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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1982.2.10. 강의 / 푸코 / 2016.05.29.(일) /닥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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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29 19820210 주체의해석학 푸코 닥홍.hwp
교육과 정치 활동과 관련한 자기 배려의 이중적 변화에 대한 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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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실천은 청소년이 성년과 정치 활동에 입문하는 시기에 부과되는 계율이기보다 실존 전반에 전개에 유효한 지상명령입니다. 자기 실천은 생활의 기술과 동일시됩니다. 자기 실천은 다양한 사회 관계망과 섞이고 착종됩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를 배려 합니다. 이와 같은 자목적화속에서 구원 개념이 기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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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자목적화에 대한 은유
지금까지 내가 논의한 모든 분석의 기저에 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급선회라는 중요한 이미지였습니다. 팽이는 외관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항시 운동 중에 있습니다. 팽이의 운동과 비교해 지혜는 외부 운동에 자극에 의한 무의지적인 운동을 초래하도록 자기 자신을 결코 방치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의 중심부에서 고정 지점과 부동 지점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를 향해서 자기의 중심을 향해서 자기의 중심 내에서 자기의 목표를 고정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운동은 결정적으로 부동하기 위해 중심으로 회기하는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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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 도식의 발명 ; 자기로의 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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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기의 이미지들을 우회하여 전향이라는 말래 접근할 수 있습니다. epistrephein pros heauton(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기)라는 표현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서 규칙적으로 나타납니다. 전향 개념을 기독교적인 개종 내에서만 그 중요성을 가늠해보고 측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향 개념은 현란하고, 소위 극적인 방식으로 19세기부터 정치적 실천과 경험 활동에 유입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신화-역사적인 최초의 사건과 관련하여 혁명으로의 전향이라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의 도식을 규정하기 시작했다고 생각됩니다. 전향이 혁명 정당에 있음으로 유효하고 동화되고 소거된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와 동시대인의 경험에서 사람들은 혁명의 포기 쪽으로 전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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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epistrophe와 이것이 자기로의 전향과 맺는 관계
우리는 플라톤 epistrophe 개념의 형태를 갖는 전향 개념을 발견합니다. 플라톤의 epistrophe의 특징은 무엇으로부터 우회하기, 자기로 되돌아가기, 상기를 실증하기, 본향으로 돌아가기입니다. 플라톤의 epistrophe는 첫째 이승세계와 저승 세계의 근본적 대립에 의해 작동됩니다. 둘째 육체로부터 영혼의 해방과 해탈에 의해 작동합니다. 셋째, 인식의 특권에 의해 작동합니다.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진실된 바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인식의 근본 형식인 상기 행위 내에서 이 상이한 요소들이 서로 관계를 맺게 됩니다.
헬레니즘 로마시대에 발견되는 전향(conversion)은 플라톤의 epistrophe처럼 이승 저승의 대립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헬레니즘 로마시대의 자기수양에서 문제가 되는 전향은 우리의 소관이 아닌 바로부터 우리의 소관인 바 쪽으로 우리를 이동시킵니다. 결국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내재성의 축을 중심으로 우리가 주인이 아닌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전향이 육제로부터 해방되는 양상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와 자기의 완벽하고 완결적이며 적절한 관계 설정의 양상을 띤다는 점이 결론적으로 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전향의 또 다른 특성으로 귀결됩니다. 결국 전향은 내 신체의 휴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의 조응에서 이루어집니다. 또 큰 차이점은 인식이 플라톤의 epistrophe에서 핵심적인 반면 se convertere ad se(자기에로의 방향 전환)의 절차에서 연습, 훈련, 절차와 같은 askesis(자기 수련)가 핵심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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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metanoia와 이것이 자기로의 전향과 맺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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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기독교에서 발달하게 될 metanoia(개종) 개념과 관련지어 헬레니즘 시대의 전향 개념의 위치를 설정해보고자 합니다. metanoia 는 고해성사와 사유와 정신의 급격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개정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내포합니다. 단번에 변형시키는 역사적이고 동시에 메타 역사적인 단일하고 갑작스러운 사건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체 내부에 단절이 존재할 경우에만 개종이 있을 수 있습니다(245).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버려서 자신의 존재나 존재 방식에 있어서나 자신의 습관이나 ethos에 있어서도 이전의 자기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새로운 형태 내에서 태어나기가 기독교 개정의 근본요소입니다.
