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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대인의 삶, 1906-1975, 제롬 콘
2022. 12.4.일. 저녁 9:40
한 유대인의 삶
제롬 콘
인간의 조건은 아렌트는 여기에서 유대인, 유대인 문제, 유대인 역사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아렌트는 여기에서 십계명의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다
히브리 법전이 ...이런 매개자적 입장에서 ...이교도 시대 세계의 불멸성, 기독교 시대 또는 후기 기독교 시대 개인 생명의 불멸성과 구별해 유대 민족의 잠재적 불멸성을 강조하는 히브리 교리에 의해 밝혀질 수 있다.
그는 어렸을 때에 자신의 유대인성을 자각했다.
선생님이 반유대적인 발언을 하면 아렌트의 어머니가 관계 당국의 탄원서를 작성해 보낸다
아렌트는 처음부터 유대인이 특별하고 결코 열등하지 않음을 알았다. ‘유대인인 것은 제 경우 삶에 필수 불가결한 사실에 속하지요 ’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과 같이 자기 존재의 순전한 수동적 소여성의 요소였다.
아렌트 존재에 이런 세 가지 이미 알려진 사실
1 유대인성, 2 정신의 잠재력, 3여성을 좀 더 살펴보자
1번 사유하는 나는 세계에서 나타나고 발생하는 것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 세계로부터 이탈한다.
2번 사유하는 나는 또한 내면에서 자신과 강렬하게 대화를 하며 자신에게 다시 영향을 미친다
3번 그리고 사유하는 나는 순수한 활동에서 늙지 않고 성도 없고 특성도 없고 삶의 이야기도 없다.
사유 활동의 조건은 활동적 삶의 양상을 구성하는 조건과 전적으로 상이하며 대립된다.
사유하는 나는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동일하지 않은 하나 속의 둘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가장 내밀한 존재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랑은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나는 당신이 본래 상태로 있기를 바란다—를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사유를 통해 과거의 사유를 검증하고 사상자의 각 단계에서 사유되지 않았던 것을 제거하려는 노력으로 사상사를 통해 더욱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하이데거는 지속적이고 끊임없이 활동하는 ‘사유하는 나’가 습관적으로 질문하지 않는 모든 실체의 존재, 사유 자체의 근원에 대해 첫 번째이자 마지막인 가장 기본적인 물음을 재기하기 위해, 사람의 마음을 끄는 자력으로 제자들을 끌어들였으며 누구보다도 아렌트를 더 강렬하게 끌어들였다.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는 사유의 기원인 이해로 이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존재론적 차이는 주체-대상 구분, 이해하는 실체와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것의 분리를 넘어선다
하이데거는 가르침의 열정으로 무(no-thingness)를 노출시키며 사랑하고 가장 열성적인 제자에게 현재라는 실재, 현존하는 사물의 세계, 엄격하게 인간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역사적 시간을 경험하도록 했다.
아렌트는 학위 논문을 집필했다.
사랑의 형태— 갈망, 잘못된 욕망, 올바른 욕망, 세계를 공유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웃사랑—을 구분했다.
아렌트의 학위 논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에 대한 분석으로서 상당히 신학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하느님 사랑은 자체로 홀로 향유될 수 없으며 세계 자체를 포함한 시간적 대상들은 모두 어떤 것, 즉 자신의 미래의 삶을 획득하기 위해 제대로 사용될 수 있다.
하느님 사랑으로 세계에서 벗어난 사람은 어떻게 여전히 세계에서 살면서 어떤 것을 향유하거나 세계 속에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아렌트는 결코 대답을 제시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유대인성이다.
