령=바이마르 헌법)
하지만 1938년 3월 빈에서 일어난 일은 완전히 달랐다. 아이히만의 임무는 '강제이주로 규정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그들의 바람이나 시 민권과 관계없이 모든 유대인은 강제이주, 보통 말로 하면, 추방될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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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적인 유대인 조직과 이념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에 대해 칭찬받았다.
8개월 동안 4만 5000명의 유대인이 오 스트리아에서 떠났지만, 같은 기간 독일에서는 기껏 1만 9000명만이 떠났다. 18개월 이내에 오스트리아 유대인 인구의 약 60피센트인 10만 5000명이 오스트리아에서 정호b'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다 '합법적으 로' 떠났다. 심지어 전쟁이 터진 후에도 대략6만 명의 유대인이 탈출할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해냈을까? 이 모든 것을 기능케 한 기본 생각은 물론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분명 그를 빈으로 보낸 장본인 하이드리히의 상세한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총 괄적인 책임'이라는 환상적인 주장에 사로잡혀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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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업무진행 과정에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었고, 여기서 아이히만은 생전 처음으로 자신에게 및 가지 특별한 재능이 있음을 발 견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남들보다 뛰어났다. 그는 조 직능력과 협상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협동작업라인'을 고안해 냈다. “그 시작 부분에 첫 번째 서류가 제출되면, 이어 다른 문서가 제출 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마지막에는 완제품으로 여권이 생산'되는 방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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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끝에서 당신이 어느 경 도의 재산, 공장, 가게, 아니면 은행계좌를 가진 유대인을 집어넣으면, 그는 이 청구에서 저 창구로,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움직이며 이 건물 안을 통과하면, 다른 끝에서 돈 한문도, 아무런 권리도 없이, 단지 '당신은 2주일 안에 이 나리를 떠나야 합니다. 아니면 당신은 수용소로 보내집니다라고 쓰인 여권만을 갖고 나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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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치스 간부와 당국의 노력을 함께 기울인 결과인 500 만 명의 유대인 죽음을 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 자신도 잘 알듯이, 터무니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이 저주받을 말을 들어줄 만한 모든 이들 에게 이 말을 역겹도록 반복했다.
자신이 게토 체계를 '발명'했다든가, 모든 유 럽의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보낼 '생각을 해만 척한 것은 완전히 허풍이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한 아이히만 의 기여는 그가 좋아한 뢰벤해르츠 박사에게 대부분 의존한 것이었다. 400만여 명의 유대인을 어떻게 전쟁 후 유럽에서 수송할 것인지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인 생각를을 하기 위해 그는 뢰벤해르츠 박사를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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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허풍 떠는 것은 일반적인 악덕인 반면, 더 구체적이고 결정적 인 아이히만의 성격 결함은 그에게 그 어느 것도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성격 결함이 빈에서의 에 피소드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만큼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와 그 의 부하들과 유대인은 모두 '함께 노력하고 있었고,' 문제가 있을 때마 다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은 그에게 달려와 가습을 털어놓고', 그에게 '그들의 모든 슬픔과 비애'를 얘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유대인은 이민 가기를 '원했고,' 자기 자신 즉 아이히만은 그들을 돕기 위해 거기에 있 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우연히 나치 당국은 제국을 유대인이 없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 두 욕구가 일치했고, 그 자신 즉 아이히만은 “양쪽 모두에게 공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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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29일부터 1961년 1월 17일까지 행해진 경찰심문 녹음의 독일어 번역본의 각 페이지마다 아이히만이 교정한 후 승인했는데, 이 는 심리학자에게는 말 그대로 금광을 이룬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를 분명 히 괴롭혔을 결점 (경미한 실어증 증세)을 희미하게 깨닫고 있던 그는 사과하면서, 관청용어(Amtssprache)만이 나의 언어입니다'라고 말했 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관청용어가 그의 언어가 된 것은 상투 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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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만든 문장을 하나 말하더라도 그는 이 밀이 상투어가 될 때기지 계속 만복했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 회고록을 쓸 때나 김철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년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 수록, 그의 밀서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 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기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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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지 과거를 상기하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세상과 그는 한대 완벽 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8000만 명으로 이루어진 독일 사회가 동일한 방법, 동일한 자기기만, 거짓말, 어리석음을 통해 현실과 사실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 아이히만의 정신 속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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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독일 국민 전체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기짓말은 히들러나 괴벨스가 만든 독일 민족을 위한 운명의 전투'(der Schicksalskampf des deutschen Volkes)리는 구호였다. 이 구호는 세 가지 면에서 쉽게 자기기만에 빠 지게 해주었다. 그것은 첫째로 전쟁은 전쟁이 아니라고 암시했다. 둘째 로 전생을 시작한 것은 운명이지 독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셋째로 전 생은 독일인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이들은 적을 전멸시켜야지, 그렇 지 않으면 전멸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만약 그가 “그들을 이송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도살자에게로 인도되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인정'하라는 것인 가7'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가 계속한 말은 “그는〔자신의〕과거의 적 들과 화해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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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터무니없는 상투어는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지신들이 만들어낸 관용구로서, 사람들이 12년 동안이나 믿고 살아온 그 상투어만큼이나 현실 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피고가 자산의 인 생의 모든 시기와 모든 활동마다 그것에 대해 의기양양함을 느끼게 하 는 다른 상투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판시들은 당황한 동시에 분 노했다. 그의 정신 속에서는 종전 무렵에 걸맞은 “나는 내 무덤에 웃으 며 뛰어들 것이다라는 말과, “나는 지상의 모든 반유대주의자들에 대 한 경고로 기쁘게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할 것이다라는 말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었다. 이 말은 아주 다른 상황들 가운데서도 그의 기 분을 북돋우는 데 완전히 똑같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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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내게 부여한 얼마 안되는 재능 가운데 하나는 진실에 대한 능력입니다.
정리가 안 된 장황한 메모 속에서 그는 '여 기에 기록된 이 진실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미래의 역사가들은 충 분히 객관적이도록 하라는 환상적인 경고를 했다.
그가 행한 최악의 광대짓들은 거의 주목받지 않았고 거의 보도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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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에게는 이것은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들이었고, 그가 기억 속에서나 즉흥적으로 자신의 기분을 북돋우는 관용구들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모순' 따위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주 만족스러 워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 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The End. 2022. 10.10
제1장 정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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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정의의 집).