헬레니즘 로마의 자기수양에서 자기로의 방향전환(conversion ad se, epistrophe pros heauton)과 기독교 개종이 완전히 다릅니다. 첫째 여기엔 단절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절이 일어난다 해도 자기 내부에서 발생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바와 관련한 단절입니다.
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전향에서 주시해야 할 바는 바로 자기라는 사실이 기독교의 개종과 대립되는 전향의 두 번째 테마입니다. 자기 자신을 목전에 두고 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목적지로 가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눈의 활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존재 전반의 활동입니다. 자기가 사전에 이미 주어졌기 때문에 되돌아가야 할 곳인지, 아니면 자기는 정해진 목표이고 또 지혜에 도달하면 접근이 가능하게 되는 어떤 목표인지가 분명치 않고 확정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됨에 따라 전향 개념과 실천, 실천의 도식간의 긴장을 드러내는 문제입니다. 자기 실천에는 근본적으로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도달 지점, 완결 지점을 특징짓는 상당수의 관계를 되돌아가야 하거나 지향해야 하는 자기와 설정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와의 관계는 태도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영예롭기 하기 등. 관계는 상태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주인이고 자기 자신을 소유하며 자기 자신을 자기에게 귀속시킵니다. 여기서 전향은 자기로 향해 가는 활동, 자기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는 활동, 자신을 결정적인 목표로 고정시키는 활동, 궁극적으로는 자기에 도달한다거나 되돌아가는 행위로 규정됩니다. 개종이 자기 내에서의 단절과 변동의 형태를 가진 타동 주체화(trans-subjectivation)이라면 기원후 초기 철학에서 전향은 능동 주체화(auto-subjectivation)라 부를 수 있는 연속적인 절차입니다.
결과적으로 전향은 기독교의 개종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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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noia의 고대 그리스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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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가치와 함께 자기 단절, 자기 개혁을 의미하는 metanoia는 시기적으로 뒤늦은 텍스트 내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metanoia는 비합리적인 모든 행위와 담론으로부터 도주입니다. 그것은 후회 없는 삶의 최초의 준비입니다. 주체의 존재의 변화, 동요 변형, 후회없는 인생에 이르는 길을 의미하는 metanoia 관념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연구하려는 영역 내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epistrophe와 기독교의 metanoia(새로운 의미를 갖는 metanoia)사이에 위치하게 됩니다.
피에르 아도의 텍스트를 참조하면 그는 epistrophe와 metanoia라는 두 종류의 중요한 전향의 모델이 서구철학에 존재한다고 단언했습니다. epistrophe는 영혼이 자신의 원천으로 귀환하는 것을 함의하는 전향 개념과 그 경험, 영혼이 존재의 완벽을 향해 회귀하는 운동, 영혼이 존재의 영원한 운동 내에 다시 위치하는 운동이라고 피에르 아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metanoia는 정신의 동요, 혁신이 문제시되며 그 중심에 자기 자신의 경험과 자기 자신에 의한 자기 자신의 포기인 죽음과 부활을 수반하는 주체 자신에 의한 자기의 재생산이 문제입니다. 피에르 아도는 epistrophe와 metanoia 이들의 대립을 서구 사상 영성 철학 내에서 항구적인 양극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고대 내내 전향 테마의 여정을 추적해 보면 두 모델이나 도식을 플라톤 시대부터 기독교에 이르는 시기에 발생한 바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설명과 분석의 틀로 내세우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epistrophe도 아니고 metanoia도 아닌 전향을 두 방식으로 연구하고자 합니다.(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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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변환 : 호기심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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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시선의 전향 문제를 연구하고자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가 어떻게 설정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너 자신에게 시선을 돌려라라는 명령적 정언이 함축하는 바는 주체의 자기 인식인 것 같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에픽테토스,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기 자신을 응시해야 한다고 말할 때 어떤 종류의 앎이 문제가 될까요?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명령을 받을 때 시선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가?(254) 우선 타자들로부터 시선을 해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은 세계의 사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호기심에 관하여>라는 플루타르코스의 텍스트에서 흥미로운 은유를 발견합니다. 도시는 나쁜 환경에서 건축되어서 도시를 전적으로 이전할지 재정비할지 방향 설정해야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시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집의 은유를 반복하며 집안의 창문이 이웃으로 향해선 안되고 감시가 자신을 향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타자에 대한 인식이나 타자에 대한 불건전한 호기심을 자기 자신에 대한 좀 진지한 검토로 대체하는 것이 문제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타인들에게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신경 쓰는 것이 훨씬 낫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호기심은 알려는 욕망이라기보다 경거망동을 의미합니다. 