아마도 자신을 유대인으로 옹호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폄하하고 곡해한 재능, 즉 그에게서 완전히 박탈하려고 시도한 바로 재능에 대한 ‘감사’로 촉진된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반면에 아렌트의 여성성은 사랑의 경험으로 뚜렷하게 드러나고 그의 정신의 잠재력은 이해 활동에 완전히 나타났다
우리가 복수의 존재자로서 세계 속에서 자발적으로 행위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며 세계를 변화시키고,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인간과 전적으로 구별되며 우리가 누구인가를 드러낼 실존의 한 차원이 우리에게 있는가
무엇의 인식과 이해는 결코 같지 않다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와 논문은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나 1975년 미국에서 선거한 한 유대인 여성의 가상과 삶의 궤적을 그린다
유대인으로서 아렌트의 경험은 다섯 국면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국면 독일계 유대인의 관심
1920년대 아렌트는 처음으로 독일계 유대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 아렌트는 주로 17세기부터 독일에 사는 유대인의 지위를 이야기한다. 1812년 해방 칙령은 새로운 유대인의 존재를 독일의 정치적 삶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유대인 해방의 가능성을 유대인이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 인정될 기다려 마지않던 가능성으로 이해했다.
달리 말하면 유대인을 해방시키는 목적은 계몽주의 사고방식으로는 비유대인이 향유한 인권은 유대인에게 부여하는 것이고.
유대인의 결정론적 역사를 말소함으로써 그들의 운명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유대인이 겪은 불운한 박해와 학살의 역사는 중세까지 지속되었지만 유대인의 해방 이후로는 인류에 저지할 수 없는 진보로 기대된 미래 역사에서 가지려고 망각됐을는지도 모른다
아렌트가 최초의 낭만주의자로 인정하는 헤르더는 계몽주의 원리를 비판했다.
첫째, 유대인의 해방 둘째, 동화 유대인의 교육과 교양, 유대인의 인간화는 정치적 결정의 결과일 것이다.
이 정치적 결정은 헤르더의 생각에 자신들의 역사를 갖고 있지 못한 유대인의 경우에 공백 상태에서 발현되는 독립적인 자기 사유, 즉 계몽주의 원리와 명백히 구별된다.
유대인은 확실히 자신들의 ‘예외적’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자신들이 더 이상 하느님의 선민이 아님을 아마 실감한 역사적 민족이다.
헤르더가 살던 당시 해방된 독일의 유대인의 교양은 자신의 과거가 자신에게 ‘생소하다’는 이해를 조건으로 한다.
헤르더는 유대인에게서 그들이 물려받은 역사가 아니라 그들의 과거를 박탈한다. =공백상태?
어쨌든 선포된 지 12년도 채 되지 않아 폐지됐던 유대인의 시민적 해방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즉 그들의 사회적 동화, 독일 ‘사회’로의 통합은 실행 가능한 것 같이 보이는 정도로만 실현되었다.
유대인은 한편, 게토라는 어둡고 무세계적인 사적 영역에 격리됐고 다른 한편, 공공 영역의 빛으로 나타난 게 아니라, 사교계에서 나타났다는 점을 마음에 간직하자
또한 아렌트가 유대인 문제를 통해 인간의 권리, 추정컨대 모든 인간의 양도 불가능한 권리와 처음으로 마주쳤다는 사실을 마음에 간직하자
두 번째 국면 사회적 동화에 대한 정치적 자각
두 번째 국면은 그가 더 이상 독일 국민이 아니라는 정치적 자각이었다.
사회 동화 계획의 좌절은 전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결과, 특히 가장 기본적인 인권, 즉 노동할 권리, 향유할 권리, 가정을 가질 권리, 궁극적으로 생존권을 독일 내 유대인에게서 박탈했다.
아렌트가 1933년 부터 40년까지 파리 생활 동안 아렌트는 결코 유대인 국민국가의 건설이란 시온주의자들의 목표를 공유하지 않았는데 시온주의자들은 적어도 유대인이 자신들에게 닥친 위험에 대응해 조치를 취해야 할 긴급 상황을 알았다.
아렌트는 프랑스에서 시온주의 단체인 청년 알리야를 지원하는 일을 찾았다.
