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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10강 (3월10일)
대다수 타인들은 자기애나 자기에 대한 혐오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기 환멸이나 과도한 자기애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상 배려해야 할 가치가 없는 것들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sollicitudo, 즉 자기 밖에 있는 사람들에 전념하고 몰두하면서 괴로워한다고 세네카는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모든 쾌락과 관능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은 자기애의 결과입니다. (405)
무엇이 parrhesia를 참된 담론의 특수한 실천으로 규정하는 걸까요? 그것은 신중과 능란의 규칙입니다. 즉 그것은 진실을 듣는 개인이 진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최적의 순간에 최적의 형식하에서 최적의 조건하에서 그 개인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parrhesia의 규칙들을 규정하는 것은 kairos, 즉 계기입니다. 왜냐하면 계기는 개인들 상호간의 상황이고 진실을 말하기 위해 사람들이 선택하는 순간이기 때문이지요. 말을 듣는 자와 그에게 말해야 하는 계기에 따라 parrhesia는 참된 담론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형식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412)
수사학은 타자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은 항시 말하는 자에게 가장 큰 혜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 이와는 반대로 parrhesia는 완전히 다른 목표와 목적을 갖습니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입장은 완전히 다릅니다. 물론 parrhesia에서도 타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그것은 그들에게 무엇을 명한다거나 이러저러한 일을 그들이 하도록 유도하거나 영향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이 세상에서 도달 가능한 모든 복락에 도달한 주체, 지혜로운 주체, 덕 있는 주체를 특징짓는 자기 자신과의 숭고한 관계를 통해 그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축하는 데 성공하도록 하는 게 근본적인 관건입니다. (...) 파르헤지아의 실천은 근본적으로 이타성에 의해 명령됩니다. 타인에 대한 아량은 파르헤지아의 도덕적 의무 사항의 핵심에 놓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솔직히 말하기, 파르헤지아는 구조상 수사학과 완전히 다르고 대립되는 무엇입니다. (413)
제자에게 말할 때는 많은 배려를 해야 하고 제자들에게 개입하는 경우들을 가능한 한 늦추어야 한다고 필로데모스는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적절한 순간을 정확히 선택해야 합니다. 말을 듣는 자의 정신 상태를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개적으로 너무 심하게 질책하면 젊은이들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질책할 수 있지만 이와 같은 방법을 선택해 모든 일이 즐겁고 유쾌한 상태(hilaros)에서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417)
솔직히 말하기가 문제이며 그것을 통해 제자들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선동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영향을 주어야 하고 그들에게 어떤 것을 선동하고 요컨대 무언가를 ‘강화해야’ 하는 스승의 솔직한 말하기, 파르헤지아가 문제시됩니다. 그런데 무엇에 생기를 불어넣고 강화하는것일까요? 그것은 자유롭게 말했다는 사실에 힘입은 제자들 서로에 대한 호의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자유롭게 말했단 사실에 힘입어 상호적인 호의가 확보되고 배가됩니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에는 스승의 파르헤지아에서 제자들의 파르헤지아로 옮겨가는 기호가 등장합니다. (418)
이 고백은 자신이 저지른 바가 유죄임을 인정하던 예식적이고 종교적인 고백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에피쿠로스주의단체의 고백에는 무언인가 완전히 다른 바가 있습니다. 요컨대 그것은 명시적이고 상세히 기술되고 규칙화된 언어의 실천이며, 이를 통해 제자는 스승의 진실의 용기에 일정한 진실의 용기, 즉 타자의 영혼과 소통하는 자기 영혼의 개방에 해당하는 일정한 마음의 개방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마음을 개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바를 행하며, 또 타자들이 자기에 대하여 거부나 거절 그리고 비난하는 태도가 아니라 eunoia(호의)를 갖도록 자극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단체의 구성원들과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도록 독려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처음으로 고백의 의무를 발견한다고 생각되며, 또 이것을 이후 기독교에서 재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나에게 진실을 가르치고 결국에는 나를 구원하는 데 도움을 주는 진실된 말에 타자에게 내 영혼의 진실을 열어 보여주는 진실된 담론으로 화답하도록 선동되고 요청받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420)
결과적으로 animi negotium(영혼의 교류, 활동 실천) 내에서 솔직히-말하기의 유용성은 다음과 같은 바를 궁극적인 목표로서 설정해야 합니다. 즉 들은 바를 그 아름다움을 상기하며 기억 한구석에 저장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나리 그것을 자기 자신 안에 각인해서 그것이 요구되는 상황에 처할 때 적절히 행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들은 말, 즉 파르헤시아에 의해 전승된 이 말의 유용성과 효율성은 시험에 입각해 평가될 수 있습니다. (432)
사람이 행하는 담론의 파르헤지아(솔직함)을 보장하기 위해 말하는 바 내에서 말하는 자의 현존이 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libertas와 parrhesia 개념에서 핵심적인 요소이고, 여기 세네카의 텍스트에서 개진되는 핵심 요소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파르헤지아, 즉 그가 말하는 바의 진실이 그가 관찰하는 행동과 실제로 자신이 사는 방식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파르헤지아의 토대는 진실을 말하는 주체와 이 진실이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주체 간의 일치라고 생각합니다. 전술적으로 타자에 맞추는 것 이상으로 파르헤지아와 libertas를 특징짓는 바는 말하는 주체 혹은 발화 주체와 행위 주체의 일치입니다. (434)
파르헤지아(libertas, 솔직히 말하기)는 스승의 말에 꼭 필요한 이 같은 형식이며, 또 이렇게 파르헤지아에 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요약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듣는 사람의 상황과 계기 그리고 특수성에 맞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말하는 자의 측면에서는 발화 주체와 행동 주체 간의 약속과 관계의 가치를 지니며 일정한 계약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규칙으로부터 벗어나고 수사학적 절차들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말입니다. 말하는 주체는 약속합니다. “나는 진실을 말한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말하는 바를 행한다고 약속하고, 또 자신이 표명하는 진실에 정확히 따르는 행동의 주체임을 약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인 예가 없는 진실 교육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관계가 (대중 집회에서 주어지며 어떤 개인이 군중에게 진실을 설득하는 연극적인 교육에서보다 훨씬 더) 필요합니다. 대화상에서 개인적인 관계가 필요합니다. 요컨대 공유하는 삶의 관계, 손에서 손으로 전승되는 살아 있는 모범의 긴 연쇄가 필요합니다. 이는 실례가 말해진 진실의 이해를 단지 더 수월하게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례와 담론의 연쇄에서 계약이 부단히 재생산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진실을 말하고 나는 당신에게 진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진실을 말한다는 것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바는 실제로 행동주체인 내가 절대적으로, 전적으로, 완전히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바를 당신에게 말할 때 발화주체인 나와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파르헤지아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435)
말하자면 기독교의 영성에서는 인도되는 주체가 자신의 참된 담론의 대상으로서 참된 담론의 내부에 현존해야 합니다. 이 점을 강조합니다. 인도받는 자의 담론 내에서 발화 주체는 언표의 지시 대상(referent)이어야 합니다. 요컨대 이것이 고백의 정의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로마 철학에서는 참된 담론에 현존해야 하는 자는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언표의 참조 대상의 형태로 현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나는 이렇다”라고 말하는 사람으로서 현존하는 게 아니라 발화 주체와 자기 행동의 주체 간의 일치 속에서 현존합니다. “내가 너에게 말하는 진실을 너는 내 안에서 본다.”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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