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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활동적 삶과 근대 (357-404, 35절-40절)
2022. 9. 20 화. 여여
41. 관조와 행위의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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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발견이 낳은 가장 중요한 정신적 결과이자 아르키메데스적 점의 발견과 이와 병행하는 데카르트적 회의가 낳은 결과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위계가 바뀐 일이다.
지상에서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려는 실용적인 열망으로 인해 근대과학이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근대의 테크놀로지가 인간이 노동의 고통을 줄이고 인공세계를 건립하려는 이중의 목적을 위해 고안한 도구의 발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용한 지식에 대한 비실천적인 탐구에 기원을 둔다는 것은 역사적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최초의 근대적 도구 중의 하나인 시계는 실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연실험을 행하기 위한 고도의 ‘이론적’ 목적 때문에 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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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일차적으로 실용적 존재라는 확신만을 고집한다면 기술적 조건을 가진 우리 세계는 더 발전하기는커녕 존속하지도 못할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 경험은, 지식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인간 손의 재주를 신뢰한 후에만 진정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관조가 아닌 ‘행위’를 통해서만 진리와 지식이 획득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새로운 능동적 탐구의 결과물이 나온 이후 활동을 신뢰하고 관조나 관찰을 불신하는 이유들은 더욱 강력한 설득력을 얻게 됐다.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해야만 했고, 알기 위해서는 행해야만 했다. ...우리가 정신이 스스로 만든 어떤 실체를 다루는 곳에서 수학적 지식은 지식의 이상이 되었다. 둘째, 지식은 더 많은 활동을 통해서만 검증될 수 있다는 본질을 가진다. 그 이후 과학과 철학의 진리는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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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일어난 변화는 ...이 전도는 단지 사유와 행위의 관계에만 해당될 뿐이다. 반면 진리를 바라본다는 원래 의미에서의 관조는 완전히 제거되었다. 사유와 관조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사유는 진리의 관조에 이르는 가장 직접적이고 중요한 길로 생각되었다.
사유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말하는 내적 대화로 이해되었다(플라톤의 대화편)
이 대화는 그 자체로 고도의 능동적 상태로 구성되어 있다.
진리는 플라톤이 주장하듯이 arrhēton, 즉 말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logos, 논리적, 오역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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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일어난 이 전도로 인해 행위가 마치 관조를 수행하는 궁극적 의미인 양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 상태인 관조의 지위로 승격된 것은 아니다. ... 근대의 전도는 오로지 사유에만 관심을 가진다. ... 고대철학에서는 존재의 진리를 관조하기 위한 시녀였던 사유가 이제 행위의 시녀가 된다. 관조 자체는 완전히 무의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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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맥락에서 나의 유일한 관심은 플라톤에 기반을 둔 철학과 정치사상의 전통이 하나의 전도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고 또 이 근원적 전도가 위대하고 독창적인 철학의 영향을 받지 못하면 서양철학이 늘 빠져들던 사유의 유형을 광범위하게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 강단철학은 관념론과 유물론, 초월론과 내재론, 실재론과 유명론, 쾌락주의와 금욕주의 등의 끊임없는 역전으로 점철되었다.
플라톤이 한때 이 구조적 요소와 개념들을 전도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이후, 지성사 내부에서 전도가 발생할 때는 오로지 순수 지성적 경험, 즉 개념적 사유 자체의 틀 안에서의 경험 외에는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저 유명한 위계 안에서의 근대적 전도를 지배한 것도 동일한 전통이고 한 쌍의 반대명제를 가지고 벌이는 동일한 지성 게임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는 전도는 갈릴레오의 발견이 낳은 정신적 결과다. 객관적 진리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은 스스로 만든 것만 인식할 수 있다는 확신은 회의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증명 가능한 발견의 결과다. 그러므로 이 확신으로 인해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몇 배로 더 활동적이 되거나 아니면 절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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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은 이제 기만적이고 사라져 없어질 이 세계로부터 영원한 진리의 세계로 눈을 돌리지 않고 그 반대로 두 세계 모두로부터 등을 돌려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간다.
이 측면에서 대부분의 근대철학은 실로 인지이론이자 심리학이다.
