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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작업 2022. 9. 6. 화. 여여
18. 세계의 지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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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노동과 구별되는 우리 손의 작업은
무한히 다양한 사물을 제작하며, 이 사물의 총계는 인공세계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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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사물세계의 지속성은 절대적이지 않다. 우리가 소비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이용함으로써 이 세계는 소모된다. 우리의 존재 전체에 스며드는 삶의 과정도 역시 인공세계를 침해한다.
모든 단일 사물은 이 인위적 세계에 와서 머물다가 여러 세대가 교체되면서 함께 항상 대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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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항상 변하는 본질에도 불구하고 같은 의자나 같은 탁자와 관계함으로써 자신의 동일성을, 즉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달리 말해, 인간의 주관성에 대립하는 것은 손대지 않은 자연의 숭고한 무관심이기보다 인위적 세계의 객관성이다. ... 육체와 사용될 사물이 더 밀접하게 접근하면 할수록, 소비와 사용의 동일화는 더욱 그럴듯해 보인다.
소비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인간 노동인 경작은 그 자체를 생산과정으로 변형시키는 완벽한 노동 사례일 수 있다
...그러나 경작지 유지는 반복적 노동을 필요로 한다. 달리 말해 반복적 노동은 생산된 물건의 존재를 확실하게 보장하는 진정한 사물화를 결코 실현할 수 없다. 경작지가 인간의 세계에 영원히 머물기 위해서는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어야 한다. 따라서 경작지는 사용물건이 될 수 없다.
?노동은 끝이 없다. 그래도 해야 한다. 누가? 페이지급, 끝?
19. 사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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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파베르의 작업, 즉 제작은 사물화로 이루어진다.
?사물화? 객관적으로 다룬다? 지속성이 영속해서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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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하는 동물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자 지배자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자연과 지구의 하인으로 남았다. 오직 호모 파베르만이 전 지구의 군주이자 지배자처럼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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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의 즐거움’...그것은 폭력적인 힘의 행사를 통해 느끼는 의기양양함과 관련된다. 인간은 이런 힘을 통해서 스스로를 요소들의 거대한 힘과 비교하고, 도구의 발명을 통해 자연적 수준을 훨씬 넘어 폭력을 증대시키는 방법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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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세계에서 대부분의 작업이 노동의 양식으로 수행되기 때문에 작업인은 자신이 설령 원한다고 하더라도 ‘자신보다는 작품을 위해 일할’ 수 없게 된다.
활동적 삶의 위계 안에서 제작이 가지는 중요성은, 그 형상을 통해 제작과정을 주도하는 이미지나 모델이 제작에 선행할 뿐만 아니라 제품이 완성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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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용물건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성질은 플라톤의 영원의 이데아론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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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사물을 지배하는 영원의 이데아는 그 모델(이데아)이 가지는 영속성과 동일성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다수의 사라질 대상들은 이 모델에 따라 만들어진다.
... 노동과정은 최종생산물이 생산될 때 종결되지 않고 노동력이 고갈되었을 때 끝난다. .... 반대로 작업의 과정에서 끝은 존재한다. 세계에 하나의 독립적 실재로 남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속성을 가진 새로운 사물이 완성되어 인간의 인공세계에 부가될 때 작업과정은 끝난다.
? 노동은 끝이 없고 (끝을 볼 수 없고), 작업은 끝이 있다(끝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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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시작과 예측가능한 끝을 가진다는 것이 제작의 특징이다.
... 작업의 가장 큰 신뢰성은 제작과정이 행위와는 달리 (수단과 목적이) 역전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호모 파베르는 주인이자 지배자다. 그가 모든 자연의 지배자이자 스스로를 지배자로 설정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자신과 자기 활동의 지배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삶의 필연성에 예속된 노동하는 동물에게도, 자신의 동료에게 의존하는 행위의 인간에게도 해당되지 않는다. 호모 파베르는 장차 만들 생산물의 이미지를 가지고 혼자서 자유롭게 생산할 수 있고 자신의 손으로 만든 작품에 홀로 맞서서 다시금 그것을 마음대로 파괴할 수 있다.
