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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
제13, 14, 15장 여여 2022. 11.8 화 9:40
제13장 동부의 학살센터들
나치스가 동부라고 말할 때 이는 폴란드와 발틱 연안 국가들 그리고 점령된 러시아 영토를 의미했다. 이것은 4개의 행정 단위로 나뉘었다.
(1) 폴란드 서부 지역(바르테가우)-책임자 아르투르 그라이저의 관할
(2)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그리고 백러시아의 다소 불특정한 지역을 포함하는 (오스들란트)-점령당국 지위의 리가의 관할
(3) 폴란드 중부 지역(일반정부)- 한스 프랑크의 관할
(4) 우크라이나-알프레트 로센베르 크의 동부점령지역청의 관할
동부는 유대인 고통의 중심적 장면에 해당하며 모든 이송작업의 소름끼치는 최종 종착지였다(생존자의 수는 거의 5퍼센트)
동부는 전쟁 이전에는 유럽에서의 유대인 인구의 중심지였다
(300만 이상의 유대인이 폴란드 거주,
260만명이
발틱 국가들에서,
300만으로 추산되는 러시아 유대인 가운데 절반 이상이 백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크리미아에 거주)
검찰은 유대 민족의 고통과 그것을 위해 이루이진 대량학살의 차원에 일차적으로 관심이 있었다.
문제는 아이히만과 동부의 사태를 연결시키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원고 측은 생존자 이스라엘인들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았다
이 생존자들이 현재 이 나라 인구의 20퍼센트 가량을 이루고 있다.
재판 당국이 명명한 '유대 민족의 고통에 대한 증인들 56명이 원래 계획된15명 내지 20명의 '배경 증인들' 대신에 결국 법정에 섰다.
전체121회 공판 가운데 23회가 전적으로 '배경' 문제에 할애되었는데,
이때 '배경‘이란 말은 이 재판에 명백한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폴란드 게토의 상황과 수많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있었던 절차, 강제 노동, 그리고 대체로 노동을 통한 학살의 시도 등에 대한 증인들의 배경 증언의 요지는 결코 논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는 ’소문에 따르면'과 같은 풍문에 의한 증거들이어서 법적 타당성은 없었다.
법정은 그(아이히만)의 활동 반경이 제국과 보호국, 그리고 서부와 북부, 남부, 남동부, 그리고 중앙유럽의 국가를(즉 동부를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피고(아이히만)는 기소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부정한 적이 없었다 그는 단지 ‘기소된 의미로’ 그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다.
실제로 판사들은 상당히 불쾌한 딜레마에 봉착해 있었다.
(1)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판사들의 공정성에 대해 논란을 벌였다.
그의 생각에는 어떠한 유대인도 최종 해결책의 수행자들에 대한 재판을 주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세르바티우스가 이러한 주장을 했을 때 그가 들었을 답은, 피고인이 반복해서 강조하여 증언한 것처럼 유대인 문제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유대인 시온주의 저술가들, 즉 테오도어 헤르츨과 아돌프 뵘의 '기초적 저술들'로부터 배웠다는 말이겠기 때문이다.
(2) 인간적으로 말해, 이 사람들이 법정에서 어느 누구라도 증언을 못하게 할 사람은 누가 있겠는가? 또한 비록 증인들이 말해야 하는 것이 단지' 이 재판의 부산물로 간주될' 뿐이라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이들이 '증언대에서 자신의 피맺힌 한을 쏟아 부을‘ 때 그 세부사항의 정확도에 대해 누가 감히 문제를 제기하겠는가?
(3) 이스라엘에서도 재판에 출두한 사람은 유죄가 판명 날 때까지는 무죄 로 간주된다. 그러나 아이히만의 경우 이것은 완전히 허구에 불과했다.
벤구리온 수상은 1960년 6월 3일 날짜의 서신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에게 ... 전 유럽에 걸쳐 거대한 그리고 전례 없는 규모로[우리 동족 600만 명]의 대량학살을 조직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아이히만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 주된 이유는 아이히만이 '유대인 문제 전문가’이며 다른 어떤 문제도 다루지 않은 유일한 독일 관리였으므로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과 밀접한 접촉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4) “항소자가 어떠한' 상급자의 명랑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최상급자였으며, 유대인 문제와 관련된 모든 명령을 그가 내렸다.”
그것은 정확히 검사의 주장이었고, 지방법원 판사들은 이 점을 수용하지 않았는데, 위험한 난센스였음에도 불구하고 항소심 법정은 그 내용을 전적으로 옹호했다.
대법관 마이클 A. 무스마노의 증언(검찰 측 증인)을 통해 ...
무스마노 씨는 집단수용소 행정요원들과 동부지역의 이동학살대 요원들을 재판한 사람이었다.
아이히만이 히틀러에게서 직접 자신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과 그의 권력이 “힘러와 하이드리히를 통해 구두로 주어졌다는 것을 믿었다.
구스타프 M. 길베르트(검찰 측 증인)
이런 모든 난제들로부터 판사들이 벗어난 길은 타협을 통한 것이었다.
...판사들은 독일에서 시작하여 동부에 대한 언급으로 끝남으로써 그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이 당한 수난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것보다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에 집중하려 했다
그들은 나치스의 피괴의 작동방식이 이루어진 복잡한 관료적 구성을 확실하게 이해했으며, 따라서 피고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주된 논쟁은 네 가지 항목에서 이루어졌다.
(1) 첫째, 동부에서 돌격대가 자행한 1941년 3월에 있었던 대량학살에 아이히만이 참여했는가의 여부였는데, 이때 아이히만은 현장에 있었다.
아이히만은 살인자들의 보고서를 받아서 이를 요약하여 상급자에게 보고한 점에서만 최종 해결책의 이 중요한 단계에 관련되었을 뿐이다.
(하이드리히와 발터 폰 브라우히츄 사이의) 이 합의서에는 돌격대가 '시민에 대한 그들의 계획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즉 민간인을 살해하는 데 전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었다
아이히만이 '이 작전을 통제'했으며 심지어 이를 '개인적으로 감독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판사들은 이를 증거를 포기했다.
따라서 남기긴 것은 아이히만이 동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정보를 잘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판결문에서는 놀랍게도 이 증거가 실질적인 참여의 증거로 삼기에 충분하다고 결론 맺고 있었다.
(2) 유대인을 폴란드의 게토에서 인근의 학살센터로 이송하는 문제에 관 한 두 번째 항목이다.
다른 많은 자료로부터 우리는 친위대 고위층 및 경찰 지도자들이 이 지역 전체의 이송을 책임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히만이 힘러의 명령에 영감을 줄 수 있었다는 검찰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받이들이지 않는다면,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했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곳에 도착한 모든 유대인을 아이히만이 이송시켰다고 입증할 수는 없었다.
보강증거가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것과 아이히만이 강력히 부인했다
(3)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항목은 학살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아이히만의 책임문제였다. 검찰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학살수용소에 서 상당한 권위를 누렸다고 한다,
(수용소에서 유대인의 두 범주)
하나는 이른바 '수송된 유대인' (Transportjuden)-한 차례의 범죄도 없음
다른 범주는 '보호관리대상(Schutzhaftjuden)에-어떤 위반 사항 저지름(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
아이히만은 보호관리대상과는 무관했다.
그러나 그가 전문적으로 처리한 수송된 유대인의 경우, 수용소에서 사역시키기 위해 선택된 특별히 신체가 건강한 사람 25퍼센트를 제외하고는 규정상 죽게 되어 있었다.
누가 살게 되고 누가 죽게 되는가를 말할 권한이 그에게는 없었다
아무도 죽이지 않은 대량학살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검찰은 개별 살인행위를 입증하려고 지속적으로 애를 썼다.
(4) 네 번째 문제는 동부지역에서 아이히만의 일반적 권위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는 게토에서의 삶의 조건에 대한 것, 게토에서 견디어 낸 형용할 수 없는 비참상에 대한 것, 그리고 대부분의 증인들의 증언의 주제였던 최종적인 유대인 몰살에 대한 것이다
검찰이 공을 들여 입증하려고 노력한 것은, 이는 그 일이 아이히만의 직책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외무성을 포함하는 '국가적 중대성’을 가진 문제였기 때문에 지역 당국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런 유대인에 관해서 모든 독일 사무실에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경향이 있었는데,
(1) 그 하나는 과격한 입장으로서 모든 차이들은 무시되어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경향(유대인은 유대인일 뿐이라는 것으로)이고,
(2) 다른 하나는 온건한 입장으로서 이런 유대인을 교환 목적으로 '보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아이히만은 '과격분자에 속했고, 행정적 이유와 '이상적' 이유에서 예외를 두는 것에 반대했다.
하이드리히나 힘러가 지역 관할권자에게 어떤 명령을 내릴 때 아이히만이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권력 또는 권위가 나올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판결문에서 주장된 것은 하이드리히에게 지역적 제한이 없는 최종 해결책의 이행에 대한 중심적 권위가 부여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에서 주요 대리인이있던 아이히만이 어디에서나 동등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는 것이있다.
폴란드 유대인에 대한 학살은 1941년 5월이나 6월, 즉 최종 해결책의 명령이 내린 그 때가 아니라, 1939년 9월에 히틀러에 의해 결정되었다.
폴란드 인텔리겐치아의 중간 계층( '교사, 성직자, 귀족, 재향군인, 퇴직 공무원 등)은 등록되고 체포되었다.
한편 '원주민 폴란드인'은 '이주 노동자들'로 독일 인력에 보충되어 그들의 고향에서 소개될 예정이었다.
“목표는 폴란드인들로 하여금 영원한 예비적 이주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들의 영구 거주지는 크라우카 지방에 있어야만 했다.
제국으로 편입된 이들 동부지역에서는 유대인은 즉각적으로 제거되었
다
독일 민족 강화를 위한 제국 감독관의 역할에 따라 힘러는 마침내 대부분의 폴란드 국민들을 이 지역에서 최근에 제국으로 합병된 지역으로 소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판결문에서 표현한 것처럼 이 같은
조직적인 민족 이주의 실행의 임무는 주요 임무가 '이주 및 소개‘였던 제국중앙보안본부의 하위부서 제Ⅳ-D-4부의 수장인 아이히만에게 부여되었다.
이미 1937년 11월에 히틀러가 독일 고급 지휘관들에게 행한 비밀 연설에서 .... 요구하는 것은 독일인들의 이주를 위한 동부의 '빈 공간'〔volkloser Raum〕이라고 지적했다.
동부 유대인에 대한 조치는 반유대주의의 결과일뿐 아니라, 포괄적인 인구 정책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만일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폴란드인들은 유대인과 동일한 운명(즉 종족 학살)을 겪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다.
독일의 폴란드 인들은 이미 유대인의 별 대신에 특별한 'p'자 표지를 달고 다니도록 이미 강요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듯이 파괴의 과정을 제도화하는 가운데 경찰이 취한 최초의 조치였던 것이다.
9월 회의 이후 이동학살대의 사령관들에게 보내진 속달 편지에는
...'점령 지역의 유대인 문제’만을 지칭하고 있으며, 비밀을 지켜야만 할
‘최종 목표’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예비적 조치들'을 구별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구절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최종 목표란 아마도 폴란드 유대인의 파멸을 의미했을 것이다
새로운 내용은 제국에 새로이 합병된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이 폴란드로 이주되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실로 독일을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 따라서 최종 해결책을 향한 첫 번째 조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역시 그의 역할은 '이송’과 '이주' 전문가로서의 역할이었다,
동부에서는 '유대인 전문가가 필요 없었고, 어떤 특별한 '지시들도 요구되지 않았으며, 어떠한 특권적 범주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인 관료조직은 유대인을 체포하고 수용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군대의 배후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야만적 대량학살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하이드리히는 독일 고위 지휘관과 함께 유대인, 폴란드 지식인, 가톨릭 성직자, 그리고 귀족들에 대한 완전한 ‘즉각적인 청소’의 원칙을 수립하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2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이 '청소'되이야 하는 작전의 규모 때문에 유대인이 먼저 게토에 수용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제14장 증거와 증언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 몇 주 동안 친위대 관료들은 주로 증명서를 위조하고 또 6년간의 체계적인 살인을 입증할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파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히만의 부서에서 나온 모든 서신들은 다른 국가나 당 사무실로 보내 졌고, 그곳의 대부분의 파일은 연합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최종 해결책에 대해 이야기해 줄 충분한 양의 문서들이 남았으며, 이들 대부분은 이미 뉘른베르크 재판과 그 후의 재판을 통해 이미 알려졌다.
문서상의 증거는 예루살렘으로 올 수 없는 16명의 증인들의 경우 해외, 즉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의 법정에서 취합된 증언을 통해 보충되었다.
갑자기 이스라엘이 피고 측 증인들의 진술을 들을 수가 없고
또 검찰 측 증인들 가운데 이전 재판에서 서면 진술서를 제출한 증인들이 피고와 대질심문할 수 없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사실상 피고가 이 사건을 적절히 다룰 ‘수단도 시간도' 없었고,
'전 세계의 자료실이나 정부의 수단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전쟁이 끝난 지 18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나치 정권에 대한
엄청난 양의 자료실 자료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대체로 소송을 목적으로 골라낸 것에 의존하고 있다.
