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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 1982년 2월 17일 강의
주체의 해석학 7강(2월 17일) 발제 16.05.29.hwp
전반부
자기로의 전향
‘자기 자신을 배려하기’는 새로운 개념으로 이어진다. ‘자기로의 전향’이 그것이다. 주체는 자기 자신에게로 전향해야 하고, 자기 자신에게 몰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그리스어 표현으로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자기 자신으로 귀한하기’ 등이 있는데, 이 표현들은 ‘주체의 실제적 운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방점은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거나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고 각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실제로 이동하는 것에 있다. 주체는 자기 자신인 바로 나아가야 한다. 이동·여정·노력·운동, 혹은 후퇴·순환·귀한. 요컨대 ‘이동’과 ‘회귀’는 자기로의 전향을 살필 때 유념해야 할 사항들이다.
항해의 은유
이런 요소들을 응축하는 은유가 바로 ‘항해’다. 항해는 다음과 같은 관념을 내포한다. ①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의 이동, 곧 도정. ② 일정한 목표. ③ 그 실체적 목표지인 항구, 곧 안식처. ④ 도정에 개입해 들어오는 위험. ⑤ 위험을 극복하고 얻게 되는 복락 ⑥ 도정을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앎과 테크닉, 수완에 대한 전제.
특히 이 마지막 관념, 항해에 필요한 ‘앎’은 이론적이면서도 기술적 앎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실제로 ‘의술’, ‘정치적 통치’, ‘자기 자신의 통솔과 통치’라는 세 유형의 활동은 모두 항해술과 연관되어 표현되었다. 이 항해의 이미지를 통해 그리스와 로마인은 tekhne, 곧 ‘보편적 원리·관념·개념에 입각한 실천의 기술과 그 숙고된 체계’를 설립하려고 했다. 그리고 16세기까지, 즉 국가 이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통치 기술의 정의가 자기 통치와 의학과 타자의 통치를 철저하게 구분하기에 이를 때까지 항해의 은유는 역사상 꾸준히 이어졌다.
자기로의 전향이 서구 문화에서 갖는 의미
자기로의 전향은 서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① 자기 회귀 테마에 대한 거부는 기독교 영성의 중심축이었다. 기독교 금욕주의는 다른 생·빛·진실·구원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근본 원리로 삼았다.
② 자기로의 회귀는 16세기 이후 근대 문화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테마이기도 했다. 다만 그것은 헬레니즘·로마에서처럼 총체적이고 연속적인 방식이 아니라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다. 슈티르너, 쇼펜하우어, 니체, 댄디즘, 보들레르, 무정부주의, 무정부주의적 사유 등은 자기 미학과 자기 윤리를 구축하고 복원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을 공히 던졌다.
③ 오늘날 ‘자기로 돌아가기’, ‘자기를 해방하기’, ‘자기 자신이 되기’, ‘진정하게 되기’와 같은 표현들에 실상 의미가 부재하는 것을 보았을 때, 자기 윤리 복원의 노력이 모두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이 자리 윤리를 부단히 참조하게 만드는 활동에는 무언가 의심해 볼 만한 구석이 있다. 그럼에도 자기와 자기의 관계 내에서가 아니라면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의 궁극적 지점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또 통치성 관념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자기와 자기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주체의 요소를 이론적·실천적으로 거치지 않을 수 없다면, 정치 문제와 윤리 문제를 접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자기로의 전향과 자기 인식 간의 관계 유형
자기로의 전향과 자기 인식은 어떤 관계로 맺어지는가. 그 관계 유형을 세 가지 지목할 수 있다. 플라톤적 모델, 기독교적 모델, 그리고 그 사이의 헬레니즘적 모델.
플라톤주의적 모델에서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의 관계는 세 요소를 중심으로 설정된다. ≪알키비아데스≫를 환기해 보자. ① 자기를 배려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무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지하며 또 자신이 무지한지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② 이로써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가 중요해진다. 이때 자기 인식은 영혼에 의한 자기 자신의 존재 파악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영혼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재확인하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며 존재를 파악하려 시도해야 한다. ③ 결과적으로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의 접점에 ‘상기’의 문제가 핵심 쟁점이 된다. 영혼은 자신이 본 바를 상기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재발견한다.
기독교적 모델은 ‘수도원 금욕’ 모델이라 표현할 수 있다. 그 특징은, ① 기독교 모델에서 자기 인식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주어진 진실을 인식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때 자기 인식은 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마음의 정화를 전제한다. ② 자기 인식은 내면의 환상을 걷어내는, 영혼과 마음 안의 유혹을 식별하고 와해시킬 수 있는 기술을 통해 실천된다. ③ 여기서 자기 인식의 목적은 상기를 통한 자기 재발견이 아니라 자기 포기다.
