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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_1982년 2월 3일 강의_윤명_샘.hwp


[전반부]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적 주석: 프로클로스와 올림피오드루스(201~206)

질문: 왜 주석자들이 보기에 플라톤의 저작에서 일반적으로 그다지 큰 중요성이 없는 <알키비아데스>의 대화편을 택했습니까? 플라톤을 논의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고대철학의 주요한 부분을 조망하기 위해 왜 이 대화를 지표로 삼는 것입니까?

고대의 문화·사유·철학에서 대체적으로 2세기부터 신플라톤주의가 대대적으로 회귀한 이후에 상당수의 문제들이 제기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플라톤 저작의 체계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플라톤 저작의 편집 문제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프로클로스와 올림피오도루스는 내가 출발점으로 취했던 <알키비아데스>의 대화에 부여해야 할 위상에 대해, 둘 모두가 이 대화편을 플라톤 저작을 선두에 놓아야 하고, 또 이 대화를 통해 플라톤이나 플라톤주의의 연구와 일반적인 철학 연구에 착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했습니다. 거기엔 세 가지 원칙이 있는데, <알키비아데스>는 플라톤 철학의 요약입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철학적 실천의 일차적인 조건으로 철학 내에 처음으로 엄숙하게 gnothi seauton(자기 인식)을 도입합니다. 둘은 <알키비아데스>에서 정치적인 것과 정화적인 것 간의 분리가 처음 발생하는 것을 봅니다.

플라톤 저작의 분류에 관한 5세기 프로클로스의 텍스트를 보면 헬레니즘 시대와 제정기 그리고 고대 후반기 동안의 교육 및 철학의 보급과 상응하며 뒤늦게 도입된 결코 플라톤주의에서 볼 수 없는 구분이 발견됩니다. 철학은 논리·도덕·자연에 관한 연구, 신학 혹은 신성한 것에 대한 담론과 같은 근본적인 4요소 사이에 분배됩니다. 따라서 프로클로스는 이 4요소가 <알키비아데스>에 사실상 분산되어 있고, 또 현존함과 동시에 은밀히 감추어져 있지만 모든 요소들은 그것들의 원리가 되는 바, 즉 자기로의 회귀에 입각해 존재한다고 가정합니다. 이같은 철학의 요소는 우리 자신에로의 최초의 회귀를 통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 자신으로 돌아갑시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의식합시다. 그러면 이 회귀를 통해 철학적 사유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기 시작할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성한 잠블리코스는 그가 보기에 플라톤 철학 전반이 담겨 있는 10편의 대화 가운데 선두의 자리를 <알키비아데스>에 부여했다고 생각된다.“

올림피오도루스는 <알키비아데스>를 플라톤 철학의 입구로, <파르메니데스>를 심장부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올림피오도루스는 지극히 명시적으로 <알키비아데스>에서 공식화된 너 자신을 알라를 모든 철학적 지식의 토대일 뿐만 아니라 철학하고 하는 사람의 실천의 모델로 만들어 버립니다. “소크라테스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실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재생산해야 한다고 그는 단언합니다. 이 두 명의 텍스트를 를 통해 우리는 정치적인 것과 정화적인 것의 구분의 문제에 이르게 됩니다. <알키비아데스>에서 너 자신을 알라의 원리를 제기하면서 우리는 정치적 요소와 다른 한편으로 상당수의 실천들에 호소하게 되는데 그것을 통해 주체는 자기 자신을 정화해야 하고, 또 그 절차들을 통해 자신의 본성 안에서 신성한 요소와 접촉하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알키비아데스>는 이러한 분기점에 놓입니다. 올림피오도루스에 따른 계열은 정치적 계보의 측면에서 <알키비아데스>-<고르기아스>의 계열이 있고, 정화적 측면에서는 <알키비아데스>-<파이돈>의 계열이 있습니다.

