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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문제와 정치적 사유-파리아로서 한나 아렌트, 서론(137-187) 론 펠드만

Felman, Ron the jewish question

http://www.ronhfeldman.com/

Ron H. Feldman, Ph.D. is a Visiting Scholar at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

유대인 문제와 정치적 사유-파리아로서 한나 아렌트, 서론(137-187) 론 펠드만2022.12.1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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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11.. 저녁 9:40

 

 

 

 

 

 

 

 

파리아로서 한나아렌트 서론

론 펠드만

 

1. 의식적인 파리아와 파비뉴

 

한나 아렌트의 삶은 20세기 어두운 시대에 펼쳐졌다

아렌트는 탁월한 정치 평론가이고 문화 평론가이다.

사상가로서 그의 목적은 우리가 격렬한 혼돈의 세계에서 사건의 의미와 방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아렌트가 서거했을 때 그는 예루살렘의 아이만 출간으로 비롯된 문제 때문에 유대인 공동체의 눈밖에 나 있었다.

아렌트의 정치 이론은 유대인 역사에 대한 그의 해석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수의 에세이들이 쓰인 지 50년도 넘었지만 여기서 다루는 쟁점들은 여전히 현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치에 의한 유럽 유대인의 파멸, 세계 유대인과 이스라엘 국가의 관계, 유대 국가의 국경선 내외에서 이루어지는 이스라엘과 아랍의 관계, 현대 서양 사회에서 유대인의 특이한 역사적 위상 등이 그러하다

 

아렌트 관점에서 볼 때 파리아 지위는 계몽주의와 해방 이후 서유럽 유대인의 위상을 특징 지운다

그들은 결코 유럽 사회에 진정으로 수용되지 않았다.

 

유대인은 150년 동안 서유럽 민족의 이웃에 속하지는 않지만 이들 가운데 삶을 영위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은 항상 사회적 영광을 위해 정치적 고통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정치적 성공을 위해 사회적 모욕으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이런 국외자의 위상은 두 가지 특별한 유형을 잉태했다.

국외자 위상을 아는 의식적인 파리야 그리고 이방인 세계에서 성공하고자 노력했으나, 유대인의 뿌리를 결코 피할 수 없었던 파비뉴 벼락 출세자다

 

의식적인 파리아는 유럽인이 일반적 삶에서 한 장소를 차지할 권리와 유대인의 특이성을 모두 주장한다.

유럽 사회와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유대인 공동체에서도 한계인이 됐다.

아렌트에 따르면 의식적인 파리아는 숨겨진 전통이다.

 

숨겨진이란 말은 파리아의 지위를 인정하는 위대하면서도 고립된 개개인 사이에 약간의 연계는 있지만 유대인 공동체에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가 없다는 의미이다.

전통이라는 말은 동일한 기본적 조건이 동일한 기본적 반음을 100년 이상 획득하고 환기시켰다는 의미이다.

 

파비뉴는 동료 유대인보다 우월 의식을 가진다

아렌트는 자신의 유대인 유산과 유럽인 유산을 모두 수용하면서도 이를 비판한 의식적인 파리아이다.

그의 지적 계획은 전반적으로 현대 세계의 유대인성이라는 문제 틀에서 형성됐었다

유대주의 특성은 점점 더욱 세속화되는 세계에서 유대인성으로 바뀌었다.

 

그의 저작은 파리아로서 한편, 자신의 유대인성과 유대인 경험 다른 한편, 현대 세계에서 자신이 겪은 유럽적이고 일반화된 인간 경험 사이에 변증법적 긴장을 특징으로 한다.

 

한나아렌트는 자신의 유대인 또는 유럽인 유산 내부 또는 외부에 배타적으로 서 있지 않기에 다른 것에 대한 비판적 통찰력을 얻는 기반으로 두 유산을 이용한다.

아렌트는 유대인성과 유대주의를 구분하면서 대담하게 유대인성을 수용하고 유대주의를 거부한다.

그는 그렇게 자기 민족 사이에서 저항자가 된다.

