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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장 성서는 매우 단순한 교리들만을 가르치며, 오직 순종만을 고취한다는 것, 그리고 신의 본질에 관하여 그것은 오직 사람들이 행동에 관한 명확한 규준에 의해 본받을 수 있는 것만을 가르친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번 장에서는 성서와 철학을 분리해낸다. 그동안에 나는 스피노자가 예언자나 예언에 현혹되지 않고 제대로 성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탐구하듯 이성을 이용해서 한다고 이해했다. 어쩌면 불완전한 이해였는지를 따지기 위해서 앞장을 충분히 검토할만한 여유는 되지 않아 과제로 남겨놔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전에 감정 혹은 정서와 이성의 대립 구도를 유지했다면 이번 장에 들어서는 성서와 철학을, 그리고 순종과 지적인 인식의 대립 구도를 ‘새로’ 만들어낸다.
성서는 심원한 사변 또는 철학적 논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활기가 없는 정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매우 단순한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결론이 내려진다(P. 225).
성서의 목적이 체계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 명백히 성서는 사람들에게 순종 외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무지가 아닌, 단지 완고함만을 비난한다 …
신에 대한 순종은 전적으로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목적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하지 않는 다른 철학적 문제들은, 그것들이 신에 대한 인식에 관계가 있든 혹은 자연에 대한 인식에 관계가 있든, 성서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계시된 종교와는 분리되어야 한다(p. 227).
출애굽기 6장 3절의 내용에서 신의 속성에 대해서 철학적인 방법으로 탐구하여 인식하지 않고도 보이는 대로 신을 따르는 족장에 대해 혼내지 않고 오히려 신앙을 격찬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을 기반으로 스피노자는 성서에서 요구하는 것이 철학이 아닌 신앙이라고 밝혀낸다.
출애굽기 6장 3절
모세에게 부여된 비범한 은총을 강조하기 위해, 신이 그에게 말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엘 사다이(만족시키는 신)로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나를 알리지 않았다.”
족장들은 어떤 속성에 대해서가 아니라, … 눈으로 보이는 사물을 통하여 현시된 신의 능력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는 결론이 내려진다(p. 228).
신은 족장들의 신앙의 부족을 나무라고 있지 않다. … 그들로 하여금 신의 약속들의 확고함 및 확실성을 믿도록 인도한 그들의 신뢰와 신앙을 격찬하고 있다.
모두 명령에 의해 똑같이 순종할 수는 있지만, 명령에 의해 지혜로울 수는 없다(p. 229).
스피노자는 지혜로울 수 있는 사람이 소수이며, 다수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언급하는 것을 이번 장에서도 잊지 않는다.
나는 신에 대한 지적인, 또는 정확한 인식이 … 모든 충실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재능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p. 227). 보통사람들의 이해력(p. 231). 보통 사람들의 제한된 지성(p. 231).
스피노자는 철학적 탐구방법을 따르는 이들이 ‘증명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다고 한다. 반대로 이렇게 증명을 갖지 못하고 되풀이하기만 하는 이들을 ‘앵무새’ 혹은 ‘꼭두각시’라고 명명한다.
신이 자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요구한 것이 신의 신성한 정의와 박애, 즉 사람들이 행동에 관한 명확한 규준에 의해 본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그러한 신의 속성들에 대한 인식 외에 그에 대한 다른 인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
다음으로 스피노자가 밝히려고 하는 명제는 ‘신의 신성한 정의와 박애를 규준으로 본받는 것은 가능하다.’이다.
우리는 … 신은 최고로 공정하며 최고로 자비로운 존재, 즉, 참된 삶의 유일하고 완전한 모범이라는 것 등을 안다(p. 230).
신의 본질을 관조하는 신에 대한 지적인 인식은 참된 삶의 방식의 실천, 신앙, 그리고 계시된 종교와는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죄를 범하지 않고도 이 문제로 인하여 헤맬 수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p. 230-231).
