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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치론』 스피노자 (황태연 번역)
7장 성서 해석에 관하여
앞서 스피노자는 예언(1장)이나 예언자(2장)의 권위에서 벗어나고, 외적인 행동인 의식(5장)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성에 따라 성서를 읽으며 기적(6장)이라는 자연사건과 이에 대한 서술의 이유도 이해할 수 있으며 신성한 법칙(4장)에 따르며 인간의 최고의 행복에 다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성서에 어떠한 태도로 무엇을 읽어야하는 지는 분명해졌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왜 성서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가? 7장은 그 방법에 대해서 고찰한다. 스피노자는 불화, 자의적 해석, 신성모독, 증오 등의 해악이 성서에 충실하지 않고 성서를 빌려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며 일어난다고 한다.
성서가 인류에게 진정한 축복이나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고 있는 신의 말씀이라고 이야기 한다(p. 127).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의 생각을 신의 말씀으로 과시하려 드는 것이며, 그들의 주요 목적은 종교를 핑계 삼아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 역시 똑같이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서에 관하여 스스로 공언한 것에 대해 참으로 성실하다면, 그들은 아주 다르게 행동할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이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감정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게 마련이라고 스피노자는 일관되게 서술한다. 감정에 휩싸이는 게 사람의 본성이고, 이 본성을 극복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면 비난이 아니라 이해하고 감안해야 하는 전제가 된다. 스피노자가 앞으로 이 한계를 어떻게 돌파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이 인식의 출발점은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순수한 지성에 의해 생겨난 것을 오로지 지성과 이성에 의해서만 옹호하는 반면, 감정들로부터 생겨난 믿음들은 감정적으로 옹호되도록 인간의 본성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p. 128).
스피노자는 성서를 제대로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연의 능력이 곧 신의 능력(p. 109)”이라고 보는 인식은 성서 해석에서도 자연을 이해하는 방법과 동일하게 적용한다.
우리는 성서를 해석하는 참된 방법을 논담해야 하며 그 방법을 철저히 고찰해야만 한다.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은 자연을 해석하는 방법과 다르지 않으며, 사실상 그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성서 이해에서의 자료는 성서 그 자체이며 방법은 이성에 따른 논리적 추론이다.
이런 식으로 - 성서의 해석 및 성서의 내용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오로지 성서 자체와 성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의해서만 모아질 수 있는 것들 외에는 다른 원리들이나 자료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 오류의 위험 없이 안정되게 진행될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이성의 자연적 빛에 의해 알고 있는 문제들에 못지않게 누구나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지성을 능가하는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p. 128-129).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성서 해석 규칙을 제시한다.
1. 성서에 쓰여 있으며 성서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데에 익숙했던 언어[헤브라이어]의 본성과 특성을 우리에게 알려줘야 한다.
2. 각각의 책에서 이루어진 선언들은, 우리가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모든 원문을 확보할 수 있도록 표제들 아래에 모아지고 기록되어야 한다.
3. 우리의 역사적 연구는 예언자들에 관한, 현존하는 모든 책드렝 관련된 전후사정을 밝히면서, 모든 책의 저자의 삶, 성격, 직업을 알려주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어떤 경우에 대해, 어느 시대에, 누구를 위해, 어떤 언어로 썼는지에 대해 상술해야한다(p. 132).
스피노자는 “신은 불이다.”라고 모세가 설명한 구절을 예시로 위의 규칙을 적용해보며 해석과정을 설명한다. 그 해석에 있어서 해당 구절이 ‘이성의 자연의 빛’에 부합하는지 여부보다도 성서 해석의 원리에 어긋나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성서 해석의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 자의적 해석이 될 수도 있다.
모세가 ‘신은 불이다’라고 믿었는, 또는 믿지 않았는지에 관한 질문은 결코 믿음의 합리성 또는 비합리성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 되며, 전적으로 모세의 다른 선언들에 의해서 결정되어야만 한다(p. 131).
우리는 ‘신은 불이다’라는 이 단 하나의 선언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허용하는지 어떤지를, 즉, ‘불’이라는 단어가 보통의 자연적 불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의미할 수 있는지 어떤지를 우선 질문해야 한다.