 

아렌트의 특이한 시각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를 숄렘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장 잘 표현한다.

 

“...제 생각에 어떤 이데올로기 여론 확신도 결코 자기 사유의 대체물로 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결과에 어떤 반론을 가지든 그것들이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것이 아닌 제것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

 

2. 유대인의 정치사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에 의한 유럽유대인의 절멸 이후 곧 유대국가 이스라엘의 건국은 세계 유대인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홀로코스트가 왜 어떻게 발생했고 결과로 무엇이 바뀌었는가를 이해하려는 임무는 홀로코스트 이후 시대 유대 사상의 핵심적인 임무이다.

 

아렌트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역사적 관계를 추적함으로써 현대 반유대주의의 근원을 이해하고자 시도했다.

파멸에 직면해 불신과 소극성 같은 반응을 초래한 유대인의 자기 이해와 세계 이해 방식을 비판한다.

 

유대인이 우발적인 희생물이라고 주장한 속죄양이론, 유대인이 불가피한 희생물이라고 주장하는 영구적 반유대주의와 달리 아렌트는 유럽 유대인 역사에 파국적 종말이 우연적이거나가 불가피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오히려 파국적 종말은 유대인 이방인 관계의 특정한 역사의 결과였다.

유대인이 정치적으로 깨닫지 못해 자신들과 적대자들의 행위의 함의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아렌트가 근대 유대인 역사의 주요 측면으로 생각하는 거다,

즉 유대인의 무세계성의 결과였다.

 

반유대주의는 19세기 이후부터 유대인 존재의 유지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유대인은 분열을 생존에 필요한 기초로 삼음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세계의 다른 부분과 완전히 분리되고 독립된 것으로 여겼다

결과적으로 유대인은 현실 세계의 조건을 모르게 됐고 새로운 기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에 닥친 새로운 위협도 인식할 수 없었다

 

샤베타의 체비의 출연은 두세기의 정점을 이루었다

유대인-이방인 관계도가 전례 없이 낮았고 카발라Kabbalah 신비주의가 인기를 끌며 크게 확산된 두 세기 동안 유대인은 자신들이 살던 정치 환경에 관여하고 이를 통제할 능력이 없어 신비 사상에 강렬히 이끌렸다

 

유대인 세계 전체를 사로잡았던 메시아 열병은 비유대인 세계에서 발생하는 특별한 사건에 기초를 두지 않은 정치 행위의 대체물로써 신비주의를 수용함으로써 형성되는 내적 동역학의 결과였다.

카발라는 세계의 메시아적 완성으로 이어지는 사건을 하느님, 하느님 민족 이스라엘과 전적으로 연관되는 사건으로 이해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현실과의 이런 대면은 유대인 사이에서 훨씬 더 메시아적인 이해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샤베타이 체비의 재앙은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못한 채 전통적 틀을 파괴했다.

결과는 전례 없는 무세계성이었다.

 

샤베타의 운동은 그가 유대 신비주의의 현실과 행위에 대한 배타적 관심으로 이해한 것을 공공영역에 드러내는 현실적인 대중적 행위로 중대한 정치 운동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다른 모든 박해가 그랬던 것보다 유대 민족에게는 더 심각한 재앙이었다.

유대인 정치 체제는 이때부터 고사됐고 유대 민족은 역사의 공적인 무대에서 물러났다

유대인이 더구나 현실주의적이지 못했으며 이전과 달리 현실적 상황을 직시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현실적 상황이란 유대인이 17세기경 세계 전반에 관여하고 잠재적인 정치 권력의 위치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궁정 유대인의 자격을 지닌 유대인과 이들을 따르는 국제 금융업자들은 절대군주정의 부상과 이후 국민국가 발전에 도구적 역할을 했다.

 

국가재정가가 되면 정치 권력을 획득할 가능성이 크지만 반유대주의자들이 이해가 빨랐듯이 유대인의 무세계적 사고방식은 결코 어느 특정 정부와 연합하지 않고 오히려 그와 같은 권위를 지닌 여러 정부와 연합하는 것이었다.

