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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강 / 1982년 3월 24일 강의

 

발제_주체의 해석학_12강(통합본)_160619.hwp

 


전반부

스토아주의적 명상의 특징
자기 수련에서의 자기 인식은 ≪알키비아데스≫의 그것과 다르다.
① 자기 인식은 자기 자신인 바에 대한 재인식, 곧 신성과의 동일시라는 틀 내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에픽테토스는 ≪어록≫에서 인간이 자신을 돌볼 수 있고 또 돌보아야 하는 이유로 인간이 그 속성상(기능상) 여타의 자질들과 상이한 자질(말하는 자질, 음악을 연주하는 자질)을 ‘운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여러 자질들을 무작정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여러 자질이 선한지 악한지를 다른 자질에 의거하여 용례를 한정하여 사용해야 한다.
② 스토아주의자들은 자신에게 시선을 던지는 이유는 사유에서 일어나는 운동, 표상, 표상들을 따라다니는 의견과 판단, 육체와 영혼을 동요시키는 정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알키비아데스≫처럼 영혼의 실체적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표상과 정념의 흐름 내에서 발생하는 바를 관찰하고 통제하며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관건이다.
③ 스토아주의의 명상에서는 신성이 주체의 쪽, 곧 여타의 자질들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자질의 훈련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여타 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성찰하고,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점진적 절차를 통해 우리는 ‘현자’가 되고, 신(제우스)가 이미 가지고 있는 특성에 도달한다. 완전한 독립 상태에서 살기, 자기 자신과 타자에 대해 행사하는 통치의 속성에 대해 성찰하기, 자기 자신의 사유와 대화를 나누기, 자기 자신과 대화하기.
④ ≪알키비아데스≫에서 파악된 진실은 결국 타자를 지휘할 수 있게 해 주는 진실이다. 반면 스토아주의에서 자기로 향하는 시선은 자기 자신을 진실의 주체로 구축하기 위한 것이며, 이는 명상의 성찰적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찰성의 세 가지 유형
서구 역사에서 세 유형의 성찰성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① 기억의 형식. 이 성찰성에서 주체는 변형되는데, 그 이유는 기억 행위 내에서 주체가 자신을 해방하고 자신의 ‘본향’과 고유한 존재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② 명상의 형식. 여기서 우리는 진실의 윤리적 주체로서 자신의 구축하고 변형하는 것을 목표로 ‘실제로 자기 자신이 체험하는 바를 사유’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실천’하는 주체인 자신의 체험이 이루어진다.
③ 방법의 형식. 이는 있을 수 있는 모든 진실의 기준으로 쓰일 수 있는 확실성이 무엇인지 확정할 수 있게 해 주고, 객관적 인식의 조직과 체계화로 나아가는 성찰 형식이다.

고대 사유 전반은 기억에서 명상으로의 이동이었고, 그 귀결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였다. 반면 중세부터 근대 초기, 즉 16~17세기까지의 궤적은 명상에서 방법으로의 여정이었다. 그 근본 텍스트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명상≫이다.

올해 강의의 의도
정통 철학은 늘 주체, 성찰성, 자기 인식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한 분석의 근간으로 ‘자기 인식’을 특권화시켜 왔다. 그러나 자기 인식을 그 자체로 고찰한다면 우리는 그릇된 연속성을 설정하거나 날조된 역사를 창시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올해 강의는 그리스인들이 ‘자기 배려’라 명명한 바의 맥락과 토대 위에 자기 인식을 재위치시키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스 사유 내에서 자기 인식의 원칙은 독자적이지 못했고, 더 나아가 고대의 사유에서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는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배려는 완전히 상이한 성찰의 형식들을 발생시키는 복잡한 실천이다. 따라서 주체에 대한 일반적이고 보편적 이론을 전제하는 ‘자기 인식’의 연속적 역사를 구축해서는 안 되고, 성찰성의 형식들과 그 근간 역할을 하는 실천의 역사들을 연구해야 한다.