그들은(예언자들은) 보통 사람들의 이해력에 맞추어 이야기하고 있으며, 성서는 이들에게 학식이 아닌, 순종을 가르치고자 힘쓰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건하거나 또는 불경한 것은 무엇이든지 행위와 상관없이 단순하게 그 자체로 해석된 믿음들에 속한다는 의견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신에 대한 참된 인식이 명령되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선물[재능]이라는 것을 밝혔고, 신은 신성한 정의와 박애에 대한 지식 외의 다른 지식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지식이 철학적 인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덕법칙에의 순종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도 밝혔기 때문이다(p. 232).
14장 신앙, 충실한 사람들, 그리고 신앙의 기본원리들에 대한 분석. 신앙은 최종적으로 철학과 분리된다.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이 신에 관한 일반적이고 절대적인 가르침인 것으로 무차별하게 받아들이며, 대중의 이해력에 적응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중의 믿음과 신성한 교리를 혼동할 수밖에 없고, 지어낸 이야기와 사람들의 멋대로의 의견들을 신의 가르침으로 선언할 수밖에 없고, 성경의 권위를 모욕할 수밖에 없다(p. 233).
네덜란드에서는 ‘원문 없는 이단은 없다.’라는 말이 오랫동안 격언이 되었다.
나는 단순히 그들이 성경의 말씀들을 자신들의 신앙에 맞추어 적응시킨다는 이유로 그들 특정 종파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불경의 죄로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신앙에 관한 개인적 의견의 자유가 갖는 한계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누가 그들의 다양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충실한 사람들에 속하는 것으로 보여야 하는지를 확립하기 위하여, 우리는 신앙과 그것의 근본원리들을 정의해야만 한다(p. 234).
스피노자는 여기에서 “성서의 주요 목적”인 “복종을 가르치는 것”이 “신앙을 정의하기 위한 참된 기준”을 제공할 것이라고 한다. 앞 장의 내용에서도 연결되는 것처럼 성서는 복종을 가리키는 것이지 철학이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전하는 수단”이 아니게 된다. 이때 우리에게 친숙한 “이웃을 사랑하라.”가 구체적이고도 핵심적인 계율이 된다.
신의 명령에 의거해 자신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진실로 순종하는 사람이고 계율에 따라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지만, 자기의 이웃을 미워하고 배려하지 않는 사람은 반역심이 있는 사람이고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다(p. 235).
이러한 명령은 인류 전체의 공통의 신앙을 위한 유일한 지도원리이[다].
이러한 원리로부터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아무도 신을 본 적이 없으므로 그는 그것으로부터 누구든 신을 인지하고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이다(p. 236).
우리는 또 그리스도의 진짜 적들은 이것들이 그것들과 일치하지 않고 동일한 종교적 교리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결한 사람들과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정의와 자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충실한 사람들임을 알고, 그래서 충실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적이다(p. 237).
사람들은 정신의 단순함으로 인해 실수할 수가 있으며, 우리가 보아왔던 것처럼, 성경은 무지가 아닌, 완고함만을 나무란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단히 다양한 기질이 발견되기 마련이라는 것, 모든 사람이 모든 문제에서 똑같이 일치하지는 않으며, 자신들의 믿음에 의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 그리하여 한 사람을 헌신으로 이끄는 것이 또 다른 사람을 조롱과 경멸로 이끌 것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p. 238).
이제야 나는 전체로서의 성경이 전달하려고 의도하는 일반적인 신앙의 교리들, 근본적 가르침들을 대담하게 열거할 수 있다.
1. 신, 즉, 지고한 존재는, 존재하며, 최고로 공정하고 자비로우며, 참된 삶의 전형이다.
2. 신은 유일하다.
3. 신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모든 사물은 그분에게 공개되어 있다.
4. 신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최고의 권리와 지배력을 갖고 있다.