통역사들의 불어 통역은 탁월하 고 영어 통역은 참고 들어줄 만한데, 독일어 통역은 완전 코미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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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시들의 행동에 극적인 요소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재판장 모세 란다우 (Moshe Landau)는 통역사가 통역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답한 적이 거의 없었다. 또 종종 통역에 끼어들어 고치고 수정해 주기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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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대질심문 때에는, 심지어 아이
리만과 대화 시 동료 재판관들에게 그들의 모국이인 독일어를 사용하 라고 권유리기도 했다.
전반적인 재판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은 란다우 판사였다.
이스라엘 수상인 다비드 벤구리온(Daⅵd Ben-Gurion) 이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하여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책' 1) 에 대한 그의 역할을 재판하도록 예루살렘 지방법원으로 압송하기로 결정했을 때 염두에 뒀던 쇼와 같은 재판을 위해서 이 법정은 분명히 그리 나쁜 장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의 설계사라는 적 절한 칭호로 불렸던 벤구리온은 이 소송 절차의 보이지 않는 무대 매니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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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대에 오른 것은 그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유대인의 고통이나 독일 민족 또는 인 류, 심지어는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
재판 기간 동안 검사에게 기자회견과 Tv 인터뷰가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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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은둔을 요구하고, 분노보다는 슬픔을 허 용하며. 그 자신을 주목받는 자리에 놓음으로써 갖게 되는 모든 쾌락을 이주 조심스럽게 피하도록 처방한다.
이번 경우는 “유대인의 비극 전체가 주요 관심사가 될 것이다.” ...“
우리가 어떤 인종차별도 하지 않기 때 문이다.” ...이 소송사건은 아이 히만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이 무엇을 겪었느냐를 바탕으 로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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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오로지 유대인 법정만이 유대인에게 정의를 실현해줄 수 있으며, 그들의 적들을 심판 하는 자리에 앉는 것은 바로 유대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그는 믿었다.(법무장관 하우스너)
따라서 “우리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호언장담을 하게 된 것이다,
랍비의 법으로 유대인 시민권에 대한 개인 자격을 규정하는 이 스라엘에서는 어떤 유대인도 비유대인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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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비유대인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고, 오직 이스라엘에서만 유대인은 안전하고 명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흐국국1시켜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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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나름 대로의 결론을 이끌기 위해 이 재판이 필요하지도 않은, 나처럼 유럽 에서 이주한 중년과 노년의 '생존자들이었다.
유리 부스 안의 인물은 더욱더 창백해지고 더욱더 유령과 같은 모 습으로 변해가서, “바로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괴물이 앉아 있다" 고 소리치며 손가락질해도 그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지 못할 것처 럼 보였다
재판이란 희생자가 아니라 행위자와 함께 시작되고 끝나는 연극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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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파도 위에서 출령이는 배'와 같은, 피투성이의 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재판은 결코 연극이 되지는 않았지만, 벤구리온이 처음에 염두에 두었던 쇼, 즉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간 단히 말해 전 세계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교훈을 담은 쇼는 이루어졌다. 바로 이 쇼에서 얻은 교훈은 교훈 받을 사람에 따라 다르
다고 생각했다. 왜 이스라엘이 피고를 납치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 해 재판 시작 전에 벤구리온*(수상)이 작성한 많은 글에서 이 교훈들은 개괄 되었다. 비유대인의 세계에 주는 교훈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100여만 명의 아기들이 단지 유대인의 아 기라는 이유 때문에, 어떻게 나치스에 의해 살해되었는기를 우리는 세계 만방에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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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이후에 성 장한 이스라엘의 세대는' 유대 민족과의 연관성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이는 그들 자신의 역사와의 연관성 상실을 의미한다. “우리의 젊 은이들은 유대 민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실에 대해 그들이 알기 원한다." (벤구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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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또한 달리 설명되지 않는, 초기 단계의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 유대인 공동체의 협상적 태 도를 설명해 주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 위험성이 드 러나게 된 것은 수년 뒤 전쟁이 발발한 후, 유대인 단체들과 나치 관료 사이의 일상적 계약 때문에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이 유대인 탈출을 돕 는 일과 나치스가 유대인의 이동 격리를 돕는 것과의 차이점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게 된 때였다).
모든 실제적 차원에서 유대 국 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벤구리온 수상이 이런 종류의 '유대적 의식을 강화하려고 했다면 그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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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종교적으로 기초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낡아빠진 불행한 이분법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복수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16년 전에 모든 집단수용소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비밀경찰의 승리를 위해서 고문당한 희생자들이 저항 없이 스스로 교수대에 목을 매고,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이상 긍정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포기하도록 요구되었다.
교수대로 올라가기 전에 희생자를 이미 파괴하는 데 성공한 체제가....한 민족을 노예상태로 , 다른 것에 비교할 수 없을만큼 최상의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안다. 복종하는 가운데 바보처럼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 인간의 행진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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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서 유대인 편에서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려고 한 계획적인 시도는 무엇보다 바로 이 점에서 더 두드러지게 진리를, 더욱이 유대인의 진리를 왜곡시켜 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발생한 폭동의 영예와, 저항을 선택한 몇몇 사람들의 영웅 주의는 바로 나치스가 제시한 비교적 쉬운 죽음(형장에서 처형당하거 나 가스실에서 죽는 죽음)에 대해 거절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리 고 저항과 반란, 즉 '홀로코스트의 역사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작은 지하에 대해 증언한 예루살렘의 증인들은 아주 젊은 사람들만이 ‘우리는 양처럼 가서 학살될 수 없다고 결심’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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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다른 나치스와 그들 수백명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아랍 국가들의 경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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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 게 1958년에 서독에 의해 창설된, 에르빈 쉴레 검사가 이끄는 중앙나치 범죄수사국은 한편으로는 독일인 증인들이 협조를 꺼려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법원이 수사국의 자료들을 기초로 하여 기소하기를 꺼 려하는 태도 때문에 발생한 온갖 종류의 난점에 부딪혔다. 이 예루살렘 의 재판이 아이히만의 협력자들을 밝혀내는 데 필요한 어떤 새롭고 중 요한 증거를 찾아낸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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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다른 나치스들)에게 부과된 놀랄 만큼 관대한 형량을 보면 이들의 범죄 에 대해 기소하기를 꺼려하는 지방법원들의 태도가 드러난다
새로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나치 정권에서 대단히 활약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들 대부분은 독일 법정에서 이미 나치스의 협의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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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혹독한 선고도 부과되쩠기 만, 그런 선고가 친위대 고위층과 경찰 간부대의 장성이었던 에리히 폰 뎀 바흐결레브스기와 같은 법죄가들에게 주어긴 것은 기대에 월 썬 못 미치는 조치였다.