철학은 자연과학의 원리를 사후의 사실로부터 발견하고 이를 인간지식의 본질에 관한 총체적 해석에 끼워 맞추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철학은 분명 어떤 다른 영역보다 현대성으로부터 고통을 받았다.
42. 활동적 삶 내에서의 전도와 호모 파베르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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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적 삶 내의 활동 가운데 이전에 관조가 차지하던 지위로 제일 먼저 상승한 것은 만들고 제작하는 활동이었다. 즉 호모 파베르가 특권을 갖게 되었다.
지식을 획득하는 데 호모 파베르가 준 도움과 도구류 덕택으로 이들 활동들은 이전에 인간능력의 위계에서 차지하던 하찮은 위치에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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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에서 오래된 물음인 사물의 ‘본질’ 또는 ‘이유’의 물음이 사물이 존재하게 된 ‘방법’이라는 새로운 물음으로 강조점이 이동한 것은 이러한 확신이 낳은 직접적 결론이다.
그 어떤 책임 있는 과학자도 인간이 자연을 실제로 ‘만들’ 수 있다고 꿈꾸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는 처음부터 제작자의 관점에서 자연에 접근했다. ... 실천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렇지 않으면 획득할 수 없는 지식의 확실성을 위한 ‘이론적’ 목적 때문이었다. “나에게 재료를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그것으로 세계를 건설하겠습니다. 나에게 재료를 주십시오. 그러면 세계가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발전했는지를 보여주겠습니다.” 칸트의 이 말은 만든다는 것과 안다는 것의 근대적 결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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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는 ‘본질’과 ‘이유’에서 ‘방법’으로 강조점이 이동했는데, 이것은 이제 사물이나 영원한 운동이 아니라 과정이 지식의 실질적 대상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과학의 대상은 더 이상 자연이나 우주가 아니라 역사, 즉 자연이나 생명 또는 우주가 존재하게 된 역사여야 한다는 점이다.
자연은 인간의 천재성, 즉 호모 파베르의 천재성이 실험을 통해 반복하고 다시 만들 수 있는 과정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기 때문에, 자연은 이제 과정이 되었다. 그래서 모든 자연적 사물들의 의미는 오로지 전체 과정에서 행하는 그들의 기능으로부터 주어졌다.
이러한 생산과정의 강조나 모든 사물을 제작과정의 결과로 간주하는 태도가 호모 파베르와 그의 경험 영역에 뚜렷한 특징이지만, 근대가 생산물 그 자체에 대한 모든 관심을 버리고 오로지 그 과정만을 강조한 것은 매우 새로운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호모 파베르와는 반대로 생산과정을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도구 제작자의 정신을 능가하는 것이다. 이제 호모 파베르의 관점에서 수단인 생산과정 또는 발전은 완성된 생산물인 목적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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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는 이 전도의 완전한 의미는 탁월한 호모 파베르의 세계관인 기계적 세계관이 지배할 때는 드러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근대는 특별히 진리를 수용하는 인간의 능력을 의심하고 주어진 것을 불신하며 그리하여 인간의식 내에 안다는 것과 생산한다는 것이 일치하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희망에 고무되어 새롭게 생산과 자기반성을 확신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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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정신과 철학적 반성의 이와 같은 밀접한 관계는 호모 파베르의 승리가 자연과학에서의 새로운 방법의 적용과 실험 및 과학적 탐구의 수학화에 제한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근대는 자연을 이해하거나 인간이 생산하지 않은 것을 알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대신에 오로지 인간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되는 사물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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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치철학을 서술하려는 17세기의 시도들이다. ..
‘국부’(commonwealth) 또는 국가라고 불리는 인공 동물을 만들기’ 위한 수단과 도구를 발명하려는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홉스에게도 “최고의 동인은 회의였다.” 그리고 ‘신이 세계를 만들고 지배하듯이’ 인간도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인간의 기술’을 확립하기 위해 채택한 방법도 마찬가지로 자기반성, 즉 ‘자기를 독해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인간의 ‘기술 작품’ 중 가장 인간적인 것을 만들고 판단하는 기준과 규칙은 인간의 바깥에 있지 않으며, 감각이나 정신을 통해 지각되는 세계의 실재에서 인간이 공유하는 어떤 것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인간 신체에 적용된 정념의 운동을 설명하고 있는 시계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국부, 즉 인간의 창조물인 ‘인공적 인간’의 확립은 ‘시계처럼 스프링과 바퀴로 저절로 움직이는 자동체’의 구축에 다름 아니다.