20. 도구성 과 노동하는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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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들의 세계적 성격이 노동과정에서 사용될 때보다 더 명백하게 드러날 때는 없다. 노동과정에서 도구들은 노동과 소비과정보다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구체적 사물이다. ... 세계의 지속성과 안정성은 우선 노동하는 동물이 사용하는 도구와 용구에서 드러난다.
? 도구와 도구 사용이 세계를 유지시켰고 계속 지속시키는 잠재력이 있다. 이것이 도구화, 사물화 덕분이다.
노동은 삶의 필수적 부분이고 삶을 초월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삶의 과정에서 노동할 힘을 가지기 위해 살고 소비하는지, 아니면 소비의 수단을 생산하기 위해 노동하는지의 물음처럼 수단과 목적을 전제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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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정과 노동의 양식으로 수행되는 모든 작업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목적지향적 노력이나 그가 원하는 생산물이 아니라 과정 자체의 운동이고 과정이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리듬이다. ...
노동과정은 삶의 과정과 그것이 자연과 행하는 신진대사의 반복적 리듬, 즉 똑같이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리듬과 일치한다. ... 기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 노동력을 더 우월한 자연의 힘으로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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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로 생산을 계속하는 한, 기계의 과정은 육체의 리듬을 대신한다...그러나 아무리 원시적인 기계라 하더라도 그것은 육체의 노동을 지도하고 결국 완전히 대체한다.
? 노동의 리듬, 패턴, 지도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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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힘들을 그 원초적 폭력과 함께 우리 세계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제작 개념에 엄청난 혁명이 일어났다. 늘 ‘일련의 분리된 단계’이던 제조업은 컨베이어 벨트와 일관 작업배치의 과정인 ‘연속과정’이 되었다.
자동화는 이 발전의 가장 최근 단계로서 정말 “기계화의 전 역사를 밝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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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기술이 자연의 힘을 인공세계로 유입하는 데 근거한다면, 미래 기술의 본질은 우주의 힘을 지구의 자연으로 유입하는 것일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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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화가 주도하는 생산양식에서 제조공정에 대한 생산물의 우선성과 생산물과 제조공정(이것은 단지 목적을 생산하는 수단이다)의 구별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진부하다. 이전에는 자연과 자연적 우주에 적용될 수 있었던 호모 파베르와 그의 세계라는 범주(수단과 목적의 범주)는 여기서는 적용되지 못한다
? 노동의 AI화? 알고리즘화?
...그러나 도구와 용구의 목적은 그것이 생산하고자 한 대상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도구의 ‘인간적 가치’는 노동하는 동물의 이용에 제한된다. 달리 말해 도구의 생산자인 호모 파베르는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도구를 발명한 것이지 인간의 삶의 과정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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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의 생산에 적합한 기계를 고안하는 대신 기계의 작용능력에 맞는 대상을 고안하는 것은 ... 그러나 일반적으로 공인된 기계의 목적, 즉 인간 노동력의 해방은 이제 부차적이고 낡은 것으로 그리고 잠재적인 ‘놀라운 효율성의 증대’를 위해서는 부적합하고 제한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기계세계에 자원을 공급했던 자연과정은 기계세계를 점차 삶의 과정과 결합시켰다
... 기술은 사실상 더 이상 ‘물질적 힘을 확장하려는 의식적인 인간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유기체의 내적 구조가 점점 더 인간의 환경으로 이식되는 인류의 생물학적 발전인 것처럼’ 나타난다
? 기술, 기계의 발달로 인간 자체가 사이보그화,처럼 확장된 비인간으로까지 넓어졌다.
21. 도구성 과 호모 파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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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파베르의 용구와 도구들은... 모든 작업과 제작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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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사회에 스며든 유용성의 이상은.... 실제로 더 이상 유용성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의 문제다. 호모 파베르가 도구적 목적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하는 것은 유용성을 위해서다.
공리주의에서 당혹스러운 것은 목적과 수단의 범주, 즉 유용성의 범주 자체를 정당화하는 원리에 도달하지 못한 채, 수단과 목적의 끝없는 연쇄에 빠진다는 사실이다. ‘……하기 위해서’의 목적은 ‘……을 위하여’라는 목적의 내용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의미로서 확립된 유용성이 무의미성을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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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달성되면 목적은 목적이기를 그치고 수단의 선택을 지도하고 정당화하며 수단을 생산하고 조직하는 능력을 잃기 때문이다. 목적은 이제 대상들 가운데 하나의 대상이 된다.
