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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 1982년 2월 24일 강의 / 화니짱

주체의 해석학 8강(2월 24일) 발제 16.06.11.hwp

 

전반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식의 영적인 양태화: 표상분석 작업, 정의하고 기술하기, 보고 명명하기, 가치평가하고 체험하기, 영혼의 위대성에 접근하기

영적인 훈련의 첫째 단계는 이미지가 정신에 나타나는 대상을 규정하고 기술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영적인 훈련은 규정들을 부여하고 논리적으로 의미론적으로 규정을 부여하며 또 동시에 가치를 정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321) 문제가 되는 것은 내적이지만 완벽하게 명시적인 발화입니다. 명명하고 자기 자신에게 말해야 하고 그것을 자기에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324) 영적훈련의 두 번째 단계는 대상의 가치를 측정하려는 목적을 갖는데 ‘영혼을 위대하게 만들기’이다. megalophrosunê(일종의 영혼의 위대성)은 간단하게 말해 세계의 보편적인 이성에 영혼을 적응시키는 행위이다. 이 훈련을 통해 세계를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합리적인 원리의 위대성을 발견, 사물에 대한 무관심과 모든 사건들과 관련한 평정으로 해석되는 자유와 위대성이 수련을 통해 적응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사물의 각 부분을 분석적으로 또는 전반적으로 고찰하면 영혼은 그 순간에 신의 이성에 부합하는 평정이라는 지고의 초연함을 획득하게 된다. 즉 이 초연함이 수련의 목적이다. 이는 사물을 시험, 즉 사물에 대한 점검을 행할 때에만 도달 가능하다. (325) 이러한 대상의 시험은 무엇을 목적으로 할까? 그것은 대상의 어떤 우주 혹은 코스모스에 어떤 유용성이 있느냐를 아는데 있다. 즉 세계라는 거대한 국가들의 집들에 해당하는 국가들의 시민인 인간을 위한 대상의 유용성을 말한다. 그리고 사물들과 관련해 인간 주체가 필요로 하는 덕이 무엇인지를 한정할 수 있다. 사물들이 정신에 나타나는 순간에 판타지아가 주체의 지각에 이 사물들을 부여하게 되는 순간에 주체는 이 사물들과 관련해 온화함, 용기, 진솔함, 정직성과 같은 덕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훈련이 유형이다. (327)

 

에픽테토스에 있어서 영적인 훈련의 예들

이러한 훈련은 특히 에픽테토스에게서 더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두 형태로 등장하는데 (327) 산보-훈련(사물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를 규정하는 문제)과 기억-훈련이 바로 그것이다. 훈련은 기독교의 영성에서 재발견되는데 4-5세기 수도원 문학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카시아누스의 방앗간과 환전소의 예가 대표적이다. (328) 이 예에서도 시험 즉 ekekhosr가 문제가 된다. 이러한 표상의 점검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다르다.

 

표상에 대한 기독교의 주해화 스토아주의의 분석

기독교에게 있어서 표상은 자연과 관념의 물질성에 근거해서 기원의 문제를 따집니다. 내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은 신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관념은 나로부터 오는 것은 아닐까? (329) 결과적으로 이것은 표상의 속성 내에서 표상의 순수성에 대한 물음과 그 기원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3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표상의 기원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표상의 기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제기하는 기원의 문제는 표상된 사물이 세계의 필연적 질서에 속하는지, 직접 신과 그의 섭리 그리고 나에 대한 그의 자비심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묻는 표상된 사물의 기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토아주의자(아우렐리우스)들의 분석의 핵심은 표상하는 ‘내용’의 분석에 근거하는 반면, 기독교의 영적인 훈련과 명상의 핵심은 ‘사유’ 자체의 속성과 기원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3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되돌아가기: 시간 속에서 대상을 분해하는 훈련, 물질적 구성 성분으로 대상을 분석하는 훈련, 대상을 환원적으로 기술하는 훈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의해 실제적으로 시행된 표상 내용 점검의 원칙.