이 두 재판 어디에서도 바흐-첼레브스키가 동부전선에서 반당분자의 수장이었다 는 사실이나 그가 백러시아의 민스크와 모길레프에서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언급이 없다. 독일 법정은 전쟁 중에 저질러진 범죄는 범죄 가 아니라는 핑계로 '인종차별'을 한 것인가?
그는 1952년에 대량학살에 대한 책임이 있다 고자기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결코 이 때 문에 기소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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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1만 1500여명의 판사들 가운데 5000여 명이 히틀러 치하의 버법정에서 활동했다고 추정된다.
모든 독일 문제 전문가들이 지난 15년 간 의문시해 왔던, 독일 민족 자신의 과거에 대한 태도는 이때 가장 분 명하게 입증되었다. 독일인 스스로는 이러저런 이유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또 살인지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지 않은 채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데 대해 별로 못마땅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만일 세계 여론이 끈질기게 이러한 사람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한 다면, 그들은 전적으로 기꺼이 어느 정도까지는 의무감을 가지고 수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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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유는 독일이 사형제도를 폐지했으며 , 따라서 아이 히만이 응당받이야 할 형량을 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일 법정 이 나치스의 대량학살지들에게 보여준 관대함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주장을 불성실한 것이라고 의심하기는 어렵다. 물론 독일에서 아이히 만에 대한 재판을 할 때 초래될 가장 큰 정치적 위험은, 안센이 지적한 것처럼• 범죄 의도(mens rea)가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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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단기 히틀러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들을 수행하기 위해 모였올 뿐 이었다
왜냐하면 이 기소사건과 관련된 한 재판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역사 였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재판의 심판대에 서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아 니고 나치 정부도 아니며 바로 역사 전체에 나타나는 반유대주의이다." 이것은 벤구리온이 설정한 기조였고, 이를 하우스너 씨는 충실하게 따 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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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민족이 걸어간 핏자국 난 길을 표시한 이정표에 필수적인 반유대주의의 결백한 집행자일 뿐이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이 민족의 운명의 근거에는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어떤 비합리적인 동기들이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히틀러는 유대인의 살육에 대한 죄가 없고 시온주의자들의 희생자였으며, 시온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목표(이스라엘 창건)를 결국 달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범죄를 그가 수행하도록 강요했다(사부라, *이집트 외무장관)
피고가 설명하는 역사철학을 따라가며 역사를 시온의 장로들이 이끌어 간다는 식으로 말했다(세르바티우스 박사)
제2장 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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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저녁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에서 체포되어 9일 후에 이스라엘로 압송, 1961년 4월 11일에 예루살렘 지방 법원으로 재판받기 위해 이송된 뒤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재판의 근거가 되는 1950년에 입안된 나치스 및 나치 협력자 (처벌)법은 “이러한-~ 범죄 가운데 하나라도 범한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각의 죄목에 대해 아이히만은 '기소장이 의미하는 바대로는 무죄' 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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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
나치 법률체계하 국가적 공식행위,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 행사할 수 없다
아이히만 자신의 태도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살인죄에 대한 기소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 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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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에서의 최종 해결책의 이행은 6개월 뒤에 시작되었다. 이때 여자와 아이들은 모아서 이동식 가스 화물차 안에서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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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가 살인의 방조자로 기소되있다면 유죄라고 인정헀을까? 아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조건들을 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은 회고를 할 때에만 범죄일 뿐, 자기는 언제나 법률을 준 수하는 시민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최선을 다해 수행한 히 들러의 명령은 제3제국에서는 '법의 효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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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을 분개 하게 만든 것은 “경찰 소속이 아닌 사람에 의해 이주 문제가 다루어졌 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추방을 돕고 실행해야 할 사람은 나였고, 내가 전문가인 이주 문제가 이 부대의 신참자에게 맡겨졌기 때문입니 다
그는 지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 심의 가책을 받았을 거라는 점을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이란수백만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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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판정(정신과의사), 매우 긍정적인 사람(성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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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나치 정권 아래에서 예외가 아 니었다•는 점에서는 정상이었다. 하지만 제3제국의 조건 하에서는 오 직 예외들만이 정상적으로 반응할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다. 이러 한 간단한 진실은 판사들이 해결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딜레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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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스는 군대를 명령을 받는 자 (Befehlsempfänger)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Befehlsträger)로 바 꾸어 놓았다. 이는 옛날의 '나쁜 소식의 사자와 같이 명령을 실행해야 하는 자들 위에 놓인 중요하고 책임성 있는 부담을 암시했다. 더구나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이히만은 공식적으 로 비밀의 사자(Gehimnisträger)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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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희생자들에게 어떠한 나쁜 감정을 가진 적이 없었고, 게 다가 그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상당히 긴 시간을 들여 증명하려 했다.
. 그가 유대인 의 '강제이주를 아주 성공적으로 수행한 빈에서 그는 린츠 출신의 '옛 애인을 유대인 정부로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유대인과의 성교를 의미하는 민족보호법위반(Rassenschande) 죄는 친위대 요원에게는 죄 가운데 가장 큰 범죄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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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1932년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해 4월 에 그는 린츠의 젊은 변호사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권고로 나치당에 가입 했고 친위대에 들어갔다. 칼텐브루너는 나중에 제국안전부 본부의 우두머리가 된다. 제국안전부의 6개 주요부서 가운데 하인리히 뮐러가지휘히는 제4국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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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간에 그는 신념을 가지고 당에 가입한 것도 아니었고, 또 어떤 신념에 설득된 적도 없었다.
그는 제대로 정보를 입 수할 시간도 없었고, 알고 싶은 욕구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당의 정강 도 몰랐고『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다. 칼텐브루너가 그에게 “친위대에 가입하는 것이 어때?'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지 다라고 대답했다. 일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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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새로운 직업들은 그 시작부터 그다지 전망이 밝지 않았다.친위대에 가입한 모든 이들은 모두 정규 직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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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그는 독일 여권을 소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오스트리아인이 되었다. 그는 1933년 8 월부터 1934년 9월까지 이 훈련소에 머물러 소대 지휘관3)으로 승진 했고, 군인으로서 직업을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충분 히 가졌다.
매일매일, 군복무의 년수힘을 니는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미칠 듯 이 지루한 생활에서 그는 친위대 제국지휘관 소속 보안대(힘러 보안대 S.D.) 에 자리가 나자 즉시 신청했다
제3장 유대인 문제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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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아이히만이 직장을 얻는 데 성공했을 때, 친위대 제국지휘관 소속 보안대 (이하 보안대)는 친위대 내의 비교적 새로운 기구였다.