 

금권정치에 관여한 부유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권력을 행사하기보다 오히려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권위와 권력이란 특권적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 다수의 가난한 의대인에 대해 법적 차별을 유지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유대인의 정치적 관심과 인식은 결코 그들이 이전에 가졌던 유일한 정치적 목표인 생존의 추구 그 이상으로 확장되지 않았다.

 

유대인은 정부 덕택에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하고 국가를 무조건 지지하며 국가와 같이 사회나 계급 구분과 별도로 존재하는 단지 독특한 사회 집단이었다.

 

아렌트가 관찰했듯이 국가 자체와 대립한 사회의 각 계급은 반유대적 입장을 취했다.

국가를 대변하는 것 같은 유일한 사회 집단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대인은 바로 시기에 국가와 사회 사이에 증대되는 긴장을 망각했다.

정치적으로 아주 순진했다.

 

따라서 그들은 20세기의 정치적 반유대주의가 유대인의 세계 음모라는 혐의에 근거해 부상했을 때 실로 경악했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국민국가의 발전에 도구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유대인은 실제로 뜻하지 않게 국민국가 체계 유지의 과정을 지원했다.

 

부와 경제적 행운의 포화점에 이르렀을 때 오히려 자유 직업이나 순수한 지적 추구를 위해 아버지들의 직업을 포기했다.

 

유대인은 예술과 학문 분야에 많이 진출함으로써 명성에 빛나는 위력을 기반으로 하는 진정한 국제 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동화된 유대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망각했다.

유대인이 자신들의 활동으로 사회적 명성을 얻은 나머지 그들은 특정한 사회 자체의 상징이 되고, 사회가 인정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증오의 대상이 됐으며, 동시에 국가로부터 쥐꼬리만큼 보호를 받게 해준 금권 정치에 대한 관심도 잃었다

 

아렌트는 비판을 통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유대인의 무세계성은 유대인이 이전보다 공격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자신들을 보호했던 국가의 맹목적 믿음을 가졌다

그들은 이런 보호가 독특하고 필요한 기능의 수행에 기반을 두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은 정치 세계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기에 자신들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로서 신의 섭리를 지목했다.

 

시온주의는 유대인이 지금까지 발견했던 반유대주의에 대한 유일한 정치적 대답이고 유일한 이데올로기다

유대인은 이데올로기에서 자신들을 세계적 사건의 중심에 설정하고자 했던 적대감을 이제 진지하게 고려했다.

 

 

3. 정치적 시온주의

 

테오도르 헤르칠이 1897년 시온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헤르츠리 재직한 빈 신문사는 드레퓌스 사건 취재를 위해 그를 파견했다.

헤르츨은 전형적으로 동화된 유대인이었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열렬한 유대인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

 

헤르츨은 반유대주의자들이래 유대인 문제를 현존하는 정치적 위협으로 인식했고 근본 해결책으로 유대 국가 창설을 제안했다.

 

아렌트의 견해에 따르면 헤르츨은 반유대주의를 자연적 갈등으로 평가했다.

 

반유대주의는 자연스럽고 불가피했기에 반유대주의는 정하기 힘든 강제력이었고 유대인은 이 강제력을 이용하거나 이것에 휩쓸려야 했을 것이다.

 

반유대주의는 제대로 작동된다면 유대인의 유대인이 자신들의 운명을 통제하도록 인도할 수 있었다.

아렌트의 해석에 따르면 헤르츨의 정치적 시온주의는 대중 혁명 운동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세속화된 서유럽 유대인 지식인들의 신념이었다.

시온주의의 위대한 자산은 시온주의가 이후 유대인 사이에 존재했던 욕구에 응답했다는 점이다.

 

 

시온주의는 현실로 되돌아가는 행로를 제공했다.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들의 견해는 국가들로 영구적으로 구성되는 세계에서 한유대주의의 영구성을 전제한다.