⓵ 시간 속에서 대상을 분해 하는 능력

⓶ 대상을 그 구성 요소들로 분해하는 훈련

⓷ 환원적이고 축소적인 기술 훈련

이런 원칙들은, 그릇된 통일성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며, 밑을 쳐다보거나 아니면 우리 자신을 위에서 아래로 굽어보게 되면 우리는 물질적 요소나 불연속적인 순간들과 같이 서로 구별되는 일련의 요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영적인 수련은 개인성의 해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주체의 정체성과 그것이 추구하는 특이성과 안정적인 자기 존재를 기초하고 확립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세네카의 영적 수련과 대비됩니다. (331)

 

영적 지식의 개념적 구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서는 세계에 대한 지식의 주변이나 전면 혹은 거기에 반해서 인간 존재, 영혼, 내면성에 대한 앎일 수 있는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지식의 양태화가 관건입니다. 양태화의 특징은 ⓵ 주체 이동의 문제 ⓶ 사물의 위치, 관계, 세계 내에서 고유한 자유로운 인간에게 행사되는 힘의 문제 ⓷ 일종의 ‘자기보기’의 문제 ⓸ 지식이 효과에 의한 주체의 존재 방식 변환 ⇒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영적인 지식을 구축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지식은 소위 인지적 지식에 의해 차츰 축소되어서 16-17세기에는 인지적 지식이 영적인 지식을 완전히 뒤덮여 버립니다. (340)

 

파우스트의 형상

영적인 지식과 인지적 지식의 관계를 나타낼 때 필요한 인물이 파우스트의 형상입니다. 파우스트는 사라지는 영적 지식의 영웅입니다. 인지적 지식에서 주체는 자기 변형을 위한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파우스트가 요청하는 지식은 영적인 가치와 효과입니다. 여기에는 계몽과 더불어 사라지는 영적 지식에 대한 마지막 향수에 젖은 표현과 인식적 지식의 탄생에 대한 슬픈 인사가 있습니다. (341)

 

후반부

자기 수련(akesis)과 관련된 덕

고행은 자기로의 전향이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 전재하는 수행적 실천을 말합니다. (342) 덕의 획득은 두 가지의 것을 전제한다고 무소니우스 루푸스는 말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론적 지식이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덕은 실천적 지식을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고통·열의·훈련을 통해서만 실천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으며 이론적 지식에도 필요 불가결합니다. (343) 고행askêsis는 진실의 실천이며 법에 주체를 예속시키는 방식이 아닙니다. 역으로 우리는 (배움Mathesis의 관점, 인식, 세계의 인식, 자기 인식 등의 견지에서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실천과 수련의 관점(즉, 고행askêsis)에서 자기로의 전향을 구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진리의 질서가 아니라 법·규칙·규범이 될 질서 속에 위치하게 될 것입니다. (345)

 

과학(mathesis) 내에서 주체의 객관적 인식에 대한 참조의 부재

근대인의 이해

“인식의 장에서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주체의 대상화 / 법질서에 주체의 예속”

법에 입각해, 주체는 무엇 때문에, 어떤 범위 내에서, 어떤 토대에 입각해, 어느 한도까지 법에 복종해야 하는지를 제기하는 것이 자명한 것

고대인의 이해 (그리스·헬레니즘·로마)

“주체의 영적인 체험으로 세계에 대한 앎을 구축하기 / 진실의 실천을 통해 주체를 최종적인 목표로 구축하기”

어떤 한도 내에서 진실을 인식하고 말하며 실천하고 수련하는 것이 주체에게 행위해야 하는 바대로 행위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또 존재해야 하는 바대로, 또 존재하기를 원하는 바대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지를 아는 것

이제 우리 자신의 범주와 문제들과 관련한 동일한 실마리 풀기와 해방을 고행askêsis에 적용해 봅시다. 우리가 실천의 질서 내에서 주체 문제를 제기하면 지극히 본능적으로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 질문) 주체의 상황은 어떠한가, 또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 (346)

 

자기 수련 내에서 법에 대한 참조의 부재

법에의 복종, 주체 자신에 의한 인식과 같은 근대의 문제들은 고대의 사유와 수양 내에 등장하지도 않으며 근본적이지도 않습니다. ‘지식의 영화(靈化)와’ ‘진리의 실천과 훈련’은 다릅니다. (347)