이 기구의 초기의 임무는 당원들을 염탐하는 것이었고, 따라
서 보안대는 정규 당기구에 대해서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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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란 원래 당 지도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된 특수기구였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실망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고, 다시 밑바닥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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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으로 돌아가보면, 분명한 것은 정권을 잡은 나치 정부의 첫 조 치 중 하나가 공직 (독일에서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의 모든 교직과 라디오, 극장, 오페라, 콘서트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오락 예술 산업이 공직에 포함된다)에서 유대인을 축출하는 것이었는데, 일반적으로 공 직에서 그들을 퇴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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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다른 유럽 국 가에서도 별로 미래가 없니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가 몇몇 유대인 이민자들은 이 시기에 실제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이 꿈에서 깨어나는 데는 크리스탈나호트(Kristallnacht), 깨진 유리의 밤이라 불리는 1938년 11월의 조직적인 학살이 필요했다. 이때 7500곳의 유대인 가게 유리가 깨졌고, 모든 회당이 불타올랐으며 , 2만 명의 유대인 남자가 집단수용소로 끌려갔다.
뉘른베르크 법은 유대인에게서 정치적 권리를 월배앗았지만 시 민적 권리를 빼앗진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국민(Reichsbürger)이 아 니지만, 독일 국가의 일원(Staatsangehörige)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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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뉘른베르크 법은 독일 제국에서 유대인이 처 하게 된 새로운 상형을 안정시킨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말하면 그 들은 1933년 1월 30일 이후로는 2급 시민이었다. 이들이 나머지 주민으로부터 거의 완벽히 분리되기까지는 몇 주 또는 몇 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일은 공포를 줌으로써,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일상적인 묵 인을 통해서 기능하게 되었다.
유대인은 이제 자신 만의 법을 부여받았으므로 더 이상 법적 국외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어차피 그들에게 강요된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끼리 산다면 간 섭받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독일 소재 유대인 제국대변단의 말에 의하면, 뉘른베르크 법령의 의도는 '독일 과 유대 민족 간에 참을 만한 관계 수준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친위대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유대인 은 행복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대체로 잠정협상(modus vivendi)이 기능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들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협조하겠다고 제의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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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기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을 기음으로 만났을 때, 시온주의자들과 동화론자들 모두 위대한 '유대인의 부용이나 '독일계 유대인의 위 대한 건설 운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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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일에 대한 그의 학습이 거의 전적으로 시온주의와 관 련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모두 오랫동안 지위를 유지해온 저명한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과 그의 첫 개인적인 접촉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가 '유대인 문제'에 그렇게 매혹된 이유는 그 자신의 '이상주의' 때문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상주의자란 자신 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었고(따라서 사업가 같은 사람은 아 니었음),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회 생시길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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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만단 가장 위대한 '이상주의자'는 그가 헝가리에서 유대인 추방을 협 상한 루돌프 카스트니 (Rudolf Kastner) 박사였다. 아이히만이 수천 명의 유대인을 불법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보내는 대신(기차는 사실 상 독일 경철에 의해 보호되었음), 여러 수용소(그곳에서 몇십만이 아 수수비츠로 보내졌음)에서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오스트리아의 독일제국합병 (Anschluss) 이후인 1938년 3월에 아이히만은 빈으로 보내져 독일에 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이민을 계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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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인은 완전한 시민(full-fledged citizens)이 될 수 없었고, 공무원이 될 수 없었으며, 언론 활동에서 배제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 2일 이후로 독일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은 국적이 박탈되 있는데, 이는 추방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나치당 강령=바이마르 헌법)
하지만 1938년 3월 빈에서 일어난 일은 완전히 달랐다. 아이히만의 임무는 '강제이주로 규정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그들의 바람이나 시 민권과 관계없이 모든 유대인은 강제이주, 보통 말로 하면, 추방될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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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적인 유대인 조직과 이념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에 대해 칭찬받았다.
8개월 동안 4만 5000명의 유대인이 오 스트리아에서 떠났지만, 같은 기간 독일에서는 기껏 1만 9000명만이 떠났다. 18개월 이내에 오스트리아 유대인 인구의 약 60피센트인 10만 5000명이 오스트리아에서 정호b'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다 '합법적으 로' 떠났다. 심지어 전쟁이 터진 후에도 대략6만 명의 유대인이 탈출할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해냈을까? 이 모든 것을 기능케 한 기본 생각은 물론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분명 그를 빈으로 보낸 장본인 하이드리히의 상세한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총 괄적인 책임'이라는 환상적인 주장에 사로잡혀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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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업무진행 과정에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었고, 여기서 아이히만은 생전 처음으로 자신에게 및 가지 특별한 재능이 있음을 발 견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남들보다 뛰어났다. 그는 조 직능력과 협상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협동작업라인'을 고안해 냈다. “그 시작 부분에 첫 번째 서류가 제출되면, 이어 다른 문서가 제출 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마지막에는 완제품으로 여권이 생산'되는 방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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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끝에서 당신이 어느 경 도의 재산, 공장, 가게, 아니면 은행계좌를 가진 유대인을 집어넣으면, 그는 이 청구에서 저 창구로,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움직이며 이 건물 안을 통과하면, 다른 끝에서 돈 한문도, 아무런 권리도 없이, 단지 '당신은 2주일 안에 이 나리를 떠나야 합니다. 아니면 당신은 수용소로 보내집니다라고 쓰인 여권만을 갖고 나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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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치스 간부와 당국의 노력을 함께 기울인 결과인 500 만 명의 유대인 죽음을 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 자신도 잘 알듯이, 터무니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이 저주받을 말을 들어줄 만한 모든 이들 에게 이 말을 역겹도록 반복했다.