호모 파베르가 단순한 제작자로 머물고 생산활동에서 직접 발생하는 수단과 목적의 범주에서만 생각하는 한, 호모 파베르는 노동하는 동물이 도구성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 실제로 호모 파베르가 얻을 수 없는 이 세계의 유의미성은 그에게는 역설적으로 ‘목적 자체’가 된다.
? 유의미성을 지향하고 목적으로 상정하지만 도달할 수 없다.
엄격히 공리주의적 철학이 무의미성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용물건의 객관적 세계로부터 등을 돌려 사용 자체의 주관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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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파베르의 인간중심적 공리주의를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은 “모든 인간은 결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인간존재는 목적 자체다”라는 칸트의 정식이다.
‘사용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대상이자 ‘어떤 이해관계 없이도 기쁨’을 느끼는 예술작품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대한 역설적인 해석도 공리주의적 사유에 그 기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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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공리주의의 난관은, 모든 제작이 도구성을 통해 세계를 건설한다 할지라도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한 기준이 세계를 확립한 후에도 계속 지배한다면, 사용된 원료만큼이나 이 세계가 무가치해진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인간이 제작자인 한, 그는 모든 것을 도구화하며, 그의 도구화는 모든 사물이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즉 내재적이고 독자적인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결국 제작의 대상, 즉 인간의 도움 없이 존재하고 인간세계와 독립하여 존재하는 ‘지구 자체와 모든 자연의 힘’은 ‘작업으로부터 발생하는 사물화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가치’를 상실한다. 속물적(banausic)의 가장 적절한 번역은 ‘교양 없는’(philistine)이다. 이것은 편의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저속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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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문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사용을 의미하는 도구성 자체가 아니라, 유용성과 공리성을 확립하는 제작의 경험을 삶과 인간세계의 궁극적 기준으로 일반화하는 태도다. 이 일반화는 호모 파베르의 활동에 내재한다. 제작에 들어 있는 수단-목적의 경험은 생산물이 완성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그것이 사용물건으로 쓰이게 되는 마지막 목적지까지 연장되기 때문이다. ... 제작이 주로 사용물건을 제작하는 한에서만 완성된 생산품은 다시 수단이 되며, 삶의 과정이 사물을 취하여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경우에만 제작의 생산적이고 제한적인 도구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무한한 도구화’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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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목적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용자이자 도구화하는 자인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결국 인간은 사물의 척도일 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모 파베르의 기준이 이 세계의 건설에 필수적이었던 것처럼 완성된 세계도 지배하도록 허용된다면, 호모 파베르는 결국 모든 것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단순히 자신의 수단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22. 교환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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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가 호모 파베르의 배제에 열중했던 것처럼 근대는 정치적 인간, 즉 행위하고 토론하는 인간을 공론 영역에서 배제하는 데 열중했다
? 사적영역의 소멸, 정치배제된 공적영역의 사회화?
...달리 말해 가정의 노동자인 노예(oiketēs)와 구별되는 사람들을 위한 생산자(dēmiourgos)가 되는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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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공적인 일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고 비생산적인 공론(agoreuein)과 정치(politeuesthai)로 시간을 허비하지 못하게 하며,
‘과시적 소비’가 노동자 사회의 특징이듯이 ‘과시적 생산’은 사실 생산자 사회의 특징이다.
노동하는 동물의 사회생활은 무세계적이고 종족집단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들은 공적이고 세계적인 영역을 만들어 거기에 거주할 능력이 없다. 이런 노동하는 동물과는 달리, 호모 파베르는 정치 영역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공론 영역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그의 공론 영역은 교환시장이다.
? 노동의 세계는 정치가 없다. 공적영역이 못된다. 무한반복한다,셰계성이 없다.
