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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9강 (3월 3일) 발제/푸코/2016.06.12(일)/윤명(샘) 발제 (동문선버전)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6. 12. 03:24주체의 해석학_1982년 3월 3일 강의_윤명_샘.hwp
[전반부]
기독교 고행과 철학적 고행의 개념적 분리-주체화의 실천 (357~359)
철학적 고행 또는 자기 실천의 고행에서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표는 자기 포기가 아닙니다. 반대로 목적은 연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자기 실존의 목표로 설정합니다.
철학적 고행에서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거나 희생하는 순서를 규칙화하는 게 관건이 아닙니다. 반대로 선천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무엇을 갖추는 것이 관건입니다. 생에 있을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해 방어할 수 있는 장비, 주체가 자신을 구축하기 위한 장비, paraskeue를 만드는 임무를 고행이 담당합니다.
철학적 고행은 개인을 법에 종속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것이 아닌, 진실에 연루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요컨대 철학적 고행은 내가 진실된 담론을 말할 수 있게 만들며, 또 내가 그 진실된 담론의 발화 주체가 되게 합니다. 자신이 진실을 말한다는 사실에 의해 자기 자신이 변형되는 주체가 되게도 해줍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고행에서는 참된 담론 내에서 자기 자신의 객관화를 거치는 자기 포기 활동이 발견된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적 고행은 참된 담론 내에서 자기의 대상화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가하는 자기의 실천과 수련 속에서 참된 담론을 주체화하는 계기와 더불어 자신과 만나는 것이 관건입니다. 진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참된 담론의 발화 주체가 되는 것ㅇ, 바로 이것이 철학적 고행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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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훈련의 중요성-수동성과 능동성 사이에 있는 경청의 애매모호한 속성 (359~362)
참된 담론의 주체화로 이해되는 고행에 필요 불가결한 일차적 형식은 경청, 독서, 말한다는 사실과 관련된 모든 기술과 실천입니다. 듣기는 고행과 참된 담론을 주체화하는 첫 단계인데,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구두적이었던 문화에서 경청은 logos와 진실된 바를 취합할 수 잇께 해주기 때문이지요. Aletheia에서 ethos로의 이행(참된 담론에서 행동의 근본적인 규칙인 바로의 이행)은 물론 경청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경청 고행의 출발점과 그 필요성은 그리스인들이 듣기의 심층적인 모호성이라고 인정하는 바 내에서 발견됩니다. 청각은 모든 감각 중에서 가장 pathetikos(수동적)하며 logikos(logos를 더 잘 받아들이는)하다고 플루타르코스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서 발생하는 바를 듣지 않을 수 없으며, 시각이나 촉각보다도 듣는 바에 의해 훨씬 놀라고 동요된다는 사실이 청각의 수동성을 잘 증명한다고 플루타르코스는 말합니다. 그리고 청각은 그 어떤 다른 감각보다도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는 힘이 강합니다. 이는 율리시스가 자신의 청각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정념적이라고 말한 텍스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각은 또한 가장 logikos하다고 플루타르코스는 말합니다. 본질적으로 미각·촉각·후각과 같은 다른 감각들과 이런 기능들을 담당하는 신체 부분이나 기관을 통해 인간은 악덕을 배웁니다. 반대로 청각은 덕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감각입니다. 덕은 시각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덕은 logos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실제로 음성 내에서 언어적으로 분절되고, 이성에 의해 합리적으로 분절되고, 표현된 현존하는 합리적인 언어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귀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혼이 logos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접근로는 청각입니다. 따라서 청각은 pathetikos와 logikos라는 근본적인 양면성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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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의 백여덟번째 서신 (362~364)
세네카는 플루타르코스와 마찬가지로 청각의 양의성을 취하지만 이 pathetikos를 결과적으로 장점과 단점을 갖는 양의성의 원칙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는 청각의 수동성이 갖는 장점을 설명하기 위해 귀는 의지가 개입함이 없이 그냥 침투를 받게 내버려두고 logos 가운데서 자신의 범위에 오는 모든 것을 수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철학 수업은 대단히 유익한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완전히 수동적으로 있다 할지라도 항시 뭔가가 남는다고 그는 말합니다. Logos가 귀 속으로 침투하여 주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영혼에 logos의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무엇인가 항시 남는 게 있습니다. 따라서 철학자 측근에 있는 사람들 모두는 이득을 봅니다.
