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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강 / 1982년 3월 17일 강의 / 호섭

발제_주체의 해석학_11강_160619.hwp

 


전반부

정숙의 교육적 기능
피타고라스학파 내에서 ‘정숙’은 교육적 정숙, 스승의 말과 관련한 정숙이었다. 정숙은 일종의 ‘기억’ 훈련이었다. 제자는 스승의 말을 끊는다거나 질의응답을 할 권리가 없었고, 말할 자격도 부여받지 못했다. 메모할 권리도 없었다. 모든 것은 기억의 형태로 그의 머릿속에 기록되어야 했다. 제자는 정숙과 경청, 이 두 가지를 터득한 이후에야 말하고 질의할 수 있는 권리, 들은 바를 쓰고 생각한 바를 설명할 수 있는 권리를 갖질 수 있었다. 정숙은 모범적인 제자들에게는 배움의 첫 번째 초석이었다.

금욕적 자기 수련
참된 담론의 경청과 수용에서 그 사용과 활성화 문제로 넘어가 보자. 여기서는 단지 참된 담론을 재음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활동을 통해 그것을 사용하고 활성화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즉 고행을 통해 주체는 참된 담론과 진실을 자신의 에토스로 변형시켜야 한다. 이 과정을 표현하는 단어 중 하나가 자기 수련으로서 금욕적 자기 수련(ascetique)이다. 금욕적 자기 수련은 행동과 참된 인식의 주체로 자신을 변형하기 위해, 개인이 실제 행할 수 있고 또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체계화된 수련의 총체를 말한다. 절제, 명상(죽음의 명상, 닥쳐올 질병들에 대한 명상), 의식 점검 등등이 그 범주에 속한다. (한편 이러한 금욕 수련이 기원적 6, 7세기 북동부 유럽 문명과 접촉하면서 그리스로 유입되었다는 설이 있다.)

자기 수련의 역사적 함의
≪알키비아데스≫는 ‘자기 배려’가 ‘자기 인식’으로 회수되는 순간을 보여 준다. ‘너 자신을 배려하라’보다 ‘너 자신을 인식하라’라는 정언이 더 높은 위상을 차지한다. 종국에는 ‘너 자신을 배려하라’가 곧 ‘너 자신을 인식하라’가 되기까지 한다.
반면 스토아-견유주의의 자기 수련은 자기 인식을 중심으로 조직되지 않는다. 물론 스토아-견유주의에서도 자기 인식이 아예 사장되는 것은 아니다. ‘신과의 동일시를 위한 자기 자신의 재인식’과 같은 테마도 존재한다. 그러나 자기 수련이 자기 인식에 함몰되어 있지는 않았다. 자기 인식과 자기 수련 사이에는 격차가 존재했다. 이러한 격차 덕분에 자기 수련은 16~17세기 기독교 영성에까지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꾸준히 명백히 유지했다. 3세기말과 4, 5세기 전반 동안 수도원 제도 내에서 기독교 영성은 신플라톤주의적인 그노시스적 실천(모든 인식을 영혼이 자신을 재인식하고 자신을 신성한 요소에 재인식하는 행위에 집중하는 것)과 결별하는 노선을 취했다. 자기 수련은 기독교가 그노시스의 영성에 빠지지 않기 위한 기술적 보증이었다.
또 자기 수련은 신성한 바를 재인식하는 활동이라기보다 지속적인 의심을 의미했다. 자기 안에서 일차적으로 재인식해야 하는 것은 신성한 요소가 아니다. 스토아주의자가 자기 안에서 과오와 나약함의 흔적을 간파하려고 노력했다면, 기독교인은 자기 죄의 흔적과 사탄의 흔적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요컨대 기독교 영성은 스토아주의의 ‘의심의 모델’을 취했고, 이 모델에 바탕한 여러 수련들은 15, 16세기부터 종교 개혁은 물론 반종교 개혁 내에서 훨씬 중요하고 강한 새로운 차원과 강도를 갖게 됐다.