호모파베르는 정치 대신 교환시장을 공적영역이라는 사회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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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건립자이자 사물의 생산자인 호모 파베르가 생산품의 교환을 통해서만 타인과 적절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인으로부터의 고립은 존재하게 될 사물의 정신적 이미지인 ‘관념’과 함께 독거하는 모든 장인에게는 삶의 필수조건이다. 정치적 형식의 지배와는 달리, 이 장인제도는 일차적으로 사물과 물질의 지배이지 사람의 지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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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작업활동에 가장 대립적이며 가장 파괴적인 것은 팀 작업이다. 팀 작업은 실제로 노동분업의 변형일 뿐이고 ‘공정을 구성요소의 단순운동으로 분해해야만’ 가능하다
교환시장에서 만나는 사람은 ...그들은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상품과 교환가치의 소유주로서 만난다. ... . 이런 인간의 평가절하는 인간을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상품의 질에 따라 생산자로서 판단하는 제조업 사회에서 노동이 처한 상황의 특징이다. 반대로 노동의 사회에서 인간을 판단하는 척도는 그들이 수행하는 기능이다. ...노동의 사회는 노동력에 기계만큼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요즘의 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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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기의 자본주의는 여전히 호모 파베르의 기준에 의해 지배받는다. 호모 파베르가 고립에서 벗어날 때, 그는 상인과 무역인으로 등장하고 이 자격으로 교환시장을 확립한다. ...사물이 지속성으로 인해 사용하기에 적합한 것이 되기보다 미래의 교환을 위해 ‘미리 저장할 수 있게’ 된다 할지라도, 지속성은 여전히 최고 기준으로 남는다. 이것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구별에서 표출되는 질적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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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그 밖의 어떤 것과 교환될 수 있는 교환시장에서만 모든 사물은, 노동생산물이든 작업의 생산물이든 소비재이든 사용물건이든 육체적 삶에 필요하든 생활의 편리를 위해 필요하든 정신생활에 필요하든, ‘가치’(values)가 된다..... 사물은 이 영역에서 상품으로 나타나며 어떤 대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노동도 생산도 자본도 이윤도 원료도 아니라, 단지 그리고 오로지 공론 영역이다. ... 이 ‘시장가치’는, 로크가 분명히 지적했듯이, ‘어떤 사물에 자연적으로 내재하는 가치’와는 무관하다. 이 내재적 가치는 ‘개별 구매자와 판매자의 의지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의 객관적 성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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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행위·관념과 구별되는 가치는 특별히 인간적인 활동의 산물이 아니라 생산품이 사회구성원들 간에 이루어지는 교환의 가변적 상대성에 빠질 때 존재하게 된다.
사물, 관념, 도덕적 이상들은 “이들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만 가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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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도 ...초지일관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의 변화를 자본주의의 원죄로 생각했다. ... 상업사회의 악들에 대항해서 마르크스는 사물 자체의 ‘내재적’이고 객관적인 가치를 다시 선언하지는 않았다. ...소비적인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사물의 기능을 제시했다. 모든 재화를 노동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분배하는 사회주의에서 구체적인 모든 사물은 삶과 노동력의 재생산과정 안의 한 기능으로 변한다.
마르크스가....실패한 이유는 가치의 적절한 영역인 교환시장에는 어떤 ‘절대적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원적 가치 계속 부상, 사물화의 관계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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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신과학인 경제학의 주요 문제를 구성하게 된 이유는 상대성 자체 때문이 아니라, 잣대, 척도, 규칙, 기준들을 사용하여 모든 활동을 결정하는 호모 파베르가 ‘절대적’ 기준이나 잣대의 상실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이미 기준과 보편적 규칙의 상실을 간파했다. 이것은 교환시장의 상대성이 장인의 세계와 호모 파베르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도구성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는지를 보여준다. 교환시장은 단절 없이 일관되게 도구성으로부터 발전했다.
23. 세계의 영속성 과 예술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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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두드러진 영속성 때문에 예술작품은 모든 구체적인 사물들 중에서 가장 세계적인 사물에 속한다. ...그래서 예술작품의 지속성은 모든 사물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지속성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이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영속성을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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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하고 교환하려는 인간의 성향’이 교환대상의 원천이고 인간의 사용능력이 사용물의 원천이듯이, 예술작품의 직접적 원천은 인간의 사유능력이다.
감정과 관련하여 사유는 말이 없고 불명료한 감정의 의기소침한 상태를 변화시킨다. 이런 변화를 통해 이 모든 속성은 세계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사물로 변형된다. 즉 사물화된다.