피고의 입장에 대해서 법정은 피고가 이스라엘 경찰심문관에게 진술과 또 재판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11개월 동안 그가 넘긴 수많은 자필 메모로 보충된, 상세한 진술성에 의존할 수 있었다.
아이히만의 법정 진술은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로 나타났다.
한 차례의 공판도 채 안 되는 동안 자신의 변호사와의 짧은 심문을 한 뒤 그는 세 판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판사들은 검사가 17차례의 공판에서 해명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2차례 반의 짧은 공판 기간 동인에 그에게서 이끌어 냈다
아이히만은 ... 전체 121회의 공판 가운데 62차례의 공판이 이 나라 저 나라 출신으로 자신의 공포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준 100명의 검찰 측 증인으로 활용되있다.
자료 대부분을 법무장관은 공판 기록으로 해석했고, 이것은 매일 언론에 전달되었다.
증인 가운데 단지 몇 명만이 이스라엘 시민이었는데, 이들은 수만 명의 신청자들 가운데 선정된 사람들이었다. (수만 명 가운데 90명만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생존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로서 나치스에게 체포되었다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연대기 순으로 진행하려는 무익한 시도로 인해 독일에서 온 8명의 증인들의 행렬이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냉정하기는 했지만 '생존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독일에서 고위직 유대인 관리들이었고 지금은 이스라엘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뒤이어 프라하에서 5명의 증인
이어 오스트리아에서 1명의 증인
프랑스와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그리스, 그리고 소련에서 각각 1명의 증인
유고슬라비아에서는 2명의 증인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에서는 각각 3명의 증인
헝가리에서는 13명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는 53명의 증인
'배경을 설명하는 증인'들도 있었는데,
아우슈비츠(10명 증인)에 대해,
트레블링카(4명 증인)에 대해
테레지엔슈타트(4명 증인)에 대해
베르겐벨젠의 교환 수용소(1명 증인) 에 대해 법정 진술했다
검찰 측 마지막 증인 아론 호터-이샤이 씨는...
유럽 내의 유대인 생존자들을 찾기 위한 모든 노력을 조정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살아남은 유대인은 유럽 전역의 거주지가 뒤바뀐 약 800만 명 가운데 흩어져 있었는데, 연합국은 이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을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본국으로 송환하기를 원했다.
“테레지인슈타트에는 3만 2000명의 생존자가 있었다.
우리가 거기서 본 4000여 명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출신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도중에 바로 팔레스타인, 곧 이스라엘이 될 지역으로 가는 길이 그들에게 제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합법적으로든 불법적으로든 어떻게 하는 돌아갈 수 있고
또 그들이 환영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의 밀사들을 필요로 했다.
하우스너 씨의 첫 번째 배경 증인은 마치 자원해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진델 그린즈판.. 1938년 파국이 다가왔을 때 그는 독일에서 27년간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서류를 변경하여 귀화를 신청하려고 하지 않았다.
'1938년 10월 27일, 목요일 밤 8시에 경찰이 와서 우리들에게 7번 지역[경찰서]로 오라고 했습니다.’
거리에는 '유대인놈들을 팔레스타인으로!'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차 검게 보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데 아마 10분밖에 걸리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27년의 세월을 24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무자비하고 아무 필요도 없었던 이 파괴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가 법정에서 하루 종일 이야기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증언대에는 '시인이자 저술가인 아바 코브너가 있었다....
그는 주심 재판관으로부터 간결하게 대답하도록 주문을 받았다
독일군 야전 하사관(Feltwebel) 안톤 슈미트 라는 이름을 언급했다. 이
검찰측이 ”당신은 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라는 질문을 증인들에게 한 것과 동일한 빈도로
판사 할레비는 증인들에게 ”유대인은 어떤 도움을 받은 적이 있나요?“ 라고 물었다.
(유대인 도와준 사례 증언)
-어떻게 자기와 12명의 다른 유대인을 숨겨주었는지 증언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이 기독교인 친구에게로 탈출하여 도음을 받았다.
-폴란드 지하조직이 많은 유대인에게 무기를 공급했고,
-또 수천 명의 유대인 아이들을 폴란드인 가정으로 데려가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
여섯 살 난 유대인 여자아이를 입양한 이유로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모든 가족이 몰살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경찰의 특정한 명령에 사보타주함으로써 한 독일 장교가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코브너가 독일 하사관(안톤 슈미트)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해 말하는 데 걸린 몇 분 동안 쉿 하는 소리와 함께 법정이 조용해졌다.
독일 의무관 외과의사인 페터 밤은 『보이지 않는 국기』(Unsichtbare Flagge, 1952)에서 세바스토폴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이다, ... 우리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그들의 적들을 침묵하는 익명성 속에서 사라지도록 한다. 조용히 이러한 범죄를 감내하기보다 감히 죽음을 감당하려 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려 했겠지만 쓸데없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깊이 뿌리내린 확신을 갖고 있어서 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의미를 위해 실질적으로 쓸모없는 희생을 감당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체주의 지배체제는 선하거나 악한 모든 사실들을 사라져버리게 하는 망각이라는 구명을 마련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942년 6월 이래로 있었던 대량학살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소란스러웠던 시도들이 실패할 운명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적들이 '완전한 익명 속에서 사라져버리도록' 한 모든 노력들은 허사였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불필요'하지 않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 교훈이란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최종 해결책이 제안된 나라들의 교훈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일이 어디서나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제15장 판결, 항소, 처형
전쟁이 끝나기 전 수개월 동안 아이히만은 ... 방어책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는데, 이는 베를린을 위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직책에 따라 테레지엔슈타트에 이따금씩 방문하여 적십자 대표단들에게 시설물들을 보여주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힘러의 새로운 '인도적인 노선‘에 대한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았다.
이때 그는 '다음에 만들’ 강제수용소가 '영국의 모델‘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맹세했다.
1945년 4월 아이히만은 힘러와의 몇 차례 면담 가운데 마지막 면담을 가졌다
힘러는 그에게 “테레지엔슈타트에 있는 100명 또는 200명의 저명한 유대인을 선별하여 오스트리아로 이송해서 호텔에다 수용해 놓고,
이들을 힘러가 앞으로 있게 될 아이젠하워와의 협상 때 '인질'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재판 당국은 여러 이유에서 전쟁이 끝난 이후의 시기를 다루는 (아이히만의) 어떠한 증언도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1945년 11월에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다.
아이히만의 이름이 거북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1946년 1월에 비슬리케니는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아이히만의 유죄에 대한 확증적인 증언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그의 정체를 다 알고 있는 한 프란체스코파 신부가 그에게 리하르트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망명자 여권을 만들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보내주었다.
그는 7월 중순 그곳에 도착하여 아무런 어려움 없이 가톨릭 신자, 총각, 무국적자, 나이는 37세 (실제 나이보다 일곱 살 어림)인 리카르도 클레멘트로 신분증과 노동 허가를 받았다.
1952년 여름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왔다.
1960년 초 아이히만이 체포되기 몇 달 전 그와 그의 아이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난한 외곽지역에 원시적인 벽돌집 건축을 완성했다.
전기도 수도도 없는 이곳에 아이히만의 가족은 정착했다.
아이히만의 유일한 보상은 자신의 정체를 이미 드러내보인 나치스 광역단체 요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데 있었다.
그가 이스라엘에 와서 재판을 기꺼이 받으려 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드러난 사실이라기보다는 증명된 것이었다.
물론 피고 측 변호사는 무엇보다도 피고가 납치되었고
따라서 “국제법에 저촉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로 데려왔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했다.
(반론) 그들은 국제법의 훼손이 아르헨티나와 이스라엘 두 국가에만 관계될 뿐 피고의 권리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예루살렘 법정이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아이히만이 사실상 무국적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오직 무국적 상태로서만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몰살당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국적을 상실해야만 한 것이다.
1960년 5월 11일 저녁 6시 30분,
아이히만은 ... 자기가 누구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즉각 독일어로 “나는 이돌프 아이히만이다" (Ich bin Adolf Eichmann)고 말했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 손에 잡혔다는 것을 안다고 덧붙였다.
그가 체포된 다음날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해 이의가 없다는 것을 서면으로 진술하도록 요구받았다.
나는 진실을 추구하는 내 노력을 위해 보고서와 진술서 등을 활용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요구하는 바이다. 서명 아들프 아이히만, 부에노스아이레스 1960년 5 월.
아이히만이 재판 당국에 대해 놀랄 만한 협조를 한 것에 대해 자신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그가 체포되기 수년 전에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자신이 익명으로 지내는 것에 대해 얼마나 지겨워 했는지에 대해 쓴 적이 있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죄책감에 대한 이 대화를 한 후에 저는 잠적할 권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지난 전쟁'을 그는 다른 맥락에서는 '독일제국에 강요된 전쟁'이라고 여전히 부르고 있었다.
경찰심문 초기에 그는 '나는 사형선고가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 공언한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그에게 외국인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의 가족이 추천한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 박사
-칠레에 거주하는 다른 독일인 변호사
-재판당국이 접촉한 뉴욕에 있는 한 미국계 법률회사
그는 다른 가능성을 택하지 않고, 즉석에서 세르바티우스 박사를 선택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대부분의 시간에 전적으로 혼자 등장했다.
그 결과 아이히만은 변호사의 주보조원이 되었고, '미래 세대들을 위한' 책을 쓰기는커녕 재판 기간 줄곧 아주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
1961년 6월 29일, 공판이 시작된 4월 11일....
12월 11일에 판결을 선고하기 위해 다시 개정했다.
세 판사가 244항목으로 이루어진 판결문을 낭독했다.
그는 '주요 전범'이 되어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 자동적으로 책임지도록 되어 있었다,
'다른 죄목과 함께' 그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법했다.
따라서 아이히만이 총통의 명령에 앞서 한 모든 일들과 비유대인에게 행한 모든 범죄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총괄되었다.
그 이후에 유대인에 대해 범한 그의 모든 범죄들이 더해졌다
왜냐하면 이런 범죄는 일상적인 범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 유죄인 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집시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유죄였다.
1항에서 12항까지 열거된 모든 범죄는 사형에 해당되었다
함축적으로 판결문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제로
살상수단들을 손으로 조작한’ 사람들은 통상 수감자들과 희생자들이었다는 섬뜩한 사실을 역시 인정한 것이다.
판결문 낭독 다음에는....
검찰 측에서 일어나 한 차례 더 사형 언도를 요구하는 긴 연설을 했다
죄를 경감시켜줄 상황이 아니라면 사형 언도는 자동적이었다.
일찍이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법정이 피고를 무죄 방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아르헨티나의 형 면제법에 따르면 '납치가 일어나기 직전인' 1960년 5월 7일에 그에 대한 형법의 적용이 만료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독일에서는 사형제도가 무조건적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후 아이히만의 최종 언도가 나왔다.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된다.
그의 덕은 나치스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배집단의 일원이 아니었고,
그는 희생자였으며,
오직 지도자들만 처벌을 받아야 한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
이틀 후인 1961년 12월 15 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3개월이 지난 1962년 3월 22일.이스라엘 대법원에서 항소심이 열렸다
세르바티우스 박사, 피고 측 변호인은 이스라엘 법정의 권한에 반대하는 이전의 논지를 재차 반복했다.
한마디로 재판은 공정치 못했고, 판결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1962년 5월 29일 두 번째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원래의 판결문과 명백히 대조된 점은
“항소자가 '상관의 명령을 전혀 받지 않았음”이 이제는 발견되었다
'그 스스로가 자신의 상관이었으며,
“유대인 문제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그가 모든 명령을 내렸다."
그는 “중요성에 있어서는 뮐러를 포함한 그의 모든 상관들을 능가했다."
판사들은 이제 “최종 해결책이라는 아이디어는 항소자와 그의 공범자들의 억누를 수 없는 피의 갈증과 광신적 열정이 없었다면 수백만의 유대인의 벗겨진 살갗과 고문당한 살이라는 연옥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검찰의 논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언어 자체 도 차용한 것이다.
같은 날인 5월 29일에 이스라엘 대통령 이츠하크 벤츠비는 ...
아이히만의 사면 청원서를 린츠에 있는 그의 아내와 가족으로부터 온 편지와 함께 받았다.
대통령은 또한 전 세계로부터 온 관대한 조치를 호소하는 수백 통의 편지 와 전문을 받았다.
대법원이 판결을 내린 지 이틀이 지난 5월 31일에
벤츠비(대통령) 씨는 모든 자비의 청원을 물리쳤다
같은 날 몇 시간이 지난 뒤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자정이 되기 직전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체는 화장되었고 재는 지중해의 이스라옐 수역 밖에 뿌려졌다.
자비의 청원이 거부되었다는 소식을 아이히만이 들은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형이 집행되었다.
사형선고가 내릴 것은 예견된 일이고 여기에는 거의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사형을 집행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저명인사와 특권층 인사에 의해 반대입장이 표명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논지는 아이히만의 행위가 인간의 처벌의 가능성을 능가했다는 것,
그런 엄청난 범죄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마르틴 부버는 이 재판을 “역사적 차원에서의 실수'라고 불렀다.
이 일이 “독일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느끼는 죄책감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부버는 아이히만이 독일 청년들의 어깨에서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을 공개처형해주기를 원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다.
사형제도를 원칙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반대한 사람들로부터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그는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했고 그 절반을 마셨다.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지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evil)을.
The End. 2022.11.8.