 

자기 수련의 목적과 수단

우리는 고행에 대해 논의할 때 상당히 왜곡된 일정한 전통을 보며, 고행을 ‘자기 포기라는 본질적인 포기에 도달하기 위한 여러 포기 속에서 진보’라는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고행은 다른 의미를 지니는데 그 이유는 고행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기포기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자기를 구축하는 것(더 정확히, 충만하고 완수되고 완결되며 자족적이고 자기에게서 취하는 행복에 해당하는 자기 변형을 이루어 내는 자기와의 일정한 관계를 형성하는 경지)이기 때문입니다. (347)

 

장비(paraskeuê)를 특징짓기

고행이 엄격성을 요하기는 하지만 고대 고행의 수단을 자기 자신의 부분을 포기하는 것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고행의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은 미래에 갖게 되거나 갖게 될 어떤 요소를 포기하는 대신에 자기를 보호해 주고 도달하게 해주는 무엇을 갖추는 것이다. 고대의 고행은 제거하는 게 아니라 장비paraskeuê를 갖추고 소유합니다. 고대의 고행은 장비paraskeuê의 구축을 임무, 전술, 도구로 삼습니다. (348)

1) 장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는 비교들

현자의 육상선수적인 훈련 - 데메트리우스 인용

훌륭한 운동선수는 훈련을 통해 자기 자신을 단련합니다. 그의 훈련은 타인을 제압하거나 자신을 초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칠 수 있는 것과 만날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해 준비하는 것이며 모든 상황에 적응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하면 즉각적으로 운용 가능할 수 있도록 충분히 일반적이며 효과적인 동작에 대한 훈련입니다. 이는 우리 실존 전반에 걸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강하게 하는데 필요 충분한 동작의 총체, 실천의 총제와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자의 육상선수적인 훈련입니다. (349)

춤과 격투기의 비교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인용

“생활의 기술은 춤보다는 격투기와 비슷하다. 왜냐하면 항시 경계 태세를 할 필요가 있고, 너희들을 갑작스럽게 엄습하는 타격들에 대해 평형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춤과 운동경기의 대립, 격투기와 춤의 대립은 흥미롭습니다. (349) 무용수는 타인을 뛰어넘거나 자기 자신을 뛰어넘게 해주는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나 그의 작업은 막연합니다. 반면에 격투기술의 핵심은 경계태세를 갖추면서 평형을 유지하는 채비를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마주칠 수 있는 상황에 의해서든, 타인에 의해서든 우리에게 가해지는 타격에 의해 전복되지 않고 그것보다 강하며 동시에 결코 약하지 않도록 경계 태세를 갖추면서 평형을 유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고대의 영성에 입각한 운동선수와 기독교도 운동선수의 비교

기독교도 운동선수는 죄, 타락한 자연, 악마의 유혹 등 자신이 대면해야 할 해악적이고 위험한 힘들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게 됨에 따라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계태세를 갖춥니다. 반면 고대의 영성을 갖춘 운동선수도 물론 투쟁하지만 그는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모든 적수와 사건과 싸울 채비를 합니다. 고대의 운동선수는 사건의 운동선수이며 기독교인은 자기 자신의 운동선수입니다.

 

장비paraskeuê의 내용: 담론logoi과 행동

우리가 갖추어야 하고 필요한 순간에 가장 단순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장비paraskeuê는 담론logoi에 의해 구축됩니다. (350)

1) 담론logoi에 대한 올바른 이해

① 담론logoi를 단순히 진실된 명제·원칙·공리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물질적으로 실존하는 언표들이라는 한에서 이해해야 한다.

충분한 장비paraskeuê를 갖춘 운동선수는 보편적 질서에 관한 것과 상황에 부응하는 특수한 정언을 단순히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실제로 듣고 읽고 다시 기억해 발화하고 문장을 다시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취해진 logos의 물질적 장비는 사건과 운명의 훌륭한 선수여야 하는 자에게 필요한 기반입니다.