신플라톤주의적인 전통에서는 정화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는 일정한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플라톤에 있어서는 정화의 절차와 정치적 절차 사이에 구조상의 차이가 없는 반면에, 신플라톤주의의 전통에서는 이 두 경향이 분리되었고, 또 정치적 목적을 갖는 자기 인식의 용례와 정화적 목적을 갖는 자기 인식의 용례는 이제 더 이상 일치하지 않으며 선택해야 할 갈림길을 구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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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것과 정화적인 것의 신플라톤주의적 분리(207~208)

첫 강의에서 언급했듯이, 알키비아데스가 자기 자신을 배려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도시국가를 위한 선이 무엇인지를 몰랐고, 또 그와 동시에 시민들의 화합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적절히 도시국가를 통치하고 시민들을 돌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나 자신을 돌보려고 한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dikaiosune(정의)를 배려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알키비아데스> 전반에 걸쳐 자기 배려는 타자에 대한 배려와 관련해 명백히 도구적입니다. <향연>에서의 알키비아데스 속에서 그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으며 그가 소크라테스의 교훈에 매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경청하지 않았던 것을 한탄하고 후회합니다. “내가 결여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자신을 계속 돌보지 않고 아테네인들의 일만을 돌보았다.” 그는 <알키비아데스>에서 dikaiosune(정의)를 배려의 중심에 놓고 시민들을 돌보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를 하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는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시민을 돌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dikaiosune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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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 있어서 자기 배려와 타자 배려의 관계에 대한 연구: 목적, 상호성, 본질적인 내포(208~209)

플라톤에 있어서 정화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서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혹은 차라리 그것은 동일한 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세 가지 방식에서 그러합니다. 자기 배려와 타자의 배려 간에는 목적 관계가 존재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타자를 돌볼 수 있기 때문에 타인들을 돌보기 위해 나 자신을 돌본다는 말이지요. 상호성 관계가 있습니다. 자기 배려는 도시국가의 구원에서 그 보상과 보증을 발견합니다. 도시국가가 구원됨에 따라, 또 자기 자신을 돌보며 도시국가가 자기 자신을 구하게 만들면서 자기 자신도 구원됩니다. 본질적 내포 관계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보면서, ‘자기 정화를 실천하면서 영혼은 자기 자신인 바를 발견하며, 또 자신이 기억의 형태로 명상한 바를 발견합니다. 영혼은 이렇게 기억 행위 속에서 다시 엄정하게 도시국가의 질서를 기초하는 제 진실에 대한 명상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보시다시피 플라톤에게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정화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으로 명명하게 될 바를 견고히 연결시키고 고정하는 세 방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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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와 2세기의 상황: 자기의 자목적화(209~210)

하지만 1세기와 2세기에 위치하게 되면 양자의 분리는 아주 폭넓게 진행됩니다. 배려되는 자기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 한 요소가 아닙니다. 배려해야 하는 자기는 그 자체로서는 연결점이 더 이상 아닙니다. 자기는 배려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목표가 됩니다.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에 집중된 행위이고, 그 귀결과 완수 그리고 만족을 오직 자기 내에서, 즉 자기 자신에게 가해진 행위 자체 내에서 찾습니다. 배려의 대상인 자기에 대한 절대화가 존재하고, 또 동시에 소위 자기 배려에서 자기에 의한 자기의 자목적화가 존재합니다. 이 현상은 두세 가지 이유 때문에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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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개종의 원리에 따르는 철학적 삶의 기술, 자기 수양의 발전(210~213)

철학 자체에 있어서 이 현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견유학파 이후로 철학은 더욱더 자신의 정의(定義)와 무게중심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즉 숙고된 삶의 기술 혹은 절차를 중심으로 목표를 고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배려의 대상이고, 또 그래야 하는 것으로 단엄됨에 따라 생활의 기술과 자기 배려 간에 더욱 동일시가 현저해집니다. 이는 분명히 여러 결과를 발생시킵니다. 우선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에 진리에 대한 사유인 철학이 더욱더 현저하게 주체에 의한 자기 존재 방식의 변형인 영성에 점차적으로 흡수되어 버립니다. 진정한 철학은 자기 자신의 테크닉이 되어 버린 tehne tou biou의 노선 내에 위치합니다. 여기로부터 결국 서구철학은 그 역사 전반에 걸쳐 주체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 방식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가?”의 문제로부터 어떻게 그리고 어떤 조건하에서 진리를 사유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완만히 이탈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자기 배려에서 자기의 자목적화는 단순히 철학 안에서만 결과를 발생시킨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자목적화는 일련의 실천과 일련의 생활 양식,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경험의 방식과 연관된 보다 더 광범위한 결과를 발생시켰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사용하게 될 용어와 마주치면서, 그 용어에 많은 아이러니한 괄호를 치면서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부터 자기 수양의 진정한 전개가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soi)가 실제적으로 고대 헬레니즘 세계의 전통적 가치의 장을 조직하고 재조직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는 보편적 가치로 등장하지만 사실상 소수의 사람들만이 접근 가능합니다. 자기 접근은 상대적으로 잘 구축되고 성찰된 다수의 테크닉 및 절차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자기 수양이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체와 진실이 맺는 관계의 역사를 자기 수양의 틀 속에 삽입하지 않고서는 기독교 내에서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와 17세기 일련의 변모와 변형을 겪게 될 주체성의 역사를 결코 기술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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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관념의 종교적 의미(213~214)

