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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4강(1월27일) 발제

 

주체의 해석학 4강(1월27일) 발제 16.05.22.hwp

화니짱

전반부

 

1,2세기 자기 배려 실천의 일반적 특성에 대한 환기

지난번에 지적한 첫 번째 특징은 자기 실천을 생활의 기술에 통합하여 상호 연루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이는 명백히 자기 실천과 관련해 상당히 많은 결과들을 발생시켰습니다. 첫째로, 교육적이기보다는 훨씬 더 비판적인 기능이 그것입니다. 즉 훈육하는 것보다 교정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는 교육으로부터 자기 실천을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59) 두 번째 특질은 자기 배려가 무조건적인 원칙으로 표명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자기 실천은 만인과 관계하지만 실제로 자기를 가질 능력을 갖춘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그리고 무조건성과 관련한 두 종류의 배제 형식은 폐쇄된 집단에의 귀속이나 교양 있는 여가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이는 경제·사회적 형태의 격리를 대표합니다. (160)

 

헬레니즘·로마 시대: 주체화의 숙달

이 구원의 빈 형식에 고대의 문화와 철학, 그리고 사유가 어떤 내용을 부여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구원의 형식과 거기에 부여해야 할 내용 간의 매개자인 타자의 문제, 타자와의 관계의 문제라는 선행적 문제를 제기하려고 합니다. 자기 실천이 규정하는 형식이 실제적으로 그 대상인 자기에 도달하고, 또 자기로 채우기 위해 타자는 불가결합니다. 이것이 보편적 양식입니다.

 

타자의 문제: 플라톤 대화에서 세 유형의 숙달

<알키바아데스>의 대화를 통해 세 유형의 숙달, 다시 말해서 세 종류의 타자와의 관계가 젊은이의 교육을 위해 필요 불가결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모범의 숙달이 있습니다. 둘째로 가장 어린 자에게 전승되며 제안되는 행동의 모델이 있고, 이는 교육에 꼭 필요합니다. (161) 두 번째 유형의 숙달은 수행 능력의 숙달, 요컨대 가장 어린 자에게 단순히 지식·원칙·소질·수완을 전승시킬 수 있는 능력의 숙달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유형의 숙달은 대화를 통해 수행되는 소크라테스의 숙달, 즉 곤경과 발견의 달련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세 종류의 숙달은 각기 무지와 기억의 놀이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델을 상기하며 수완을 상기하고 배우고 숙달하는 것이 문제시되고, 또 결여된 지식은 기억 속에서 쉽게 재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며, 결과적으로 모른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임을 깨닫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에 숙달은 기억에서도 작용합니다. 무지는 알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결과적으로 지식이 무지 자체로부터 어느 정도까지는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임무임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숙련은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실존 및 그의 질문의 필요성은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타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162) 결과적으로 주체는 무지를 대체하는 앎을 지향해서는 안 됩니다. 개인은 생활의 어떤 순간에도 결코 인식하지 못했던 주체의 위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는 비주체를 자기와의 충만한 관계에 의해 규정된 주체의 위상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을 주체로 구축해야 하며, 바로 여기에 타자가 개입해야 합니다. 이제 스승은 더 이상 기억의 스승이 아닙니다. 그는 타인이 모르고 있는 바를 알면서 그것을 그에게 알려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스승은 이제 개인의 개혁과 개인이 주체로서 자신을 구축하는 일을 지도하는 자입니다.

 

세네카의 stultitia 분석

벗어나야 하는 병적인 상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stultitia입니다. stultus는 자기 배려가 없는 사람입니다. stultus는 우선 모든 바람, 즉 외부 세계로 열린 자입니다. 즉 그는 정신 속에 외부 세계가 그에게 제공할 수 있는 모든 표상들이 들어오도록 방치하는 자입니다. 그는 이 표상들을 검증 없이 그것들이 표상하는 바를 분석할 줄 모른 채 받아들입니다. (165) 이 표상들을 자신의 정신 - 정념·욕망·환상 등과 섞이도록 방치함을 고려할 때 stultus는 외부 세계로 열려 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외부의 표상의 바람에 열린 자이고, 또 한번 들어오면 그 표상들의 내용과 그와 섞이게 되는 주체적인 요소들을 구분 할 수 없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생과 실존은 기억이나 의지 없이 흐릅니다. 그는 생을 흐르도록 방치하고 끊임없이 견해를 바꿉니다. 결과적으로 stultus에게는 생활 방식의 부단한 변화가 있습니다. (166) 그래서 이 외부 세계와 시간 속에서의 분산에서 기인하는 이 표상들에 노출된 결과는 stultus가 품위 있게 욕망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Stultus의 의지는 자유롭지 않은 의지입니다. 자유롭게 욕망한다는 것은 어떤 한정 없이 욕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stultus는 외부에서 오는 것에 의해 결정됨과 동시에 내부에서 오는 것에 의해 한정됩니다. stultus는 무엇인가를 욕망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을 후회합니다. 그 결과 stultus는 영광을 갈망하지만 평온하고 관능적 삶 등을 영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자입니다. 셋째로 stultus는 욕망하지만 무기력 속에서 욕망하며 게으름 속에서 욕망하고 그의 의지는 부단히 끊기고 목표를 바꿉니다. (167) Stultitia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은 바로 자기를 욕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스스로가 자기를 욕망하도록 하는 것, 자기를 자유롭고, 절대적이고, 항구적으로 욕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으로 지향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stultitia는 이 대상을 욕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원치 않는 것이 stultitia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의 무관계로 정의됨에 비추어 볼 때 stultitia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stuptus한 개인과 sapiens한 개인 사이에는 타자가 필요합니다. 결과적으로 자기 배려는 타자의 현전·개입을 필요로 합니다. (168)