달리 말하면, 자연의 사물을 존재하게 했던 ‘제작’ 과정을 인공적 조건 아래서 모방하려는 시도인 실험을 통해 자연과학을 지배했던 과정은 인간사 영역의 행동원리로서도 기능하며, 더 잘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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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반성에 의해 산출된 결과물들, 즉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운동의 본성 속에 들어 있다.
즉 그것들은 감각작용의 활동이다. ...사유함 그 자체가 아니라 사상의 대상들만이 운동과 소멸의 가능성을 넘는다. 그러므로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모델과 형상, 즉 관념이 아니라 과정이 근대 호모 파베르의 생산과 제작활동의 지표가 되었다.
홉스는 제작과 계산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정치철학에 도입하고자 했다. 아니 그는 새롭게 발견한 생산의 소질을 인간사의 영역에 적용하고자 했다.
이 철학은 그 본질상 실재를 이해할 수도 심지어는 믿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만들려고 하는 것만이 장차 실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제작의 영역에서 전적으로 옳고 정당하다.
그런데 이 생각은 전적으로 예상할 수 없는 것만이 발생하는 사건들의 실제 과정 때문에 언제나 무시되었다. 생산의 양식으로 행위하고 ‘결과를 계산함’의 양식으로 추론한다는 것은 예상할 수 없는 것, 즉 사건 자체를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발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비개연적인 것이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인간사의 영역 내에서 사건은 실재의 그물망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사건을 계산하지 않는 것, 즉 누구도 안전하게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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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세계소외가 확장될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관조와 행위, 사고와 행동의 전도가 시사하는 것 이상으로 근대의 태도와 가치평가를 전통의 그것과 예리하게 갈라놓는다. 관조와의 단절은...과정의 개념을 제작에 도입함으로써 완성되었다.
.. 제작이 이제 활동적 삶 내에서 정치적 행위의 지위를 차지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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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인식의 상이한 종류를 논하면서 추론지(dianoia)와 실천학(epistēmē praktikē)을 가장 낮은 서열에 위치시키고, 오히려 제작학(epistēmē poiētikē)을 이들 위에 둔다. 그리고 테오리아(theōria), 즉 진리의 관조를 최고의 서열에 둔다
(그런데) 관조(theōria)와 제작(poiēsis)은 내적 친화성을 가지며 관조와 행위와의 관계와는 달리 서로 명확한 대립적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리스 철학에서 관조와 제작은 결정적인 유사점을 가진다. 즉 장인의 작업이 ‘형상’(idea)에 의해 인도되는 한에서 관조는 제작에 내재하는 요소로 여겨진다. 이때 형상은 제작과정이 시작되기 전과 과정이 끝난 후에 여전히 장인이 가지는 모델이다. 형상은 우선 장인에게 무엇을 만들 것인지를 말해주고 그다음에는 완성돤 생산물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해준다.
관조(1) 첫째, 그것은 타우마차인, 즉 존재의 기적에 대한 놀라움으로부터 모든 철학이 시작된다. 진리의 관조 역시 말이 필요 없는 놀라움의 상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 그 내용과 용어 및 예증들에서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는 다른 측면을 갖고 있다. 이 예들은 내적인 눈으로 모델의 형상을 보고 이것에 따라 대상물을 제작하는 장인의 경험에 기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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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의 대상이었을 때는 영속성을 가졌던 그 무언가의 탁월성이 작업에 의해, 사라져가는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어지고 망가진다. 그래서 작업과 제작을 지도하는 모델, 즉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적절한 태도는 존재하는 그대로 내버려두어 정신의 내적인 눈에 현상하도록 하는 것이다.
관조(2)
이러한 측면에서 관조는 인간이 존재의 기적에 직면하여 빠져드는 놀라움의 상태와 매우 다르다. 관조는 모든 작업과 행위와 분리되었을 때조차도 작업과정의 한 부분이자 동시에 그것으로 남는다. 관조에서 모델을 보는 것은 시간적으로 연장되며 본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 된다. 여기서 모델은 더 이상 어떤 행동을 지도하지 않는다.