5. 신에 대한 숭배와 그분에 대한 복종은 오로지 정의와 자선, 또는 자기의 이웃을 향한 사랑에만 있다.
6. 이러한 삶의 방식을 따름으로써 신에게 복종하는 사람은, 또한 오직 그러한 사람들만, 구원받는다. 쾌락의 명령을 받고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은 파멸당한다.
7. 신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한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들었던 목소리가 비록 그 사람들에게 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이거나 수학적인 확실성을 줄 수 없었을지라도, 그것은 그들이 이전에 그를 알았었음에 따라 그들에게 신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을 복종하도록 설득하기에 충분했고, 이러한 것은 그러한 현시의 목적이었다(p. 241).
철학의 목적은, 아주 간단히, 진리이고, 반면에 신앙의 목적은, 우리가 풍부하게 제시했듯이, 순종과 경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p. 241).
신앙은 모든 사람에게 철학하는 자유를 최대한으로 허용해야 하며, 개인은 어떤 주제에 관해서든 악의 오명이 없이 자신이 원하는 어떠한 의견이라도 가질 수가 있다(p. 242).
제 15장 신학은 이성에 대해, 이성은 신학에 대해, 보조적이지 아니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우리가 성서의 권위에 대해 확신하는 이유.
철학과 신학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서가 이성에 대해 보조적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이성이 성서에 대해 보조적이어야 하는지 어떤 지에 관해 … 논쟁한다(p. 243).
후자의 의견은 이성의 확실성을 부정하는 회의론자들이 지지하는 것이고, 전자의 것은 독단론자가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전의 발견으로부터 양쪽이 다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는 (마이모니데스)는 … 성서의 명확한 선언들에 대해 모순되는 경우에만 은유적인 설명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p. 244).
그는 성서가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모든 것을 참된 것으로서 받아들이거나 잘못된 것으로서 거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두 번째로, 그것이 어딘가 다른 곳에서 긍정하거나 부정한 것에 모순되는 그 어떤 것도 성서는 결코 분명히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한다(p. 246).
그는 성서에는 이성에 모순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신은 질투심이 많다는 것을 성서가 명백하게 긍정하고 가르친다는 것을 나는 주장한다.
우리는 알파카와 마이모니데스, 두 사람의 견해를 버릴 수가 있으며, 또한 신학이 이성에, 이성이 신학에, 종속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각각은 그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서 주장할 수가 있다. 이성의 영역은, 우리가 말했듯이, 진리와 지혜이고, 신학의 영역은 경건과 순종이다(p. 248).
이성은 실제로 정신의 빛이고, 이것이 없으면 정신은 몽상 및 환상만을 본[다](p. 249).
사람들이 단지 순종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학의 이러한 기본원리의 진리성 또는 그릇됨을 이성이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어찌하여 우리가 그것을 받는지 질문을 받을 수가 있다.
수학적 질서를 가진 증명으로써 성서의 권위를 입증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왜냐하면 성서의 권위는 예언자들의 권위에 의존하며. … 그것 외에 다른 근거를 가질 수 없다(p. 250).
비록 모든 신학이론과 성서의 기초를 이루는 이러한 근본적 원리가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증명될 수는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판단력에 대해 의심받는 일 없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p. 251).
우리가 이성에 의해 달성할 수 없는 신의 비범한 은총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오직 계시만이 우리에게 가르치기 때문에, 성서는 인류에게 대단히 고귀한 위안을 가져왔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왜냐하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순종할 수 있지만, 오직 이성만의 지도 아래에 유덕한 성품을 획득한 사람은 – 인류 전체에 비해서 – 소수일 뿐이기 때문이다(p. 253).
제 16장 국가의 기초; 개인의 자연권과 시민권, 그리고 최고권력의 권리
모범적인 국가에서 이러한 사상의 자유와 누구나 생각한 것을 말할 자유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 질문할 때가 되었다(p. 255).