②담론logoi들은 일상적인 담론이 아니다.

logoi는 logos라는 용어가 지시하듯 이성에 기초한 명제이며 합리적이고 참되며 수용 가능한 원칙들을 구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명제는 스토아주의 철학에서 일반 원칙dogmata과 엄격한 계율praecepta에 해당하지만 이 점은 건너 뛰기로 하지요. (351)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문장들이 실제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물질적으로 실존하는 담론logoi이 진실된 바를 말하고, 동시에 해야할 바를 명하는 합리성의 문장과 담론의 요소라는 사실입니다. (352)

③이 담론logoi들은 설득적인 담론이다.

참된 것과 해야 할 바를 명할 뿐 아니라 담론logoi이 적절한 장비paraskeuê를 구축할 경우 신념을 야기시키며 행위 자체를 유발하고 자발적으로 행위하게끔 하는 행위 유도적 도식들입니다.

마치 차츰차츰 주체의 이성·자유·의지와 일체되어 그가 해야 할 바를 말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합리성의 방식에 따라 해야할 바를 행하면서 주체를 위해 말하기까지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합리적인 logos의 물질적 요소(담론logoi)들은 행동 모태의 자격으로 주체에 각인됩니다. 바로 이것이 장비paraskeuê이다. 운동선수에게 필요한 고행askêsis은 이것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합니다.

 

담론의 존재 방식: prokheiron

장비paraskeuê를 구축하는 logos는 구조boêthos자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352) 사건이 발생할 때 logos는 말을 하며 구조를 요청하는 주체에게 응답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구조는 곧 logos의 언표, 재활성화, 구조를 약속하는 목소리에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 문학 전반에 걸쳐 수 많은 방식으로 은유되어 오는데 그 예로는 약(藥), 배의 항해사가 있으며 갑옷과 성벽과 같은 전투적인 형태의 은유도 있습니다. (353) 이러한 항구적인 구조자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합리적 logoi의 장비는 활용 가능한khrêstikos 형태로 항시 주체의 수중(手中)에 있어야 하고 지녀야 합니다. (354)

장비를 수중에 지녀야 한다는 말은 그것을 진리의 빛 속에 현시하는 형태로 넣어 두라는 말이 아니라, 거의 근육 속에 지녀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노래와 빛의 기억이기 보다는 행동과 행위의 기억이어야 하며 (354) 즉각적으로 필요 할 때 지체 없이 자동적으로 재가동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슬픔과 참담과 사고가 발생하는 날, 죽음이 위협하고 병들어 고통 받는 날이 찾아오면 이 장비paraskeuê는 영혼을 보호하고 영혼이 타격받지 않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 작동해야 합니다. 장비가 개인에게 명령할 수 있고 근육과 신경에 속하게 하기 위해 고행askêsis에서 장비의 자격으로 정언과 명제를 실제적으로 환기하게 될 회상 훈련을 하기 이전에 logoi를 재활성화하고 발화해야 합니다. 사건이 터지면 그 순간에 logos는 행동의 주체가 되어 있어야 하고 행동의 주체는 logos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355)

참되게 말하기를 주체에 내장하는 훈련으로서의 자기 수련(askesis)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고행askêsis은 충만하고 독립적인 자기와 자기 관계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장비paraskeuê를 구축하고 채비하는 것을 그 일차적인 임무와 목적으로 삼습니다. 장비는 합리적인 행동의 모태를 구축할 수 있기 위해 진실된 담론이 취해야 하는 형식입니다. 장비paraskeuê는 참된 담론을 도덕적으로 수용 가능한 행동의 원칙으로 지속적으로 변형시키는 구조이며 logos를 êthos로 변형시키는 요체입니다. 고행askêsis은 개인이 장비paraskeue를 형성하고 확정하며 주기적으로 재활성화하고 강화할 수 있는 절차들의 규칙화되고 계측된 총체 혹은 계기로 정의될 수 있다.

고행askêsis은 (주체에게 호소되고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호소하는) 진실 말하기dire-vrai가 주체의 존재 방식으로 구축되게 해주며 주체의 존재 방식이 되게 합니다. (355) 이는 계시와 성서와 신앙관계에 입각해 자기 자신이 정의되고, 절대적 타자인 신에 의해 말해진 절대적으로 참된 말에 따라 자기 자신을 버리는 기독교적 고행과도 다릅니다.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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