아이히만
제13, 14, 15장 여여 2022. 11.8 화 9:40
제13장 동부의 학살센터들
나치스가 동부라고 말할 때 이는 폴란드와 발틱 연안 국가들 그리고 점령된 러시아 영토를 의미했다. 이것은 4개의 행정 단위로 나뉘었다.
(1) 폴란드 서부 지역(바르테가우)-책임자 아르투르 그라이저의 관할
(2)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그리고 백러시아의 다소 불특정한 지역을 포함하는 (오스들란트)-점령당국 지위의 리가의 관할
(3) 폴란드 중부 지역(일반정부)- 한스 프랑크의 관할
(4) 우크라이나-알프레트 로센베르 크의 동부점령지역청의 관할
동부는 유대인 고통의 중심적 장면에 해당하며 모든 이송작업의 소름끼치는 최종 종착지였다(생존자의 수는 거의 5퍼센트)
동부는 전쟁 이전에는 유럽에서의 유대인 인구의 중심지였다
(300만 이상의 유대인이 폴란드 거주,
260만명이
발틱 국가들에서,
300만으로 추산되는 러시아 유대인 가운데 절반 이상이 백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크리미아에 거주)
검찰은 유대 민족의 고통과 그것을 위해 이루이진 대량학살의 차원에 일차적으로 관심이 있었다.
문제는 아이히만과 동부의 사태를 연결시키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원고 측은 생존자 이스라엘인들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았다
이 생존자들이 현재 이 나라 인구의 20퍼센트 가량을 이루고 있다.
재판 당국이 명명한 '유대 민족의 고통에 대한 증인들 56명이 원래 계획된15명 내지 20명의 '배경 증인들' 대신에 결국 법정에 섰다.
전체121회 공판 가운데 23회가 전적으로 '배경' 문제에 할애되었는데,
이때 '배경‘이란 말은 이 재판에 명백한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폴란드 게토의 상황과 수많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있었던 절차, 강제 노동, 그리고 대체로 노동을 통한 학살의 시도 등에 대한 증인들의 배경 증언의 요지는 결코 논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는 ’소문에 따르면'과 같은 풍문에 의한 증거들이어서 법적 타당성은 없었다.
법정은 그(아이히만)의 활동 반경이 제국과 보호국, 그리고 서부와 북부, 남부, 남동부, 그리고 중앙유럽의 국가를(즉 동부를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피고(아이히만)는 기소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부정한 적이 없었다 그는 단지 ‘기소된 의미로’ 그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다.
실제로 판사들은 상당히 불쾌한 딜레마에 봉착해 있었다.
(1)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판사들의 공정성에 대해 논란을 벌였다.
그의 생각에는 어떠한 유대인도 최종 해결책의 수행자들에 대한 재판을 주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세르바티우스가 이러한 주장을 했을 때 그가 들었을 답은, 피고인이 반복해서 강조하여 증언한 것처럼 유대인 문제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유대인 시온주의 저술가들, 즉 테오도어 헤르츨과 아돌프 뵘의 '기초적 저술들'로부터 배웠다는 말이겠기 때문이다.
(2) 인간적으로 말해, 이 사람들이 법정에서 어느 누구라도 증언을 못하게 할 사람은 누가 있겠는가? 또한 비록 증인들이 말해야 하는 것이 단지' 이 재판의 부산물로 간주될' 뿐이라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이들이 '증언대에서 자신의 피맺힌 한을 쏟아 부을‘ 때 그 세부사항의 정확도에 대해 누가 감히 문제를 제기하겠는가?
(3) 이스라엘에서도 재판에 출두한 사람은 유죄가 판명 날 때까지는 무죄 로 간주된다. 그러나 아이히만의 경우 이것은 완전히 허구에 불과했다.
벤구리온 수상은 1960년 6월 3일 날짜의 서신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에게 ... 전 유럽에 걸쳐 거대한 그리고 전례 없는 규모로[우리 동족 600만 명]의 대량학살을 조직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아이히만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 주된 이유는 아이히만이 '유대인 문제 전문가’이며 다른 어떤 문제도 다루지 않은 유일한 독일 관리였으므로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과 밀접한 접촉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4) “항소자가 어떠한' 상급자의 명랑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최상급자였으며, 유대인 문제와 관련된 모든 명령을 그가 내렸다.”
그것은 정확히 검사의 주장이었고, 지방법원 판사들은 이 점을 수용하지 않았는데, 위험한 난센스였음에도 불구하고 항소심 법정은 그 내용을 전적으로 옹호했다.
대법관 마이클 A. 무스마노의 증언(검찰 측 증인)을 통해 ...
무스마노 씨는 집단수용소 행정요원들과 동부지역의 이동학살대 요원들을 재판한 사람이었다.
아이히만이 히틀러에게서 직접 자신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과 그의 권력이 “힘러와 하이드리히를 통해 구두로 주어졌다는 것을 믿었다.
구스타프 M. 길베르트(검찰 측 증인)
이런 모든 난제들로부터 판사들이 벗어난 길은 타협을 통한 것이었다.
...판사들은 독일에서 시작하여 동부에 대한 언급으로 끝남으로써 그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이 당한 수난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것보다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에 집중하려 했다
그들은 나치스의 피괴의 작동방식이 이루어진 복잡한 관료적 구성을 확실하게 이해했으며, 따라서 피고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주된 논쟁은 네 가지 항목에서 이루어졌다.
(1) 첫째, 동부에서 돌격대가 자행한 1941년 3월에 있었던 대량학살에 아이히만이 참여했는가의 여부였는데, 이때 아이히만은 현장에 있었다.
아이히만은 살인자들의 보고서를 받아서 이를 요약하여 상급자에게 보고한 점에서만 최종 해결책의 이 중요한 단계에 관련되었을 뿐이다.
(하이드리히와 발터 폰 브라우히츄 사이의) 이 합의서에는 돌격대가 '시민에 대한 그들의 계획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즉 민간인을 살해하는 데 전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었다
아이히만이 '이 작전을 통제'했으며 심지어 이를 '개인적으로 감독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판사들은 이를 증거를 포기했다.
따라서 남기긴 것은 아이히만이 동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정보를 잘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판결문에서는 놀랍게도 이 증거가 실질적인 참여의 증거로 삼기에 충분하다고 결론 맺고 있었다.
(2) 유대인을 폴란드의 게토에서 인근의 학살센터로 이송하는 문제에 관 한 두 번째 항목이다.
다른 많은 자료로부터 우리는 친위대 고위층 및 경찰 지도자들이 이 지역 전체의 이송을 책임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히만이 힘러의 명령에 영감을 줄 수 있었다는 검찰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받이들이지 않는다면,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했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곳에 도착한 모든 유대인을 아이히만이 이송시켰다고 입증할 수는 없었다.
보강증거가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것과 아이히만이 강력히 부인했다
(3)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항목은 학살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아이히만의 책임문제였다. 검찰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학살수용소에 서 상당한 권위를 누렸다고 한다,
(수용소에서 유대인의 두 범주)
하나는 이른바 '수송된 유대인' (Transportjuden)-한 차례의 범죄도 없음
다른 범주는 '보호관리대상(Schutzhaftjuden)에-어떤 위반 사항 저지름(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
아이히만은 보호관리대상과는 무관했다.
그러나 그가 전문적으로 처리한 수송된 유대인의 경우, 수용소에서 사역시키기 위해 선택된 특별히 신체가 건강한 사람 25퍼센트를 제외하고는 규정상 죽게 되어 있었다.
누가 살게 되고 누가 죽게 되는가를 말할 권한이 그에게는 없었다
아무도 죽이지 않은 대량학살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검찰은 개별 살인행위를 입증하려고 지속적으로 애를 썼다.
(4) 네 번째 문제는 동부지역에서 아이히만의 일반적 권위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는 게토에서의 삶의 조건에 대한 것, 게토에서 견디어 낸 형용할 수 없는 비참상에 대한 것, 그리고 대부분의 증인들의 증언의 주제였던 최종적인 유대인 몰살에 대한 것이다
검찰이 공을 들여 입증하려고 노력한 것은, 이는 그 일이 아이히만의 직책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외무성을 포함하는 '국가적 중대성’을 가진 문제였기 때문에 지역 당국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런 유대인에 관해서 모든 독일 사무실에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경향이 있었는데,
(1) 그 하나는 과격한 입장으로서 모든 차이들은 무시되어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경향(유대인은 유대인일 뿐이라는 것으로)이고,
(2) 다른 하나는 온건한 입장으로서 이런 유대인을 교환 목적으로 '보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아이히만은 '과격분자에 속했고, 행정적 이유와 '이상적' 이유에서 예외를 두는 것에 반대했다.
하이드리히나 힘러가 지역 관할권자에게 어떤 명령을 내릴 때 아이히만이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권력 또는 권위가 나올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판결문에서 주장된 것은 하이드리히에게 지역적 제한이 없는 최종 해결책의 이행에 대한 중심적 권위가 부여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에서 주요 대리인이있던 아이히만이 어디에서나 동등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는 것이있다.
폴란드 유대인에 대한 학살은 1941년 5월이나 6월, 즉 최종 해결책의 명령이 내린 그 때가 아니라, 1939년 9월에 히틀러에 의해 결정되었다.
폴란드 인텔리겐치아의 중간 계층( '교사, 성직자, 귀족, 재향군인, 퇴직 공무원 등)은 등록되고 체포되었다.
한편 '원주민 폴란드인'은 '이주 노동자들'로 독일 인력에 보충되어 그들의 고향에서 소개될 예정이었다.
“목표는 폴란드인들로 하여금 영원한 예비적 이주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들의 영구 거주지는 크라우카 지방에 있어야만 했다.
제국으로 편입된 이들 동부지역에서는 유대인은 즉각적으로 제거되었
다
독일 민족 강화를 위한 제국 감독관의 역할에 따라 힘러는 마침내 대부분의 폴란드 국민들을 이 지역에서 최근에 제국으로 합병된 지역으로 소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판결문에서 표현한 것처럼 이 같은
조직적인 민족 이주의 실행의 임무는 주요 임무가 '이주 및 소개‘였던 제국중앙보안본부의 하위부서 제Ⅳ-D-4부의 수장인 아이히만에게 부여되었다.
이미 1937년 11월에 히틀러가 독일 고급 지휘관들에게 행한 비밀 연설에서 .... 요구하는 것은 독일인들의 이주를 위한 동부의 '빈 공간'〔volkloser Raum〕이라고 지적했다.
동부 유대인에 대한 조치는 반유대주의의 결과일뿐 아니라, 포괄적인 인구 정책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만일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폴란드인들은 유대인과 동일한 운명(즉 종족 학살)을 겪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다.
독일의 폴란드 인들은 이미 유대인의 별 대신에 특별한 'p'자 표지를 달고 다니도록 이미 강요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듯이 파괴의 과정을 제도화하는 가운데 경찰이 취한 최초의 조치였던 것이다.
9월 회의 이후 이동학살대의 사령관들에게 보내진 속달 편지에는
...'점령 지역의 유대인 문제’만을 지칭하고 있으며, 비밀을 지켜야만 할
‘최종 목표’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예비적 조치들'을 구별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구절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최종 목표란 아마도 폴란드 유대인의 파멸을 의미했을 것이다
새로운 내용은 제국에 새로이 합병된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이 폴란드로 이주되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실로 독일을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 따라서 최종 해결책을 향한 첫 번째 조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역시 그의 역할은 '이송’과 '이주' 전문가로서의 역할이었다,
동부에서는 '유대인 전문가가 필요 없었고, 어떤 특별한 '지시들도 요구되지 않았으며, 어떠한 특권적 범주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인 관료조직은 유대인을 체포하고 수용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군대의 배후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야만적 대량학살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하이드리히는 독일 고위 지휘관과 함께 유대인, 폴란드 지식인, 가톨릭 성직자, 그리고 귀족들에 대한 완전한 ‘즉각적인 청소’의 원칙을 수립하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2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이 '청소'되이야 하는 작전의 규모 때문에 유대인이 먼저 게토에 수용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제14장 증거와 증언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 몇 주 동안 친위대 관료들은 주로 증명서를 위조하고 또 6년간의 체계적인 살인을 입증할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파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히만의 부서에서 나온 모든 서신들은 다른 국가나 당 사무실로 보내 졌고, 그곳의 대부분의 파일은 연합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최종 해결책에 대해 이야기해 줄 충분한 양의 문서들이 남았으며, 이들 대부분은 이미 뉘른베르크 재판과 그 후의 재판을 통해 이미 알려졌다.
문서상의 증거는 예루살렘으로 올 수 없는 16명의 증인들의 경우 해외, 즉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의 법정에서 취합된 증언을 통해 보충되었다.
갑자기 이스라엘이 피고 측 증인들의 진술을 들을 수가 없고
또 검찰 측 증인들 가운데 이전 재판에서 서면 진술서를 제출한 증인들이 피고와 대질심문할 수 없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사실상 피고가 이 사건을 적절히 다룰 ‘수단도 시간도' 없었고,
'전 세계의 자료실이나 정부의 수단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전쟁이 끝난 지 18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나치 정권에 대한
엄청난 양의 자료실 자료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대체로 소송을 목적으로 골라낸 것에 의존하고 있다.