전통철학에서는 이 두 번째의 관조가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그래서 말없이 놀라운 상태에서 단지 몰입에 의한 부차적이고 비의도적 결과물이었던 부동은 이제 관조적 삶의 조건이자 현저한 특징이 된다. 인간을 압도하여 움직임이 없는 부동의 상태로 던져넣은 것은 놀라움이 아니다. 관조의 상태는 제작활동을 의식적으로 중단함으로써 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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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철학자의 무언의 놀라움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용된 경험인 데 반하여 다수가 알고 있는 장인의 관조적 일별은 일차적으로 호모 파베르의 경험으로부터 파생된 관조에 무게가 실리도록 만든다.
따라서 관조와 관조적 삶의 개념과 실천을 형성한 것은 철학자와 무언의 철학적 경이가 아니라 위장한 호모 파베르였다. ...호모파베르는 불멸적이고 영속적인 것과 더불어 사는 관조적 삶에서 자신의 거처를 발견하도록 설득되었다. ...그가 해야만 하는 것은 자신의 팔을 내리고 형상을 바라보는 행위를 무한히 지속하는 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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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와 제작의 서열을 단지 뒤엎기만 했다면, 근대는 여전히 전통의 틀 안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틀은 제작 그 자체를 이해해서 강조점이 완전히 달라지자 강제로 열렸다. 강조점은 이제 생산을 이끄는 영속적 모델과 생산물로부터 제작과정으로, ‘사물의 본질은 무엇이고 어떤 종류의 사물이 생산되어야 하는가?’의 물음으로부터 ‘이 사물은 어떻게, 그리고 어떤 수단과 과정을 통해 존재하게 되고 재생산될 수 있는가?’의 물음으로 이동했다. 이것이 함축하는 의미는 두 가지다. 한편으로 관조는 이제 더 이상 진리를 산출한다고 믿어지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 관조는 활동적 삶 자체에서 가졌던 지위도 상실한 까닭에 일상적 인간경험의 영역 안에 위치하게 되었다.
43. 호모 파베르의 패배와 행복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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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낳았던 사건들, 갈릴레오의 발견 이후,.... 관조와 제작의 전도 또는 의미 있는 인간능력의 범위에서 관조를 제거하는 것은 거의 당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전도가 행위자인 인간이나 노동하는 동물로서의 인간보다는 호모 파베르, 즉 제조업자와 호모 파베르를 최고의 인간으로 고양시켰다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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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파베르의 전형적인 태도를 발견한다. 세계의 도구화, 인공물을 만드는 제작자의 도구와 생산성에 대한 확신, 모든 영역에서 수단-목적 범주의 신뢰, 모든 문제는 해결가능하고 인간의 동기들은 유용성의 원리에로 환원될 수 있다는 확신, 주어진 모든 것을 원료로 취급하고 자연 전체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리가 다시 깁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잘라낼 수 있는 광활한 옷감’으로 간주하는 주권, 지능과 창조성의 균등화, 즉 ‘인공물의 제작, 특히 도구를 만들어내고 이것들의 제작을 무한히 다양하게 할 수 있는 도구의 제작을 위한 첫 단계’로 간주될 수 없는 모든 사상에 대한 경멸, 그리고 제작과 행위의 동일시를 당연히 여기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생산될 사물의 유형에 대한 호모 파베르의 편애는 조화와 단순성이라는 이전 관념을 대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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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호모 파베르의 가장 오래된 확신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일상적인 것으로 그 지위가 상승되었다.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은 근대가 호모 파베르를 존경한다는 점이 아니라 이 존경으로 인해 활동적 삶의 위계질서 내에서 노동이 너무나 빨리 최고 지위로 상승했다는 점이다.