‘귀향하는 젊은이들’ 글에서 독자는 사회 노동자이며 실천적 심리학자로서 아렌트의 진귀한 단면을 포착할 수 있다.
아렌트는 1936년 하인리히 블뤼허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조국으로 생각한 이유를 밝혔다.
아렌트는 1930년대 조국에 대한 유대인 권리의 기원을 시온주의 안목 또는 야망에서 찾지 않고, 즉 대개 유대인의 입장을 수용한 1917년 벨푸어 선언에서 찾지 않고 약 20년 후 언급했듯이 유대 민족의 잠재적 불멸성에서 찾는다
아렌트는 이전에는 아니었지만 현재 유대인이 된다는 게 “나 자신의 문제가 됐으며, 나 자신의 문제는 정치적이다. 완전히 정치적이다” 라고 이후에 회고했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전략가였고 독일군 공산당의 당원이었던 블뤼허가 아렌트의 정치 교육에서 맡았던 역할은 종종 중요하게 주목된다.
“유대인은 국제적 규모에서 민족 개방 전쟁을 수행해야 해요. ”
이때 아렌트는 반유대주의가 오래 이어지는 사회 편견으로부터 이데올로기적 세계관으로 바뀌어 온 방식을 검토하는 게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이 문제를 검토하려는 아렌트의 욕구는 자신의 구체적인 정치 문제가 됐다.
아렌트는 유대인 해방이 200년 동안 인간의 자유를 위한 투쟁과 동일시됐고 더 많은 유대인이 적어도 경제적으로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보다 사회 조직에 흡수된 독일에서 하필 반유대주의가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이해하려고 했다.
1930년대 말 몇 년 동안 거의 확실히 집필했던 날짜 미상의 미완성 독일어 원고를 중심으로 편집한 논문은 그가 정치 영역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과 정치 영역에서 나타나는 독창적 정향을 직접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전체주의 기원 1951년에 출간됐을 때 아렌트는 자신이 역사 저작이 아닌 정치 저작을 집필했음을 이미 알았다.
아렌트가 언급했듯이 그는 소멸된 전례 없는 정부 형태, 즉 전체주의를 알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
반유대주의는 아렌트의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에 대한 그의 심도 있는 첫 번째 탐색은 근대 독일 역사에 나타난 전체주의의 진전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다.
한편, 중세 시대 유대인에 대한 증오의 모든 영역... 다른 한편, 근대 반유대주의 영역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모호하게 하고 역사적 비유사성을 경시하려는 수많은 지도가 있었다.
중세의 야망과 항구적인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인 우리에게 아무 희망도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유대인은 근대 독일 역사 내내 권력 정치 게임에서 거의 부득이 의도적인 노리개에 불과했다.
왕과 귀족 자유주의자들은 유대인을 이용했다.
유대인의 경제적 유용성이 소진되거나 사회적으로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됐을 때 반대 파당들은 유대인을 무시했다.
따라서 유대인은 개개인으로나 별개의 민족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개별 계급이라기보다 독일 사회 내의 신분 계층으로 간주됐다.
이 신분 계층은 아렌트가 설명하듯이 유령의 공포를 먹고 사는 부활한 반유대주의의 공격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이렇듯 반유대주의는 편견에 중독된 사회적 분위기에서 완만하게 정치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
귀족사회와 부르주아지는 군주제에 공동으로 대립했지만, 결코 연합하지는 못했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와 시민은 자신들을 뿌리가 없는 신흥부자이고 독일 국민의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세력이라고 매도하는 귀족들의 공격의 수치심을 느끼고 공격의 화살을 유대인에게 돌렸다
자유주의자들의 진정 파괴적인 자기 증언은 결국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증오는 자유주의자들과 유대인 사이의 거리를 넓히고 비록 자신들을 부르주아지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100% 부르주아지의 화신으로 강요받는 유대인에게 비방을 전가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초기에 이데올로기적 반유대주의는 다른 위치에서 부르주아지를 멸시한 훨씬 더 난폭한 계급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폭민?)