유럽 유대인이 국민국가의 구성과 기능에서 담당한 역할을 무시한다.

 

그로 인해 그들의 견해는 부득이 유대인과 함께 사는 모든 이방인이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유대인 혐오자가 되어야 한다는 부조리하고 자의적인 가정으로 바뀐다

 

시온주의의 정치적 정책은 비현실주의적인 현실 정치의 정책이 되었다.

시온주의는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해결책으로써 반유대주의와 투쟁하기보다 오히려 이를 회피했다.

 

헤르츨에 고정된 현실관이 초래한 다른 결과는 모든 혁명 운동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였으며 동유럽 유대인 대중에 대한 그의 오만한 태도였다.

 

라자르는 드래퓌스 사건이 발생한 프랑스에서 살며 유대인 존재의 파리와 속성을 직접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해방되지 않은 동포들은 파리아 위상을 자동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인정한다.

해방된 유대인은 자기 위상에 대한 의식을 각성시키고 자기 위상을 알아차려 이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의 자유투쟁은 유럽의 억압받는 사람들이 모두 민족 해방과 사회 해방을 성취하기 위해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 부분이다.

 

유대인 문제에 대한 헤르츨의 해결책은 결국 조국으로 도피해 해방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라자르에게 이차적인 문제인 영토는 유대인이 한 민족으로서 국민의 형태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1차적 요구의 단순한 결과였다.

그는 반유대주의로부터 도피한 게 아니라, 반유대주의 적들에 대항해 민족을 동원하려고 노력했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추방된 유대인으로서 라자르의 경험은 아렌트 자신 경험과 아주 유사하다

 

라자르는 드래퓌스 사건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견해 때문에 공동체에서 축출되었다.

라자르는 유대인 벼락 출세자들과 맞서 싸우도록 유대인 파리아를 격려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벼락 출세자의 운명은 불가피한 파멸이었다.

 

아렌트의 시온주의는 헤르츨의 주류적인 전통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민족이 아니라 자기 민족 사이에서 혁명가가 되기를 원하는 베르나르 라자르의 반 체제적인 틀에 속한다.

 

4. 유대인 조국의 건설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의 실질적 목적은 유대인 조국의 건설이다.

이 목표는 유대 국가의 유사 주권에 결코 희생돼서는 안 된다.

시온주의자들 가운데 극소수만이 그의 견해를 공유했다.

 

이들 대부분은 수많은 팔레스타인 유대인 단체 가운데 가장 늦게 형성된 이후드Ihud 당에 들어갔다

이들의 목적은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이해와 연대의 증진이었다.

 

그러나 이중 민족주의에 대한 이후드당의 지지는 1940년대 중반 시온주의 주류의 입장에 부응하지 못했다.

 

아렌트는 유대 국가의 건설이 근동과 세계 전체의 상황이란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주장했기에 시온주의에 이런 입장 변화는 이 기간에 추진된 공식적인 시온주의 정책에 대한 아렌트 비판의 핵심이다.

 

시온주의 정치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은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 민족의 운명에 대한 깊은 관심에 근거를 둔다

수백만 유대인이 저항 없이 사라졌다는 인식은 유대인의 의식에 혁명적 변화를 초래했다.

 

유대인이 수세기 동안 지속된 무세계성의 경험을 극복하려는 욕구에서 헤르출식 시온주의에 비현실주의적인 이데올로기적 틀과 영원한 반유대주의의 교의를 파악했음은 문제였다.

 

아렌트의 시온주의는 몇가지 방식에서 비알리크와 아드아함의 문화적 시온주의와 유사하지만 그는 자신의 관점에서 고도의 정치적 이유로 이 입장에 이른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문화 종합시설을 설립하는 것은 유대 민족의 입장에서 의식적 창조의 행위이다.