피고의 입장에 대해서 법정은 피고가 이스라엘 경찰심문관에게 진술과 또 재판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11개월 동안 그가 넘긴 수많은 자필 메모로 보충된, 상세한 진술성에 의존할 수 있었다.
아이히만의 법정 진술은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로 나타났다.
한 차례의 공판도 채 안 되는 동안 자신의 변호사와의 짧은 심문을 한 뒤 그는 세 판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판사들은 검사가 17차례의 공판에서 해명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2차례 반의 짧은 공판 기간 동인에 그에게서 이끌어 냈다
아이히만은 ... 전체 121회의 공판 가운데 62차례의 공판이 이 나라 저 나라 출신으로 자신의 공포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준 100명의 검찰 측 증인으로 활용되있다.
자료 대부분을 법무장관은 공판 기록으로 해석했고, 이것은 매일 언론에 전달되었다.
증인 가운데 단지 몇 명만이 이스라엘 시민이었는데, 이들은 수만 명의 신청자들 가운데 선정된 사람들이었다. (수만 명 가운데 90명만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생존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로서 나치스에게 체포되었다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연대기 순으로 진행하려는 무익한 시도로 인해 독일에서 온 8명의 증인들의 행렬이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냉정하기는 했지만 '생존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독일에서 고위직 유대인 관리들이었고 지금은 이스라엘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뒤이어 프라하에서 5명의 증인
이어 오스트리아에서 1명의 증인
프랑스와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그리스, 그리고 소련에서 각각 1명의 증인
유고슬라비아에서는 2명의 증인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에서는 각각 3명의 증인
헝가리에서는 13명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는 53명의 증인
'배경을 설명하는 증인'들도 있었는데,
아우슈비츠(10명 증인)에 대해,
트레블링카(4명 증인)에 대해
테레지엔슈타트(4명 증인)에 대해
베르겐벨젠의 교환 수용소(1명 증인) 에 대해 법정 진술했다
검찰 측 마지막 증인 아론 호터-이샤이 씨는...
유럽 내의 유대인 생존자들을 찾기 위한 모든 노력을 조정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살아남은 유대인은 유럽 전역의 거주지가 뒤바뀐 약 800만 명 가운데 흩어져 있었는데, 연합국은 이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을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본국으로 송환하기를 원했다.
“테레지인슈타트에는 3만 2000명의 생존자가 있었다.
우리가 거기서 본 4000여 명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출신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도중에 바로 팔레스타인, 곧 이스라엘이 될 지역으로 가는 길이 그들에게 제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합법적으로든 불법적으로든 어떻게 하는 돌아갈 수 있고
또 그들이 환영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의 밀사들을 필요로 했다.
하우스너 씨의 첫 번째 배경 증인은 마치 자원해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진델 그린즈판.. 1938년 파국이 다가왔을 때 그는 독일에서 27년간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서류를 변경하여 귀화를 신청하려고 하지 않았다.
'1938년 10월 27일, 목요일 밤 8시에 경찰이 와서 우리들에게 7번 지역[경찰서]로 오라고 했습니다.’
거리에는 '유대인놈들을 팔레스타인으로!'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차 검게 보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데 아마 10분밖에 걸리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27년의 세월을 24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무자비하고 아무 필요도 없었던 이 파괴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가 법정에서 하루 종일 이야기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증언대에는 '시인이자 저술가인 아바 코브너가 있었다....
그는 주심 재판관으로부터 간결하게 대답하도록 주문을 받았다
독일군 야전 하사관(Feltwebel) 안톤 슈미트 라는 이름을 언급했다. 이
검찰측이 ”당신은 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라는 질문을 증인들에게 한 것과 동일한 빈도로
판사 할레비는 증인들에게 ”유대인은 어떤 도움을 받은 적이 있나요?“ 라고 물었다.
(유대인 도와준 사례 증언)
-어떻게 자기와 12명의 다른 유대인을 숨겨주었는지 증언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이 기독교인 친구에게로 탈출하여 도음을 받았다.
-폴란드 지하조직이 많은 유대인에게 무기를 공급했고,
-또 수천 명의 유대인 아이들을 폴란드인 가정으로 데려가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
여섯 살 난 유대인 여자아이를 입양한 이유로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모든 가족이 몰살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경찰의 특정한 명령에 사보타주함으로써 한 독일 장교가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코브너가 독일 하사관(안톤 슈미트)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해 말하는 데 걸린 몇 분 동안 쉿 하는 소리와 함께 법정이 조용해졌다.
독일 의무관 외과의사인 페터 밤은 『보이지 않는 국기』(Unsichtbare Flagge, 1952)에서 세바스토폴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이다, ... 우리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그들의 적들을 침묵하는 익명성 속에서 사라지도록 한다. 조용히 이러한 범죄를 감내하기보다 감히 죽음을 감당하려 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려 했겠지만 쓸데없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깊이 뿌리내린 확신을 갖고 있어서 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의미를 위해 실질적으로 쓸모없는 희생을 감당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체주의 지배체제는 선하거나 악한 모든 사실들을 사라져버리게 하는 망각이라는 구명을 마련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942년 6월 이래로 있었던 대량학살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소란스러웠던 시도들이 실패할 운명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적들이 '완전한 익명 속에서 사라져버리도록' 한 모든 노력들은 허사였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불필요'하지 않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 교훈이란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최종 해결책이 제안된 나라들의 교훈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일이 어디서나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제15장 판결, 항소, 처형
전쟁이 끝나기 전 수개월 동안 아이히만은 ... 방어책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는데, 이는 베를린을 위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직책에 따라 테레지엔슈타트에 이따금씩 방문하여 적십자 대표단들에게 시설물들을 보여주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힘러의 새로운 '인도적인 노선‘에 대한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았다.
이때 그는 '다음에 만들’ 강제수용소가 '영국의 모델‘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맹세했다.
1945년 4월 아이히만은 힘러와의 몇 차례 면담 가운데 마지막 면담을 가졌다
힘러는 그에게 “테레지엔슈타트에 있는 100명 또는 200명의 저명한 유대인을 선별하여 오스트리아로 이송해서 호텔에다 수용해 놓고,
이들을 힘러가 앞으로 있게 될 아이젠하워와의 협상 때 '인질'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재판 당국은 여러 이유에서 전쟁이 끝난 이후의 시기를 다루는 (아이히만의) 어떠한 증언도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1945년 11월에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다.
아이히만의 이름이 거북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1946년 1월에 비슬리케니는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아이히만의 유죄에 대한 확증적인 증언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그의 정체를 다 알고 있는 한 프란체스코파 신부가 그에게 리하르트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망명자 여권을 만들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보내주었다.
그는 7월 중순 그곳에 도착하여 아무런 어려움 없이 가톨릭 신자, 총각, 무국적자, 나이는 37세 (실제 나이보다 일곱 살 어림)인 리카르도 클레멘트로 신분증과 노동 허가를 받았다.
1952년 여름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왔다.
1960년 초 아이히만이 체포되기 몇 달 전 그와 그의 아이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난한 외곽지역에 원시적인 벽돌집 건축을 완성했다.
전기도 수도도 없는 이곳에 아이히만의 가족은 정착했다.
아이히만의 유일한 보상은 자신의 정체를 이미 드러내보인 나치스 광역단체 요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데 있었다.
그가 이스라엘에 와서 재판을 기꺼이 받으려 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드러난 사실이라기보다는 증명된 것이었다.
물론 피고 측 변호사는 무엇보다도 피고가 납치되었고
따라서 “국제법에 저촉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로 데려왔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했다.
(반론) 그들은 국제법의 훼손이 아르헨티나와 이스라엘 두 국가에만 관계될 뿐 피고의 권리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예루살렘 법정이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아이히만이 사실상 무국적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오직 무국적 상태로서만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몰살당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국적을 상실해야만 한 것이다.
1960년 5월 11일 저녁 6시 30분,
아이히만은 ... 자기가 누구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즉각 독일어로 “나는 이돌프 아이히만이다" (Ich bin Adolf Eichmann)고 말했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 손에 잡혔다는 것을 안다고 덧붙였다.
그가 체포된 다음날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해 이의가 없다는 것을 서면으로 진술하도록 요구받았다.
나는 진실을 추구하는 내 노력을 위해 보고서와 진술서 등을 활용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요구하는 바이다. 서명 아들프 아이히만, 부에노스아이레스 1960년 5 월.
아이히만이 재판 당국에 대해 놀랄 만한 협조를 한 것에 대해 자신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그가 체포되기 수년 전에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자신이 익명으로 지내는 것에 대해 얼마나 지겨워 했는지에 대해 쓴 적이 있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죄책감에 대한 이 대화를 한 후에 저는 잠적할 권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지난 전쟁'을 그는 다른 맥락에서는 '독일제국에 강요된 전쟁'이라고 여전히 부르고 있었다.
경찰심문 초기에 그는 '나는 사형선고가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 공언한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그에게 외국인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의 가족이 추천한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 박사
-칠레에 거주하는 다른 독일인 변호사
-재판당국이 접촉한 뉴욕에 있는 한 미국계 법률회사
그는 다른 가능성을 택하지 않고, 즉석에서 세르바티우스 박사를 선택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대부분의 시간에 전적으로 혼자 등장했다.
그 결과 아이히만은 변호사의 주보조원이 되었고, '미래 세대들을 위한' 책을 쓰기는커녕 재판 기간 줄곧 아주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
1961년 6월 29일, 공판이 시작된 4월 11일....
12월 11일에 판결을 선고하기 위해 다시 개정했다.
세 판사가 244항목으로 이루어진 판결문을 낭독했다.
그는 '주요 전범'이 되어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 자동적으로 책임지도록 되어 있었다,
'다른 죄목과 함께' 그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법했다.
따라서 아이히만이 총통의 명령에 앞서 한 모든 일들과 비유대인에게 행한 모든 범죄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총괄되었다.
그 이후에 유대인에 대해 범한 그의 모든 범죄들이 더해졌다
왜냐하면 이런 범죄는 일상적인 범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 유죄인 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집시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유죄였다.
1항에서 12항까지 열거된 모든 범죄는 사형에 해당되었다
함축적으로 판결문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제로
살상수단들을 손으로 조작한’ 사람들은 통상 수감자들과 희생자들이었다는 섬뜩한 사실을 역시 인정한 것이다.
판결문 낭독 다음에는....
검찰 측에서 일어나 한 차례 더 사형 언도를 요구하는 긴 연설을 했다
죄를 경감시켜줄 상황이 아니라면 사형 언도는 자동적이었다.
일찍이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법정이 피고를 무죄 방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아르헨티나의 형 면제법에 따르면 '납치가 일어나기 직전인' 1960년 5월 7일에 그에 대한 형법의 적용이 만료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독일에서는 사형제도가 무조건적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후 아이히만의 최종 언도가 나왔다.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된다.
그의 덕은 나치스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배집단의 일원이 아니었고,
그는 희생자였으며,
오직 지도자들만 처벌을 받아야 한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
이틀 후인 1961년 12월 15 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3개월이 지난 1962년 3월 22일.이스라엘 대법원에서 항소심이 열렸다
세르바티우스 박사, 피고 측 변호인은 이스라엘 법정의 권한에 반대하는 이전의 논지를 재차 반복했다.
한마디로 재판은 공정치 못했고, 판결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1962년 5월 29일 두 번째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원래의 판결문과 명백히 대조된 점은
“항소자가 '상관의 명령을 전혀 받지 않았음”이 이제는 발견되었다
'그 스스로가 자신의 상관이었으며,
“유대인 문제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그가 모든 명령을 내렸다."
그는 “중요성에 있어서는 뮐러를 포함한 그의 모든 상관들을 능가했다."
판사들은 이제 “최종 해결책이라는 아이디어는 항소자와 그의 공범자들의 억누를 수 없는 피의 갈증과 광신적 열정이 없었다면 수백만의 유대인의 벗겨진 살갗과 고문당한 살이라는 연옥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검찰의 논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언어 자체 도 차용한 것이다.
같은 날인 5월 29일에 이스라엘 대통령 이츠하크 벤츠비는 ...
아이히만의 사면 청원서를 린츠에 있는 그의 아내와 가족으로부터 온 편지와 함께 받았다.
대통령은 또한 전 세계로부터 온 관대한 조치를 호소하는 수백 통의 편지 와 전문을 받았다.
대법원이 판결을 내린 지 이틀이 지난 5월 31일에
벤츠비(대통령) 씨는 모든 자비의 청원을 물리쳤다
같은 날 몇 시간이 지난 뒤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자정이 되기 직전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체는 화장되었고 재는 지중해의 이스라옐 수역 밖에 뿌려졌다.
자비의 청원이 거부되었다는 소식을 아이히만이 들은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형이 집행되었다.
사형선고가 내릴 것은 예견된 일이고 여기에는 거의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사형을 집행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저명인사와 특권층 인사에 의해 반대입장이 표명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논지는 아이히만의 행위가 인간의 처벌의 가능성을 능가했다는 것,
그런 엄청난 범죄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마르틴 부버는 이 재판을 “역사적 차원에서의 실수'라고 불렀다.
이 일이 “독일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느끼는 죄책감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부버는 아이히만이 독일 청년들의 어깨에서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을 공개처형해주기를 원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다.
사형제도를 원칙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반대한 사람들로부터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그는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했고 그 절반을 마셨다.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지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evil)을.
The End. 2022.11.8.