불행의 사전 숙고
이제 명상, 특히 ‘불행을 미리 숙고하기(praemeditatio malorum)’, ‘죽음에 대한 명상하기’, ‘의식 점검하기’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불행을 미리 숙고하기. 이는 헬레니즘 시대와 제정 시대까지 수많은 토론과 논쟁을 발생시켰다. 왜냐하면 그것이 얼핏 ‘미래’라는 키워드와 연결되어 있고, 그리스 사상 전반에 걸쳐 미래, 미래에 대한 사유, 미래로의 방향 설정·성찰·상상력은 불신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은 미래보다 과거를 중요시했고, 미래를 미리 근심하게 하는 것, 인간이 미래에 의해 미리 점유되는 것을 거부했다. 미래는 실상 인간에게 실존하지 않는 무이거나, 상상력을 통해 미리 선재한다고 여겨지는 것인데, 그러한 미래는 인간의 무기력을 강요한다. 자기 실천의 관건이 존재하는 바 혹은 발생하는 바와 직면해서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임을 고려할 때, 미래가 왜 부정적 가치를 갖는지 여기서 알 수 있다.
따라서 미래로 향하는 사람들은 현재와 현실태에 무능력하다. 미래로 향한 나머지 현재에 일어나고 이는 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현재가 과거 속에 즉각적으로 함몰되는 순간 현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를 사유할 수 없고, 무와 비존재에 지나지 않는 미래로 향해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과거, 또는 과거를 기억하는 게 자기 실천에서 더 중요하다. 기억 훈련은 이미 실존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결코 상실할 수 없는 그런 형태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사전 숙고의 현재성
‘불행을 미리 숙고하기’는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이는 단순히 미래를 미리 사유해 보거나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자연적이고 필연적 질서 내에서는 하나의 돌발 사건에 지나지 않지만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불행으로 생각되는 사건이 출현했을 때, 구조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참된 담론의 장비를 인간에게 갖추게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즉 그것은 불행을 대비하고 준비하기 위한 수련이다.
그러므로 사전 숙고는 ①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들 중 최악의 것들이 고려하고, ② 그 최악의 것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닥친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하며, ③ 그것이 지체 없이 즉각 닥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불행을 미리 숙고하기(praemeditatio malorum)’는 미래에 대한 사유가 아니다. 여기서는 미래를 막는 일, 체계적으로 미래의 고유한 차원을 제거하는 일이 관건이다. 즉 이것은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불행들이 이미 현재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미래를 소거하는 행위, 현행적 사유의 체험 내에서 모든 가능한 바를 현재화함으로써 미래를 소개하는 행위다.
이러한 ‘미래의 현재화’는 불행을 현실화한다거나 더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을 헤아려 보고, 그래서 그 사건이 중요성도 없고 지속되지도 않는 것을 깨닫도록 해 준다. 현실태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미래를 막고 상상적 적나라함을 통해 현실을 축소하는 것, ‘불행을 미리 숙고하기’의 목적이다. 즉 그것은 다른 자기 실천과 마찬가지로 paraskeue, 곧 장비 갖추기다.


후반부

죽음의 명상
사전 숙고의 극한이 ‘죽음의 명상’이다. 죽음은 다른 불행과 달리 절대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명상은 다른 명상에 없는 특징이 있다.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명상은, 마치 생의 마지막 날을 산다고 생각하는 훈련이다. 세네카는 하루를 한 달처럼, 일 년처럼 살고 또 전 생애가 하루에 흘러가 버리는 것처럼 살라고 권한다. 이 훈련의 관건은 “아! 나는 오늘 죽을 수도 있다”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매 순간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고, 또 하루의 마지막 순간을 실존의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조직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죽음의 명상은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① 현재를 굽어보는 즉각적 시선을 갖게 해 준다. 현재 살고 있는 순간 혹은 현재 살고 있는 날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게 되면, 현재의 내 사유와 행동의 가치를 좀 더 명확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된다. ② 인생 전반에 대한 회고적 시선을 갖게 해 준다. 죽음의 순간에 있다고 체험하는 경우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인생이었던 바 전체를 일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인생의 진실, 인생의 가치를 검토할 수 있게 된다. 곧 죽음에 대한 사유는 인생을 가치 평가하는 기억과 회고를 가능케 한다.
요컨대 죽음에 대한 훈련과 사유는 현재의 가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절단적 시선을 갖추게 하는 수단, 또 인생 전반을 총체화하여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해주는 기억의 거대한 고리를 작동시키는 수단이다.

