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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치론

2예언자들& 3이스라엘인들의 소명에 대하여』, pp.59-107

 

「신학정치론」_2&3장_20241017_발제_태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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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언자들

1장에 이어서 2장에서는 유대교 또는 히브리 신정이라는 특정한 정치-신학의 복합적 구성요소들 중 예언과 예언자의 본질, 그리고 그에 기반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설명한다.

먼저 예언자의 특성에 대해 논하는데, 첫 번째 예언자의 특성은 그들이 완벽한 지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단지 생생한 상상력을 지닌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솔로몬은 지혜로웠으나 예언의 재능이 없었던 반면, 교육받지 못했던 농부나 여종이 예언을 받았다는 점을 예로 들고 있다. 만약 예언자가 상상력을 통해 말과 이미지의 도움을 받아 신의 계시를 해석해주는 것이라면, ‘상상을 통해서 인식하는 것에 대한 확실성을 어디에서 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남게 된다. 이는 이어지는 예언자의 두 번째 특성과 관련된다. (pp.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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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에서 상상의 정의

2_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대하여

(정리 17) 만일 인간의 신체가 어떤 외부 물체의 본성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자극받아 변화된다면 인간의 정신은 신체가 그 외부 물체의 존재 또는 현존을 배제하는 변용으로부터 자극받아 변화될 때까지는 그 물체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혹은 자기에게 있어 현재적인 것으로서 고찰할 것이다.

(주석) 이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현존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원인 중에 한가지 일 뿐이다. 관념들이 외부 물체들을 마치 현존하는 것처럼 보는 것을 실재들의 이미지들이라고 부른다. 그 실재들이 모양이 없더라고. 정신이 물체를 이런 방식으로 고려할 때는 정신이 상상한다고 말한다. 상상은 그 자체로는 오류가 아니다.

상상 = 신체 변용의 관념

 

두 번째 특성은 예언자들의 어떤 증표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아브라함, 기드온,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서 스피노자는 단순한 상상은,  본성상 확실성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언 자체로는 확실성을 포함할 수’(60) 없어서 예언자들이 항상 표징을 요구했다고 설명한다. (pp. 60-61)

세 번째는 예언자의 확실성(certitudine prophetraum)이 어떤 수학적 확실성이 아니라 도덕적 확실성이라는 점이다. ‘신은 경건한 자를 자신의 은총의 도구로 사용하고, 불경한 자들을 분노의 수단과 집행자로 활용하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신 앞에 정당해야했기에 바른 것과 선한 것을 추구함으로써 그 예언의 확실성, 확실한 지식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pp. 62-63, 71-72)

“예언자들은 자기들의 경건함과 상관없이 무지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도 무지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자들은 그들의 고귀하고 탁월한 정신적 재능 때문이 아니라 경건함과 영혼의 한결같음(ob pietatem et animi constantia) 때문에 칭찬과 찬양을 받았음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pp.71-72)

예언자의 특성에 이어 예언자마다의 기질, 상상력, 기존의 견해에 따라 예언이 달라졌다고 스피노자는 설명한다. 쾌활한 기질의 예언자는 승리와 평화를 예언했고, 우울한 기질의 예언자는 전쟁과 재앙을 예언했다. 상상력이 세련된 예언자는 신의 뜻을 정교하게 인식했고, 혼란스러운 상상력을 가진 예언자는 신의 뜻을 혼란스럽게 인식했다. 또한 농부 출신 예언자는 소와 황소의 이미지로, 군인 출신 예언자는 장군과 군대의 이미지로 계시를 받았다. (pp. 60, 64-66)

또한 예언의 방식도 예언자들의 문체나 웅변 능력에 따라 달랐으며, 예언의 표상과 상징도 예언자마다 달랐다고 스피노자는 설명한다. (p.66-67)

예언자의 이해력과 견해에 따라 달라지는 예언의 다양성을 성경 속 여러 예시들을 통해 주장하며 스피노자는 예언자들이 자연과 영적 문제에 대해 무지하고,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의견을 가지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서 예언이 예언자의 지식을 증가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선입관이 더 강화되어 유지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를 바탕으로 스피노자는 순수한 사변적 문제에 대해서는 예언자를 맹목적으로 믿을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는다. (pp.68-69)

“예언은 예언자들을 결코 더 박식하게 만들지 않고 그들은 이미 파악한 견해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변적인 것들에 대해서(circa res mere speculativas)만은 결코 예언자들을 신뢰할 필요가 없다.” (p.69)

그러나 예언자의 정동의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예언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을 부정하는 것은 성서를 왜곡하는 것일 뿐이라고 사변적 신학 비판한다. (p.69)