자신이 게토 체계를 '발명'했다든가, 모든 유 럽의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보낼 '생각을 해만 척한 것은 완전히 허풍이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한 아이히만 의 기여는 그가 좋아한 뢰벤해르츠 박사에게 대부분 의존한 것이었다. 400만여 명의 유대인을 어떻게 전쟁 후 유럽에서 수송할 것인지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인 생각를을 하기 위해 그는 뢰벤해르츠 박사를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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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허풍 떠는 것은 일반적인 악덕인 반면, 더 구체적이고 결정적 인 아이히만의 성격 결함은 그에게 그 어느 것도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성격 결함이 빈에서의 에 피소드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만큼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와 그 의 부하들과 유대인은 모두 '함께 노력하고 있었고,' 문제가 있을 때마 다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은 그에게 달려와 가습을 털어놓고', 그에게 '그들의 모든 슬픔과 비애'를 얘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유대인은 이민 가기를 '원했고,' 자기 자신 즉 아이히만은 그들을 돕기 위해 거기에 있 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우연히 나치 당국은 제국을 유대인이 없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 두 욕구가 일치했고, 그 자신 즉 아이히만은 “양쪽 모두에게 공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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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29일부터 1961년 1월 17일까지 행해진 경찰심문 녹음의 독일어 번역본의 각 페이지마다 아이히만이 교정한 후 승인했는데, 이 는 심리학자에게는 말 그대로 금광을 이룬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를 분명 히 괴롭혔을 결점 (경미한 실어증 증세)을 희미하게 깨닫고 있던 그는 사과하면서, 관청용어(Amtssprache)만이 나의 언어입니다'라고 말했 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관청용어가 그의 언어가 된 것은 상투 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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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만든 문장을 하나 말하더라도 그는 이 밀이 상투어가 될 때기지 계속 만복했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 회고록을 쓸 때나 김철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년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 수록, 그의 밀서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 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기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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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지 과거를 상기하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세상과 그는 한대 완벽 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8000만 명으로 이루어진 독일 사회가 동일한 방법, 동일한 자기기만, 거짓말, 어리석음을 통해 현실과 사실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 아이히만의 정신 속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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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독일 국민 전체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기짓말은 히들러나 괴벨스가 만든 독일 민족을 위한 운명의 전투'(der Schicksalskampf des deutschen Volkes)리는 구호였다. 이 구호는 세 가지 면에서 쉽게 자기기만에 빠 지게 해주었다. 그것은 첫째로 전쟁은 전쟁이 아니라고 암시했다. 둘째 로 전생을 시작한 것은 운명이지 독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셋째로 전 생은 독일인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이들은 적을 전멸시켜야지, 그렇 지 않으면 전멸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만약 그가 “그들을 이송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도살자에게로 인도되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인정'하라는 것인 가7'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가 계속한 말은 “그는〔자신의〕과거의 적 들과 화해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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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터무니없는 상투어는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지신들이 만들어낸 관용구로서, 사람들이 12년 동안이나 믿고 살아온 그 상투어만큼이나 현실 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피고가 자산의 인 생의 모든 시기와 모든 활동마다 그것에 대해 의기양양함을 느끼게 하 는 다른 상투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판시들은 당황한 동시에 분 노했다. 그의 정신 속에서는 종전 무렵에 걸맞은 “나는 내 무덤에 웃으 며 뛰어들 것이다라는 말과, “나는 지상의 모든 반유대주의자들에 대 한 경고로 기쁘게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할 것이다라는 말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었다. 이 말은 아주 다른 상황들 가운데서도 그의 기 분을 북돋우는 데 완전히 똑같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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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내게 부여한 얼마 안되는 재능 가운데 하나는 진실에 대한 능력입니다.
정리가 안 된 장황한 메모 속에서 그는 '여 기에 기록된 이 진실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미래의 역사가들은 충 분히 객관적이도록 하라는 환상적인 경고를 했다.
그가 행한 최악의 광대짓들은 거의 주목받지 않았고 거의 보도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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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에게는 이것은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들이었고, 그가 기억 속에서나 즉흥적으로 자신의 기분을 북돋우는 관용구들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모순' 따위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주 만족스러 워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 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The End. 2022. 10.10
제1장 정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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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정의의 집).
통역사들의 불어 통역은 탁월하 고 영어 통역은 참고 들어줄 만한데, 독일어 통역은 완전 코미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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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시들의 행동에 극적인 요소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재판장 모세 란다우 (Moshe Landau)는 통역사가 통역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답한 적이 거의 없었다. 또 종종 통역에 끼어들어 고치고 수정해 주기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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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대질심문 때에는, 심지어 아이
리만과 대화 시 동료 재판관들에게 그들의 모국이인 독일어를 사용하 라고 권유리기도 했다.
전반적인 재판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은 란다우 판사였다.
이스라엘 수상인 다비드 벤구리온(Daⅵd Ben-Gurion) 이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하여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책' 1) 에 대한 그의 역할을 재판하도록 예루살렘 지방법원으로 압송하기로 결정했을 때 염두에 뒀던 쇼와 같은 재판을 위해서 이 법정은 분명히 그리 나쁜 장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의 설계사라는 적 절한 칭호로 불렸던 벤구리온은 이 소송 절차의 보이지 않는 무대 매니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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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대에 오른 것은 그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유대인의 고통이나 독일 민족 또는 인 류, 심지어는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
재판 기간 동안 검사에게 기자회견과 Tv 인터뷰가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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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은둔을 요구하고, 분노보다는 슬픔을 허 용하며. 그 자신을 주목받는 자리에 놓음으로써 갖게 되는 모든 쾌락을 이주 조심스럽게 피하도록 처방한다.
이번 경우는 “유대인의 비극 전체가 주요 관심사가 될 것이다.” ...“
우리가 어떤 인종차별도 하지 않기 때 문이다.” ...이 소송사건은 아이 히만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이 무엇을 겪었느냐를 바탕으 로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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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오로지 유대인 법정만이 유대인에게 정의를 실현해줄 수 있으며, 그들의 적들을 심판 하는 자리에 앉는 것은 바로 유대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그는 믿었다.(법무장관 하우스너)
따라서 “우리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호언장담을 하게 된 것이다,
랍비의 법으로 유대인 시민권에 대한 개인 자격을 규정하는 이 스라엘에서는 어떤 유대인도 비유대인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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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비유대인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고, 오직 이스라엘에서만 유대인은 안전하고 명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흐국국1시켜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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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나름 대로의 결론을 이끌기 위해 이 재판이 필요하지도 않은, 나처럼 유럽 에서 이주한 중년과 노년의 '생존자들이었다.
유리 부스 안의 인물은 더욱더 창백해지고 더욱더 유령과 같은 모 습으로 변해가서, “바로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괴물이 앉아 있다" 고 소리치며 손가락질해도 그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지 못할 것처 럼 보였다
재판이란 희생자가 아니라 행위자와 함께 시작되고 끝나는 연극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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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파도 위에서 출령이는 배'와 같은, 피투성이의 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재판은 결코 연극이 되지는 않았지만, 벤구리온이 처음에 염두에 두었던 쇼, 즉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간 단히 말해 전 세계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교훈을 담은 쇼는 이루어졌다. 바로 이 쇼에서 얻은 교훈은 교훈 받을 사람에 따라 다르
다고 생각했다. 왜 이스라엘이 피고를 납치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 해 재판 시작 전에 벤구리온*(수상)이 작성한 많은 글에서 이 교훈들은 개괄 되었다. 비유대인의 세계에 주는 교훈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100여만 명의 아기들이 단지 유대인의 아 기라는 이유 때문에, 어떻게 나치스에 의해 살해되었는기를 우리는 세계 만방에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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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이후에 성 장한 이스라엘의 세대는' 유대 민족과의 연관성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이는 그들 자신의 역사와의 연관성 상실을 의미한다. “우리의 젊 은이들은 유대 민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실에 대해 그들이 알기 원한다." (벤구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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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또한 달리 설명되지 않는, 초기 단계의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 유대인 공동체의 협상적 태 도를 설명해 주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 위험성이 드 러나게 된 것은 수년 뒤 전쟁이 발발한 후, 유대인 단체들과 나치 관료 사이의 일상적 계약 때문에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이 유대인 탈출을 돕 는 일과 나치스가 유대인의 이동 격리를 돕는 것과의 차이점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게 된 때였다).