독일 사회의 모든 계급은 융커 계급의 봉건적인 주장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기만당한 채 유대인이 독일에 존재한다는 것을 공연히 미워했다.
세 번째 국면 유대 민족의 의미
아렌트는 전면전 이전에 일어난 소동들을 1941년에서 50년까지 10년 사이에 글로 발표했다.
아렌트가 뉴욕의 독일계 유대인 신문 ‘재건’에 기고한 많은 논담 가운데 첫 번째는 1941년 10월 24일 개재됐다.
아렌트는 여기에서 유대인이 비유대인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우리 유대인에 관련된 것.... 우리가 달리 택할 길은 진정 악의적인 적들과 잘난 체하는 친구들 사이에만 있는가
이 전쟁에서 우리의 자유와 명예가 쥘 로맹(프랑스인으로 유대인탈출 도운 인물)이 속한 국가의 자유와 명예 못지않게 불확실한 상태에 있음을 이해하는 협력자, 즉 진정한 협력자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가
아렌트는 유대인이 세계의 민족들 가운데 무의식적인 파리아라는 특권 계급보다 오히려 특이한 민족을 구성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를 국제적 신탁 통치로 대체하는 문제, 무국적 무국적자들의 지리 문제를 포함해 하나의 민족으로서 유대인에게 중대한 문제들을 논의하였다.
아렌트는 이 기사에서 행동하는 유대인의 동원 자체의 깃발 아래 나찌와 투쟁하는 국제적 유대인 군대의 창설을 촉구한다.
아렌트는 이런 기사를 집필 중일 때 유럽 유대인이 나치의 손에 파멸되는 것을 알았다.
아렌트는 이를 계기로 살아 있는 모든 유대인에게 행위에 참여하자고 더욱 강하게 호소한다.
아렌트의 정치적 시각은 헤르츨의 시온주의와 대립한다.
아렌트는 정치적 시온주의자들과 반정치적 수정주의자들을 강력히 대조시킨다.
이 수정주의자들은 결과적으로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 자신들이 적으로 인지하는 사람들을 협박하거나 살해하기 위해 테러 수단을 이용한다.
아렌트는 ‘재건’의 정기 기고란 ‘이것은 당신을 의미한다’는 표지 아래 유대인 개개인에게 군대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식탁에 앉아서 자신들의 차이점을 논증하는데 동참하라고 명백히 촉구한다.
아렌트는 또한 그들 자신의 의견을 부인하라고 촉구하지 않고 이것을 자신들의 다른 의견으로 사유하고 진지하게 고려하며 동료들에게 말하고 이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의견의 차이를 극복하고 유대인의 진정한 다원성을 형성하는 데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다른 민족의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유로운 민족 유대 민족의 의미는 유대인으로서 아렌트의 경험에서 세 번째 국면에 나타난다
네 번째 국민 민족과 국민의 차이에 대한 이해
아렌트는 여러 민족의 화해를 향하는 길에서 자신이 겪은 유대인 경험의 네 번째 국면을 소개하면서 민족과 국민 차이를 제시한다.
패탱이 프랑스의 모든 난민을 나치에 인도해야 한다고 요구한 독일-프랑스 협정에 조인했다.
국민국가는 더이상 법의 상태가 아니고 시민의 권리가 폐기되고 정의가 더이상 국민국가의 원리가 아니고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가 프랑스의 정책이 됐을 때 프랑스 국민국가의 토대는 붕괴됐다.
프랑스 시인 르네샤르는 혁명론의 마지막 절 ‘혁명 전통과 상실된 보물’을 특징 짓는다
아렌트는 2절에서 혁명이 아닌 저항에 대해 언급한다.
이 논문의 1차적인 주제는 나치 억압자들에 대한 유대인의 저항이다. 혁명의 목표는 새로운 국가 새로운 형태의 국가 이전 상태로의 복귀가 아닌 건설이다.