이 두 모델 사이에서 가려진 헬레니즘 모델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① 플라톤주의 모델과 달리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기 배려를 강조하고 특권화한다. ② 기독교 모델과 달리 자기 포기를 지향하지 않고 자기를 목적지로 구축하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플라톤주의 모델은 상기를 중심으로 돌고, 기독교 모델은 자기 포기를 중심으로 돌고, 헬레니즘 모델은 자기의 자목적화를 중심으로 돈다.
헬레니즘 모델에서 자기 인식의 위상: 세네카의 사례
견유주의와 에피크로스주의 텍스트에서 알 수 있듯, 헬레니즘 모델에서 자기 인식과 자연에 대한 인식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로의 전향은 자연을 인식하는 일정한 방식이다.
이 쟁점을 스토아주의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자. 스토아주의자들은 견유주의자나 에피크로스주의자들처럼 무용한 지식을 비판했고, 인간의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인식·지식·기술 정언을 우선시했다. 모든 지식은 생활의 기술(tekhne tou biou)이어야 했다.
그런데 일견 역설적이게도(오직 ‘도덕’만이 중요하다고 설파한 아리스톤처럼) 스토아주의 사상은 우주론과 세계 질서에 관한 사변을 체계적으로 구축하기도 했다. 모든 지식을 생활의 기술에 종속시키고 시선을 자기 쪽으로 향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세계의 질서와 그 일반적·내적 조직을 탐구한 스토아주의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기 자신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동시에 세계의 질서를 탐색하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세네카의 사례를 살펴보자. 세네카는 ≪영혼의 평정에 관하여≫에서 알렉산드리아도서관에 수집된 책들이 왕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는 책을 과도하게 읽지 말고, 해석을 배가시키려고 하지 말고, 호기심을 분산시키지 말고 오직 두세 권의 책을 취해 심독하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자연의 의문들≫에서는 천체의 도정과 강수의 지리, 불과 기상에 대한 설명 등 천지를 포괄하는 방대한 탐색을 펼친다. 자기가 이런 종류의 책을 쓰는 이유를, 세네카는 이 책 1권과 3권의 서문(루킬리우스에세 보내는 동반 서신)에서 자문하고 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의 거대한 원’을 주파하고 그것의 ‘원인과 비밀’을 탐구하는 것인데, 정작 나에게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세네카는 자신이 세계를 주파하며 그 원인과 비밀을 탐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네 가지 쟁점을 언급한다.
첫째, 세네카는 세계를 탐색하며 그 원인과 비밀을 찾고 있으며 동시에 자기는 노인이라고 말한다. 이는 ‘노년의 테마’, 곧 생을 서두르는 것과 가능한 한 빠르게 주파한다는 테마와 연결된다. 세네카의 관심은 생이 완결되는 지점에 서둘러 도착하는 데 있다. 여기서 완결은 시간상의 끝이 아니라 ‘충만성’에 도달한다는 의미에서의 완결이다. 그 이전까지 그는 무용하고 공허한 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시간을 허비했다. 노년의 그는 이제 자신과 밀접한 영역을 집중해서 돌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 상관없는 문제들은 배제해야 한다.
둘째, 세네카는 노년의 자기가 배제해야 할 것이 ‘역사적 지식’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외국 왕들의 이야기, 그들의 모험담과 무훈, 정복에 대한 이야기다. 이 모든 것은 왕을 칭송하는 이야기고, 동시에 백성들에게 가해진 고통의 이야기다. 세네카는 역사가들처럼 이러한 ‘정념’들에 관심을 거두고 자기 자신의 정념 또한 초극해야 하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불안정한 승리나 불확실한 재산에서 인간의 위대성을 보는 위험과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 역사적 지식 중 유익한 것은 화려함과 권능의 가시적 형태가 아니라 오직 자기 제어를 실천한 모범적 개인(겸손한 ‘카토’, ‘스키피오’ 등)으로 한정된다.