‘불’이라는 말은 노여움이나 질투의 의미로도 또한 사용되기 때문에(욥기 31장 12절), 모세의 선언들은 쉽사리 조화되며, ‘신은 불이다’와 ‘신은 질투심이 많다’라는 두 진술이 하나의 동일한 진술임을 무리 없이 결론지을 수 있다.
스피노자는 성서해석에서도 자연현상 연구에서처럼 연역법을 사용할 것을 제시한다.
자연형산들을 고찰함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가장 일반적이며 전체 자연에 공통적인 특징들을 …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것들로부터 점차적으로 다른 덜 일반적인 특징들로 나아간다.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성서에 대한 우리의 연구로부터 가장 일반적이며 성서 전체의 기초 및 기반을 형성하는 것을, 요컨대, 성서에서의 모든 예언자들이 영원하며 모든 인류를 위하여 가장 유익한 교리로서 추천하는 것을 첫째로 탐구해야만 한다(p. 133).
성서에서 불확실하거나 충돌되는 내용이 발견될 때 이 원칙에 준하여 판단할 수 있다.
만약 성서에서 그러한 문제들에 관해 모호하거나 애매한 무언가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성서의 일반적 교리를 기준으로 삼아 설명되고 결정되어야만 한다(p. 134).
스피노자는 성서해석에서 언어(헤브라이어)가 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구절들이 명확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지식으로 충분하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우리의 해석방법은 성서의 어떤 책들의 경우에 그것들이 처음에 쓰였던 언어로 우리 앞에 남아 있지 않다는 추가적인 어려움을 수반한다(p. 143).
‘현자에게는 한 마디면 충분하다’와 같은 격언처럼 유클리드 … 는 어떤 언어를 쓰든 누구에게나 쉽사리 명확해진다(p. 144).
참된 경건에 관한 가르침들은 아주 평번한 언어로 표현되어 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에 맞추어 쓰여 있어서 이해하기가 수월하고 쉽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성서 해석을 위해 자연의 빛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초자연적 빛이 필요하다는 반론에 대해서 다룬다. 스피노자는 이 반론이 의심에서 비롯되며 해석의 어려움이 자연의 빛의 부족이 아닌 태만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이미 설교의 청중인 불신자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임을 재반론의 근거로 든다.
우리는 성서를 해석하는 일의 어려움이 자연적 빛의 능력의 부족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 자료를, 여전히 가능한데도, 모으지 않았던 사람들의 태만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이미 입증했다(p. 145).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취지를 위해 초자연적 빛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자연적 빛이 부족한 것 같다(p. 146).
7장을 정리하며 스피노자는 국가에서 시민법에 대한 개인과 종교에서 성서를 해석하는 개인의 권리에 대해서 차이를 둔다. 시민법과는 다르게 성서에 대한 해석은 권위에 따르는 것이 아닌 개인의 권리의 영역인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시민법을 해석할 자유를 갖는다면, 국가는 보존될 수가 없다. 바로 그러한 사실로 인해 국가는 즉시 붕괴될 것이고, 공적인 권리는 사적인 권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종교에 관해서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 … 종교에 관해서 자유롭게 판단하며, 따라서 그것을 설명하고 그 자신을 위하여 그것을 해석할 최고의 권리와 최상의 권위도 역시 각자에게 속한다(p. 151).
8장 모세 5경과 여호수아기, 판관기, 룻기, 사무엘 및 열왕기 등이 그들 자신에의해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 여기에서 밝혀진다. 그것들의 원작자의 문제가 고찰된다. 한 명의 저자가 있었는가, 아니면 여러 명이 있었는가, 또한 그들은 누구이었는가?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성서에 대해서 갖고 있는 잘못된 선입견이 선대 작가들의 수집부족과 후대 인들의 전승, 그리고 맹목적 접근 때문이라고 한다. 그 결과가 이성적 판단을 가로막기 때문에 바로잡아야 한다며 자신의 사명감을 내비친다.
성서적 지식의 기초들은 완전한 인식을 위한 근거를 형성하기에는 너무 빈약할 뿐 아니라 불합리하기조차 하다. 이러한 결점들을 바로잡고 일반적인 신학의 선입견들을 제거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p. 153).