이는 사실 영혼의 씨앗과 관련된 교의의 중요한 요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오는 모든 합리적 영혼에는 덕의 씨앗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영혼의 씨앗들이 주체의 주위에서 발화되고, 주체가 귀를 통해 수집하는 진실된 말을 통해 개화되고 활성화됩니다. 덕의 씨앗의 책임자가 주제가 아니라 이성의 속성에 의해 주체에게 이식된 것과 마찬가지고 각성도 주체가 주의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logos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일종의 자동성이 청각의 수동적 측면의 장점입니다. 그래도 철학 학교에서 어떤 이득도 취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미사여구, 아름다운 목소린, 말과 문체에 대한 탐구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즉, 관심이 잘못 유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관심이 적절치 않은 대상이나 목표로 향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기술이 필요하며, 경청할 수 있는 어떤 방식이 필요하게 됩니다.
에픽테토스 어록 II, 23-Tekhne로 고민하는 경청-경청의 고행적 규칙들 (364~367)
세네카와는 달리 에픽테토스는 logos를 취합할 수 있는 감각인 청각으로부터 출발해 그것이 양의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게 됩니다. 논리적 듣기 활동에는 필연적으로 수동적인 무엇인가가 있고, 또 바로 이 때문에 진실의 경청마저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입말 행위와 교육을 통해 완벽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합니다. 따라서 logos를 경청하고 전승된 입말과 교육인 paradosis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logos와 paradosis는 완전히 적나라한 상태로 나타날 수 없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합니다. 적나라한 방식으로 진실을 전승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경청하는 자의 영혼에 진실이 도달하기 위해서 그것은 발화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첫째, lexis(말하는 방식)가 필요합니다. 둘째로, 관념이나 담론의 진실이 직접 전달되는 것을 막는 문체적이고 의미론적인 상당수의 선택을 하지 않고서는 사물을 전승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청자는 사물을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바(lexis의 요소들)에만 사로잡혀 거기에만 머물 위험(katamenoi)이 있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수동적인 양상을 갖거나 logikos의 양상을 갖는다 할지라도 듣기는 항시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경청하는 순간 인간은 logos와 관계를 맺게 되고 이 logos는 lexis와 분리될 수 없으며, 또 상당수의 어휘들과도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경청하기가 말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적절하고 유용하게 말하는 법을 알고 유용하게 말하는 법을 알고 공허하고 해로운 방식으로 말하지 않기 위해서는 tekhne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합니다. 경청하기 위해서는 empeiria, 다시 말해서 자질·경험, 요컨대 후천적인 수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tribe(열중, 근면한 실천)도 필요합니다. <파이드로스>에서 플라톤은 tekhne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고 그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의학(인체에 대한 인식), 웅변술(영혼에 대한 인식) 등은 tekhne입니다. 반면에 empeiria와 tribe의 경우 인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조건하에서 에픽테토스에게 왜 자연스럽게 경청이 tekhne로 규정되지 않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이유는 경청이 고행의 첫 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이지요. 경청 속에서 인간은 진실과 접촉을 시작합니다. 결과적으로 tekhne가 경청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인식을 전제로 할 경우 경청이 어떻게 tekhne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질, 수완이며 경청의 요구 사항들과 친숙해지는 일정한 방식입니다. Empeiria와 trbie는 아직까지 tekhne가 아닙니다. 말하기 위한 tekhne가 존재하지만 경청을 위한 tekhne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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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靜肅) (367~370