아이히만
제13, 14, 15장 여여 2022. 11.8 화 9:40
제13장 동부의 학살센터들
나치스가 동부라고 말할 때 이는 폴란드와 발틱 연안 국가들 그리고 점령된 러시아 영토를 의미했다. 이것은 4개의 행정 단위로 나뉘었다.
(1) 폴란드 서부 지역(바르테가우)-책임자 아르투르 그라이저의 관할
(2)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그리고 백러시아의 다소 불특정한 지역을 포함하는 (오스들란트)-점령당국 지위의 리가의 관할
(3) 폴란드 중부 지역(일반정부)- 한스 프랑크의 관할
(4) 우크라이나-알프레트 로센베르 크의 동부점령지역청의 관할
동부는 유대인 고통의 중심적 장면에 해당하며 모든 이송작업의 소름끼치는 최종 종착지였다(생존자의 수는 거의 5퍼센트)
동부는 전쟁 이전에는 유럽에서의 유대인 인구의 중심지였다
(300만 이상의 유대인이 폴란드 거주,
260만명이
발틱 국가들에서,
300만으로 추산되는 러시아 유대인 가운데 절반 이상이 백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크리미아에 거주)
검찰은 유대 민족의 고통과 그것을 위해 이루이진 대량학살의 차원에 일차적으로 관심이 있었다.
문제는 아이히만과 동부의 사태를 연결시키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원고 측은 생존자 이스라엘인들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았다
이 생존자들이 현재 이 나라 인구의 20퍼센트 가량을 이루고 있다.
재판 당국이 명명한 '유대 민족의 고통에 대한 증인들 56명이 원래 계획된15명 내지 20명의 '배경 증인들' 대신에 결국 법정에 섰다.
전체121회 공판 가운데 23회가 전적으로 '배경' 문제에 할애되었는데,
이때 '배경‘이란 말은 이 재판에 명백한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폴란드 게토의 상황과 수많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있었던 절차, 강제 노동, 그리고 대체로 노동을 통한 학살의 시도 등에 대한 증인들의 배경 증언의 요지는 결코 논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는 ’소문에 따르면'과 같은 풍문에 의한 증거들이어서 법적 타당성은 없었다.
법정은 그(아이히만)의 활동 반경이 제국과 보호국, 그리고 서부와 북부, 남부, 남동부, 그리고 중앙유럽의 국가를(즉 동부를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피고(아이히만)는 기소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부정한 적이 없었다 그는 단지 ‘기소된 의미로’ 그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다.
실제로 판사들은 상당히 불쾌한 딜레마에 봉착해 있었다.
(1)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판사들의 공정성에 대해 논란을 벌였다.
그의 생각에는 어떠한 유대인도 최종 해결책의 수행자들에 대한 재판을 주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세르바티우스가 이러한 주장을 했을 때 그가 들었을 답은, 피고인이 반복해서 강조하여 증언한 것처럼 유대인 문제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유대인 시온주의 저술가들, 즉 테오도어 헤르츨과 아돌프 뵘의 '기초적 저술들'로부터 배웠다는 말이겠기 때문이다.
(2) 인간적으로 말해, 이 사람들이 법정에서 어느 누구라도 증언을 못하게 할 사람은 누가 있겠는가? 또한 비록 증인들이 말해야 하는 것이 단지' 이 재판의 부산물로 간주될' 뿐이라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이들이 '증언대에서 자신의 피맺힌 한을 쏟아 부을‘ 때 그 세부사항의 정확도에 대해 누가 감히 문제를 제기하겠는가?
(3) 이스라엘에서도 재판에 출두한 사람은 유죄가 판명 날 때까지는 무죄 로 간주된다. 그러나 아이히만의 경우 이것은 완전히 허구에 불과했다.
벤구리온 수상은 1960년 6월 3일 날짜의 서신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에게 ... 전 유럽에 걸쳐 거대한 그리고 전례 없는 규모로[우리 동족 600만 명]의 대량학살을 조직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아이히만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 주된 이유는 아이히만이 '유대인 문제 전문가’이며 다른 어떤 문제도 다루지 않은 유일한 독일 관리였으므로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과 밀접한 접촉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4) “항소자가 어떠한' 상급자의 명랑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최상급자였으며, 유대인 문제와 관련된 모든 명령을 그가 내렸다.”
그것은 정확히 검사의 주장이었고, 지방법원 판사들은 이 점을 수용하지 않았는데, 위험한 난센스였음에도 불구하고 항소심 법정은 그 내용을 전적으로 옹호했다.
대법관 마이클 A. 무스마노의 증언(검찰 측 증인)을 통해 ...
무스마노 씨는 집단수용소 행정요원들과 동부지역의 이동학살대 요원들을 재판한 사람이었다.
아이히만이 히틀러에게서 직접 자신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과 그의 권력이 “힘러와 하이드리히를 통해 구두로 주어졌다는 것을 믿었다.
구스타프 M. 길베르트(검찰 측 증인)
이런 모든 난제들로부터 판사들이 벗어난 길은 타협을 통한 것이었다.
...판사들은 독일에서 시작하여 동부에 대한 언급으로 끝남으로써 그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이 당한 수난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것보다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에 집중하려 했다
그들은 나치스의 피괴의 작동방식이 이루어진 복잡한 관료적 구성을 확실하게 이해했으며, 따라서 피고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주된 논쟁은 네 가지 항목에서 이루어졌다.
(1) 첫째, 동부에서 돌격대가 자행한 1941년 3월에 있었던 대량학살에 아이히만이 참여했는가의 여부였는데, 이때 아이히만은 현장에 있었다.
아이히만은 살인자들의 보고서를 받아서 이를 요약하여 상급자에게 보고한 점에서만 최종 해결책의 이 중요한 단계에 관련되었을 뿐이다.
(하이드리히와 발터 폰 브라우히츄 사이의) 이 합의서에는 돌격대가 '시민에 대한 그들의 계획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즉 민간인을 살해하는 데 전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었다
아이히만이 '이 작전을 통제'했으며 심지어 이를 '개인적으로 감독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판사들은 이를 증거를 포기했다.
따라서 남기긴 것은 아이히만이 동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정보를 잘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판결문에서는 놀랍게도 이 증거가 실질적인 참여의 증거로 삼기에 충분하다고 결론 맺고 있었다.
(2) 유대인을 폴란드의 게토에서 인근의 학살센터로 이송하는 문제에 관 한 두 번째 항목이다.
다른 많은 자료로부터 우리는 친위대 고위층 및 경찰 지도자들이 이 지역 전체의 이송을 책임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히만이 힘러의 명령에 영감을 줄 수 있었다는 검찰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받이들이지 않는다면,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했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곳에 도착한 모든 유대인을 아이히만이 이송시켰다고 입증할 수는 없었다.
보강증거가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것과 아이히만이 강력히 부인했다
(3)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항목은 학살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아이히만의 책임문제였다. 검찰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학살수용소에 서 상당한 권위를 누렸다고 한다,
(수용소에서 유대인의 두 범주)
하나는 이른바 '수송된 유대인' (Transportjuden)-한 차례의 범죄도 없음
다른 범주는 '보호관리대상(Schutzhaftjuden)에-어떤 위반 사항 저지름(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
아이히만은 보호관리대상과는 무관했다.
그러나 그가 전문적으로 처리한 수송된 유대인의 경우, 수용소에서 사역시키기 위해 선택된 특별히 신체가 건강한 사람 25퍼센트를 제외하고는 규정상 죽게 되어 있었다.
누가 살게 되고 누가 죽게 되는가를 말할 권한이 그에게는 없었다
아무도 죽이지 않은 대량학살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검찰은 개별 살인행위를 입증하려고 지속적으로 애를 썼다.
(4) 네 번째 문제는 동부지역에서 아이히만의 일반적 권위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는 게토에서의 삶의 조건에 대한 것, 게토에서 견디어 낸 형용할 수 없는 비참상에 대한 것, 그리고 대부분의 증인들의 증언의 주제였던 최종적인 유대인 몰살에 대한 것이다
검찰이 공을 들여 입증하려고 노력한 것은, 이는 그 일이 아이히만의 직책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외무성을 포함하는 '국가적 중대성’을 가진 문제였기 때문에 지역 당국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런 유대인에 관해서 모든 독일 사무실에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경향이 있었는데,
(1) 그 하나는 과격한 입장으로서 모든 차이들은 무시되어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경향(유대인은 유대인일 뿐이라는 것으로)이고,
(2) 다른 하나는 온건한 입장으로서 이런 유대인을 교환 목적으로 '보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아이히만은 '과격분자에 속했고, 행정적 이유와 '이상적' 이유에서 예외를 두는 것에 반대했다.
하이드리히나 힘러가 지역 관할권자에게 어떤 명령을 내릴 때 아이히만이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권력 또는 권위가 나올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판결문에서 주장된 것은 하이드리히에게 지역적 제한이 없는 최종 해결책의 이행에 대한 중심적 권위가 부여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에서 주요 대리인이있던 아이히만이 어디에서나 동등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는 것이있다.
폴란드 유대인에 대한 학살은 1941년 5월이나 6월, 즉 최종 해결책의 명령이 내린 그 때가 아니라, 1939년 9월에 히틀러에 의해 결정되었다.
폴란드 인텔리겐치아의 중간 계층( '교사, 성직자, 귀족, 재향군인, 퇴직 공무원 등)은 등록되고 체포되었다.
한편 '원주민 폴란드인'은 '이주 노동자들'로 독일 인력에 보충되어 그들의 고향에서 소개될 예정이었다.
“목표는 폴란드인들로 하여금 영원한 예비적 이주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들의 영구 거주지는 크라우카 지방에 있어야만 했다.
제국으로 편입된 이들 동부지역에서는 유대인은 즉각적으로 제거되었
다
독일 민족 강화를 위한 제국 감독관의 역할에 따라 힘러는 마침내 대부분의 폴란드 국민들을 이 지역에서 최근에 제국으로 합병된 지역으로 소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판결문에서 표현한 것처럼 이 같은
조직적인 민족 이주의 실행의 임무는 주요 임무가 '이주 및 소개‘였던 제국중앙보안본부의 하위부서 제Ⅳ-D-4부의 수장인 아이히만에게 부여되었다.
이미 1937년 11월에 히틀러가 독일 고급 지휘관들에게 행한 비밀 연설에서 .... 요구하는 것은 독일인들의 이주를 위한 동부의 '빈 공간'〔volkloser Raum〕이라고 지적했다.
동부 유대인에 대한 조치는 반유대주의의 결과일뿐 아니라, 포괄적인 인구 정책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만일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폴란드인들은 유대인과 동일한 운명(즉 종족 학살)을 겪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다.
독일의 폴란드 인들은 이미 유대인의 별 대신에 특별한 'p'자 표지를 달고 다니도록 이미 강요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듯이 파괴의 과정을 제도화하는 가운데 경찰이 취한 최초의 조치였던 것이다.
9월 회의 이후 이동학살대의 사령관들에게 보내진 속달 편지에는
...'점령 지역의 유대인 문제’만을 지칭하고 있으며, 비밀을 지켜야만 할
‘최종 목표’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예비적 조치들'을 구별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구절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최종 목표란 아마도 폴란드 유대인의 파멸을 의미했을 것이다
새로운 내용은 제국에 새로이 합병된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이 폴란드로 이주되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실로 독일을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 따라서 최종 해결책을 향한 첫 번째 조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역시 그의 역할은 '이송’과 '이주' 전문가로서의 역할이었다,
동부에서는 '유대인 전문가가 필요 없었고, 어떤 특별한 '지시들도 요구되지 않았으며, 어떠한 특권적 범주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인 관료조직은 유대인을 체포하고 수용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군대의 배후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야만적 대량학살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하이드리히는 독일 고위 지휘관과 함께 유대인, 폴란드 지식인, 가톨릭 성직자, 그리고 귀족들에 대한 완전한 ‘즉각적인 청소’의 원칙을 수립하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2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이 '청소'되이야 하는 작전의 규모 때문에 유대인이 먼저 게토에 수용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제14장 증거와 증언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 몇 주 동안 친위대 관료들은 주로 증명서를 위조하고 또 6년간의 체계적인 살인을 입증할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파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히만의 부서에서 나온 모든 서신들은 다른 국가나 당 사무실로 보내 졌고, 그곳의 대부분의 파일은 연합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최종 해결책에 대해 이야기해 줄 충분한 양의 문서들이 남았으며, 이들 대부분은 이미 뉘른베르크 재판과 그 후의 재판을 통해 이미 알려졌다.
문서상의 증거는 예루살렘으로 올 수 없는 16명의 증인들의 경우 해외, 즉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의 법정에서 취합된 증언을 통해 보충되었다.
갑자기 이스라엘이 피고 측 증인들의 진술을 들을 수가 없고
또 검찰 측 증인들 가운데 이전 재판에서 서면 진술서를 제출한 증인들이 피고와 대질심문할 수 없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사실상 피고가 이 사건을 적절히 다룰 ‘수단도 시간도' 없었고,
'전 세계의 자료실이나 정부의 수단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전쟁이 끝난 지 18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나치 정권에 대한
엄청난 양의 자료실 자료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대체로 소송을 목적으로 골라낸 것에 의존하고 있다.
피고의 입장에 대해서 법정은 피고가 이스라엘 경찰심문관에게 진술과 또 재판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11개월 동안 그가 넘긴 수많은 자필 메모로 보충된, 상세한 진술성에 의존할 수 있었다.