 

정치 영역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삶을 통제하며 무세계성과 무기력함을 동반했던 디아스포라 이후 역사에 다시 참여하는 유대인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슈브(국가형성 이전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 그리고 이후 이스라엘 국가가 대단히 인위적인 창조물이었음을 인정해 왔다

이슈브의 위대성은 이슈브가 유대 민족에 결연한 의지의 의식적인 산물이지 유대 민족이 복종했던 어떤 자연적 강제력의 숙명적인 산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유대민족이 고토(게토?)에서 국가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목표일 뿐만 아니라 성공의 궁극적 표시라고 생각했던 시온주의자들과 달리 아렌트는 이슈브가 자신이 상상한 시온주의 목표를 이미 구현했다고 여긴다

 

아렌트의 경우 유대인 조국은 정치적 공간, 즉 유대인 문화가 존재할 수 있는 의식적인 인간의 노력으로 창조된 인간 세계다

 

이슈브는 정치적 주권도 없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다수 세력이 아니면서도 정치적 공간을 이룩했다.

아렌트 생각에 유대인 조국이란 이런 정치적 문화적 공간은 시온주의 운동의 비현실주의적인 정치적 요구 때문에 유대 국가라는 재단에서 희생됐다.

 

 

아렌트 견해에 따르면 유대 국가를 요망하는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지역 주민의 대다수가 아랍인이고 팔레스타인 자체가 인근 국가들의 수백만 아랍인들에 의해 둘러싸였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근동에 바꿀 수 없는 사실은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이웃이라는 점이다.

 

아렌트는 아랍의 정책도 팔레스타인 지역 내 시온주의자들의 필요와 구체적인 성과를 인정하지 않기에 똑같이 맹목적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아렌트가 관찰한 바와 같이 유대인과 아랍인 양쪽 입장에서 팔레스타인 상황에 대한 비현실주의 접근 방식은 영국이 두 공동체를 중재하면서 서로 분리시킨 위임 통치의 결과였다.

 

그러나 갈등의 중심에 놓인 실질적 쟁점은 아랍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국가 주권을 유지하며 아마도 확장시키려는 유대인의 결정,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의 성과를 고려하지 않고 유대인 침략자를 추방하겠다는 아랍의 결정이었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요구는 완전히 양립할 수 없으며 상호 반박할 수 없었다

 

두 주장은 자기 민족과 역사의 폐쇄적인 틀 내에서 형성된 민족주의적 정책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근동에서 유대인과 아랍인의 협력이 지역을 발전시켜 진정한 주권과 독립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렌트는 이웃 국가들과 불편한 정전의 결과 군사적 자위에 대한 관심이 다른 모든 공적 관심과 활동을 지배할 것이라는 점을 예측했다.

나라는 외부의 지속적인 위험에 위협에, 즉각 군대를 동원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대비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와 국수주의가 그러한 희생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문화적 분위기에, 즉각 스며들 것이다.

아렌트는 또한 노동 운동의 위대한 성과와 문화적 시온주의자들의 위대한 성과가 국가주의의 결과로 군사적 불안과 민족주의적 공격성이 지속되는 오랜 기간 중에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렌트는 전쟁 국가 이성과 함께 국가성이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조국에 문제 조국의 관계를 문제거리로 만든다고 주장했다.

 

아렌트가 경고한 바와 같이 헤르츨의 유대 국가는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비극적 결과는 반유대주의가 반시온주의로 변형된다는 것이다.

 

약소국이 강대국 경쟁의 주요 지역에 위치할 때 이스라엘의 운명은 디아스포라 상태의 유대인 운명과 마찬가지로 통제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인 상황에 예속될 것이다.

 

 

5. 무세계성과 원자화

 

한나아렌트는 근대에 대한 비판의 중심의 유대인과 유대인 조건을 설정했다.

아렌트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통찰력과 마르크스 비판을 모두 제시했다.

아렌트가 설명하듯이 마르크스가 생각한 자기 소외가 아니라 세계 소외가 근대의 이정표가 되어 왔다

마르크스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라는 논문에서 유대인이 근대 발전이 선두에 있으며 근대의 진정한 정신을 구현했다는 테제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마르크스는 유대인 가운데 처음으로 화폐가 현재의 보편적인 반사회적 요소라는 것을 발견한다.