셋째, 역사적 지식에서 위대성을 찾지 말아야 한다면, 무엇에서 위대성을 발견할 것인가? “위대한 것은 정신의 눈을 통해 세계 전체를 본 것이며, 가장 아름다운 승리인 악덕에 대한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도시와 국가 전체의 지배자가 된 사람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지배자가 된 사람은 참으로 적다. 이 세상에서 위대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운명의 위협과 약속 위로 영혼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수준에 있는 것을 운명에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 위대한 것은 역경 속에서도 마치 그것을 원하기라도 하듯이 모든 사건들을 받아들이는 굳건하고 평온한 영혼이다. … 위대한 것은 자기 발밑에 운명의 화살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여기서 세네카는 자기를 지배하는 것, 역경에서 굳건하고 평온한 것, 쾌락과 싸우는 것, 일시적 행복이 아니라 지혜를 구축하는 것, 떠나기 위해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한다. 결과적으로 자기와의 관계에서 필요한 질과 충만함을 갖추는 것, 곧 죽을 채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후반부
자연의 연구와 자기 배려
(넷째) 세네카는 ≪자연의 의문들≫ 3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대한 것은 자신의 영혼을 입술 가장자리에 위치키시고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도시국가의 법에 의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에 의해 자유롭다”(세네카). 이때 ‘자유’는 ‘예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예속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예속’이다.
세네카는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는 것은 모든 예속 중 가장 무겁고, 부단하고,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항과 투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두 조건하에서 이 예속성을 동요시킬 수 있다. 첫째, 자기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 자기 자신에게 많은 노고를 부과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한 일에 대한 봉급, 이익 분배, 보상의 형태로 자기에게 부여되는 바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자기 자신을 이윤에 결부시키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다. 요컨대 책무-보상의 체계, 채무-활동-쾌락의 체계 속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세네카는 자연에 대한 연구가 바로 이 책무-채무 체계 속의 자기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해방을 위해 사물의 자연을 응시하고 탐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곧 해방해야 할 자기는 바로 이 자기 관계이며, 자연에 대한 탐구가 이 해방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철학의 두 부분
≪자연의 의문들≫ 1부 서문은 철학을 두 분야로 구분하면서 시작한다. 먼저 인간과 관련되고 인간을 돌보며 응시하는(ad hominess spectat) 분야가 있다. 이 분야는 지상에서 해야 할 바(quid agendum in terries)를 논한다. 다른 분야는 인간을 응시하지 않고 신들을 응시한다(ad deos spectat). 여기서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바(quid agatur in caelo)를 논한다.
인간을 성찰하는 철학은 오류를 피하게 해 준다. 이 철학은 인생의 모호한 길을 식별하게 해 주는 빛을 지상에 가져 온다. 반면 신들을 성찰하는 철학은 인간을 어둠에서 끌어내 빛의 원천으로까지 인도한다. 여기서 쟁점은 세계의 위로 상승하는 운동, 암흑으로부터 벗어나는 영혼의 실제적 운동이다. 이 운동은 네 가지 특성을 갖는다.
① 이 운동은 결점이나 악덕과의 절연을 완수하고 완결하는 자기와 관련해 또 다시 도주와 절연을 구축한다. “너는 많은 것들로부터 도망쳤지만 너 자신으로부터는 도주하지 못했다.” ② 이 운동은 신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거나 신 속으로 침잠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과의 공통 자연성 혹은 공통 기능성 내에서(in consortium Dei) 우리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게 해 주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이성은 신의 이성과 동일한 속성과 역할, 기능을 갖는다. ③ 이 운동에서 인간은 가장 높은 곳까지 상승한다. ④ 이로써 인간은 자연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꿰뚫게 된다. “영혼은 자연의 가장 내밀한 가슴 한복판에 도달하게 된다.”
영혼의 상승 운동과 자기 해방
이 운동의 결과 혹은 의미는 무엇일까.
이 운동은 이승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다. 진리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외관 세계를 떠나는 것도 아니다. 이는 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운동과 다르다. 플라톤주의 운동은 다른 세계를 응시하기 위해 이승 세계를 벗어난다. 반면 세네카가 정의한 스토아주의 운동은 성격이 다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있는 지점으로부터 후퇴해야 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눈길을 떼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계로부터 결코 눈길을 떼지 않으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도달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 위치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시선’은, 이전에는 소중한 것으로 보이던 것이 실상은 보잘것없으며 가식적이고 인공적인 속성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부·쾌락·영광과 같은 모든 일시적 사건들은 인간이 이 후퇴 운동에 힘입어 가장 높은 곳에 이르게 되는 순간부터, 세계 전체의 비밀이 밝혀지게 되는 순간부터 진정한 차원을 회복하게 된다. 전 세계를 주파한 후에야, 세계를 그 보편적 원 내에서 주파하고 지상의 원을 높은 곳에서 굽어볼 수 있게 된 후에야, 인간이 개조한 가시적인 화려함을 ‘경멸’할 수 있다고 세네카는 말한다. 한 번 이 지점에 도달하기 되면 바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그릇된 가치와 거래를 배격하고 실추시키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의 실제적인 우리의 실존(공간과 시간 속에서 하나의 점에 불과한 실존)과 우리의 보잘것없음을 가늠하게 해 준다.