아렌트는 정확히 국가 건설을 무대 민족의 목표로 봤다.
첫째, 아렌트는 유대인이 국민을 형성할 기회를 찾았다.
유대인의 기회는 자신들의 과거의 파편을 상기시키고 다시 전 인류의 빛을 밝히는 것이다.
둘째, 기회는 유대인의 국민 지위와 주요 조건을 구현할 수 있는 국가 구조를 갖추는 것이다.
아렌트의 개념인 권리를 가질 권리는 이런 두 문제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권리가 시민권이었다면 유대인이 과거에 이따금 박탈당했지만, 어느 때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나치에 의해 박탈당했듯이 권리를 가질 권리는 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권리에 속할 것이다.
권리를 가질 권리는 시민권이 아닌 정치적 권리다
아렌트의 경우 정치란 항상 다수의 개개인에게 공통으로 관련되는 것에 대해 함께 말하고 행동하며 자신들의 결정으로 수행될 수 있는 것을 수행할 권력을 창출하는 다수의 개개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아렌트는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이 감내하고 견뎌기에 대단한 권력 잠재력을 지닌 국가를 건설할 기회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권리를 가질 권리를 행사하고 자신들의 과거에서 정의의 역할을 유념하는 유대 민족은 자신들 밑에 자체의 실존을 지탱할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을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즉 그들 자신이 자신들의 토대였을 것이다.
아렌트가 보았듯이 팔레스타인에 건설되는 새로운 국가의 구조는 유럽 국민국가의 구조가 아니어야 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유대인은 아랍이라는 대해로 에워싸인 섬이다.
아랍인과 유대인은 평화를 향한 다양한 지침을 공동으로 작성하지 않았다.
외부 국가와 단체의 외교관이 이 지침을 작성했다.
아렌트는 이미 1948년 오늘날 발생한 것을 예견했다.
그 예견은 이스라엘이 폐쇄되어 있지만, 사라질지 모르는 국경선 배후에서 호전적 국가, 즉 반(半)주권 국가가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유대인 문화는 이러한 국가에서 점진적으로 소멸될 것이다.
아랍인과 유대인이 이웃으로서 살 수 있는 권리 를 주장한 베르나도테(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조정관)는 1948년 테러단에 의해 숨졌다
현재의 이스라엘 국가는 아렌트가 구상한 이중 민족 아랍 유대 국가와 닮은 모습이 거의 없다.
아렌트는 팔레스타인에서 이런 국가의 실현을 위해 유다 마그네스(팔레스타인의 이중민족국가 옹호, 히브리대 총장)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활동했다.
두 민족 한 국가의 구조는 평의회 통치 체계 사람들이 말하듯이 전적으로 혁명적인 체계이다.
아렌트 말처럼 작은 규모의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은 지역자치적이고
혼합적인 유대인-아랍인 지방 평의회와 농촌 평의회는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해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현실주의적 정치 조치이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평의회 체계에서 배제될 타자는 없으며 권력 잠재력은 엄청나다
평의회 통치 체계의 조건은 이웃 사람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웃과의 정치적 우정에 관여함으로써 형성된다.
팔레스타인에 수립되는 두 민족 한 국가에 대한 그의 거대한 희망이 성취되지 못한 1950년 이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아렌트의 저술은 양적으로 축소했다.
그는 인간 자유의 의미 자유와 활동적 삶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성찰의 시기로 들어갔다
다섯째 국면 유대 민족의 거부에 대한 경험
다섯번째 국면은 아렌트가 자청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에 대해 보고하던 때, 즉 10년 이상 지난 이후에 나타났다.
그것은 자기 민족이 한 유대인(아이히만?)을 전적으로 부적절하게 거부한 경험이다.
결국 그는 한 인간의 얼굴에서 인간적 악의 고대적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전통적 범주나 기준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아이히만을 미치광이가 아니라 평범한 관료, 즉 나쁜 감정을 품지 않고 수백만 유대인의 살인을 효율적으로 처리한 유대인 문제 전문가로 판단했다.