 

즉 인간 세계를 원자론적이고 적대적인 개개인의 세계로 해체시키도록 유도하는 인간적 자기소외의 최고로 실천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실질적 특성은 유대인 사이에서 처음으로 비인간성을 조성하고 드러낸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유대인에 대한 고찰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밀이라고 생각한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고 그 비밀이 역사적으로 유대인 사이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경우 유대인은 사회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지 못해 곧 자신의 분석에서 부각되지 못했다.

 

아렌트의 경우 역사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사건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는 한 역사적 시기의 의미를 드러내는 예외적인 인물과 행위로 구성된다.

 

근대의 외부에서 유대인에게 영향을 미쳤던 반유대주의라는 관점과 내부에서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무세계적인 유대인 조건이란 관점에서 볼 때 유대인의 경험은 모두 근대 전체를 조명하는 예외라는 경험이다.

 

따라서 그는 근대의 특징적 현상이 처음으로 유대인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마르크스의 분석에는 동의하지만 근대가 전개됨에 따라 무세계성이란 위험한 효과가 유대인 역사에서 매우 명백히 현시된다고 믿는다

 

유대인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분리됐고 잉여적 존재가 됐다. 따라서 유럽 민족들의 파국적 패배가 유대 민족의 재앙과 함께 시작된 것은 단순히 우연이 아니다.

 

방황하는 유대인의 뿌리 뽑힘은 근대의 뿌리 상실보다 더 일찍 나타났으며 어느 다른 요인보다도 더 많이 세계에 대한 유대인의 무세계적·비현실주의적 비정치적 인식의 원인이 됐다.

 

마르크스의 분석을 반영하면 유대인은 경제의 시장 부문 금융 거래의 본질적 비현실성을 특징으로 하는 영역 내에서 삼아 살았다.

근대는 유대인이 화폐 형태의 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특징으로 했다.

공동체가 고립된 개개인으로 원자화되는 것은 동화된 유대인 사이에 가장 명료하게 보이는 과정이었다.

 

한편, 동화는 유대인 공동체의 종말을 가져다주었다

다른 한편, 유대인은 예로써만 상류 사회의 반열에 수용됐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의 일부가 되기 위해 유대인 공동체에서 이탈해 부유하는 개개인이 되어야만 했다.

 

 

유대인은 국적이나 종교에 의해 정의되는 대신 한 사회 집단으로 변화되어 왔다

이 집단의 구성원들은 어떤 심리적 특성과 반응을 공유했는데 이것의 총체가 유대인성을 형성했다.

 

달리 말하면 유대주의는 심리적 특성이 됐으며, 유대인 문제는 모든 유대인 개개인에게 관련된 개인 문제가 됐다.

이렇듯 유대인 공동체는 현실 세계로부터 소외된 결과로 격리되고 고립된 개개인으로 분열됐다.

유대인 개개인의 끔찍하고 피비린내 나는 절멸에 앞서 유대 민족의 무혈의 파멸이 있었다.

 

아렌트의 경우 유대인 공동체 파멸은 유대 전체 유럽 전체 공동체의 파멸에 선행했을 뿐이었다.

이후 결과는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대중운동의 부상과 국민국가의 파멸이었다.

 

아렌트의 설명에 따르면 계급 사회는 대중 사회에 흡수됐다.

이미 부르주아지로 전환된 시민은 이제 속물이 됐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계급에서 소외되어 부르주아 계급 자체의 붕괴로 생산된 원자화된 개인으로 바뀌었다.

 

소수 민족 특히 유대인은 이제 인종에 근거해 정치의 기초인 시민권을 선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특별한 자연 상태로 도로 빠져 들어간 국가 없는 유대인 권리 없는 민족은 시민의 권리가 없는 상태에서 인간의 권리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처음 발견한 민족에 속했다.

 

그들은 구금 수용소와 집단수용소 외에 갈 수 있는 지구상의 어떤 장소도 갖지 못했다.