노동의 지위상승에 앞서 호모 파베르의 전통적인 정신적 태도에서의 일탈과 변화들이 일어나는데, 이것들은 근대에 매우 특징적일 뿐만 아니라 근대의 발전을 주도했던 사건들의 본성 속에 실제로 내재하고 있다. 호모 파베르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킨 것은 바로 과정의 개념이 근대에서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다. 호모 파베르가 관련된 근대에서 그 강조점이 ‘본질’에서 ‘방법’으로, 사물 자체에서 사물의 제작과정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결코 축복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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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가치에 대한 교환가치의 승리와 더불어 먼저 모든 가치의 교환가능성, 다음에는 상대화, 최종적으로 탈가치화의 원리가 도입된 것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상업사회의 발전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호모 파베르는 무한히 크거나 작은 것 모두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를 고안해냄으로써 경이로운 천재성을 확보했지만, 제작과정에 선행하며 이후에도 지속되거나 제작활동과 관련해서 신뢰하고 의지할 만한 절대적인 것을 형성하는 불변의 척도들은 박탈당했다. 의미 있는 인간능력의 영역에서 관조를 제거함으로써 활동적 삶의 활동들에서 제작이 가장 많은 것을 상실했다. 어느 정도는 과정의 연속성을 끊는다고 할 수 있는 행위나 신진대사의 과정인 생물학적 삶을 따르는 노동과 달리 제작은 과정을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경험하며 따라서 이차적이고 파생적인 것으로 여긴다. 더욱이 근대의 세계소외와 자연을 정복하는 전능한 장치로의 자기반성의 상승을 통하여 가장 많은 것을 상실한 것은 세계 건설과 세계 사물의 생산을 주도하던 인간능력인 제작의 능력이다.
호모 파베르의 세계관의 정수인 유용성의 원리가 불충분하다고 판명되어 재빨리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원리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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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이 만든 것만을 알 수 있다는 이 시대의 확신은 더 현대적인 과정의 원리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고 종국에는 파괴된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사람과 세계의 이 관계가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다면, 즉 세계 사물이 더 이상 그들의 유용성에서 고려되지 않고 단순히 이것들을 산출하는 생산과정의 부산물로 여겨진다면 그래서 생산과정의 최종생산물이 더 이상 참된 목적이 아니며 생산된 사물이 미리 결정된 사용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을 생산하는 데 이용됨에 따라서 가치가 매겨진다면, 이때 다음과 같은 반박이 분명히 제기될 것이다. 즉 “생산물의 가치는 단지 이차적이며, 어떤 일차적 가치도 포함하지 않는 세계는 역시 어떤 이차적 가치도 가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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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건설자로 정의하지 않고 일차적으로 도구 제작자, 우연히 사물을 생산하는 ‘특별히 도구를 위해 도구를 만드는 자’로 생각하자마자 자동적으로 발생했다. 유용성의 원리를 이러한 맥락에서 적용한다면, 그 원리는 이제 대상의 사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과 관계 맺게 된다. 이제 생산성을 자극하고 고통과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 유용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궁극적 척도는 유용성이나 대상의 사용이 아니라 ‘행복’이다. 여기서 행복은 생산이나 사물의 소비에서 경험되는 고통과 쾌락의 총계를 의미한다.
‘고통과 쾌락의 계산법’에 관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고안은 쾌락에서 고통을 뺀 총계를 의미하는 벤담의 ‘행복’은 감각을 지각하지만 세계대상과는 무관한 내적 감각과 같으며 자신의 활동만을 의식하는 데카르트적 의식과도 같다. 더욱이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그들 본성의 동일함이며 이 동일함은 고통과 쾌락 계산법의 동일성과 고통과 쾌락에 의한 영향의 동일성에서 알 수 있다는 벤담의 기본적 가정은 근대초기 철학자에게서 직접 이끌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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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주의의 궁극적 토대가 고통의 경험에 근거한다는 것이 고대의 쾌락주의와 그 근대적 변형들에 대해 타당하다 할지라도 근대에 와서는 전적으로 다르고 훨씬 더 강한 중요성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고통에 빠져들게 하고 이 고통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인간을 자신 안으로 밀어 넣은 것이 고대에서는 세계였지만 근대에서는 결코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유파인 청교도주의, 감각주의, 벤담의 쾌락주의는 고대와는 반대로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인해 고무되었다. 그리고 인간 감각이 실재를 지각하는 데 부적합하며 인간 이성의 진리를 인식하는 데도 부적합하다는 의심과 인간은 본질상 결핍의 존재이자 심지어는 박탈을 당한 존재라는 확신에 의해서도 촉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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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들은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상상하거나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이전의 행복을 기억함으로써 자신이 행복하다고 확신했다. 이와 달리 행복이나 구원에 대한 일종의 환상과 같은 수학적 확실성에 이르기 위하여 근대인들은 쾌락의 계산법을, 청교도들은 공덕과 죄에 대한 도덕적 장부를 필요로 했다.