 

주체화의 스승인 철학자상

Educat는 명령법입니다. 손을 내밀다, 거기로부터 끌어내다의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훈육이나 전통적 의미에서의 교육 행위, 이론적 지식이나 수완의 전승이 아닙니다. 따라서 제기되는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을 주체로 구축하는 데 필요한 타자의 행위는 무엇일까요? 또 교육 이상의 것인 이 끌어내기(eduction)는 무엇일까요? 그는 오직 자신만이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욕망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자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등장하는 실행자는 물론 철학자입니다. (169) 어떤 제도적 매개를 통해 철학은 철학자가 그의 실존·실천·담론, 그리고 그가 하게 될 조언 내에서 그를 경청하는 자들에게 그들 자신을 단련하고, 자신을 배려하며, 종국에는 그들에게 제안된 이 자기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헬레니즘 시대의 제도적 형식: 에피쿠로스 학원과 스토아주의 모임

간단하게 살펴보면 제도는 크게 두 형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헬레니즘적 유형의 형식과 로자적 유형의 형식입니다. 헬레니즘적 형식은 당연히 학파skhole입니다. 학파는 개인들의 공동체적 삶을 전재하면서 폐쇄적 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171) 에피쿠로스 학파의 의식 지도 실천에서 몇 가지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필로데모스는 각자가 자신의 지도를 담당하는 인도자가 필요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 개별적 지도는 두 원리에 따라 체계화되었습니다. 이 개별적 지도는 지도자와 지도를 받는 자 사이에 강도 있는 애착 관계, 즉 우정 관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172) 그리고 이 지도는 parhesia로 명명된 ‘말의 윤리’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parhesia는 마을 열기이고, 두 파트너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를 전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서로 이야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에게는 두 범주의 개인들이 있다고 세네카는 말합니다. 즉 첫 번째 범주의 개인들은 사람들이 제안한 인도와 관련해 내적인 어려움을 전혀 갖지 않기 때문에 인도하기에 충분한 개인들입니다. 두 번째 범주의 개인들은 천성의 교활함 때문에 강압적으로 구출해야 하고, 자신들의 현 상태 밖으로 밀어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 두 범주의 제자들 간에는 어떤 가치나 질의 차이가 없었고, 지도 방식은 다르지만 지도가 완수되면 그들의 덕은 동일한 유형의 덕이고 동일한 수준의 덕이라 간주했습니다.

스토아주의자들에 있어서는 단체의 실존과 덜 연관되어 있고 우정의 요청이 덜 명확해 보입니다. (173) 에픽테토스의 학교는 철학자들을 위한 일종의 사범대학교로 소개되고 있으며 여기서 그들은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한 개인이 실수를 범할 때, 그것은 그가 진실되지 않은 것을 진실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또 그에게 씁씁한 필연성, 즉 자신이 진실하다고 믿는 바를 포기해야 한다는 씁쓸한 필연성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합니다. (175) Protereptikos는 정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 있는 교육을 행할 수 있는 자입니다. 다른 한편 그는 elegktikos, 즉 오류에서 진실을 끌어내어 오류를 논박하여 참된 명제로 바꾸게 해주는 토론 기술, 지적인 토론에 능한 자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개인, 결국 교육자의 전형적인 자질인 이 두 자질을 갖춘 자는 오류를 범하는 자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영혼은 자신이 깨닫는 진리에 따라 기웁니다. 그리고 이렇게 타자의 정신 속에서 전개되는 싸움을 조정할 수 있고, 충분한 담론 기술로 타자가 믿는 진실을 논박하며 정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행위의 능력이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진정한 철학자입니다. (176) 반대로 여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 자신이 지도하는 자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자신을 힐책해야지, 자신이 설득시키지 못한 사람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로 철학자가 되기 위해 학원에 있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에픽테토스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거나 지배할 수 없는 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고, 사물들에 대해 자신이 갖는 표상에 몰두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할 수 이TSms 것이 그것이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대화는 표상들을 점검하기 위해서는 skholastikos가 되어야 한다(달리 말해 학원에 가야한다)는 말로 종결됩니다. (177)