호기심을 정의한 philomateia allotrionkakon은 타자의 불행한 소식을 알려는 욕망과 그것으로부터 오는 쾌감, 타인이 잘되어 가고 있지 않은 데에 대한 관심, 타자의 결점에 관심입니다. 그래서 플루타르코스는 반대로 타인들의 과오에 신경 쓰지 말고 너의 과오에 신경 쓰라고 합니다. 타자의 불행보다 더 유쾌한 것 쪽으로 영혼의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 역사, 농촌으로 은거하면 편안함을 취하기 세 영역을 탐구하라고 합니다. 호기심에 반대하는 수련으로 기억훈련을 제시합니다. 개처럼 앞을 보며 산책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타자에 대한 악의적이고 사악하고 적대적인 시선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관찰해야 하고 유지해야하는 곧은 행보 내에서 자기 자신에 몰두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주체는 집중 훈련을 통해 자신의 모든 활동과 주의를 자신의 목적으로 이끄는 긴장을 향해 되돌러야 합니다. 자기에 대한 목적론적 집중이 문제입니다. 해독해야 할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 경계, 주의할 대상은 목표와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는 바, 자기 자신과 목표를 분리시키는 거리입니다. 사유해야 하는 바는 물론 육상선수들이 하는 것과 같이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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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 이론의 틀 : 진실 말하기와 주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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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으로 시선을 돌리기 위해 세계의 사물에 대한 시선으로 벗어나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해보고자 합니다. 그 문제는 진실 말하기와 주체의 실천 간에는 어떤 관계를 설정할 수 있고, 그 관계는 어떻게 고정되고 정의될 수 있을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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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세계에 대한 앎과 자기 실천: 데메트리우스의 예
자연에 대한 인식, 자기에 대한 인식간의 관계가 관련된 문제에 대한 견유주의 운동 혹은 견유주의자들의 입장은 보기와 달리 복잡합니다. 데메트리우스는 귀족사회의 적응한 견유주의자입니다. 그는 마음속에 항시 육상선수의 이미지를 모델로 간직해야 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실전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몸짓만을 아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리고 항시 이 몸짓들을 사용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에 이 몸짓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잘 인식한 이 몸짓을 숙달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델에 입각해 유용성의 기준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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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우스에 있어서 유용한 인식의 특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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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우스가 알 가치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구분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식이 불필요한 사물은 해일의 원인, 인생에 운을 부여하는 7년 주기 리듬, 별자리 등인데 이것은 먼 세계의 아득한 사물은 아닙니다. 인간의 실존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그들을 무용한 것으로 만드는 바는 원인에 입각한 지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이 사물의 원인을 인식하는 것은 무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사물의 발견은 발견 이상의 다른 결실을 갖지 않습니다. 지혜가 제공하는 안전한 지대로 영혼이 은둔한 상태에서 기분전환의 자격으로 또 단지 발견 그 자체에 존재하는 쾌락을 발견하기 위해, 그 원인을 단지 부수적으로 찾으려 할 경우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교양의 즐거움이고 부가적 장식적 즐거움입니다.
알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에 대해 겁낼 바가 거의 없고, 신들을 전혀 무서워할 필요가 없으며 죽음은 결코 어떤 병도 발생시키지 않고 덕에 이르는 길은 발견하기 쉬우며, 인간은 공동체를 위해 태어난 사회적 존재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만이 문제이며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바만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누구는 무엇인가와 같은 앎의 방식을 관계적 앎이라고 말합니다. 인식해야 할 바는 주체와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의 관계들입니다. 진리로 주어진 바가 곧바로 계율이 될 수 있는 그런 방식이 알아야 할 바 아니 차라리 알아야 할 방식입니다. 결국 그것은 소유하자마자, 획득하자마자 주체의 존재 방식을 변형시키는 지식입니다. 이 앎을 통해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이 앎 덕분에 자신을 타자보다 존중하며 푹풍우로부터 벗어나 영구적인 평정 속에 자신을 정착시킬 수 있습니다. 교양의 장은 명령적 정언으로 변형 불가능한 지식이고, 정언적 관여성을 결여하고 있는 지식입니다. 그것은 알게 되는 경우 주체의 존재 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앎입니다.