‘자연은 인간을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 지배 아래 두었다’는 의심스러운 발견과 아주 쉽게 측정될 수 있는 감정을 인간영혼속에서 고립시킴으로써 도덕을 엄밀한 학문으로 확립하고자 하는 불합리한 생각 외에 어떤 것도 연루되지 않았을 때 최대행복의 원리가 영어권 세계에서 지성적 승리를 달성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매우 불확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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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와 19세기 초 ...이기주의의 신성함과 강한 확산력을 가진 자기 이익의 힘에 관한....고통-쾌락 계산법이 제공하던..새로운 원리를 형성하는 또 다른 준거점을 발견하게 되는데...바로 삶의 원리다. 18-19세기 모든 체계에서 고통과 쾌락, 공포와 희망이 성취하려고 생각했던 것은 행복이 아니라 개인의 삶의 증진이었으며, 나아가 인류의 생존 보장이었다.
최후의 수단으로서 항상 삶 자체가 그 밖의 모든 것의 준거점 역할을 하는 최고 기준이 된다. 그리고 비록 삶이 최고선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이해관계와 인류의 이해관계는 언제나 개인의 삶 또는 종의 삶과 동일시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원인을 가지며 이 원인은 그것의 가장 완전한 결과보다 더 완전하다는 두 가지 핵심적인 공리를 가지는 인과율은 제작의 영역에 속하는 경험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근대 지성사의 전환점은 유기체 생명의 발전 이미지가, 원인이기 때문에 모든 시계들에 대해 우월할 수 밖에 없는 시계 제작공의 이미지를 대체했을 때 도래했다.
갈릴레오의 발견으로부터 이끌어낸 두 가지 방법, (1) 즉 자기 반성의 방법과 (2) 실험 및 제작의 방법 사이의 갈등은 18세기에는 잠복해 있었고 자기 반성의 방법은 다소 뒤늦게 승리를 할 운명이었다.
자기 관찰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이 생물학적 과정은 동시에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 과정이기 때문에 자기 반성은 마치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의식의 가지들에서 사라질 필요가 없으며...신체 내에서 자신을 외부세계와 연결해줄 충분한 물질을 발견한다.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연장으로서의 세계와의 데카르트적 대립에서 치유불가능하며 의식에 내재하는 주체와 대상 간의 분열은 살아있는 유기체 내에서는 전적으로 사라진다. ...유물론의 19세기 해석판인 자연주의는 데카르트 철학의 난점을 해결하고 동시에 철학과 과학 사이의 골 깊은 격차를 메을 수 있는 길을 생명에서 찾았다.
44. 최고선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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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파베르의 패배는 왜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로 끝났는가. 노동활동이 인간능력의 서열에서 최고의 지위로 상승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다양한 인간의 조건과 능력 내에서 삶이 다른 모든 요소를 지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근대에서 삶이 궁극적인 준거점이자 근대사회의 최고선이 된 이유는 이러한 근대의 전도가 기독교 사회의 구조 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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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개별적 인간생명의 불명성에 대한 기독교의 ‘기쁜 소식’은 인간과 세계의 고대적 관계를 전도시켰고 가장 가멸적인 인간생명을 당시 우주가 차지하고 있던 불멸성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기독교의 새로운 소식은 결코 그들이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불멸성을 약속해주었다.
이전에 정치적 조직체의 ‘생명’이 가지던 지위는 이제 개별적 인간생명이 차지하게 되었다.
*가멸적 존재, mortal 가 멸적이고 유한한 인간
(https://boliar.tistory.com/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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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조직체는 단지 정치적 죄로 인해 박탈될 수 있는 잠재적 불멸성만을 소유한다.
..이제 예수로 인해 잠재적으로 영속하는 새로운 생명이라는 불멸성을 다시 획득했다. 하지만 이 생명은 개인이 저지른 죄의 대가인 두 번째 죽음으로 인해 다시 상실 할 수도 있다.