Pathetikos한 부분과 logikos한 역할을 하는 양의적인 경청이 문제이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범위 내에서 해로울 수 있는 무의지적인 수동성의 효과를 제거하면서 logikos한 역할을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이 관건입니다. 요컨대 이러한 숙고된 실천에서, 경청에 몰두하는 실천에서 논리적 경청을 정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실천에서 어떻게 논리적 경청을 정화할까요? 첫째로 그것은 정숙입니다.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의 공동체에 가입하는 초심자들에게 5년간의 정숙이 부과되었습니다. 참된 담론의 실천과 훈련에 들어갈 때마다 초심자인 사람은 말할 권리가 없었으며, 경청하기만 해야 했습니다. 수다는 배우기 시작하고 처학에 입문할 때 치유해야 할 첫 번째 악덕입니다. 플루타르코스에게 있어서 신의 교육인 정숙이 인간 교육의 근본 원칙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평생 엄격한 입말의 절제가 자기 자신을 지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타인이 말할 때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들을 바를 즉각적으로 담론으로 변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변환을 억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들은 바를 간직하며 즉각적으로 말로 변형시키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수다스러운 자는 항시 빈 꽃병과 같습니다. 그리고 수다스러운 사람은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수다스러운 사람의 정념은 다른 정념과 마찬가지로 오직 logos로만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수다스러운 사람은 logos를 간직하지 못하며 그것을 자신의 담론에 쏟아져 나가게 방치하는 사람입니다. 결과적으로 수다스러운 자는 침묵하기를 원치 않는 한 치유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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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경청자의 정확한 제스처 (370~377)
물론 이 정숙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정숙 외에도 능동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경청은 청자에게 당대의 텍스트에 정확히 묘사되어 있는 신체적 태도를 요구합니다. 우선 어떤 간섭이나 동요 없이 최선의 경청을 허용하는 기능입니다. 따라서 영혼이 자신에게 건네진 말을 듣기 위해 순수하고 동요가 없어야 한다면 신체 또한 절대적으로 평온한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정확하고 가능한 한 부동하는 신체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신체는 실제로 영혼이 자신에게 제안되고 전달되는 그대로의 logos를 잘 이해하고 취합하고 있음을 상당수의 기호로 표현해야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의 <명상 생활에 관하여>
청자는 동일하고 유일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연사를 향해야 합니다.(부동성에 의해 고정되고 보장되며 표현된 주목의 의무)
신체의 부동성은 도덕성의 보증으로서 매우 중요합니다. 설득하려 하고 지극히 정확한 언어를 구축하려고 하는 연사의 몸짓이 최대한의 의미론적 가치를 지니기 위해 대단히 중요합니다. 몸짓의 몰상식성과 신체의 항구적 유동성은 아시다시피 영혼·정신, 주의의 항구적인 동요이고, 항구적으로 비약을 행하는,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 항시 수동적이며 자기 자신에게 제어 주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남자라는 의미에서의 여성화된 남자에게서 그 도덕적 버전을 갖는 stultitia의 신체적 버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청자는 연사에게 강의를 잘 경청하고 있고 잘 이해했다는 신호를 보내야 합니다. 이는 주의의 질을 보장하고 logos가 영혼을 침투하게 해주는 조상의 주동성과 수강자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연사의 말을 잘 듣고 있고 잘 이해했음을 보증하며, 또 동시에 연사의 담론과 설명의 리듬을 안내하는 신체의 기호학적 운동이라는 이중적인 지식의 영역이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3. 모든 장식은 거부되어야 하며, 모든 유혹의 기술은 배제되어야 합니다. 에픽테토스와 스승은 근면하고 엄격하며 모든 장식과 겉치레의 환상이 제거된 의지를 통해 진실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에의 주의, 바로 이것만이 유일하게 스승으로 하여금 자신의 제자를 돌보도록 자극하고 선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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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注意)(담론과 관련한 애착과 즉각적인 기억을 통한 담론의 주체화) (377~380)
철학적 담론은 당연히 진실을 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적 담론은 상당수의 장식 없이는 진실을 말할 수 없습니다. 철학적 담론은 진실을 찾는 사람의 능동적인 주의를 통해 경청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철학적 담론은 고유의 물질성과 고유의 형상 그리고 고유의 수사학에서 기인하는 효과를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수행해야 할 실제적인 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양의적인 담론을 정확히 들으며 자신의 주의를 적절히 운용해야 하는 것이 수강자의 작업입니다.
수강자는 관심을 전통적으로 to progma라 불리는 바 쪽으로 유도해야 합니다. Progma란 명확한 철학 및 문법 용어로서 단어의 지시 대상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표현이 지시하는 대상으로 향해야 합니다. 주의가 형식의 아름다움이나 문법 그리고 어휘 쪽으로 쏠려서는 안 되며 심지어는 철학적이거나 소피스트적인 궤변을 반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도 안 됩니다. 말해진 바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철학적 경청의 progma(지시 대상)는 행동 정언으로 변경 가능한 참된 명제들입니다.