“어떠 사람에 대해서 분노한 사람은 그 사람의 선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을 상상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신은 화난 사람이나 슬퍼하는 사람에게 계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공상에 불과하다.” (65)

“모든 주석가들은, 예언자들이 인간의 지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서 이상할 정도로 서둘렀다. 성서의 어떤 구절에서는 예언자들이 어떤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성서의 그 구절들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성서가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서의 말들을 왜곡하려 한다고 했다.”(69)

이어서 스피노자는 솔로몬, 노아, 모세의 예를 들어 위의 주장을 다시 한 번 설명한다. 이들조차도 신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가졌으며, 신의 전지전능함이나 모든 인간 행위가 신의 결정에 의한 것임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예언자들에게서 자연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에 대한 인식(cognito rerum naturalium et spiritualium)을 예언자들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고, 계시의 목적과 내용(finis et substantia revelationis)에 관해서 예언자를 믿어야한다고 결론 내린다. (pp.70-82)

이를 바탕으로 스피노자는 예언은 각 예언자의 이해 수준에 맞춰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 그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논지는 성경 해석에서 도덕적 가르침에 초점을 둠으로써 철학과 신학의 분리를 시도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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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의 예언

이성적 인식과 달리 예언은 주관적 믿음이다.

자기가 직접 계시를 받은 일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이 받은 계시를 확신할 수 있는가? 이것은 명백히 불가능한 일이다. () 기적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나에게 놀라운 일이라고 하더라도 남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신성함을 가식으로 꾸밀 수도 있으며,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복된 결과들도 대부분 자연적, 일상적 원인에 의한 신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이 신의 의지에 관해 초자연적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자연적 이성에 의해서는 알 도리가 없다.” - 리바이어던 226(진석용 옮김, 나남, 2008, 1p.373)

"Do you believe that God spoke to you in a dream? You have said no more than that you ‘dreamed that God spake to [you].’ Do you believe that you have seen a vision? You say no more than that you ‘dreamed between sleeping and waking.’ Do you believe that you speak by divine inspiration? You say no more than that you ‘find an ardent desire to speak’, or ‘some strong opinion of [yourself]...“ 리바이어던 2 26

3이스라엘인들의 소명(vocatio)에 대하여, 그리고 예언의 재능(donum propheticum)이스라엘인들에게만 고유했는가?』

3장은 인간의 참된 지복과 행복(vera felicitas et beatitudo)은 선을 향유하는 안에서만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는 1,2장에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선택받은 민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기 위한 전제로 이를 바탕으로 성경 속 신의 선택이 유대인들의 특별한 지적 능력이나 도덕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성서는 히브리인들에게 율법에 순종하라고 권고하면서 신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다른 모든 민족들보다 그들을 택했다고 말한다. (’신명기‘ 10:15을 볼 것). 성서는 또 신이 이스라엘인들을 가까이하고 다른 민족은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신명기‘ 4장 7절), 오직 그들을 위해서만 정의로운 율법을 제정하였고(’신명기‘ 4장 8절), 다른 모든 민족들에 앞서 그들에게만 자신을 알렸다(’신명기‘ 4장 32절을 볼 것)는 것 등등을 말한다. 이것들은 우리가 앞 장에서 제시한 것처럼 그리고 모세 또한 증언한 것처럼(’신명기‘ 9장 6-7절을 볼 것) 참다운 행복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게 이야기되었을 뿐이다.”(p.86)
“’모세오경‘(Pentateuch)의 구절들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인들의 수준에 맞게 말하고 잇었다고 주정하더라도, 우리는 ’모세오경‘에서 신이 오직 이스라엘인들만을 위해서 그 율법들을 제정했다는 것과 신이 그들과 매우 자주 이야기했으며, 다른 민족들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은 매우 많은 놀라운 일들을 이스라엘인들이 목격했다는 것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모세는 이스라엘인들을 그들의 미숙한 이해력으로 한층 더 신을 숭배하도록 그런 식으로, 그런 논거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인들을 훈계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인들은 지식도 경건함도 아닌 전혀 다른 것에서 타민족들보다 뛰어났고, 또는 (성서가 그들의 이해력에 대해서 말할 떄처럼) 이스라엘인들은 자주 권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삶이나 고귀한 사색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목적을 위해서 다른 민족들보다 앞서서 신에게 선택되었다.”(p.87)

 

스피노자의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선민사상은 참된 지복(beatitudo)에 대한 무지했던 히브리인들의 무능력의 산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들의 선민사상은 기쁨(laetitia)을 동반할 수 있지만, 그것은 지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pp. 85-86)