모든 실제적 차원에서 유대 국 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벤구리온 수상이 이런 종류의 '유대적 의식을 강화하려고 했다면 그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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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종교적으로 기초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낡아빠진 불행한 이분법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복수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16년 전에 모든 집단수용소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비밀경찰의 승리를 위해서 고문당한 희생자들이 저항 없이 스스로 교수대에 목을 매고,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이상 긍정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포기하도록 요구되었다.
교수대로 올라가기 전에 희생자를 이미 파괴하는 데 성공한 체제가....한 민족을 노예상태로 , 다른 것에 비교할 수 없을만큼 최상의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안다. 복종하는 가운데 바보처럼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 인간의 행진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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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서 유대인 편에서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려고 한 계획적인 시도는 무엇보다 바로 이 점에서 더 두드러지게 진리를, 더욱이 유대인의 진리를 왜곡시켜 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발생한 폭동의 영예와, 저항을 선택한 몇몇 사람들의 영웅 주의는 바로 나치스가 제시한 비교적 쉬운 죽음(형장에서 처형당하거 나 가스실에서 죽는 죽음)에 대해 거절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리 고 저항과 반란, 즉 '홀로코스트의 역사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작은 지하에 대해 증언한 예루살렘의 증인들은 아주 젊은 사람들만이 ‘우리는 양처럼 가서 학살될 수 없다고 결심’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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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은 다른 나치스와 그들 수백명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아랍 국가들의 경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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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 게 1958년에 서독에 의해 창설된, 에르빈 쉴레 검사가 이끄는 중앙나치 범죄수사국은 한편으로는 독일인 증인들이 협조를 꺼려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법원이 수사국의 자료들을 기초로 하여 기소하기를 꺼 려하는 태도 때문에 발생한 온갖 종류의 난점에 부딪혔다. 이 예루살렘 의 재판이 아이히만의 협력자들을 밝혀내는 데 필요한 어떤 새롭고 중 요한 증거를 찾아낸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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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다른 나치스들)에게 부과된 놀랄 만큼 관대한 형량을 보면 이들의 범죄 에 대해 기소하기를 꺼려하는 지방법원들의 태도가 드러난다
새로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나치 정권에서 대단히 활약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들 대부분은 독일 법정에서 이미 나치스의 협의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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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혹독한 선고도 부과되쩠기 만, 그런 선고가 친위대 고위층과 경찰 간부대의 장성이었던 에리히 폰 뎀 바흐결레브스기와 같은 법죄가들에게 주어긴 것은 기대에 월 썬 못 미치는 조치였다.
이 두 재판 어디에서도 바흐-첼레브스키가 동부전선에서 반당분자의 수장이었다 는 사실이나 그가 백러시아의 민스크와 모길레프에서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언급이 없다. 독일 법정은 전쟁 중에 저질러진 범죄는 범죄 가 아니라는 핑계로 '인종차별'을 한 것인가?
그는 1952년에 대량학살에 대한 책임이 있다 고자기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결코 이 때 문에 기소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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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1만 1500여명의 판사들 가운데 5000여 명이 히틀러 치하의 버법정에서 활동했다고 추정된다.
모든 독일 문제 전문가들이 지난 15년 간 의문시해 왔던, 독일 민족 자신의 과거에 대한 태도는 이때 가장 분 명하게 입증되었다. 독일인 스스로는 이러저런 이유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또 살인지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살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지 않은 채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데 대해 별로 못마땅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만일 세계 여론이 끈질기게 이러한 사람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한 다면, 그들은 전적으로 기꺼이 어느 정도까지는 의무감을 가지고 수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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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유는 독일이 사형제도를 폐지했으며 , 따라서 아이 히만이 응당받이야 할 형량을 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일 법정 이 나치스의 대량학살지들에게 보여준 관대함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주장을 불성실한 것이라고 의심하기는 어렵다. 물론 독일에서 아이히 만에 대한 재판을 할 때 초래될 가장 큰 정치적 위험은, 안센이 지적한 것처럼• 범죄 의도(mens rea)가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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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단기 히틀러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들을 수행하기 위해 모였올 뿐 이었다
왜냐하면 이 기소사건과 관련된 한 재판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역사 였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재판의 심판대에 서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아 니고 나치 정부도 아니며 바로 역사 전체에 나타나는 반유대주의이다." 이것은 벤구리온이 설정한 기조였고, 이를 하우스너 씨는 충실하게 따 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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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민족이 걸어간 핏자국 난 길을 표시한 이정표에 필수적인 반유대주의의 결백한 집행자일 뿐이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이 민족의 운명의 근거에는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어떤 비합리적인 동기들이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히틀러는 유대인의 살육에 대한 죄가 없고 시온주의자들의 희생자였으며, 시온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목표(이스라엘 창건)를 결국 달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범죄를 그가 수행하도록 강요했다(사부라, *이집트 외무장관)
피고가 설명하는 역사철학을 따라가며 역사를 시온의 장로들이 이끌어 간다는 식으로 말했다(세르바티우스 박사)
제2장 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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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저녁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에서 체포되어 9일 후에 이스라엘로 압송, 1961년 4월 11일에 예루살렘 지방 법원으로 재판받기 위해 이송된 뒤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재판의 근거가 되는 1950년에 입안된 나치스 및 나치 협력자 (처벌)법은 “이러한-~ 범죄 가운데 하나라도 범한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각의 죄목에 대해 아이히만은 '기소장이 의미하는 바대로는 무죄' 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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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
나치 법률체계하 국가적 공식행위, 어떤 다른 나라도 재판권 행사할 수 없다
아이히만 자신의 태도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살인죄에 대한 기소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 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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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에서의 최종 해결책의 이행은 6개월 뒤에 시작되었다. 이때 여자와 아이들은 모아서 이동식 가스 화물차 안에서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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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가 살인의 방조자로 기소되있다면 유죄라고 인정헀을까? 아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조건들을 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은 회고를 할 때에만 범죄일 뿐, 자기는 언제나 법률을 준 수하는 시민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최선을 다해 수행한 히 들러의 명령은 제3제국에서는 '법의 효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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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을 분개 하게 만든 것은 “경찰 소속이 아닌 사람에 의해 이주 문제가 다루어졌 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추방을 돕고 실행해야 할 사람은 나였고, 내가 전문가인 이주 문제가 이 부대의 신참자에게 맡겨졌기 때문입니 다
그는 지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 심의 가책을 받았을 거라는 점을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이란수백만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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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판정(정신과의사), 매우 긍정적인 사람(성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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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나치 정권 아래에서 예외가 아 니었다•는 점에서는 정상이었다. 하지만 제3제국의 조건 하에서는 오 직 예외들만이 정상적으로 반응할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다. 이러 한 간단한 진실은 판사들이 해결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딜레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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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스는 군대를 명령을 받는 자 (Befehlsempfänger)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Befehlsträger)로 바 꾸어 놓았다. 이는 옛날의 '나쁜 소식의 사자와 같이 명령을 실행해야 하는 자들 위에 놓인 중요하고 책임성 있는 부담을 암시했다. 더구나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이히만은 공식적으 로 비밀의 사자(Gehimnisträger)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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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희생자들에게 어떠한 나쁜 감정을 가진 적이 없었고, 게 다가 그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상당히 긴 시간을 들여 증명하려 했다.