의식 점검
마지막으로 의심 점검은 어떨까? 의식 점검은 피타고라스의 규칙, 곧 하루 동안 행한 모든 일을 점검하면서 부드러운 수면을 준비하라는 피타고라스의 운문에서 기원한다. 이때 의식 점검은 행위한 바를 심판하기 위한 것도, 후회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행한 바를 상기하고 또 이를 통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나쁜 것을 제거하여 스스로를 정화하고 평온한 수면을 취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의식 점검의 주된 목적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의 의식 점검은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 그들은 아침 점검과 저녁 점검을 행한다. 아침 점검은 앞으로 해야 할 바의 점검이다. 약속한 것과 만남의 약속, 대면해야 할 과업 등과 같이 하루 동알 해야 할 활동을 미리 점검하는 것이 관건이다.
저녁 점검은 그 역할과 형태가 아침 점검과 또 다르다. ≪분노에 관하여≫에서 세네카는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어 주변의 모든 것이 조용해졌을 때 하루 동안 행한 바를 재점검한다. 여러 상이한 활동을 숙고하고, 어떤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 자기 자신에게 어떤 관대함도 보여서는 안 되며 재판관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 의식 점검 프로그램에서 우리는 기독교에서의 고해성사, 곧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을 회고적으로 표명하는 ‘고백-자백’의 모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고해성사와 세네카의 의식 점검에는 차이가 있다. ① “친구와 담화하고 대화하며 그에게 도덕적 교훈을 주고 그가 발전하고 재기할 수 잇도록 도우려고 시도했으나 … 그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이처럼 세네카가 의식 점검에서 짚어내는 행동의 오류는 상대적 의미를 갖는 오류다. 이 오류는 주로 ‘기술적 실수’들로서, 세네카는 자신이 사용한 도구들을 잘 운용하거나 조종할 수 없었음을 짚어내고 있다. 즉 그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이유는 수단들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수단과 목표의 부조화). ② 세네카의 텍스트에는 법률적이고 사법적 유형의 은유들이 상당수 존재하지만, 사실 좀 더 중요한 관념들은 행정적 유형의 것들이다. 그는 모든 오류를 털어낸다는 의미에서 회계적 용어인 excutere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군대·야영·선박의 사열과 시찰과 같이 ‘면밀히 조사하다’를 의미하는 기술적 동사 scrutari를 사용한다. 요컨대 세네카는 자신에게 행정적 검열 작업을 가한다. ③ 세네카는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간과하지 않고 내가 한 모든 것을 상기하며 관대함을 내보이지도 않지만 내 자신을 징벌하지 않고 단지 앞으로 내가 한 일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할 뿐이다.”
요컨대 의식 점검은 행동의 근본 규칙을 재활성화하고, 유념해야 할 목적을 재활성화하며, 이 목적들과 즉각적으로 상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들을 재활성화하는 체험이다. 이런 맥락에서 의식 점검은 단순히 하루 동안 일어난 바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항시 유념해야 하는 규칙들과 관련된 기억 훈련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제 막 상기한 규칙들과 수행한 행동 간의 불일치를 측정하면서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지, 목표가 아직 멀리 있는지, 인식의 영역에 속해 있는 진실의 원리들을 자기 행위에서 해석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등 현재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는 일종의 시험의 성격을 갖는다.

삶, 테크네, 주체
epimeleia heautou, 즉 자기 배려가 삶의 기술(tekhne tou biou)에 의해 규정된 위치를 점유한 순간이 있었다. 고전기 초반부터 그리스인들은 삶의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자기 자신을 배려해야 하고, 이 자기 배려는 예측 불허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비하는 것이며, 이 사건들을 불가피한 필연성 속에서 현실화시켜 극소의 실존으로 축소시키기 위해 상상적 현실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벗겨내는 상당수의 수련을 행해야 한다는 원칙에 전적으로 사로잡히게 된다. 이 수련과 놀이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평생 동안 자신의 실존을 단련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 이래로 서구 사유에 존재하는 고유한 객관성이 무엇인지 알려면 고전기 그리스의 어느 순간과 상황에서 세계가 tekhne의 상관물이 되어 버렸다고 가정할 필요가 있다. 서구 사유에 고유한 ‘객관성의 형식’은 사유가 쇠퇴하여 세계가 tekhne에 의해 고찰되고 조작되는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서구 사유에 고유한 ‘주체성의 형식’은 bios(생)가 그리스 사유에서 유구하게 자신이었던 바, 즉 tekhne의 상관물이기를 중단하고 자기 단련의 형식이 되어 버린 순간에 구축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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