예술작품의 경우, 사물화는 단순한 변형 이상이다. 사물화는 참된 변형이라 할 수 있는 변신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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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하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고 작곡할 때 발생하는 사물화는 이에 선행하는 사유와 관계하기는 하나, 사유를 현실로 만들고 사유의 사물을 제작하는 것은 최초의 도구인 손을 가지고 인공세계의 다른 지속적인 사물을 만드는 것과 같은 장인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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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살아 있는 말로서 시인과 독자의 회상에 아무리 오래 남는다 할지라도 결국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글로 쓰여 사물들 가운데 하나의 구체적인 사물로 변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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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인식은 같지 않다. 예술작품의 원천인 사유는 모든 위대한 철학에서 변형되거나 변신하지 않고도 분명히 표출된다. 반면 지식을 획득하여 저장하는 인식과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과학이다. 인식은 실천을 고려하여 결정한 것이든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설정한 것이든 항상 명확한 목표를 가진다. 일단 이 목표가 달성되면 인식과정은 끝난다. 반대로 사유는 목적도 없고 자기 외부의 목표도 없다. 사유는 심지어 결과를 산출하지도 않는다.
사유의 과정은 인간의 실존 전체에 너무나 깊이 침투하여 사유의 시작과 끝은 인생의 시작과 끝과 일치한다. ...사유가 자신이 호모 파베르의 영감의 원천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호모 파베르가 도를 지나쳐 무용한 것을 생산하는 경우뿐이다. 여기서 무용한 것이란 물질적·정신적 욕구, 즉 육체적 필요나 지식에 대한 갈망과 무관한 대상들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인식은 예술과 정신적 생산과정을 포함한 모든 과정에 속한다. 제작과 비슷하게 인식은 시작과 끝이 있는 과정이다. 이 과정의 유용성은 검증됐다. 즉 이 과정이 결과를 산출하지 못하면 실패한 것이다. 이는 목수가 두 다리의 탁자를 만들었을 때 이 작업활동을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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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유와 인식을 논리적 추론과 구별해야 한다. 논리적 추론은 공리적이거나 자명한 진술로부터의 연역이나 개별 사건을 일반규칙 아래 포섭하는 작용에서 명백히 드러나며, 일관된 결론의 연쇄를 끌어내는 기술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다.
...인간보다 더 ‘지능적’인, 그래서 가끔 그것을 발명한 인간에게 공포와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새로 발명된 전자기계는 정말 작은 인간(homonculi)인가?
? AI,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지 않은지? 섬세하고 더욱 인간이되고자 한다. 우리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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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성이 인간의 최고 능력이자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 믿은 것, 잘못이다.
단순한 ‘열정의 노예’, 옳다.
명백하게도 두뇌력과 이것이 추진하는 논리적 과정은 세계를 건설할 수 없으며, 삶과 노동, 소비의 충동적 과정만큼이나 무세계적이다.
흔히 유용성 자체를 잘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체로 작업의 특수한 생산성이 유용성에 달려있다기보다 지속성을 산출하는 능력에 달려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사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기능적 사용을 초월한다.
모든 사물은 세계적으로 존재하면서 일단 완성되면 순수한 도구성의 영역을 넘어선다.
271
사용물조차 인간의 주관적 필요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사용물건이 거처를 발견하고 지속하고 사람에게 보이고 이용되는 곳인 세계의 객관적 기준에 의해서 판단된다.
인공적인 사물세계, 즉 호모 파베르가 건설한 인간의 세계는...이 세계의 안정성이 항상 변화하는 인간의 삶과 행위의 운동을 견뎌내고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이세계가 소비를 위해 생산된 사물의 기능주의를 초월하고 이용을 위해 생산된 사물의 유용성을 초월할 때다.
세계가 늘 존재하는 세계가 되기 위해서는 지상의 거처인 인공적 세계가 행위와 말에 적합한 장소여야만 하고, 삶의 필연성에는 전적으로 무용할 뿐 아니라, 세계와 세계의 사물을 생산하는 제작의 다양한 활동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활동들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생물학적 삶과 노동의 강제적 필연성은 만물의 척도가 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제작과 사용의 실용적 도구주의도 만물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The End. 2022.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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