아이히만의 법정 진술은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로 나타났다.
한 차례의 공판도 채 안 되는 동안 자신의 변호사와의 짧은 심문을 한 뒤 그는 세 판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판사들은 검사가 17차례의 공판에서 해명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2차례 반의 짧은 공판 기간 동인에 그에게서 이끌어 냈다
아이히만은 ... 전체 121회의 공판 가운데 62차례의 공판이 이 나라 저 나라 출신으로 자신의 공포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준 100명의 검찰 측 증인으로 활용되있다.
자료 대부분을 법무장관은 공판 기록으로 해석했고, 이것은 매일 언론에 전달되었다.
증인 가운데 단지 몇 명만이 이스라엘 시민이었는데, 이들은 수만 명의 신청자들 가운데 선정된 사람들이었다. (수만 명 가운데 90명만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생존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로서 나치스에게 체포되었다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연대기 순으로 진행하려는 무익한 시도로 인해 독일에서 온 8명의 증인들의 행렬이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냉정하기는 했지만 '생존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독일에서 고위직 유대인 관리들이었고 지금은 이스라엘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뒤이어 프라하에서 5명의 증인
이어 오스트리아에서 1명의 증인
프랑스와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그리스, 그리고 소련에서 각각 1명의 증인
유고슬라비아에서는 2명의 증인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에서는 각각 3명의 증인
헝가리에서는 13명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는 53명의 증인
'배경을 설명하는 증인'들도 있었는데,
아우슈비츠(10명 증인)에 대해,
트레블링카(4명 증인)에 대해
테레지엔슈타트(4명 증인)에 대해
베르겐벨젠의 교환 수용소(1명 증인) 에 대해 법정 진술했다
검찰 측 마지막 증인 아론 호터-이샤이 씨는...
유럽 내의 유대인 생존자들을 찾기 위한 모든 노력을 조정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살아남은 유대인은 유럽 전역의 거주지가 뒤바뀐 약 800만 명 가운데 흩어져 있었는데, 연합국은 이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을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본국으로 송환하기를 원했다.
“테레지인슈타트에는 3만 2000명의 생존자가 있었다.
우리가 거기서 본 4000여 명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출신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도중에 바로 팔레스타인, 곧 이스라엘이 될 지역으로 가는 길이 그들에게 제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합법적으로든 불법적으로든 어떻게 하는 돌아갈 수 있고
또 그들이 환영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의 밀사들을 필요로 했다.
하우스너 씨의 첫 번째 배경 증인은 마치 자원해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진델 그린즈판.. 1938년 파국이 다가왔을 때 그는 독일에서 27년간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서류를 변경하여 귀화를 신청하려고 하지 않았다.
'1938년 10월 27일, 목요일 밤 8시에 경찰이 와서 우리들에게 7번 지역[경찰서]로 오라고 했습니다.’
거리에는 '유대인놈들을 팔레스타인으로!'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차 검게 보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데 아마 10분밖에 걸리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27년의 세월을 24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무자비하고 아무 필요도 없었던 이 파괴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가 법정에서 하루 종일 이야기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증언대에는 '시인이자 저술가인 아바 코브너가 있었다....
그는 주심 재판관으로부터 간결하게 대답하도록 주문을 받았다
독일군 야전 하사관(Feltwebel) 안톤 슈미트 라는 이름을 언급했다. 이
검찰측이 ”당신은 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라는 질문을 증인들에게 한 것과 동일한 빈도로
판사 할레비는 증인들에게 ”유대인은 어떤 도움을 받은 적이 있나요?“ 라고 물었다.
(유대인 도와준 사례 증언)
-어떻게 자기와 12명의 다른 유대인을 숨겨주었는지 증언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이 기독교인 친구에게로 탈출하여 도음을 받았다.
-폴란드 지하조직이 많은 유대인에게 무기를 공급했고,
-또 수천 명의 유대인 아이들을 폴란드인 가정으로 데려가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
여섯 살 난 유대인 여자아이를 입양한 이유로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모든 가족이 몰살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경찰의 특정한 명령에 사보타주함으로써 한 독일 장교가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코브너가 독일 하사관(안톤 슈미트)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해 말하는 데 걸린 몇 분 동안 쉿 하는 소리와 함께 법정이 조용해졌다.
독일 의무관 외과의사인 페터 밤은 『보이지 않는 국기』(Unsichtbare Flagge, 1952)에서 세바스토폴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이다, ... 우리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그들의 적들을 침묵하는 익명성 속에서 사라지도록 한다. 조용히 이러한 범죄를 감내하기보다 감히 죽음을 감당하려 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려 했겠지만 쓸데없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깊이 뿌리내린 확신을 갖고 있어서 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의미를 위해 실질적으로 쓸모없는 희생을 감당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체주의 지배체제는 선하거나 악한 모든 사실들을 사라져버리게 하는 망각이라는 구명을 마련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942년 6월 이래로 있었던 대량학살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소란스러웠던 시도들이 실패할 운명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적들이 '완전한 익명 속에서 사라져버리도록' 한 모든 노력들은 허사였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불필요'하지 않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 교훈이란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최종 해결책이 제안된 나라들의 교훈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일이 어디서나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제15장 판결, 항소, 처형
전쟁이 끝나기 전 수개월 동안 아이히만은 ... 방어책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는데, 이는 베를린을 위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직책에 따라 테레지엔슈타트에 이따금씩 방문하여 적십자 대표단들에게 시설물들을 보여주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힘러의 새로운 '인도적인 노선‘에 대한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았다.
이때 그는 '다음에 만들’ 강제수용소가 '영국의 모델‘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맹세했다.
1945년 4월 아이히만은 힘러와의 몇 차례 면담 가운데 마지막 면담을 가졌다
힘러는 그에게 “테레지엔슈타트에 있는 100명 또는 200명의 저명한 유대인을 선별하여 오스트리아로 이송해서 호텔에다 수용해 놓고,
이들을 힘러가 앞으로 있게 될 아이젠하워와의 협상 때 '인질'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재판 당국은 여러 이유에서 전쟁이 끝난 이후의 시기를 다루는 (아이히만의) 어떠한 증언도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1945년 11월에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다.
아이히만의 이름이 거북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1946년 1월에 비슬리케니는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아이히만의 유죄에 대한 확증적인 증언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그의 정체를 다 알고 있는 한 프란체스코파 신부가 그에게 리하르트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망명자 여권을 만들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보내주었다.
그는 7월 중순 그곳에 도착하여 아무런 어려움 없이 가톨릭 신자, 총각, 무국적자, 나이는 37세 (실제 나이보다 일곱 살 어림)인 리카르도 클레멘트로 신분증과 노동 허가를 받았다.
1952년 여름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왔다.
1960년 초 아이히만이 체포되기 몇 달 전 그와 그의 아이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난한 외곽지역에 원시적인 벽돌집 건축을 완성했다.
전기도 수도도 없는 이곳에 아이히만의 가족은 정착했다.
아이히만의 유일한 보상은 자신의 정체를 이미 드러내보인 나치스 광역단체 요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데 있었다.
그가 이스라엘에 와서 재판을 기꺼이 받으려 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드러난 사실이라기보다는 증명된 것이었다.
물론 피고 측 변호사는 무엇보다도 피고가 납치되었고
따라서 “국제법에 저촉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로 데려왔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했다.
(반론) 그들은 국제법의 훼손이 아르헨티나와 이스라엘 두 국가에만 관계될 뿐 피고의 권리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예루살렘 법정이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아이히만이 사실상 무국적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오직 무국적 상태로서만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몰살당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국적을 상실해야만 한 것이다.
1960년 5월 11일 저녁 6시 30분,
아이히만은 ... 자기가 누구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즉각 독일어로 “나는 이돌프 아이히만이다" (Ich bin Adolf Eichmann)고 말했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 손에 잡혔다는 것을 안다고 덧붙였다.
그가 체포된 다음날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해 이의가 없다는 것을 서면으로 진술하도록 요구받았다.
나는 진실을 추구하는 내 노력을 위해 보고서와 진술서 등을 활용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요구하는 바이다. 서명 아들프 아이히만, 부에노스아이레스 1960년 5 월.
아이히만이 재판 당국에 대해 놀랄 만한 협조를 한 것에 대해 자신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그가 체포되기 수년 전에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자신이 익명으로 지내는 것에 대해 얼마나 지겨워 했는지에 대해 쓴 적이 있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죄책감에 대한 이 대화를 한 후에 저는 잠적할 권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지난 전쟁'을 그는 다른 맥락에서는 '독일제국에 강요된 전쟁'이라고 여전히 부르고 있었다.
경찰심문 초기에 그는 '나는 사형선고가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 공언한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그에게 외국인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의 가족이 추천한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 박사
-칠레에 거주하는 다른 독일인 변호사
-재판당국이 접촉한 뉴욕에 있는 한 미국계 법률회사
그는 다른 가능성을 택하지 않고, 즉석에서 세르바티우스 박사를 선택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대부분의 시간에 전적으로 혼자 등장했다.
그 결과 아이히만은 변호사의 주보조원이 되었고, '미래 세대들을 위한' 책을 쓰기는커녕 재판 기간 줄곧 아주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
1961년 6월 29일, 공판이 시작된 4월 11일....
12월 11일에 판결을 선고하기 위해 다시 개정했다.
세 판사가 244항목으로 이루어진 판결문을 낭독했다.
그는 '주요 전범'이 되어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 자동적으로 책임지도록 되어 있었다,
'다른 죄목과 함께' 그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법했다.
따라서 아이히만이 총통의 명령에 앞서 한 모든 일들과 비유대인에게 행한 모든 범죄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총괄되었다.
그 이후에 유대인에 대해 범한 그의 모든 범죄들이 더해졌다
왜냐하면 이런 범죄는 일상적인 범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 유죄인 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집시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유죄였다.
1항에서 12항까지 열거된 모든 범죄는 사형에 해당되었다
함축적으로 판결문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제로
살상수단들을 손으로 조작한’ 사람들은 통상 수감자들과 희생자들이었다는 섬뜩한 사실을 역시 인정한 것이다.
판결문 낭독 다음에는....
검찰 측에서 일어나 한 차례 더 사형 언도를 요구하는 긴 연설을 했다
죄를 경감시켜줄 상황이 아니라면 사형 언도는 자동적이었다.
일찍이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법정이 피고를 무죄 방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아르헨티나의 형 면제법에 따르면 '납치가 일어나기 직전인' 1960년 5월 7일에 그에 대한 형법의 적용이 만료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독일에서는 사형제도가 무조건적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후 아이히만의 최종 언도가 나왔다.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된다.
그의 덕은 나치스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배집단의 일원이 아니었고,
그는 희생자였으며,
오직 지도자들만 처벌을 받아야 한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
이틀 후인 1961년 12월 15 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3개월이 지난 1962년 3월 22일.이스라엘 대법원에서 항소심이 열렸다
세르바티우스 박사, 피고 측 변호인은 이스라엘 법정의 권한에 반대하는 이전의 논지를 재차 반복했다.
한마디로 재판은 공정치 못했고, 판결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1962년 5월 29일 두 번째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원래의 판결문과 명백히 대조된 점은
“항소자가 '상관의 명령을 전혀 받지 않았음”이 이제는 발견되었다
'그 스스로가 자신의 상관이었으며,
“유대인 문제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그가 모든 명령을 내렸다."
그는 “중요성에 있어서는 뮐러를 포함한 그의 모든 상관들을 능가했다."
판사들은 이제 “최종 해결책이라는 아이디어는 항소자와 그의 공범자들의 억누를 수 없는 피의 갈증과 광신적 열정이 없었다면 수백만의 유대인의 벗겨진 살갗과 고문당한 살이라는 연옥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검찰의 논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언어 자체 도 차용한 것이다.
같은 날인 5월 29일에 이스라엘 대통령 이츠하크 벤츠비는 ...
아이히만의 사면 청원서를 린츠에 있는 그의 아내와 가족으로부터 온 편지와 함께 받았다.
대통령은 또한 전 세계로부터 온 관대한 조치를 호소하는 수백 통의 편지 와 전문을 받았다.
대법원이 판결을 내린 지 이틀이 지난 5월 31일에
벤츠비(대통령) 씨는 모든 자비의 청원을 물리쳤다
같은 날 몇 시간이 지난 뒤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자정이 되기 직전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체는 화장되었고 재는 지중해의 이스라옐 수역 밖에 뿌려졌다.
자비의 청원이 거부되었다는 소식을 아이히만이 들은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형이 집행되었다.
사형선고가 내릴 것은 예견된 일이고 여기에는 거의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사형을 집행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저명인사와 특권층 인사에 의해 반대입장이 표명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논지는 아이히만의 행위가 인간의 처벌의 가능성을 능가했다는 것,
그런 엄청난 범죄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마르틴 부버는 이 재판을 “역사적 차원에서의 실수'라고 불렀다.
이 일이 “독일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느끼는 죄책감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부버는 아이히만이 독일 청년들의 어깨에서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을 공개처형해주기를 원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다.
사형제도를 원칙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반대한 사람들로부터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그는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했고 그 절반을 마셨다.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지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evil)을.
The End. 2022.11.8.