. 그가 유대인 의 '강제이주를 아주 성공적으로 수행한 빈에서 그는 린츠 출신의 '옛 애인을 유대인 정부로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유대인과의 성교를 의미하는 민족보호법위반(Rassenschande) 죄는 친위대 요원에게는 죄 가운데 가장 큰 범죄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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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1932년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해 4월 에 그는 린츠의 젊은 변호사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권고로 나치당에 가입 했고 친위대에 들어갔다. 칼텐브루너는 나중에 제국안전부 본부의 우두머리가 된다. 제국안전부의 6개 주요부서 가운데 하인리히 뮐러가지휘히는 제4국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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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간에 그는 신념을 가지고 당에 가입한 것도 아니었고, 또 어떤 신념에 설득된 적도 없었다.
그는 제대로 정보를 입 수할 시간도 없었고, 알고 싶은 욕구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당의 정강 도 몰랐고『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다. 칼텐브루너가 그에게 “친위대에 가입하는 것이 어때?'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지 다라고 대답했다. 일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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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새로운 직업들은 그 시작부터 그다지 전망이 밝지 않았다.친위대에 가입한 모든 이들은 모두 정규 직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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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그는 독일 여권을 소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오스트리아인이 되었다. 그는 1933년 8 월부터 1934년 9월까지 이 훈련소에 머물러 소대 지휘관3)으로 승진 했고, 군인으로서 직업을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충분 히 가졌다.
매일매일, 군복무의 년수힘을 니는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미칠 듯 이 지루한 생활에서 그는 친위대 제국지휘관 소속 보안대(힘러 보안대 S.D.) 에 자리가 나자 즉시 신청했다
제3장 유대인 문제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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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아이히만이 직장을 얻는 데 성공했을 때, 친위대 제국지휘관 소속 보안대 (이하 보안대)는 친위대 내의 비교적 새로운 기구였다.
이 기구의 초기의 임무는 당원들을 염탐하는 것이었고, 따라
서 보안대는 정규 당기구에 대해서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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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란 원래 당 지도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된 특수기구였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실망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고, 다시 밑바닥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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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으로 돌아가보면, 분명한 것은 정권을 잡은 나치 정부의 첫 조 치 중 하나가 공직 (독일에서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의 모든 교직과 라디오, 극장, 오페라, 콘서트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오락 예술 산업이 공직에 포함된다)에서 유대인을 축출하는 것이었는데, 일반적으로 공 직에서 그들을 퇴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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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다른 유럽 국 가에서도 별로 미래가 없니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가 몇몇 유대인 이민자들은 이 시기에 실제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이 꿈에서 깨어나는 데는 크리스탈나호트(Kristallnacht), 깨진 유리의 밤이라 불리는 1938년 11월의 조직적인 학살이 필요했다. 이때 7500곳의 유대인 가게 유리가 깨졌고, 모든 회당이 불타올랐으며 , 2만 명의 유대인 남자가 집단수용소로 끌려갔다.
뉘른베르크 법은 유대인에게서 정치적 권리를 월배앗았지만 시 민적 권리를 빼앗진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국민(Reichsbürger)이 아 니지만, 독일 국가의 일원(Staatsangehörige)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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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뉘른베르크 법은 독일 제국에서 유대인이 처 하게 된 새로운 상형을 안정시킨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말하면 그 들은 1933년 1월 30일 이후로는 2급 시민이었다. 이들이 나머지 주민으로부터 거의 완벽히 분리되기까지는 몇 주 또는 몇 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일은 공포를 줌으로써,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일상적인 묵 인을 통해서 기능하게 되었다.
유대인은 이제 자신 만의 법을 부여받았으므로 더 이상 법적 국외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어차피 그들에게 강요된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끼리 산다면 간 섭받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독일 소재 유대인 제국대변단의 말에 의하면, 뉘른베르크 법령의 의도는 '독일 과 유대 민족 간에 참을 만한 관계 수준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친위대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유대인 은 행복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대체로 잠정협상(modus vivendi)이 기능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들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협조하겠다고 제의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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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기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을 기음으로 만났을 때, 시온주의자들과 동화론자들 모두 위대한 '유대인의 부용이나 '독일계 유대인의 위 대한 건설 운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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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일에 대한 그의 학습이 거의 전적으로 시온주의와 관 련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모두 오랫동안 지위를 유지해온 저명한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과 그의 첫 개인적인 접촉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가 '유대인 문제'에 그렇게 매혹된 이유는 그 자신의 '이상주의' 때문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상주의자란 자신 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었고(따라서 사업가 같은 사람은 아 니었음),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회 생시길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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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만단 가장 위대한 '이상주의자'는 그가 헝가리에서 유대인 추방을 협 상한 루돌프 카스트니 (Rudolf Kastner) 박사였다. 아이히만이 수천 명의 유대인을 불법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보내는 대신(기차는 사실 상 독일 경철에 의해 보호되었음), 여러 수용소(그곳에서 몇십만이 아 수수비츠로 보내졌음)에서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오스트리아의 독일제국합병 (Anschluss) 이후인 1938년 3월에 아이히만은 빈으로 보내져 독일에 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이민을 계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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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인은 완전한 시민(full-fledged citizens)이 될 수 없었고, 공무원이 될 수 없었으며, 언론 활동에서 배제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 2일 이후로 독일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은 국적이 박탈되 있는데, 이는 추방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나치당 강령=바이마르 헌법)
하지만 1938년 3월 빈에서 일어난 일은 완전히 달랐다. 아이히만의 임무는 '강제이주로 규정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그들의 바람이나 시 민권과 관계없이 모든 유대인은 강제이주, 보통 말로 하면, 추방될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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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적인 유대인 조직과 이념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에 대해 칭찬받았다.