기독교 수련과 철학적 수련의 차이
철학자들의 자기 수련에도 여러 규칙성과 지표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규칙과 지표보다 수련자의 자유로운 선택이 더 중요하다. 이때 수련은 생의 규칙이라는 틀이 아니라 ‘생활의 기술(tekhne tou bioe)’의 틀 속에서 발생하며, 자신의 삶을 tekhne의 대상으로 삼는 것,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만드는 작업은 tekhne를 사용하는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는 철학적 수련과 기독교 수련 사이의 차이다. 기독교 수련은 로마 군단 모델을 취하는 반면, 철학적 수련은 규칙(regula)에 따르지 않고 형식(forma)에 따른다.

명상(meletan)과 수련(gumnazein)
철학적 금욕실천론을 살필 때 도움이 되는 두 용어가 meletan과 gumnazein다. meletan은 명상하는 것, 즉 사유상에서 수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과 원리를 사유하고 성찰해 사유를 통해 ‘준비’한다. gumnazein는 현실 속에서 수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위적으로 요청하거나 조직한 것이든, 실제로 자기 인생에서 마주친 것이든 간에 gumnazein는 실제 상황과의 대면을 전제한다.

절제의 목표와 실행
gumnazein, 즉 ‘실제적 상황에서 행하는 수련’은 다시 ‘절제’와 ‘시련’으로 다시 나뉠 수 있다.
먼저 절제. 무소니우스 루푸스는 수련에서 신체는 간과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덕이 능동적이 되려면 신체를 거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신체의 수련은 두 가지 목표를 갖는다. 용기(andreia)와 자제(sophrosume). 신체 수련은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것을 견뎌낼 수 있게 해 주는 용기와, 모든 내적인 동요를 파악하고 해결하며 제어할 수 있는 자제를 배양해야 한다.
이때 신체 수련은 플라톤이 말한 신체 수련(체조)과는 거리가 멀다. 무소니우스가 말하는 신체 수련은 체조가 아니라 절제, 곧 배고픔·추위·더위·수면과 관련한 인내요법을 말한다. 굶주림, 갈증, 극도의 추위와 더위를 참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즉 체조적 신체가 아니라 인내, 끈기, 자제의 신체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 세네카는 실체 체조에 대해 비판을 하다. 그것이 정신을 지치게 하고 신체적인 과부화로 정신을 짓누른다는 이유다.

시련의 특징
시련은 절제와 구분되는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① 시련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질의를 포함한다.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또 그것을 끝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② 성공과 실패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진보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하는 바, 또 그것을 하는 자신에 대해 양식 있고 의식적인 일정한 태도를 갖는 한에서만 시련은 시련일 수 있다. ③ 시련은 삶의 일반적 태도가 되어야 한다. 생애 전반이 시련이 되어야 한다.

물음으로서 시련, 태도 구축으로서 시련
에픽테토스는 분노와 싸우기 위해 몇 날 며칠 동안 화를 참을 수 있을지 자문한다. 자신의 향상을 확보하고 가늠하는 이러한 계약-시련의 유형은 플루타르코스의 분노 통제에도 활용된다.
절제는 또한 규칙의 단순 부과가 아니라 내적 태도의 형성으로 이어져야 한다. 에픽테토스틑 길거리에서 젊고 아름다운 소녀를 만났을 때 전혀 아무 느낌도 갖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핵심을 순결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사유 작업을 통해 욕망과 상상을 중화하는 것이다.


후반부

시련으로서의 생
제정 시대 철학의 금욕실천론에서 시련은 어느 순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실존 전반에 걸친 것이 된다. 이른바 ‘시련으로서의 생’이라는 테마가 출현한다. 그리고 이 테마의 핵심에는 ‘아버지로서 신’이라는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아버지로서의 신은 자식인 인간을 ‘용기를 자기고 사랑(amat fortitier)’한다. 이 말은 자식이 적절히 교육받을 수 있도록, 장차 닥칠 수 있는 실제적 피로·고통·불행에 대비할 수 있게 해 주는 피로·어려움·고통을 통해 교육받을 수 있도록 신경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는 사악한 자와 선한 자를 구별한다. 신성의 총애를 받는 선한 사람들만이 인생의 가파른 길을 기어오르기 위해 노력하고 수고하며 땀 흘린다.