아이히만
제13, 14, 15장 여여 2022. 11.8 화 9:40
제13장 동부의 학살센터들
나치스가 동부라고 말할 때 이는 폴란드와 발틱 연안 국가들 그리고 점령된 러시아 영토를 의미했다. 이것은 4개의 행정 단위로 나뉘었다.
(1) 폴란드 서부 지역(바르테가우)-책임자 아르투르 그라이저의 관할
(2)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그리고 백러시아의 다소 불특정한 지역을 포함하는 (오스들란트)-점령당국 지위의 리가의 관할
(3) 폴란드 중부 지역(일반정부)- 한스 프랑크의 관할
(4) 우크라이나-알프레트 로센베르 크의 동부점령지역청의 관할
동부는 유대인 고통의 중심적 장면에 해당하며 모든 이송작업의 소름끼치는 최종 종착지였다(생존자의 수는 거의 5퍼센트)
동부는 전쟁 이전에는 유럽에서의 유대인 인구의 중심지였다
(300만 이상의 유대인이 폴란드 거주,
260만명이
발틱 국가들에서,
300만으로 추산되는 러시아 유대인 가운데 절반 이상이 백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크리미아에 거주)
검찰은 유대 민족의 고통과 그것을 위해 이루이진 대량학살의 차원에 일차적으로 관심이 있었다.
문제는 아이히만과 동부의 사태를 연결시키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원고 측은 생존자 이스라엘인들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았다
이 생존자들이 현재 이 나라 인구의 20퍼센트 가량을 이루고 있다.
재판 당국이 명명한 '유대 민족의 고통에 대한 증인들 56명이 원래 계획된15명 내지 20명의 '배경 증인들' 대신에 결국 법정에 섰다.
전체121회 공판 가운데 23회가 전적으로 '배경' 문제에 할애되었는데,
이때 '배경‘이란 말은 이 재판에 명백한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폴란드 게토의 상황과 수많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있었던 절차, 강제 노동, 그리고 대체로 노동을 통한 학살의 시도 등에 대한 증인들의 배경 증언의 요지는 결코 논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이히만의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는 ’소문에 따르면'과 같은 풍문에 의한 증거들이어서 법적 타당성은 없었다.
법정은 그(아이히만)의 활동 반경이 제국과 보호국, 그리고 서부와 북부, 남부, 남동부, 그리고 중앙유럽의 국가를(즉 동부를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피고(아이히만)는 기소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부정한 적이 없었다 그는 단지 ‘기소된 의미로’ 그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다.
실제로 판사들은 상당히 불쾌한 딜레마에 봉착해 있었다.
(1)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판사들의 공정성에 대해 논란을 벌였다.
그의 생각에는 어떠한 유대인도 최종 해결책의 수행자들에 대한 재판을 주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세르바티우스가 이러한 주장을 했을 때 그가 들었을 답은, 피고인이 반복해서 강조하여 증언한 것처럼 유대인 문제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유대인 시온주의 저술가들, 즉 테오도어 헤르츨과 아돌프 뵘의 '기초적 저술들'로부터 배웠다는 말이겠기 때문이다.
(2) 인간적으로 말해, 이 사람들이 법정에서 어느 누구라도 증언을 못하게 할 사람은 누가 있겠는가? 또한 비록 증인들이 말해야 하는 것이 단지' 이 재판의 부산물로 간주될' 뿐이라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이들이 '증언대에서 자신의 피맺힌 한을 쏟아 부을‘ 때 그 세부사항의 정확도에 대해 누가 감히 문제를 제기하겠는가?
(3) 이스라엘에서도 재판에 출두한 사람은 유죄가 판명 날 때까지는 무죄 로 간주된다. 그러나 아이히만의 경우 이것은 완전히 허구에 불과했다.
벤구리온 수상은 1960년 6월 3일 날짜의 서신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에게 ... 전 유럽에 걸쳐 거대한 그리고 전례 없는 규모로[우리 동족 600만 명]의 대량학살을 조직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아이히만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 주된 이유는 아이히만이 '유대인 문제 전문가’이며 다른 어떤 문제도 다루지 않은 유일한 독일 관리였으므로 유대인 지도층 인사들과 밀접한 접촉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4) “항소자가 어떠한' 상급자의 명랑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최상급자였으며, 유대인 문제와 관련된 모든 명령을 그가 내렸다.”
그것은 정확히 검사의 주장이었고, 지방법원 판사들은 이 점을 수용하지 않았는데, 위험한 난센스였음에도 불구하고 항소심 법정은 그 내용을 전적으로 옹호했다.
대법관 마이클 A. 무스마노의 증언(검찰 측 증인)을 통해 ...
무스마노 씨는 집단수용소 행정요원들과 동부지역의 이동학살대 요원들을 재판한 사람이었다.
아이히만이 히틀러에게서 직접 자신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과 그의 권력이 “힘러와 하이드리히를 통해 구두로 주어졌다는 것을 믿었다.
구스타프 M. 길베르트(검찰 측 증인)
이런 모든 난제들로부터 판사들이 벗어난 길은 타협을 통한 것이었다.
...판사들은 독일에서 시작하여 동부에 대한 언급으로 끝남으로써 그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이 당한 수난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것보다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에 집중하려 했다
그들은 나치스의 피괴의 작동방식이 이루어진 복잡한 관료적 구성을 확실하게 이해했으며, 따라서 피고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주된 논쟁은 네 가지 항목에서 이루어졌다.
(1) 첫째, 동부에서 돌격대가 자행한 1941년 3월에 있었던 대량학살에 아이히만이 참여했는가의 여부였는데, 이때 아이히만은 현장에 있었다.
아이히만은 살인자들의 보고서를 받아서 이를 요약하여 상급자에게 보고한 점에서만 최종 해결책의 이 중요한 단계에 관련되었을 뿐이다.
(하이드리히와 발터 폰 브라우히츄 사이의) 이 합의서에는 돌격대가 '시민에 대한 그들의 계획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즉 민간인을 살해하는 데 전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었다
아이히만이 '이 작전을 통제'했으며 심지어 이를 '개인적으로 감독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판사들은 이를 증거를 포기했다.
따라서 남기긴 것은 아이히만이 동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정보를 잘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판결문에서는 놀랍게도 이 증거가 실질적인 참여의 증거로 삼기에 충분하다고 결론 맺고 있었다.
(2) 유대인을 폴란드의 게토에서 인근의 학살센터로 이송하는 문제에 관 한 두 번째 항목이다.
다른 많은 자료로부터 우리는 친위대 고위층 및 경찰 지도자들이 이 지역 전체의 이송을 책임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히만이 힘러의 명령에 영감을 줄 수 있었다는 검찰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받이들이지 않는다면,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했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곳에 도착한 모든 유대인을 아이히만이 이송시켰다고 입증할 수는 없었다.
보강증거가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것과 아이히만이 강력히 부인했다
(3)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항목은 학살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아이히만의 책임문제였다. 검찰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학살수용소에 서 상당한 권위를 누렸다고 한다,
(수용소에서 유대인의 두 범주)
하나는 이른바 '수송된 유대인' (Transportjuden)-한 차례의 범죄도 없음
다른 범주는 '보호관리대상(Schutzhaftjuden)에-어떤 위반 사항 저지름(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
아이히만은 보호관리대상과는 무관했다.
그러나 그가 전문적으로 처리한 수송된 유대인의 경우, 수용소에서 사역시키기 위해 선택된 특별히 신체가 건강한 사람 25퍼센트를 제외하고는 규정상 죽게 되어 있었다.
누가 살게 되고 누가 죽게 되는가를 말할 권한이 그에게는 없었다
아무도 죽이지 않은 대량학살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검찰은 개별 살인행위를 입증하려고 지속적으로 애를 썼다.
(4) 네 번째 문제는 동부지역에서 아이히만의 일반적 권위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는 게토에서의 삶의 조건에 대한 것, 게토에서 견디어 낸 형용할 수 없는 비참상에 대한 것, 그리고 대부분의 증인들의 증언의 주제였던 최종적인 유대인 몰살에 대한 것이다
검찰이 공을 들여 입증하려고 노력한 것은, 이는 그 일이 아이히만의 직책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외무성을 포함하는 '국가적 중대성’을 가진 문제였기 때문에 지역 당국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런 유대인에 관해서 모든 독일 사무실에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경향이 있었는데,
(1) 그 하나는 과격한 입장으로서 모든 차이들은 무시되어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경향(유대인은 유대인일 뿐이라는 것으로)이고,
(2) 다른 하나는 온건한 입장으로서 이런 유대인을 교환 목적으로 '보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아이히만은 '과격분자에 속했고, 행정적 이유와 '이상적' 이유에서 예외를 두는 것에 반대했다.
하이드리히나 힘러가 지역 관할권자에게 어떤 명령을 내릴 때 아이히만이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권력 또는 권위가 나올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판결문에서 주장된 것은 하이드리히에게 지역적 제한이 없는 최종 해결책의 이행에 대한 중심적 권위가 부여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에서 주요 대리인이있던 아이히만이 어디에서나 동등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는 것이있다.
폴란드 유대인에 대한 학살은 1941년 5월이나 6월, 즉 최종 해결책의 명령이 내린 그 때가 아니라, 1939년 9월에 히틀러에 의해 결정되었다.
폴란드 인텔리겐치아의 중간 계층( '교사, 성직자, 귀족, 재향군인, 퇴직 공무원 등)은 등록되고 체포되었다.
한편 '원주민 폴란드인'은 '이주 노동자들'로 독일 인력에 보충되어 그들의 고향에서 소개될 예정이었다.
“목표는 폴란드인들로 하여금 영원한 예비적 이주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들의 영구 거주지는 크라우카 지방에 있어야만 했다.
제국으로 편입된 이들 동부지역에서는 유대인은 즉각적으로 제거되었
다
독일 민족 강화를 위한 제국 감독관의 역할에 따라 힘러는 마침내 대부분의 폴란드 국민들을 이 지역에서 최근에 제국으로 합병된 지역으로 소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판결문에서 표현한 것처럼 이 같은
조직적인 민족 이주의 실행의 임무는 주요 임무가 '이주 및 소개‘였던 제국중앙보안본부의 하위부서 제Ⅳ-D-4부의 수장인 아이히만에게 부여되었다.
이미 1937년 11월에 히틀러가 독일 고급 지휘관들에게 행한 비밀 연설에서 .... 요구하는 것은 독일인들의 이주를 위한 동부의 '빈 공간'〔volkloser Raum〕이라고 지적했다.
동부 유대인에 대한 조치는 반유대주의의 결과일뿐 아니라, 포괄적인 인구 정책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만일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폴란드인들은 유대인과 동일한 운명(즉 종족 학살)을 겪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다.
독일의 폴란드 인들은 이미 유대인의 별 대신에 특별한 'p'자 표지를 달고 다니도록 이미 강요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듯이 파괴의 과정을 제도화하는 가운데 경찰이 취한 최초의 조치였던 것이다.
9월 회의 이후 이동학살대의 사령관들에게 보내진 속달 편지에는
...'점령 지역의 유대인 문제’만을 지칭하고 있으며, 비밀을 지켜야만 할
‘최종 목표’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예비적 조치들'을 구별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구절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최종 목표란 아마도 폴란드 유대인의 파멸을 의미했을 것이다
새로운 내용은 제국에 새로이 합병된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이 폴란드로 이주되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실로 독일을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 따라서 최종 해결책을 향한 첫 번째 조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역시 그의 역할은 '이송’과 '이주' 전문가로서의 역할이었다,
동부에서는 '유대인 전문가가 필요 없었고, 어떤 특별한 '지시들도 요구되지 않았으며, 어떠한 특권적 범주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인 관료조직은 유대인을 체포하고 수용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군대의 배후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야만적 대량학살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하이드리히는 독일 고위 지휘관과 함께 유대인, 폴란드 지식인, 가톨릭 성직자, 그리고 귀족들에 대한 완전한 ‘즉각적인 청소’의 원칙을 수립하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2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이 '청소'되이야 하는 작전의 규모 때문에 유대인이 먼저 게토에 수용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제14장 증거와 증언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 몇 주 동안 친위대 관료들은 주로 증명서를 위조하고 또 6년간의 체계적인 살인을 입증할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파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히만의 부서에서 나온 모든 서신들은 다른 국가나 당 사무실로 보내 졌고, 그곳의 대부분의 파일은 연합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최종 해결책에 대해 이야기해 줄 충분한 양의 문서들이 남았으며, 이들 대부분은 이미 뉘른베르크 재판과 그 후의 재판을 통해 이미 알려졌다.
문서상의 증거는 예루살렘으로 올 수 없는 16명의 증인들의 경우 해외, 즉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의 법정에서 취합된 증언을 통해 보충되었다.
갑자기 이스라엘이 피고 측 증인들의 진술을 들을 수가 없고
또 검찰 측 증인들 가운데 이전 재판에서 서면 진술서를 제출한 증인들이 피고와 대질심문할 수 없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사실상 피고가 이 사건을 적절히 다룰 ‘수단도 시간도' 없었고,
'전 세계의 자료실이나 정부의 수단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전쟁이 끝난 지 18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나치 정권에 대한
엄청난 양의 자료실 자료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대체로 소송을 목적으로 골라낸 것에 의존하고 있다.