선입견들이 사람들의 정신을 속속들이 점령해버렸기 때문에, 이성을 위해 남겨진 어떠한 공간도, 비교해서 말한다면, 형편없이 작을 뿐이다.
스피노자는 모세5경을 예시로 들어, 저자가 모세가 아닌 다른 사람임을 아벤 에즈라를 인용하며 밝힌다.
그[에즈라]는 모세5경을 썼던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상당기간 뒤 후세에 살았던 그 밖의 어떤 사람이었으며, 모세가 썼던 것은 다른 책이었음을 명확히 지적해준다(p. 154).
모세는 요르단 강을 건너지 않았다.
2. 모세의 책은 단 하나의 제단 주변에 새겨진 것이 전부다.
3. “모세가 율법을 썼다.”라고 나와있다. 이러한 말은 모세에게 돌려질 수 없다(p. 155).
4.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때에 그 땅에 있었다.” … 이 구절은 가나안 사람들이 내쫒기고 더 이상 그 땅을 소유하지 못했던 때인 모세의 사후에 쓰였음에 틀림없다.
5. 창세기 22장 14절 모리아산이 신의 산으로 일컬어지는데 … 산에 대한 이러한 선택은 모세의 시대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6. 신명기 3장 “오직 바산의 왕 옥만이, 거인들 중의 유일한 생존자로 남아 있었다. 보라, 그의 침대는 철로된 침대였으며, 그 침대는 지금 암몬의 자손들의 랍바에 있는 것이니, 길이가 아홉 큐빗이고……” 이러한 삽입구는 이 책들의 저자가 모세와는 멀리 떨어진 시대에 후에 살았다는 걸 아주 명백히 보여준다(p. 156).
스피노자는 이 외에도 중요한 근거들을 제시한다.
저자는 모세에 대해 3인칭으로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많은 세부에 대해서도 증언을 전한다(p. 157).
모세의 죽음, 그의 매장, 헤브라이인들의 삼십 일간의 애도에 대해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모세와 그의 사후에 나타난 다른 모든 예언자들을 비교하면서, 그가 그들 모두를 능가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는 것이 추가로 더해져야 한다.
몇몇 장소들은 모세 시대에 가졌던 이름으로 표시되지 않고, 나중에야 획득한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p. 158).
이야기는 때때로 모세의 죽음 이후까지 계속된다.
스피노자는 여호수아기 또한 그 저자가 여호수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판관기와 열왕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모세 5경을 포함해서 이 책들이 한 명의 저자에게서 나왔으며 에스라가 바로 그 저자라고 추측한다.
우리가 이 세가지 사항들, 즉 이 책들 모두의 주제의 통일성, 그것들의 상호 연결, 그리고 그것들이 사건들 이후 여러 세대가 지난 뒤에 후세에 의해 쓰였다는 사실을 종합하여 고려할 때, 우리는 내가 방금 말했듯이, 그것들이 모두 단 한 명의 역사가의 저작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p. 164).
9장 이전과 동일한 책들에 관한, 그 이상의 문제들에 대한 연구. 즉, 에스라가 그것들에 최종적인 수정을 가했는지 어떤지, 그리고 헤브라이어 사본들에서 발견되는 난외의주들이 상이한 이문[읽기]들인지 어떤지
8장에 이어서 모세 5경 등의 실제 작가로 추정되는 에스라가 해당 책들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된 오류를 설명한다.
에스라가 이 책들에 포함된 이야기들에 대해 최종적인 교정을 하지 않았고 다수의 작가들로부터 역사들에 관한 모음집을 만드는 일에 자신을 한정했으며, 그러면서 때때로 있었던 그대로 그것들을 단순히 베꼈고 적당한 정밀 조사와 정리가 없이 그것들을 후세에게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p. 168).
에스라는 이 이야기[유다와 타말의 이야기]를 단순하게 그대로 베끼면서, 비판적인 고찰 없이 자신의 저작의 나머지 속에 그것을 끼워 넣기도 했었음에 틀림없다(p. 170).
이들 다섯 권의 내용들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일곱 권의 책들 속에서의, 정확하게 도시의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다른 역사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수집되었다(p. 171).