요컨대 자연을 주파하는 것은 인간이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 아니다. 비현실의 세계나 암흑과 외관의 세계 내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다시 파악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보편 체계 내에서 우리를 하나의 점으로 표시할 때, 자연 사물의 전반적 체계에 시선을 던질 때 우리가 얻게 되는 해방이다.
자기 인식과 세계 인식
헬레니즘 모델에서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자기 인식에서 자연에 대한 인식이냐, 자기에 대한 인식이냐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관점과 인식, 자연의 전반적 조직 체계와 그 세부 사항을 인식하게 해 주는 폭넓고 세밀한 지식을 갖출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적절히 인식할 수 있다. 신의 섭리의 세계인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안전한 세계 내에 우리의 위치를 재설정해야 한다.
② 세계를 주파하고 우리가 있는 지점에서 후퇴하여 자연의 총체를 파악하는 것은 해방적 효과를 지닌다. 자연에 대한 지식은 인간을 교정하여 연속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관점을 갖게 해 주고 자기 명상을 가능케 한다. 주체의 영적 후퇴 운동이라는 조건하에 ‘시선을 잃지 않는 것’과 ‘세계 전반을 눈길로 주파하는 것’ 활동은 분리불가능하다.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기, 내면의 비밀로 방향을 바꾸는 대신 세계의 비밀을 탐색하기. 영혼의 덕은 여기에 있다.
③ “우리의 육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영혼에 고통을 가하는 무게이다. 육체는 영혼을 억압하고 고통을 가하며 사슬로 영혼을 묶지만 철학은 영혼이 신성한 현실을 위해 세상을 버리게 만든다. … 이따금씩 영혼은 감옥으로부터 탈출하여 하늘을 향유하며 자신을 재창조한다”(세네카). 플라톤주의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이러한 주장은 잘못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영혼의 운동에 대한 이미지는 플라톤의 그것과는 다르며, 전혀 다른 영적 줄기와 구조에 속한다.
먼저, 이 운동에는 ‘상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의 본질 재발견 이상으로 세계를 가로지르는 탐색, 세계의 사물과 그 원인을 거치는 탐구가 문제시된다. 즉 자기 자신으로 퇴각한다거나 영혼이 과거에 본 순수한 형식들에 대한 추억을 자기 자신 안에서 재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계의 사물을 현행적으로 보는 것과 그 세부 사항과 조직 체계를 파악하는 것이 주된 문제다.
아울러 이 운동에는 다른 세계로의 이행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네카가 기술하는 운동을 통해 인간이 도달하는 세계는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다. 인간은 후퇴하면서 자신이 위치한 맥락이 확장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다시 파악한다. 요컨대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 속한 세계의 총체적 질서를 볼 수 있는 지극히 중심적이고 높은 지점에 위치하는 것, 자기가 자기를 굽어보는 시선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다.
굽어보는 시선
세계를 굽어보는 시선과 이 시선을 점차적으로 굽어보는 시선(점차적으로 상승하면서 점차적으로 포괄적이 되는 시선)을 제공하는 이 영적 운동은 플라톤주의적 운동과는 성격이 다르다. 아울러 이는 서구 문화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영적 경험의 한 형식이기도 하다.
세네카의 ≪마르키아에게 보내는 위로문≫에는 독특한 구절이 하나 나온다. “생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네 영혼이 세상으로 보내지기 이전에 일어날 일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보거라.” 여기서 쟁점은 선택의 권리가 아니라 시선의 권리, 굽어보는 시선임을 알 수 있다. 세네카는 마르키아에게 생명 이전을 생각해 보라고 제안하면서 그 시선을 가지도록 권유하는데, 이는 사실 현자가 생의 마무리 단계에서 던져야 하는 시선과 동일한 것이다.
세계를 굽어보는 시선을 가지라고 권유하는 이유는, 플라톤의 사례처럼 영혼들이 그들의 운명을 선택하듯이 그로 하여금 선택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직 하나의 세계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에게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하늘·천체·기상·세상의 아름다움·평원·바다·산 등에서 그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경이로운 것들이 신체와 영혼의 재앙·전쟁·약탈·죽음·고통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관건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선택해야 할 점은, “네 자신과 대화하며 네가 원하는 바를 숙고해 보아라. 이 경이로운 생명 속으로 한번 들어오면 이렇게 그것으로부터 나가야 한다”다. 즉 인생의 문턱인 세상에 태어나려 하는 순간에 영혼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 사항은 거기에 들어갈 건지 나갈 건지에 대한 선택, 곧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세네카는 마르키아에게 이러한 세상에서 살 것인지 말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고, 만약 그가 삶을 선택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세상의 총체(경이로움과 고통을 수반하며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의 총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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