말해진 진실과 주어진 명령이라는 양태하에서 사물을 듣고 난 뒤에 즉각적으로 기억력을 작동시켜야 합니다. 발화자의 입에서 청자가 이 사물을 듣는 순간 이 사물을 정신 속에 취합하고 이해하며 파악해야 하고, 그래서 그것이 즉각적으로 정신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단정이 명령의 가치를 지니는 순전히 철학적인 의미의 progma의 응시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들은 바를 기억하며 그것이 영혼의 내부에 새겨져 차츰차츰 주제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는 자기 자신에게 향해진 시선이 있습니다. 경청하는 영혼은 자기 자신을 감시해야 합니다. 자신이 듣는 바에 대해 적절히 주의를 기울이며 영혼은 자신이 듣는 바의 의미 progma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영혼은 이 참된 사물이 차츰차츰 경청과 기억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담론이 되도록 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철학적 고행의 궁극적이고 항구적인 목표인 참된 담론의 주체화의 첫 번째 요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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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
적절한 독서 실천 규칙과 그 목적의 부여 (381~382)
많은 저자들의 글을 읽지 말고 많은 작품과 텍스트를 읽지 말며 입문자나 입문을 이미 완료하여 교의의 근본 원칙들을 재활성화하고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중요하고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몇몇 구절들을 선별해야 합니다. 이 교의를 인식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흡수했어야 하고 그것을 발화하는 주체가 되었어야 하는 게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것을 요약의 실천입니다. 그것은 주어진 한 주제나 일련의 주제들에 대한 여러 저자들의 명제와 성찰을 한데 모으는 선문 해위이기도 합니다. 독서를 통해 명상의 계기를 부여하는 것이 관건이며, 이것이 독서의 주요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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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주체에 대한 사유 활동으로서의 melete/meditatio의 의미-담론 흡수의 신체적 훈련으로서의 글쓰기-주체화/진실 말하기의 순환으로서의 서신 교환-기독교 영성에서 말하는 기술 (382~389)
우리는 명상을 어떤 사물의 의미를 심하시키지 않고 특수한 강도를 가지고 사유하려는 시도나 우리가 사유하는 이 사물에 입각해 다소 규칙화된 질서 속에서 사유가 전개되도록 내버려두는 시도록 이해합니다. 그리스·로마인들에게 melete 혹은 meditatio는 다른 것입니다.
meletan은 사유의 자기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어진 텍스트가 의미하려 한 바를 자문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관건이 아닙니다. 사유이 자기화 훈련은 주해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사유를 진실된다고 믿고, 다른 한편으로는 필요하다거나 기회가 되는 대로 그것을 부단히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중요시됩니다. 따라서 필요한 경우 즉각적으로 회상하고 그것을 수중에(prokheiron) 지닐 수 있도록 이 진실이 정신에 새겨지게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meditatio는 동일시의 경험을 하는 데 있으며, 사물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유하는 사물을 훈련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가장 유명한 예는 죽음에 대한 명상입니다. 로마인과 그리스인이 이해하는 의미에서늬 죽음에 대해 명상한다는 것은 인간이 죽을 것임을 사유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명상하기란 사유를 통해 죽어가고 있거나 죽게 되거나 생의 마지막 날들을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의 상황에 처하는 것입니다. 주체와 그의 사유 혹은 사유들간의 작용이 아니라 주체에게 사유가 가하는 작용이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작용이 문제시됩니다. 이러한 명상 관념은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 명상>에서 데카르트가 했던 바이며, 또 정확히 ‘명상’에 그가 부여한 의미입니다. 데카르트는 의심스러운 모든 것이나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물음을 던지지 않고 모든 것을 의심하는 주체의 상황에 자신을 위치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바르 탐구하기 시작하는 사람의 위치에 자신을 위치시킵니다. 따라서 이것은 사유와 그 내용에 대한 훈련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체가 사유를 통해 어떤 상황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훈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자가 말하려 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것인 참된 명제들의 장비를 구축하는 것이 독서에 대해 사람들이 기대하는 효과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상이한 출처를 갖는 명제들의 모자이크로 자신을 구축하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명령의 가치를 지니는 명제들과 동시에 행동의 원칙일 수 있는 참된 담론의 골조를 구축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독서가 이처럼 훈련으로 여겨지고 명상을 위한 독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독서는 즉각적으로 글쓰기와 연결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역시 훈련이며 명상의 요소인 글쓰기에 의해 독서는 연장되고 자신을 재강화하고 재활성화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독서를 완화하고 독서를 통해 글쓰기를 완화시켜서 씌어진 글은 독서가 수집한 바를 자료체(corpus)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독서는 oratones와 logoi(담론과 담론의 요소들)를 취합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료체(corpus)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 자료체(corpus)는 그것을 구축하고 확보하게 될 글쓰기입니다. 글쓰기는 자기 자신을 위해 두 용례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글을 쓴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은 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자기와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었을 경우 쓰라고 권고되는 습관이고, 또 썼을 경우 그것을 다시 읽어보도록 충고하는 습관이며, 또 큰 소리로 읽도록 권고하는 습관입니다. “밤낮으로 이 사유들을 네 수중에(prokheira) 간직하라. 글쓰기를 통해 그것을 적어 놓고 독서를 통해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사유를 간직합니다. 독서 이후에 독서한 바를 자기 자신에게 다시 읽어 타자의 입으로부터 들은 바나 타자의 이름하에 읽은 진실된 담론을 자기화하기 위해 글로 씁니다.