피고의 입장에 대해서 법정은 피고가 이스라엘 경찰심문관에게 진술과 또 재판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11개월 동안 그가 넘긴 수많은 자필 메모로 보충된, 상세한 진술성에 의존할 수 있었다.
아이히만의 법정 진술은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로 나타났다.
한 차례의 공판도 채 안 되는 동안 자신의 변호사와의 짧은 심문을 한 뒤 그는 세 판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판사들은 검사가 17차례의 공판에서 해명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2차례 반의 짧은 공판 기간 동인에 그에게서 이끌어 냈다
아이히만은 ... 전체 121회의 공판 가운데 62차례의 공판이 이 나라 저 나라 출신으로 자신의 공포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준 100명의 검찰 측 증인으로 활용되있다.
자료 대부분을 법무장관은 공판 기록으로 해석했고, 이것은 매일 언론에 전달되었다.
증인 가운데 단지 몇 명만이 이스라엘 시민이었는데, 이들은 수만 명의 신청자들 가운데 선정된 사람들이었다. (수만 명 가운데 90명만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생존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로서 나치스에게 체포되었다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연대기 순으로 진행하려는 무익한 시도로 인해 독일에서 온 8명의 증인들의 행렬이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냉정하기는 했지만 '생존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독일에서 고위직 유대인 관리들이었고 지금은 이스라엘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뒤이어 프라하에서 5명의 증인
이어 오스트리아에서 1명의 증인
프랑스와 네덜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그리스, 그리고 소련에서 각각 1명의 증인
유고슬라비아에서는 2명의 증인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에서는 각각 3명의 증인
헝가리에서는 13명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는 53명의 증인
'배경을 설명하는 증인'들도 있었는데,
아우슈비츠(10명 증인)에 대해,
트레블링카(4명 증인)에 대해
테레지엔슈타트(4명 증인)에 대해
베르겐벨젠의 교환 수용소(1명 증인) 에 대해 법정 진술했다
검찰 측 마지막 증인 아론 호터-이샤이 씨는...
유럽 내의 유대인 생존자들을 찾기 위한 모든 노력을 조정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살아남은 유대인은 유럽 전역의 거주지가 뒤바뀐 약 800만 명 가운데 흩어져 있었는데, 연합국은 이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을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본국으로 송환하기를 원했다.
“테레지인슈타트에는 3만 2000명의 생존자가 있었다.
우리가 거기서 본 4000여 명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출신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도중에 바로 팔레스타인, 곧 이스라엘이 될 지역으로 가는 길이 그들에게 제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합법적으로든 불법적으로든 어떻게 하는 돌아갈 수 있고
또 그들이 환영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의 밀사들을 필요로 했다.
하우스너 씨의 첫 번째 배경 증인은 마치 자원해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진델 그린즈판.. 1938년 파국이 다가왔을 때 그는 독일에서 27년간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서류를 변경하여 귀화를 신청하려고 하지 않았다.
'1938년 10월 27일, 목요일 밤 8시에 경찰이 와서 우리들에게 7번 지역[경찰서]로 오라고 했습니다.’
거리에는 '유대인놈들을 팔레스타인으로!'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차 검게 보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데 아마 10분밖에 걸리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27년의 세월을 24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무자비하고 아무 필요도 없었던 이 파괴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가 법정에서 하루 종일 이야기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증언대에는 '시인이자 저술가인 아바 코브너가 있었다....
그는 주심 재판관으로부터 간결하게 대답하도록 주문을 받았다
독일군 야전 하사관(Feltwebel) 안톤 슈미트 라는 이름을 언급했다. 이
검찰측이 ”당신은 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라는 질문을 증인들에게 한 것과 동일한 빈도로
판사 할레비는 증인들에게 ”유대인은 어떤 도움을 받은 적이 있나요?“ 라고 물었다.
(유대인 도와준 사례 증언)
-어떻게 자기와 12명의 다른 유대인을 숨겨주었는지 증언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이 기독교인 친구에게로 탈출하여 도음을 받았다.
-폴란드 지하조직이 많은 유대인에게 무기를 공급했고,
-또 수천 명의 유대인 아이들을 폴란드인 가정으로 데려가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
여섯 살 난 유대인 여자아이를 입양한 이유로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모든 가족이 몰살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경찰의 특정한 명령에 사보타주함으로써 한 독일 장교가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코브너가 독일 하사관(안톤 슈미트)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해 말하는 데 걸린 몇 분 동안 쉿 하는 소리와 함께 법정이 조용해졌다.
독일 의무관 외과의사인 페터 밤은 『보이지 않는 국기』(Unsichtbare Flagge, 1952)에서 세바스토폴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이다, ... 우리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그들의 적들을 침묵하는 익명성 속에서 사라지도록 한다. 조용히 이러한 범죄를 감내하기보다 감히 죽음을 감당하려 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려 했겠지만 쓸데없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깊이 뿌리내린 확신을 갖고 있어서 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의미를 위해 실질적으로 쓸모없는 희생을 감당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체주의 지배체제는 선하거나 악한 모든 사실들을 사라져버리게 하는 망각이라는 구명을 마련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942년 6월 이래로 있었던 대량학살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소란스러웠던 시도들이 실패할 운명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적들이 '완전한 익명 속에서 사라져버리도록' 한 모든 노력들은 허사였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불필요'하지 않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 교훈이란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최종 해결책이 제안된 나라들의 교훈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일이 어디서나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제15장 판결, 항소, 처형
전쟁이 끝나기 전 수개월 동안 아이히만은 ... 방어책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는데, 이는 베를린을 위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직책에 따라 테레지엔슈타트에 이따금씩 방문하여 적십자 대표단들에게 시설물들을 보여주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힘러의 새로운 '인도적인 노선‘에 대한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았다.
이때 그는 '다음에 만들’ 강제수용소가 '영국의 모델‘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맹세했다.
1945년 4월 아이히만은 힘러와의 몇 차례 면담 가운데 마지막 면담을 가졌다
힘러는 그에게 “테레지엔슈타트에 있는 100명 또는 200명의 저명한 유대인을 선별하여 오스트리아로 이송해서 호텔에다 수용해 놓고,
이들을 힘러가 앞으로 있게 될 아이젠하워와의 협상 때 '인질'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재판 당국은 여러 이유에서 전쟁이 끝난 이후의 시기를 다루는 (아이히만의) 어떠한 증언도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1945년 11월에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다.
아이히만의 이름이 거북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1946년 1월에 비슬리케니는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아이히만의 유죄에 대한 확증적인 증언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그의 정체를 다 알고 있는 한 프란체스코파 신부가 그에게 리하르트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망명자 여권을 만들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보내주었다.
그는 7월 중순 그곳에 도착하여 아무런 어려움 없이 가톨릭 신자, 총각, 무국적자, 나이는 37세 (실제 나이보다 일곱 살 어림)인 리카르도 클레멘트로 신분증과 노동 허가를 받았다.
1952년 여름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왔다.
1960년 초 아이히만이 체포되기 몇 달 전 그와 그의 아이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난한 외곽지역에 원시적인 벽돌집 건축을 완성했다.
전기도 수도도 없는 이곳에 아이히만의 가족은 정착했다.
아이히만의 유일한 보상은 자신의 정체를 이미 드러내보인 나치스 광역단체 요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데 있었다.
그가 이스라엘에 와서 재판을 기꺼이 받으려 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드러난 사실이라기보다는 증명된 것이었다.
물론 피고 측 변호사는 무엇보다도 피고가 납치되었고
따라서 “국제법에 저촉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로 데려왔다'는 점을 강조해야만 했다.
(반론) 그들은 국제법의 훼손이 아르헨티나와 이스라엘 두 국가에만 관계될 뿐 피고의 권리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예루살렘 법정이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아이히만이 사실상 무국적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오직 무국적 상태로서만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몰살당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국적을 상실해야만 한 것이다.
1960년 5월 11일 저녁 6시 30분,
아이히만은 ... 자기가 누구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즉각 독일어로 “나는 이돌프 아이히만이다" (Ich bin Adolf Eichmann)고 말했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 손에 잡혔다는 것을 안다고 덧붙였다.
그가 체포된 다음날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해 이의가 없다는 것을 서면으로 진술하도록 요구받았다.
나는 진실을 추구하는 내 노력을 위해 보고서와 진술서 등을 활용함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요구하는 바이다. 서명 아들프 아이히만, 부에노스아이레스 1960년 5 월.
아이히만이 재판 당국에 대해 놀랄 만한 협조를 한 것에 대해 자신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그가 체포되기 수년 전에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자신이 익명으로 지내는 것에 대해 얼마나 지겨워 했는지에 대해 쓴 적이 있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죄책감에 대한 이 대화를 한 후에 저는 잠적할 권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지난 전쟁'을 그는 다른 맥락에서는 '독일제국에 강요된 전쟁'이라고 여전히 부르고 있었다.
경찰심문 초기에 그는 '나는 사형선고가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 공언한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그에게 외국인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의 가족이 추천한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 박사
-칠레에 거주하는 다른 독일인 변호사
-재판당국이 접촉한 뉴욕에 있는 한 미국계 법률회사
그는 다른 가능성을 택하지 않고, 즉석에서 세르바티우스 박사를 선택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대부분의 시간에 전적으로 혼자 등장했다.
그 결과 아이히만은 변호사의 주보조원이 되었고, '미래 세대들을 위한' 책을 쓰기는커녕 재판 기간 줄곧 아주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
1961년 6월 29일, 공판이 시작된 4월 11일....
12월 11일에 판결을 선고하기 위해 다시 개정했다.
세 판사가 244항목으로 이루어진 판결문을 낭독했다.
그는 '주요 전범'이 되어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 자동적으로 책임지도록 되어 있었다,
'다른 죄목과 함께' 그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법했다.
따라서 아이히만이 총통의 명령에 앞서 한 모든 일들과 비유대인에게 행한 모든 범죄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총괄되었다.
그 이후에 유대인에 대해 범한 그의 모든 범죄들이 더해졌다
왜냐하면 이런 범죄는 일상적인 범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 유죄인 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집시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유죄였다.
1항에서 12항까지 열거된 모든 범죄는 사형에 해당되었다
함축적으로 판결문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제로
살상수단들을 손으로 조작한’ 사람들은 통상 수감자들과 희생자들이었다는 섬뜩한 사실을 역시 인정한 것이다.
판결문 낭독 다음에는....
검찰 측에서 일어나 한 차례 더 사형 언도를 요구하는 긴 연설을 했다
죄를 경감시켜줄 상황이 아니라면 사형 언도는 자동적이었다.
일찍이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법정이 피고를 무죄 방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아르헨티나의 형 면제법에 따르면 '납치가 일어나기 직전인' 1960년 5월 7일에 그에 대한 형법의 적용이 만료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독일에서는 사형제도가 무조건적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후 아이히만의 최종 언도가 나왔다.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된다.
그의 덕은 나치스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배집단의 일원이 아니었고,
그는 희생자였으며,
오직 지도자들만 처벌을 받아야 한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
이틀 후인 1961년 12월 15 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3개월이 지난 1962년 3월 22일.이스라엘 대법원에서 항소심이 열렸다
세르바티우스 박사, 피고 측 변호인은 이스라엘 법정의 권한에 반대하는 이전의 논지를 재차 반복했다.
한마디로 재판은 공정치 못했고, 판결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1962년 5월 29일 두 번째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원래의 판결문과 명백히 대조된 점은
“항소자가 '상관의 명령을 전혀 받지 않았음”이 이제는 발견되었다
'그 스스로가 자신의 상관이었으며,
“유대인 문제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그가 모든 명령을 내렸다."
그는 “중요성에 있어서는 뮐러를 포함한 그의 모든 상관들을 능가했다."
판사들은 이제 “최종 해결책이라는 아이디어는 항소자와 그의 공범자들의 억누를 수 없는 피의 갈증과 광신적 열정이 없었다면 수백만의 유대인의 벗겨진 살갗과 고문당한 살이라는 연옥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검찰의 논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언어 자체 도 차용한 것이다.
같은 날인 5월 29일에 이스라엘 대통령 이츠하크 벤츠비는 ...
아이히만의 사면 청원서를 린츠에 있는 그의 아내와 가족으로부터 온 편지와 함께 받았다.
대통령은 또한 전 세계로부터 온 관대한 조치를 호소하는 수백 통의 편지 와 전문을 받았다.
대법원이 판결을 내린 지 이틀이 지난 5월 31일에
벤츠비(대통령) 씨는 모든 자비의 청원을 물리쳤다
같은 날 몇 시간이 지난 뒤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자정이 되기 직전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체는 화장되었고 재는 지중해의 이스라옐 수역 밖에 뿌려졌다.
자비의 청원이 거부되었다는 소식을 아이히만이 들은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형이 집행되었다.
사형선고가 내릴 것은 예견된 일이고 여기에는 거의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사형을 집행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저명인사와 특권층 인사에 의해 반대입장이 표명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논지는 아이히만의 행위가 인간의 처벌의 가능성을 능가했다는 것,
그런 엄청난 범죄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마르틴 부버는 이 재판을 “역사적 차원에서의 실수'라고 불렀다.
이 일이 “독일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느끼는 죄책감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부버는 아이히만이 독일 청년들의 어깨에서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을 공개처형해주기를 원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다.
사형제도를 원칙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반대한 사람들로부터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그는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했고 그 절반을 마셨다.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지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evil)을.
The End. 202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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