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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yth of the “Cartesian Subject”
Is this nuance decisive? The fact is that it would be difficult to find the slightest reference
to the “subject” as subjectum in the Meditations, and that in general the thesis that would
posit the ego or the “I think/I am” (or the “I am a thinking thing”) as subject, either in the
sense of hypokeimenon or in the sense of the future Subjekt (opposed to Gegenstandlichkeit),
does not appear anywhere in Descartes.
"데카르트적 주체"의 신화
이러한 뉘앙스 차이가 결정적일까요? 사실은 <사색>에서 subjectum으로서 "주체(subject)"에 대한 사소한 언급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일반적 논지 중 자아 또는 "나는 생각한다/나는"(또는 "나는 생각하는 사물이다" 중)의 주체로서, hypokeimenon의 의미에서 또는 미래적 Subjekt(Gegenstandlichkeit에 반대되는 의미로서)로서의 주체는 데카르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By evoking an implicit definition, one that awaits its formulation, and thus a teleology of the history of philosophy (a lag of consciousness, or
rather of language), Heidegger only makes his position more untenable, if only because
Descartes’s position is actually incompatible with this concept. This can easily be verified
by examining both Descartes’s use of the noun “subject,” and the fundamental reasons
why he does not name the thinking substance or “thinking thing” “subject.”
그러한 (공식화를 기다리는) 암묵적인 정의를 통해, 철학사의 목적론(의식의 지연, 또는 오히려 언어의 지연)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하이데거는 자신의 입장을 더 지지할 수 없게 만들 뿐입니다. 데카르트의 입장이 이 개념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명사 "주체"를 사용하는지를 검토함으로써 그리고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실체 또는 "생각하는 사물"을 "주체"라고 명명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를 검토함으로써 쉽게 진위를 따질 수 있습니다.

철학사의 목적론이 왜 여기서 환기되는 것이며, 목적론은 왜 하이데거의 입장을 지지할 수 없게 만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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