3. 글쓰기는 hupomnemota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에게 유용하지만 타자에게도 유용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혜택과 이익의 유연한 교환과 선과 자기 자신을 향하는 여정 내에서 타인을 도우려 하는 영혼 봉사의 유연한 교환 내에서 글쓰기 훈련이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서신 교환을 통해 실제로 덕과 선에서 가장 앞서가는 사람이 타자에게 충고를 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 훈련은 충고를 하는 자가 타자에게 주지만 자기 자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진실을 다시 상기시키게 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타자와 서신을 교환하면서, 그의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면서 소위 나는 개인적인 이런 훈련을 부단히 수행해야 하며 이와 같은 서신 교환을 통해 부단히 자기 관리의 상태를 유지하게 해주는 신체 운동을 수행합니다. 우리가 타자에게 하는 조언은 우리 자신에게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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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시대로 넘어오면서 주체와 진실의 관계가 “어떻게 진실 말하기의 주체가 될 것인가”라는 목표에 의해 단순히 명령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가 되어 버리는 체제로 넘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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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도자의 고백 (390~391)
기독교의 영성 내에서 다양한 스승의 담론이 있지만 내가 하려고 하는 분석에 중요하고 주목할 만한 바는 피지도자가 아무튼 무엇인가 해야 할 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피지도자는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고 일정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이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의 진실입니다. 굽어보는 역사적 시선을 취해보면 자기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어 버렸고, 주체가 자신과 맺는 관계에서 근본적인 원칙이 되어 버렸으며,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개인이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되어 버린 이 순간을 중요한 결과를 갖는 사건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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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진실 말하기(dire-vrai)-그리스·로마의 지도 행위 (391~393)
이러한 원칙은 고대 그리스·헬레니즘·로마 시대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스승의 담론에 의해 진실로 인도를 받는 자는 자기 자신의 진실을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 진실을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서구의 역사에서 지도와 인도를 받는 자는 자기 자신이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의무, 즉 고백의 의무 내에서만 말할 권리를 갖습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도 있으나, 이 모든 요소들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고백’, 아무튼 영적인 의미에서의 ‘고백’과는 심층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고대에 고백은 도구적 의미와 더불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의 요소들은 도구적이기 수행적이지 않습니다. 요컨대 주체는 진실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주체는 진실된 담론을 돌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주체는 자신에게 제안된 참된 담론들을 경청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주체화를 시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주체는 진실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진실된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된 바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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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도자 측에서 용의주도한 정숙을 통한 진실의 주체를 구축하기 (393)
참된 담론의 주체화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능력상에서 주체가 어떤 지점에 있는지를 의식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진실을 말하는 주체의 역할상에서 그를 시험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피지도자의 담론에는 독자성이 없으며 고유한 기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그의 역할은 정숙입니다. 피지도자로부터 끌어내고 추출하는 말과 또 대화의 독설을 통해 피지도자들ㅇ게 선동하는 말은 스승의 말 속에 진실 전반이 있고, 또 유일하게 거기에만 진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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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담론에서 parrhesia의 의무 (393~396)
그래서 스승의 담론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고행 활동, 즉 참된 담론의 점진적인 주체화에서 스승의 담론과 그것을 전개하는 방식에서 분별해야 할 부분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지점에서 parrhesia와 마주치게 됩니다. Parrhesia는 스승의 입장에서 제자 측의 정숙의 의무에 화답하는 바입니다. Parrhesia는 어원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솔직, 마음을 열기, 언어의 개방, 말의 자유)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parrhesia란 말의 도덕적 의미는 내가 논의하는 철학, 자기 기술, 자기 실천에서 아주 정밀한 기술적 의미를 지니며, 철학자들의 영적인 고행에서 언어와 말의 역할은 대단히 흥미롭다고 생각되며 바로 이같은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아리아누스는 에픽테토스의 <어록>을 쓰고 난 후에 “같은 단어로 그것을 전사하고 난 후에 그것을 나를 위해(emauto), 그리고 미래를 위해(eis husteron) hupomnemata의 형태로 간직하려고 시도했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말해진 바를 듣고, 쓰며 다시 베낍니다. 여기서 아리아누스는 자신이 분명히 ‘동일한 말’을 되풀이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는 hupomnemata를 자기 자신을 위해, 미래를 위해, 다시 말해서 다양한 사건과 위험 그리고 불행과 같은 상황이 닥칠 때 이 모든 것을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장비(paraskeue)를 구축하기 위해 구축합니다. 아리아누스는 자신을 위해 만든 hupomnemata를 출간하면서 다른 출간들이 할 수 없었던 바인 daiania, 즉 대화에서 에픽테포스 특유의 사유와 말의 자유를 복원하려는 임무를 자신에게 부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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