각자의 자연권은 건전한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욕망과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p. 256).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이성의규칙 및 법칙에 따라 행동하도록 자연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의 권리와 확정된 질서 … 는 아무도 욕구하지 않고 누구도 할 수 없는 것만을 금지한다.
안전하고 유익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단체 안에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아주 명백해질 것이다(p. 258).
오로지 이성의 지령에 의해서만 인도되도록 … 하는 가장 업격한 서역으로써 자신들을 묶어야 했다(p. 258).
우리는 어떻게 이 합의가 그것의 안정성과 유효성을 보증하도록 만들어지는지 고려해야만 한다.
누구나 두 개의 선 중에 보다 더 크다고 판단하는 것과, 두 개의 악 중에 자기에게 더 작게 여겨지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이 법칙에 의하면, 보다 큰 악에 대한 두려움 또는 보다 큰 선에 대한 희망이 없이는, 자기의 제한되지 않은 권리를 포기할 정도로 마음을 다 바쳐 약속하려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어떠한 약속이든지 지키려 하는 사람도 일반적으로 아무도 없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내려진다.
만약에 모든 사람이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인도되도록, 또한 국가가 존재하는 것의 최고의 이점과 필요성을 인지하도록, 쉽사리 설득될 수 있다면, 누구나 전적으로 기만을 그만둘 것이다(p. 259).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이성에 의해 인도되도록 쉽사리 설득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p. 260).
우리는 각자의 자연권이 오로지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만 결정됨을 이미 증명했으므로, 각자가 억지로이든, 자발적으로이든, 타인에게 자기의 능력을 이양한 이상, 그 점에서, 본인도 필연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그 사람에게 넘겨주게 되며, 모두를 힘으로 강제할 수 있고, 모두가 일반적으로 두려워하는 최고의 형벌로 위협함으로써 사람들을 위압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권력]을 보유한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한 최고의 권리를 소유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자연권에 대한 어떠한 침해도 없이, 누구나 자신이 소유한 모든 능력[권력]을 공동체에 이양하는 조건을 기초로 하여,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고 계약은 절대로 성실하게, 전적으로 항상 보존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의 권리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일컬어지고, 따라서 이것이 자기 능력의 범위 내에서 모든 것에 관한 최고의 권리를 단결하여 소유한 사람들의 연합체로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최고의 권력[능력]은 법에 구속되지 않으며, 누구나 온갖 문제에서 그것에 복종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정부가 완전히 비이성적인 명령을 공포하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p. 261).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한 모임의 다수가, 그게 상당한 규모가 된다면, 어리석은 행위에 대해 똑같이 동의하는 일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부가 비이성적으로 행동할 위험성이 훨씬 더 적다.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목적은, 가능한 한, 욕망으로 인한 우행을 피하고, 사람들을 이성의 한계 안에 머무르게 하며, 사람들이 평화롭게 화합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국민을 노예로 … 변화시키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을 아마도 하게 될 것이다(p. 262).
이성의 독점적인 지도 아래에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만이 자유인이다.
명령에 따른 행동은 … 실제로 어느 정도 자유에 대한 침해이지만, 그것이 자동적으로 인간을 노예로 만들지는 않는다.
자녀들이 부모의 모든 명령에 의무적으로 복종해야 할지라도, 자녀들은 노예가 아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명령은 자녀의 선을 주요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최고권력도 국민들과 다름없이 신성법칙에 이해 구속된다는 반대와 마주쳐야만 한다. 반면에 우리는 최고권력이 자연권을 유지하며 권리에 있어서 제한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p. 267).
우리는 신성한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가(p.268).
우리가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계시를 가지고 있다면 모든 것에 앞서 신에게 복종해야만 한다.
만일 정부의 수뇌부에 있는 사람들이 이교도들이라면 … 어느 쪽이라도 그들과는 결코 계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p.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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