쿠산 리사다임에게 정복당하기 전 헤브라이 국가가 번영했을 때인, 여호수아 사후의 기간이 더해져야만 하는데, 이 기간은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 해에 걸쳐 있었다(p. 173).
더군다나, 우리는 사무엘이 판관이었던 햇수를 더해야만 하는데, 이 것의 수는 성서 안에 주어져 있지 않다.
참으로, 13장에서의 이 이야기 전체는 이전에 했던 것과 완전히 불일치 한다(p. 174).
내가 만약 사무엘에 관한 첫 번째 책의 모든 이야기들이 단 한 명의 역사가에 의해 쓰이고 정리되었던 상황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그것들을 조정하려고 시도한다면 나는 확실히 곤경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들이 어떠한 적당한 정리와 정밀조사도 없이, 서로 다른 출처에서 수집되었다는 것이 인정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이전의 관찰들에 더하여, 우리는 이 책들이 어떠한 오류의 침입도 당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후세에 의해 보존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한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성서에서 보이는 오류들을 저자, 역사적인 구전의 문제 등에서 원인을 찾는다. 그렇게 오류는 설명 가능한 것이 된다. 오히려 이성으로서 이 성서를 대한다면 문제가 없다고 본다. 오히려 맹목적으로 성서를 받아들이는 태도로 ‘성경무오류설’을 주장하는 것을 경계한다.
나의 견해로는, 그것들이[그 오류들이] 별로 중요치 않다, 적어도 성서에 대해 계몽된 접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도덕적 교리의 문제에 있어서 그러한 가르침에 대해 애매함 또는 의심이 생기게 할 수 있는 상이한 이문의 결점을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원문들에서 조차도 결점이 생겼을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신이 어떤 신비로운 섭리의 작용에 의해 모든 신성한 책들을 훼손되지 않은 채로 보존해왔다고 주장한다.
헤브라이어 사본들 속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난외의 주들은 의심스러운 이문들이라는 것을 이것들의 대부분이 헤브라이어 문자 사이의 현저한 유사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p. 177).
이문들은 우연에 기인한 것이 아니며 이와 같은 명백한 결점들이 수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논거는 결국 그것들이 무언가를 나타내기 위한, 최초의 작각의 심사숙고한 저작이었다는 것이 된다(p. 178).
옛날의 작가들은, 단순한 방식으로, 사물들을 품위 있는 완곡한 표현 없이 그것들의 이름으로 솔직하게 불렀다. 나중에, 악덕과 무절제가 만연하게 되었을 때, 고대인들의 입에서는 외설로부터 자유로웠던 말들이 외설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이것 때문에 성서를 바꿀 필요는 없었지만, 마음이 약한 보통 사람들에게 양보하여 그들은, 난외의 주들에 표시되어 있듯이, 성교 및 배설물을 좀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단어들로 대체하는, 공개적인 읽기[이문]라고 하는 관례를 도입했다(p. 179).
내가 단어들을 폐기된 것으로 분류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나에게 묻는다면,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오랜 옛날의 작가들의 저술 – 즉, 성서 – 속에서는 그것들이 자주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나중의 작가들은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p. 180).
내가 기꺼이 인정하는 것 – 진실로, 내가 확신을 가지고 믿는 것 – 은 하나의 구절에 대해 둘보다 많은 이문들이 결코 발견된 적이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p. 181)
우리는 모호함의 주요 원인이 어떤 문자들의 유사점이었음을 설명했다.
우리는 우리가 둘 보다 더 많은 의심스러운 이문들을 그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서 속에서의 표시된 구절들이 어떤 불가사의들을 나타내기 위해 계획적으로 틀리게 쓰였다는 결론에 도저히 이를 수 없다(p. 182).
아마도 그들은[율법학자들은] 몇 개 되지 않는 최초의 필사본들 속에서 찾아냈었던 상태 그대로의 성서를 후세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실한 소망에 의해 움직여졌으며, 그러는 동안 그들은 필사본들 속에서의 불일치들을, 의심스러운 이문들로서가 아니라 상이한 이문들로서 난외에 적어두었다(p. 182-183).
마지막으로, 의심스러운 이문들은 별 문제로 하고, 율법학자들은 문장의 중간에 공간을 남겨둠으로써 상당수의 훼손된 원문들의 경우들을 나타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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