8개월 동안 4만 5000명의 유대인이 오 스트리아에서 떠났지만, 같은 기간 독일에서는 기껏 1만 9000명만이 떠났다. 18개월 이내에 오스트리아 유대인 인구의 약 60피센트인 10만 5000명이 오스트리아에서 정호b'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다 '합법적으 로' 떠났다. 심지어 전쟁이 터진 후에도 대략6만 명의 유대인이 탈출할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해냈을까? 이 모든 것을 기능케 한 기본 생각은 물론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분명 그를 빈으로 보낸 장본인 하이드리히의 상세한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총 괄적인 책임'이라는 환상적인 주장에 사로잡혀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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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업무진행 과정에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었고, 여기서 아이히만은 생전 처음으로 자신에게 및 가지 특별한 재능이 있음을 발 견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남들보다 뛰어났다. 그는 조 직능력과 협상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협동작업라인'을 고안해 냈다. “그 시작 부분에 첫 번째 서류가 제출되면, 이어 다른 문서가 제출 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마지막에는 완제품으로 여권이 생산'되는 방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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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끝에서 당신이 어느 경 도의 재산, 공장, 가게, 아니면 은행계좌를 가진 유대인을 집어넣으면, 그는 이 청구에서 저 창구로,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움직이며 이 건물 안을 통과하면, 다른 끝에서 돈 한문도, 아무런 권리도 없이, 단지 '당신은 2주일 안에 이 나리를 떠나야 합니다. 아니면 당신은 수용소로 보내집니다라고 쓰인 여권만을 갖고 나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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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치스 간부와 당국의 노력을 함께 기울인 결과인 500 만 명의 유대인 죽음을 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 자신도 잘 알듯이, 터무니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이 저주받을 말을 들어줄 만한 모든 이들 에게 이 말을 역겹도록 반복했다.
자신이 게토 체계를 '발명'했다든가, 모든 유 럽의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보낼 '생각을 해만 척한 것은 완전히 허풍이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한 아이히만 의 기여는 그가 좋아한 뢰벤해르츠 박사에게 대부분 의존한 것이었다. 400만여 명의 유대인을 어떻게 전쟁 후 유럽에서 수송할 것인지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인 생각를을 하기 위해 그는 뢰벤해르츠 박사를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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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허풍 떠는 것은 일반적인 악덕인 반면, 더 구체적이고 결정적 인 아이히만의 성격 결함은 그에게 그 어느 것도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성격 결함이 빈에서의 에 피소드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만큼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와 그 의 부하들과 유대인은 모두 '함께 노력하고 있었고,' 문제가 있을 때마 다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은 그에게 달려와 가습을 털어놓고', 그에게 '그들의 모든 슬픔과 비애'를 얘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유대인은 이민 가기를 '원했고,' 자기 자신 즉 아이히만은 그들을 돕기 위해 거기에 있 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우연히 나치 당국은 제국을 유대인이 없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 두 욕구가 일치했고, 그 자신 즉 아이히만은 “양쪽 모두에게 공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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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29일부터 1961년 1월 17일까지 행해진 경찰심문 녹음의 독일어 번역본의 각 페이지마다 아이히만이 교정한 후 승인했는데, 이 는 심리학자에게는 말 그대로 금광을 이룬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를 분명 히 괴롭혔을 결점 (경미한 실어증 증세)을 희미하게 깨닫고 있던 그는 사과하면서, 관청용어(Amtssprache)만이 나의 언어입니다'라고 말했 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관청용어가 그의 언어가 된 것은 상투 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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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만든 문장을 하나 말하더라도 그는 이 밀이 상투어가 될 때기지 계속 만복했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 회고록을 쓸 때나 김철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년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 수록, 그의 밀서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 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기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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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지 과거를 상기하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세상과 그는 한대 완벽 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8000만 명으로 이루어진 독일 사회가 동일한 방법, 동일한 자기기만, 거짓말, 어리석음을 통해 현실과 사실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 아이히만의 정신 속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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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독일 국민 전체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기짓말은 히들러나 괴벨스가 만든 독일 민족을 위한 운명의 전투'(der Schicksalskampf des deutschen Volkes)리는 구호였다. 이 구호는 세 가지 면에서 쉽게 자기기만에 빠 지게 해주었다. 그것은 첫째로 전쟁은 전쟁이 아니라고 암시했다. 둘째 로 전생을 시작한 것은 운명이지 독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셋째로 전 생은 독일인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이들은 적을 전멸시켜야지, 그렇 지 않으면 전멸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만약 그가 “그들을 이송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도살자에게로 인도되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인정'하라는 것인 가7'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가 계속한 말은 “그는〔자신의〕과거의 적 들과 화해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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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터무니없는 상투어는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지신들이 만들어낸 관용구로서, 사람들이 12년 동안이나 믿고 살아온 그 상투어만큼이나 현실 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피고가 자산의 인 생의 모든 시기와 모든 활동마다 그것에 대해 의기양양함을 느끼게 하 는 다른 상투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판시들은 당황한 동시에 분 노했다. 그의 정신 속에서는 종전 무렵에 걸맞은 “나는 내 무덤에 웃으 며 뛰어들 것이다라는 말과, “나는 지상의 모든 반유대주의자들에 대 한 경고로 기쁘게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할 것이다라는 말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었다. 이 말은 아주 다른 상황들 가운데서도 그의 기 분을 북돋우는 데 완전히 똑같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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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내게 부여한 얼마 안되는 재능 가운데 하나는 진실에 대한 능력입니다.
정리가 안 된 장황한 메모 속에서 그는 '여 기에 기록된 이 진실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미래의 역사가들은 충 분히 객관적이도록 하라는 환상적인 경고를 했다.
그가 행한 최악의 광대짓들은 거의 주목받지 않았고 거의 보도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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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에게는 이것은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들이었고, 그가 기억 속에서나 즉흥적으로 자신의 기분을 북돋우는 관용구들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모순' 따위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주 만족스러 워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 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The End. 202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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