다만 그들이 더 많은 계시를 받은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신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소명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모든 자연적 사물들의 힘은 모든 것을 생기게 하고 결정하는 신의 힘 자체(ipsa Dei potentia)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자기 보존을 위해서 행하거나 또는 인간의 관여 없이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모든 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통해서 작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적 사물들을 통해서 작용하는 신적 힘에 의해서만(a sola divina potnetia) 인간에게 부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인간의 존재(esse)를 보존하기 위해서 단지 자기 자신의 힘에 의해서 수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신의 내적 도움이라고 부르며, 이외에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외적 원인들의 힘에 의해서 생기는 것을 신의 외적 도움으로 부를 수 있다. 이로부터 또한 우리가 신의 선택을 무엇으로 이해해야만 하는지도 쉽게 도출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의 예졍된 질서에 의하지 않고서는 곧 신의 영원한 지도와 결정에 의하지 않고서는(nisi ex praedeterminatio naturae ordine, hoc est, ex Dei aeterna directione et decreto) 어느 누구도 어떤 것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 사실에 귀결된다. 신의 특별한 소명에 의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자신을 위한 삶의 방식을 택하지 못하며 또한 어떤 것도 수행하지 못하는데, 신은 삶의 특별한 일이나 특별한 방식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 앞서 어떤 사람을 선택한다.”

 

스피노자의 설명에 의하면 개인은 각각의 본성을 바탕으로 신의 내적, 외적 도움을 받아 자신을 위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것을 신의 소명(vocatio) 또는 신의 선택(electio)이라고 한다. (pp.88-89) 그러나 삶의 안전과 신체 보존에 기여하는 것들은 주로 외적인 것들이며 그 원인을 잘 알지 못하는 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인들이 선택된 이유가 지식이나 정신의 안정감이라기보다는 신이 특별한 사회와 국가를 설립하기 위해그들을 선택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내적 선택과 운이라는 외적 도움에 의해서 탁월함에 도달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설명에 의하면 이스라엘인들의 국가의 세속적 번영과 자유, 그리고 그들이 이를 획득한 방식이 신의 선택의 실질적인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선택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특정 역사적 시기에 국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pp.91-94)

“민족들은 그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고 통치되는 사회와 법에 관련해서만 서로 구분된다. 그래서 신이 다른 민족들보다 히브리 민족을 선택하신 것은 지성이나 평정심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히브리 민족이 국가를 세우고 다년간 국가를 보존하게 한 사회(societas)와 운(fortuna)에 관련된 것이다. 이는 성서 자체에서도 매우 분명하다. 성서를 피상적으로만 훑어 보아도, 히브리인들이 다른 모든 민족들보다 우월했던 점은 오직 그들이 삶의 안전과 관련된 일들을 성공적으로 해 냈고 커다란 위기들을 극복했다는 점이었으며, 이런 것들은 모두 오직 신의 외적 도움 덕분이었고, 나머지 면에서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다를 바 없었으며 신은 모두에게 똑같이 호의를 베푸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지성과 관련해서 보면, (앞 장에서 보여 주었듯이) 그들은 신과 자연에 대해서 어리석은 대중들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성 때문에 다른 민족들보다 신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덕 및 참된 삶과 관련해서 봐도,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였고 그들 중 선택 받은 자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선택(electio)과 소명(vocatio)은 오직 일시적인(temporaneus) 국가 (imperium)의 번영과 거기서 나오는 편익에 있었다.” (pp.91-92)

스피노자는 또한 예언의 능력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성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며 모든 민족에게 예언자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노아, 에녹, 아비멜렉, 발람 등의 예를 들어 비유대인 예언자의 존재를 입증한다. 이를 통해 스피노자는 신이 모든 민족에게 평등하게 대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바오로의 로마서를 인용하며, 신 앞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다는 점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스피노자는 유대인들의 특별한 지위를 부정한다. (pp.94-101)

“신의 지식과 사랑이라는 이 영원한 계약(hoc aeternum foeduc)은 보편적이다.”(p.104)

유대인들이 오랜 시간 동안 흩어져 살면서도 민족성을 유지한 것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를 그들의 분리주의적 관행과 할례 등의 관습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관행들이 다른 민족들의 증오를 불러일으켰고, 역설적으로 이 증오가 유대인들의 정체성 유지에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p.105-106)

“유대인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흩어져서도 왕국도 없이 유지된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민족이 전적으로 그들을 미워할 정도로 자신들을 모든 민족들로부터 분리시켰기 떄문이다.”(p.105)
“할례의 징표 … 이 한 가지만으로도 유대민족이 영원히 보존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p.106)

결론적으로 스피노자는 지성과 참된 덕성에 있어서는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의 선택이 일시적이든 영원한 것이든, 그것은 오직 국가와 물리적 생활 조건에만 관련된 것이라고 결론지으며 장을 마무리한다. (p.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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