기독교가 생명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것은 유대 전통의 한 부분이며 이것은 고대인들의 태도와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즉 십계명은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가장 심각하고 최악의 범죄인 살인에 대해서는 아무 강조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일련의 죄 중 하나로 열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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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어떤 이교도의 형벌체계보다 우리 시대의 법률체계와 가장 유사한 유대 법률이 결코 생명보존을 그 토대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대교는 민족의 잠재적 불멸성을 강조한다. 이 불멸성은 이교도의 세계 불멸성과 다르며 기독교가 주장하는 개체적 생명의 불멸성과도 다르다.
기독교는 불멸성을 부여했다. 이로 인해 내세성이 명백히 증가하고 동시에 지상에서의 삶의 중요성도 매우 증가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개체적 생명의 불멸성이 서양의 핵심고리가 되었을 때, 즉 기독교가 발생했을 때에만 지상의 삶도 인간의 최고선이 될 수 있었다.
생명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기독교는 활동적 삶 내부의 고대적 구별과 명료한 표현을 균등화시켰다. 기독교는 노동, 작업, 행위가 현세의 필연성에 똑같이 예속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기독교는 고대인과 달리 노동활동, 즉 생물학적 과정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활동을 경멸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시기 기독교 전파? 자본주의의 발원? 적극적 세계 개발(을 넘어 정복, 심하게는 착취, 이용, 그리고 폐기; 이 모든 것은 신의 이름으로 . 미개인을 개화시키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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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이나 근대 이전의 다른 기독교 저자들이 노동을 예찬했다는 이야기는 발견할 수 없다.
이후의 기독교 철학,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노동은 살아갈 다른 수단을 전혀 갖지 못한 사람들의 의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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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퀴나스에게 노동은 인간의 종의 생존을 유지시키는 자연의 길이다. 그는 자신의 생계를 위해 모든 사람이 땀 흘려 일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노동은 생계문제를 해결하고 의무를 다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필사적인 수단이라고 결론지었다.
기독교가 육체의 고행을 빈번히 이용한다는 점은 노동활동의 성격에 대한 고대의 확신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 고행에서 노동은, 특별히 수도원의 노동은 가끔씩 자기 고문과 같은 처벌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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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신성함과 어떤 경우에도 살아있어야 한다는 의무를 강조하는 기독교가 긍정적인 노동철학을 결코 발전시키지 못했던 이유는 모든 인간활동에 앞서 관조적 삶을 최우선시했기 때문이다.
‘관조적 삶은 활동적 삶보다 단적으로 우월하다’ 그리고 행위의 삶의 가치가 무엇이든 간에 관조에 헌신하는 삶의 가치들이 ‘보다 효과적이고 강력하다’
이 복음서에도 노동을 예찬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예수가 설교에서 권면하는 유일한 활동은 행위다. 그리고 그가 강조하는 유일한 인간능력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다.
근대는 최고선이 세계가 아니라 삶이라는 가정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해왔다.
모든 근대를 뒤로 하고 노동의 사회가 직업인의 사회로 대체된 현재의 우리 세계에도 이것은 여전히 진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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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여전히 기독교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중요한 것은 생명의 불멸성이 아니라 , 삶의 최고선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본질인 의심과 불신의 정신은 기독교 정신에는 가장 해로운 것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근저에서 흔들어 놓은 것은....오히려 진실한 신앙인이 구원에 대해 의심을 할 때 기독교의 근본적 동요가 일어났다. 이들의 눈에 기독교의 전통적 내용과 약속은 ‘터무니 없는 ’것으로 보였다)
45.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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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는 세속화의 과정, 특히 데카르트적 회의의 필연적 결과인 근대의 신앙의 상실이 없었다면 결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회의로 말미암아 개체의 생명은 그 불멸성을 박탈당했거나 적어도 불멸성에 대한 확신을 상실했다.
도래한 세계에 대한 확실성을 상실하자 근대인은 이 세계가 아니라 자신에게 내던져졌다.
근대인은 내세를 상실했을 때 이 세계를 얻지 못했다. 근대인은 엄격히 말해 생명을 얻지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로 내던져졌고 폐쇄된 자기반성의 내부로 내던져졌다. 여기서 그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계산하는 정신의 텅 빈 과정이며 자기 자신과 행하는 정신의 작용이다. 이 정신에 남겨진 유일한 내용은 탐욕과 욕망, 즉 신체의 무감각적인 충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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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정치조직체와 중세 개인의 삶처럼 지금 잠재적으로 불멸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삶 그자체, 즉 인간 종의 잠재적으로 영속하는 삶의 과정이다.