지금까지 나는 이 자기 수양, 즉 자기 실천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지금부터는 행실들의 요구 사항과 그와 연관된 기술적 이론과 더불어 조직된 가치의 장인 자기 수양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물음을 먼지며 보다 일반적인 문제를 다시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 수양에서 대단히 중요한 한 요소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먼저 논의해야 할 문제는 구원 개념입니다. 플라톤에서는 타자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 합니다. 반대로 이 개념이 기원후 1세기와 2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외연과 적용 영역이 무한히 확장되지만, 지극히 특수한 가치와 구조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의 세 요소-이원성, 사건의 극적인 속성, 두 항을 갖는 활동-를 통해 우리는 구원을 항시 종교적인 관념으로 간주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 가운데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그 기원이 무엇이든간에 이 구원 개념은 실제적으로, 또 이질적이지 않게 철학의 장내에서 철학적 개념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철학적 실천과 철학적 삶의 목표가 되어 버렸고 목표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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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teriasalus의 의미(214~218)

여러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Soezin 동사나 실사인 soteria(구원)는 그리스어에서 여러 의미를 갖습니다. 여러 의미에 입각해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는 의미의 측면에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죽을 운명으로부터 불멸성으로, 악에서 선으로 실존을 변화시키게 해주는 사건의 극적인 속성에 상당하는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어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Soteriasozein은 훨씬 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 구원이라는 용어는 생활 이외의 다른 것을 지시하지 않습니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텍스트 내에서 발견되는 구원 개념에서 죽음이나 불명성 또는 저승 세계와 같은 것에 대한 참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극적인 사건이나 다른 실행자를 참조하면서 자기 자신을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구제하기는 평생에 걸쳐 전개되며, 그 유일한 실행자는 주체 자신입니다. 그리고 이 자기 구제행위가 그 목표나 목적인 최종적인 결과에 이르게 된다면, 그 결과는 이 구원을 통해 불행이나 동요 등 사고와 외부적 사건에 의해 영혼 내에서 초래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초연하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아타락시아(동요의 부재, 그 무엇에도 동요하지 않게 만드는 자기 제어)와 아우타르케이아(자기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 같은 두 주요 테마는 구원, 평생 동안 수행된 구원 행위가 그 보상을 받게 되는 두 형식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항구적 행위입니다. 구원은 자기로 폐쇄되는 세심하고 연속적이며 완수된 자기 관계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를 구원하고, 자기에 의해 자기를 구원합니다. 오직 자기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구원합니다. 우리는 플라톤의 도시국가에 의해 매개되는 구원과 기독교 내에서의 구원과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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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

자기에 대한 배려와 타자에 대한 배려: 관계의 역전(224~225)

자기 구원과 타자의 구원은 완전히 단절된 것일까요? 신플라톤주의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정치적인 것과 정화적인 것이 결정적으로 분리된 것일까요? 적어도 1세기와 2세기의 사유 형식 내에서는 분명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화적인과 정치적인 것 간의 단절보다는 관계의 역전이 오히려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또 우리 자신을 위해 자기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타자의 구원은 집요하게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구원 행위와 활동에서 추가로 얻어지는 보상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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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주의의 우정 개념(225~228)