피고측 변호인은 아이히만이 거대한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 없고 상급자 명령에 복종했고 히틀러 말이 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때 아렌트는 많지 않은 사람이 이후 확인한 것, 즉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이란 수많은 사람이 수 세기 동안 생각해 왔던 범주를 거부한다는 점을 혼자 목격했다.
아렌트는 상상력의 힘을 통해 아이히만의 악인 사유의 불가능성 때문에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판단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났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자행한 악을 상상할 수 없다고 꾸준히 주장했다. 이 악의 유죄 판결을 내림으로써 유대인이 자신들에게 닥쳤던 공포라는 실체에 주목하기를 원했다.
유대인이 실체를 깨달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을 위해 마땅히 주장하는 권리를 팔레스타인 사람에게는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유대인 자신들이 체험했음에도 여전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마치 잉여적인 존재인 것 같이 취급할 수 있단 말인가
홀로코스트 이후 상황은 우리 정신 습관의 재평가, 즉 진정 고통스러운 우리의 인간성을 부적절하게 만들 우려가 있을 만큼 실제로 아주 고통스러운 재평가를 요구한다.
판단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렌트의 인간적인 거부는 사유하지 않는 것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인간적인 거부를 반영한다.
가장 극단적인 악은 사유 없이 그리고 사유될 수 없어서 자행된다는 그의 판단에서 너무 많은 것이 인류에 달려 있다.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은 예루살렘의 아렌트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그는 여생 동안 그 의미를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우리가 누구인가는 항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아렌트가 30년 훨씬 이전부터 출판한 유대인 다운 저술은 아렌트 정치 사상의 범례라기보다 그러한 이념이 성장하고 발전한 경험으로 얻은 기반이다.
아렌트의 경험은 그가 유대인 또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때에도 그의 사유를 뒷받침한다.
유대인으로서 아렌트의 경험은 때로는 목격자의 경험이며, 때로는 사건의 행위자나 수행자의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은 모두 편파성의 위험을 지닌다
그러나 아렌트는 항상 판관으로서 사건을 경험했다.
판관에게 요구되는 확장된 정신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반영한다.
이 경험은 판관 자신의 경험은 아니지만, 자신의 공평한 판단이 경험의 의미를 노출시킬 수 있게 상상 속에서 경험을 재생산하는 능력 덕택에 일반화된다.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반성적 판단에서 재귀성의 완벽한 본보기인 자신의 경험을 재현 했다.
그의 경우 자신의 민족 가운데 판관과 의식적인 파리아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의 조건’에 관심을 돌려보자
모든 것에 개입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능력,
즉 인간들이 죽어야 하더라도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게 아니라,
시작하기 위해 태어난다는 항상 존재하는 암시와 같이 행위에 내재된 능력이 없었다면
죽음을 향해 달리는 인간의 수명은 불가피하게
모든 것을 파멸과 파괴로 이르게 했을 것이다.
아렌트는 이후에 그러한 사유를 지속하고 확장시킨다.
인간의 삶에 모든 역량 가운데 행위와 정신은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정하지 않은 채 우리가 생각도 할 수 없는 유일한 것들이다.
자유가 없다면 정치적 삶은 무의미할 것이다.
정치의 존재 이유는 자유이며 그것을 경험하는 장은 행위이다.
나는 그러한 진술들이 아렌트의 유대인 다운 경험에 기반을 둔다고 본다
그의 상상력을 통해 공동의 인간 세계, 즉 우리가 오늘날 사는 세계보다 중요하고 훨씬 더 현실적인 것 같이 보이는 의미와 다른 세계의 현재 상태를 보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그러한 세계가 여전히 실현되리라는 것을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자유롭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그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게 우리의 삶에서 다른 어떤 것만큼이나 가치 있음을 확신했다.
The End. 202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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