다른 철학학파들에서도 재발견되는 지식과 진리에 관한 윤리의 일반적 특질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신, 세계, 인간에 대해 알고 인식하는 방식상에서의 구분이며 이것은 자연에 대해서도 효력을 갖습니다. 내가 의미하려는 바는 이 구분이 행위하는 방식, 즉 주체의 ethos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개읜의 존재 방식, 실존의 방식 만들기, 생산하기, 변형하기를 의미하는 어휘들이 됩니다. 요컨대 구분은 윤리시학적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지 지식의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과 인식이 하나의 형태를 가질 경우, 인식이 ethos를 생산할 수 있도록 작동할 경우 그것은 유익합니다. 즉 그것은 ethos를 생산해 낼 수 있고, 타자에 대한 앎과 신에 대한 앎도 생산해 낼 수 있습니다. 자기 인식은 의식의 비밀에 대한 해독이나 기독교에서 발달한 자기 해석이 아닙니다. 유익한 앎, 즉 그 속에서 인간의 실존이 문제시되는 앎은 단정적이고 동시에 정언 명력적인 관계적인 앎의 방식이며, 주체의 존재 방식에 변화를 발생시킬 수 있는 앎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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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의 생리학적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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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주의자들에게 phusiolosia란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실천을 위핸 철학적으로 관여적이라는 한에서 자연에 대한 앎의 방식입니다. paideia는 목적이 사람들로 영광을 얻기인 과시 목적의 허풍선이의 사람입니다. 이것은 말꾼, 팔아먹기 위해 말을 만들어내는 자입니다. 에피쿠로스는 paideia와 phusiolosia를 대립시킵니다. phusiologia는 paraskeuei를 준비시킵니다. paraskeue는 주체와 영혼이 마주칠 수 있는 모든 인생의 상황들에 대해 필요 충분적으로 적절히 대비할 수 있는 준비를 말합니다. phusiologia는 개인에게 과감성과 용기를 주며, 또 그에게 부과되는 무수한 신앙에 맞설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협과 맞설 수 있게 해주고 그를 지배하는 권위와 맞설 수 있는 일종의 대담성을 갖게 해줍니다. 공포의 부재, 과감성, 완고성, 굳건함을 제공합니다.
둘째로 이러한 개인은 autarkies가 됩니다. autakeia개념을 재발견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더불어 만족하고 자기 자신에 만족합니다. 자기 자신과 충만한 관계 속에서 쾌락과 관능을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마지막으로 phusiologia는 개인의 요행으로부터 얻어진 재산이 아닌 자기 고유의 재산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해줍니다.
phusiologia는 인간 행실의 원리로 사용될 수 있고, 인간의 자유를 작동시키는 기준의 역할을 하며 또 주체를 자유로운 주체, 즉 자기 자신 안에서 불변하고 완벽히 평온한 관능의 가능성과 원천을 발견하게 되는 주체로 변형시킨다는 한에서 그것은 자연, 즉 phusis에 대한 앎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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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주의 생리학자의 parrhesia(진실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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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rhesia는 스승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된 바들 가운데서 제자를 변화시키는 작업을 위해 유용하고 효율적인 바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테크닉을 의미합니다. 의사와 환자, 스승과 제자의 관계 내에서 사용되는 테크닉입니다. 참된 인식의 장에서 주체의 변형, 변모 향상에 관여적인 인식을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놀이의 자유입니다. 이 parrhesia의 틀속에서 에피쿠로스는 생리학자의 자격으로 다시 말해서 자연을 아는 자로서 그러나 이 자연에 대한 인식을 주체에게 유용한 범위 내에서만 활용하는 자로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나는 기성의 의견들에 동의하기보다는 만인에게 유용한 바를 예언적으로 말하기를 더 선호한다.” 에피쿠로스는 신탁을 참조하면서 참된 바와 행해야 할 바를 동시에 말하는 일정 유형의 담론, 즉 진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명령하는 담론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리학자의 자유 내에서 parrhesia를 통해 생리학을 활용하면서 나는 만인이 동의하고 만인이 이해하지만 주체의 존재를 전혀 변화시킬 수 없는 기성의 의견을 따르기보다는 비록 모호하다 할지라도 진실된 바를 말함과 동시에 해야 할 바를 명령하는 신탁의 언어에 근접하기를 더 좋아 한다”라고 말합니다. 진실을 이해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예언적으로 주체의 존재 방식을 그 자체로서 변화시킬 능력이 있는 자연의 진실을 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생리학자의 기술과 자유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언적 표현과 유사한 테크닉입니다. 주체의 변형을 목적으로 한다는 한에서 그것은 또한 의학과 유사한 기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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