에피쿠로스는 우정을 찬양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정을 항시 유용성으로부터 파생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티칸 금언> 23 “모든 우정은 그 자체로 인해 바람직하다. 하지만 우정은 유익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에피쿠로스주의의 우정이 자기 배려의 한 형식과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이 자기 배려가 유익성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정은 유용성에서 시작된다고 에피쿠로스는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출발한다 해도 우정은 그 자체를 위해 선택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바티칸 금언> 39에 나와 있듯이, 우정은 유용성 제거를 통해서가 아니라 역으로 유용성과 유익성과는 다른 무엇간의 일정한 균형을 통해 그 자체로서 바람직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바티칸 금언> 34는 우정은 복락에 속하기 때문에 바람직하다고 말합니다. 우정이 속한 복락이란 세계로부터 올 수 있는 고통에 대항해 우리가 가능한 한 보호받고, 또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는 복락입니다. 지혜는 영혼을 makariotes(복락) 속제-아타락시아에 의존하는, 동요 없는 평정 속제- 설정하기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친구들과 이들의 우정에 부여하는 신뢰 속에서 아타락시아와 동요의 부재의 증표를 확보한다는 한에서 지혜는 친구들로 둘러싸입니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주의의 우정 개념은 우정에서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정은 전적으로 자기 배려에 속하며, 또 자기 배려를 통해 친구를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우정으로부터 얻는 유용성과 또 결과적으로 우리가 친구들에게 기울이는 우정으로부터 그들이 끌어내는 유용성을 자기 자신을 위한 우정의 추구 내에서 부가적인 것입니다. 이같은 상호 관계는 자기 구원과 자기 배려의 일반적 목적 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플라톤에 있어서 타자를 위해 자신을 돌보아야 하고, 또 도시국가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 내에서 타자가 나의 구원을 확보해 주는 것이라고 말하며, 내가 앞서 논의했던 플라톤주의의 상호성이 역전된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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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스토아주의의 인간 개념(228~232)

에픽페토스를 예로 들어 보죠. 공동체적 개념은 자연적 수준인데 그것은 섭리적인 관계 개념입니다. 에픽테토스 <어록> 1<열아홉번째 대담> “제우스 신은 공동의 유익을 유발시키지 않는 어떤 특수한 선도 얻을 수 없도록 합리적 동물의 본성을 장치해 놓았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은 반사회적인 것이 아니다.” 에픽테토스는 유용한 것이나 각자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에 대한 이기적인 추구와 타자를 위한 유익한 행위의 관계를 설정합니다. 이 관계는 엄밀한 의미에서 합리적인 존재와 인간 존재가 문제시될 때 그 순서가 바뀌게 됩니다. 그 순간 이 관계는 반성적 수준에 놓이게 됩니다. 동물과는 다르게 인간은 자기를 돌보아야 하는 일을 면제받을 수 있는 이점들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게 제우스가 만들어 놓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달리 말해서 인간은 합리적인 자신의 본성을 완성하고 동물과 자신을 대립시키는 차이를 완결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배려의 대상으로서 삼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kathekonta(임무)나 그 proegmena(행위)의 범주에 따라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에 속하는 바와 그렇지 않은 바가 무엇인지를 잘 분석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잘 돌보아서 그 결과 자신의 표상에 어떤 것이 나타날 때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잘 알게 되고,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이 인간 공동체에 속한다는 한에서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아들·남편·시민 등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고, 이는 바로 그가 자기 자신을 돌보기 때문입니다. <어록> 2편의 열네번째 대담을 살펴보면 에픽테토스는 가족의 사랑은 자연적인 요소라고 주장하며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적이라고 말합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한 가족 안에서 개인들의 관계를 지배하는 원칙들에 따르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이 때문에 중병에 걸린 딸을 간호하지 않고 부리나케 도망을 친 아버지를 이와 같이 비난합니다. “너는 네 딸을 배려하기 위해 네 자신을 배려하는 것을 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네가 저 자신을 돌보았다면, 너 자신을 합리적인 개인으로 생각했다면, 네 딸의 병과 관련해 정신에 떠오르는 표상들을 점검했다면 네 자신이 무엇인지, 네 딸이 무엇인지, 너와 네 딸 간에 설정되는 관계의 속성과 토대가 무엇인지를 점검해 보았다면 딸에 대한 정념과 애착에 의해 동요되도록 너를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는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가 무엇이었는지를 구별했을 것이다. 너는 그녀를 돌보았을 것이다. 너는 skholastikos, 즉 학교에 와서 네 의견을 체계적으로 시험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결론짓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구체적인 예를 통해 실제로 타자를 배려할 수 있는 행동을 그 자체로서, 또 결과로서 생산하고 촉발시키는 것은 자기 배려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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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그릇된 예외(232~236)