무국적성은 무세계성의 근본적인 징표였으며 그것의 논리적 결론은 이 세계에서의 소멸이다.

 

세계소외는 유대인 사이에서 군대에 가장 일찍 출연한 현상이다.

세계 소외는 유대인 파멸과 함께 정점에 도달했다.

 

 

6. 아이히만 논쟁의 정치적 교훈

 

그의 주장은 유대인이 사는 곳이며 어느 곳에서든 인정받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있었고, 이런 지도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치와 동조했다이다.

비판자들은 한나 아렌트가 완전한 무세계성에 합의해 대해 보여주고자 노력하는 것을 전적으로 놓친다

 

악의 평범성은 완전한 무세계성의 논리적 결론이다.

 

아이히만이 자신이 행하는 것을 결코 인식하지 못했으며 유대인 평의회 구성원들이 대개 모반자나 비밀경찰 대리인이 아니라 여전히 나치의 도구였다는 사실은 모두 소름 끼친다

 

나치 체제는 범죄의 성격이 아닌 희생자의 선택만이 유대인 증오와 반유대주의의 오랜 역사에서 도출될 수 있었다.

유대인의 조건이 모든 사람의 조건과 연계되어 있으며 유대인에게 발생했던 것이 고립된 사례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나 나타날 수 있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한다.

 

범죄 자체가 유례 없이 유대인 특유의 속성을 지닌 게 아니라, 단지 그들에게 자행됐기 때문이다.

 

유대인 난민으로서 아렌트의 경험은 근본적 경험을 제공했기에 그는 정치적 판단의 기준으로서 세계성을 이 경험으로부터 도출했다.

그는 나치가 유대인에게 자행한 악행뿐만 아니라 유대인이 부지불식 간에 자신들에게도 다행한 악행의 위험에 놓인 세상 사람들에게 정치의 의미를 가르치고 싶었다

 

아렌트는 근대 어느 다른 민족보다 유대인에게 특징적으로 더 많이 드러난 무세계성의 조건이 우리 시대 일반화된 조건이 될 수도 있음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세계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정치적 이해를 갖지 못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행했던 것을 결코 인식하지 못했지만, 유대인은 무엇이 발생했는가를 결코 인식하지 못했다.

 

아렌트의 목적은 유대인이 의식하든 못하든 정치 공동체를 구성했다는 바로 이유로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대인에게 자각시키는 것이다.

 

유대인도 집단 행위로 발현되는 권력을 통해 세계를 건설할 수 있고 인간이 정치 영역을 유린할 때만 사회의 자연적 과정이 불가피한 결과를 생산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7. 아렌트의 유대인성과 유럽인성

 

아렌트는 자신의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자신의 유대인성을 거부하거나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의식적인 파리아의 입장을 선택했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은 아렌트의 삶과 저작을 중심으로 유대인으로서 그의 경험의 중심적 의미를 드러낸다

 

그의 정치 교육은 한 유대인, 특별히 시온주의자로서의 정치 교육이었다.

아렌트가 믿듯이 유대인 경험은 오직 유대인이 특이한 소수 민족으로 살았던 복잡한 맥락에 대한 고려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아렌트의 견해 또는 아렌트의 견해로 인식됐던 것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지속적으로 논쟁의 주제가 됐다.

그는 유대민족이 있으며 유대인이 유대인으로서 유대인 공동체의 정치에 이를 통해 세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아렌트의 태도는 그가 옹호한 특정 입장을 넘어 지속적으로 의미를 지닌다

그는 하나의 유대인 정치체, 즉 모든 유대인이 격렬한 정치적 논쟁에 참여할 내재적 권리를 가질 만큼 충분히 강력하고 자랑스럽고 안정된 공동체의 존재를 주장한다.

 

그는 여전히 한 유대인이고 한 유럽인이기에 역사 속에서 한 위치를 확보했으며 우리는 그의 삶과 저작을 한 유대인과 유럽인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The End 2022.12.11. 일요일. Be happy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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