사회가 발생하자 결국 종의 삶이 자기 주장을 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근대초기는 개인의 ‘이기적’ 삶을 주장했고 근대후기는 ‘사회적’ 삶과 ‘사회회된 인간 을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사회의 계급들을 지도하고 고무시키며 이들 간의 갈등을 통해서 사회 전체가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이제 남겨진 것은 ‘자연적인 힘’, 즉 모든 인간과 인간의 활동이 똑같이 예속되어 있는 삶의 과정 자체의 힘이다.
개인의 삶을 종의 삶과 연결하는 데 인간의 보다 고차적인 능력 중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개인의 삶은 삶 과정의 한 부분이 되었다 . 그리고 노동한다는 것, 즉 자신의 삶과 가족의 삶을 보장하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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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만이 전적으로 무의미한 인간경험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사고 자체도 ‘결과를 계산하는 것’이 됨으로써 두뇌의 한 기능으로 변했다. 그 결과 인간보다 훨씬 더 이런 기능을 잘 수행하는 전자 도구들이 고안되었다. 행위는 곧장 생산과 제작의 관점에서 이해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이 관점에서만 이해된다.
제작은 이제 노동의 다른 형식으로 간주되었고...신비스럽지 않은 삶 과정의 한 기능으로 간주되었다.
반면 우리는 인간활동의 영역에서 노동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이상 유토피아로 간주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노고와 고통을 완화시키는 길을 발견하여...
노동하는 사회 또는 직업인 사회의 마지막 단계는 구성원들에게 단순한 자동적 기능만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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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멀리 떨어진 우주의 유리한 지점에서 바라볼 때 인간의 모든 활동은 어떤 활동으로서가 아니라 과정으로 나타난다. 최근에 과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근대의 자동화는 생물학적 돌연변이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원자의 경우에 모든 입자를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자유롭다. 그리고 이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들은, 인간행위를 지배하고 다수로 하여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행동하게 하는 통계법칙과 동일하다.
이것은 사회학자의 주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개별 입자들이 그 선택에 있어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면 과학자들이 우리에게 원자의 ‘생명’에 대해 말해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령 정밀한 도구를 통해 지각할 수 있다 하더라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인 무한히 작고 무한히 큰 세계로부터 떨어진 만큼이나 인간실존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듯이, 우리가 이 사회에서 행동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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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심리학, 인류학이 우리에게 ‘사회적 동물’에 관해 무슨 말을 했든지간에 인간은 만들고 제작하고 건축하는 일을 고집한다. 물론 이들의 능력은 점점 더 예술가의 능력으로 제한되고 그래서 이 능력에서 얻어지는 세계성의 경험은 점점 더 일상적인 인간경험의 영역에서 빠져나가버렸다.
과학자들은 자연과 인간세계 사이에 예전부터 존재하던 보호의 경계선을 없앨 정도로 인간사의 영역을 확장했다. 이들 과학자의 행동은 이른바 정치가 외교나 행정활동보다 정치적 의미가 더 크다
공적여론이 가장 실천적이지 않고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사회구성원이라고 매도했던 사람들이, 행위하는 방법과 조화롭게 행위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로 판명이 난다는 사실은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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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행위는 우주의 관점에서 자연에 작용을 가하지 인간관계의 망에는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행위가 본래 가지는 계시적 성격과 이야기를 산출하고 역사적 사건이 되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이러한 행위의 능력과 계시적 성격은 인간실존에 의미를 부여하여 빛을 발하게 하는 원천들이다.
행위는 특권을 부여받은 소수 사람들의 경험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유는..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가능하며 또 실제로 이루어진다.
실제로 전제정치에서는 사유하는 것보다 행위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활동적 삶 안의 여러 활동을 관찰하고 측정하는 데 오직 활동하는 존재의 경험과 활동성의 정도만을 적용했다면, 사유가 모든 활동을 능가한다는 결론을 얻었을 것이다.
“사람은 그가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을 때 보다 더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은 없다”(Cato 기원전 234-149, 로마 정계 진출)
The End. 2022.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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