군주는 역설적인 인물이고, 일련의 성찰 속에서 중심적인 인물이며, 비범하고 자기 존재 전반을 구축하는 권력을 타자에게 행사하며 보통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자기 관계와 타자 관계를 원칙적으로 맺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여러 군주 중 자신이 황제여서 그가 타자 배려자기 배려를 이해하던 방식이 거기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텍스트에 주의를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그의 <명상록>이라 불리는 텍스트에서 황제의 권력 행사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는 타자들에 대한 행동의 규칙으로서 군주와 평범한 사람과 절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규칙들을 제안합니다. 군주가 되려는 자의 행동의 일반 원칙은 군주 임무의 특수성과 상당수의 직분, 특권, 임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자신의 행동으로부터 소거하는 데 있었습니다. 자신이 카이사르와 같은 자인 걸 잊을 필요가 있고, 또 스스로가 평범한 사람으로 행동하는 한에서만 그의 일과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카이사르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아침에 의식 점검을 하는 구절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아시다시피 스토아주의와 피타고라스주의의 의식 점검은 두 형태와 두 시기를 갖습니다. 한편으로 했어야 할 바를 척도로 하여 하루에 한 일들을 평가하기 위해 밤에 그것들을 기록하는 점검이 있고, 아침 점검에는 반대로 해야 할 과업을 미리 준비합니다. 이 점검에 대해 그는 나는 모든 사람이 할 일이 있다고 상기한다. 나 역시 그렇게 해야 되고, 또 내가 해야 할 일은 타인의 일보다 중요한 까닭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속성의 차이나 특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유형의 직업에 동일한 하중이 있을 뿐이며 단지 양적으로 부가적인 무게가 더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서 이후 유럽의 군주제와 특히 16세기 군주제의 문제화 내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갖게 될 문제가 출현함을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그것은 그 도덕적 구조나 근본 원리가 모든 직업 활동의 근본 원리가 되는 임무로서의 지고성의 문제입니다. 황제라는 관념은 임무를 부과할 뿐만 아니라 이 임무들이 자기의 임무에 대해 만인이 갖는 도덕적인 태도에 입각해 다루어지고 수행되고 실행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에 입각해 제국과 공국은 직무와 직업이 됩니다. 그 이유는 실존의 목적이기도 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일차적인 목표, 그가 지향해 나가야 하는 목표점은 황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가 자기 배려를 하고 부단히 자기 자신을 돌봄에 따라 그는 황제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일련의 배려와 만나게 됩니다. 황제는 자기 자신을 배려해야 하기 때문에 황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라고 하는 보편적 목적에 속한다는 한에서 절대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임무와 만나게 될 것이고, 또 그것을 수행할 것입니다. 제국, 군주권은 특권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분으로부터 결과되는 바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일과 별다르지 않은 임무, 과업입니다. 둘째로 이 일은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황제의 경우에는 그의 특권과 특수한 사명이 아니라 자연-그가 만인과 공유하는 인간의 본성-에 의해 규정되는 도덕적인 정직성이 그의 행동의 토대를 이루어야 하며, 결과적으로 그가 타자를 배려하는 방식을 한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시선을 뒤로 돌리지 않고 이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도 우회해서는 안 되는 인생의 목표를 단번에 결정적으로 고정시킨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 그의 목표는 자기 자신입니다. 따라서 자기 배려와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노력으로서의 자기와의 관계 내에서 황제는 자신에게 선을 행해야 하고, 또 타자를 위해 선을 행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배려하면서 필연적으로 그는 타자를 배려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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