생-시련 담론의 특징
생 자체가 시련의 연속이 되면서 여기서 독특한 함의들이 덧붙는다.
① 인생 전반이 일종의 ‘교육’ 과정이 된다. ≪알키비아데스≫에서 자기 배려는 부족한 교육의 대체물이었다. 반면 이제 자기 배려, 자기 실천은 일반화된 교육이다. 인생의 모든 불행을 통해 자신을 단력하는 데 자기 배려의 목적이 있다.인생과 교육의 공통 외연성.
② 시련으로서의 인생은 선량한 사람에게 예정되고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시련에는 식별적 기능이 덧붙는다. 불행과 불운, 고통을 먼저 ‘정찰’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대단히 혹동하고 어려운 시련을 격고, 동표 시민들이 겁내는 모든 위험들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겁낼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시련과 연결된 ‘정찰병-척후병’이라는 테마가 여기서 등장한다.

불행의 문제
따라서 시련과 불행은 더 이상 나쁜 것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난관과 고통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에픽테토스는 모든 낙관과 곤란은 유익하게 이용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나를 모욕하는 자는 “내 스승이 되어 내 인내력, 평정, 온화함을 훈련시킨다.” 즉 나를 아프게 한다는 한에서 악을 선으로 변형되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선으로의 변형은 고통이 실제적으로 시련이라는 점, 또 주체에 의해 인정되고 체험되고 실천된다는 점에서 야기된 고통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시련으로 단련되는 삶
이상의 내용과 관련해 몇 가지 사항을 확인해 보자.
① 시련으로서의 삶이라는 관념은 모든 고전기 그리스 비극과 위대한 신화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 비극에서 시련은 일종의 인간과 신의 대결이다. 이 투쟁 관계는 불행에 의해 결정적으로 기진맥직해진 인간이 위대하게 되면서 마무리된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대표적 사례를 보여 준다.
그러나 스토아주의 시련의 토대를 이루고 세네카와 에피테토스가 규정하는 시련은 이와 같은 신과 인간의 거대한 대결이나 한판 팔시름이 아니다. 고통의 준엄한 부자중심주의를 통해 신들은 실제로 인간을 교육하는 데 필요한 일련의 시련과 불행을 선량한 인간 주변에 배열한다. 여기에는 결투가 아니라 보호적 자비심이 있다.
② 시련이 식별적 기능을 갖는다는 역설적 테마는 이론적 공백으로 남아 있다. 신이 인간을 시련에 빠트리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해 그들을 준비하게(sibi)하기 위함이라고 세네카는 말한다. 그런데 이 준비는 무엇이며 또 무엇을 위한 준비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인생이 준비다’는 분명 중요한 테마이지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는 긴급하게 제기되지 않는다. 식별의 문제에 대해서도, 세네카나 에픽테토스는 진지하게 매달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③ 위 두 테마는 기독교 신앙 생활에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된다. 기독교에서 ‘시련으로서 인생’이라는 관념은 기초 관념이 된다. 또 인생에서 준비해야 할 것은 불명과 구원이 되고, 식별의 문제는 예정설이나 인간의 자유, 은총 등 기독교적 사유가 집착하는 근본 문제가 된다.

헬레니즘 · 로마 시대의 주체 구성
그리스 고전기 이후 자기 배려의 원칙은 ‘삶의 기술’ 또는 ‘실존의 기술’이라는 일반적 문제 내에서 표명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tekhne의 분절이라는 합리적이고 명령적인 분절을 참고하게 됐다. 요컨대 도시국가가 억압적이라 해도, 법(nomos) 관념이 중요하다 해도, 종교가 그리스 사유에 보급되어야 해도, 결코 그리스인이나 로마인(특히 그리스인)에게 인생에서 해야 할 바를 구체적으로 말할 권한을 갖지 못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인간의 자유 적용 영역을 인간이 사용하는 tekhne(자기 기술)에서 발견하고 전개시켰다.
헬레니즘·로마에는 그런데 삶의 기술과 자기 배려 간의 역전과 비틀림이 발생함을 볼 수 있다. 자기 배려는 삶의 기술 전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지배하며 지탱하며, 삶의 기술은 이미 독자화된 자기 배려의 범위 내로 완전히 들어오게 된다. 요컨대, 수양적이고 식별적인 가치를 가지며 전적으로 시련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인생’, 그 의미와 목적은 무엇일까? 이는 ‘자신을 수양’하는 데 있다. 사람을 더 잘살기 위해, 또는 더 적절히 타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자기를 배려하는 게 아니다. 인간은 자기와 최상의 관계를 맺기 위해 살아야 한다. 극단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 이는 서구 주체성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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