로마의 제도적 형식: 실존에 대한 사적인 조언자

에픽테토스가 가장 발전 모범을 보여주는 헬레니즘적이고 교육적인 이 형식에 맞서 내가 로마적이라고 부르는 형식이 존재합니다. 로마 형식은 사적인 고문의 형식입니다. (178) 사적인 고문은 학원과는 거의 반대의 방식을 대표합니다. 학원에는 철학자가 있고 사람들은 그를 찾아와서 간곡히 그에게 청원합니다. 반대로 사적인 고문 방식에서는 거대한 귀족 가문이 있고, 가장이 있고, 중요한 정치 책임자가 있고, 그들이 철학자를 자기 집에 거주하게 하며 그를 고문으로 활용했습니다. 이 고문 역할은 스승의 역할도 아니고, 절친한 친구의 역할도 아닙니다. 그는 일정한 환경 내에서 견해를 피력하는 실존의 고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0) 철학자의 직업은 중요성을 더욱 확보함에 따라 탈전문화됩니다. 자신을 위한 고문을 필요로 하면 할수록 자기 실천에서 타자에 대한 의존은 더욱 필요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순수 철학적 기능은 약화되고 철학자는 플라톤의 보편적 모델들이 아니라 신중에 대한 조언, 상황적 조언을 하는 실존의 고문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즉 의식 지도 실천은 철학자들의 직업의 장을 넘어서 개인들간의 사회적 관계 형식이 됩니다. (181)

 

후반부

기원후 1,2세기의 직업 철학자와 그의 정치적 선택

자기 실천이 보급됨에 따라 소크라테스 이후부터 늘 상당 부정적인 반응을 야기한 직업 철학자의 형상은 점차적으로 모호해집니다. 요컨대 직업 철학자는 웅변술사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또 정치적인 이유로 불신의 대상이 됩니다. (182) 특히 제정 초기 아우구스투스의 주변에서도 자기 테크닉으로 소개되고, 또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보도록 청유하는 철학이 유용한지의 여부를 알기 위한 문제들이 제기되었습니다. (183)

 

플리니우스의 <서한집>에서의 반-견유학파주의자 유프라테스

플리니우스는 철학만을 하는 전통적인 철학자상을 탈전문화시키면서 유프라테스를 찬양합니다. 그는 유프라테스를 일조의 사회화된 지혜의 위대한 대가로 등장시킵니다. 1,2세기 시대에는 자기 실천은 철학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가가 아닌 개인들 사이에서 발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스승은 엄밀히 말해 사라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 실천이기도 한 자기 실천에 의해 침식당하고, 포위당하고, 도전받게 됩니다. (189)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학원 밖 철학: 세네카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세네카는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세네카는 당대에 직업이라는 말이 갖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직업철학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0)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는 타인을 지도하기 위해 직업 철학자의 자격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러저러한 사람들과 맺는 사회적 관계(우정·환심사기·보호 등)가 영혼의 봉사라는 임무와 또 타자가 자기 자신을 적절히 이끌어 나갈 수 있게 해주는 일련의 간섭과 조언의 토대를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의 차원의 개입입니다. 자기 실천과 관련된 대부분의 텍스트는 지도자와 조언자의 일방으로부터 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조언은 무익하고 공허하며 실제적으로 사람들의 행동과 경험 속에 각인되지 않는 권고였습니다. 요컨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철학적 사유를 구축하는 일정한 방식이었습니다. (191)

 

프론토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간의 서신: 실존의 지도에서 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의 체계화

프론토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승입니다. 그러나 그는 철학 선생이 아니라 웅변술 선생입니다. (19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포도 수확을 하고, 푸도 수확은 그로 하여금 많은 땀을 흘리게 하고 또 마음껏 외치게 해주며, 그래서 양생술에 속하는 훈련임을 알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에서 행해진 소크라테스의 개입에서는 자기배려가 신체의 배려, 즉 양생술과 재산의 배려, 즉 가정관리술과 완전히 구분되며, 또 사랑의 배려, 즉 연애술에 대한 배려와 구분됩니다. 그러나 이제 이 세 영역은 성찰의 표면의 자격으로, 자기 실천을 체험하고 훈련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의 자격으로 재통합됩니다. (198)

 

의식 점검

자기 실천의 발전을 통해 자기 실천이 일종의 사회적 실천(철학의 스승과 제자간의 관계 내에서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보편적 관계)이 됨을 통해 아주 새롭고 중요한 것이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일반적인 언어나 담론의 윤리가 아닌 타자와 맺는 언어 관계의 윤리입니다. ‘정직성’이라고 번역되는 parrhesia는 놀이의 규칙이고, 의식 지도의 실천에서 사람들이 타자와 가져야 하는 언어 행동의 원칙입니다.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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